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걱정보다 앞서는 반가움
“형.”
멍하니 있는 강현을 보며, 지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비 맞으면서 뭐 하는 거야? 왜 그래?”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비를 막고 있던 지석은 강현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도대체 뭘 보길래….”
지석은 같은 우산을 쓰고, 걸음을 옮기는 남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때, 남녀가 서로 마주 보느라고 고개를 돌린 순간, 그들의 옆모습을 보고 지석은 깜짝 놀랐다.
“저, 저 사람은….”
지석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강현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때,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정액 검사에서 정액이 발견됐다는 문자였다. 정관수술이 잘못 됐다는 뜻이었지만… 이제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옆에 다른 남자가 있는 걸 확인했으니까.
* * *
꽃꽂이 수업을 마친 지아는 예약된 꽃 주문을 처리하고 가게를 정리했다.
이때, 영지가 꽃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짐 가지러 몇 시에 간다고 했지?”
“이제 출발하려고. 약국은 어쩌고 왔어?”
“화장실 간다고 메모 써놨어. 근데 벌써 출발해?”
“아, 거기 가기 전에 꽃시장 가서 부자재 살 게 좀 있어서.”
“그것도 짐 많아?”
“아니, 조금.”
“오늘 짐 옮기는 거 같이 못 가서 어떡해?”
“혼자 할 수 있어. 사람 불렀잖아.”
“네 전남편은? 집에 있대? 가면 보는 건가?”
“아니, 집에 없을 거야. 이 시간에 집에 있을 사람이 아니야. 넌 왜 자꾸 그 사람이 있는 게 궁금해?”
“짐 빼는데 얼굴 봐야 네 마음만 불편할까 봐 그러지. 없다니 잘됐네. 그나저나 나도 같이 가야 하는 건데….”
영지는 지아가 행여 예전 집에 갔다가 기분이 다운될까 봐 같이 가려고 했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 속상했다.
그런 영지의 마음을 알고 있는 지아는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나 괜찮아. 넌 약국 지켜야지. 오늘은 오빠도 없는데, 약국 닫을 순 없잖아.”
“그러니까… 라디오 생방송 하는 날이 하필 오늘이어서. 오빠도 걱정되는지 또 전화했더라.”
“오빠도 참, 내가 어린앤가… 근데 오빠는 진짜 그런 방송 같은 건 숫기 없어서 안 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들어 보면 진짜 잘한다니까.”
“우리 오빠 다 내숭이야. 그런 사람들 있잖아. 못한다고 하면서 막상 시키면 다 잘하는 사람.”
“그러니까.”
“우리 오빠가 연애 빼고 다 잘하지.”
“그건 너랑 똑같네.”
지아가 웃음을 참으며 빤히 바라보자, 영지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야! 너 진짜… 안 되겠다.”
“뭐가?”
“오빠를 위해서라도 간판을 꼭 바꿔야겠어. 남매 약국이라고.”
“왜? 영준약국 아니고 영지약국이라서 좋다며? 네가 사장 같다고.”
“간판만 영지면 뭐 해. 오빠가 사장인 거 저기 지나가는 강아지도 다 아는걸.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남매약국이라고 할걸.”
“그럼 바꾸자고 해.”
“오빠가 간판값 아깝대. 뭔 상관이냐고.”
“그럼 어쩔 수 없네.”
“어쩔 수 없긴… 다시 말해 볼 거야.”
청소를 다 마무리한 지아는 가방을 챙겨 들고는 투덜대는 영지의 엉덩이를 팡 한 대 때렸다.
“나 갔다 올게.”
“이 생각 저 생각 곱씹지 말고, 들고 나올 짐만 챙겨서 얼른 나와. 알았지?”
“알았어.”
“빨리 와.”
“꽃시장 들렀다 갈 거라니까.”
“그래도 빨리 와.”
“네.”
가게 문을 닫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지아의 뒷모습을 보며 영지는 중얼거렸다.
“신경 또 엄청 쓴 거 봐… 으이그… 여기 이 남자나, 저기 저 여자나… 도대체 뭐 하러 귀찮게 사랑을 하는 거야? 나 봐. 얼마나 편해. 얼마나!”
영지는 발을 구르고, 약국으로 향했다.
* * *
“이거만 옮기면 되나요?”
“네.”
생각보다 옮길 짐은 없었다.
가구들은 모두 결혼할 때부터 이 집에 있던 것이었다. 강현은 가져가라고 했지만, 이사 갈 집에 가져가봤자, 너무 커서 방만 좁아지고, 어울리지도 않았다.
이렇게 화려한 대궐 같은 집에나 어울리는 최고급 가구들이었으니까.
지아는 꽃꽂이 방에 있는 소파와 작업대, 그리고 안방에 있는 화장대 같은 강현이 쓸 수 없는 것들만 챙겨 트럭에 실었다.
이사하는 날까지 보관을 신청했기 때문에 아저씨들은 짐을 싣자마자 확인만 거치고 먼저 떠났다.
지아는 짐이 빠진 곳을 치우기 위해 혼자 남았다.
도우미들의 손길을 타는 집이었기 때문에 워낙 깨끗해서 가구를 뺏는데도 별로 치울 게 없었다.
