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밤보다 더한 짓-17화 (17/94)

17화

아직이야

“오빠!”

놀란 영지가 얼른 영준을 뒤따라가는데, 그가 다시 돌아왔다.

“차키 어디 있어? 차키!”

“오빠가 가서 뭐 하게?”

“차키 어디 있냐고!”

영준이 소리를 지르자, 영지가 그를 노려봤다.

“키 못 줘.”

“내놔.”

“가서 뭘 어쩌게?”

“말려야 할 거 아니야. 넌 지아가 그놈 만나러 간다는데 안 말리고 뭐 했어?”

“어떻게 말려? 뭐 받을 거 있어서 만난다잖아. 그리고 지아가 오늘 종일 거울을 몇 번 들여다본 줄 알아? 휴대전화는 또 어떻고? 쟤 아직이야.”

“뭘 아직이야?”

“전남편 못 있었다고. 그런 애를 어떻게 말려?”

“하아… 넌 친구라면서, 지아가 또 그 자식한테 가길 바라는 거야?”

“나도 그 남자는 아니라고는 했지. 근데 쟤가 귓등으로도….”

“됐어. 괜한 얘기로 지아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전남편 얘기는 절대 꺼내지 마.”

“안 꺼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리고 난 오빠를 생각해서….”

영준은 영지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지아에게 전화를 걸며 약국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보며, 영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우리 오빠 어쩌냐….”

영지는 고개를 저으며, 영준을 따라 약국으로 향했다.

* * *

집 앞에 도착한 지아는 주차를 하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정말 오랜만에 오는 곳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집이었던 곳에 이렇게 오게 되니, 마음이 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였다.

집에 있겠지?

이곳에 오니 자연스럽게 그가 생각났다.

이 집에서 있었던 일들도 떠오르고…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 심장이 찌르르… 통증이 오는 것만 같았다.

그가 보일 리도 없는데, 지아는 핸들에 기대 집을 올려다봤다.

높은 담벼락과 커다란 대문,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들 때문에 그가 왔는지 안 왔는지 창문 불빛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대문 안은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 집이 그와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가까이 부부로 살면서, 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지아는 알지 못했다.

언제나 제 감정은 숨기고, 욕망만 드러내던 사람이었다.

그 욕망도 어떤 감정으로 드러내는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그가 몸을 붙여 올 때마다 그의 욕망이 좋은 감정이었으면 좋겠다.

저 잘생긴 입술로 내뱉는 못된 말들이, 쑥스러워서 내뱉는, 마음과 다른 말들이길 바랐다.

결국 상처투성이로 내쳐지긴 했지만… 이 집에 살 때는 그랬다.

그 헛된 욕망, 희망 고문으로 버티며 살았던 집이었다.

이 집에 오면 안 좋은 기억만 날 것 같았는데… 빨리 받을 것만 받고 벗어나야지 생각했는데, 사람은 정말 망각의 동물이 맞는 건지….

나쁜 기억보다 그가 안아줄 때마다 느꼈던 그의 숨결과 촉감, 체취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그가 그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 미쳤나 봐.

정말 그 사람 말대로 야한 게 맞나… 속도 없지.

지아는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선바이저를 내려 거울을 봤다.

그러다 순간,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지아는 선바이저를 다시 올렸다.

“진짜 나 미쳤나 봐….”

그렇게 잔인하게 버림받아 놓고 얼굴 상태를 확인하고, 머리를 매만지는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아는 고개를 젓고는, 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더 오래 있다가는 마음만 더 혼란스러워질 것 같았다.

“문 실장님, 저 집 앞에 왔어요.”

- 네, 내려가겠습니다.

잠시 후, 집에서 지석이 나왔다.

그가 혹시나 같이 나왔나 싶었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그가 없다는 걸 확인한 지아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안녕하셨어요?”

지아가 인사를 하자, 지석도 꾸벅 인사했다.

“제가 가야 하는데 이렇게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미안해하는 지석을 향해, 지아가 미소를 지었다.

“다시 평소의 문 실장님으로 돌아오셨네요?”

“네?”

“우리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날… 그날 문 실장님이 너무 딱딱하게 말해서… 저 좀 서운했거든요.”

지아의 말에 정곡을 찔린 지석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뒤통수를 매만졌다.

“제가 그랬습니까?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때 제 감정이 그래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몰라요. 뭐든 서운하게 느껴졌을 거예요. 꽃은 트렁크에 있다고 했죠?”

“네.”

지석은 얼른 트렁크에서 프리지아를 꺼내 지아에게 다가갔다.

“제가 트렁크에 실어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트렁크가 열리고, 프리지아를 싣던 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트렁크 안은 꽃장식에 쓰일 소품들과 조화, 잎과 꽃잎 같은 생화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뭐가 많네요?”

“다시 일을 시작했거든요.”

“일이라면… 결혼 전에 하셨던 플로리스트 말씀이신가요?”

