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계약 위반
“혹시 연락 왔어? 네 전남편?”
지아가 고개를 젓자, 영지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실은….”
영지가 뜸을 들이자, 지아는 불길한 생각에 그녀를 재촉했다.
“왜? 무슨 말인데?”
“그게… 오빠가 네 전남편을 봤나 봐. 그것도 이하은이랑 같이 있는 거.”
이하은이라는 이름에 지아는 심장이 쿵 떨어졌다.
“어?”
“이하은이랑 엄청 다정하더래. 네 전남편이 방송국까지 이하은을 데려다줬다더라. 그러고는 집에서 보자고 하고, 둘이 귓속말하고… 완전 연인 사이였다던데?”
너무 놀라 눈물도 말라버린 지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자, 영지는 조금 잔인하지만 말을 이어갔다.
“둘이 만나나 봐… 아무래도 그때 스캔들이 아예 근거 없는 스캔들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너한테 굳이 이 말을 하는 건….”
“알아….”
“그래… 그런 놈이야… 이미 그놈은 다른 여자 만나서 룰루랄라 신이 났다고… 그런 놈 때문에 너 아파하지 말라고….”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난다… 그것도 이하은을… 이하은을… 하필 이하은을… 언제부터였지? 날 속인 건가? 계속 이하은을 만나고 있었던 건가?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만 같아 지아는 입술을 짓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 이제 나가봐야겠다.”
“어딜?”
“플랜테리어 맡은 집… 미리 가서 일 좀 더 하게.”
지아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이런 때일수록 몸을 힘들게 해야만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으니까.
* * *
강현이 집무실에서 나오자, 지석과 율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근하십니까?”
“퇴근들 해요.”
강현이 서둘러 퇴근을 하자, 지석도 퇴근 준비를 하면서 율희를 바라봤다.
“나 먼저 갑니다. 퇴근해요.”
“네, 들어가세요.”
지석은 퇴근을 하려다가 다시 돌아서서 율희를 바라봤다.
“아, 꽃다발 확인했어요?”
“지금 한 번 더 확인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즐거운 주말 보내요. 진짜 퇴근합니다.”
지석이 퇴근을 하자, 율희는 곧바로 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만 울릴 뿐 지아가 전화를 받지 않자, 율희는 다시 한번 전화를 하고는 휴대전화를 내려놨다.
“잘하셨겠지? 에이… 잘하고 가셨겠지.”
율희는 고개를 젓고는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한편, 강현의 집 화초를 돌보던 지아는 해가 완전히 지자, 들어올 때 젖혀놨던 커튼을 다시 닫으며 혼잣말했다.
“낮 동안에는 집에도 해가 들어오는 게 좋은데… 낮에 오는 거로 시간대 바꿔야겠네….”
지아는 창가에 있는 화초에 물을 주며 말을 걸었다.
“다음엔 더 일찍 와서 종일 햇살 받을 수 있게 해줄게. 오늘은 물만 줘서 미안.”
강현과 하은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지아는 더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정신없이 일을 하느라 휴대전화가 울리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랬더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고 있었다.
화초를 다 들여다본 지아는 마지막으로 테이블에 놓은 꽃다발을 확인했다.
“좋아하셨으면 좋겠다.”
생일 선물이라고 하길래 지아는 혹시 몰라서 꽃다발 위에 빈 카드도 올려놓았다.
그리고 쪽지를 썼다.
<필요하실 것 같아 카드도 함께 준비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프리 플라워>
쪽지를 꽃다발 위에 올려놓으며, 지아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이 몇 시지?”
* * *
“누나, 나 왔어.”
치킨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지석은 하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테이블을 치우고 있던 하은은 츄리닝 차림으로 나타난 지석을 바라봤다.
“집에 들렀다 왔어?”
“응, 엄마는?”
“아직 미용실.”
“아빠는?”
“주방.”
지석은 주방으로 가서 수용을 찾았다.
“아빠, 저 왔어요.”
“강현이는? 같이 오라니까.”
“형도 올 거예요. 집에 들러서 옷 좀 갈아입고 온대요.”
“아, 그래? 오늘은 가게 일찍 닫는 날이니까 이제 손님 받지 말고, 가게 문 클로즈로 바꿔 달아놔.”
“네.”
지석이 가게 입구로 가서 오픈을 클로즈로 바꾸는데, 영지가 다가왔다.
“벌써 문 닫아요?”
“…네.”
“아, 오늘 가려고 했는데….”
너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는 영지를 지석은 저도 모르게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 눈빛이 거슬렸던 영지가 미간을 좁혔다.
“왜 그렇게 봐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석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영지가 말을 걸었다.
“근데 누구세요?”
“네?”
“누구시냐고요.”
“이 집 아들인데요.”
“아….”
