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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13화 (13/94)

13화

너 누구야?

건명은 극도의 흥분 상태인 희숙에게서 은서를 떼어냈다.

“그만 좀 해.”

“당신은 빠져! 가자. 미안하다고 빌면 받아줄 거야.”

희숙이 은서의 손목을 다시 잡아당겼다.

“얼른 나오래도!”

“엄마….”

은서가 사정했지만, 희숙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때, 건명이 희숙을 거칠게 잡아 세웠다.

“그만 좀 해! 내가 이혼하라고 했어. 그놈의 집구석이 애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길래 내가 이혼하라고 했다고! 그러니까 애 좀 그만 잡아! 얘도 할 만큼 했잖아.”

“무슨 소리야? 잡다니? 난 우리 은서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 안 그래, 은서야?”

희숙이 눈이 돌아간 채 은서에게 묻자, 건명이 그녀의 두 팔을 붙들고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얘 똑바로 봐.”

건명은 은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얘는 우리 은서가 아니야. 당신도 알잖아. 언제까지 얘한테 은서 연극을 시켜야 속이 시원하겠어? 10년 넘게 강요했으면 됐잖아. 이제 얘 인생 살게 해주자. 희숙아, 얘, 너 위해서 은서로 산 애야. 진짜 은서가 아니라고!”

건명이 사정했지만, 희숙은 부정했다.

“무슨 소리야? 얘가 은서가 아니면 누군데? 은서야. 너 은서잖아. 윤은서! 윤은서, 너 대답해 봐. 너 윤은서잖아.”

희숙이 다그치자, 은서는 겁에 질린 채 몸을 떨었다.

“나, 나는….”

“그래, 너 윤은서잖아.”

“나… 나는… 나는….”

은서가 대답하지 못하자, 희숙이 달려들어 몸을 흔들었다.

“대답해! 대답해, 윤은서!”

“죄송해요.”

“여보, 제발!”

건명이 말리자, 희숙은 은서를 노려봤다.

“빨리 말 안 해? 너 누구야?”

희숙과 눈이 마주치자 은서는 고개를 숙였다.

“엄마… 나 이제 나로 살고 싶어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로… 죄송해요.”

“……?”

“죄송해요….”

“누가 죄송하다는 말 듣고 싶댔어? 너 은서잖아… 은서 맞잖아!”

“아니… 지아… 권지아요….”

은서의 말에 건명도, 희숙도 깜짝 놀라 멈칫했다.

은서의 입으로 ‘권지아’라는 이름을 듣는 건, 10년 전 첫 만남 이후로 처음이었다.

희숙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물고 다시 물었다.

“무슨 말이야? 윤은서! 넌 윤은서야! 내 딸 윤은서라고!”

“아니, 난 이제 지아….”

“악!”

은서의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희숙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악! 아악! 네가 왜… 넌 윤은서야! 윤은서! 내 딸! 내 딸 윤은서라고! 아악!”

마지막 발악을 하듯 소리를 지른 희숙은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아, 안 돼… 엄마!”

“여보! 눈 좀 떠봐. 여보!”

“죄송해요… 정말… 정말 죄송해요. 근데 나 좀… 나 좀 봐주면 안 돼요? 제발… 제발….”

은서는 눈물범벅이 된 채 희숙을 붙잡고 오열했다.

* * *

3개월 후.

새벽 비행기로 한국에 도착한 강현은 빠른 걸음으로 공항 로비를 가로질렀다.

지석이 그 뒤를 공항 카트를 끌고 따라갔다.

“집으로 이동하실 거죠?”

“아니, 회사.”

“네? 지금 새벽인데….”

“어차피 시차도 안 맞아서 잠도 안 와.”

“좀 살려주십시오.”

3개월 전보다 핼쑥해진 지석이 지친 몰골로 사정하자, 그보다 더 핼쑥해진 강현이 말없이 바라봤다.