“네.”

“잘됐네요.”

“네, 좋아요.”

프리지아를 싣고 지석이 트렁크를 닫자, 지아가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아, 네….”

이대로 그냥 보내기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던 지석은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모님.”

“네? 저 이제 사모님 아니잖아요.”

“그래도요. 아무튼 사모님.”

“네.”

“형,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주세요.”

“……?”

지아는 지석을 빤히 쳐다봤다.

살짝 상기된 볼, 그리고 밖이라서 몰랐는데 살짝 술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혹시 술 마셨어요?”

“네, 지금 형이랑 한잔하고 있는데, 전 취하진 않았습니다.”

“그런 것 같긴 한데….”

“형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거… 그것만 알아주세요. 너무 미워하지 마시고요.”

“어쩔 수 없었다고요?”

“그러니까 그게….”

술기운이 올라오나… 하마터면 쓸데없는 말까지 할 뻔하자 지석은 입술을 꾹 닫았다.

답답해도 참아야 했다.

CCTV 확인 결과, 로비 데스크에 사진을 맡긴 남자와 사진 속 남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날 통화를 한 번호가 없는 번호가 됐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게다가 강현도 내일 병원을 가보기로 했기 때문에 아직은 확실하게 그 사진이 조작된 거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의심스러운 정황들만 가지고 너무 성급하게 말을 꺼낸 것 같아 지석은 말을 삼켰다.

“제가 뭐라고 그랬죠? 제가 좀 취했나 보네요.”

지아는 입을 꾹 다물고 지석을 바라봤다.

지아가 계속 쳐다보자, 민망해진 지석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죄송합니다.”

자꾸 횡설수설하며 꾸벅 고개를 숙이는 지석을 보며, 지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문 실장님이 죄송할 게 뭐 있어요. 강현 씨는 좋겠어요. 문 실장님 같은 분이 곁에 있어서. 솔직히 제가 걱정할 처지는 아닌데, 걱정하긴 했거든요. 그 사람, 너무 혼자니까… 근데 문 실장님 얘기 들어보니까… 제가 괜한 걱정한 거 같아요. 그 사람 곁에 오래오래 함께 있어주세요.”

“사모님….”

“그 사람 안 미워할게요. 걱정 마세요.”

그 말에 지석은 면목이 더 없어졌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문 실장님이 왜요. 저 이만 가볼게요. 아, 저 남은 큰 짐들이요. 이제 옮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언제 빼면 좋을까요? 언제 연락드리고 오면 편하세요?”

“언제든 편하실 때, 그냥 문 열고 들어오세요.”

“문 열고요?”

“네. 지금 사정상 옥산댁 아주머니가 안 계시거든요. 낮에는 본부장님도 일하시고, 당분간 도우미는 필요할 때만 부르기로 해서 문 열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문 열고 들어오세요.”

“제가 어떻게….”

“지문되어 있으시잖아요. 지문 인식하고 들어오시면 됩니다.”

“제 지문 안 지웠어요?”

“네.”

그 말에 지아는 묘한 감정이 일었다.

“제 지문 왜 안 지우셨어요?”

“아, 그건 형이 안 바꾼 거라서… 아무튼 지문 인식하고 들어오세요.”

귀찮아서 안 바꾼 걸까?

아님, 일부러?

지석도 모른다고 하니 더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강현에게 전화해서 물을 수도 없는 거였다.

지아는 궁금함을 뒤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강현 씨 스케줄은 전이랑 똑같겠죠? 집 비어 있을 때 짐 뺄게요.”

“네, 아시잖아요, 형 스케줄. 낮에 언제든 오시면 됩니다.”

“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네. 또 뵙겠습니다.”

“글쎄요… 또 볼일이 있을까요?”

지아의 말에 지석은 잠시 머뭇대다가 자신 있게 말했다.

“저는 있을 것 같은데요?”

“네? 네, 뭐… 그럼 들어가세요.”

“들어가시는 거 보고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잠깐… 잠깐만 있다가 갈게요.”

지석은 왜 그런지 묻지 않았다.

왜인지 알 것 같아서….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지아가 인사하자, 지석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들어가기 전, 다시 한번 지아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지석이 집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지아는 고개를 높이 들어 집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있는 집을 더 보고 싶었다.

그가 보이는 건 아닌데 그냥….

그가 있는 집이라도 더 오래 보고 싶었다.

한편, 집으로 들어간 지석은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는 강현의 앞에 마주 앉아 그의 눈치를 살폈다.

“창밖으로도 안 본 거야?”

“…….”

“진짜 안 궁금해?”

강현은 지석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술잔을 비우고는 다시 그 잔에 술을 채웠다.

전혀 괜찮지 않은 모습으로 괜찮은 척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고 먼저 들어가라더라… 아직 집 앞이야. 사모님. 안 갔다고.”

그 말에 강현은 입으로 가져가려던 술잔을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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