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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49화 (49/94)

49화

안 믿어

갑작스러운 강현의 방문도, 예상치 못했던 그의 말도, 지아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지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강현이 다시 말했다.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할게.”

“나가요.”

“그건 말고.”

“장난해요?”

“어디 가라는 얘기는 하지 마. 당신 옆에 있을 거니까.”

“난 그게 싫다고요.”

“날 원망하고 있잖아. 그럼 내 옆에 있어야지.”

“……?”

“마음껏 원망하라고. 다 받아줄 테니까.”

“싫어요. 그러니까 나가요.”

지아가 차갑게 말하자, 강현은 그녀를 돕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지아에게 다가갔다.

어느덧 성큼성큼 다가와 지아 앞에 선 강현은 그녀에게 몸을 붙여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왜 이래요….”

강현은 더더욱 몸을 붙이며 지아를 바라봤다.

지아는 그를 밀어냈지만, 그럴수록 강현은 몸을 붙여왔다.

“왜 이래요, 진짜?”

“진심이야?”

“……?”

“내가 싫고, 내가 나갔으면 좋겠냐고.”

“네, 진심이에요.”

강현은 지아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아니, 당신 진심 아니야.”

“아뇨. 진심이에요. 그러니까 저리 좀 비켜… 읍!”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강현의 입술이 지아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지아는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냈지만, 그럴수록 강현은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고 혀를 옭아맸다.

지아가 아무리 주먹질을 하고 밀어내도 강현은 놔줄 생각이 없다는 듯 더욱더 빈틈없이 입술을 맞물렸다.

빈틈없이 맞물리던 입술 사이에 생긴 작은 틈 사이로 지아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아….”

지아는 힘이 빠진 채 그에게 더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에게 입술을 빼앗긴 지아가 이내 눈물을 흘리자, 강현은 그제야 입술을 떼고 그녀를 바라봤다.

지아는 강현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미쳤어. 진짜 너무 싫어.”

“아니, 당신 거짓말이야.”

“싫어! 싫다고!”

“아니, 나 안 믿어.”

“믿든 말든 상관없어요. 계속 이런 식으로 오면 신고할 거니까 다신 오지 말아요.”

“신고? 그럴 수 있으면 해봐.”

“차강현 씨!”

“나 출장이야. 당분간 당신한테 못 와. 내가 당신 포기했다고 생각했을까 봐 온 거니까 그런 오해 하지 말라고. 나 당신 포기 안 해. 어떻게든 다시 내 옆에 있게 만들 거야.”

“하, 누구 맘대로요?”

“그렇게 만들 거야. 두고 봐. 그리고 이하은은 정말 아니야. 당신 아닌 다른 여자… 단 한 번도 품었던 적 없어. 믿어.”

지아가 여전히 노려보고 있자, 강현은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

“다녀올게. 다녀와서 봐.”

강현은 제 할 말만 하고 가게를 나갔고, 지아는 다리에 힘이 풀린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 * *

“청선그룹 큰딸하고 날짜 언제 잡을 거야? 당신이 자꾸 미룬다면서?”

차 회장의 재촉에 경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저기 그게….”

“왜 자꾸 미루는 거야? 혹시 강현이가 미뤄?”

“아, 그게….”

“내가 직접 말해야겠구만.”

차 회장이 휴대전화를 들려고 하자, 경옥이 막았다.

강현에게 말했다가 덥석 청선그룹 큰딸과 맞선을 보겠다고 하면 낭패였다.

“제가 말할게요.”

“아직 강현이한테도 말 안 했어?”

“저기… 아직 시기상….”

차 회장은 더 듣기 싫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놈의 시기… 그런 거 따지지 말라고 했잖아. 병현이는 곧 애 아빠가 되는데, 강현이 혼자 저렇게 놔둘 거야?”

“바쁜 애예요. 강현이가 싫다고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천천히….”

“천천히 하다가 좋은 자리 다 놓치지. 그놈이 싫어할 거 같으면 몰래라도 만나게 해.”

“여보, 그건….”

경옥이 또 반대하자, 차 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당신 기다렸다가는 숨넘어갈 거 같으니, 내가 알아서 하지.”

“아뇨, 제가 할게요. 제가.”

“얼른 강현이 날짜 잡고, 병현이나 좀 신경 써. 기사 난 거는 당신도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병현의 얘기에 경옥은 고개를 떨궜다.

“봤어요?”

“전 국민이 다 본 걸 나라고 안 봤겠어? 그 여배우랑 뭐? 친분? 언제까지 밖으로 나돌 거야? 곧 애 아빠 될 놈이… 내가 설 회장 보기 민망해서….”

“조심시키고 있어요.”

“시킨 게 그거야? 이러다 설 회장이 딸내미 데리고 가겠다고 하면 어쩔 거야?”

“알겠어요. 근데 당신… 강현이 결혼, 왜 이렇게 서두르는데요? 혹시….”

“혹시 뭐?”

강현이를 후계자로 올리는 거에 힘을 싣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경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끝까지 모르는 척을 해야 했다.

끝까지 외면한 채, 얼른 병현을 강현의 위치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려놔야 했으니까.

“아니에요. 아무것도.”

“나도 이제 많이 늙었어.”

