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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보다 더한 짓-4화 (4/94)

4화

좋은 사람

“이 자리는 혼외자식 차강현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어머니 이경옥 여사가 마련한 자리입니다. 여기서 차강현은 나고.”

“……?”

“나랑 결혼하려면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난 혼외자식입니다. 아버지가 결혼 전에 낳은 자식. 이미 알고 있는 건가? 모르면 참고하시고.”

은서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자, 강현이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그 여자가 어떤 의도로 당신을 내 앞에 앉혀놨는지는 알고 있지만, 난 당신만 괜찮다면 결혼할 생각입니다.”

“……?”

은서가 의문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자, 강현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난 그 여자 엿 먹이는 거 좋아하거든요. 괜히 어설프게 힘 있는 처가 만나 간섭받고 눈치 보는 것도 취미 없고. 그걸 다 만족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 당신입니다.”

은서가 기분 상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그 여자는 윤은서 씨 집이 돈도 빽도 없으니까 나한테 소개시켰겠지만, 차 회장님은 당신 아버지 인성을 믿고 날 이 자리에 보낸 거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사모님께서도 차 회장님과 같이 좋은 의도로….”

“아뇨. 나랑 결혼하면 바로 알게 될 겁니다. 그 여자가 나한테 엄마가 아니라는 거. 가족이지만, 내 편은 없다는 거.”

가족이지만 내 편은 없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그와의 공통점을 찾아낸 은서였다.

외로웠겠다….

은서는 저도 모르게 강현의 어릴 때 모습을 상상했다.

왜 이 사람의 어릴 때 모습을 아는 것만 같지?

아픈 얘기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의 삐딱함에서 은서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맨날 아무렇지 않다고, 괜찮다고 말했던,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닮은 그 사람이….

외로워했던 그 사람이….

외로워요?

은서는 저도 모르게 위로의 말을 건넬 뻔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 눈빛을 보고 강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렇게 보는 거죠?”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은서는 당황했다.

“죄송해요.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할게요. 저는 그저….”

은서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강현이 살짝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날 그런 눈빛으로 보는 사람은 너무 오랜만이라….”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지려고 하자, 은서는 눈을 피했다.

“혹시… 우리 어디에서 본 적 있나요?”

“글쎄요….”

은서는 강현의 ‘글쎄요.’라는 말을 입 모양으로 혼자 되뇌며 그를 바라봤다.

또다시 잠깐의 적막이 흐르고, 생각을 갈무리한 듯 한숨을 내쉰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사람 만나요. 이런 데 끌려다니지 말고.”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은서가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요.”

은서의 엄마인 희숙은 성문그룹으로부터 혼사 얘기를 듣고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은서는 희숙이 원하는 거라면,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지 했다.

엄마를 실망시키면 안 되니까. 엄마한테 미움받으면 안 되니까. 엄마한테 사랑받아야 하니까.

그래서 은서는 맞선에 나오기 전부터 이 결혼은 할 거라고 이미 마음이 기운 상태였다.

그래도 상대는 봐야 할 것 같아서, 보고 결심을 하자 생각했는데, 강현이라면… 이 남자라면….

이 남자의 옆에 있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 닮아서일까?

은서는 강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대로 가시는 건가요? 저랑 할 거라면서요, 결혼.”

“……?”

“왜 그냥 일어나세요?”

“지금 날 잡는 겁니까?”

“잡으면요?”

은서의 의외의 모습에 강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안 잡는 게 좋을 텐데….”

강현은 은서의 눈을 바라봤다.

여전히 수줍음이 묻어 있는 눈빛이었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이게 도망칠 기회라는 것도 모르고….

때 묻지 않은 은서의 눈빛에 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당신한테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도 좋은 사람 같은데요? 제 걱정해주셨잖아요, 지금.”

“……?”

“그래서 일어나신 거 아니에요?”

일어나 있는 제 자신을 보며 강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은서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렇게 되는 건가?”

그런 강현을 은서도 똑바로 바라봤다.

“알다시피 우리 집은 당신한테 도움이 안 될 거예요. 힘없으니까. 그래도 괜찮아요? 저랑 결혼하는 거?”

수줍어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은서를 강현은 흥미롭게 바라봤다.

너무 긴장해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은서는 말을 이어갔다.

“옆에 있을게요, 저라도 괜찮다면…. 해요, 결혼.”

은서는 말을 끝내자마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옆에 있을게요’라….

강현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요.”

“네?”

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강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뭘 그렇게 놀라요? 하자면서요? 하죠, 결혼. 옆에 있어요, 내 옆에.”

부딪힌 눈빛이 또 진득하게 얽혀 들어가고 있었다.

* * *

Rrrrrr- Rrrrrr-

친정집 앞에서 강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은서는 휴대전화로 걸려 온 전화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친구 영지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영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 권지아, 나와라. 날도 추운데, 언니가 오늘 어묵탕에 소주 쏜다.

“소주? 미안하지만 난 오늘 시댁 가야 돼.”

- 에? 뭐야… 오빠랑 너랑 셋이서 술 한잔하려고 했는데! 내가 이래서 결혼을 안 해요. 뭐 이렇게 자주 불러? 그럼 내일 마실까?

“내일도 안 돼. 아니, 앞으로 한 1년 정도는 나 술 못 마셔.”

- 응? 왜? 너 어디 아파?

“아니.”

아니라고 말하는 은서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밝자, 영지는 멈칫했다.

- 뭐야? 그럼 왜 안… 헉! 너?

