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 그렇게 아빠가 된다
낙뢰를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날 밤.
황후의 출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귀족들이 서둘러 황성에 모여들었다. 고통스러운 비명은 오케스트라의 선율 속에 묻혀 버리고, 아래층에선 한바탕 축제가 열렸다.
“허허, 오랜만에 황성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다 듣겠군.”
“그러게나 말이오. 폐하의 탄생을 지켜본 게 꼭 엊그제만 같은데…… 시간이 화살보다 빠른 것 같소.”
그러나 데릭은 쉽사리 대화에 끼지 못하고 자꾸만 창밖을 응시했다.
‘도돌이가 잠들었어야 할 텐데.’
임신 중엔 절대 안정이 중요하다지 않나. 살벌하게 흔들리는 창문 때문에 혹여 잠을 설치고 있진 않을까, 문득 걱정이 솟았다.
“흠흠. 프리트 공작님.”
“…….”
“오오, 몰레 자작. 소식은 들었네. 자작 부인이 아이를 가졌다지? 진심으로 축하하네.”
“아, 예. 감사합니다.”
아이를 가져?
데릭은 본능적으로 몰레 자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성에 도착한 뒤로 프리트 공작의 주위만 맴돌던 남자는 드디어 마음 편히 웃었다.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요? 공작 부인께서도 아이를 가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자작 부인은 얼마나 되었지?”
“아마…… 사 개월, 오 개월 정도 되었을 겁니다.”
데릭은 진지한 얼굴로 동조했다.
“도돌이와 비슷하군. 의원 말로는 십이 주라던데.”
“남자 대 남자로 공작님과 같은 고민을 나눌 수 있어 참으로 기쁩니다.”
“마침 잘되었군. 자작은 어떤 육아서로 공부를 하고 있지?”
그러나 타이밍만 재고 있던 몰레 자작은 기다렸다는 듯, 눈치도 없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언제 한번 시간을 내주십시오. 제가 아주 좋은 곳을 압니다.”
“좋은 곳?”
“예. 공작님께서도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임신한 부인께선 조심할 게 워낙 많아야지요.”
“그건 그렇지. 도돌이는 아주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음식을 가리느라 여간 고생을-”
“그러니 공작님, 적당히 비밀스러운 곳에서 서로의 고민을 나눠보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
데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몰레 자작의 더러운 속내를 한 박자 늦게 눈치챈 까닭이다.
‘아주 난잡하기 그지없군.’
상종도 못 할 인간 같으니라고. 자작을 노려보는 눈동자엔 혐오와 경멸이 넘실거렸다.
“나는 짐승과 말을 섞지 않는다.”
“공작님, 그러지 마시고-”
그런데 그때.
“으아아앙!”
모두가 기다렸던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아아…….”
감격한 황제가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 이런 뜻깊은 날에 경들과 함께하여 참으로 기쁘군. 드디어 제국의 새로운 미래가 탄생했도다!”
“크리앙트 제국에 영원한 축복이 함께하기를!”
“자, 다 같이 잔을 들지. 어서.”
패트릭은 기분 좋게 샴페인 잔을 비워 냈다. 그 뒤로 귀족들의 축하 인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황후는? 아직인가?”
“곧 내려오실 겁니다.”
“황후도 얼른 내려와서 축하를 받아야지. 암, 분명 기뻐할 거야.”
황제가 닦달하자 시종장은 눈치껏 위층에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얼마 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시녀의 부축을 받은 황후가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보는 눈들 때문에 억지로 웃고 있었으나, 초췌한 안색은 영 말이 아니었다.
“황후, 오, 나의 카타리나! 정말 고생 많았소!”
“……아닙니다, 폐하.”
“내 평생의 사랑은 오직 당신뿐. 그대를 만난 것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요!”
“…….”
귀족들은 황후를 사랑하는 황제의 모습에서 벌써부터 성군의 자질이 엿보인다며 칭찬을 쏟아 냈다.
그러나 데릭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기괴하군.’
저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이 맞나? 산고에 시달리느라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부인을 이끌고 나와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키고야 마는 남자가 정말로 정상이 맞냔 말이다.
‘도돌이가 이런 일을 겪게 할 수는 없다.’
당장이라도 제국을 떠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도돌이가 아이를 낳고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그는 조금이라도 도돌이를 고생시킬 만한 빌미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 * *
“윽, 못 먹겠어요…….”
오드리가 괴로운 얼굴로 접시를 밀어냈다. 그러자 데릭은 번개처럼 일어나 베드 테이블을 침실 밖으로 치워 버렸다.
“또 식사를 거르려고요?”
“말했지 않나. 내가 대신 낳아 줄 수 없으니 고통이라도 함께 나누겠다고. 그래야 마땅하지.”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나는 부끄러운 아빠가 되고 싶지 않다.”
“…….”
도대체 황후의 출산 기념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데릭은 돌아오자마자 루카스에게 장기 휴가 계획을 통보하더니, 갑작스러운 별장행을 택했다. 원래도 유난스럽던 그의 보살핌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벌써 한 시로군. 정원을 산책할 시간이다.”
