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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24화 (24/94)

24화

남자 있어?

강현을 더 감싼다고 할까 봐, 그 여자의 아들이라 더 챙긴다고 할까 봐, 행여 그러다가 강현이 경옥에게 미움과 구박이라도 받을까 봐, 차 회장은 일부러 강현의 일에서, 아들들의 일에서, 집안일에서 멀어지려고 애썼다.

경옥이 하는 대로 맡겼다. 그게 아들 강현을 위한 일이라고 여겼으니까.

경옥은 이 점을 이용했다.

병현이 사고를 칠 때마다, 모자라게 굴 때마다, 차 회장이 갖고 있는 이 미안함을 이용해 제 아들을 감쌌다.

남편의 혼외자식인데도 차별 없이, 아니 오히려 제 배로 낳은 자식보다 더 감싸고 사랑으로 보듬은 아내, 결국 누구보다 잘나고 훌륭하게 키워낸 아내가 되어 차 회장이 더 미안함을 갖도록.

실제로 차 회장도 경옥이 그런 아내라고 여겼다. 강현이 딱히 얘기한 적이 없었으니까. 겉보기는 그랬으니까.

하지만 결국 가만히 들어 보면 경옥은 아쉬울 때마다, 불리할 때마다 강현 때문에 병현을 신경 쓰지 못했다는 걸 은근히 어필하며 동정심을 일으키고 있었다.

강현은 잘해 줘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놈으로 만들고.

그걸 차 회장만 몰랐다.

차 회장은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앞에 앉아 있는 경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왜 또 그런 표정이야?”

“이번 한 번만 눈감아줘요. 난 병현이한테 미안해서 화도 못 내요… 알잖아요… 엄마 정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경옥이 눈물짓자, 차 회장은 한숨을 또 크게 내쉬었다.

“알았으니까 울지 마.”

“내가 강현이 그렇게 이혼하고… 이번 일로 병현이까지 그럴까 봐….”

경옥의 말에 차 회장은 발끈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덕이 없나 봐요… 나 때문에 우리 아들들이….”

“그런 소리 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강현이 잘 살고 있는데 왜 그래?”

“내가 요새 또 강현이 신경 쓰느라 병현이를 못 돌봤더니 이런 일이… 내 몸이 두 개면 좋겠어요. 다 내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아들들 미워하지 말고, 날 미워해요. 날….”

“거참 쓸데없는 소리. 다 큰 놈들 언제까지 뒤치다꺼리하면서 그렇게 끼고 살 거야? 그리고 내가 왜 내 아들들을 미워하고 당신을 미워해. 당신 그거 고치랬잖아. 자기 탓이라고 하는 거.”

“제 탓인 걸요… 제가 은서를 그날 괜히 불러서….”

“어허! 좋은 일 하자고 불렀다가 그렇게 된 걸 왜 당신 탓이라고 생각해?”

“얼마 전에 강현이가 저 보는 눈빛 못 봤어요… 절 원망하는 거 같아요… 제가 그날 은서 불렀다고….”

경옥이 고개를 떨구자, 차 회장이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놈이 그랬어?”

“뭐라고 하지 마세요. 누구라도 잡고 원망하고 싶겠죠… 절 원망해서 그나마 마음이 편해진다면… 난 괜찮아요… 그런데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속상해요, 정말….”

“그래도 내가 당신한테 잘하라고 하면 알았다고는 하는데….”

“당신 앞에서는 당연히 알았다고 하겠죠… 아니에요, 제 욕심이죠. 강현이 마음 편해질 때까지 기다릴게요… 다 제 잘못이에요.”

“잘못했다는 말 그만하래도… 당신은 어떻게 나이가 들어도… 내 친구 와이프들은 다 독해졌다는데… 당신이 그 와이프 반만 닮았으면 좋겠다고 했어, 내가.”

차 회장이 예상했던 대로 반응하자, 경옥은 고개를 내려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하는 걸 겨우 참았다.