“응, 나 임신 6주래.”

- 정말이야?

“응.”

수화기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은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보세요? 안 들려?”

- 잘 들려. 이거 축하해야 하는 거지?

축하의 느낌이 전혀 없는 영지의 목소리를 은서는 타박했다.

“야, 당연히 축하해 줘야지.”

- 네 남편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네 시댁은 더!

“나 지금 너무 행복해. 그러니까 축하해 줘.”

- 축하야 하지… 근데 걱정되니까… 애까지 낳았는데 너한테 잘못하기만 해봐 아주! 내가 가만 안 둬!

“고마워. 나 있지…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진짜 신기할 정도로 이 마음이… 이 마음이 꽉 차는 기분이랄까? 이런 기분 처음이야….”

- 그렇게 좋아?

“응.”

- 네 남편이랑 시댁은 뭐래?

“너한테 처음 말하는 거야. 이제 만나면 얘기해야지. 이제 곧 올 때가 됐는데….”

코끝이 시려진 은서는 입김을 내뿜으며 차가 오는지 고개를 쭉 빼고 골목을 바라봤다.

* * *

“뭐야? 정말이야?”

강 실장의 말을 전해 들은 경옥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믿는 구석이 이거였구만? 그래서 그렇게 까분 거였어. 확실한 거지? 제대로 감시한 거 맞지?”

“물론입니다. 산부인과 진료 기록도 확인했고, 임신 6주인 것도 확인했습니다.”

강 실장이 경옥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경옥은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은서의 사진을 확인하고는 소파 위로 태블릿을 던졌다.

“옥산댁은 이런 것도 눈치 못 채고 뭐한 거야? 정신 차리게 한마디 해줘야지 안 되겠네. 평소에 따로 또 감시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뻔했냐고. 이거 강현이도 알고 있어?”

“그건 아직 잘… 알아보겠습니다.”

“감히… 이걸 믿고 날 협박해?”

“협박이요?”

“가만히 안 있겠대. 까짓 게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쩌겠다는 건데? 강현이 감시하게 한 거, 회장님과 강현이한테 말하겠다는 거야? 뭐야? 난 뭐 입 없고? 쓸모도 없는 게… 골치까지 아파졌어. 게다가 우리 병현이도 아직 애가 없는데 임신?”

일찍이 재벌가의 여식인 채영과 결혼을 한 병현은 아직 아이 소식이 없는데, 강현에게 먼저 소식이 들린다면 이건 큰일이었다.

또 강현에게 병현이 밀리는 꼴을 볼 수 없는 경옥은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대로 병현이가 밀리는 거 보고만 있을 거야?”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이 물건을 어쩐다….”

경옥이 서늘한 눈빛으로 강 실장을 바라봤다.

* * *

운전을 하던 지석은 뒷좌석에 앉아 있는 강현을 백미러로 힐끔 보며 눈치를 살폈다.

“본부장님….”

“그래서 오늘도 만났다는 건가?”

“네. 오전에 큰사모님께서 댁에 방문하셨습니다. 이후에는 외출을 하셨는데, 세부 일정도 알아볼까요?”

강현은 대꾸 없이 태블릿으로 고개를 내렸다.

더는 알고 싶지 않다는 듯, 다른 질문을 하지도 않는 강현을 보며 지석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본부장님, 아직 사모님이 큰사모님 사람이라고 속단하기는 이릅니다.”

“그럼 회장님이 비밀 스케줄이었던 릴브리즌 대표와의 미팅 건을 어떻게 알고 오늘 저녁에 부르시는 거지? 문 실장이 말한 건가?”

“아뇨, 전 아니죠.”

“그럼 나?”

“그건….”

“남은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군.”

“그렇긴 하지만 본부장님, 이건 물론 제 생각이지만… 사모님은 본부장님께 그러실 분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가….”

“됐어. 이런 적 한두 번 아니잖아. 네가 조사하고 나한테 보고한 거야. 넌 그러고도 아직 그 여자를 믿어?”

“형….”

지석은 강현이 은서와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두 사람 사이를 더 자주 오가며 지켜봤다.

두 사람은 서로 직접 연락하지 않고, 뭐든 지석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지석은 본의 아니게 은서의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봐왔다.

한 예로, 은서는 강현이 봐주지도 않는데, 매일같이 그의 서재 책상에 어떤 꽃을 올려놓을까 고민하고, 언젠가 봐주길 바라며 꽃꽂이를 했다.

강현에게 마음이 없다면, 집을 꾸미는 거로 만족을 했을 거다.

근데 은서는 강현이 집에서 제일 오래 머무는 곳인 서재를 꾸미는 데에 진심이었다.

강현이 피곤하면, 피로에 좋은 향이 나는 꽃으로, 계절이 바뀌면 바쁜 그가 계절을 놓칠세라 계절을 전달할 수 있는 꽃으로, 그가 좋아하는 색이 뭔지 눈여겨봤다가 그 색깔의 꽃으로, 언제나 강현에게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늘 강현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큰사모님의 사람일 리가 없었다.

지석의 눈에는 보이는데, 왜 강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지….

지석은 문 실장이기 이전에, 강현과 형제와도 같은 사이인 동생의 자격으로 입을 열었다.

“…형한테 진심인 사람이야. 그건 형이 조금만 더 마음을 열면….”

“하! 진심? 과연 윤은서한테 진심이라는 게 있을까?”

강현은 은서와 결혼하고 얼마 안 됐을 때 함께했던 그 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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