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5장. 홈, 스윗 홈 (19/25)

제15장. 홈, 스윗 홈

‘으응? 이상하다?’

집무실에 도착한 오드리는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마땅히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어야 순결 증명서가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영문을 모르는 데릭은 그녀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며 안절부절못했다.

“뭐 찾는 거라도 있는 건가.”

“…….”

“도돌이?”

곧 있으면 출근 시간이다. 그러니 두 사람이 오붓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

‘이럴 때가 아니란 말이다.’

참다못한 데릭이 도돌이의 팔을 슬쩍 잡아당겼다.

“앗.”

그러자 갸우뚱 중심을 잃은 오드리가 그의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데릭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심장과 멀지 않은 곳에서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졌다.

‘……하.’

만약 그가 도돌이를 사랑하는 만큼 꽉 끌어안았다면, 이 자그마한 몸은 진작에 터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데릭은 실수로라도 도돌이를 터뜨리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그런데 그때.

“……데릭.”

“도돌이?”

별안간 도돌이가 몸을 바르작거리기 시작하더니, 그의 품에서 쏙 빠져나갔다.

“……!”

데릭은 잔뜩 충격받은 얼굴로 차갑게 식은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도돌이가 그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혹시 뭔가 실수라도 한 게 있나 싶어 되짚어 보았지만,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으니.

“순결 증명서가 안 보여요.”

“……뭐?”

“저기 벽에 붙어 있던 거요.”

순결 증명서에 발이 달려서 도망갔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앙큼한 남자가 제 손으로 직접 치웠다는 건데, 이건 연인으로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오드리의 얼굴이 한껏 심각해졌다.

“다른 곳으로 치운 건가요?”

“그게-”

데릭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귓바퀴며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그가 슬쩍 도돌이의 눈치를 살폈다.

“……거짓말로 붙여 놓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거, 거짓말이요?”

“나는, 더 이상 순결한 몸이 아니니까.”

“……!”

오드리의 입술이 충격으로 바들바들 떨렸다.

‘순결한 몸이 아니라니?’

그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오늘따라 데릭이 낯설어 보였다.

“어떻, 어떻게 그런!”

“도돌이?”

“도대체 누구랑…….”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절절하게 매달리던 남자가 뒤로는 호박씨를 까고 있었다니! 아주 악독한 배신자가 따로 없다.

데릭은 기어코 울먹이는 도돌이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발밑으로 피가 몽땅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도돌이, 일단 진정을-”

“어떻게 그새 바람을 피울 수 있어요? 네? 정식으로 사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바람?”

“더 이상 순결한 몸이 아니라면서요! 도대체 어떤 여자예요?”

가만히 눈만 끔뻑이던 그가 의아한 듯 대꾸했다.

“어떤 여자냐니, 당연히 그대지.”

“이 거짓말쟁이!”

“도돌-”

오드리가 옹졸한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통통 두드렸다.

두 사람은 여태껏 입을 맞춘 게 전부 아니던가! 물론 그게 조금 길고 진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막사에서 함께 밤을 보냈을 때도 키스 이상은 없었다. 그럼에도 거짓으로 오드리의 이름을 대는 작태가 아주 기가 막혔다.

그런데 그때.

─쪽.

“……!”

허리를 굽힌 데릭이 불쑥 입을 맞춰 왔다.

“이,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짓말이 아니다. 그대가 전부 가져가지 않았나. 내 입술도, 첫 키스도.”

“…….”

“그러니 나는 더 이상 순결하지 않은 몸 아닌가.”

오드리는 화내던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눈만 끔뻑였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래도 저 남자가 뭔가 단단히 오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데릭은 수줍게 얼굴을 붉힌 채 고백을 이어 갔다.

“나는 그날, 별이 쏟아지는 언덕에서 그대에게 내 모든 것을 주었다.”

“…….”

“그래서 오자마자 떼어 버렸지.”

“……!”

오드리는 의기양양하게 대꾸하는 그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나마 그를 오해했던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는 까닭이다.

“도돌이.”

어느새 데릭이 그녀의 양쪽 볼을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 오드리는 턱을 바짝 치켜든 채 얌전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곧 있으면 출근 시간이다.”

“네?”

“그리고 지금은 우리 둘뿐이지.”

“……!”

잔뜩 내리깐 눈동자가 그녀의 입술 위를 진득하게 훑었다. 오드리의 시선도 어느새 그의 입술 위를 뜨겁게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렴 어때.’

어쨌든 한눈을 판 게 아니라면 된 거 아니겠는가.

“읍.”

두 사람의 몸이 불시에 맞붙었다. 오드리의 팔은 그의 목을, 데릭의 팔은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짙은 입맞춤은 공작성 복도가 소란스러워질 시간까지 멈추지 않았다.

* * *

데릭은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황성으로 불려갔다.

“오, 프리트 공작!”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어서 앉게.”

“예.”

유독 살갑게 맞이하는 얼굴부터, 처음으로 준비해 놓은 다과까지. 황제는 오늘따라 의뭉스럽게 굴었다.

“공작이 없었다면 황녀가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걸세.”

“전부 도돌이의 덕입니다.”

“아무튼, 다행이야.”

데릭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안 그래도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참, 마침 나도 공작의 도움이 필요했다네.”

“먼저 말씀하십시오.”

황제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별건 아니고, 얼마 전부터 마탑주가 짐을 협박하려 들더군.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지 뭔가?”

“…….”

“그래서 마탑과의 전쟁을 선언하려 하네. 여기에 공작이 힘을 보태 주었으면 하는데.”

황제의 뻔뻔한 말에 데릭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정신인가?’

도돌이의 오라비를 배척하는 일에 앞장서라니. 도돌이와 그의 관계를 뻔히 알면서도 굳이 데릭을 끌어들이려는 이유야 뻔했다. 도돌이에게 면죄부를 내어 주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그의 눈초리가 한껏 매서워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황제가 이렇게 나온다면야. 데릭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꽤 골치 아프시겠습니다.”

“그럴 게 뭐 있나. 공작이 함께-”

“황녀 저하께서 직접 납치를 사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파장이 크지 않겠습니까.”

“……뭐라?”

“심지어는 주술사들에게 제국의 영토까지 넘기려 하셨다지요. 그것도 엄연한 공작령의 땅을.”

“……!”

“폐하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황제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주술사와의 결탁이라니, 이는 제국의 건국이념에 반하는 행동 아닌가? 황녀가 그랬을 리 없네.”

데릭이 주머니에서 풀피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미 증거도 확보한 상태입니다.”

“공작이 뭔가 오해를 했겠지.”

“주술사 일당의 증언도 있습니다.”

“…….”

황제는 더 이상의 발뺌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꼬리라도 자르는 수밖에.

“공작, 굳이 일을 키울 필요가 있겠는가? 황녀라면 조만간 시집 보낼 생각이었네.”

“이대로 묻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황녀야 떠나면 그만 아닌가.”

데릭은 무표정한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면 지하 감옥에 있는 주술사는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뭐?”

황제의 손이 흠칫 떨렸다. 설마하니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눈치다.

“다들 놀랄 겁니다. 제국을 수호해야 할 황실이 사악한 주술사와 손을 잡고 있었다니.”

“……!”

“황성의 주인이 바뀌어도 할 말이 없지 않겠습니까.”

“프리트 공작!”

─탕!

분노한 황제가 의자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러나 데릭은 미동도 없었다.

“혹시 압니까. 마력석 폭발도 폐하께서 사주하셨을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짐이 얼마나 골머리를 앓는지 공작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할 뿐.”

“……!”

그때, 노크도 없이 알현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황제는 아주 불쾌한 얼굴로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황태자, 이 무슨 건방진-”

“아바마마.”

제멋대로 들이닥친 황태자가 곧장 연단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더니 천천히 연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황제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들을 불안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아바마마께서 그러셨지요. 크리앙트 제국은 저의 것이 될 거라고.”

“황태자가 끼어들 상황이 아니다.”

“어차피 제 것이 될 거, 지금 주시지요.”

“……뭐라?”

“공작도 약속했습니다. 제가 아바마마 대신 이 자리에 앉는다면, 그 어떤 것도 문제 삼지 않겠다고요.”

“……!”

황제의 시선이 곧장 데릭을 향했다. 마치 믿었던 이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표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른 황태자가 의자에 앉은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고귀한 혈통으로 황가의 명맥을 이어 나가야지요.”

“…….”

“제 아들뿐 아니라 손자들까지요.”

“…….”

“다른 이에게 황성을 빼앗긴 채 개처럼 끌려 나갈 순 없습니다.”

의자 팔걸이를 움켜쥔 황제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갔다.

‘황성을 빼앗겨?’

