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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5. 연애 전문가 데릭 (24/25)

외전5. 연애 전문가 데릭

“흐음.”

오드리는 집무실 책상 위에 대충 걸터앉은 채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데릭 역시 사뭇 심각한 얼굴로 초상화를 든 채 한참이나 집무실을 서성였다.

─탁.

마침내 오드리의 스물한 번째 초상화가 집무실 한편에 자리 잡은 순간.

‘완벽하군.’

데릭은 아주 흐뭇한 얼굴로 오드리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가파른 지붕 모양으로 한껏 모여 있는 연분홍색 눈썹이 여간 심상치가 않았다.

“……!”

이른 아침부터 너무 부산을 떨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가 뭔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단 말인가?

흠칫 놀란 데릭은 조심스레 오드리의 곁으로 다가섰다.

“도돌이.”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이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도돌이?”

“아!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초상화는 걸었어요?”

데릭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집무실은 이제 ‘집념의 도돌이 방’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어느 날부턴가 어두운색의 실크 벽지 위로 오드리의 초상화가 하나둘 자리 잡기 시작하더니, 결국 집무실 전체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물론 사이 사이로는 아이들의 초상화도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루카스는 오늘도 오후에나 출근한대요?”

“……!”

데릭의 목울대가 거칠게 일렁였다.

게슴츠레하게 좁아진 반달눈과 앙증맞게 깨문 입술. 이건 도돌이가 보내는 은밀한 신호임이 분명하다.

데릭은 떨리는 눈으로 훤한 창문과 집무실 문을 재빨리 번갈아 보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렇다.”

날카로운 눈매가 그윽하게 내리깔렸다. 이어서 유혹적인 몸짓으로 도돌이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역시!”

“…….”

별안간 오드리가 책상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우뚝 멈춰 선 데릭은 멀어지는 도돌이의 뒷모습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데릭, 요즘 들어 루카스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루카스?

데릭이 눈을 번뜩였다.

지금 이 상황에 다른 남자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괜스레 심통이 났다.

“글쎄.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아서 잘 모르겠군.”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사람이 무단결근에 조퇴까지 하잖아요.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요.”

“……걱정?”

─휙.

데릭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분명 두 사람은 결혼식에서 서약하지 않았던가? 온 마음을 다해 평생토록 서로만을 사랑하겠노라고! 생판 남인 보좌관을 걱정해도 된다는 내용 따윈 없었단 말이다.

“루카스는 가족 같은 사이잖아요. 우리 아니면 누가 신경 써 주겠어요?”

“하지만.”

“데릭이 물어보는 게 루카스에게도 편할 거예요.”

“…….”

일자로 다문 입술엔 불만이 가득했으나, 어차피 데릭의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무릇 사랑받는 남편이 되려면 아내 말을 잘 들어야 하는 법이니까.

* * *

오후가 되자마자 출근한 루카스는 확실히 이상해 보였다. 집무실 한쪽에 앉아 목각 인형을 성의 없이 흔드는 팔과 텅 빈 눈에는 영혼이랄 게 없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뽀각.

“모, 모니카……!”

“헉.”

대형 사고가 터졌다.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던 목각 인형의 목이 똑 부러지고 만 것이다. 루카스는 두 동강 난 인형을 허둥지둥 등 뒤로 숨겼다.

“아, 아가씨, 그게, 아니-.”

“오데트, 데미안. 이만 유모에게 갈 시간이다.”

바람처럼 나타난 데릭이 울먹거리는 오데트를 얼른 안아 들고 데미안에게도 손을 뻗었다. 그러나 무뚝뚝한 아들은 이미 제 발로 걸어 나가는 중이었다.

“아빠, 모니카는 죽은 거예요? 그런 거예요? 이, 이제 오데트랑 못 놀아요?”

“……죽은 건 아니고 잠시 기절한 것뿐이야.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럼 오데트가 모니카 옆에 있어 줄래요. 네?”

데릭은 목에 매달려 오는 딸을 간신히 떼어 놓았다.

“모니카도 의원을 만나 봐야지.”

“아빠아.”

“세 밤만 자고 나면 만날 수 있을 거다. 알겠지?”

“히잉.”