이혼 후, 3개월 동안 해외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미친 듯이 일에만 몰두를 한 강현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보다 핼쑥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그의 턱선은 베일 듯 더 날렵해졌고, 그전보다 눈빛도 더 날카로워졌다.

그 눈빛을 보며 지석은 울상을 지었다.

“본부장님, 진짜 이러다 죽습니다.”

“엄살은….”

“우리 엄마가 본부장님을 많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할 말이 많으시다네요?”

“엄마 있다고 자랑하냐?”

“아, 그게 아니고! 형, 그냥 치맥이나 하자.”

“힘들면 넌 들어가.”

강현이 걸음을 더 서두르자, 지석이 뒤에서 눈을 한 번 흘기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하… 같이 가겠습니다. 갑니다. 가요.”

강현을 뒤따라가던 지석은 무언가 생각나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 본부장님.”

“왜?”

“임치한 씨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생일이라서 연락한 건가?”

“네. 이번 생일에도 절에 갈 거라고요. 어젯밤 꿈에 나타났는데, 꿈속에서 편치 않아 보여 이번엔 더 신경을 쓸 생각이라고요. 돈 더 달라는 얘기죠.”

“그래, 적당히 보내줘.”

“돈 달라는 게 너무 노골적입니다. 그리고 매번 이렇게 돈을 주긴 하지만… 솔직히 이 돈을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겠고. 얼마 전에도 지아 씨 찾겠다면서 돈 받아 간 거 아시잖아요.”

“그냥 보내줘. 그래도 지아 키워주신 분들이잖아. 절에 지아 이름 올린 것도 확인했고.”

“확인은 했죠. 근데 돈이 그만큼이 들 것 같지가 않다는 거죠.”

“그래도 그냥 줘. 형편도 어렵다잖아. 지아가 있었다면 이보다 더 줬을 거야. 지아 힘든 건 볼 수 없으니까.”

“그렇긴 한데….”

“넉넉히 보내.”

“네….”

지석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강현의 뒤를 따랐다.

* * *

강현은 한국에 돌아온 첫날을 내내 회사에서 보냈다.

새벽에 회사로 출근해 늦은 저녁에 퇴근한 강현은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다.

몸도 피곤한데다가, 오랜만에 호텔이 아닌 집에서 잠을 청하는 거였는데도, 강현은 제 집이 아닌 것 같은 불편함이 들어 밤새 뒤척였다.

시차 적응이 안 돼서 그런가….

옥산댁이 아침 식사를 차려놓은 식탁에 앉아 밥을 한술 뜨는데, 마치 모래를 씹는 것처럼 밥알이 입 안에서 까끌거리자, 강현은 젓가락을 내려놨다.

물을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쩐지 집이 삭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색하기도 했고.

그리고 어딘가 집 안이 그 예전의 풍경과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거실을 찬찬히 둘러보자, 생기 없이 시든 식물들이 보였다.

“저것 좀 버리세요.”

“네? 뭘 말씀이신지?”

“저 죽은 화분들이요.”

“아, 버리겠습니다.”

“화분 좀 새로 들여다 놓죠. 꽃도 좀 들여다 놓고.”

“아… 화분이랑 꽃이요….”

옥산댁이 시원스럽게 대답하지 못하자, 강현이 고개를 들었다.

“왜 뭐 문제 있습니까?”

“저기 그게… 저는 왜 그런지, 제 손만 닿으면 화초며 꽃이며 다 죽더라고요.”

옥산댁이 멋쩍게 웃자, 강현은 미간을 좁혔다.

“……?”

“전 사모님은 매일 꽃꽂이도 하시고, 화초도 잘 가꾸셨는데… 저는 그런 쪽에는 영 소질이 없는지… 죄다 이렇게 다 죽더라고요.”

“그럼 전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전 사모님이….”

“아니 그 전 말입니다. 결혼 전.”