영지는 일전에 부동산 사장님이 치킨집 아들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지석을 위아래로 훑어보는데, 부동산 사장님이 했던 말이 생각했다.
“진짜 치킨집 아들 괜찮다니까? 대기업 다니는 데다가 얼굴도 아주 잘생겼어. 키도 훤칠하고. 요즘 아가씨들 좋아하는 그 뭐냐… 비율, 그래 비율도 좋고….”
얼굴도 아주 잘 생기고?
키도 훤칠하고?
비율도 좋고?
영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석도 그 눈길이 거슬려 미간을 좁혔다.
“왜 그렇게 봅니까?”
“아,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쪽이 치킨집 아들이라는 거죠?”
“네.”
“아….”
영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석은 경계하듯 바라봤다.
“지금 그 ‘아…’가 뭡니까?”
“네?”
“지금 저 보고 ‘아…’했잖아요.”
“제가 그랬나요?”
“네.”
“아니 그냥… 실례했습니다.”
영지가 쿨하게 돌아서자, 지석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저기요.”
영지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봤다.
“저요?”
“그럼, 그쪽 말고 또 여기 누가 있습니까?”
영지는 주변을 살피고 지석을 바라봤다.
“그러네요. 근데 저 왜요?”
“좀 전에 ‘아….’ 이게 무슨 눈빛이냐고요.”
“아… 그냥 봤어요. 보면 안 돼요?”
“네?”
“이상한 사람이네.”
영지는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라는 표정을 짓고는 태연하게 몸을 돌려 약국으로 향했다.
그런 영지를 보며, 지석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누가 이상한데….”
영지가 약국으로 들어가는 게 보이자, 지석은 좀 전에 그녀가 입고 있던 약사 옷을 떠올렸다.
“저런 여자가 약사야? 약은 본인이 먹어야 되게 생겼구만….”
지석은 약국을 한 번 노려보고는 입을 삐쭉이며 치킨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 * *
차고에 주차를 마친 강현은 집으로 들어가면서 지석과 통화를 나눴다.
“지석아, 나 조금 늦을 것 같다.”
- 왜? 무슨 일 있어?
“차가 너무 막혀서 이제야 집에 도착했네. 가는 길에 사고가 났더라고.”
- 괜찮으니까 천천히 와. 엄마 지금 미용실이래. 알잖아, 생일 때마다 아빠가 엄마 손 하나 까딱 못 하게 하고 풀케어 받게 해주는 거.
“알지. 오늘은 기분 어떠셔?”
- 아침부터 이곳저곳 미역국 돌리시고도 우울해하셔서 아빠가 바로 미용실로 데려다주셨나 봐.
“잘하셨네.”
또 안 가겠다고 하시는 거 억지로 데려다주셨다고는 하는데… 우리 앞에서는 워낙 티를 안 내시잖아. 이따 가도 괜찮을 거야. 하필이면 생일이 같아서….
“그러게… 얼른 준비하고 갈게.”
- 천천히 와.
“그래.”
문을 열고 들어간 강현은 깜깜한 집의 불을 밝히고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넥타이를 풀며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지아가 집으로 들어왔다.
“어? 내가 불 안 끄고 나갔나?”
지아는 실수로 불을 안 끄고 나간 줄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 진짜 왜 이래… 그나저나 휴대전화는 어디에 뒀더라….”
지아는 얼른 거실로 가 휴대전화를 찾았다.
소파 위에도 테이블 위에도, 선반 위에도 없자, 지아는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안방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열린 문틈 사이로 샤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헉!”
지아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어떡해… 집에 왔나 봐.’
지아는 까치발을 하고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찾았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 순간, 휴대전화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헉!”
지아는 얼른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가 휴대전화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아, 이게 왜 이렇게 안 꺼져.’
허둥지둥하며 겨우 휴대전화 전원을 끈 지아는 안방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치를 살폈다.
휴대전화를 찾은 건 다행인데, 혹시라도 집주인이 인기척을 느꼈을까 봐 지아는 숨을 죽였다.
집이 워낙 커서 귀를 기울여도 샤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휴대전화 진동 소리도 안 들렸을 거란 생각에 지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눈치를 살피며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 까치발을 들었다.
살금살금 현관으로 향하는데, 남자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어떡해….’
지아는 행여 숨소리라도 들릴까 싶어 숨을 꾹 참은 채, 얼른 꺾인 벽으로 몸을 숨겼다.
귀를 기울이는데,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들킨 건가?’
지아는 속으로 ‘제발 제발’ 기도를 했다.
다른 상황도 아니고, 고객이 샤워를 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약속한 시간도 아닌 시간에 몰래 집에 들어온 거였다.
엄연한 계약 위반이고, 이건 충분히 오해를 받을 상황이었다.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수천수만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휴대전화 벨 소리가 거실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Rrrrrr- Rrrrr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