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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30화 (30/94)

30화

누구길래?

갑작스러운 율희의 부탁이 부담스러워 지아는 그녀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갑자기요?”

“선생님이라면 제가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뭘 맡겨요?”

“가정집이에요. 좀 돈 많은 가정집인데… 누구 집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프라이버시를 중시하시는 분이라서… 근데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네?”

“돈은 많지만, 검은돈은 아니다 이거죠. 돈 준다 그래도 나쁜 사람 집에서는 일하기 싫어하실 거 같아서.”

“네, 뭐….”

“그러니까 선생님이 맡아서 좀 해주세요. 네? 제발요… 선생님이면 제가 진짜 믿을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에요. 네? 시간은 일주일!”

“일주일이요?”

“네, 선생님! 제발요!”

너무나도 간절해 보이는 율희의 부탁에 지아는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 * *

퇴근을 한 강현은 거실 소파에 기대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업무차 복지재단을 방문했다가 그곳의 이사장이자 전 장인어른인 은서의 아빠 건명을 마주쳤다.

하필 오늘은 건명의 마지막 근무 날이었고, 그와 마주치는 순간 강현은 깍듯이 인사를 나누고,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지나쳤다.

결혼 생활 중에도 결혼식 때, 신혼여행을 다녀와서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인이었다.

복지재단 이사장과 성문그룹의 본부장으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는데, 그냥 지나치던 건명이 다시 돌아와서 말을 걸어왔다.

“애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했나?”

“……?”

건명은 강현의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게 애를 쥐잡듯 잡아 놓고… 미안하다는 말도 안 했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눈치를 보니… 몰랐구만? 자네 어머니가 툭 하면 나한테 전화해서 내 딸을 욕했네. 우리한테 한 짓을 보면 애한테는 어떻게 했을지… 후, 오죽하면 내가 딸한테 이혼하라고 했겠나… 그래, 안 그래도 내가 이혼하라고 했네. 내가.”

건명은 말을 하다 보니 흥분을 하게 돼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후… 그래, 이제 와서 이런 얘기 무슨 소용이냐고, 듣기 싫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가 해야겠네. 결혼 중에도 만나기 힘든 사위, 이혼하고나 만났으니까. 후….”

흥분으로 점점 언성이 높아지자, 건명은 또 숨을 골랐다.

“후….”

화를 겨우 억제하며 건명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내가 이혼하라고 해도, 끝까지 이혼 안 하겠다고, 자네는 혼자라서 자기가 자네 편 들어줘야 한다고 한 애가 내 딸일세! 근데 어떻게!”

또 흥분이 올라오자, 건명은 다시 숨을 골랐다.

“내가 지금 이혼이 아쉬워서 이러는 게 아닐세. 뭐 때문에 이혼했는지는 우리 애가 말을 안 해줘서 모르지만, 난 내 딸이 오죽하면 이혼했겠나 싶네. 그리고 만약 지금도 이혼을 안 했다면, 내가 이혼하라고 두 팔 걷어붙였을 거고.”

“……?”

“이혼해 줘서 고맙네. 내 수고 덜어줘서 고맙다고. 진즉에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도통 얼굴을 볼 수 있어야 말이지. 이제야 봐서 하는 얘기니까 뒷북이라도 이해하게.”

건명은 할 말을 다 했는지 휙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다시 뒤돌아 강현에게 다가갔다.

한 대 칠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오자, 강현은 살짝 긴장했다.

건명은 강현의 앞에 떡하니 서서 고개를 당당히 들었다.

“아, 복지재단 이사장 자리는 오늘이 마지막인 건 알고 있겠지? 잘린 거 아니라, 내가 관둔다고 했네. 성문에서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관둔다고 했다고. 복지재단? 며느리 복지는 개판으로 하는 집이 무슨? 아나… 똥이다.”

차 회장으로부터 익히 듣던 온화한 인성의 건명이 아니었다.

많이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동안 봐왔던 건명의 모습이 아니어서 강현은 당황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나 똥이라니….

정말로 이혼한 이유를 모르는 거 같아서 강현은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저도 은서에게도 좋을 건 없으니까. 달라질 것도 없고. 피곤하기만 하니까.

낮에 있던 일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순간, 강현의 얼굴로 넝쿨 식물 줄기가 떨어졌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소파 벽면에 채워진 넝쿨 식물 한줄기가 강현의 얼굴을 덮친 거였다.

그 넝쿨 식물을 피해 소파 위치를 바꾸고 정면을 바라보는데, 벽면을 가득 메운 넝쿨 식물이 또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강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때마침 지석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강현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저거 좀 내 눈에서 사라지게 해.”

“네?”

“저 치렁치렁 하….”

“아, 치렁… 안 그래도 업체 구했습니다. 본부장님. 내일 출장 가시는 대로, 인테리어 바꾸는 작업 들어갈 예정입니다.”

“이번엔 확실히 해. 아예 없애던가.”

“이번엔 확실합니다. 신 비서가 그 플랜테리어 하실 분의 작품을 보여줬는데, 저도 기대가 큽니다.”

“나한테도 보내 봐.”

“네.”

지석은 강현에게 몇 장의 사진을 휴대전화 메시지로 바로 전송했다.

강현은 사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그렇죠? 내일 바로 작업 들어가겠습니다.”

* * *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던 영지는 지아의 말을 듣고는 사레에 걸렸다.

“켁! 얼마?”

