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내 편
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힘겹게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은서의 눈에 하얀 천장이 들어왔다.
은서는 다 떠지지도 않은 눈으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봤다.
경옥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님?”
“그래, 일어났니?”
“여기가 어디… 저 왜 여기….”
그제야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은서는 얼른 배부터 살폈다.
배 속에 아이가 무사한가 싶어서 배 위에 손을 올리고 상체를 일으키려는데 쉽지 않았다.
“윽….”
“누워 있어. 그것도 수술인데….”
수술이라는 말에 은서는 눈을 키웠다.
“수, 수술이요?”
“넌 애가 임신을 했으면 좀 조심을 하지. 누구 탓할 거 하나 없다. 누구 탓한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겠지만 굳이 탓을 따지자면 네가….”
“네? 무슨… 우리 아기… 아기는요? 아기는 괜찮은 거죠?”
“수술했다니까.”
“……?”
“너 쓰러졌었잖아. 기억 안 나? 임신 초기여서 그런지… 애는 안타깝게 됐구나.”
전혀 안타깝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는 경옥을 바라보며, 은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거짓말… 거짓말이죠? 선생님… 의사 선생님 불러줘요, 어서.”
은서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굴자, 경옥이 미간을 찌푸렸다.
“얘! 지금 여기 너 혼자 있니? 이 병원 너 혼자 전세 냈어? 품위 좀 지켜.”
경옥의 말에 은서는 그녀를 찌릿 째려봤다.
“품위? 어머님 손주예요. 강현 씨 아이라고요! 지금 품위라는 말이 나오세요?”
“어머, 유난… 유난… 애 제대로 간수 못 한 게 누군데, 뭘 잘했다고 큰소리니?”
손주를 잃은 할머니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경옥을 향해 은서는 소리 질렀다.
“나가요! 다 나가!”
“어머, 너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른 거니?”
“어머, 미쳤나 봐요.”
채영이 경옥에게 팔짱을 끼고 얄밉게 빈정대자, 은서는 베개를 집어 던졌다.
“나가! 나가라고!”
모두 병실에서 나가자, 은서는 호출벨을 누르며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가 들어오자, 은서는 매달렸다.
“사실 아니죠? 우리 아기 괜찮은 거죠? 괜찮은 거죠?”
“환자분, 진정하시고요.”
“아니라고 말해줘요. 한마디면 되잖아요. 네? 아니죠? 우리 아기 괜찮은 거죠?”
간절하게 바라보는 은서를 향해 간호사는 고개를 떨궜다.
“환자분, 많이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진정을 하시고… 아이는 안타깝게….”
“아니야. 아니야.”
은서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귀를 틀어막고 소리를 질렀다.
진짜 가족이었다. 진짜 가족.
진짜 내 편이 되어줄 내 가족.
절대로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가족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아이는 이렇게 허망하게… 다신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다시 만날 거라는 기약도 하지 못하는 곳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기다려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혼자….
이 못난 엄마를 두고 혼자….
“아가… 미안해… 미안해, 아가… 엄마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아가… 미안해… 미안해….”
이성을 잃은 채 울부짖던 은서는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지고 말았다.
한편, 병실 밖에 있던 경옥과 채영은 은서의 난동 소리가 잠잠해지자, 서로 눈을 마주쳤다.
“어머님, 저는 진짜 잘못 없어요.”
“그럼, 네가 뭐 알고 그랬니? 배 속 아이가 그럴 운명이었던 거지. 그리고 다 인과응보다. 넌 잘못 하나도 없어.”
“어머님….”
“그러니까 오늘 있었던 일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낼 생각 말아라. 쟤한테도 내가 아무 말 하지 말라고 일러둘 테니까. 괜히 말 꺼내봤자 산 사람만 잡는 거지, 안 그래?”
“네, 어머니… 정말이지… 전 저 여자 너무 싫어요.”
“그래, 얼른 치워버려야지. 조금만 기다려라.”
“무슨 좋은 수가 있으세요?”
채영의 질문에 경옥은 살짝 당황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수는 무슨? 나한테 그런 게 어디 있겠니? 그냥…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쟤는 헤어지게 돼 있다, 이거지. 어디 우리 집안에 어울리기나 한 애니?”
“맞아요.”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혹시 모르니까 이 틈에 네가 빨리 애를 가져. 애들 서열까지 밀려서야 되겠니?”
“그게 쉽지 않다는 거 어머님도 아시잖아요. 병현 씨도 자주 들어오지도 않고….”
“일이 바쁘니까 어쩔 수 없잖니… 그리고 자주 본다고 애 생기니?”
“에이… 어머니도 참….”
채영이 부끄러워했지만, 경옥은 말을 이어갔다.
“약이나 한 재 지어줄까?”
“그거 쓴 거 아니에요?”
채영이 입을 삐쭉이자, 경옥이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달랬다.
“써도 먹어야 얼른 애를 갖지.”
“음… 쓴 건 싫은데….”