누가 도돌이 딸 아니랄까 봐.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올려다보는 애처로운 눈망울이 아주 엄마를 쏙 빼닮아 있었다. 데릭은 가슴이 만 갈래로 찢어지는 고통을 참으며 집무실 문을 닫았다.

“가, 각하. 인형은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상 복구를-.”

“무슨 일이지?”

“예?”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안 하던 무단결근이며 조퇴를 해서 괜히 도돌이의 걱정을 사느냔 말이다.”

프리트 공작은 영 마뜩잖은 얼굴로 보좌관의 행색을 살폈다.

밤잠을 설쳤는지 퀭한 눈과 거뭇거뭇한 눈 밑 그림자. 출근과 동시에 퇴근을 갈망하며 들썩이는 엉덩이.

데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도박이라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이래 봬도 아주 건실한 청년이란 말입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지?”

“그게…….”

“얼른 털어놔라. 단숨에 해결해 줄 테니.”

한참을 망설이던 루카스가 깊은 한숨과 함께 털어놓은 사연이란 이러했다.

* * *

오데트와 데미안의 생일을 앞두고 수도의 유명 꽃집에 방문했던 날.

“어서 오세요.”

“……!”

루카스는 꽃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숨을 멈췄다.

대충 내려 묶은 듯한 은색 머리칼과 맑은 민트색 눈동자. 팔꿈치까지 돌돌 말아 올린 셔츠. 환하게 웃는 꽃집 점원에게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만 것이다.

“뭐 찾는 거라도 있으세요?”

“그, 케, 케이크 좀 주, 주십시오!”

“네? 여긴 꽃집인데요?”

“……!”

아차.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루카스는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몸을 돌려 가게를 뛰쳐나왔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날 이후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하아…….”

시도 때도 없이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고, 정신을 차려보면 저도 모르게 꽃집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이대로는 안 돼.’

결국, 루카스는 잔뜩 멋을 부리고 비장한 얼굴로 꽃집 문을 열었다.

─딸랑.

“어, 또 오셨네요?”

“……예.”

그는 한 박자 늦게 모자를 벗어 들곤 가슴 앞에다 다소곳이 포개었다. 하지만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은 저도 모르게 길쭉한 신사 모자를 쥐어뜯고 있었다.

“오늘은 간판을 제대로 확인하고 들어오신 거겠죠?”

“그, 아니, 예. 꽃집. 꽃집이죠. 꽃 사러 왔습니다.”

점원은 고개를 숙여 웃었다.

“농담이에요. 다시 뵈니까 반가워서요. 앞으로도 자주 들러 주세요.”

“……!”

얼마 후. 꽃집을 나서는 그의 손엔 생각에도 없던 커다란 꽃바구니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자주…… 들러 달라고…….’

루카스는 점원의 말을 곱씹으며 헤벌쭉 웃었다. 하늘을 날 것 같았다. 무단결근으로 주군에게 한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쌍둥이들이 주군의 다리를 한쪽씩 잡고 매달린 덕분에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다.

그 뒤로 루카스는 매일같이 꽃집을 찾았다.

─딸랑.

“꽃다발 하나만 주세요, 리엔.”

“루카스 님! 좀 늦으셨네요? 오늘은 안 오시려나 했어요.”

“일이 많아서 겨우 처리하고 오는 길입니다. 혹시 꽃집 문이 닫혀 있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직 열려 있어서 다행이네요.”

“네, 뭐. 저도 일이 많아서요.”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루카스 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꽃을 사 가시네요. 애인에게 선물하시는 건가요?”

“……예?”

“루카스 님 애인은 좋겠다. 매일 꽃도 선물 받고. 너무너무 부러운 거 있죠?”

희게 질린 루카스가 말까지 더듬으며 팔짝 뛰었다.

“그, 그, 그런 거 아닙니다. 애인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저는 아직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 본 순결한 몸이란 말입니다!”

“네?”

“……!”

망했다. 상대가 묻지도 않았는데, 모태솔로라고 스스럼없이 고백해 버리다니! 아주 얼간이가 따로 없었다.

“아무튼,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저기-.”

당황한 루카스는 재빨리 값을 치르고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왔다.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날부터였을까? 루카스는 부쩍 생각에 잠겨 있는 날이 많아졌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도 실없는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애인. 애인이라.”

매일 밤 꽃다발을 사서 선물할 수 있는 연인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창가엔 갈 곳 없는 꽃들이 늘어 가고 있었다.

