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조건이 어떻게 되죠?
경옥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에 쉬고 있다가, 병현을 의심하는 채영의 연락을 받고, 호텔을 샅샅이 뒤졌다.
역시나 병현은 예상대로 대낮부터 유흥에 빠져 호텔 방을 뒹굴고 있었다.
경옥은 아들과 같이 있던 여자에게 분풀이를 했다.
짝-
여자는 뺨을 맞고 휘청이며 소파로 쓰러졌다.
경옥의 뒤에 건장한 남자들이 버티고 있어서 어떻게 대들지도 못하겠고, 여자가 억울함에 제 볼을 만지고 있는데 경옥이 그녀의 머리 위로 그들이 먹다 만 와인을 부었다.
“하….”
“이제 좀 정신이 드니? 지금 너랑 뒹군 사람이 누군지 몰라? 이제 애 아빠 될 사람이야. 어디서 너같이 천박한 게 내 아들하고 붙어먹어? 네가 뭔데? 어디 네가 감히!”
경옥은 그녀의 머리 위로 와인을 다 부어버리고는 그들이 먹다 만 안주도 접시째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버렸다.
“비싼 술 사주니까 좋았니? 왜? 평생 와보지도 못할 곳에서 재워주니까 좋았어? 내가 지난번에도 경고했지? 내 아들 만나지 말라고. 몇 번 뒹구니까 내 아들 옆자리가 네 자리 될 것 같아?”
자존심은 강했던 여자는 이를 갈며 경옥을 노려봤다.
“당신 아들 옆자리? 내가 그 정도로 성이 찰 거 같아요?”
“뭐야?”
“당신 아들이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거예요. 찌질하게 매달린 건 당신 아들이라고.”
“뭐, 뭐야?”
경옥이 여자의 뺨을 또 때렸다.
여자는 맞아 죽을지언정 할 말은 하겠다는 듯 경옥을 노려봤다.
웬만한 여자들 같았으면 경옥에게 이렇게 대들지 못할 텐데,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는 좀 달랐다.
여자는 한때 국민 요정이었고, 영화배우 이하은과는 라이벌로 유명했었던 이인형이었다.
라이벌이었던 이하은은 갈수록 늘어가는 연기력과 시원하고 소탈한 성격으로 점점 호감도가 상승하는 반면, 인형은 그와는 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은이 좀 센 캐릭터여서 청순하고 착한 이미지였던 인형이 호감도가 더 높았지만, 역전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예쁜 외모 때문에 그래도 어느 정도 인기는 가지고 있었지만, 갈수록 늘지 않는 연기력과 잦은 소송으로 점점 입지가 줄어들고 있었다.
대중들은 그녀를 청순하다고 알고 있지만, 업계에서 그녀의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건 유명했다.
인성 또한 논란이 많았고, 점점 그녀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스태프들은 없었다.
노력도 안 하면서, 얼굴만 믿고 갑질을 일삼는 그녀의 곁에 남을 사람들은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지경이었다.
병현과 호텔 방에서 뒹굴다가 걸려 수모를 당하는 꼴까지 겪게 되었지만 나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형은 경옥의 폭력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독한 것… 천한 것들이 원래 독하지.”
“그럼 천한 것 맛보고 싶어서 침 흘리는 당신 아들은 뭔데? 당신 아들을 탓해. 왜 매번 나만 잡는데?”
“그 입 못 닥쳐? 네가 꼬리친 거 모를 줄 알아?”
“아줌마, 잘못 짚었어. 내가 꼬리친 게 아니라, 당신 아들이 매달린 거라고. 자꾸 이거저거 사주겠다고 사정을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몇 번 만나준 것뿐이야. 내가 차병현 같은 게 눈에 찰 거 같아? 차강현이면 또 몰라….”
“이게!”
경옥이 분을 못 이겨 와인 병을 집어던지려 하자 인형이 얼굴을 숙였다.
그 순간, 불현듯 경옥의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
경옥은 고개를 기울여 머리를 굴렸다.
“그래, 그 방법이 있었어… 그래….”
경옥은 던지려던 와인 병을 내려놓고, 웃으며 인형을 노려봤다.
인형은 갑자기 미소를 짓는 경옥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
“너 차강현이랑 뒹굴고 싶지?”
“뭐?”
“그렇게 해줘?”
“무슨 소리야?”
“기회 줄게 어떻게든 꼬셔. 그리고 뒹굴면 보상은 톡톡히 하지. 아예 만나면 더 좋고.”
차병현은 안 된다고 하면서, 차강현은 꼬셔라? 뒹굴어라?
인형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아줌마가 원하는 그림이 뭐야?”
“스캔들. 너와 차강현의 스캔들.”
스캔들은 더럽고 추잡할수록 좋았다.
그래야 청선그룹에서 다시는 강현을 사윗감으로 찾지 않을 테니까.
그러기에 이인형은 경옥이 보기에 이 스캔들에 딱 맞는 상대였다.
“내 아들한테 떨어지고 차강현한테 붙어.”
“폭탄 취급당해서 기분 별로이기는 한데… 차강현이면 뭐….”
“어때? 차강현이랑 스캔들이 난다고 해서… 네가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안 그래?”
차강현이 손해를 크게 보겠지.
경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고, 인형도 머릿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차강현 정도면, 아니, 차강현이라면, 이혼은 했지만 그래도 스캔들이 난다면 이미지 상승을 할 기회였다.
