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후회를 알면서도 미치는
“진짜요?”
“네. 와이프가 갑각류 알레르기인데도, 내가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요. 애 엄마한테 혼나겠네. 내가 기억했습니다, 이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갑각류 알레르기가 많이 심해요?”
“네, 뭐… 별로 안 심해요.”
지아가 미안한 마음에 대충 얼버무리자, 영지가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안 심하긴… 얘 이거 먹으면 숨도 제대로 못 쉬어요. 온몸에 두드러기 올라오고요.”
“아… 우리 와이프도 그렇게 심한데… 큰일 날 뻔했네. 알레르기 같은 건 꼭 말을 해줘요. 말 안 해줬으면 맨날 서비스로 새우튀김 줄 뻔했네.”
수용의 말에 영지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봐! 사장님, 저 말 잘했죠?”
“그럼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수용이 테이블을 떠나자, 영준이 눈을 흘겼다.
“하여간 저 넉살….”
“뭐!”
영지는 영준에게 입을 삐쭉이고는 좀 전에 하던 얘기를 이어갔다.
“아까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지?”
“됐어. 재미없어 그 얘기.”
“아니, 재미있거든. 아, 나 생각났다. 그래서 처음에 오빠가 준우 오빠한테 형! 형! 이랬잖아. 며칠 동안을 형이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한 살 동생인 거 알고, 오빠 그때 준우 오빠랑 며칠 말 안 했더라?”
영지가 놀리자, 영준이 눈을 흘기며 맥주를 들이켰다.
“넌 그 얘기 지겹지도 않냐?”
“재미있잖아. 맨날 따라다니면서 형형 그랬는데 동생이었어. 풉!”
“그만해라. 준우 걔가 노안인 걸 어떡하냐?”
“에이, 어린애한테 무슨 노안? 노안이 아니라, 준우 오빠가 많이 성숙한 편이긴 했지. 난 어릴 때 기억 다 흐릿한데, 준우 오빠 잘생긴 건 기억나. 그렇지, 지아야?”
“뭐… 근데 이젠 얼굴도 솔직히 잘 기억 안 나….”
“하긴, 진짜 오래되긴 했다. 우리 준우 오빠 나온 사진도 단체 사진 찍은 거 그거 딱 한 장 있잖아.”
“맞아. 그마저도 얼굴 너무 조그맣게 나와서 잘 보이지도 않아. 오빠는 잘 살고 있겠지?”
“잘 살겠지. 좋은 집에 입양 갔다고 했으니까.”
영준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영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툭 밀었다.
영준은 영지가 왜 어깨를 밀었는지 알지만, 시치미를 딱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잠깐 화장실.”
영준이 화장실로 가자, 영지는 지아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아까 다녀온 거 어떻게 됐어?”
“뭐가 어떻게 돼?”
“진짜 그 비서만 나왔어?”
“그럼?”
“네가 집 앞까지 갔는데 안 나와봤다고?”
“어.”
“진짜 독하네. 진짜 개자식이야. 네 전남편.”
“됐어. 이제 안 볼 사람인데 욕해서 뭐 해.”
“하여간 넌 끝까지 남편이라고 그 나쁜 놈 감싸기냐? 너 솔직히 말해 봐.”
“뭘?”
“너, 네 전남편이 준우 오빠 닮아서 더 맘 약해지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너 솔직히 결혼할 때, 준우 오빠 닮아서 그 남자한테 더 끌렸던 거 사실이잖아. 준우 오빠가 네 첫사랑이니까.”
“그거야 뭐… 야, 그만 말해… 보고 싶잖아.”
지아가 속상한 마음에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혼자 또 멍해 있자, 영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녀의 술잔에 잔을 부딪쳤다.
“누구?”
“어?”
“누가 보고 싶은데? 네 전남편? 아님 준우 오빠?”
“……?”
지아가 대답을 못 하고 망설이고 있자, 영지가 눈을 키웠다.
“어머, 얘 봐라….”
“왜?”
“너 지금 왜 대답 못 하고 망설이는 거야?”
“내가 뭐….”
지아가 시선을 피하고 애꿎은 식탁 테이블만 긁고 있자, 영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쳐.”
영지가 속상한 마음에 맥주를 들이켜자, 지아가 그 입에 강냉이를 하나 쏙 넣어줬다.
“왜? 또 뭐가 화가 나는데?”
“너 자꾸 미련 둘래?”
“뭐가?”
“널 어쩌니….”
“아, 왜….”
“내가 얼른 준우 오빠를 찾아줄게. 찾아야겠다.”
“치, 그동안 못 찾은 걸 네가 무슨 수로?”
“준우 오빠를 찾아야 네가 그 나쁜 놈을 잊을 거 아니야.”
“잊었어.”
“잊긴 뭘 잊어. ‘나 아직 그리워요. 보고 싶어 죽겠어요.’ 얼굴에 써 있구만. 안 되겠다, 진짜. 내가 준우 오빠 찾고 만다.”
이때, 화장실에 갔던 영준이 자리로 돌아오면서 영지 상태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얜 또 왜 표정이 비장해?”
“영지가 준우 오빠 찾아준대.”
“또 헛소리하고 있구만.”
“헛소리 아니야. 내가 찾고 만다. 내가 꼭….”
