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밤보다 더한 짓-16화 (16/94)

16화

대가 없는 호의

- 그건….

“윤은서도 함께 했냐고 물었습니다.”

- 아뇨….

아니라는 옥산댁의 말에 강현은 절망했다.

아니면 안 되는 거였다… 아니면 안 된다… 내가 윤은서한테 어떤 짓을 했는데… 내가….

그러면서 한편으로 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강현은 복잡한 심정을 애써 다스리고,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이경옥 그 여자에게 그 어떠한 연락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냥 조용히 사라지십시오.”

수화기 너머 울먹이는 옥산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본부장님. 사… 사라지다니요?

“여사님은 그냥 사라진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 사, 살려만 주세요. 자, 잘못했습니다. 저는 정말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시키는 대로만 하십시오. 이경옥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조용히 살면 이쯤에서 더는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 본부장님… 제발… 제발… 그럼 저는 뭐 먹고 살라는 겁니까… 저도 먹고살아야죠… 먹고만 살게 해주세요. 딸린 식구들이 있어요, 제발…

강현은 지석에게 휴대전화를 넘겼다.

지석은 통화를 마무리하고 강현의 앞에 다시 섰다.

“사람은 계속 붙여 놓을까요?”

“당분간은 감시해. 그리고 지금 통화내용 녹음 파일 나한테 넘겨.”

“네, 알겠습니다. 혹시 몰라서 저와 나눈 대화도 녹음을 해놨습니다. 나중에 다른 소리 하지 못하게.”

“그래, 그것도 나한테 넘겨놔. 그리고 메일 주고받은 것들도 증거로 다 남기고.”

“네, 알겠습니다.”

“직장은 다시 구해주고.”

“네? 누구요?”

“옥산댁.”

“네?”

“한 짓은 용서할 수 없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용한 건 이경옥이야. 옥산댁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마음도 좋으십니다… 그런 여자를….”

“멀리 봐. 형편이 힘들어지면 또 이경옥을 찾을 수도 있어. 그럼 안 되는 거잖아. 이경옥 눈도 피해야 하니까, 문 실장이 신경 써서 다시 옥산댁 직장 구해줘.”

지석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녹음기가 몇 개나 있었지?”

“집안 곳곳에 열 개 넘게 설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집에 올 줄 모르고, 큰사모님께 녹음 파일을 전송하다가 들킨 거였습니다. 집에 이제 사모님도 안 계시겠다, 방심한 거 같습니다. 그리고 본부장님께서 오랫동안 집을 비우셔서 그동안 녹음기를 신경 안 썼는데, 3개월 만에 하려니까 헷갈려서 더 시간이 걸렸다고, 그러다가 들킨 거라고 자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녹음기가… 그….”

“왜?”

“안방에도 있었던 거로 확인이 됐습니다.”

강현은 이를 악물었다.

사생활이란 아예 없었던 거였다.

집안 생활 일거수일투족이 경옥에게 보고가 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물론 녹음에는 은서도 있었다.

은서도 피해자임이 분명하다는 증거였다. 그런데도 옥산댁에게 다시 물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을 또 확인한 거였다.

은서와 제 사이를 안 좋다는 거로 단정 지어 말하는 경옥을 보며 은서를 더 오해했었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는데 경옥이 부부 사이를 안다는 건, 은서가 그런 관계까지 그 여자한테 다 말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안방에서 관계를 가질 때도, 은서에게 온갖 나쁜 말들을 해댔으니 그 여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언제 한번 따뜻하게 말해 준 적이 없었으니까.

이런 사생활까지 그 여자한테 보고가 되고 있었다니….

강현은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

제 어리석음에 분노했다.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하는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윤은서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지?”

“여사님에게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여사님 말로는 절대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오히려 사모님은 큰사모님과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합니다.”

“하….”

강현이 고개를 숙이자, 지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요? 큰사모님은?”

“아니, 그보다 우선… 그 사진….”

“사진이요?”

“그… 윤은서가 남자랑 찍힌 사진 말이야.”

“네, 그건 왜요?”

“그 사진에 대해 더 알아봐. 사진도 조작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사진이라면 그 사진 속 남자랑 이미 통화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날 우리가 통화한 사람이 그 사진 속 남자라는 확신 있어?”

“네?”

“그럴 듯하게 사진을 찍고 다른 남자와 통화를 하게 했을 수도 있잖아. 그 여자라면 하고도 남을 짓이야.”

“이것도 큰사모님 짓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윤은서랑 사이가 안 좋았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정황상 윤은서가 다른 남자를 만났을 거란 생각이 안 들어.”

“임신한 건 확실하지 않습니까?”

“나한테 문제가 생겼다면?”

“네?”

지석은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아 입을 떡 벌렸고, 강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으로 뒤통수를 감쌌다.

“아무것도 확신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정관수술한 게 풀렸을 수도 있다… 이 말씀이세요?”

“그래, 난 혹시 몰라 검사해 볼 테니까 문 실장은 그 사진, 로비로 전달됐다고 했지?”

“네.”

“그날 로비 CCTV 확인해서 사진 전달한 사람이랑 사진 속 남자랑 일치하는지 확인해. 그리고 만약에 사진 속 남자랑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날 이 근처 CCTV 다 뒤져서 그놈이 누군지 알아내. 그리고 그날 통화한 남자의 전화번호도 누구 건지 알아보고.”