그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전부 이 황성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는가. 다른 이에게 빼앗긴다는 건 상상조차 못 할 일이다. 이는 제국민 앞에서 참수를 당하는 것보다도 훨씬 큰 치욕이자 모욕이었다.

마음이 급한 황태자는 고뇌에 빠진 황제를 연거푸 재촉했다.

“아바마마.”

“얼른 결정을 내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 마음이 바뀌기 전에.”

“…….”

그러나 황제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하나뿐이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네.”

“물론입니다.”

“아바마마!”

“당장 오늘부터 대관식을 준비해야겠군.”

들뜬 황태자가 데릭을 곁눈질했다.

이 모든 건 한밤중의 은밀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공국으로 독립할까 합니다.’

‘그걸 왜 나에게…….’

‘먼 훗날, 제가 전하의 목을 베러 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

어젯밤. 연락도 없이 찾아온 프리트 공작이 다짜고짜 선전포고했다. 더 이상 황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데릭은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려 드는 황태자에게 마지막 제안을 건넸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제국을 만들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나는 아바마마와 다르다.’

‘그렇다면 황위에 올라 증명하십시오. 제가 돕겠습니다.’

‘……!’

요구도 까다롭지 않았다. 황위에 오르자마자 특별법을 개정하고 마탑을 독립시켜 주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왜 스스로 황좌에 오르지 않냐는 물음엔 다소 단호하게 응수했다.

‘그럴 시간 없습니다. 바쁩니다.’

누가 보면 공작성에 꿀단지라도 숨겨 놓은 줄 알 것이다.

황태자는 날이 밝자마자 마탑주를 만났다. 그의 요구도 프리트 공작과 같았다.

특별법을 개정하는 것.

‘아주 문제가 많은 법인가 보군.’

황태자는 이 악법을 반드시 뜯어고치고야 말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잘은 모르지만, 두 사람이나 이의를 제기하는 걸 보면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는 합리적인 황제가 될 것이다. 현명한 황제가 되어 제국에 무궁한 영광을 남길 것이다. 패트릭 황태자는 연단 위에 앉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 * *

한스는 집무실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하.”

도토리가 무사한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가도, 야속하던 마지막 인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 어떡해! 좋아하는 사람이 실종 상태라는데! 너라면 가만히 있겠어?’

야속한 계집애. 남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는 데는 아주 도가 텄다. 이 와중에도 걱정이 되어 집무실 앞까지 찾아온 한스 에밀튼이야말로 호구 중의 상호구였고.

그런데 막 노크를 하려던 찰나.

─벌컥.

“……!”

“에밀튼 영식?”

갑작스레 집무실 문이 열리며 루카스가 걸어 나왔다.

“아, 그게…….”

한스의 시선은 자연스레 집무실 안의 도토리를 향했다.

“으응? 한스?”

“…….”

도토리는 아주 말짱해 보였다. 오히려 사랑받는 자 특유의 밝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돌아온 건 다행스러울 일인데, 왜 이렇게 마음 한쪽이 아린 걸까?

“이 미친 계집애.”

“다짜고짜 웬 시비야?”

“야! 너는, 어? 왔으면 왔다고 재깍 보고나 할 것이지!”

“너…….”

책상에 앉아 있던 오드리가 저도 모르게 스르륵 일어났다.

“울어?”

문간에 서 있는 친구의 눈시울이 멀리서 보기에도 확연하게 붉었기 때문이다.

한스는 가까이 다가오려는 오드리를 필사적으로 만류했다.

“거기서 말해! 가까이 오지 마!”

“우는 거야?”

“저리 떨어지라니까!”

그러나 오드리는 진귀한 구경이라도 하듯, 한스의 얼굴 밑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야!”

“우는 거 맞네.”

“…….”

한스가 씩씩거리는 얼굴로 오드리를 노려보았다.

“이 못된 계집애!”

“으응. 그래, 그래.”

─통, 통.

하찮은 손바닥이 너른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나 도토리의 얼굴엔 걱정은커녕, 웃음기만 가득했다. 그마저도 싫지 않으니 문제였지만.

“너, 솔직히 창피하지.”

“꼭 그걸 말로 해야겠냐?”

“그으래?”

“……지금 그 표정은 뭐야?”

“헤헤.”

의미심장하게 웃은 오드리가 갑작스레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흥, 흥, 흥. 클로드 오라버니한테도 말해 줘야지!”

“뭐? 야! 너 이리 안 와?”

“어디 창피해서 죽어 봐라.”

“이 미친 계집애가! 거기 안 서?”

한스는 폴짝폴짝 멀어지는 오드리를 따라 뛰었다. 조그만 주제에 빠르긴 또 어찌나 빠른지.

‘……한 번을 안 잡혀 주네.’

한스는 이만 포기하고 멈춰 섰다.

아주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도토리를 좋아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마음의 크기가 마음의 방향까지 결정하는 건 아니었다. 상대방도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야속한 계집애…….”

하지만 인제 와서 누구 탓을 하겠는가.

한스는 소리도 없이 흐르는 눈물을 연거푸 닦아 냈다. 온몸에 열이 펄펄 끓는 듯했다. 이번엔 꽤 오래 아플 것 같았다. 어쩌면 평생.

* * *

‘아, 진짜! 집무실 혼자 쓰나!’

루카스는 질린 얼굴로 데릭과 오드리 쪽을 노려보았다. 넓은 집무실 한쪽에서 유독 쪽쪽 대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 까닭이다.

“데, 데릭.”

범인은 당연히 주군이었다. 케벨슨 영애의 양손을 붙잡은 채, 단풍잎인가 통밀빵인가 하는 손등 위로 쪽쪽 입을 맞춰 대느라 아주 정신이 없었다.

“이거 오늘 안으로 끝내야 하는데…….”

“오른손은 놓아주겠다.”

“아잇.”

이젠 왼쪽 손등 위에 집중적으로 쪽쪽 대는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뽀뽀 귀신이라도 들렸나.’

참다못한 루카스가 괴로운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그대 손은 어쩌면 이리도 작지?”

“데릭이 큰 거 아닐까요?”

“흠흠! 각하? 케벨슨 영애?”

“황성에서 그대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계속 기다렸는데…….”

“다음부턴 서두르도록 하지. 앞으론 절대 늦지 않을 것이다.”

“헤헤. 좋아요!”

“…….”

투명 인간도 이런 투명 인간이 없다.

‘내가 무슨 좋은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결국, 루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 순간.

“읍.”

데릭이 기다렸다는 듯 도돌이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도 어찌나 안달이 나고 애가 타던지.

‘내가 미친 건가.’

자꾸만 도돌이와 살을 맞대고 싶고, 입을 맞추고 싶고, 손을 잡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하…….”

데릭은 아쉬움을 남긴 채 겨우 입술을 떼었다. 그리곤 도돌이의 입술을 엄지로 살며시 쓸어 주었다.

“이만 데려다주겠다.”

“혼자 가도 괜찮-”

─쪽.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다.”

“……!”

오드리의 심장이 빠르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손끝과 발끝은 가만히 있질 못하고 자꾸만 곱아들었다.

─끄덕끄덕.

입술을 앙다문 오드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데릭의 입꼬리가 요란하게 들썩였다.

“앗!”

그러다 결국 도돌이를 와락 끌어안고 말았지 뭔가.

“잠시만 이러고 있겠다.”

“…….”

오드리도 주춤주춤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어쩐지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 * *

“도착했습니다.”

두 사람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케벨슨 백작가로 오는 길이 오늘따라 어찌나 짧게 느껴지던지.

“내일 봐요.”

“그래. 기다리고 있겠다.”

“…….”

“…….”

마지막 인사가 끝난 뒤에도 맞잡은 손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렇게 마차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찰나.

“……날이 추우니 일단 마차로 들어갈까.”

“조, 좋은 생각이에요!”

데릭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나란히 앉아 손장난도 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 뒤. 이번에는 오드리가 그를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도돌이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던 데릭은 당장 고개를 주억거렸다.

─털그덕, 털그덕.

“도착했습니다.”

마차는 다시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이제 더 이상 핑계 삼을 만한 것이 없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대도.”

“네에.”

두 사람은 힘겹게 손을 놓았다. 그런데 마차가 다시 케벨슨 백작가로 향하려던 찰나.

“잠깐!”

“데릭?”

그가 출발 직전의 마차 위로 급하게 올라탔다.

“그대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

“……!”

“내가 데려다주겠다.”

“데릭…….”

마부는 심드렁한 얼굴로 코를 훌쩍이며 다시 고삐를 말아 쥐었다.

“이럇!”

하지만 두 사람의 유난은 그칠 줄을 몰랐으니. 케벨슨 백작가에 도착하면 오드리가, 공작성에 도착하면 데릭이 서로 데려다주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마부는 그대로 증발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제가 데려다줄게요.”

