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오랜만이야.
강현은 인형이 옆으로 바짝 다가오자,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가까이에 서 있는 지석에게 눈짓했다.
이거 저리 치우라고.
지석은 바로 알아듣고는 인형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인형 씨?”
“네?”
인형은 기다리던 차강현은 말을 안 걸고, ‘이 남자는 뭐지?’라는 눈빛으로 지석을 바라봤다.
지석은 정중하게 손짓했다.
“옆으로 좀 가시죠? 옆에 자리 많이 남으셨는데?”
“네?”
“옆으로 가시라고요.”
인형은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강현을 힐끔 보고는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인형이 봐왔던 대부분의 남자들은 인형이 옆에 앉으면 아는 척을 하려고 했었다.
말이라도 한번 붙여보고 싶어 했었다.
한때지만, 그래도 청순의 대명사. 국민요정이었던 여배우였으니까.
아직도 외모는 죽지 않았으니까.
근데 옆으로 가라고?
보통은 이런 식으로 가까이 앉게 되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은근히 스킨십을 즐겼었는데 이게 무슨….
게다가 자기가 직접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비서를 시켜?
인형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옆으로 살짝 이동했다.
“죄송해요. 제가 실수를 했네요.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해요.”
인형의 사과에도 강현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정면을 바라봤고, 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행사가 진행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인형은 초조해졌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단답이거나, 대답을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일부러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왔는데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강현을 보며, 인형은 기분이 상했다.
본능이라면 한 번쯤은 쳐다봤어야 했는데….
인형이 생각했던 시나리오랑 완전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인형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아까부터 자신을 힐끔힐끔 노려보는 강 실장과 경옥의 눈치가 보인 탓에 입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인형은 목이 말라 의자 아래 놓인 생수병을 들었다.
그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렇게 눈길을 안 준다면, 눈길을 줄 만한, 말을 걸 만한 이유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인형이 생수병 뚜껑을 열어, 실수인 척 강현에게 물을 쏟으려고 생수병을 기울였다.
“어? 죄송….”
그 순간, 뒤에서 불쑥 손이 나오더니 인형이 잡고 있던 생수병을 가로챘다.
“어?”
인형은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지석이었다.
“일어나시죠.”
“네?”
“순순히 일어나서 나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
인형은 얼결에 지석을 따라 이동했고, 강현은 여전히 행사에만 시선을 둔 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잠시 후, 인형의 눈에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가 일어나 제 쪽으로 다가오자, 인형은 표정이 밝아졌다.
아, 행사 끝나고 연락하려고 했구나? 어쩐지….
인형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지석을 바라봤다.
“잠깐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네?”
“지금 차 본부장님 여기로 오시는 거 안 보이세요? 할 얘기 있으니까 좀 비켜주시라고요.”
지석이 어이없어하고 있는데, 강현이 다가왔다.
인형이 지석에게 저리 가라고 눈짓을 하자, 강현은 비웃으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제 비서는 왜 다른 데로 보내려고 하는 겁니까?”
“네?”
인형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사슴 같은 눈망울로 강현을 바라봤다.
“저 안 그랬는데요.”
“…….”
“근데 저는 여기 왜… 혹시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거라면 여기는 좀 그런데… 다른 데로 가시는 건 어떠세요? 아시겠지만… 제가 스캔들에 좀 민감한 직업을 갖고 있어서요.”
그가 빤히 쳐다만 보고 있자, 인형은 부끄러운 척 고개를 떨궜다.
“왜 그렇게 보세요?”
예쁜 척 눈을 반짝이는 인형을 향해 강현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이름이?”
너무나도 무심한 표정으로, 너무나도 기본적인 질문을 건네는 강현을 보며, 인형의 반짝이던 눈망울이 빛을 잃고 말았다.
“제 이름이요?”
“네.”
“장난이시죠? 제 이름을 모르세요?”
뭐야? 이런 식으로 작업 거는 거야? 내 심기 건드려서 질투심 작전 뭐 이런 거?
인형이 혼자 피식피식 웃자, 강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알려주기 싫으면 그쪽이라고 하죠.”
“네? 그쪽이요?”
“네, 그쪽… 헤어메이크업은 청담 일리네, 원피스랑 구두는 우리나라에 정식 수입도 되지 않는 명품브랜드인 베르노와 줄랑드. 가방은 돈이 있어도 감히 구하기 어렵다는 랭코코….”