“결혼 전에는 집에 식물이 하나도 없었죠. 그래서 말인데… 그냥 전처럼 식물 없이 사는 건 어떠세요?”

원래 집에 식물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는 사실에 강현은 살짝 기분이 묘했다.

그때였다.

띵동-

초인종이 울리고, 인터폰을 받은 옥산댁이 강현에게 다가왔다.

“퀵서비스라는데요.”

“내가 시킨 겁니다. 꽃일 거예요.”

“그게 꽃은 맞는데… 윤은서 씨가 보냈다는데요?”

“윤은서?”

“네. 몇 개월 전에 미리 결제하고 예약한 거라고 하네요.”

“알아서 돌려보내세요.”

“그게….”

“또 왜요?”

“이미 문 앞에 두고 갔는데… 그럼 가져오겠습니다.”

말릴 틈도 없이 밖으로 나간 옥산댁이 꽃을 들고 중얼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이왕이면 꽃꽂이한 거로 주문하지… 이거 어떻게 할까요?”

옥산댁은 정돈이 안 된 생화 더미를 들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강현은 한숨을 쉬고는 턱으로 소파 테이블을 가리켰다.

“우선 저기 놔두세요.”

“아이고, 이 많은 걸 어쩌나….”

옥산댁이 중얼거리며 꽃을 내려놓는데, 카드가 한 장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옥산댁이 카드를 주웠다.

“카드가 있네요. 누구 주시려고 했나 본데요?”

강현이 대꾸를 안 하자, 옥산댁은 카드로 시선을 돌렸다.

봉투도 없고, 접혀 있는 것도 아닌 카드에 적힌 글씨는 보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보였다.

생일 축하해, 지아야. 오늘은 더 행복한 하루 보내. 파이팅!

“이거 친구한테 생일 선물로 주시려고 한 거 같은데… 본부장님도 아는 분인지 카드 한 번 보실래요? 이름이 지….”

“됐습니다. 버리세요.”

강현이 사양하자, 옥산댁은 카드를 내밀었던 손을 거뒀다.

그러고는 쓰레기통에 카드를 버리는데, 강현의 휴대전화 일정 알람이 울렸다.

강현이 휴대전화로 시선을 내리자, 옥산댁은 제 할 일을 찾아 움직였고, 강현은 휴대전화 일정을 확인했다.

혹시나 잊을까 봐 저장해둔 일정이었는데,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강현은 오늘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일부러 오늘을 위해 해외 일정도 일찍 정리하고 왔으니까.

오늘은 지아의 생일이었다.

강현은 오늘 지아가 좋아하던 프리지아 꽃을 들고 야생화 꽃밭에 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꽃을 주문했는데….

그때였다. 초인종이 울리고, 옥산댁이 인터폰을 받았다.

“꽃배달 왔네요. 이게 본부장님께서 주문하신 거네요.”

곧 옥산댁이 꽃을 들고 집으로 들어왔고, 꽃을 보며 또 중얼거렸다.

“오늘은 뭐 일만 하려면 배달이 오네. 본부장님! 전 사모님이 주문한 꽃이랑 같은 꽃이네요?”

“……?”

강현은 고개를 돌려, 좀 전에 집으로 배달된 꽃을 바라봤다.

은서가 주문한 꽃은 노란색 프리지아였다.

봄에만 만날 수 있는 꽃이라며, 자기 생일 때에만 볼 수 있는 꽃이라며 지아가 좋아했던 꽃.

‘당신의 앞날을 응원합니다.’라는 꽃말이 마음에 든다며, 지아가 좋아했던 꽃.

그래서 강현이 오늘 지아에게 생일 선물로 주려고 주문한 꽃.

근데 왜 당신이…?

도대체 오늘이 당신한테 무슨 날이길래….

지금 강현의 소파 테이블 위에 놓여진 꽃은, 은서가 오늘 날짜로 미리 예약한 꽃은, 프리지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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