“아니다. 내가 데려다주겠다.”

“하지만-”

“쉬이. 금방이면 간다.”

“…….”

마차는 케벨슨 백작가와 공작성을 수도 없이 오갔다.

그러다 여섯 번째로 공작성에 도착했을 때.

“시간이 너무 늦었군.”

“앗. 벌써…….”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 하루는 공작성에서 머물렀다 가는 게 좋을 듯하군.”

“그,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털그덕, 털그덕.

마차가 멈춰 선 곳은 결국 공작성 앞이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주무시고 가셨으면 됐잖아.’

마부는 유난히 지친 얼굴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어쩐지 두 사람의 사랑놀음에 놀아난 기분이 들었다.

* * *

오드리는 주인도 없는 공작 부인의 침실로 안내되었다. 온통 백금과 보석들로 장식된 것이, 예전에 봤던 데릭의 방만큼이나 화려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여기서…… 자면 된다.”

“네. 네에.”

“그리고 이거.”

그가 불쑥 수상한 열쇠 하나를 건넸다.

“이 문을 잠그면 내 쪽에선 열쇠 없이 들어올 수 없다.”

“……!”

“그러니 안심하고 자도 좋아.”

데릭의 침실과 연결된 문 열쇠였다.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이만 내 침실로 가 보겠다.”

“…….”

“곧장 문을 잠그면 돼.”

“자, 자, 잠깐만요!”

“도돌이?”

오드리가 난데없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손도 잡고, 입도 맞추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

“저녁 인사는요?”

“……뭐?”

그녀가 삐걱대는 몸짓으로 데릭의 목에 팔을 감았다.

“저녁 인사요.”

“……!”

데릭은 키스를 조르는 듯한 도돌이를 보고서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비상, 비상이다.’

톡 튀어나온 목울대가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곳은 침실 아니던가. 바로 뒤에는 언제든 누울 수 있는 커다란 침대가 있다. 자꾸만 나쁜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힘들 듯하다.”

“네? 어, 어째서요?”

“……그런 게 있다.”

왠지 오늘 밤엔 입맞춤으로 못 끝낼 것 같지 뭔가. 데릭은 퍽 고통스러운 얼굴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오드리가 그의 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도돌이.”

“…….”

“시간이 많이 늦었다. 응?”

그런데 그때.

“읍!”

오드리가 기습적으로 그의 아랫입술을 베어 물었다. 놀란 데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대로 도돌이에게 끌려갔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도 잠시.

“…….”

이미 늦었음을 직감한 그가 뜨거운 한숨과 함께 오드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그가 이렇게 몸을 맞붙여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으응?’

그런데 유독 한 곳에서 강렬한 열기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가 주머니에서 뭘 뺀다는 걸 깜빡 잊어버린 듯했다. 열심히 그의 입술을 탐하던 오드리는 숨을 헐떡이며 데릭의 어깨를 붙잡았다.

“데릭, 주머니에 뭐가 있나 봐요.”

“하…… 주머니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봐라.”

데릭은 오드리의 양손에 깍지를 낀 채 자신의 양쪽 주머니로 찔러넣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자잘한 입맞춤은 멈출 줄을 몰랐다.

“…….”

주머니는 정말로 텅 비어 있었다. 오드리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 이건 대체…….’

열기의 정체를 되묻기도 전. 그가 오드리를 달랑 안아 들었다.

“앗!”

데릭은 침대로 향하는 내내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오드리는 얼마 가지 않아 열기의 정체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 * *

오드리는 생각보다 개운한 상태로 눈을 떴다. 그녀가 잠든 사이, 데릭이 부지런히 손 써 놓은 결과였다.

‘앗!’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드리가 주섬주섬 이불을 그러모았다. 맨살 위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이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

오드리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베개 위로 폭 처박았다. 도무지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때.

─휙.

“으앗……!”

그녀가 이불째로 들어 올려졌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따윈 없었다. 오드리는 그대로 데릭의 맨가슴 위에 착지했다.

“도돌이.”

“……!”

진작부터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데릭이 콩벌레가 된 도돌이를 달랑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밤을 꼴딱 지새우고도 피곤한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생기를 몽땅 빼앗아간 것처럼 얼굴에서 반들반들 윤이 났다.

‘참으로 깜찍하다.’

데릭은 참지 못하고 도돌이의 얼굴에 쪽쪽 입을 맞췄다. 어쩌면 이불에 돌돌 말린 모습까지도 이렇게나 사랑스러운지.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다.”

“……네?”

“가 보면 알 것이다.”

그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도돌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데, 데릭!”

도무지 이 들뜬 기분이 주체가 되질 않았다. 아무래도 연무장에서 오랜만에 몸을 풀어야 할 듯싶었다. 오늘 밤에도 밤새 도돌이를 괴롭힐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 * *

“여긴…….”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공작성 온실이었다. 그곳엔 개화 시기가 제각각인 꽃들이 아름답게 만개해 있었고, 푸르른 수풀 너머에서는 은은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마치 천국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여기 앉으면 된다.”

데릭은 어쩐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오드리의 의자를 빼 주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앉을 생각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데릭? 안 앉아요?”

“…….”

지금 그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꽃을, 아니, 반지를…….’

새벽 내내 몇 번이고 연습했던 것들이 왜 도돌이 앞에만 서면 엉망이 되고 마는지.

“데릭?”

멋지게 프러포즈하려던 계획은 결국 물 건너가 버렸다. 데릭은 욕심을 버리고 도돌이 앞에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 온실엔, 내 마음이 가득하다.”

“네?”

“그대에게 해 주고 싶은 말들로만 가득 채워 넣었거든.”

“…….”

“그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 영원히 변치 않고, 평생 그대만을 사랑하겠다.”

그의 나직한 고백에선 꽃향기가 물씬 풍겼다. 온실 속의 모든 향기가 전부 오드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어, 어떡해!’

마침내 데릭이 그녀를 향해 반지를 내밀었다.

“부디 나와 혼인해 주었으면 한다.”

“……!”

그의 청혼과 함께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한껏 고조되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멍하니 앉은 채 제대로 된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저는, 저는…….”

이대로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한편, 수풀 너머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루카스는 당장 오케스트라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그만! 그만! 전원 퇴장!’

‘이크!’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 이들은 숨소리까지 죽인 채 온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데릭과 오드리뿐. 천국같이 로맨틱하던 온실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데릭은 도돌이의 침묵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잔뜩 충격을 받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설마…… 그대는 혼인 생각이 없었던 건가?”

“그게.”

“우린 손도 잡고, 입도 맞추고, 심지어는 밤도 보냈다.”

“…….”

“그러니 마땅히 혼인해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야.”

그의 몸이 작게 휘청거렸다.

“어젯밤, 나는 그런 각오로 몸을 내어 주었다. 그대의 마음도 같을 거라 생각했는데…….”

“……!”

“그대는 나를 버릴 생각이었나?”

“데릭!”

“하룻밤의 불장난, 뭐 그런-”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데릭은 아주 간절한 얼굴로 오드리의 손을 붙잡았다.

“그렇다면 내가 안심할 수 있게 대답을 해 줘. 응?”

“…….”

“도돌이.”

모든 걸 다 가지고도 그녀의 마음 하나 못 가질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참으로 한결같았다.

오드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남자와 함께라면 평생 사랑하며 오순도순 살 수 있을 거란 걸. 세상을 다 뒤져도 프리트 공작보다 자신을 사랑해 줄 남자는 없을 거란 걸.

앙다물었던 입술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조, 좋아요. 우리 결혼해요!”

“……!”

프리트 공작은 조심스런 그녀의 대답에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도돌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끄악.”

“아까 한 약속 진심이다. 평생 사랑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겠다. 절대 그대가 후회하지 않도록 내가 잘하겠다.”

“믿어요. 저도 잘할게요.”

“매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마주 안고 있었다. 끝나지 않는 고백과 함께.

* * *

“프리트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신전까진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결혼 날짜를 받으러 왔다.”

“예?”

대신관 에토스는 가면 같은 웃음을 뒤집어쓰고 되물었다.

“실례지만, 어떤 분의……?”

“내 결혼 날짜 말이다.”

“……!”

충격을 받은 대신관 대신 젊은 견습 신관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케벨슨 백작 영애와 뜨거, 아니, 흠, 건전한 만남을 이어 가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아름다운 결실을 이루셨군요!”

“케벨슨 백작 영애?”