영지가 너무 목소리를 높이자, 지아가 주변 눈치를 살폈다.

“야, 목소리 좀 낮춰.”

“아니, 너무 놀라서… 그 돈이면 남들 연봉 아니야? 그것도 잘나가는 직장인 연봉.”

“그렇지. 플랜테리어 해주고, 정기적으로 가서 관리만 해주면 된대.”

“근데 플랜테리어? 그게 뭐야?”

“식물로 인테리어하는 거.”

“아, 근데 그걸 그렇게 돈을 많이 준다고? 그것도 선금으로?”

“일을 해야 하니까. 식물도 사고 해야지. 그리고 그 집주인이 돈이 워낙 많다나 봐.”

“누구길래? 집주인 뭐 하는 사람이래?”

“누군지는 비밀이래.”

“왜 비밀이지?”

“도우미들도 다 그 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있대. 누구 집에서 일한다, 누구 집은 이렇다더라 이런 소문 나는 것도 싫어하고, 보안도 철저한 사람이라더라고.”

“아… 다른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 거 싫어하면 그럴 수 있지. 그나저나 진짜 돈이 많나 보다. 그 많은 돈을 인테리어에 쓰고… 근데 당장 내일부터라니… 너 할 수 있어? 시간 돼?”

영지가 염려하듯 물었지만, 지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처음에 꾸미는 건 좀 시간 걸리겠지만, 정기적으로 관리하는 건 시간이 자유로운 편이니까… 어차피 꽃은 예약받는 거고, 수업도 시간표가 있는 거잖아. 그 시간만 피해서 하면 될 거 같아.”

“너 일 너무 많이 늘리는 거 아니야? 지금 수업도 좀 무리하는 거 같던데? 일하다가 가끔 봐도 너 앉아서 쉬는 걸 못 봤어.”

“쉬면 뭐 해? 돈 벌어서 얼른 테라스 있는 집으로 이사 갈 거야. 그래서 그 테라스에 나만의 정원을 만드는 거지. 그리고 내 집은 아니지만… 나 원래 집 꾸미는 거 좋아하잖아. 재미있을 거 같아.”

“다 좋은데, 건강 생각도 해.”

“네가 챙겨주는 영양제 먹으면 되는 거 아니야?”

“영양제만 먹는다고 건강해지냐….”

이때, 약국 마감 정리를 하고 온 영준이 치킨집으로 들어왔다.

영준은 단번에 지아와 영지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찾아 자리했다.

“치킨 아직 안 나왔어?”

“곧 나올 때 됐어. 오빠도 맥주 시켜야지?”

“그래, 한잔하자.”

영지가 테이블 벨을 누르자, 기순이 맥주를 따르고 있는 하은을 바라봤다.

“그거 다 따르고, 치킨 거의 다 튀겨졌으니까 이 치킨 들고 3번 테이블 좀 가봐. 부른다.”

“나도 바빠.”

“어차피 맥주 들고 나갈 거잖아. 얼른.”

이때, 치킨집으로 손님이 또 들어오자, 기순은 손님에게 향했다.

주문을 받고 돌아온 기순은 알람이 울리자, 주방으로 들어가 접시에 치킨을 담아 하은에게 전달했다.

“3번 테이블.”

저 테이블만 안 가려고 했는데, 아빠는 배달을 가고, 엄마는 정신 없이 일을 하는 걸 보고 있자니, 하은은 어쩔 수 없이 치킨을 들고 홀로 나갔다.

하은은 모자를 더 푹 눌러쓴 채, 3번 테이블,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갔다.

“치킨 나왔습니다. 뭐 더 필요한 거 있으세요?”

“저희 맥주 한잔이랑… 오빠, 어떻게 할까? 치킨 한 마리 더 시킬까?”

물어본 건 영지인데, 영준은 지아를 바라봤다.

“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난… 그냥 오빠 먹고 싶은 거로 시켜.”

“이건 어때?”

지아와 영준이 머리를 맞대고 메뉴판을 보면서 서로 먹고 싶은 거로 시키라고 하고 있자, 하은은 슬슬 열이 올랐다.

바빠 죽겠는데, 뭐 하는 거지?

하은은 이를 악물고 애써 친절하게 말했다.

“저기, 고르시고 다시 불러주시겠어요? 우선 맥주 한 잔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영준은 쳐다도 안 보고 대답을 하더니 지아 쪽으로 메뉴판을 밀었다.

하은은 아니꼽게 한 번 찌릿 째려보고는 맥주를 따르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다시 3번 테이블을 힐끔 쳐다봤다.

“와이프 놔두고 저 인간은 매번 왜 저러는 거야? 누가 보면 저 여자랑 부부인 줄 알겠네….”

하은은 지난번에 영준이 약국에서 자신을 쳐다보던 그 서늘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한 달 동안 본의 아니게 그를 근처에서 지켜본 모습과 너무 대조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자신만 빼고. 그리고 그 친절함은 저 꽃집 여자. 저 여자한테 더 특별히 친절했다.

진짜 웃기는 사람이네… 나한테는 그렇게 인상을 쓰면서, 저 여자한테는 왜 저렇게 다정한 거야?

어쩐지 기분이 나빠 혼자 툴툴대다가 하은은 입구 쪽을 쳐다봤다.

“문지석 얘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바빠 죽겠는데?”

하은은 괜히 지석에게 짜증을 내며 발을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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