“……?”

“슬슬 경영권 물려줄 때가 됐잖아. 가정이 평안해야 바깥일도 잘할 수 있는 법이니 강현이도 병현이도 얼른 안정 찾게 당신이 신경 써.”

“벌써 물려주게요? 어떻게….”

“그거야 능력대로지.”

그 말에 강현이 유력하다는 생각이 경옥의 머릿속에 불현듯 들었다.

“너무 이른 거 아닐까요?”

“지금부터 해야지 무슨 소리? 강현이 선보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병현이 가정 좀 신경 써.”

“네, 알겠어요….”

* * *

강현은 서류를 지석에게 넘기고는 다음 일정을 확인했다.

“출장 일정 좀 조정해 봐.”

“어떻게요?”

“삼 일로 줄여.”

“일주일 일정을 어떻게 삼 일로….”

“이틀로 줄이면 더 좋고.”

“본부장님, 그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게 문 실장 능력 아닌가?”

명령이었다. 지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정이야 어떻게든 조정을 한다지만, 그 일정 다 소화한다는 건…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일을 조금 줄이시거나, 급한 일정만 이번에 먼저 소화하고 다시 일정을 잡아 방문을 하시는 게….”

“안 돼. 한 번에 끝낼 수 있게 해. 더 오래 비울 수가 없어서 그래.”

“어딜요?”

강현이 노려보자, 지석은 입을 다물었다.

뻔한 질문이었다.

“해보겠습니다.”

“그래.”

지석이 집무실을 나가자, 강현은 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강현의 말대로 율희는 그의 출장 소식을 전했다.

- 일주일간 출장이시거든요. 편하게 방문하셔서 관리하시면 된다고 일정 공유합니다.

“저기 그게….”

- 네?”

“다른 사람 알아볼 수 있을까요?”

- 다른 사람이요?”

“제가 더는 이 일을 못 할 것 같아서요. 미안해요, 율희 씨.”

- 왜요, 선생님?

“위약금 문제는…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요. 다른 사람으로 구해주세요.”

- 무슨 일 있으세요?

“별일은 아니고, 개인 사정이요.”

- 우선 위에 전달은 할게요. 근데 당장은 힘들 것 같은데… 당장 관두시겠다는 건 아니죠?

“출장 중이라고 하셨으니까… 그때까지만 하는 거로 할게요. 더는 안 되고요. 갑자기 미안해요.”

- 네… 우선은 그렇게 알고 위에 보고할게요.

“네, 미안해요.”

- 아니에요. 연락드릴게요.

지아는 통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렇게 하는 게 맞아.’

그때, 누군가 꽃집 앞을 기웃거리는 게 느껴졌다.

지아가 고개를 돌려 밖을 자세히 바라보는데, 치킨집 여사장인 기순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어? 무슨 일이시지?”

지아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문을 열었다.

“사장님,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바빠요?”

“아뇨.”

“통화하길래 기다렸어요. 차 한잔할 수 있나?”

“네, 그럼요. 들어오세요.”

꽃집 안으로 들어선 기순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솜씨가 좋네… 밖에서 볼 때도 예뻤는데, 안에 들어오니까 더 예쁘네.”

“감사합니다. 여기 앉으세요.”

지아가 안내한 자리에 앉아서도 기순은 가게를 구경했다.

“나도 꽃집 하고 싶었었는데….”

지아는 커피를 타면서 기순의 말에 대꾸했다.

“정말요? 아, 맞다. 전에 꽃 좋아하신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

“네, 맞아요. 꽃 좋아해요.”

지아는 기순에게 커피를 건네고, 자기 앞에도 커피를 내려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드세요.”

“고마워요.”

기순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내가….”

“네.”

“내가 할 얘기가 있어서.”

“무슨 얘기요?”

“진즉에 만나서 얘기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네? 사장님께서 저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으세요?”

“있어요… 저기 그게….”

기순이 자꾸 뜸을 들이자, 지아가 멋쩍게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무슨 얘기인데 힘들어하세요?”

“그게….”

“네.”

“내가 이하은이 엄마예요.”

“……?”

지아가 놀라서 멈칫하자, 기순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놀랐죠?”

“그… 문 실장님 어머니 아니셨어요?”

“아… 우리 지석이도 내 아들이죠. 하은이는 내 딸. 지석이 누나가 하은이에요.”

“어떻게….”

“아, 이름 때문에 더 믿기 힘들겠구나. 이하은은 배우할 때 쓰는 예명이에요. 본명은 따로 있고.”

“아, 네….”

문 실장의 누나가 이하은이었다니… 지아는 생각보다 두 사람의 사이가 더 오래되고 깊은 관계라는 사실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석에게도 배신감이 들었고.

“몰랐어요….”

“모르는 게 당연하죠. 나도 꽃집 사장이 강현이 처… 아니 지금은 아니지만… 아무튼 진즉에 만나서 미안하다는 얘기는 하고 싶었어요.”

“네?”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는 기순의 말에 지아는 심장이 쿵 떨어졌다.

두 사람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재차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미안하다고 하는 얘기가… 이하은이 불편해하니까 설마 플랜테리어도 하지 말란 얘기인가?

지아는 고개를 들어 기순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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