“……대신관님 빼고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크흠! 제가 한발 늦었군요. 요즘 통 정신이 없다 보니. 죄송합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날짜만 받으면 그만인 것을.”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오드리가 잠시 낮잠을 자는 사이, 데릭은 결혼 날짜를 지정받기 위해 재빨리 신전을 찾았다. 크리앙트 제국의 귀족들은 신전의 허가 없이 결혼식을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날짜를 선점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다.

“어디 한 번 살펴보지요. 으음, 내년 겨울은 어떠십니까?”

“나보고 일 년이나 기다리라는 소리인가? 설마, 농담이겠지.”

데릭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럼 내년 여름은 어떠십니까?”

“쪄 죽기에 딱 좋겠군. 전부 일사병으로 죽고 말 것이다.”

“…….”

데릭은 은근슬쩍 본심을 꺼냈다.

“다른 날짜는 없나? 되도록 빨랐으면 하는데.”

“이번 겨울은 꽉 찼습니다. 내년 봄에 한 자리가 있긴 한데…….”

“딱 좋군. 봄으로 하겠다.”

“완전 초봄입니다. 날씨가 꽤 쌀쌀할 텐데요.”

걱정스런 신관의 질문에 공작이 퍽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애타서 죽느니 차라리 얼어 죽는 편이 낫지 않나.”

“…….”

“아무튼, 그때로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황성에도 알리겠습니다.”

“좋군.”

기분이 좋아진 데릭은 신전을 떠나기 직전, 통 큰 기부금을 쾌척했다. 무려 프리트 공작가의 인장이 찍힌 백지수표였다.

* * *

“흥, 흥, 흥.”

오드리는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신문을 펼쳐 들었다.

조간신문엔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가득했다.

≪[단독] 황제, 선위 발표…… “새로운 황제가 불러올 새로운 바람 기대해 달라.”≫

≪서열 정리의 희생양? 다이안 황녀, 이역만리 마르카 왕국과 혼약 확정≫

≪[속보] 특별법, 100년 만에 첫 개정 앞둬…… 제국민 시선 집중≫

≪‘주술사 없는’ 신대륙을 위한 ‘신대륙 연합’ 탄생! 평화와 번영 기대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한창인 황제는 뜬금없이 황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황녀는 늙은 왕의 후처로 들어간다니.

물론 가장 놀랄 만한 소식은 특별법 개정 소식이었다.

마탑은 이번 특별법 개정과 함께 신대륙 전체의 화합을 위한 국제기구로 변모할 예정이다.

마법사들은 국적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마탑을 드나들며 연구에 매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별법의 주요 개정 사안은 다음과 같다.

1. 불법 마력 보유자에 대한 처벌 폐지

2. 마력 보유자에게 마탑 행 선택권 부여

오드리는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멍하니 눈만 끔뻑였다.

그런데 그때.

─우웅.

통신구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오드리는 손끝으로 통신구 표면을 두드렸다.

―도토리!

“오라버니?”

―조간신문 봤어? 응응? 이 오라비의 업적을 잘 보았냔 말이야!

“설마…….”

아놀드는 용맹한 새처럼 의기양양하게 가슴팍을 부풀렸다.

―맞아. 이 오라비의 작품이지!

“세상에!”

―물론 프리트 공작님이 조금, 아주 조금 도와주긴 했지만.

“…….”

―스튜에 소금 치는 정도였어. 딱 그만큼!

한참이나 본인의 영웅담을 조잘조잘 늘어놓던 아놀드가 뒤늦게 본론을 꺼내 들었다.

―아차차! 실은 부탁할 게 있어.

“뭔데요?”

―으응, 그게…….

프레이아 극단의 정체가 밝혀진 뒤로 신대륙은 뜻하지 않은 홍역을 치렀다. 이미 주술은 그들의 삶 전반에 고루 자리 잡고 있던 것이다. 첫사랑 팔찌부터 나비 모양 머리핀, 저주 인형과 부적까지. 신대륙 연합은 주술의 잔재를 청산하는 데 뜻을 모았다.

―그래서 신대륙 곳곳에 커다란 마력석을 세우고, 그걸 관리할 마법사를 파견할 예정이야.

“신대륙 전체를 아예 마력으로 뒤덮는다는 거예요?”

―으응. 따지자면 그렇지.

“…….”

아놀드는 오드리가 자문 위원으로 함께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데릭과 한 달이나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분명 서운해할 텐데…….’

서운한 건 오드리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생각해 볼게요.”

―알았어. 아, 맞다! 혼자 자는 건 안 무서웠어?

“……네?”

오드리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설마, 외박한 걸 눈치챈 걸까?

―너한테 미리 말하는 걸 깜빡했지 뭐야! 영지를 다 둘러보면 며칠 정도 더 걸릴 것 같아.

“그게 무슨…….”

―응? 이야기 못 들었어? 어제부터 아버지랑 영지 시찰 중인데.

“……!”

―도토리?

“아, 아아! 들은 것도 같아요! 천천히 와도 괜찮아요! 정말로요.”

―흐응, 수상한데…….

오드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한편, 이 모든 걸 우연히 들어 버린 사람이 있었으니.

‘케벨슨 백작가가 비었다고? 앞으로 며칠이나 더?’

데릭은 반짝 눈을 빛냈다. 이건 도돌이를 며칠간 독차지할 수 있는 아주 절호의 기회였다.

* * *

어느 날.

공작성 사용인들에게 주인의 비밀 지령이 내려졌다.

도돌이가 내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 쓸 것.

‘특별 손님’께서 너무도 편한 나머지 이곳을 ‘내 집’이라 착각할 정도로 편의를 제공하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프리트 공작은 케벨슨 백작가에 사람까지 보냈다. 도돌이의 취향을 미리 파악하여 더욱 안락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으응.”

“쉬이, 더 자도 된다.”

데릭은 뒤척이는 오드리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러다 따끈한 도돌이의 몸을 품에 안을 때면, 결혼을 약속한 내년 봄이 너무도 아득하게 느껴지곤 했다.

‘……봄이 오긴 하는 건가.’

혹시 내년에만 봄이 안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정말 말도 안 되게.

“후우.”

데릭은 끙끙 앓는 듯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저 도돌이와 하루빨리 정식 부부가 되고 싶단 마음뿐이었다. 그러면 지금처럼 도돌이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할까 봐 마음 졸일 필요도 없을 테니까. 함께 잠들고, 함께 일어나고, 함께 식사하는 것이 당연한 사이가 되고 싶었다.

─쪽.

“얼른 봄이 오면 좋겠다.”

“…….”

“나는 이곳이 그대의 집이 되었으면 좋겠어.”

데릭은 잠든 오드리의 귓가에 한참이나 사랑을 속삭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꾹꾹 억눌러 온 마음이 폭탄처럼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 * *

“빗이 어디 갔지?”

─스윽.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오드리 앞으로 익숙한 빗이 불쑥 들이 밀어졌다. 단 3초 만이었다.

“여기 있다.”

“아, 고마워요.”

“또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도 좋다.”

“……네에.”

오드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요 며칠간 만능 요정처럼 구는 데릭 때문이었다. 그는 온종일 오드리의 뒤만 따라다니다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면 어김없이 앞으로 나서곤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늘은 이만 가 봐야-”

“에르마 설산 아래에 유명한 온천이 있다. 혹시 가 본 적 있나?”

“온천이요?”

“그대도 분명 좋아할 것이다.”

“가 보고 싶긴 한데…….”

“당장 포털을 준비하지.”

데릭은 오드리가 지루할 틈이 없도록 매일같이 새로운 즐길 거리를 준비했다. 그러다 밤이 깊으면 새벽녘까지 오드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혼식 첫날 밤 침대를 부술 것 같은 남자 1위’라는 이름값을 하는 건지, 뭔지. 덕분에 오드리는 하루 내내 데친 시금치처럼 축 늘어진 상태였다.

“도돌이?”

“…….”

“도돌이.”

“……아.”

“피곤하면 한숨 자도 괜찮다.”

“네에……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곁에 있어 주겠다.”

“…….”

케벨슨 백작가로 돌아가겠다는 말은 쥐도 새도 모르게 쏙 들어갔다. 뜻하지 않은 강행군에 잔뜩 지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으음.”

“쉬이.”

데릭은 자신의 품 안에 잠든 도돌이를 퍽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대가 나에게로 온 걸까.’

가끔은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날, 어떤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만났더라도 그는 결국 도돌이를 사랑하게 되었겠지.

‘이리도 깜찍하고 사랑스러운데.’

데릭은 울컥 치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도돌이의 뺨에 입을 쪽쪽 맞췄다. 그러나 기절하듯 잠든 오드리는 미동이 없었다.

* * *

그날 오후.

내로라하는 목수들이 공작성을 찾아왔다. 내년 봄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오드리와 데릭은 나란히 앉아 카탈로그를 들여다보았다.

“이건 어떻습니까?”