“전화번호랑 근처 CCTV는 제가 알아볼 수 있는 권한이….”

지석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강현은 휴대전화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성문그룹 차강현입니다.”

웬만해선 권력을 이용하지 않는 강현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알아봐야만 했다.

그때 왜 그걸 곧이곧대로 믿었을까?

왜 한번 의심해 볼 생각을 안 했을까?

왜 처음부터 제게 호의를 보였던 윤은서를 믿지 못하고 의심했을까?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대가 없는 호의를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모든 호의에는 대가가 따랐고, 이유가 있었다.

보통 대부분은 그랬다.

그래서 믿지 못했다… 믿을 이유를 찾지 않았다. 끝까지 외면만 했을 뿐.

근데 만약… 윤은서를 믿었어야 했다면… 그랬다면….

* * *

퇴근 후, 강현은 지아와의 추억이 있는 야생화 꽃밭에 가 생일 선물로 준비한 프리지아를 내려놓았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어 야생화를 보며 머물고 있는데, 한 30분 정도 지났을까?

옆에 있던 지석의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액정을 확인한 지석은 여전히 꽃밭을 바라보고 있는 강현에게 말을 걸었다.

“사모님인데요? 전화 받고 오겠습니다.”

“윤은서?”

사모님이라는 말에 꽃밭에 고정되어있던 강현이 시선이 지석을 바라봤다.

잠시 후, 통화를 끝낸 지석은 강현에게 다가갔다.

“사모님께서 지금 집으로 가도 되냐고 물으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지금?”

“네, 오전에 프리지아 전달하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가져다드린데도, 굳이 직접 받으러 오신답니다.”

“아….”

그 말에 강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그럼 지금 오라고 해. 집으로 가지.”

“네.”

* * *

지금 집에 와도 된다는 지석의 전화를 받은 지아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왜 이렇게 답답하지?”

지아는 원인 모를 답답함에 가슴을 연신 두드렸다.

그러고는 다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면 보는 건가?”

강현을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지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자리에 앉았다.

* * *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약국 손님을 보내고, 영준은 자연스럽게 지아의 꽃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꽃집과 약국은 같은 건물이었지만, 건물이 디귿 자 형태로 되어 있고 가운데 바닥 분수가 있는 작은 공원이 형성되어 있어서, 약국에서는 지아의 꽃가게가 정면으로 보였다.

그래서 영준은 습관처럼 약국에서 일을 하다가 지아의 꽃집을 살피고는 했다.

“어?”

가게를 닫을 시간이 아닌데 가게를 닫는 지아를 발견한 영준은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

“어, 오빠. 잠깐 어디 갔다 오려고.”

지아가 까치발로 문 꼭대기에 있는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으려고 하자, 영준이 열쇠를 뺏어 들었다.

“이리 줘. 내가 할게. 근데 잠깐 갔다 온다면서 위에까지 잠그게? 도어락만 잠그고 다녀와.”

“아니, 아예 문 닫으려고. 가게 열 시간에는 못 올 거 같아서.”

“잠깐 아닌 것 같네. 늦어? 생일파티는?”

“그 전에는 오지.”

영준이 문을 잠그고 지아에게 열쇠를 전달했다.

“여기.”

“고마워.”

지아는 문이 잘 잠겼는지 흔들어 보고는 지문으로 보안 시스템의 경비를 설정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차 키를 꺼냈다.

“오빠, 나 갔다 올게.”

“어디 가는데 차까지 끌고 가?”

“뭐 좀 받을 게 있어서. 약국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올게.”

“그래….”

지아가 주차장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가자, 영준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툭 건드렸다.

“오빠!”

영지였다.

“어?”

“뭘 그렇게 봐?”

“약국은 어쩌고 나왔어?”

“그러는 오빠는? 지금 아무도 없거든? 그나저나 오빠는 지아 뒷모습을 왜 그렇게 애잔하게 보고 있어?”

“뭔 소리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오빠는 지아가 아직도 그렇게 좋아?”

“……?”

“오빠 지아 좋아하잖아. 아니야?”

“까분다.”

“오빠, 내가 오빠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다른 여자 만나. 지아 말고.”

영지의 의외의 말에 영준은 미간을 좁혔다.

“너 지금 한 말 무슨 뜻이야?”

“지아는 아니라고. 지아는 안 된다고.”

“왜?”

“오빠 눈에는 안 보여? 쟤 아직도 전남편 못 잊은 거? 난 우리 오빠 마음 상하는 거 보기 싫다.”

영지가 어깨에 손을 올리자, 영준은 그 손을 내려놓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전남편을 못 잊다니? 이미 끝난 사이인데 무슨 소리야?”

“쟤 아직도 전남편 얘기만 나오면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서는….”

영준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영지의 말을 막았다.

“이혼하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한 거야. 어쨌든 이별이니까.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일이야.”

“괜찮아진다고? 오빠, 쟤 지금 어디 가는 줄 알아?”

“어디 가는데?”

영지는 한숨을 내쉬고는 영준을 빤히 바라봤다.

영준은 답답한 마음에 영지를 닦달했다.

“어딘데 뜸을 들여? 지아 지금 어디 가는 건데?”

“전남편 집.”

“뭐?”

“전남편 연락받고 가는 거야. 그 집에.”

영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준은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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