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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28화 (28/94)

28화

볼일

“왜 지금… 나 뭐 실수한 거 있어요?”

지아의 말에 강현은 기가 막힌다는 듯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강현이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지아는 혼란스러움에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

“갑자기라….”

“네, 갑자기요.”

“볼일 다 본 거 아닌가? 당신이나 나나?”

“……?”

“볼일 다 봤으니 가보라고. 여긴 더 이상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니잖아.”

“강현 씨….”

“침대는 되도록 빨리 비워줬으면 좋겠어. 사람 불렀으니까 곧 청소 시작할 거야.”

“강현 씨….”

“가봐.”

차갑게 돌아선 강현이 다시 돌아서서 은서를 바라봤다.

“다신 보지 말자.”

“강현 씨….”

지아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했다.

그러고는 문을 닫고 나가는 강현을 바라보며 조여오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 * *

쾅-

넋이 나간 채로 강현의 집에서 나온 지아는 대문 앞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흑….”

도우미들과 지석이 집에 들어오는 바람에 쫓기듯 집을 나왔다.

강현은 아는 척도 하지 않았고, 제 모습은 누가 봐도 그와 밤을 보낸 행색이었다.

그들의 당황한 눈빛에 수치심을 느끼며, 지아는 간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집을 나와야 했다.

꽃가게에 도착해서도 지아의 멍한 상태는 이어졌다.

영지가 옆에서 뭐라고 묻는데도, 지아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강현의 생각으로 가득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너 진짜 뭐야? 괜찮아?”

처음엔 뭐라고 할 작정이었던 영지도 지아의 상태를 보고는 이젠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상태가 이런 건데? 너 이따가 수업할 수 있겠어?”

“해야지….”

“지아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해야 알지… 너 진짜 괜찮은 거야?”

이때, 지아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떨어지자 영지가 화들짝 놀랐다.

“야… 너 진짜 왜 이러는데… 답답해 죽겠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영지는 지아를 따라 눈물이 나려고 해 울먹였다.

“그 자식이 뭐라고 했어? 너한테 뭔 짓을 한 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했는데 네가 이런다고?”

“영지야….”

“응, 말해.”

“영지야, 나….”

“그래.”

지아는 참으려고 했지만, 곧 참을 수 없는 감정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 사람이 좋아….”

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한다면, 누구에게라도 이 마음을 얘기해야 이 답답한 가슴에 조금 숨 쉴 공간이 생길 것만 같았다.

막상 지아가 솔직하게 말하자, 영지는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야….”

“좋아… 너무 좋은데… 좋은데….”

“그래, 좋으면 된 거잖아. 그 사람도 너 좋아하니까 지금까지 함께 있었던 거 아니야?”

“모르겠어… 그 사람을….”

“뭐? 모른다니?”

“모르겠어… 같은 마음인 것 같아서 다가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 차갑게 대해… 그럼 또 난… 난….”

“무슨 말이야… 밤새 같이 있었다며? 그래놓고 그놈이 너 아니래?”

“다신 보지 말재… 나 어떡해?”

“뭐 그런 개자식이 다 있어?”

“몰라… 모르겠어….”

지아는 영지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고, 꽃가게로 들어가려고 했던 영준은 밖에서 그 모습을 보고는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지아가 지금 왜 우는지….

그 이유를 알아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

* * *

희숙이 집 앞을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건명이 피식 웃었다.

“지아 기다려?”

지아라는 말에 희숙은 발끈했다.

“무슨? 그리고 지아라니? 걔가 누군데?”

“적당히 해. 지금 지아 기다리는 거 맞잖아.”

“아니라니까….”

희숙은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다시 나와서 건명을 바라봤다.

“무슨 얘기 있었어요?”

“무슨 얘기?”

건명이 모르는 척하자, 희숙은 씩씩대며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그런 희숙을 보며 건명은 혀를 끌끌 찼다.

“하여간에 저 고집… 그나저나 오늘 진짜 무슨 일 있나?”

건명은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지 말래도 오던 애가 오늘은 무슨 일이지?

지아가 아무 말도 없이 안 오질 않을 텐데…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걱정이 밀려왔다.

건명은 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만 울릴 뿐 지아가 전화를 받지 않자, 소파에 누워 있던 건명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니, 왜 전화를 안 받아?”

건명은 지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이 바쁜가?”

잠시 후, 점심을 먹으면서도 희숙과 건명은 심기가 불편했다.

희숙은 지아가 왜 안 오는지 묻고 싶어서 건명의 눈치를 살폈고, 건명은 지아가 부재중을 확인했으면 분명 전화를 했을 텐데… 왜 전화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나 싶어서 밥이 잘 넘어가질 않았다.

대충 식사를 마치고, 희숙은 방으로 들어가고, 건명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건명은 다시 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만 울릴 뿐, 지아가 계속해서 전화를 안 받자, 점점 불안한 마음이 커진 건명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방으로 들어가 차 키를 챙겼다.

여전히 골이 나서 누워 있던 희숙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요?”