“…….”
시계를 확인한 데릭이 그녀를 조심조심 안아 들고선 의자 카트 위에 앉혀 주었다.
‘교도소 생활도 이렇게 규칙적이진 않을 텐데.’
이미 체념한 오드리는 익숙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매일 밤늦게까지 온갖 육아 관련 서적들을 손에서 놓지 않는 그의 열정을 생각해서라도 적극 협조해야 하지 않겠는가.
─돌돌돌돌돌.
데릭은 걷는 것보다도 느린 속도로 신중하게 카트를 밀었다.
그렇게 현관문에 도착했을 무렵.
“…….”
무릎에 담요까지 덮은 오드리는 어느새 도롱도롱 잠들어 있었다.
* * *
데릭은 잠이 든 오드리의 배를 걱정스레 응시했다.
“저러다 도돌이의 배가 터져 버릴까 무섭다.”
“흐음.”
“대체 언제까지 부푸는 거지? 이제 육 개월인데 꼭 만삭 같지 않나.”
오드리의 상태를 살피던 의원이 묘한 얼굴로 일어섰다.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심각한가?”
숨이 넘어가는 데릭을 앞에 두고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의원이 활짝 웃어 보였다.
“양쪽 팔이 가득 차겠군요. 쌍둥이입니다.”
“……!”
데릭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쌍둥이?’
도돌이의 자그마한 몸 안에 새 생명이 둘이나 살아 숨 쉬고 있다고? 그럴 수가 있나?
그가 침대 주위를 정신 사납게 서성이기 시작했다.
“쌍둥이라니…….”
“각하?”
“출산 시 위험부담이 커지지는 않나? 혹여 도돌이가 잘못되는 건 아니고?”
“벌써부터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 잘될 겁니다.”
그러나 초보 아빠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이는 혼자 놔둔다고 알아서 자라지 않는다. 사랑과 관심을 쏟아부어 정성으로 키워야 하는 존재.’
과연 그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하나도 힘들다던데, 둘을 잘 키워 낼 수 있을까? 남들도 다 이렇게 미성숙하고 부족한 상태로 부모가 되는 걸까?
홀로 남은 데릭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가야.”
도돌이가 그랬다. 배 속의 아이도 부모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데릭은 영 쑥스러운 나머지, 아무 말이나 해 보라는 도돌이의 부탁을 에둘러 거절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동그랗게 부푼 배에 먼저 손을 얹고,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듣고 있는 건가.”
당연히 배 속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데릭은 아이들에게 해 줄 말을 신중하게 고르고 고르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엄마를 아프게 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
아차.
그가 뒤늦게 오드리의 눈치를 살폈다.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라.”
데릭은 재빨리 정정했다.
“너희를 도돌이만큼 사랑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최선을 다해 책임지겠다. 아빠로서.”
그런데 그때.
─통.
무언가가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를 가볍게 두드렸다.
“……!”
놀란 데릭은 당장 배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곤 얼이 빠진 얼굴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있길 잠시.
“의원!”
그가 허둥지둥 침실을 뛰쳐나갔다.
─쾅!
“아이가, 아이가 나오려 한다.”
“예에? 그럴 리가 없는데.”
“얼른!”
막 별장을 떠나려던 의원은 프리트 공작의 등쌀에 떠밀려 헐레벌떡 침실로 돌아왔다.
“방금, 배가 크게 꾸물댔다. 내 손바닥으로 느꼈으니 분명하다. 무언가 튀어나왔어. 이건 아이가 나오려는 징조 아닌가?”
“크흠, 각하.”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어서 뭐라도 해 봐라, 어서!”
의원의 광대가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각하. 이건 아이가 나오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태동이지요.”
“……뭐?”
“아무래도 아이들이 아빠 목소리를 알아듣나 봅니다.”
아빠.
아빠라니.
“앞으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수시로 말을 건네주십시오. 아이들도 좋아할 겁니다.”
“…….”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가 느낀 게 태동이었다니.
덜덜 떨리는 손이 다시 한번 도돌이의 배 위에 얹어졌다. 이 속에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이제야 비로소 실감 났다.
“진짜로, 진짜로 듣고 있는 건가?”
─통.
“……!”
다시 한번 힘찬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데릭의 마음에 남아 있던 미약한 의심들이 전부 자취를 감추었다.
“…….”
여태껏 데릭이 걱정했던 건 오로지 도돌이의 안위였다. 만약 아이들이 태어나면 도돌이를 향한 마음의 절반만큼이라도 흉내 낼 수 있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아이들과 교감한 순간, 강한 확신이 들었다. 도돌이와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도 바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많이 사랑해 주겠다. 도돌이도, 그리고 너희도.”
데릭은 잠든 그녀의 이마 위로 여러 번 입을 맞췄다. 그가 온전한 가족을 갖는 건 거의 10년 만의 일 아니던가.
두 사람을 쏙 빼닮았을 아이들을 하루빨리 만나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