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게 걱정한 거야
강현이 여전히 가만히 있자, 지아가 떠날까 봐 마음이 급해진 지석이 물었다.
“안 나갈 거야?”
지석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강현은 고개를 젓고는 술잔을 비웠다.
지석은 그 모습이 답답해 제 앞에 놓인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타일 좀 변했더라. 머리 기르나 봐. 어깨까지 길렀는데, 긴 머리 스타일이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 다시 일 시작했대. 플로리스트 일, 다시 한다더라고. 일을 시작해서 그런가 생기있어진 거 같아서 다행이야.”
지석이 말을 끝내고 빤히 쳐다보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궁금했지? 조용히 듣고 있는 거 보니까 궁금했네. 그럼 좀 나가 보지.”
“됐어.”
“형 걱정했대. 너무 혼자라서 걱정이니까 나보고 형 곁에 있어 주라고 하더라.”
지석의 말에 강현은 피식 웃었다.
“걱정은….”
강현은 술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살짝 나른해진 목소리로 지석을 불렀다.
“지석아.”
“왜….”
“윤은서가 나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한 거… 내가 얘기했나?”
“사모님 눈이 어떻게 되셨나 보네.”
“그러니까… 내가 좋은 사람이라니… 어딜 봐서?”
강현이 웃음소리도 없이 피식피식 미소만 지으며 술잔을 비우자, 지석은 그의 잔을 술로 채우고는 술잔을 부딪쳤다.
“아니야, 형 좋은 사람이야. 본인이 몰라서 그렇지.”
“좋은 사람은 무슨… 내 걱정을 왜 해? 뭐 하러….”
“사모님은 좋은 사람이니까.”
“아직 다 밝혀진 것도 아닌데, 넌 어떻게, 뭘 보고 그 여자를 믿는데?”
“아직도 사모님을 의심해서 안 나간 거구나?”
“…….”
“원래 좋은 사람은, 뭘 보고 믿는 게 아니야. 이 가슴으로 느껴지는 거지.”
“무슨….”
강현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콧방귀를 뀌고 술잔을 비우자, 지석이 잔을 채우며 물었다.
“사모님은 형이 왜 좋은 사람이라는데?”
“내가 자기를 걱정했다나? 솔직히 그거 아니었거든.”
“뭐였는데?”
강현은 은서와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설레하는 그녀를 보며 덩달아 설렜던… 수줍어하는 그녀를 보며 덩달아 수줍어졌던 그날….
정말 이상해서 이상하게 눈길이 갔던… 보고 있는데 더 보고 싶게 만드는 눈빛을 가진 그 여자를… 그래서 내 지옥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그 여자를….
첫 만남에서 은서는 그랬다.
강현은 맞선 내내 눈동자를 떨고 있던 은서가 떠올랐다.
“그 여자랑 싸우기엔 너무 순진해 보이더라. 난 그 여자 이겨야 되는데… 엿 먹여야 되는데….”
“걱정한 거 맞네.”
“……?”
“그게 걱정한 거야. 사모님이 순진해서 큰사모님한테 당할까 봐 걱정한 거잖아.”
“아니. 날 걱정한 거라니까?”
“그게 어떻게 형을 걱정한 거냐? 사모님을 걱정한 거지? 그리고 사모님은 형의 그 마음을 이 가슴으로 느껴서 형한테 좋은 사람이라고 한 거야. 형은 진짜 일도 잘하고 똑똑한데…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른다니까. 지능이 한쪽으로만 쏠렸나?”
강현이 찌릿 째려보자, 지석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니까 난…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안타깝다 이거지. 사람 좀… 이 가슴으로 봐. 다 의심하지 말라고 믿을 사람은 좀 믿고. 형, 난 믿어?”
강현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 진짜 서운하다. 그 눈빛 뭐야? 진짜 대답 안 하는 거야? 날 못 믿어?”
강현이 피식 웃자, 지석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전에 그 차가운 눈빛… 사모님은 그 눈빛 1년 내내 본 거 아냐… 잠깐 봐도 상처인데… 형 진짜 못됐다.”
“이제 알았냐?”
강현의 표정이 쓸쓸하자, 지석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형….”
“왜?”
“사모님이 그 남자를 만난 게 아니고, 모든 게 조작된 거라는 게 확실해지면… 형은 어떻게 할 거야?”
강현은 대꾸 없이 술을 한 잔 따라 마셨다.
강현이 아무 말이 없자, 지석은 술잔을 비우고는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따라줘.”
강현은 말없이 술을 따랐고, 지석은 잔을 다 받고는 입을 열었다.
“이렇게 술 주듯이 마음도 좀 줘라.”
“……?”
“우리 엄마가 그러셨어. 아끼면 똥 된다고.”
강현은 웃음을 흘렸고, 지석은 심각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게 장난 같은 말 같아도 문장 안에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니까. 뭐든지 때가 있는 거야. 형, 그 마음, 아끼고 아껴봤자 제때 전달하지 않으면 곪아 터지고 썩어 문드러질 뿐이라니까.”
“너나 잘해, 인마.”
“난 아직 임자를 못 만난 거고. 형은 만났는데도 이러잖아. 모든 게 밝혀지면 그땐 솔직해지라고.”
“됐고. 텔레비전이라도 좀 틀어봐. 너무 조용하다.”
“또 말 돌리긴….”
지석은 입을 삐쭉이면서 텔레비전을 틀었고, 그때 마침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성문그룹의 식품 광고였다.