“지아가 몇 시간째 계속 전화를 안 받네… 가게도 전화를 안 받고.”

“……?”

“나갔다 올게.”

건명이 방문을 닫고 나가자, 잠깐 망설이던 희숙도 몸을 일으켰다.

* * *

수업이 어떻게 끝났는지… 어떤 정신으로 했는지 지아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겨우 버텼다. 겨우 버텨내고, 할 일을 다 하고 나니, 지아는 넋이 나간 채, 꽃가게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네, 어서 오세요.”

어제 아침 일찍 꽃을 포장해간 남자 손님이었다.

인상을 구긴 채, 어제 가져간 꽃을 그대로 들고 온 손님은 꽃을 거칠게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환불해 주세요.”

“네?”

“이 꽃 좀 보세요. 시들었잖아요.”

“손님, 어제 포장해 가신 손님 맞으시죠?”

“그런데요?”

“포장한 지 시간이 좀 지나서 그런 건데, 줄기만 잘라서 화병에 꽂으면 다시 살아날 거예요.”

“나보고 지금 화병을 들고 여자한테 고백하라는 겁니까? 그 여자한테 다 시든 꽃 내밀면서 화병에 꽂으라고 할까요?”

“손님, 이건 어제 포장해서 당연….”

“당연한 게 어디 있어요? 싱싱한 게 하루도 안 가면서 이 비싼 돈을 받아먹는 거예요? 환불해 줘요.”

“네?”

“왜요? 안 돼요?”

안 그래도 버틸 힘도 없는데, 시비를 거는 손님 때문에 지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네, 그럼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지아가 생각보다 순순히 환불을 해주겠다고 하자, 남자는 눈치를 보더니 확 태도를 바꿨다.

“아니, 내가 그냥 환불만 받으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안 되겠어요. 내가 지금 피해 본 거잖아요. 시간도 돈인 거고, 나 지금 이 꽃 때문에 왔다 갔다 기름도 썼다고요. 이 석유 한 방울 안 나오는 나라에서! 그러니까 피해보상비도 내놔요.”

“손님….”

“아. 못 해주겠다? 내가 인터넷에 리뷰 한번 올려봐요? 다 시든 꽃 팔고, 환불해 달라고 했더니 화병에 꽂으라고 했다고?”

이때, 건명이 가게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저씨는 누구예요?”

이때, 희숙도 가게로 들어왔다.

“뭐야?”

“엄마…?”

장사하는데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아서 참고 있던 건명과 희숙은, 밖에서 얘기를 듣고 있자니 참을 수가 없어 가게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희숙은 남자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어디에서 감히 진상질이야?”

“진상? 손님한테 진상? 당신이 여기 사장 엄마야?”

그 물음에 희숙은 잠깐 지아를 돌아보더니 남자를 쏘아봤다.

“그래, 내가 엄마다.”

“뭐야? 엄마, 아빠한테 이른 거야? 이 사장 진짜 웃기네?”

비아냥거리는 남자를 건명이 상대하려고 나서는데, 희숙이 손으로 막아섰다.

“당신 가만히 있어.”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 턱을 들어 올린 희숙은 남자를 내리깔며 바라봤다.

“웃겨! 어디서 행패야? 너 뭔데 우리 딸한테 뭐라고 해?”

“아, 나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거 인터넷에 올려야겠네.”

남자가 협박하듯이 휴대전화 화면을 켜자, 희숙이 콧방귀를 뀌었다.

“아, 올려. 올려봐.”

“뭐라고요?”

“올리라고. 나도 당신 진상이라고 올릴 테니까.”

“……?”

희숙의 드센 모습에 남자는 당황했고, 지아도 건명도 눈을 껌뻑이며 바라봤다.

희숙은 덩달아 휴대전화 화면을 켜고는 남자를 노려봤다.

“집 어디야? 회사는?”

“아줌마가 그거 알아서 뭐 하게요?”

“너 이런 진상인 거 내가 거기 가서 밝히려고 그런다. 왜?”

“뭐, 뭐라고?”

“내가 못 할 것 같니?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내 딸이 착해 보이니까 물로 본 모양인데… 너 내가 정말 진상이 어떤 건지 보여줘? 어디서 전날 사간 꽃을 가져와서 시들었다고 환불을 해달라고 해?”

“아, 진짜 되는 일 없네… 여자한테 까인 거도 짜증 나는데 이런 진상 아줌마까지….”

남자의 혼잣말을 들은 희숙이 눈을 부라렸다.

“잠깐!”

“왜요?”

“여자한테 뭐를 해? 차여?”

“누, 누가요? 누가 차였다는 거예요?”

“여자한테 고백하려고 꽃 샀다가 차이니까 환불하는 거네.”

“이 아줌마 뭔데 소설을 써?”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 나 지금 이 휴대전화로 녹음 다 했는데?”

“뭐야?”

남자는 휴대전화를 뺏으려고 희숙을 향해 달려들었고, 이를 건명과 지아가 말리려는 순간,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하시죠.”

그 목소리에 꽃가게에 있던 사람들 모두 문 쪽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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