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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44화 (44/94)

44화

그래서 싫어?

지아는 들고 있던 분무기를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슥슥 빗으면서 소리도 안 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래, 태연하게 하자. 태연하게….”

말을 그렇게 했지만,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벽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은서.”

“……?”

윤은서라고? 그리고 이 목소리는?

지아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지아는 어색하게 삐걱대는 몸을 돌렸다.

눈앞에 강현이 서 있자, 지아는 점점 눈을 키웠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지아를 보며, 강현이 먼저 말을 걸었다.

“속은 괜찮고?”

“이게….”

“그래, 여기 내 집이야.”

“……?”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놀란 것 같네.”

강현이 다가가자, 지아가 뒤로 물러났다.

경계하는 지아를 보며, 강현은 미간을 좁혔다.

“윤은서….”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이 왜… 설마 일부러… 일부러 이런 거예요?”

“일부러는 아니고. 우리 직원이…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몰랐던 일이고. 어제 지석이도 치킨집에서 당신을 보고 알았대. 어제 당신이 술 마신 곳이 지석이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치킨집이거든. 그래서 지석이는 어제 알았고, 난 오늘 알았고.”

“말도 안 돼…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예요?”

“안 믿어도 상관없고.”

“……?”

당혹스러워하는 지아의 앞으로 강현이 바짝 다가섰다.

지아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강현은 고개를 기울여 가늘게 눈을 떴다.

“답장은 왜 안 해? 문자메시지 읽었잖아.”

강현은 ‘만나자.’ 세글자를 문자메시지로 보냈었다.

도대체 무슨 답장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

만나자는 말에 ‘네.’라고 답을 할 수도 없고, ‘어디서요?’라고 할 수도 없는 사이였다.

술 취해서 내가 실수한 건 없냐고 묻는 건 더 싫었고.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가만… 설마!

“이럴 줄 알고 만나자는 문자 메시지 보낸 거예요?”

“그게 중요해? 드디어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게 중요하지. 철옹성처럼 당신을 지키는 남매도 없겠다… 얘기 좀 해.”

“언제부터 속인 거예요?”

“말했잖아. 오늘 알았다고.”

“말도 안 돼.”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걸 지금 보면서도 그래?”

“저 갈게요.”

지아가 빠르게 짐을 챙겨 나가려고 하자, 강현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어딜 가?”

“제가 여기 더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지아가 손목을 뿌리치려고 하자, 강현은 더욱더 세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윤은서! 내가 일부러 이랬다고 생각해서 그래?”

“당신이 일부러 이랬든, 아니든 내가 여기서 더 일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거 놔요.”

“왜 안 되는데?”

“……?”

“왜 당신이 여기서 일하면 안 되는 건데?”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혼한 부부가 이런 식으로 계속 만나는 거… 이게 맞아요?”

“그럼 어떻게 만나야 하는데? 난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어. 이렇게라도 당신을 계속 만날 수 있게 됐으니까.”

“뭐라고요?”

“…다시 내 옆에 있어.”

강현의 말에 지아는 할 말을 잃고 멍해졌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다시 내 옆에 있으라니… 뭐가 이렇게 쉬워?

다신 만나지 말자는 그의 말에 몇 날 며칠을 아파했었다.

근데 당신은 왜 이렇게 쉬워?

만나지 말자는 말도, 옆에 있으라는 말도 왜 이렇게 쉬운 건데?

“당신은 내가 왜 쉬워요?”

“뭐?”

“애인이랑 싸웠어요? 아니면 또 잠깐 갖고 놀고 싶어졌어요?”

“무슨 소리야?”

“그래요.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니 얼마나 편하고 좋겠어요. 갖고 놀기 좋겠죠. 그러네, 나 같아도 편해서 찾겠네요.”

“자기 비하도 정도껏 해. 내가 언제 그런 말 했어?”

“꼭 말로 해야 한 거예요? 당신이 날 그렇게 대했어요. 당신이 나한테 이미 행동으로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말했다고요. 지금처럼.”

“그래서 내가 싫어?”

“네?”

저 당당함… 그의 앞에 서면 늘 약자가 되는 게 싫었다.

늘 아쉬운 거 없다는 듯 말하는 그도 싫었다.

그를 내치지 못하는 저는 더 싫었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왜 이렇게 늘 당당해요?”

“그래서 내가 싫으냐고 물었어.”

지아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하!”

“당신도 원하는 거잖아. 내 옆에 있고 싶잖아.”

지아는 대답을 못 한 채, 그를 바라봤다.

이 순간에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자신하는 그를 보며 지아는 슬퍼졌다.

자존심도 상했고.

“아뇨.”

“뭐?”

“그래요, 당신 옆에 있고 싶다는 생각… 했었어요. 근데 지금 막, 그러기 싫어졌어요.”

“거짓말하지 마. 어젯밤 당신이….”

“지금 싫어졌다고요. 내가 지금 당신 옆에 가면, 또 똑같을 것 같아요. 당신은 내가 너무 쉬워. 난 당신이 어렵고.”

“난 당신 쉽다고 한 적 없어.”

“나한테 제대로 된 설명도, 미안하다는 말도 해준 적 없잖아요. 늘 당신 마음대로 행동하고 내가 이해해주길 바라죠, 지금처럼? 그럼 상황은 전이랑 같아요. 당신은 날 쉽게, 또 함부로 대하겠죠.”

“다시 시작 안 해봤잖아. 어떻게 확신해?”

지아는 강현의 시선을 외면했다.

“당신이 싫으냐고 물었죠? 대답할게요. 네. 싫어요. 정말 정말 싫어요.”

“……?”

“대답 됐죠? 그러니까 놔요.”