“쓸데없이 화려-”

“와, 예뻐요!”

“……해서 보기에 딱 좋군.”

데릭은 미간을 찌푸리다가도, 도돌이의 의견이라면 일단 고개를 주억거리고 보았다.

‘도돌이만 좋다면야.’

도돌이의 행복이 곧 그의 행복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때.

“이건 서로의 침실에 하나씩 두는 게 어때요?”

“…….”

“별로예요?”

도돌이가 자기처럼 아주 앙증맞으면서도 알록달록한 새 모양 조각상을 골랐다. 어두컴컴한 그의 침실과는 영 어울리지 않은 화려함이 물씬 풍겼다. 하지만 데릭은 일단 고개를 주억거리고 보았다.

“아주 환상적이다.”

“헤헤.”

마침 칙칙하던 침실을 바꿔 보려던 찰나에 잘 되었지, 뭐. 도돌이가 저 조각상을 보러 그의 침실을 자주 드나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두 사람은 창틀 장식과 문, 의자까지 세심하게 골랐다. 물론 전부 도돌이의 취향대로였다.

“이제 침대만 고르시면 됩니다.”

“……!”

데릭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침대는 꼼꼼히 따져 보고 골라야 한다. 튼튼한 걸로.’

그리고 한껏 진지한 얼굴로 카탈로그를 훑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신중함이었다.

“캉처르 나무로 만든 침대는 천 년이 지나도 부서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더 튼튼한 나무는 없나?”

“공작님, 캉처르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목재입니다. 저희를 믿으셔도 됩니다.”

“……순 거짓말쟁이들이군.”

“예?”

데릭이 침실 한쪽을 대충 곁눈질했다. 그곳엔 엉망으로 분해된 침대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거열형을 당한 모양새였다.

“저것도 캉처르로 만든 침대였다.”

“…….”

“보다시피 산산조각이 났지.”

목수들은 당혹스러운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니, 대체 뭘 어떻게 하셨길래 저게 부서져?’

‘분명 코끼리가 뛰어도 말짱하던 침대인데?’

한편, 오드리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몰래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데, 데릭! 가만히 좀 있어요…….”

“침대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 무조건 튼튼한 것으로 골라야지.”

“…….”

흘끗 눈치를 살핀 데릭이 오드리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지금 공작성에 남은 침대라곤 내 침실밖에 없지 않나.”

“……!”

“아마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그대를 바닥에 재울 수는 없어.”

이, 이 남자가 진짜!

오드리는 제발 그만하라는 듯 그의 가슴팍을 통통 두드렸다. 두 사람이 매일 밤 침대를 하나씩 부숴 먹고 있다는 건 그녀도 익히 아는 사실 아니던가.

“흠흠. 저희 전문은 아닙니다만, 철제 침대도 있긴 합니다.”

“철이라면 적어도 산산조각이 나진 않겠군.”

“예. 그런데 나무로 만든 침대보단 소음이 크다는 걸 감안하셔야 합니다.”

“소음?”

“몸을 뒤척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제법 크게 난다는군요.”

“……!”

오드리의 얼굴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 나무가 좋겠어요. 캉처르요!”

“역시! 침대는 소음이 없는 게 최고지요? 캉처르 침대가 편안한 숙면을 도와 드릴 겁니다.”

“도돌이. 그래도 철제가 낫지 않-”

“나무로 해요. 네?”

“……그대가 정 원한다면야.”

어딘지 간절한 오드리의 눈빛에 결국 데릭은 고집을 꺾고 얌전히 주문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주문서를 확인한 목수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거푸 눈을 비볐다.

“치, 침대를…… 이백 개나요?”

“그렇다.”

프리트 공작의 배포가 상상을 초월한 까닭이다.

“최상의 품질로 보답하겠습니다!”

목수들은 고개가 거의 땅에 닿을 때까지 허리를 굽히며 공작성을 나섰다. 아주 오랜만에 만끽하는 운수 좋은 날이었다.

* * *

정오가 되어서야 일어난 오드리는 제나로부터 아주 급한 연락을 받았다.

아가씨, 저탹에 ㅂㅐ관이 터지서 물난ㄹㅣ가 났어요. 전부 물을 퍼내고 있ㅇㅓ요.

“뭐? 배관이 터져?”

왠지 편지지부터 축축하다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영지 시찰 중이라는 게 불현듯 떠올랐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오드리는 데릭에게 말을 전해 달라 부탁한 뒤, 당장 백작가로 향하는 포털을 열었다.

─우우웅.

“제나!”

“아, 아가씨이…….”

“다들 괜찮아?”

“다친 사람은 없는데, 지하가 완전히 물에 잠겼어요!”

“…….”

오드리는 엉망이 된 저택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하녀며 시녀, 심지어는 정원사와 마구간지기까지 합세해 양동이로 물을 퍼내고 있었다. 다들 밤을 꼴딱 지새운 몰골이다.

“사람은 불렀어?”

“네. 곧 있으면 배관공이 올 거예요.”

“휴, 다행이다. 많이 놀랐을 텐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어.”

“하지만 계속 퍼내지 않으면 일 층까지 물이 들어찰 거예요.”

“걱정할 필요 없어.”

치맛단을 붙잡은 오드리가 펭귄처럼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물난리의 근원지를 향했다.

“아, 아가씨!”

“흐음.”

보호막을 씌워 놓았다간 나중에 물폭탄을 맞을 게 분명하다.

‘하는 수 없지.’

오드리는 작은 주문 한 번으로 지하실의 물을 전부 증발시켜 버렸다. 밤새 사용인들을 잠도 못 자게 괴롭혔던 것 치고는 다소 허무한 해결이었다.

“아, 아가씨, 어떻게 하신 거예요?”

“어어, 여기 있던 물이 전부 어디로 갔지?”

사용인들은 신기한 듯 지하실 입구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그때. 홀 입구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관공을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어머!”

“난리가 난 게 그쪽인가요?”

여자 사용인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다리가 필요 없을 정도로 훤칠한 키, 낡은 셔츠 사이로 엿보이는 탄탄한 가슴팍. 각종 공구들로 단련된 팔근육까지. 어깨에 대충 걸친 수건에서도 수컷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아마 지하실 배관에 이상이 생긴 것 같은데.”

그런데 오드리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이 집 아가씨셨군요.”

“날 알아?”

“지나가다 몇 번 뵈었습니다.”

그가 반갑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러자 대충 수염만 정리한 볼 위로 길게 보조개가 파였다.

“당장 고쳐 드리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

─훌렁.

“세, 세상에……!”

“어머머머머!”

공구함을 내려놓은 배관공이 예고도 없이 웃통을 벗어 던졌다.

“일할 때는 옷이 불편해서요.”

“으응, 뭐…… 편할 대로 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드리의 얼떨떨한 대답에 그는 탄탄한 상반신을 한껏 과시하며 지하실로 향했다.

* * *

그 시각.

뒤늦게 상황을 보고를 받은 데릭은 당장 회의를 중단했다.

“도돌이에게 가 봐야겠다.”

저택에 물난리가 났다니, 소식을 들은 도돌이는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하필이면 이런 때…….”

케벨슨 백작과 마탑주도 없는 상황에서 홀로 곤욕을 치르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집무실을 나서는 데릭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 * *

케벨슨 백작가에 도착한 데릭은 기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여성 사용인들이 지하실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까닭이다.

“어쩜 그리 잘생겼지? 배관공이 아니라 배우라고 해도 믿겠어.”

“몸은 또 어떻고? 아, 배관이 왜 이제야 터졌나 몰라!”

“근데 그 남자가 아가씨를 쳐다보는 눈빛이 좀 묘하지 않았어?”

“‘이 집 아가씨셨군요.’라니…… ≪아가씨와 노예≫에 나오는 대사랑 완전 똑같잖아! 물론 아가씨껜 프리트 공작님이 있긴 하지만-”

“나 말인가.”

“히익! 고, 고, 공작님!”

데릭은 서슬 퍼런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바닥 위로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낡은 상의 하나가 유독 거슬렸다.

‘성인 남성의 것이로군.’

미치지 않고서야, 백작가 내에서 상의를 훌렁 벗고 다닐 사용인은 없을 터. 그렇다면 분명 배관공이라는 놈의 옷이겠지.

‘감히!’

데릭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당장 지하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

헐벗은 배관공 하나가 육체미를 뽐내듯 괜스레 도돌이 앞을 알짱거리고 있었다.

“잘 지켜보셔야 합니다.”

“뭐?”

“제가 괜한 곳을 건드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아가씨께서 감시해 주셔야지요.”

“아.”

“…….”

