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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57화 (57/94)

57화

그 자식 어디 있어?

“사장님, 우리 생맥주 두 잔부터 주세요.”

입장과 동시에 맥주 주문을 한 영지는 강현과 지아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어?”

영지가 입술을 짓깨문 채 영준을 바라보는데, 그는 이미 강현과 눈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튀자, 영지가 영준의 옷을 끌어당겨 돌아서 나가려고 하는데, 그때, 기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맥주 두 잔이라며? 얼른 앉아요.”

기순은 맥주를 따르러 가면서 지아의 어깨를 툭 쳤다.

“친구 왔는데, 같이 한잔하고 가요. 강현이랑 같이.”

기순의 말에 지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강현은 기다리던 먹잇감을 찾은 것처럼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 * *

“어? 차본이잖아?”

치킨집으로 들어선 하은은 강현을 발견하고는 손을 들었다.

그런데 아는 척을 하려는 순간,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지석이 아닌 의외의 사람들이라 눈을 키웠다.

“뭐야? 약국이잖아?”

하은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주방으로 가 인사를 건넸다.

“엄마, 나 왔어.”

“그래. 늦었네?”

“어, 촬영 좀 늦어서. 근데 강현이 화해한 거야?”

“응, 같이 인사 왔더라고. 둘이 잘 어울리지?”

하은은 강현과 지아를 힐끔거리고는 바로 영준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테이블에 헉… 소주병이 몇 개야? 저거 다 마신 거야?”

“말려도 저런다….”

기순은 가스 불을 끄고, 어묵탕을 하은에게 내밀었다.

“이것 좀 가져다줘. 안주도 안 먹고 저러면 탈 나지. 얼른.”

“알았어.”

하은은 마스크를 올려 쓰고, 모자를 꾹 눌러쓴 채 어묵탕을 들고 강현의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에 도착한 하은은 어묵탕을 내려놓았다.

“야, 너 사람 죽이려고 그러냐?”

하은이 강현을 찌릿 째려보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갑작스러운 시선 집중에 하은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 엄마가 말했다면서요? 내가 누군지? 안녕하세요.”

“네.”

지아가 일어나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영지도 덩달아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분위기가 불편해 하은은 뒷덜미를 긁적였다.

“자주 보던 사이인데 새삼 인사 나누려니 민망하네요. 근데 이 사람은 왜 이래요?”

하은이 영준을 바라보자, 고개를 푹 숙인 그를 대신해 영지가 답했다.

“지금 상태가 좀 이래서… 나중에 인사드릴게요.”

“아니에요. 제가 뭐라고.”

하은은 강현을 바라봤다.

“야, 적당히 좀 하지?”

“뭐?”

“그리고 넌 인사도 안 하냐? 누님 보고?”

강현이 퉁명스럽게 손만 들었다 내리며 대꾸하는 걸 본 지아와 영지는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저었다.

저런 두 사람을 의심했다니….

그동안 의심했다는 사실이 허탈해지는 순간이었다.

지아도 영지도 민망해 맥주를 마시는데, 하은이 정곡을 찔렀다.

“강현이랑 저랑 의심했다면서요?”

맥주를 마시던 지아와 영지는 동시에 사레에 걸려 켁켁 댔다.

“켁… 네? 저 그게….”

지아는 하은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였다.

“죄송해요.”

“저도 죄송합니다.”

영지도 덩달아 사과를 하자, 하은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스캔들도 난 사이인데 오해할 만하죠. 앞으로 내가 조심할게요.”

그때였다.

영준이 갑자기 고개를 벌떡 들더니 강현에게 삿대질했다.

“조심해!”

강현이 콧방귀를 뀌자, 영준도 덩달아 콧방귀를 뀌며 그를 비웃었다.

“야! 너, 잘난 척하지 마. 이 자식아!”

“뭐?”

강현이 짜증 난다는 듯 쳐다보자, 영준이 지아에게 삿대질했다.

“얘, 다른 남자 있어.”

강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해졌고, 지아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은도 이건 또 무슨 전개인가 싶어 지아와 영준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영지가 발끈했다.

“오빠,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왜? 지아 얘 남자 있는 거 맞잖아. 너! 네 마음속에 다른 남자 있잖아! 솔직히 말해. 이 자식한테! 잘난 척 좀 그만하라고!”

“취했네… 오빠, 그만하자.”

영지가 말리는데도 여전히 지아를 향해 손가락을 뻗은 영준이 이번엔 손가락의 방향을 강현에게 옮겼다.

“야, 너도 처음 아니야. 지아가 너 왜 좋아한다고 생각해? 왜? 네가 얘 첫사랑 닮았으니까. 그런 주제에 잘난 척은….”

“무슨 소리야?”

“아무 얘기도 아니에요. 오빠가 취해서 헛소리를….”

영지가 옷을 잡아당기며 말렸지만, 영준은 꿋꿋이 손가락의 방향을 다시 지아에게로 바꿨다.

“네 첫사랑 준….”

그 순간, 영지가 손을 뻗어 영준의 입을 틀어막았다.

“오빠!”

영준은 영지의 손을 홱 치우고 피식대며 강현을 바라봤다.

“너도 그 자식 오면 아무것도 아니야, 이 자식아!”

끝까지 폭탄을 투하한 영준은 테이블에 머리를 쿵 박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하은은 맨날 고고한 척 잘난 척만 하는 영준의 망가진 모습이 웃겨 피식댔고, 강현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봤다.