* * *

“사랑에 빠졌다는 말이로군.”

“가, 각하!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혹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파드득 놀란 루카스가 둘뿐인 집무실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프리트 공작은 그런 보좌관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네가 제일 시끄럽다.”

“아무튼, 각하께서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데릭은 여유로운 얼굴로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각하?”

“받아라. 내겐 더 이상 필요 없는 것들이다.”

“으앗!”

─턱.

“특별히 선별한 것들이니 아침저녁으로 틈틈이 읽어 완벽하게 체화하도록. 너도 할 수 있다.”

“…….”

그가 내민 것은 장장 열 권에 달하는 연애서였다.

프리트 공작의 사랑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 왔던 루카스는 어색하게 웃어넘기려 했다.

“저, 각하. 신경 써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도록-.”

“계속 얼간이처럼 굴 작정인가? 안 봐도 뻔하다. 잔뜩 긴장해서는 말실수나 하고 있겠지.”

그, 그걸 어떻게 아셨지?

프리트 공작은 루카스가 리엔 앞에서 했던 행동들을 보지도 않고서 정확히 읊어 댔다.

“그래서야 백 년이 지나도 제대로 된 고백 한 번 못 할 것이다.”

“……!”

마지막 말은 거의 쐐기나 다름없었다.

루카스는 새삼 존경심 어린 눈으로 주군을 우러러보았다.

‘영 숙맥이신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연애 전문가 같지 뭔가. 아무렴. 잘못 배달된 연애편지를 받고도 끝끝내 사랑을 쟁취해 낸 분이시니 적어도 루카스보단 낫겠지.

루카스는 냅다 무릎을 꿇었다.

“제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 * *

데릭은 아주 위풍당당한 자태로 오드리를 맞이했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대형견 같은 눈빛이었다.

“루카스 문제는 금방 해결될 듯하다. 별일 아니더군.”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모양이다. 첫눈에 반했다더군. 내가 그대에게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

오드리는 기쁜 소식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발을 도다닥 굴렀다.

안 그래도 서른이 넘도록 소처럼 일만 하는 루카스가 신경 쓰이던 참이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니! 잘만 하면 올해가 가기 전에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 잘되어야 할 텐데.”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도와주기로 했거든.”

“……데릭이요?”

순간, 오드리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자취를 감추었다.

“어, 으음, 그런데 연애는 알아서 하도록 놔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는 게 영 없어 보이기에 일단 연애서만 빌려주었다.”

“……!”

“그것만 익혀도 분명 좋은 성과를 얻겠지. 나처럼. 그러니 그대는 걱정할 필요 없다.”

오드리는 의기양양한 데릭을 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큰일이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 * *

루카스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리엔의 꽃집 근처를 서성였다.

이건 전부 주군 때문이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꽃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매일같이 출석 도장을 찍어도 모자랄 판국에 찾아가지도 말라니요! 분명 도와주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게 바로 밀고 당기기라는 것이다. 연애의 핵심 기술이지.’

주군은 거리 두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적당한 거리감으로 상대방의 궁금증을 유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 같이 오던 사람이 갑자기 발길을 끊으면 걱정이 되고 궁금해지는 게 사람 심리다.’

‘하지만.’

‘그리고 도돌이도 나와 떨어져 있을 때 비로소 자기 마음을 깨달았다고 했지.’

황녀 구출 사건까지 들먹이며 본인의 성공담을 들려주는데, 루카스로선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리엔…….”

먼발치에서나마 꽃집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사뭇 절절했다.

벌써 사흘째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루카스의 초조함은 커져만 갔다.

“각하.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겁니까?”

“아직 나흘밖에 안 되지 않았나.”

“나흘이나 된 것이지요! 이러다 리엔이 저를 잊어버리진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데릭은 조급하게 구는 루카스를 진정시켰다.

“너야 첫눈에 반했다지만, 상대방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 적어도 네 존재를 의식하게 만들어야지. 인내심을 좀 가져라.”

케벨슨 영애의 말 한마디에 온갖 유난을 떠시던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루카스는 이제 속이 타서 죽기 직전이었다.

‘일주일이 이렇게나 길었나?’