데릭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감시를 핑계 삼아 도돌이의 시선을 등 근육에 붙잡아 두려는 속셈임을 모를 줄 알고? 배관공 주제에 보통내기가 아니다. 마치 귀부인을 홀리는 정부처럼 요사스럽지 않은가.

“데릭?”

“…….”

뒤늦게 그를 발견한 오드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데릭은 다급한 손길로 당장 크라바트부터 풀어 헤쳤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이 손 놔라.”

“아니, 왜 갑자기 옷을!”

당황한 오드리가 셔츠까지 벗으려는 프리트 공작을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는 도돌이가 이리도 야속할 수가 없었다.

“……저 배관공은 되고, 나는 안 되는 건가.”

“네?”

“참으로 서운하다. 그대의 애인은 나인데, 어떻게 나한테만 이럴 수 있느냔 말이다.”

“아니, 그게 무슨 상관……!”

이 남자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오드리의 만류에도 데릭은 기어코 상의를 홀라당 벗어 던지고 말았다.

“데릭!”

화들짝 놀란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그의 맨살을 찰싹 내리쳤다. 그러자 단단한 근육 위로 단풍잎 모양의 새빨간 낙인이 새겨졌다. 하지만 프리트 공작은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도리어 한쪽 입매를 만족스럽게 휘었다. 마침 잘되었다는 듯이.

“……이런 건, 둘만 있을 때 하기로 하지 않았나.”

“네에?”

데릭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가슴팍 위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리고는 마치 배관공더러 들으라는 듯, 부끄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제삼자에게 우리의 ‘은밀한’ 비밀을 들켜 버렸군. 어쩐지……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그거야, 진짜로 발가벗고 있으니까 그렇죠!”

“다른 사람들 앞에선 부끄러우니 각별히 조심하자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그대는 참으로 못 말려. 내가 졌다.”

“데릭!”

─덥석.

오드리의 양손을 다정하게 맞잡은 그가 손등 위로 입술을 묻었다.

“쉬이, 나의 아기 고양이.”

“……!”

“나는 그대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심지어는 그대가 나를 아프게 하는 그 순간에도.”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늘 준비되어 있다는 소리다.”

“…….”

오드리는 마침 지하실 입구를 주시하던 사용인들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런데 다들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는 것이, 제대로 오해한 눈치였다.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아니야!’

한껏 늘어진 눈썹으로 억울함을 호소해 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모두들 곱게 자란 아가씨가 어쩌다 저런 고약한 취미를 가지셨나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로 데릭을 끌어당겼다.

“……얼른 방으로 올라가요. 빨리요!”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그런 거 아니-”

“내 마음도 그대와 같아.”

그는 썩 기꺼운 얼굴로 오드리의 손을 고쳐 잡았다. 그러더니 마치 제집인 양 성큼성큼 앞장서기 시작했다. 오드리는 거의 끌려가는 모양새였다.

─도다다다닥.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용인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길을 터 주었다. 그 사이를 걷는 오드리의 얼굴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아무래도 신혼집으론 쥐구멍을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이대로는 도저히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었다.

* * *

데릭은 침실 문이 닫힌 뒤에도 옷을 챙겨 입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차 맛이 좋군.”

“데릭, 감기 걸리겠어요. 옷 좀-”

“나는, 원래 종종 이렇게 티타임을 즐기곤 한다.”

“……이 겨울에 헐벗고 차를 마신다고요?”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차는 헐벗고 마셔야 제맛이다. 건강에도 아주 좋고, 아무튼, 심장도 튼튼해지고, 정신도 건강해진다던가. 뭐, 그럴 것이다. 여러모로 좋겠지.”

“…….”

이게 무슨 아무 말이란 말인가? 오드리는 오늘따라 고집을 부리는 그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도울 일은 없나?”

“네?”

“키가 안 닿아서 치우지 못했다거나, 잠시 미뤄 놓은 일은 없느냔 말이다.”

“그런 건 없는데…….”

“잘 생각해 봐라.”

데릭은 도돌이의 침실을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 걸린 장식품을 괜히 한 번 만지작거리고, 침대 휘장 위를 의미 없이 훑었다. 성난 등 근육을 한껏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그 배관공과는 비교도 안 될 테지.’

그는 자신의 등을 바라보고 있을 도돌이를 상상하며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한편, 오드리는 이제야 그의 속내를 간파했다.

‘설마…….’

죽어도 옷을 입지 않겠다며 버티는 태도. 오늘따라 힘이 바짝 들어간 등판. 아무래도 저 남자는 배관공을 의식하는 듯했다.

‘흐응.’

오드리는 턱을 괸 채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구경했다.

“침대 기둥의 조각이 아름답군. 특히 이 위쪽이 말이다.”

“그래요?”

“아주 훌륭해.”

“그렇구나아.”

손바닥에 밀려 올라간 오드리의 통통한 볼이 바쁘게 씰룩거렸다.

‘하여간.’

흉기에 가까운 몸을 가지고 저렇게 귀엽게 구는 건 반칙 아닌가?

오드리는 당장 데릭의 뒤로 다가가 무방비한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의 넓은 등허리가 성난 파도처럼 거세게 일렁였다.

“도돌, 이?”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모른다.”

참으로 눈치도 없지. 요 깜찍한 도돌이는 그걸 이제야 알았단 말인가?

데릭은 그간의 서러움을 모조리 토로하려는 듯 괜스레 툴툴거렸다.

“왜 나한테만 옷을 입으라 하느냔 말이다. 그 배관공이 눈앞에서 뻔히 벌거벗고 있는데. 입으려면 그자도 같이 입어야 마땅하지.”

“그래서 서운했어요?”

“억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오드리는 그의 호들갑에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데릭 딴엔 진심이었겠지만. 이 거대한 남자가 사랑스러워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쪽.

“……!”

오드리는 그의 날갯죽지에 연거푸 입을 맞췄다. 그럴수록 데릭의 등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갔다. 척추 아래로 열기가 몰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하…….”

그가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도돌이.”

“……데릭.”

서로를 부르는 호칭 너머로 은근한 신호가 오갔다. 데릭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손바닥이 오드리의 허리와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쌌다.

마침내 두 사람의 입술이 아찔하게 맞닿은 순간.

─똑똑.

“…….”

“……!”

벼락같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데릭!’

깜짝 놀란 오드리가 얼른 입술을 떼라는 듯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하지만 데릭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못 들은 척해라.”

“어어케 그애어!”

“하…… 안 나오면 알아서 물러가겠지.”

그녀의 아랫입술을 베어 문 채로 중얼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집요했다.

“으읍!”

오드리는 출입문과 데릭을 바쁘게 번갈아 보았다.

한편, 침실 안의 사정을 대충 눈치챈 제나가 다급하게 고했다.

─똑똑똑똑똑.

“아가씨, 주인님과 도련님께서 저택에 도착하셨어요. 곧 올라오실 거예요!”

“뭐, 뭐어?”

─휙!

당황한 오드리가 다짜고짜 데릭을 침대로 밀쳤다. 한껏 유혹적인 자태로 침대에 눕혀진 프리트 공작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케벨슨 백작과 마탑주가 왔다고?’

그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헐벗은 상체, 부어오른 입술, 열이 오른 듯 새빨간 얼굴과 목덜미까지.

“…….”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기엔 여러모로 곤란한 몰골이었다.

“아가씨, 서두르셔야 해요!”

“어, 어, 어떡하지?”

오드리는 일단 그의 옷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지하실에 놓고 온 옷에 발이 달려 제 발로 걸어오지 않는 이상, 여기에 있을 리가 없지.

─똑똑.

“아, 아가씨. 주인님과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도토리!”

“……!”

망했다.

오드리의 머릿속엔 그 생각뿐이었다.

* * *

“크흠.”

“…….”

마주 앉은 네 사람 사이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데릭은 헐벗은 가슴팍을 애써 가려 보려다가 결국 포기했다. 무릎 위로 단정하게 말아쥔 손바닥엔 이미 땀이 한 바가지였다.

“주인님, 공작님께서 입으실 만한 옷을 가져왔습니다.”

“흐흠! 이거라도 입으십시오.”

─꾸벅.

데릭은 뻣뻣한 묵례와 함께 재빨리 옷을 꿰어입었다.

그러나 한번 어색해진 분위기는 쉽사리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럴 만도 하지.’

딸의 방문을 열자마자 반나체의 외간 남자를 목격했으니, 케벨슨 백작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오해를 해도 충분한 상황이었다.

“크흠. 제 딸아이와 만나고 계시다는 소식은 기사를 통해서 접했습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예?”

케벨슨 백작의 눈동자가 거세게 떨렸다. 꼭 장인어른을 대하는 사위처럼 깍듯해진 주군의 태도가 영 불안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설마, 아니겠지.’