지아가 손목을 뿌리치고 나가려고 하자, 강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나가면 계약 위반이야. 그래도 나갈 건가?”

“……?”

지아가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자, 강현도 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위반이라고.”

“계약 파기해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단호하게 말하는 지아를 보며, 강현은 이를 악물었다.

“계약 파기면 몇 배를 보상해야 하는지 기억하나?”

“……?”

“돈 있으면 파기하던가. 금액이 만만치 않을 텐데?”

“진심이에요?”

“당신이 자처한 거야.”

계약 파기를 한다면, 계약금의 10배를 보상해야 한다는 조건이 계약 조항에 있었다는 게 떠오르자, 지아는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지아가 움직이지 못하고 있자, 강현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자꾸 날 삐딱하게 만드는 거지?”

“……?”

지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흥분했고, 강현은 그에 비해 너무나도 차분했다.

“돌아와. 다시 내 옆에 있으라고.”

지아가 돌아서서 나가려고 하자, 강현이 막아섰다.

“머리 나빠? 이대로 나가면 계약 위반이라고 했을 텐데?”

“진짜 끝까지….”

지아는 강현을 밀어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녀를 보며 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 * *

“뭐? 정말? 여기 치킨집이 그 문 실장 부모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고?”

“어.”

지아의 얘기를 들은 영지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하! 그럼 치킨집 사장님이 문 실장 부모님인 거네?”

“어.”

“내가 본 치킨집 아들이 문 실장이구나… 우와… 대박. 세상 왜 이렇게 좁아? 그리고 네가 플랜테리어 한 집은 네 전남편 집이고?”

“그래.”

“그리고 어제 싸우고 나왔다고?”

“아, 그래! 넌 재미있어?”

“아니… 재미있다기 보다 너무 기가 막혀서… 그나저나 진짜 대단하다. 네 전남편. 어떻게 들이대? 자기가 한 짓이 있으면서? 대박!”

영지가 엄지척을 하자, 지아는 그 손동작이 보기 싫어 그녀의 손을 탁, 쳤다.

“하지 마.”

“치, 결국 이하은 얘기는 못 한거네?”

“이하은까지 얘기할 필요 없었어. 미안하다는 말 하나도 없이 너무도 당당하게, ‘그래서 내가 싫어?’라고 묻는데… 너 같으면 뭐라고 답할래?”

“싫다고!”

“어, 그래서 나도 싫다고 하고 나와버렸어.”

“잘했네. 근데 이 정도로 들이대는 거면… 그새 이하은이랑 정리했나?”

“몰라.”

“그나저나 진짜 대박… 네 남편… 아니 네 전남편 정말 자존감 최고네.”

“잘난 척하는데, 그 말이 또 다 맞는 말이니까 열이 받더라고.”

“너 전에는 어떻게 참았냐?”

“전보다 더 심해진 것 같아. 아무래도.”

“더 심해졌다고?”

“어.”

“이래도 좋아, 너는?”

지아가 대답을 못 하고 망설이자, 영지는 고개를 저었다.

“너도 참… 너다. 좋으면서 싸우고는 왜 나와?”

“화나게 한다니까?”

“화나게 하는데 왜 좋으냐고. 왜 좋은 거야? 준우 오빠 닮아서?”

“갑자기 준우 오빠 얘기가 왜 나와?”

“네가 마음 약해질 만도 하다고. 나 네 전남편 보고 진짜 깜짝 놀랐잖아.”

“……?”

“나쁜 놈인 거 아는데도 너무 잘생겨서 먼저 깜짝 놀랐고, 준우 오빠 닮아서 더 놀랐고.”

“안 닮았거든?”

“안 닮긴? 우리 보육원에서 단체로 찍은 사진 하나 있잖아. 준우 오빠 나온? 나 너무 신기해서 그거 찾아봤거든? 진짜 비슷한 거 같아.”

“그거 사진 화질도 별로고, 얼굴도 엄청 조그맣게 나온 건데? 그걸 보고 어떻게 판단해… 난 이제 준우 오빠 얼굴도 기억 잘 안 나려고 하는데….”

“내가 사람 얼굴은 너보다 잘 기억하잖아. 사진이랑 비교해 봐. 진짜 닮았다니까. 잘생겨서 닮았다 느끼는 건가? 진짜 준우 오빠 아니야?”

“그럴 리가 있어? 성문그룹이야. 성문그룹 아들이 왜 보육원에 와.”

“그러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너무 닮았단 말이지. 그래도 물어보지. 혹시 모르잖아?”

“내가 보육원 출신인 걸 모르는데? 그 사람은 내가 은서인 줄 알잖아. 어떻게 물어봐?”

“아, 그러네….”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지금 그 얘기가 중요해? 나 진짜 어떡해….”

“배 째라고 하면 안 돼? 설마 너한테 위약금 받겠어?”

“받을 기세던데?”

“그럼, 일 다녀. 얼굴에 철판 깔고. 그 사람 없는 시간에만 일하고 그러면 안 되나?”

지아가 고개를 푹 숙이자, 영지가 눈치를 살폈다.

“괜찮아?”

* * *

“엄마, 나 죽을 거 같아.”

“정신 좀 차려봐.”

“엄마는 날 왜 이렇게 낳았어? 응? 왜?”

“뭔 소리야?”

병현이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자, 경옥은 강 실장에게 떠넘겼다.

“강 실장, 얼른 병현이 데리고 나가. 채영이한테는 야근이라고 둘러댔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얼른 술 깨워서 집으로 보내.”

강 실장이 병현을 데리고 호텔 방을 나가자, 경옥은 눈앞에 있는 여자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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