광고 속에는 여배우 이하은이 성문그룹에서 나온 식품을 맛있게 먹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지금 몇 시지? 들어왔나?”
지석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네. 한국 도착했겠네. 몰래 들어온다더니, 조용한 거 보니까 안 들켰나 보네.”
“그러게. 그때 시애틀에서 보고 거의 반년 만에 보는 건가?”
“벌써 그렇게 됐나?”
강현과 지석은 텔레비전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하은을 바라봤다.
* * *
“아니, 이게 얼마 만이야?”
치킨집 쪽방에 한 상 거하게 차려놓고 앉은 하은이 닭 다리를 크게 한입 베어 물고는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캬!”
엄마 기순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은의 입에 치킨 무를 넣어줬다.
“천천히 먹어.”
“엄마, 오늘은 나 말리지 마.”
이때, 아빠 수용이 양념치킨을 들고 들어왔다.
“자, 양념이다.”
“아싸!”
하은은 수용이 접시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달큰한 양념이 버무려진 닭 다리를 들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아, 이 맛이지. 미국 치킨은 왜 이 맛이 안 날까?”
그 모습이 기가 막혀 수용이 자리에 앉으며 한마디 했다.
“광고를 그렇게 찍어봐라. 맨날 깨작깨작. 이렇게 먹으면 매출 팍팍 오르겠다.”
“아빠, 광고에서는 예쁘게 먹어야지. 이렇게.”
하은이 우아하게 닭 다리를 한입 베어 물고는 맛있어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최고예요. 달달 치킨.”
멘트 뒤, 하은은 엄지척을 하며 자본주의 미소를 지었다.
“아빠, 엄마, 어때? 내가 광고 찍으면 우리 가게 진짜 대박일 텐데.”
“됐어. 지금이 딱 좋아.”
“맞아. 아빠랑 나랑 둘이 쉬엄쉬엄하기에는 지금 이 정도가 딱 좋으니까, 따님은 다른 광고나 열심히 찍으세요. 다른 분들 많이 파시게.”
“하여간 엄마랑 아빠는 욕심이 없어.”
“먹고살 만하면 됐지. 돈 껴안고 죽을 것도 아니고. 그렇지 여보?”
“그럼.”
“엄마랑 아빠는 잘 통해서 좋겠어.”
이때, 홀에서 손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기순이 답했다.
“네, 나가요.”
기순이 일어나려 하자, 수용이 먼저 일어났다.
“앉아 있어. 내가 갈게.”
수용이 홀로 나가고, 하은이 바깥을 힐끔거리며 입을 삐쭉였다.
“아니, 저 손님들은 왜 안 가? 저 손님들만 나가면 문 닫아도 되겠구만.”
“문을 왜 닫아? 문 닫을 시간도 아닌데? 그리고 저 사람들 얼마 전에 여기 약국 문 연 사람들인데, 일 끝나고 와서 얼마 먹지도 못했어.”
“그냥 오늘만 일찍 닫는다고 그래.”
“오늘 친구 생일이라고 아까 케이크 주더라. 어떻게 그래?”
“아, 생일? 그럼 안 되겠네.”
“먹던 거나 드세요.”
“응.”
하은이 다시 치킨과 맥주에 집중하자, 기순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홀에서 치킨에 맥주를 마시던 지아와 영지, 영준은 매번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는데도 재미있다며 꺄르르 웃었다.
이때, 수용이 맥주와 음식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수용은 테이블에 맥주를 내려놓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보시면 늘 즐거우신 것 같아요.”
“아, 제가 그래요?”
영지가 웃는 얼굴로 답하자, 수용이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네, 볼 때마다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니까요.”
“감사합니다.”
영지가 밝게 인사하자, 수용이 테이블에 새우튀김을 내려놓았다.
“이건 생일 주인공에게 주는 서비스!”
“어? 이건….”
영지가 새우튀김을 보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지아가 옆에서 옆구리를 찌르며 얼른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좀 애매하자, 수용이 눈치를 살폈다.
“왜? 새우튀김 안 좋아하시나?”
“그게 아니라….”
영지가 말하려는데, 또 지아가 막았다.
“아니에요. 좋아해요.”
“야, 그건 아니지. 너 하루 이틀 올 거 아닌데!”
“야….”
“왜요?”
수용이 궁금해하자, 영지가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얘가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그래서 새우튀김 못 먹어요.”
“아, 그랬구나. 내가 실수했네.”
수용이 미안해하자, 지아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모르셨을 텐데… 서비스 정말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못 먹는 거를 가져왔는데.”
수용이 새우튀김을 도로 가져가려고 하자, 영지가 막았다.
“사장님! 얘는 갑각류 알레르기인데! 제가 이거 좋아합니다. 제가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아, 그래요? 다른 거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수용이 미안해하자, 영지가 넉살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에이, 이렇게 새우튀김도 서비스로 주셨는데, 다른 건 저희가 돈 내고 먹어야죠. 과일 안주 추가할게요.”
영지의 센스에 수용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감사합니다. 내가 다음엔 꼭 기억하고, 새우튀김 말고 다른 거로 서비스 챙겨줄게요.”
“아, 아니에요.”
지아가 손사래를 치며 미안해하자, 수용이 치킨집 쪽방을 힐끔거리며 헤실거렸다.
“괜찮아요. 우리 집에도 똑같은 사람이 있거든요. 사실은 우리 와이프도 갑각류 알레르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