백작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원래 청춘 남녀란 불꽃같이 만났다가도 바람처럼 멀어지지 않던가. 딸아이와 주군도 이제 막 서로를 알아가는, 딱 그 정도의 관계일 것이다.

“아닙니다. 만나는 건 두 사람이니,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결혼식은 봄에 올릴 예정입니다.”

“……!”

─주르륵.

케벨슨 백작의 턱밑으로 찻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겨, 겨, 결혼?’

황망한 눈동자가 토끼 같은 딸 아이와 흉악한 주군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아이고, 내 딸!’

어쩐지 정중한 산도적을 마주한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놀드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도토리, 너어!”

어쩐지 배신감이 밀려들었다. 이제야 지난 10년간 못 했던 오라비 노릇도 하며 오순도순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아직 쥐방울만 한 도토리가 결혼이라니?

‘수상해. 빨라도 너무 빠른걸.’

아놀드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아무래도 이 결혼엔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는 마탑주의 권능 중 하나인 텔레파시를 사용하여 오드리에게 말을 건넸다.

〔도토리.〕

“……!”

〔쉿! 들키면 안 돼. 알았으면 눈 한 번만 깜빡여 줘.〕

맞은편에 앉은 오드리는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뻑였다.

〔좋았어. 혹시 공작님의 협박이나 강압에 의한 결혼이라면 지금 당장 티스푼을 흔들어 줘. 뒷일은 이 오라비가 전부 책임질게!〕

“네?”

“이 오라비가 무찔러 줄-”

“…….”

“아이코, 실수!”

케벨슨 백작과 데릭의 시선이 아놀드를 향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나 싶은 눈치다.

그런데 그때.

─스륵.

“……도돌이?”

오드리가 옆에 앉은 프리트 공작의 손을 꼬옥 잡았다. 티스푼이 흔들리기만을 기다리던 아놀드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도, 도토리!”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

오드리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비장했다.

“저희는 서로 사랑하고 있어요. 그렇죠, 데릭?”

잠시 넋이 나갔던 데릭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술 더 떴다.

─벌떡.

“무릎이라도 꿇겠습니다.”

“아이고, 각하! 불편하게 왜 이러십니까!”

“……!”

오드리는 무릎을 꿇는 데릭을 보며 내심 놀랐으나, 저 역시도 냉큼 그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털썩.

“아버지이.”

“아니, 오드리 너까지-”

“저를 받아 주십시오. 도돌이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저, 저도요! 허락해 주세요. 네?”

“…….”

절절한 두 사람의 모습에 케벨슨 백작은 힘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부인도 이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두 사람의 결심이 저렇게나 확고하다면, 그가 뭐라고 가타부타 말을 얹겠는가?

케벨슨 백작은 어느새 훌쩍 자라 버린 딸 아이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식이 날갯짓을 시작할 때 믿고 보내 주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겠지.

“……두 사람이 좋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느냐.”

“아버지!”

“허락하고 말 것도 없구나.”

벌떡 일어난 오드리가 케벨슨 백작을 와락 끌어안았다.

“허락해 주실 줄 알았어요!”

“녀석, 참.”

그러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동떨어진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도토리, 오라비가 마탑에서 나오면 함께 여행 가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응응?”

“네?”

─파앗!

아놀드의 손엔 어디서 온 건지 모를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봐, 여기 세 번째 줄에 쓰여 있잖아.”

“……오라버니, 그건 제가 열한 살 때 보낸 편지잖아요.”

“그래서 약속을 어기겠다는 거야? 오라비는 무려 십 년을 기다려 왔는데!”

순간 오드리의 마음이 약해졌다.

‘거절하면 오라버니가 분명 서운해할 거야.’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오라버니와 시간을 보내겠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반면에 데릭은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남자 아니던가.

“…….”

망설이는 오드리를 향해 뜨거운 시선이 쏟아졌다. 하나는 생억지를 부리는 오라비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이별을 하게 생긴 프리트 공작의 것이었다.

‘안 된다. 절대 안 돼.’

데릭은 애끓는 눈으로 도돌이를 응시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아놀드가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맘씨 넓은 공작님께서도 분명 이해해 주실 거야. 그렇지요?”

─휙.

세 사람의 시선이 프리트 공작을 향했다.

‘……어찌한다.’

데릭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케벨슨 백작과 아놀드의 환심을 사려면 당장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돌이와 며칠 동안이나 생이별을 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저는, 도돌이와 한시라도 떨어질 수 없습니다.”

“…….”

“기대하셨던 대답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데릭은 그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불쾌해할 줄 알았던 케벨슨 백작과 아놀드는 오히려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 저는 합격이에요.”

“……무슨.”

“각하께서라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제 딸아이를 포기하지 않으실 거란 확신이 듭니다. 마음이 놓이는군요.”

이게 전부 시험이었단 말인가?

데릭은 혼이 나간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두 사람의 눈 밖에 나서 결혼이 엎어지진 않을까 어찌나 마음 졸였던지.

하지만 아놀드는 안심한 데릭을 비웃듯, 곧장 오드리를 졸라 댔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꼭 지켜야 해. 오라비랑 여행 갈 거지? 응응?”

“아이, 참. 오라버니도…….”

“남매끼리 즐기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잖아. 응? 도토리이, 언제 또 우리끼리 여행을 가겠어?”

“…….”

데릭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도돌이를 보며 슬픈 미래를 직감했다.

* * *

황태자의 대관식은 아주 성대하고 아름답게 치러졌다.

그러나 황족 석은 텅 비어 있었다.

“황녀 저하께서 진짜로 시집을 가긴 가시는 모양이에요. 결혼 전까지 수도원에서 기도를 드리신다니.”

“너무 급작스레 떠나셔서 인사도 못 드린 게 아쉬워요.”

“그런데…… 황녀 저하께서 가기 싫다고 악을 쓰는 걸 들은 사람이 있다던데, 정말일까요?”

“에이, 그럴 리가요. 황태자, 아니, 폐하께서 ‘충만한 행복 속에 떠났다’고 발표하셨잖아요.”

“맞아요. 신랑감도 황녀 저하께서 직접 고르셨다고 한 걸요?”

사람들은 황녀가 행복하게 황궁을 떠났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혼 상대가 그녀보다 30살이나 많은 노인이긴 했지만.

“참, 선황 폐하께서는 섬 생활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으시다면서요?”

“이게 다 새로운 황후 폐하 덕분이죠. 어쩜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찾아내셨는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 더 아름다운가 봐요. 교통이 조금만 편했어도 오랜만에 얼굴을 비추셨을 텐데…….”

“선황 폐하께서도 좀 쉬셔야지요. 삼십 년간 많이 바쁘셨잖아요.”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황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건 프리트 공작뿐이었다. 다이안 황녀의 국혼이 당사자의 의견과 전혀 무관한 결정이었다거나, 선황제가 유배에 가까운 생활 중이라는 것. 다만 카타리나 왕녀를 아끼던 황제가 어쩌다 며느리의 손에 강제로 섬까지 보내졌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 *

“외할머니!”

케벨슨 남매는 오랜만에 어머니 가문을 찾았다. 오전 내내 기다리고 있던 이노테 대부인은 환한 미소와 함께 두 사람을 반겼다.

“이게 얼마 만이니? 어서 들어오렴, 배고프겠구나.”

“오는 길에 간단하게 식사했어요.”

“너희가 식사라고 해 봤자 어디서 간식이나 조금 깨작거리다 왔겠지. 아휴, 그새 피골이 상접했구나.”

“스테이크 먹고 왔는데…….”

“안 되겠다. 당장 손 씻고 주방으로 가자꾸나.”

아놀드와 오드리는 외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장장 1시간 반에 달하는 코스 요리를 즐겼다. 이미 점심으로 스테이크와 빵을 양껏 즐긴 후였는데도.

“저녁엔 뭘 먹고 싶니?”

“간단하게 샐러드만 먹어도-”

“샐러드? 너희가 쓰려지려고 작정을 했구나! 이렇게 삐쩍 말라서는, 그런 풀떼기가 말이나 되니?”

“…….”

“아무래도 안 되겠다. 통통하게 살이 오르기 전까진 절대로 못 돌아간다. 알겠니?”

“네에.”

남매는 빵빵한 배를 붙잡고 어렸을 적 자주 놀았던 바닷가로 향했다.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건 오랜만이었다. 오드리가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된 후, 서로 한참이나 서먹하게 굴지 않았던가.

하지만 가족이란 그런 것이었다. 특별한 사과 없이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사이.

“도토리! 이거 기억나?”

“어? 이건…….”

바닷가 주위를 기웃거리던 아놀드가 별안간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언젠가 두 사람이 어른들 몰래 숨겨 놓았던 비밀 상자였다.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러엄. 마탑에서 나오면 도토리랑 같이 열어 보려고 얼마나 기다렸는데!”