“얘도 참… 먹어야 해. 알았지?”
“아휴, 알겠어요….”
채영이 겨우 대답하자, 경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지아의 소식을 듣고, 급하게 약국 일도 집어던지고 병원으로 달려가던 영준은 어떤 험상궂게 생긴 남자와 부딪혀 병실을 코앞에 두고 발이 묶였다.
“죄송하다고 제가 지금 몇 번을 말씀드려요.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에이, 누군 급한 일 없나… 죄송하면 다입니까?”
끝까지 영준을 막아서는 남자였다.
영준은 발을 동동 구르며 한숨을 쉬었다.
“하… 그러는 그쪽도 같이 부딪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넘어가고 나중에….”
“나중이 어디 있습니까?”
너무 급한데 못 가게 막으니, 영준은 이젠 화가 치밀어오르고 있었다.
“그럼 뭐 어쩌자는 겁니까? 지금 몇 분째 급한 사람 붙잡고….”
“아야… 아야….”
이젠 우길 게 없으니 아픈 척을 하는 남자를 보며, 영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럼 우선은….”
영준은 어쩔 수 없이 지갑을 열어 지폐 몇 장을 꺼냈다.
“여기가 병원이니까 이 돈으로 접수부터 하시고요. 제가 볼일 끝나면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제가….”
그때였다.
띠링-
남자에게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시지를 확인한 남자는 영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는 이제는 아예 바닥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아이구구… 아이구구….”
남자가 드러눕자, 영준은 휴대전화를 들어 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이라는 연결음이 나오자, 영준은 더욱더 초조해졌다.
“하… 도대체 누구랑 통화 중인 거야?”
전화 연결에 실패한 영준은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남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
뚝-
잠에서 깨어난 은서는 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만 울릴 뿐 전화를 받지 않자, 은서는 또다시 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또 강현이 전화를 받지 않자, 은서는 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내동댕이쳤다.
그때, 휴대전화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강현의 연락인가 싶어 은서는 바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지만, 화면을 보는 순간,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흑….”
아이를 위해 깔아두었던 태교 일기 어플 알람이었다.
일기 쓸 시간이라고… 아이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라고 초음파 사진이 화면에 뜨는 순간, 은서는 제 배를 움켜쥐었다.
“흑… 아가… 내 아가….”
* * *
“본부장님, 안 들어가실 겁니까?”
“…….”
은서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오기는 했지만, 강현은 차에서 내리지는 않았다.
여기는 또 왜 달려온 건지….
강현은 자괴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상태는?”
“지금 안정을 취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아이는?”
“유산됐다고 합니다….”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를 원망하는 마음인지… 걱정하는 마음인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두통이 난 강현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병원을 바라봤다.
그때, 사진 속 남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
그 순간, 지석의 눈에도 혼비백산이 된 채, 병원으로 달려가는 사진 속 남자가 들어왔다.
“저… 저 남자는… 본부장님!”
강현은 말없이 남자를 노려봤다.
남자가 병원으로 들어가자, 강현은 힘이 빠진 채 시트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 메시지를 하나 전송한 후, 눈을 감았다.
“출발해.”
“네?”
강현은 눈을 닫은 것처럼, 입도 꾹 닫았다.
그런 그를 보며, 지석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그게….”
여전히 눈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를 보며, 지석은 어쩔 수 없이 액셀을 밟았다.
* * *
“지아야!”
혼비백산이 된 채 병실로 들어온 영준은 많이 안 다친 은서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전화는 왜 이렇게 안 받아? 갑자기 병원이라고 해서 놀랐… 울어?”
울고 있는 은서를 보고 영준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이때, 영지가 병실로 들어왔다.
“지아야!”
병실로 들어온 영지는 은서를 향해 달려가 와락 껴안았다.
“괜찮아?”
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지는 금세 눈물범벅이 된 채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진짜 놀랐잖아….”
잠시 후, 한참을 울던 은서가 조금 진정을 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영지와 영준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미친 집안 아니야? 너한테 뭘 시켜? 진짜 웃기는 집안이네! 병실만 이렇게 VIP로 잡아주면 뭐 해? 그리고 또 뭐랬다고? 유난?”
영지는 흥분했고, 영준은 이를 갈았다.
“네 남편은?”
그때였다.
은서의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은 은서는 ‘네’라는 대답만 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은서가 통화를 끝내자마자, 영지가 바로 물었다.
“누구 전화길래 그렇게 받아?”
“문 실장님….”
“문 실장? 네 남편 비서?”
“응.”
“왜 빨리 안 오고 비서한테 전화를 시켜? 이런 날도 비서한테 시키는 거야? 자기가 직접 전화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번 기회에 네 남편 좀 만나봐야겠다. 언제 온대?”
“안 와.”
“뭐?”
“안 온다고….”
“뭐? 말이 돼? 어떻게 와이프가 유산을 했는데 안 와?”
화를 내는 영지를 은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바라봤다.
“나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