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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40화 (40/94)

40화

내 옆에 있어

“누구 전화인데 안 받아?”

희숙이 묻자, 지아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영지. 나중에 받으면 돼.”

“그래, 밥 먹고 나중에 통화해. 그나저나 잘 먹으니까 보기 좋네. 요새 너무 살이 많이 빠졌어. 일이 많이 바빠?”

“괜찮아.”

희숙은 지아의 밥그릇에 고기반찬을 올렸다.

“이것도 먹어.”

“엄마도 먹어.”

“나는 우리 딸 먹는 거만 봐도 배불러.”

가운데 앉아 밥을 먹던 건명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희숙은 은서를 놔주기로 하고, 지아를 받아들인 날 이후로 많이 달라졌다.

마음의 짐을, 잡고 있던 미련의 끈을 놓아서 그런지 시름시름 앓던 날들도 많이 줄어들고 몰라볼 정도로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마음이 건강해지자, 진짜 몸까지 건강해지고 있었다.

희숙도, 지아도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건명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돌아왔구만. 닭살 모녀?”

“닭살이라뇨? 당신은 꼭 샘을 내더라?”

희숙이 핀잔을 주자, 건명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짓던 지아는 왈칵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아냈다.

지아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자, 희숙은 이상한 낌새를 차렸다.

“지아야….”

“응?”

지아가 고개를 숙인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희숙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너 고개 들어봐.”

“아니야….”

“지아야.”

지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을 참으려고 해도 참아지질 않았다.

지아가 애써 눈물을 삼켜내자, 건명도 희숙도 놀라서 금세 얼굴에 근심이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었어?”

지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냥 좋아서.”

“갑자기 다 죽어가는 얼굴로 와서 놀라게 하더니… 이젠 울기까지 하면… 정말 아무 일 없던 거 맞아?”

“진짜 아무 일 없어. 좋아서 그래. 좋아서.”

지아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밥을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었다.

“맛있다. 오늘 나 여기서 자고 가도 돼?”

“그럼.”

“진짜? 아, 좋다. 그럼 자고 가야겠다.”

입으로는 좋다고 하면서 눈물은 자꾸만 눈치 없이 흘렀고, 지아는 괜찮은 척 미소를 지었지만 어색함에 입꼬리가 떨렸다.

어딜 가도, 무슨 짓을 해도 자꾸만 강현이 생각났다.

이제 포기하기로 해놓고… 그런 나쁜놈 잊어버려야지 아무리 마음먹어 봐도, 잊을 수 있다고 보란 듯이 잘 살 수 있다고 몸부림쳐봐도, 아무리 발악을 해봐도 소용없었다.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거에 화가 나면서도, 왜 찾아왔을까 궁금하고, 혹시 둘이 헤어졌나 또 혼자 상상했다가… 그러다 또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해졌다.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그 때문에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고,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그를 잊지 못했다.

이하은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얘기는 들어볼 걸….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서운함에 서러움이 북받쳤고, 못되게 구는 그에게 상처받기 싫어 더 화를 내야만 덜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화 좀 덜 내고 얘기 좀 들어볼 걸… 매일 매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 끝인 건가?

그날 이후 나타나지 않는 그 때문에, 꿈을 꾼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나?

이제 좀 잊고 살려고 했는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그가 미웠다.

근데 또… 다시 찾아오면, 그땐 모르는 척 얘기는 들어줄까… 자꾸만 이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이 더 미웠다.

그렇게 당해놓고, 여전히 그에게 끌려다니는 제 자신이… 제 자신이 제일 미웠다.

* * *

다음 날, 강현은 하은의 말대로 아침 일찍 꽃집 앞을 찾았다.

지아가 트렁크에서 꽃을 꺼내 가게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강현은 몇 번을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참았다.

섣불리 나갔다가 또 싸우게 될 게 분명했으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강현은 지아가 외도를 안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아이를 잃었다는 슬픔과 함께 분노가 들끓었다.

동시에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은 날로 커져만 갔다.

자신이 받은 고통과 분노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을 그녀에게 너무 미안했다.

근데 자꾸 그녀 앞에 서면 진심과 다르게 행동하는 제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아, 왜 그랬지?

심지어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도 있었다.

이경옥은 은서를 어떤 거로 협박한 걸까?

외도가 아니면… 도대체 뭘까?

윤은서 너는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지?

그녀를 생각할수록 머리는 복잡해지는데, 저 복잡한 여자를 보고 있으면, 머릿속은 점점 단순해졌다.

그녀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남자한테는 절대로 못 보내겠다.

그 자식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 봐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다른 남자한테 가는 걸 보라는 거지?

그렇게는 못 해.

당신이 아파해도 날 미워해도 내 옆에서 아파하고 미워했으면 좋겠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숨기려 하고 외면했던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그동안 설명이 안 되던 감정들이 뭔지 새삼 깨닫게 됐다.

그녀를 볼 때마다 화가 났고, 괴롭히고 싶었고, 차갑게 대했지만, 아무리 오해를 하고 미워했어도 그녀를 떠나보낸다는 생각은 이상할 정도로 해본 적이 없었다.