“당신도 참….”

“속상해 마. 병현이는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잘 얘기해 놓고, 강현이는… 다시 결혼시켜야지.”

“네?”

이건 아닌데? 이건 시나리오에 없던 건데?

경옥이 놀라서 눈을 키우자, 차 회장은 뭘 놀라냐는 듯 여유롭게 말을 이어갔다.

“강현이를 사위 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마치 이혼한 거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말이야.”

얘기가 계속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자, 경옥은 당황했다.

“누구요? 누구랑 결혼 시키시게요?”

“누구랑이든 결혼은 시켜야지. 얘기는 들어오는데… 아직 정해진 건 없으니 나중에 얘기하지. 이제 나가 봐야 돼.”

“네….”

힘 있는 집안의 여자와 결혼하면 안 되는데… 경옥은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짓깨물었다.

* * *

오피스텔 곳곳을 꼼꼼히 살피던 지아는 부동산 사장님을 바라봤다.

“지금 제가 가진 예산으로는 절대 테라스 있는 집은 안 되는 거예요?”

“절대는 아니지. 원룸 단지에 가면 작은 테라스 있는 집이야 있는데… 근데 여자 혼자 살기에는 위험해. 원하는 테라스도 아닐 테고. 혼자 산다면서요?”

“네.”

“여기가 보안도 잘되어 있고, 여자 혼자 살기에는 이 오피스텔이 맞아요.”

지아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집을 한 번 더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집으로 계약할게요.”

“그래요, 잘 생각했다니까. 여자 혼자 살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어요.”

“네….”

정원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조그마한 테라스라도 있어서 집에서 식물을 가꾸고 싶었는데, 혼자 힘으로 집을 마련하려다 보니 가진 예산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지아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부동산 사장님을 따라 부동산으로 향했다.

잠시 후, 부동산에 도착하니 영지가 먼저 와 있었다.

“집은 잘 봤어?”

“빨리 왔네?”

“궁금해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거기로 하기로 했어?”

지아는 영지의 옆에 앉아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응. 아무래도 보안이 더 중요한 거 같아서.”

“그래, 잘했어.”

부동산 사장님은 주스를 두 병 가져오면서 말을 보탰다.

“친구랑 집도 가깝고, 그만한 집이 없다니까 그러네. 요즘 전세 매물이 얼마나 귀한데, 잘 구한 거예요. 이거 마셔요.”

“감사합니다.”

부동산 사장님은 주스를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제자리로 돌아가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지는 지아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보증금 좀 깎아준대?”

“얘기해 본다고 하셨어.”

통화를 끝내고 테이블로 다가온 부동산 사장은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하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백만 원이나 깎아주신다네? 해본 말인데?”

“우와,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이사비용은 빠졌죠?”

“네.”

“내가 다시 말하지만, 이 댁 주인이 너무 좋아요. 전셋값도 잘 안 올리고, 터치도 많이 없고. 진짜 잘 구하는 거야.”

“네, 그런 것 같아요.”

부동산 사장님은 영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약국이 지금 친구 쫓아내는 거야?”

“어머, 무슨 소리를요… 얘가 나가는 거예요. 같이 살자고 얼마나 했게요.”

“맞아요, 제가 나가는 거예요.”

“약국이 눈치를 줬나? 꽃집한테?”

영지는 발끈하며 부동산 사장을 찌릿 째려봤다.

“사장님, 제가 어디 그럴 사람이에요?”

“알지, 알지. 장난친 거야.”

부동산 사장님이 장난스럽게 눈짓을 하자, 지아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제가 짐이 많아서 같이 못 살아요. 이제 큰 짐 가져올 때가 돼서.”

강현이 외국에 가 있는 동안은 짐을 뺄 이유도, 뺄 수도 없었던 지아는 그동안 영지의 집에서 지냈었다.