“그 자식이 누구야?”

“어릴 때 얘기에요… 어릴 때.”

어릴 때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강현의 눈빛은 더욱더 이글거렸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건가?”

“그게 아니라 어릴 때 친한 오빠요.”

“내가 그 자식을 닮아서 좋아하는 거다?”

“아니 그게….”

“그 자식 어디 있어?”

“남자 얘기만 나오면 이 자식, 저 자식….”

지아가 타박했지만, 강현은 정정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비아냥댔다.

“그 자식… 그 자식 어디 있냐고! 그 자식!”

“없어요.”

“없어? 없다니?”

“연락 안 돼요. 어디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고요. 됐어요?”

그건 다행이지만, 영 찝찝한 마음에 강현은 술잔을 들어 술을 털어냈다.

“나랑 닮았어?”

“아뇨.”

지아는 손사래까지 치며 아니라고 했지만, 강현은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술병을 들었다.

술잔에 술을 채운 강현은 지아를 노려보면서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를 향해 지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어릴 때 만난 오빠예요.”

“만났어? 사귀었다는 건가?”

“사귀었다는 게 아니라… 어린 애가 이성으로 만났겠어요?”

“얼마나 어릴 때 만난 건데?”

“저 일곱 살 때요. 그 오빠는 열한 살.”

“열한 살이면 다 알 나이잖아?”

“뭘 다 알아요. 이 얘기 그만하고 얼른 일어나요. 영준 오빠 기절했잖아요.”

영지는 영준을 수습하느라 바쁜데, 강현이 자꾸만 쓸데없는 질문을 하자 지아는 그를 째려봤다.

“얼른 부축해요.”

“내가 왜?”

“그럼 내가 할까요?”

지아가 영준을 부축하는 걸 볼 수 없던 강현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강현은 짜증을 내며 억지로 영준을 부축했다.

그러자 영지가 가방을 챙겨 영준을 함께 부축했다.

“오빠, 정신 좀 차려봐.”

잠시 후, 영준을 침대에 눕히고 강현이 방을 나오려는데… 헉!

별안간 영준이 다리를 꼬고 놔주질 않는 바람에 강현은 당황했다.

“아, 뭐 하는 거야? 이거 안 놔?”

“못 놔. 어디 가려고.”

“놔!”

영준은 이번에는 팔까지 뻗어서 강현을 붙잡았다.

“너 지아한테 가려고 그러지? 못 가. 절대 못 가.”

“아까도 취한 척한 거지? 이거 안 놔?”

“안 놔.”

방에서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리자, 지아와 영지가 다가왔다.

“무슨 일….”

영준이 강현을 껴안고 있는 걸 본 지아와 영지는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보고만 있을 거야?”

강현이 도움의 손길을 뻗었지만, 지아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늦었는데 그냥 자고 가는 거 어때요?”

“뭐?”

“늦었잖아요. 게다가 오빠가 강현 씨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이게 좋아하는 거로 보여? 야! 이거 안 놔?”

술에 취한 영준은 강현을 놔줄 생각을 하질 않았고, 지아와 영지는 피식거리며 문을 닫았다.

“잘자요.”

문이 닫히자, 강현은 영준을 팔꿈치로 퍽치고 발버둥을 쳤지만, 그럴수록 영준은 더욱 옭아맸다.

“하….”

거머리처럼 딱 달라붙어 있는 영준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짜증에 취기까지 오른 강현은 이를 갈며 눈을 감았다.

* *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강현은 번쩍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오자, 강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자신을 껴안고 옆에서 자고 있는 영준을 보는 순간, 강현은 그를 밀쳐냈다.

“아, 진짜….”

강현이 목소리를 높이자, 문밖에서 지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현 씨, 일어났어요?”

“어.”

“나 잠깐 들어가도 돼요?”

“들어와.”

문이 열리고, 방으로 들어온 지아는 코를 막았다.

“아, 술 냄새….”

“윤은서,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왜요?”

“왜 이 사람이 내 옆에 있냐고. 당신이 아니고.”

그 말에 지아가 피식 웃자, 강현은 그녀를 찌릿 째려봤다.

“웃음이 나오지?”

“그만 화내고, 꿀물부터 마셔요.”

“꿀물?”

지아가 꿀물을 내밀자, 내심 기분이 좋아진 강현은 상체를 일으켜 잔을 받아 들었다.

“나 주려고 만든 건가?”

“그러니까 얼른 마셔요. 쭉.”

꿀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강현은 빈 잔을 지아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또 한 잔의 꿀물이 있자, 그것도 집어 들었다.

“이거 이 사람 주려고 만든 거지?”

“네.”

확인하자마자 강현은 나머지 꿀물도 벌컥벌컥 마셨다.

“어? 그건 오빠 건데….”

“동생이 타 주겠지. 왜 당신이 타 줘, 이 인간 거를?”

결국 꿀물 두 잔을 다 비운 강현을 보며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누가 말려.”

“오늘 스케줄 어떻게 돼?”

“가게 나가 봐야죠.”

“오늘 집에 오는 날인가?”

“아뇨.”

아니라는 말에 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네.”

“와.”

“네?”

“계약서에 내가 요구할 때는 와야 한다는….”

“알았어요.”

“알았다고?”

“뭘 계약서까지 들먹여요? 꼭 그런 거로 날 불러야겠어요?”

“……?”

“다른 이유 없냐고요.”

그 말에 강현은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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