하루는 또 어찌나 긴지. 아침저녁으로 꽃집 근처를 서성이다가 참지 못하고 그대로 뛰어들어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왠지 멍해 보이는 리엔을 보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지 묻고 싶어졌다. 평소보다 늦은 시각에 가게를 닫는 것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 같았다.

* * *

“푸읍!”

꽃집이 잘 보이는 카페테라스에 자리 잡은 루카스는 먹던 것을 그대로 뿜어냈다. 오늘따라 유독 남자 손님들로 붐비는 꽃집 안. 웬 사내 하나가 리엔에게 집적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적색 경보음이 울렸다.

“여기 계산이요!”

비상. 비상.

마음이 급해진 루카스는 허둥지둥 계산을 마치고 곧장 꽃집으로 달려갔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꽃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얼핏 주군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지만, 루카스를 멈출 순 없었다.

혹여나 이대로 리엔이 다른 사내에게 가 버린다면 밀고 당기기가 전부 무슨 소용이겠는가? 기껏 받은 연애서도 몽땅 휴짓조각이나 되고 말겠지.

─딸랑.

“어? 루카스 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꽃, 허억, 꽃다발, 좀, 주십시오!”

“이거 어쩌죠? 먼저 오신 분들이 계셔서요.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예.”

그래도 닷새나 못 봤으니 조금은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덤덤한 반응에 실망한 루카스는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구석 벤치에 웅크려 앉았다.

‘매일 같이 오던 사람이 갑자기 발길을 끊으면 걱정이 되고 궁금해지는 게 사람 심리라면서요?’

어쩐지 지난 닷새 동안 루카스 혼자만 괴로워한 느낌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매일 보러올걸.

“오늘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러는 사이, 마지막 손님을 응대한 리엔이 루카스에게 다가왔다. 미묘한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그동안 엄청 바쁘셨나 봐요?”

“……예.”

“그렇구나. 아, 이번 주말에는 시간 되세요?”

“……예.”

“잘됐네요. 그럼 애인도 없으신 마당에 저랑 데이트나 하는 거 어때요?”

“예……, 예에?!”

기계적인 대답만 반복하던 루카스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싫으세요?”

─도리도리도리도리.

“좋아요. 그럼 토요일 오후에 광장 이정표 앞에서 만나요.”

“……!”

“꽃다발은 그때 드릴게요.”

루카스는 넋이 나간 얼굴로 꽃집을 나섰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먼저 마음을 고백하러 갔건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역으로 데이트 신청을 받은 꼴이다.

정말로 주군의 밀고 당기기 수법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헤헤.”

아무렴, 좋은 게 좋은 거지.

루카스는 히죽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니었다.

* * *

‘저는 절대로 결혼이나 연애 따위 안 할 거예요. 남자라면 이골이 나요.’

리엔은 어렸을 때부터 독신으로 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모든 것이 빼어난 외모 때문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촌동네의 기적’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했는데, 대부분은 아주 불쾌한 관심이었다.

‘아가. 이웃 마을에 높으신 나리가 와 계시는데, 그분께서 잠깐 너를 만나고 싶으시단다.’

‘저를 왜요?’

‘몰라서 묻누?’

리엔을 직접 받아 줬다는 산파가 주름진 얼굴로 웃었다.

‘영리하게 굴어야지. 평민이 이런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건 더 없는 축복이란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귀족 나리의 정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

‘촌부로 늙어 죽을 바엔 평생 돈 걱정이나 안 하고 사는 게 낫지 않겠누?’

‘저는 그런 거에 관심 없어요.’

마을 사람들은 리엔이 누군가의 정부가 되어 떠나는 미래를 아주 당연시 여겼다. 그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평민 여성의 숙명인 것처럼.

그녀가 가는 길에는 일찍부터 경멸 어린 시선이 뒤따랐다. 어떻게 해서든 모욕을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씨, 내가 돈만 있었어도…….’

‘돈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오늘 밤에 도박장이나 갈래?’

‘작위라도 따시려고? 하긴. 우리 같은 소작농이 신분 상승하려면 도박밖에 답이 없지.’

‘일단 작위랑 돈만 있으면 정부 셋은 들일 수 있는 거 아니겠냐.’

‘셋? 다섯은 거뜬하지!’

