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데릭이 사라졌다
초여름의 어느 날. 오드리와 카타리나 황후는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티타임을 가졌다.
“아, 그러고 보니 차가 한 종류밖에 없네요. 미안해요. 커피나 홍차를 가져오라 할까요?”
“괜찮아요. 루이보스 차도 향이 좋은걸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황후는 어느새 만삭이 된 배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오드리의 시선도 동그랗게 부푼 배를 향했다.
‘신기해.’
저 배 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다니. 출산이 가까워진 황후는 숨 쉬는 것도 벅차 보였지만, 황태자비 시절보단 여유가 흘러넘쳤다. 마치 망령처럼 따라다니던 불안감들을 전부 떨쳐 낸 사람처럼.
“오드리,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를 이어서 해줘요. 신비주의 마법사 ‘클로디아 오벨’이야기요!”
“앗, 그게.”
“어떻게 가짜 신분을 만들어 낼 생각을 다 했어요? 나라면 생각도 못 했을 텐데…….”
“전부 수입해 온 마도구라고 하기엔 좀 의심스럽잖아요. 한스의 공이 컸어요.”
“아아, 참 아름다운 우정이에요.”
카타리나는 유독 오드리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까지. 본인이라면 꿈도 못 꿨을 스펙터클한 인생 이야기가 신선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던 오드리가 거동이 불편한 황후를 대신해 몸을 일으켰다.
“어, 벌써 주전자가 비었네요. 제가 가지고 올게요!”
“고마워요, 오드리.”
그러자 카타리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창밖을 향했다.
‘……프리트 공작?’
세상에!
카타리나는 황급히 숨을 골랐다. 정원에 서서 창문을 빤히 올려다보는 얼굴이 영 험악한 탓이었다.
‘분명 오드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거겠지.’
어쨌거나 태교에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카타리나는 오드리와 함께 점심을 하려던 계획을 당장 취소했다.
한편, 주전자를 가지러 갔던 오드리는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다.
─촤라락.
“앗!”
책상 끝에 아슬하게 걸쳐 있던 종이 뭉치가 드레스 자락에 쓸려 떨어진 것이다.
‘어떡해, 어떡해.’
오드리는 재빨리 종이를 그러모았다. 그런데 그 틈으로 수상한 편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살아서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마세요. 다음 만남은 둘 중 한 명의 장례식이 될……
뒷부분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상대방을 향한 증오가 여실히 느껴졌다.
‘내 정신 좀 봐!’
오드리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남의 편지를 몰래 읽다니! 이건 3살짜리 아이도 하지 않을 치졸한 행동 아닌가.
허둥지둥 주전자를 챙겨 든 오드리가 재빨리 창가로 돌아왔다.
“흠흠. 오드리? 창밖을 보세요.”
“네?”
“프리트 공작이 눈으로 시위하고 있거든요. 당장 아내를 내놓으라고.”
“……!”
오드리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러자 창문 너머로 시선을 마주한 데릭이 곧장 입꼬리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다.
‘데릭도 참.’
속으로 그를 타박하던 오드리 역시 창문에 찰싹 달라붙었다.
‘보. 고. 싶. 었. 어. 요.’
잘 보이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일단 뻐끔거리고 보는 입술이 참으로 애틋했다.
두 사람은 창문 너머로 아주 절절한 시선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서로의 입 모양은 알 수 없었지만.
“오드리, 아무래도 이만 헤어지는 게 좋겠어요.”
“앗, 죄송해요. 제가 잠시 한눈을……!”
“그러지 말고 어서 나가 보세요. 저러다 병나겠어요.”
“헤헤.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럼 안녕히.”
“조심히 가요.”
홀로 남은 카타리나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방에서 나갈 때만 해도 얌전하던 오드리는 어느새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 프리트 공작이 반색하며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저렇게도 좋을까.”
주위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는 게 참으로 신혼부부다웠다.
“황후 폐하,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자스민.”
카타리나는 하녀를 곁에 세워 둔 채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 책상을 향해 손짓했다.
“저기 놓인 편지 좀 보내 줄래?”
“어디로 보내면 될까요?”
“……프리즌 섬으로.”
“어쩜, 선황 폐하께서 좋아하실 거예요.”
까막눈인 하녀는 꼼꼼하게 편지를 접은 뒤, 촛농이 굳기 전에 재빨리 황후의 인장을 찍었다.
그것이 프리즌 섬으로 향하는 마지막 편지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 * *
이른 새벽. 데릭은 홀로 침실을 나서면서도 몇 번이나 미련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곤히 잠든 도돌이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
벌써 며칠째였다. 함께 출근하고 함께 퇴근하던 오붓한 일상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도돌이가 내게 이럴 수는 없다.’
연애할 때만 하더라도 새벽에 만나 자정에 헤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 아니었나?
그런데 도돌이는 결혼한 뒤로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침이면 눈을 뜨지 못했고, 저녁이면 피곤하다며 먼저 들어가 잠을 청했다.
‘설마 마음이 식은 건…….’
생각만으로도 왼쪽 가슴에서 찌르르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읏.”
그는 아직도 고 깜찍한 얼굴만 보면 심장이 쿵쾅대서 미치겠는데. 너무도 좋아 죽겠는데!