영지가 말을 하고 있는데 영준이 그 입에 큰 치킨 조각을 밀어 넣었다.
“읍!”
“조용히 하고 먹어. 헛소리 말고.”
영준은 영지를 찌릿 째려보고는 지아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한잔하자.”
“응.”
영준이 지아와 사이좋게 잔을 부딪치자, 영지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입에 가득 찬 치킨을 꼭꼭 씹었다.
* * *
지석이 술에 취해서 소파에서 잠이 들자, 강현은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석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침실로 향하려다가 강현은 방향을 틀어 은서의 꽃꽂이 방으로 향했다.
지금은 짐이 거의 다 빠져서 소파와 작업대만 남아 있는 방이지만, 아직도 그녀의 향기가, 꽃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은서가 있을 때는 이 방이 좁다고 느껴질 정도로 참 꽉 차 보였었는데, 이렇게 휑할 정도로 큰 방이었다니….
강현은 주위를 둘러봤다.
그전에 어떤 방이었는지… 저도 모르게 그려보게 되었다.
저기 저 정원으로 바로 이어지는 통창을 오른쪽으로 두고 놓여 있는 이 작업대 위에는 꽃을 다듬는 도구들과 화병들이 있었다.
늘 작업하고 있는 꽃이 있었고, 말린 꽃들도 가끔 있었다.
바로 뒤에 있는 이 소파에서는 은서가 커피를 자주 마셨었다.
늘 책이 한두 권 올라가 있는 작은 이동식 소파 테이블을 앞으로 끌어와 책도 보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은서는 이 소파 공간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은서를 찾아 이 방문을 열면, 그녀는 이 소파에 앉아 작업대 위에 놓인 꽃과 통창 밖 정원에 있는 꽃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그러다 뭐 하냐고 부르면 그제야 문 쪽을 바라봐줬었다.
가끔은 이 소파에 기대 졸고 있을 때도 있었고.
아, 그날도….
강현은 은서와 이 방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은 야근을 한 날이었다.
밤늦게 집에 도착한 강현은 야근의 여독을 풀기 위해 바로 욕실로 들어가 반신욕을 했다.
그리고 얼른 잠을 청하기 위해 방으로 향하는데, 은서의 꽃꽂이 방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
혹시나 하고 문을 열어보니, 제 방에서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은서가 작은 소파에 웅크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늦게까지 꽃을 다듬었는지 꽃향기와 풋내가 가득했고, 책을 읽다가 잠들었는지 소파 밑에는 책이 떨어져 있었다.
깊이 잠든 것 같아 불을 끄고 나가려는데, 어쩐지 너무 어두운 것 같아 강현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작은 조명을 하나 밝혔다.
그러다 살짝 추운지 웅크린 모양새가 눈에 거슬려 소파 옆에 놓인 담요를 펼쳐 덮어줬다.
그리고 이제 진짜 나가려고 돌아서는데, 쉽게 발길이 떨어지질 않아 은서 쪽으로 고개를 다시 돌렸다.
아무래도 여기서 자는 건 아닌 것 같아, 소파로 다가가, 앞치마를 두른 채 잠이 든 은서의 다리를 다리로 툭 밀었다.
미동이 없었다.
한 번 더 툭 밀었다.
역시나 미동이 없었다.
강현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번엔 볼을 톡 건드렸다.
얼마나 깊게 잠이 든 건지… 은서가 이번에도 미동이 없자 강현은 이번엔 그녀의 붉은 입술을 톡 건드렸다.
탐스러운 입술이 통 튕기자, 강현은 저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으로 그 보드라운 입술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그 순간, 잠결에 살짝 눈을 뜬 은서가 강현을 발견했다.
근데 화들짝 놀랄 줄 알았던 은서는 이게 지금 꿈인 줄 아는 건지 눈을 마주치며,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강현은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의 웃는 눈매에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내려 입술을 조심스럽게 포갰다.
입술이 닿자, 은서는 맛있는 사탕을 빨아 당기듯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빨아당겼다.
살짝 차가워진 그녀의 입술이 촉촉하게 감싸주는 그 느낌에 강현은 심장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언제 피곤했냐는 듯 기운 없던 몸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빨려 들어가듯 달디단 그녀의 입술을 음미했다.
그 순간, 강현은 그녀가 잠결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점점 진하게 맞물리는 숨결에 그녀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한 번 맛보면 멈출 수 없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녀였으니까.
그녀를 안는 순간만큼은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쾌락에 몸을 맡길 뿐, 그녀를 안고 나면 늘 만족감과 함께 자괴감도 함께 밀려왔다.
짐승처럼 몰아붙이는,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제 모습이 늘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매번 후회하면서도 이렇게 은서를 안을 때면 나중에 밀려올 후회를 알면서도 그녀를 미친 듯이 안았다.
탐하고 있어도, 아무리 맛을 봐도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일었다.
숨이 찬 은서가 강현을 밀어냈다.
“하아… 강현… 읍….”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모든 신경이 아래로 쏠렸다.
강현은 갈급하게 입술을 내리고, 앞치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살짝 넘쳐 흐르게 잡히는 이 느낌이 늘 좋았다.
다른 한 손은 몸의 곡선을 따라 허리, 골반으로 내려가 그녀의 치마 속을 파고들었다.
“하아….”
그녀의 신음을 듣는 순간, 하체가 들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