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특별대우
“네? 진짜요?”
“본부장님께서 특별히 신 비서가 이번에 일 처리를 너무 잘했다고 특별 보너스와 휴가를 내려주셨습니다.”
보너스와 휴가에 들떠 방방 뛰던 율희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요, 실장님.”
“네.”
“제가 뭘… 뭘 잘했을까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데….”
율희의 나름 날카로운 질문에 지석은 뒷목을 긁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잘했습니다. 줄 때 그냥 고맙게 받아요. 본부장님이 특별히 내리는 특혜니까.”
“주시면야 너무 감사하지만… 무엇 때문에 이런 상을 받는지는 알아야….”
“플랜테리어를 잘했답니다. 너무 마음에 드신 답니다.”
“진짜요? 이 정도 상을 내려주실 정도로요?”
“아마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해주고 싶으실 겁니다. 그러니까 즐기세요.”
“진짜요? 감사합니다. 본부장님께서 인테리어에 이렇게 진심이신 줄 몰랐어요.”
“진심이시죠… 다른 거에….”
지석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율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거라고요?”
“아닙니다. 휴가 잡아요. 언제 가고 싶은지.”
“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지시사항까지 전달하고 지석이 자리를 떠나자, 율희는 신이 나서 바로 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주문받은 꽃을 손질하고 있던 지아는 율희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정말이에요, 율희 씨?”
- 네! 저 선생님 덕분에 특별 보너스도 받고 휴가도 가게 생겼어요. 너무 감사드려요.
“그냥 맡은 일을 한 것뿐인데요….”
- 급하게 부탁드린 거였는데, 완벽하게 해주셨잖아요. 저, 이 상, 선생님께서 플랜테리어를 너무 너무 잘해주셔서 받은 거예요. 정말 감사드려요.
“마음에 드셨다니 기분 좋네요.”
어젯밤부터 강현 때문에 기분이 계속 가라앉았었는데, 좋은 소식이 들려와 다행이었다.
- 선생님! 제가 한턱 쏠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 이대로는 못 넘어가죠. 제가 조만간 한턱낼게요.
“네, 그래요.”
- 아, 그리고 또 할 말이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무슨 말이요?”
-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세요. 집주인 분이.
- “네?”
지아는 일전에 집주인에게 찝찝하게 인사를 하고 도망쳤던 일이 떠올라 뜨끔했다.
“왜요? 왜 절….”
- 선생님께도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요.
“괜찮은데… 신분 노출을 꺼린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그랬는데, 선생님은 만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도우미들한테도 신분 노출하는 거 꺼리시는 분인데, 우리 각서도 쓰거든요. 신분 노출 절대 안 되게? 근데 선생님은 아무래도 특별대우인 것 같아요.
“저를요? 왜 그러실까요….”
샤워하고 있었던 게… 그게 마음에 걸리는 걸까? 내가 봤을까 봐?
감사 인사는 핑계고, 경고를 하려고 하는 걸까? 아님… 현장 검증?
안 만나고 싶은데….
혼자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느라 지아의 귀에는 지금 율희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지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전화가 끊어졌나 싶어 율희가 휴대전화를 톡톡 손가락으로 치는 소리가 들렸다.
- 선생님? 안 들리세요? 전화는 안 끊어졌는데… 선생님?
“아, 네… 네….”
- 전화 끊어진 줄 알았어요.
“아, 죄송해요. 그래서 언제 보자고 하셨어요?”
- 빨리 보셨으면 하던데요?
“빨리요?”
- 네.
“저기 그게… 제가 퇴근하실 때쯤에는 가게로 와야 해서 시간 맞추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어떻게든 안 만나려고 핑계를 대는데, 율희의 대답에 그 노력은 금세 물거품이 되었다.
- 일하고 계시는 시간에 댁으로 가시겠대요.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고요.
지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일하고 있으면 오신다고요?”
- 네. 그럼 선생님, 저는 수업 때 뵐게요.
“네….”
율희와 통화를 마친 지아는 불안함에 손톱을 물었다.
“하필 샤워할 때 들어가서… 정말 아무것도 못 봤는데… 아니면 그전에 있었던 일도 들킨 건가? 그때도 샤워하고 있을 때였잖아….”
지아는 난감한 상황에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 * *
“네? 회장님 지금 그게 무슨….”
경옥은 잘못 들은 것 같아 식사를 하다 말고 차 회장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청선그룹이라고 하셨어요?”
“그래. 강현이 혼자 놔둘 수는 없잖아. 그 집 큰딸도 이혼한 거 알지? 신혼여행 다녀와서 얼마 안 있어 바로 이혼한 거라서 호적은 깨끗하다는군.”
청선그룹은 병현의 와이프인 채영의 회사보다 규모도 크고 훨씬 힘이 있는 기업이었다.
그런 기업의 딸이, 그것도 큰딸이 강현과 결혼하는 건 막아야 했다.
“아직 이혼한 지 1년도 채 안 됐는데 벌써 결혼은… 거기도 아직 1년 안 됐잖아요.”