늘 옆에 두고 싶었다.

옆에 두고 괴롭히고 싶었고, 옆에 두고 미워하고 싶었고, 어찌 됐든 옆에 두고 싶었다.

지금 이렇게 외도 오해까지 풀린 상황에서 그녀를 옆에 두지 않을 이유는 이제 없었다.

이경옥이 어떤 거로 협박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면 됐다.

다른 이유 따위는 이젠 뭐든 상관없다.

그동안 아팠던 것들도 내 옆에 두고 다 보상해 주고, 행여 그녀가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질렀다 해도 옆에 두고 괴롭힐 거니까.

그녀를 웃게 하는 것도, 울게 하는 것도 모두 내가 할 거다.

절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게 놔두지 않을 거니까.

내 옆에 둘 거다.

무조건.

아무 데도 못 가게. 내 옆에.

당신은 내 옆에 있어야 해.

* * *

“어머, 아가! 몸조심해야지. 홑몸도 아닌데.”

“어머니… 저 진짜 괜찮아요.”

“괜찮긴, 여기 앉아.”

경옥이 유난을 떨면서 채영을 소파에 앉히자, 차 회장도 병현도 미간을 찌푸렸다.

이때, 회장실로 비서가 차를 내왔다.

비서가 차 회장부터 차례대로 차를 내려놓는데, 경옥은 채영의 앞에 놓인 차를 보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홍차잖아. 카페인 있는 거 아닌가?”

“네, 있습니다.”

“있습니다? 있으면 안 되지. 홑몸도 아닌 애한테… 카페인 없는 거로 다시 내와요. 앞으로도 조심하고. 다른 비서들한테도 일러둬요.”

“네, 알겠습니다.”

비서가 다시 차를 가지고 나가자, 경옥이 차 회장을 바라봤다.

“채영이 임신한 거 얘기 안 했어요?”

“나도 엊저녁에 알았는데 말할 틈이나 있었어?”

“이런 건 빨리빨리 전달해야죠. 얘기를 안 하니까 이런 실수를 하잖아요. 우리 채영이가 이거 마셨으면 어떡해요?”

경옥이 볼멘소리를 하자, 차 회장이 혀를 찼다.

“애 엄마가 알아서 가려 먹겠지. 안 그러냐?”

“네, 아버님. 어머님, 제가 조심할게요.”

“그래, 조심 또 조심해야 돼. 알았지?”

“네.”

채영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좀 전부터 뭐 씹은 거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병현을 보며 차 회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넌 애 아빠가 표정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병현이 퉁명스럽게 답하자, 경옥이 당황해서 수습했다.

“얘가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잠을 얼마 못 자서.”

병현은 채영이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집에 들어가지 않아서 경옥에게 한 소리를 들은 상태였다.

경옥은 차 회장과 채영의 눈치가 보여 애써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풀려 노력했다.

“첫 손주를 보게 됐는데, 당신은 기분이 어때요?”

“좋지.”

차 회장이 간단히 답하자, 경옥은 입을 삐쭉였다.

“그게 다예요? 요즘은 며느리가 임신하면 시아버지가 선물도 크게 하고 그런다던데…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 선물도 하고.”

“그거야 태어나면 당연히 할 건데 뭐 하러 지금부터 말해? 그리고 뭐? 둘째야 뭐 갖고 싶은 거 있냐? 말만 해.”

차 회장의 둘째라는 발언에 경옥도 채영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경옥이 채영의 눈치를 살피며, 차 회장의 옆구리를 찔렀다.

“며느리 하나인데 둘째라뇨? 솔직히 우리 채영이가 맏며느리 역할 다 하는 거잖아요. 애 서운하게….”

“둘째는 둘째지? 강현이도 곧 결혼할 테니 맏며느리 자리 채워질 거다. 고생스럽다면, 그때까지만 고생해. 강현이 결혼이야 시간문제니까.”

채영과 병현은 처음 듣는 얘기에 눈을 키웠고, 경옥은 괜히 부추긴 것 같아 후회를 하며 입술을 짓깨물었다.

“정말 강현이 재혼시키시게요?”

“당연한 걸 뭘 물어? 병현이는 곧 애 아빠가 되는데, 강현이도 얼른 재혼해야지. 안 그래?”

“좀 빠른 거 아닐까요?”

“빠른 게 어디 있어? 좋은 짝 생기면 하는 거지.”

“그렇죠….”

경옥은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하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 *

“설채영이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지석의 보고에 강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개판이네….”

“네?”

“그 여자가 좋아하겠네? 손주 생겼다고?”

“네… 모든 비서들한테 앞으로 조심해서 잘 모시라고 당부도 했답니다. 어찌나 신이 났는지 여기저기 소문내고 난리도 아니랍니다.”

“누군 죽을 맛이겠네.”

“누구요?”

“있어.”

강현은 비릿한 웃음을 짓고는 이를 바득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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