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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25화 (25/94)

25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내가 나갔다 올게.”

수용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자, 하은은 강현의 접시 위로 치킨을 올렸다.

“자, 차 본부장님께서도 치킨 좀 드시죠?”

“왜 이래?”

강현은 미간을 좁히며 경계했고, 지석도 팔을 뻗어 차단했다.

“본부장님, 해롭습니다. 좀 멀리하시죠.”

“동생아, 넌 좀 빠져줄래? 나 지금 사회생활 중이잖아.”

하은은 지석을 찌릿 째려보고는 강현을 향해 자본주의 미소를 날렸다.

“그래서 차 본부장님, 저는 재계약하는 걸까요? 제가 얼마 전에 배탈이 나서 마침 다이어트가 되었거든요. 비주얼이 더 좋아졌어요.”

하은이 눈을 반짝이자, 강현이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누나는 진짜 여전하네.”

“그럼 내가 어디 가니? 얼른 대답해. 그리고 나 이번에 영화 잘됐으니까 계약금 올려줘. 안 그러면 나 다른 데로 갈 거야.”

“누나는 이 자리에서 꼭 일 얘기해야겠어?”

지석이 타박하자, 하은은 치킨을 뜯으며 자세를 편하게 바꿨다.

“겸사겸사하는 거지. 차 본부장님, 어떻게 할까요? 제 얘기 들으셨죠?”

“네, 잘 들었습니다. 문 실장, 다른 배우 있는지….”

강현이 장난치자, 하은이 인상을 구겼다.

“야! 스캔들 난 사이끼리 이러기 있어?”

“누나, 내가 인생에 오점이 몇 개 없는데… 그게 그중의 하나야. 안 떠오르게 해줄래?”

강현의 진지한 말투에 테이블에 있는 식구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손님을 받고 다시 자리에 앉은 수용이 하은을 놀렸다.

“넌 이기지도 못할 거 맨날 강현이한테 까불어?”

“아빠, 지금 들었지? 엄마도 들었지? 얘가 지금 나보고 오점이라고 한 거?”

“너도 오점이긴 하지. 처녀가 유부남이랑 스캔들이 뭐야? 내가 그때 생각하면 속상해서… 강현이 와이프는 또 얼마나 속상했을 거야. 그러니까 둘 다 행동 조심해. 친하다고 너무 편하게 다니면 다들 오해하니까.”

강현은 와이프도 속상했을 거라는 기순의 말에 은서가 떠올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강현의 눈치를 살핀 하은이 기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엄마….”

“왜?”

이때, 수용이 기순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고 한마디 더 거들었다.

“엄마 말 틀린 거 하나 없다. 다 큰 성인남녀가 너무 격 없이 지내는 거, 그거 좋지 않아. 그리고 강현아.”

“네.”

“네 처 좀 언제 한 번 데리고 오라니까 왜 이렇게 안 데리고 와?”

“그래, 결혼식도 비공개로 해서 네 처 얼굴 한 번을 못 봤구만. 스캔들 때문에 일부러 안 데리고 오는 거야?”

기순이 걱정스럽게 묻자, 수용이 얼른 말을 보탰다.

“그런 거라면, 우리가 제대로 사과도 하고, 맛있는 거 많이 해줄 테니까 데리고 좀 와 봐.”

이때, 지석이 헛기침을 했다.

“음! 맥주가 식네.”

지석이 말을 돌리려 하자, 강현이 애써 괜찮은 표정을 지으며 기순과 수용을 번갈아 바라봤다.

“저 이혼했습니다.”

순간 잠깐 정적이 흐르고, 탄식이 흘러나왔다.

“뭐?”

“아, 아니….”

기순과 수용이 놀라서 벙찐 표정을 짓고는 지석을 바라봤다.

지석은 강현의 눈치를 살피고, 헛기침했다.

“음! 내가 말 안 했나?”

기순은 안타까움에 강현의 팔을 쓸어내렸다.

“왜?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요.”

기순이 강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자, 수용이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맥주잔을 들었다.

“괜찮아. 사람이 실수도 하고 사는 거지. 앞으로 잘하면 된다. 한잔해.”

강현은 잔을 들어 수용과 잔을 부딪쳤다.

이혼 소식으로 분위기는 조금 가라앉았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언제나 만나면 유쾌한 지석의 가족들이었으니까.

강현은 이런 가족을 알게 된 것에 늘 감사함을 느꼈다.

인연은 정말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고, 강현과 지석의 만남도 그랬다.

군 시절, 강현은 후임이었던 지석이 선임으로부터 이유 없는 괴롭힘을 당할 때 지켜준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지석은 강현을 따랐다.

괜히 군기를 잡겠다고 후임들을 괴롭히지도,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따르라고 복종을 강요하지도 않는 강현에게 지석은 반하고 말았다.

남녀 간에만 반하는 게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반할 수 있다는 걸 지석은 그때 알았다.

지석은 강현에게 매력을 느꼈고, 형이 없던 지석은, 형이 있다면 강현 같은 형이 갖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석은 자신의 가족들이 면회를 왔다며 강현을 억지로 끌고 가다시피 해서 데리고 나갔다.

강현은 군시절 당시 성문그룹도 밝히지 않고, 누구 한 명 면회도 오지 못하게 해놨는데, 지석은 이걸 가지고 오해하고 있었다.