정리를 마친 지아는 집을 나서기 전에 짐이 빠진 곳을 둘러봤다.
이제 진짜 이 집에는 올 일이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니까, 눈에 공간을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강현이 오려면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겠다, 지아는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집을 둘러봤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생각보다 이 집에서 강현과의 추억이 많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이 큰 집에 늘 혼자만 있게 만든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공간 공간마다 그와 관계를 가진 잔상이 떠올랐다.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아주던 남자였다.
말은 차가웠지만, 뜨겁게 안아주던 남자였다.
그 온도 차에 참 상처 많이 받았었는데, 지아는 순간 그립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영지가 빨리 오라고 한 건가?”
스스로도 기가 막혀 지아는 헛웃음을 짓고는 강현의 방 앞에 섰다.
집을 다 둘러보고, 안 둘러본 공간이라고는 이제 강현의 방만 남았다.
같이 살 때도 몇 번 들어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관계를 나눌 때 몇 번 들어가 봤을 뿐, 혼자서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지아는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시 올 일 없는 곳이었다. 이 방에도 추억은 있었다.
이곳을 눈에 담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아는 문고리를 잡고 잠시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고는 손에 힘을 줬다.
살며시 문을 연 지아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침대에 강현이 누워 있었다.
‘저 사람이 왜 이 시간에….’
강현은 출근할 때부터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본부장님, 괜찮으세요?”
“문 실장, 남은 일정들 좀 정리해줘. 들어가야겠어.”
안 그래도 바쁜 일정에 치여 과도한 업무에 시달렸는데, 밤새 한숨도 잠을 청하지 못한 탓에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지석이 출근할 때부터 상태를 보고 병원에 가자고 할 정도로 아픈 기색이 역력했지만, 강현은 그래도 오늘 처리해야 하는 일은 마무리해야 된다며 고집부렸다.
결국엔 완벽하게 일을 마무리한 그를 보며, 지석은 혀를 내둘렀다.
“병원으로 모실까요?”
“아니, 집으로 갈게.”
“그럼 집으로 주치의를 보내겠습니다.”
“어, 그렇게 해줘.”
강현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챙기자, 지석이 따라나섰다.
그러자 강현이 지석을 향해 돌아섰다.
“할 일 있잖아.”
“모셔다드리고 처리하겠습니다. 댁에 가서 해도 되고요.”
“아니야. 윤 기사 대기 시켜. 나 혼자 갈게.”
“괜찮으시겠습니까?”
“김 박사님 부른다며? 그 정도면 됐어. 쉬고 싶어.”
“네, 알겠습니다.”
지석이 윤 기사에게 호출을 하자, 강현은 혼자 내려가겠다며 손짓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집에 도착한 강현은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는데도 머리가 아파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은서와 그 남자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짓밟고 있었다.
자꾸만 은서가 그 남자를 보고 미소를 짓던 장면이 떠올랐다.
떨쳐내려고 해도 떨쳐낼 수가 없고,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정관수술이 잘못됐다지만, 윤은서의 배 속에 있던 아이가 그 남자의 아이일지, 자신의 아이일지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 확실한 건, 그녀의 곁에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거였다.
솟구치는 분노에 속은 뜨겁게 열이 오르고 있었다.
결국, 강현은 주치의가 도착해 처치를 받고 나서야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최근 잠을 제대로 청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약의 힘을 빌어서라도, 잠을 청하고 나니 강현은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강현이 지금 왜 침대에 누워 잠들었는지 모르는 지아는 그를 보자마자 몸이 굳었다.
예상치 못한 그림이었다.
지아는 그를 보는 순간, 걱정보다 반가움이 앞섰다는 게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반가움 뒤에 걱정이 몰려왔고, 덜컥 겁이 났다.
이혼해 놓고, 짐만 가지고 나간다고 해놓고, 그의 방에 함부로 들어온 거니까.
그에게 들키기 전에 얼른 이 방을 나가야 했다.
지아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기며 돌아섰다.
그때였다.
강현의 신음이 들렸다.
“……?”
지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등지고 선 채 귀를 기울였다.
신음이 심상치가 않았다.
앓고 있는 신음이었다.
어디 아픈가?
지아는 작게 숨을 삼키고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를 향해 다가갈수록, 인상을 쓰고 있는 그가, 땀에 젖어 있는 그가, 그의 열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아 지아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딱 보기에도 그냥 잠든 모습은 아니었다.
침대 옆 협탁 위에 약이 있는 거로 봐서는 주치의도 다녀 왔다 간 게 분명했다.
지아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어머….”
지아는 그의 볼, 그의 목에도 손을 가져다 댔다.
손이 델 정도로 몸이 뜨겁자, 화들짝 놀란 지아는 얼른 거실로 나갔다.
미지근한 물로 적신 수건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온 지아는 강현의 이마와 볼, 목, 그의 쇄골을 연신 닦아냈다.
그래도 열이 안 떨어지자, 지아는 그가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그의 잠옷 단추를 열었다.
그의 옷을 벗기는 게 살짝 망설여지긴 했지만, 지금 이럴 시간조차 없다고 판단한 지아는 그의 열을 내리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옷을 벗기고 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아내는데, 그 순간이었다.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어떡해….”
진동 소리에 강현이 깰까 봐 눈치를 살피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가 뒤척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