그가 없는 집에 혼자 들어가기 싫어서 일부러도 짐을 빼지 않았던 거였는데, 이젠 짐도 빼야 하고, 언제까지 영지한테 신세를 질 수 없었던 지아는 이사를 결심했다.

“나 혼자 사는 거 처음이라 좀 떨린다.”

“부럽다.”

영지가 부러운 눈빛을 보내자, 지아가 고개를 저었다.

“넌 평생 오빠가 안 놔줄 거니까 꿈 깨.”

“알고 있거든. 나갈 거면 결혼해서 나가라는데… 그냥 못 나가지 싶다.”

영지가 입을 삐쭉이자, 부동산 사장님이 무릎을 탁 쳤다.

“아, 치킨집 아들!”

“네?”

“둘이 나이대가 맞을 거 같은데?”

“뭐가요?”

“치킨집 사장님이 아들 결혼시키고 싶어 하던데… 약국이 소개 한 번 받아보는 거 어때?”

“네? 만약 잘되면 치킨집 사장님이 시부모님 되는 거잖아요?”

“왜? 안 돼?”

“저 거기서 술 너무 마셔서 안 돼요. 단골집은 건들지 마시죠, 사장님.”

“아, 그래? 그럼 우리 꽃집이 소개받을까?”

부동산 사장님은 진심이었는지, 지아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래, 약국보다 꽃집이랑 더 잘 어울리겠네. 치킨집 사장님 아들 대기업 다녀. 돈도 아주 잘 번다더라고. 우리 같이 이렇게 장사하는 사람들은 월급 따박따박 가져다주는 남편을 만나야 좋은 거야. 어떻게… 생각 있어? 있으면 내가 말하고.”

“괜찮아요.”

“진짜 치킨집 아들 괜찮다니까? 대기업 다니는 데다가 얼굴도 아주 잘생겼어. 키도 훤칠하고. 요즘 아가씨들 좋아하는 그 뭐냐… 비율, 그래 비율도 좋고….”

부동산 사장님이 신나서 말하는데, 지아는 얼른 거절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왜? 혹시 남자 있어?”

“네? 네, 뭐….”

“남자가 있어? 에이… 아쉽네… 치킨집 사장님이 중매 서면 크게 한턱 쏜다고 했는데….”

부동산 사장님은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고, 영지는 남자가 있냐는 말에 얼버무리고는 딱히 대꾸도 안 하는 지아를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봤다.

* * *

치킨집 쪽방에 강현과 지석, 하은이 앉아 있고, 기순이 치킨을 들고 테이블에 올려놨다.

“이게 얼마 만이야? 자주 좀 오지. 이렇게 앉으니까 둘이 군대 있을 때 생각나네?”

“엄마는 언제 적 얘기를….”

지석이 투덜대는데, 수용이 시원한 생맥주를 두 손 가득 들고 들어왔다.

“원래 옛날얘기가 재미있는 거야. 그렇지, 여보?”

“맞아요.”

“자, 오랜만에 한 잔씩 하자.”

수용이 테이블에 생맥주를 내려놓자, 거품이 흘러내렸다.

맥주 거품이 아까운 하은이 본능적으로 입술을 가져다 대자, 지석은 고개를 저으며 강현을 바라봤다.

“형, 누나는 진짜 천생 배우 아니야?”

“천생 배우지.”

“저 모습을 남자들이 몰라. 변기 막혔던데 그것도 누나 짓이라며?”

“야, 넌 더럽게.”

“그 더러운 게 네 거다, 이놈아.”

수용이 맥주잔을 들자, 모두들 잔을 들어 건배했다.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고 잔을 탁 내려놓는데, 기순이 하은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너 진짜 마셔도 돼?”

“엄마, 나 이제 괜찮다니까?”

“안 먹었으면 좋겠구만.”

“나 쉬잖아. 잔소리는 그만.”

기순이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삼키고는 하은의 접시로 오븐 치킨을 올려놨다.

“그럼 덜 기름진 거라도 먹어.”

“알았어.”

이때, 밖에서 손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 오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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