“청선그룹에서 먼저 제안한 거야.”
“네? 청선그룹에서 강현이를요?”
“오래전부터 강현이를 사위로 점찍어 놨었다더군. 결혼을 해서 아쉽게 생각했는데, 이혼 소식을 듣고 인연이 아닌가 싶다며… 잘됐지, 뭐야.”
차 회장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지만, 경옥은 표정이 굳은 채 관리가 잘 안 됐다.
“이혼한 지 1년도 안 돼서 결혼하면 남들이 손가락질해요. 더군다나 둘 다 이혼 경력이 있으면….”
경옥의 말이 탐탁지 않다는 듯 차 회장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1년이고 2년이고 무슨 상관이야? 남들 손가락질 무서워 좋은 자리를 놓쳐? 그리고 요즘 이혼이 어디 뭐 흠이나 되나?”
“자랑도 아니죠….”
“음!”
차 회장이 헛기침을 하자, 경옥은 입을 닫았다.
차 회장이 다시 식사를 시작하자, 경옥은 그의 눈치를 보며 밥을 깨작댔다.
“화났어요? 저는 그저 시기상조라는 말을….”
차 회장은 경옥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언짢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됐고. 보니까 그 집 딸도 기우는 집안 아들이랑 결혼해서 결혼 전부터 삐걱댔는데, 신혼여행 다녀와서 바로 사달이 난 모양이더라고. 강현이도 기우는 처 만나서 그런 걸 수도 있어. 아무래도 사는 환경이 비슷해야 이해관계도 더 높으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강현이가 좋다고 할까요?”
“강현이도 분명 좋다고 할 거야. 청선그룹 큰딸은 조건도 비슷하고, 집안도 얼추 격이 맞으니 이만하면 좋은 자리잖아.”
“좋은 자리인 건 알죠. 근데 강현이가 안 하려고 할 것 같은데….”
경옥은 강현의 탓으로 돌리며 차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해야지, 은서랑 결혼할 때도 토 안 달고 결혼했잖아. 이번에도 그럴 테니 당신이 신경을 좀 써서 진행해봐.”
“…네.”
경옥은 대답은 했지만,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강현이 만약 청선그룹 큰딸과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병현이는 정말이지 모든 게 밀리는 게 되는 거였다.
나이도, 실력도, 처가도….
골치 아픈 물건을 치웠더니, 그 자리에 더 골치 아픈 물건이 들어오게 생기다니…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우선은 방법이 없으니 어떻게든 미뤄야만 한다. 어떻게든….
* * *
“넌 또 왜 이렇게 죽상이야? 설마 아직도….”
“아니야. 그런 거….”
“그럼?”
“그게….”
지아의 얘기를 들은 영지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악! 그래서? 하하… 너 지금 취조당하러 가는 거야?”
“오늘일지 내일일지는 모른다니까….”
“야, 그거 사람 심장 쫄려서 어쩌라고. 날짜라도 알려주지.”
“그러니까… 근데 나 진짜 할 말이 없어. 본 게 없단 말이야.”
“그게 한 번이면 그렇다 치는데… 두 번이나 샤워할 때 네가 들어갔다며? 이거 상습범이네, 생각할 수도 있지.”
“아… 억울해. 진짜 그것 때문에 보자고 하는 거면 어떡해….”
“그래서 지금 이렇게 죽상을 하고는 일도 안 가고 있는 거야?”
“어….”
“아이고… 어쩌냐… 그렇게 신분을 숨기는 사람이 갑자기 자기가 누군지 밝힌다는 것부터가… 그것부터가 좀 찝찝하긴 하다. 그래도 가긴 해야 할 거 아냐?”
“가야지….”
지아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 * *
“어디 가십니까?”
지석은 집무실에서 나온 강현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외부 스케줄은 없는데 곧 나갈 것처럼 옷을 갖춰 입은 그를 보며, 지석은 놓친 스케줄이 있었나 얼른 스케줄을 확인했다.
그런 지석을 보며, 강현은 재킷 단추를 채우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어디 가는 게 아니라, 집에 가서 일하려고.”
“집이요? 그럼 저도….”
지석이 나갈 준비를 하려고 하자, 강현이 막아섰다.
“나 혼자 가.”
“네?”
“나 혼자 집에서 일할 테니까 문 실장은 여기 있어. 급한 일 있으면… 급한 일 있어도 되도록 연락하지 말고.”
“네?”
“알아서 해결하라고.”
“무슨 일 있으십니까? 갑자기 집은… 아….”
강현이 무슨 일 때문에 집에 가는지 깨달은 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석이 이제야 알아들은 것 같자, 강현은 걸음을 옮겼다.
* * *
언제 집주인이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지아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됐다.
“일을 못 하겠잖아… 일을….”
지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현관 쪽을 힐끔거렸다.
“오늘은 안 오려나?”
와도 문제고, 안 와도 문제였다.
안 오면 내일 또 이렇게 마음 불편하게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매도 먼저 맞는 게 맞는다고, 차라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였다.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떡해… 왔나 봐….”
혼잣말로 중얼거린 지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