강현이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되어 있는 걸 모두 정확히 짚어내자, 인형은 당황했다.
“여, 역시 잘 아시네요. 보는 눈이 있으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그 여자 취향이라….”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내 스타일은 아니네요.”
그 여자 취향? 뭐야? 눈치챈 거야?
핸드백을 잡고 있는 인형의 손에 땀이 나고 있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인형은 경옥 쪽을 바라보며 입술을 짓깨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한 대응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인형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결국 생각해 낸 변명이… 잡아떼기인 건가?”
“무슨….”
인형은 모르는 척했지만, 강현은 확신의 찬 목소리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이경옥이 얼마 준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병현이가 요즘 안 찾나?”
“……?”
“그쪽이 VIP석에 있는 것 자체가 이상했습니다. 이건 너무 티가 나잖아.”
연신 비웃던 강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이경옥 그 여자한테 전해. 봐주는 건 여기까지라고.”
“네? 무슨… 그 사람이 누군지 저는 몰라요.”
인형이 끝까지 모르는 척을 하자, 강현의 눈빛이 더욱더 서늘해졌다.
“너도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꺼져.”
이때, 지석의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은 지석은 강현에게 속삭였고,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나 먼저 들어간다.”
“네?”
강현은 지석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차로 향했다.
그런 그를 보며 인형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인형이 발을 구르며 짜증을 내고 있는데 지석이 다가갔다.
“차병현의 내연녀 이인형. 얼마 전에도 호텔에서 뒹굴다가 큰사모님께 들켰죠? 오피스텔도 차병현이 구해준 거고요. 그런데 이러시면 안 되죠. 차 상무가 얼마나 배신감 느끼겠어요?”
“……?”
“다시는 본부장님 앞에 얼쩡거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직 잘 모르나본데… 차 상무가 진짜 또라이거든요. 이 사실 알면, 어떻게 될지….”
지석이 혀를 끌끌 차는데도, 인형은 포기하지 않고 시치미를 뗐다.
“차병현이 대체 누군데? 그리고 뭐?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야?”
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누나인 하은이 떠올랐다.
한때는 이인형에게 인기도 밀리는 라이벌이었던 누나가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며 공부하고 노력해서 지금의 자리까지 왔는지 옆에서 지켜봤기에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더욱 한심해 보였다.
“또 이런 수작 부리면, 그나마 드문드문 하고 있는 연예계 일도, 차병현 내연녀 자리도 영영 빠이빠이 하게 만드는 수가 있습니다. 그럼 이만.”
지석이 자리를 떠나자, 인형은 강 실장과 경옥을 차례대로 노려봤다.
* * *
강현의 집에 도착한 지아는 현관문을 열기 전에 심호흡을 했다.
“설마 있는 건 아니겠지?”
지아는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듯.
그래도 혹시 몰라서 지아는 조심스럽게 집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방 하나, 하나 문을 열어 살폈다.
그가 보이지 않자 안도를 했다가 어느새 살짝 아쉬움이 밀려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고개를 저은 지아는 얼른 앞치마를 두르고 제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그렇게 테라스로 나가 한참 동안 일을 하고 거실로 들어오는데, 순간 지아는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 강현이 서 있었다.
지아가 얼어붙은 채로 서 있자, 강현은 태연한 몸짓으로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댔다.
그의 동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지아는 한참 동안 그를 노려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이야.”
“지금 뭐 하는 거냐고요.”
“일해. 나도 일하니까.”
강현은 안경을 쓰고는 태블릿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 그가 못마땅한 지아는 그에게 다가갔다.
“지금 계속 여기 있겠다는 거예요?”
“어.”
“왜 회사에서 안 하고….”
강현이 갑자기 안경을 벗고 고개를 들자, 지아는 하던 말을 멈췄다.
“……?”
강현은 빤히 지아를 바라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어디에서 일하든, 일일이 당신한테 허락받아야 하나?”
“그건 아니지만….”
“그럼 일해. 오랫동안 안 나와서 할 일도 많을 거 같은데.”
강현은 무심하게 말하고는 다시 태블릿을 바라봤다.
또 저 차가운 태도….
언제 어떻게 감정이 바뀔지 모르는 그의 옆에 있는 건 늘 불안했다.
지금처럼….
다시 돌아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런 태도를 보이는 그가 지아는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 마음이야 읽을 생각 없다는 저 여유로운 태도도 마음에 안 들었다.
그가 일을 시작하자, 지아는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일하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강현이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