강현이 집도 절도 없이, 가족도 없는 천애 고아라고 생각한 거였다.

지석은 모범적인 선임이자, 닮고 싶은 형인 강현을 가족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오래 알고 싶은 형이었으니까.

결국, 강현은 지석에게 끌려가 그의 부모님인 기순과 수용을 만났다.

지석이 얼마나 제 얘기를 많이 했는지 기순과 수용은 강현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고, 오래전부터 봐왔던 사이처럼 친근하게 대해줬다.

그날 강현은 처음으로 면회를 나간 거였고, 군에 입대한 이후 처음으로 치킨집의 양념치킨을 먹은 날이었다.

양념치킨이 원래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강현은 그때 지석의 가족들과 함께 먹었던 양념치킨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치킨 말고도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정성스러운 집밥도 함께 먹었는데, 오랜만에 과식을 해서 배도 불렀지만, 그 이상의 것이 채워진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로, 기순과 수용은 지석을 보러 올 때면 늘 강현을 같이 불렀다.

마치 그 집의 큰아들이 된 기분이었다.

제대할 때, 지석의 부모님이 데리러 왔을 정도였으니까.

심지어 제대 후, 강현은 지석의 방에서 한동안 지냈었다.

계획대로라면 제대 후 바로 유학길에 올라야 했지만, 강현은 몰래 일정을 미루고 기순과 수용의 집으로 들어갔다.

강현이 갈 데가 없는 줄 알고 기순과 수용이 먼저 제안한 거지만, 그들의 제안을 끝까지 거절하지 않은 건 유학 전에 따뜻한 가족의 정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하은을 집에서 처음 만났다.

하은은 그때만 해도 모델학원을 다니는 모델지망생이었는데, 텔레비전 몇 번 출연한 거로 누가 자신을 알아볼지 모른다며 연예인 병에 걸린 상태였다.

그래서 동생 면회도 한 번 안 온 하은을 강현은 집에서 처음 만난 거였다.

하은은 강현이 빈대인 줄 알고 과할 정도로 편히 대했고, 강현은 그게 좋았다. 편하게 대해주는 게 진짜 누나인 것 같아서, 진짜 이 집의 아들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았었다.

그렇게 강현은 지석의 가족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그러니 하은은 정말 친누나나 다름없었다.

근데 그런 누나랑 스캔들이 나다니….

강현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소름이 돋았다. 너무 말도 안 돼서.

오랜만에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웃고 떠들다 보니 시간을 훌쩍 지나 있었다.

* * *

장을 봐서 집에 들어가는 길, 영지는 지아를 어깨로 툭 밀었다.

“야, 너 아까 말이야.”

“아까 뭐?”

“너 왜 아까 부동산 사장님이 남자 있냐고 묻는데 남자 있다고 했냐?”

영지의 질문에 지아는 시선을 피해 앞을 돌아봤다.

“그냥… 남자 있다고 하는 게 편하잖아. 나중에 또 남자 소개시켜 주겠다는 말도 안 하실 거고.”

“그게 다야?”

“그럼 뭐?”

이때, 비가 후두둑 떨어졌다.

“아, 비다.”

영지와 지아는 얼른 뛰어서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휴, 다행이다. 집 앞에서 딱 내리네….”

“그러게. 운 좋았다.”

이때, 옷에 묻은 빗방울을 털면서 숨을 고르던 영지가 무언가 떠올라 화들짝 놀랐다.

“아, 어떡해?”

* * *

늦은 밤, 바깥 공기를 맡고 싶었던 강현은 지석과 함께 치킨집을 나와 밖으로 나갔다.

“어? 비가 좀 그쳤네?”

“그러게.”

장대비가 보슬비로 바뀌자, 지석은 건너편 편의점을 보며 고갯짓했다.

“형, 나 편의점 좀.”

“갔다 와.”

“같이 안 가?”

“혼자 갔다 와. 난 여기 있을게.”

“그래. 금방 갔다 올게.”

지석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건너편 건물의 편의점으로 달려갔고, 강현은 주변을 돌아봤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가, 못 보던 가게들이 생기고 풍경도 달라져 있었다.

그때였다.

근방에서 들리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강현은 고개를 돌렸다.

“건너지 마. 내가 갈게.”

건너편을 향해 소리친 남자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보슬비를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고, 신호등의 불빛이 바뀌자,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확인을 하느라 고개를 돌렸다.

‘저, 남자는?’

아는 얼굴이었다.

사진 속… 윤은서의 옆에 있던 그 사진 속 남자였다.

맞다. 그 남자다.

병원에서 봤던, 윤은서에게 달려가던 그 남자.

예상치 못한 만남에 놀란 강현은 바로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뒤늦게 남자를 따라 길을 건너려고 걸음을 옮겼는데, 강현은 곧 걸음을 멈췄다.

남자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우산을 드는데… 윤은서?

윤은서였다. 분명 윤은서.

단정한 단발머리가 아니라,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었지만, 멀리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윤은서는….

남자는 은서가 들고 있는 우산 속으로 들어가더니,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우산을 뺏어 들었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예쁜 미소를 보이자, 남자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내 우산 속으로 숨어버린 두 사람을 보며 강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강현은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때, 편의점에 갔던 지석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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