그러나 경멸 어린 시선 속에 담긴 탐욕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딸을 가진 부모들은 그들의 딸이 리엔과 어울리지 못하도록 막았다. 혹여 나쁜 물이 들까 걱정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주머니, 저는 손가락질받을 짓 따윈 하지 않았어요. 그럴 생각도 없고요.’

‘물론 지금까지는 그랬겠지. 하지만 앞으로는 또 모르는 일 아니니?’

‘……!’

‘미안하지만 네게 맡길 일거리는 없을 것 같구나.’

누구도 리엔의 억울함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한 공포는 폐병을 앓던 홀아버지를 여읜 뒤부터 시작되었다.

─쾅!

‘야, 똑바로 좀 해 봐. 안 열리잖아! 그 상인 놈이 사기 친 거 아니야?’

‘아냐. 분명 만능열쇠랬는데…….’

‘야, 야! 저기 횃불! 튀어!’

매일 밤, 리엔의 집엔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리엔은 다락방 구석에 몸을 숨긴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낮이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 아이인가? 뭐, 나쁘지 않군.’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아무나 들이밀겠습니까.’

하루가 멀다고 찾아오는 귀족들이 시장바닥에서 물건을 품평하듯 그녀를 보고 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막 성년이 된 리엔을 지켜 주기는커녕, 귀족과 다리를 놓아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중간에서 뭐라도 얻어먹어 보려는 심산이었겠지.

‘이대로는 안 돼.’

결국, 리엔은 밤을 틈타 도망쳤다.

얼굴과 머리에 진흙을 바르고 소달구지를 몇 번이나 얻어탄 후에야 수도에 닿았다.

맨 처음에는 일을 구하지 못해 버려진 꽃을 주워다 팔았다. 조금씩 돈이 모이기 시작했고, 나중엔 멀끔한 일자리도 얻었다. 예쁜 외모도 시골에서만큼 큰 주목을 받진 않아서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5년 후.

‘어서 오세요!’

리엔은 인적이 드문 골목 끄트머리에 조그마한 꽃집을 열었다. 잔뜩 날이 서 있던 아가씨는 광장 중심부를 향해 가게를 확장해 나가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평생 혼자 살겠다는 다짐엔 여전히 변함이 없었지만.

20대의 마지막 해. 그녀의 꽃집은 드디어 수도 중심부에 당당히 자리 잡았다. 동시에, 영원히 혼자일 줄 알았던 그녀의 삶에 조금 이상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 케, 케이크 좀 주, 주십시오!’

쉽게 말을 건네고 가볍게 추파를 던지는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그, 그, 그런 거 아닙니다. 애인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저는 아직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 본 순결한 몸이란 말입니다!’

솔직히 그의 마음을 몰랐다면 거짓말이다. 이미 얼굴에 티가 났거든.

그런데 매일같이 찾아오던 남자가 홀연히 사라졌다.

처음엔 그저 늦는 건 줄 알았다. 가끔 그랬으니까. 하지만 영업시간을 1시간이나 넘기고도 나타나지 않자 확신이 들었다.

‘그럼 그렇지.’

사내들이란 뻔하다. 간이며 쓸개며 빼 줄 것처럼 굴다가도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꿔 버리지.

그렇게 천천히 마음을 비워 갈 무렵. 이상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저걸 숨는다고 숨은 거야?’

마차 뒤에 어설프게 숨어 그녀의 가게만 애타게 바라보는 루카스였다.

곧바로 답이 나왔다. 일부러 발길을 끊었다가 다시 나타났을 때, 그녀가 살갑게 맞이해 주길 바란 거겠지.

리엔은 그런 수작질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아주 보란 듯이 남자 손님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얼마 후.

‘꽃, 허억, 꽃다발, 좀, 주십시오!’

예상대로 다급한 얼굴의 루카스가 들이닥쳤다. 리엔이 별로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 않자 시시각각 시무룩해지는 얼굴은 생각보다 귀여웠다.

그래서일까?

‘잘됐네요. 그럼 애인도 없으신 마당에 저랑 데이트나 하는 거 어때요?’

리엔은 충동적으로 데이트 신청을 하고 말았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뭐. 남자랑 데이트 한 번 한다고 인생이 눈에 띄게 망하기라도 하겠는가.

그녀는 속 편하게 생각했다. 원래 인생은 예측 불가능하게 흐르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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