데릭은 못내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간 자기가 100개가 넘는 캉처르 침대를 부숴 먹느라 도돌이를 혹사시켰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이대론 안 된다. 오드리의 사랑을 되돌릴 대책을 강구해야 해.’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일 테다.
하지만 혹시라도 도돌이가 그에게 질려 버리면 어쩐단 말인가? 이런 그를 피곤하다 여기지는 않을까?
데릭은 초조하게 집무실을 서성거렸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 * *
“하암. 저 먼저 들어갈게요.”
“……!”
또다. 하루 종일 꾸벅꾸벅 졸던 도돌이는 결국 데릭만 남겨 둔 채 먼저 집무실을 나섰다.
데릭은 울적한 얼굴로 대충 서명을 휘갈겼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은데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부부란 원래 이런 것인가? 서로에게 무심해지는 것? 하지만, 하지만…… 그토록 사랑했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가 있느냔 말이야.’
마음이 복잡한 데릭은 남은 일거리를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지금 시각은 9시. 도돌이는 이미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아마 그가 외박을 해도 모르겠지.
“안 되겠다.”
얼굴을 쓸어내리던 데릭이 별안간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누군가의 조언을 구해야 할 듯싶었다. 결혼 생활을 오래 했으며, 부부 사이의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할 줄 아는 사람에게.
“루카스. 지하실에서 몽베르산 위스- 아니, 헤넛 약초로 담근 술을 내와라. 삼십 년 산이 좋겠군.”
“헤엑! 그 귀한 술을요?”
“곁들일 하몽도 함께 준비하도록. 나는 외출 준비를 하겠다.”
“예, 알겠습니다.”
루카스는 곧장 지하실로 향했다. 그러나 얼굴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대체 어디를 가려고 저러신담?’
잠든 부인 몰래 밤 외출이라니. 유부남이 정말 저래도 되는 걸까?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 * *
“하암. 데릭?”
세상모르고 잠들었던 오드리가 부스스 눈을 떴다. 평소와 달리 싸늘한 옆자리가 영 낯선 탓이었다.
“으응? 아직 일이 안 끝났나?”
오드리는 반쯤 감긴 눈으로 가운을 챙겨 입고 침실을 나섰다. 요즘 따라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쏟아지는지 모르겠다.
─철컥.
“데릭?”
그런데 집무실에도, 개인 서재에도, 심지어는 연무장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조명구를 든 채 공작성을 배회하던 오드리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 갔다. 잠기운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마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어서 주무시지 않고요.”
“지, 집사, 데릭이 사라졌어!”
“각하께서라면 출타 중이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허둥지둥 복도를 배회하던 오드리가 우뚝 멈춰 섰다.
‘출타? 이 시간에?’
하지만 저녁 9시쯤 나갔다는 남자는 자정이 될 때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 새벽 4시가 되었을 무렵.
“흐윽……!”
오드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이미 얼굴은 눈물범벅이 된 지 오래였다.
“어떻,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결혼식을 올린 지 고작 4개월.
그녀밖에 모르던 남편이 말 한마디 없이 외박을 감행했다. 슬픔과 배신감에 휩싸인 오드리는 당장 마도구로 포털을 열고 울며불며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흐윽, 아버지!”
“오드리?”
케벨슨 백작은 새벽녘에 잠옷 차림으로 달려온 딸을 보며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이내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다만, 일단 진정하거라. 이러다 큰일 나겠구나.”
“아버지, 데릭이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네?”
“…….”
“흑, 그런데 어디 외출하세요? 왜 새벽부터 옷을-.”
케벨슨 백작은 조용히 주방 쪽을 눈짓했다.
“도돌이?”
“……데릭?”
케벨슨 백작가의 주방 테이블엔 말도 없이 가출한 남편이 앉아 있었다. 텅 빈 술병과 함께.
오드리는 곧장 서럽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어떻, 흑, 어떻게 나한테 말도 없이 외박을 할 수 있어요?”
“……!”
“정말 너무해요!”
안절부절못하던 데릭은 그녀의 눈물을 보자마자 일단 주방에서 뛰쳐나갔다.
“외박이라니, 절대 아니다! 다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조금 시간이 늦-.”
“흐윽.”
“도돌이, 내가 다 잘못했다. 그러니 제발 눈물을 그쳐. 응?”
어떻게든 아내를 달래 보려 쩔쩔매는 모양새가 영 서툴기 그지없다.
케벨슨 백작은 피로에 찌든 눈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지.’
막 퇴근을 했을 땐 사위가 찾아오더니, 겨우겨우 달래서 보내려 하자 이번엔 딸이 들이닥쳤다.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하는 말도 쏙 빼닮아 있었다.
‘장인어른, 도돌이가 저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버지, 데릭이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네?’
그러나 처음으로 부부싸움을 하는가 싶던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제 잘못이에요, 흑!”
“이게 어떻게 그대의 잘못이지? 전부 내 탓이다. 내 생각이 짧았어.”
“……나는 이만 올라가 보마.”
“앞으론 혼자 출근하지 말고 꼭 깨워 줘요. 알았죠?”
“아니다. 내가 출근 시간을 늦춰 보지. 그대가 피곤한 건 싫으니.”
“크흠.”
졸지에 날을 꼴딱 샌 케벨슨 백작이 10년은 늙은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아주 피곤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