고급스러운 이미지에 최고 기업의 유력한 후계자로 뛰어난 능력까지 인정받고 있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이혼을 했어도 결혼하고 싶은 남자로 손꼽히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와의 스캔들은 추락한 인형의 이미지에 날개를 달아줄 게 분명했다.
이하은도 예전에 그랬으니까.
시애틀에서 그와 스캔들이 났을 때, 유부남을 건드렸다는 비난을 받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이미지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급상승했다.
그 상대가 무려 차강현이었으니까.
나중에 하은과 강현의 스캔들이 거짓이라는 해명 기사가 나오면서 그녀에 대한 비난은 없어졌지만, 이미 자리 잡은 그녀의 고급스럽고 세련된 이미지는 날로 인기를 치솟게 했다.
그때, 인형은 그 스캔들의 주인공이 자신이길 바란 적도 있었으니까.
그 정도로 가치 있는 남자가 차강현이었다.
그러니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좋아요. 조건이 어떻게 되죠?”
인형은 경옥과 협상을 시작했다.
* * *
「일 나와.」
지아는 어젯밤 강현이 보낸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벌써 일주일째 그의 집에 가지 않고 있었다.
일을 하긴 해야 했지만,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또 그를 밀어내는 것도, 그에게 휘둘리는 것도, 그를 미워하는 것도 이젠 지쳤으니까.
그 집에 가게 되면 또 이런 것들을 해야 할 것만 같아 지아는 무작정 강현의 집에 가는 걸 피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Rrrrrr- Rrrrrr-
갑자기 울린 휴대전화 소리에 지아는 깜짝 놀랐다. 율희였다.
끊을 생각 없다는 듯 벨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자, 지아는 안 받을 수 없어 휴대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 선생님.
“네, 율희 씨.”
- 본부장님께서 그러시는데…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다고 해서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게….”
- 진짜 안 간 건 맞으세요? 저는 그럴 리 없다고 했는데….
“미안해요… 율희 씨….”
- 선생님 진짜 무슨 일 있으세요?
“그것보다 율희 씨….”
- 네.
“혹시 율희 씨는 내가 누구… 아니에요.”
지아는 율희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말을 삼켰다.
알고 했다 한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고, 모르고 했다면 괜히 율희에게까지 그와의 관계를, 제 사정을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 선생님, 진짜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아니에요. 가려고 했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 제가 선생님 믿는 거 아시죠? 잘 좀 부탁드려요.
“네, 그럴게요.”
- 그럼 본부장님께도 말씀드릴게요.
“네? 뭘요?”
- 오늘은 관리 가신다고요.
“굳이요?”
- 보고를 해야 하거든요.
“아, 보고… 네, 보고해야죠.”
- 그럼 잘 부탁드려요.
율희가 전화를 끊자, 지아는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이 3시니까… 이러다 또 마주치겠네… 빨리 다녀와야겠다.”
지아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 * *
“바쁜데 와줘서 고마워, 강현아.”
미술관 행사에 참석한 손님들과 차 회장 앞이라고 연기를 시작한 경옥을 보며, 강현은 비웃었다.
그의 웃음이 거슬렸던 경옥은 눈은 그를 노려본 채, 미소 짓는 척 입꼬리를 올렸다.
“왜 그렇게 웃니?”
“아닙니다. 반가워서요.”
“아, 그, 그래?”
강현이 스쳐 지나가자, 경옥은 이를 갈며 옆에 있는 강 실장에게 말했다.
“이인형이는 왔어?”
“네. 정해 놓은 자리에 앉아 차 본부장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싸구려처럼 하고 오지 말랬는데, 신경 썼지?”
“그럼요. 사모님께서 말씀하셨던 곳에 데리고 가서 한껏 꾸미고 왔습니다. 차 본부장 눈에도 들 겁니다.”
“그래, 잘했어. 잘해야 될 텐데….”
“오늘 호텔까지 같이 갈 자신 있다고 장담하지 않았습니까? 한번 믿어보시죠.”
“그래, 옆에만 있게 해주면 알아서 하겠다고 했으니까… 잘 지켜봐. 호텔이든 어디든 자리 이동하는 대로 다 사진으로 남기고.”
“물론입니다.”
“병현이는? 여기 못 오게 잘 막았어?”
“네.”
“병현이는 그럼 뭐 하고 있는데?”
“그게….”
“왜? 설마 또 벌써 술을 마신 거야?”
강 실장이 아무 말도 못 하자, 경옥은 두통이 나서 이마를 짚었다.
한편, 인형은 강현이 옆자리에 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인형이 VIP석에 앉아 있는 걸 사람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그녀는 그 시선조차 즐겼다.
곧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니까.
오늘 강현과 잘되면 인생 역전을 할 수 있다고 인형은 꿈꾸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인형이 무릎 위에 올려놓은 핸드백에서 거울을 살짝 꺼내 외모 점검을 하는데, 그때였다.
누군가 옆에 앉는 게 느껴졌다.
구두만 봤는데도,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게 그가 분명했다.
인형은 굳게 다짐하고 고개를 들었다.
살짝 눈을 옆으로 돌려 강현이 옆에 왔음을 확인한 인형은 다리에 묻은 걸 떼어내는 척하면서 엉덩이를 살짝 밀어 그와 가까이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