“…….”

“이 오라비가 열어 볼까? 응응?”

“그래요.”

아놀드가 들뜬 얼굴로 상자를 열었다.

그러나 숨겨 놓은 지 10년도 더 된 터라 내용물은 보잘것없었다. 쓰다 만 편지부터 은색 리본, 코끼리 그림, 지금 먹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사탕까지. 도대체 왜 넣었는지 모를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도토리, 이거 봐! 네 시험지야.”

“앗. 그런 것까지 넣어 놨어요?”

“전부 추억인걸. 여기 오라비 것도 있지!”

하지만 두 사람은 별 볼 일 없는 물건을 보며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놀드가 마탑에 들어가기 전, 이 상자를 숨기던 그때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 * *

이노테 영지에서의 시간은 매우 편하고 즐거웠지만, 오드리는 자꾸만 속이 탔다.

“도토리!”

“오, 오, 오라버니!”

“설마 편지를 쓰는 건 아니지?”

“그, 그럼요!”

“응응. 오라비와의 시간에 집중하기로 했으니까 약속 꼭 지켜야 해. 알았지?”

“……네.”

통신구로 연락을 하는 것도, 심지어는 편지를 보내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아놀드 때문이었다. 눈치는 또 어찌나 빠른지. 잉크병 뚜껑만 열어도 귀신같이 알고 곧장 들이닥쳤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자, 오드리는 상사병에 걸릴 지경이 되었다.

‘이잇! 도저히 못 참아!’

─끼이익.

“…….”

참다못한 오드리는 살금살금 탈출을 감행했다. 데릭이 잘 지내고 있는지, 식사는 잘 챙겨 먹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 성에 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침 아놀드는 카드 게임을 하다가 잠이 든 상태였다.

─텁.

그런데 통밀빵 같은 발이 막 문턱을 밟은 찰나.

“도토리.”

“힉! 오, 오, 오라버니…….”

“오라비 안 잔다.”

잠든 줄로만 알았던 아놀드가 번쩍 눈을 떴다.

‘쳇.’

그렇게 오드리의 첫 번째 탈출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뒤로도 오드리의 탈출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오라버니,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같이 가자!”

“새, 생각해 보니 머리가 좀 아픈 것도 같아요. 아무래도 오라버니 혼자-”

“그럼 같이 책이나 읽을까? 누가 더 먼저 읽는지 내기하자! 시작!”

“…….”

아놀드가 오드리를 잠시도 혼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드리는 홀로 속을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이런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불과 며칠 뒤의 일이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켈리?”

이노테 백작가에 손님이 찾아왔다. 어울리지도 않는 봇짐을 메고 등장한 켈리였다.

“마탑으로 가는 길에 잠시 들러 봤습니다. 길을 잃었거든요.”

“뭐?”

“아, 선배님의 동생분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마법사 켈리라고 합니다.”

“네에…… 저는 오드리예요.”

“정말 선배님과 판박이시네요! 아름다우십니다.”

켈리는 길을 잃은 사람치고 매우 들떠 보였다. 야무지게 챙겨 온 초코케이크 역시 다분히 계획적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이거 드십시오. 선배님 겁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다 방법이 있습니다. 궁금해하진 마십시오. 그럼 며칠간 신세 좀 지겠습니다.”

“뭐어?”

“실례합니다.”

켈리는 다짜고짜 이노테 대부인을 찾아갔다.

“그래, 아놀드의 손님이라고?”

“예. 아놀드 님과 함께 마탑에서 일하고 있는 켈리라고 합니다.”

야무지게 올려 묶은 밤하늘 색 머리카락, 이채가 일렁이는 황금색 눈동자.

이노테 대부인은 켈리가 마음에 쏙 든 눈치였다.

“아가씨도 뼈밖에 안 남았네. 이대로 보낼 수야 없지. 푹 쉬면서 식사나 잘 챙겨 먹고 가요.”

“주시는 대로 뭐든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참으로 싹싹한 아가씨야.”

“방은 어딜 쓰면 될까요?”

“아놀드, 네가 안내를 좀 해 주렴. 마침 네 옆방이 비었잖니.”

“옆방……!”

감격한 켈리가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오드리는 묘한 눈으로 두 사람을 주시했다.

‘마탑엔 괜찮은 사람이 없다더니, 순 거짓말이잖아?’

아놀드가 저렇게 얌전한 건 처음 본다. 게다가 켈리는 그를 퍽 좋아하는 눈치 아닌가.

“선배님, 저랑 카드 게임 한 판 하시지 않겠습니까?”

“으응. 나는 조금 피곤해서…….”

“벌써 주무시려고요? 아직 해도 지지 않았습니다.”

방에 짐을 풀자마자 곧바로 오라버니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모습도 범상치가 않았다.

‘이거야!’

오드리는 반짝 눈을 빛냈다. 아놀드의 감시망을 벗어날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 * *

어두컴컴한 집무실 안.

프리트 공작의 얼굴엔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 있었다.

“도돌이…….”

도돌이와 생이별한 지 어언 열흘째. 야속한 도돌이는 연락 한 번 없었다.

‘도돌이가 내게 이럴 수는 없다. 나보고 죽으라는 것인가?’

데릭은 고 깜찍한 얼굴을 보고 싶어 숨이 꼴딱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다.

도대체 얼마나 재밌게 놀고 있길래 연락도 깜빡했단 말인가?

“하아…….”

눈앞엔 단풍잎 같은 손과 통밀빵 같은 발, 유리알 같은 눈동자와 부드러운 머리칼이 둥둥 떠다녔다. 10초에 한 번씩 초상화를 펼쳐 봐도 그리움은 가실 줄을 몰랐다.

─똑똑.

“각하, 오늘 도착한 우편입니다. 찬찬히 살펴보시고 답신을-”

데릭은 루카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빨리 편지들을 헤집었다. 그러나 금세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없다. 오늘도 없어.”

“각하?”

“전부 치워라. 꼴도 보기 싫다.”

“…….”

보좌관은 잔뜩 풀이 죽은 주군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새를 못 참으시나?’

어차피 케벨슨 영애와 주군은 봄이 되면 결혼할 사이 아니던가. 그런데 도대체 뭐가 저렇게 불안하고 애가 타는 걸까?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을.

‘에휴. 유난이다, 유난이야.’

루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때.

─위잉.

“하아…….”

한숨을 내쉬는 프리트 공작의 등 뒤로 알록달록한 포털이 열렸다. 곧이어 그 속에서 단풍잎 같은 손 두 개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데릭!”

“……도돌이?”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

“정말, 정말…… 그대가 맞아?”

데릭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도돌이가 있었다. 며칠 사이에 볼이 통통해진 채로.

─쪽, 쪽, 쪽, 쪽, 쪽.

“읍. 데, 데릭!”

그는 곧장 도돌이의 볼을 붙잡고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동그란 이마, 코끝, 관자놀이, 뺨, 심지어는 턱까지.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안도가 밀려들었다.

“이렇게 왔으니 되었다. 그걸로 되었어.”

“그게…… 사정이 있었어요.”

“전부 지나간 일이다. 어쨌든 그대가 지금 내 눈앞에 있지 않나.”

데릭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도돌이를 꽉 껴안았다. 익숙한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되었다.

한편, 그간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오드리는 그의 품에서 한껏 짜부라진 채로 웅얼거렸다.

“데릭은 잘 지냈어요?”

“아니, 잘 못 지냈다. 만약 그대가 하루만 늦었어도 말라 죽었을 것이다.”

“네에?”

“나는 이제 그대 없인 하루도 살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전부 그대가 책임져야 해.”

“…….”

이에 질세라, 오드리도 그간의 설움을 토해 냈다. 몇 번이고 편지를 썼다가 아놀드에게 들켰다는 둥, 통신구만 켜면 쫓아오는 통에 엄두도 못 냈다는 둥.

뒤늦게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된 데릭은 동그란 머리통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위잉.

“……!”

집무실 한쪽 벽에 또 다른 포털이 열리더니, 아놀드가 씩씩대며 걸어 나왔다. 바로 뒤엔 켈리도 함께였다.

“도토리, 너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응?”

“오, 오라버니, 여긴 어떻게…….”

“잊었나 본데, 오라비가 이래 봬도 마탑주야! 마력의 흔적을 쫓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라고!”

아놀드는 같잖게 눈을 부릅떴다.

왠지. 도토리가 이상하게 오늘따라 조용하다 싶었지. 강아지들도 꼭 조용하면 사고를 하나씩 치고 있지 않은가! 켈리에게 시달리던 그는 한참 뒤에야 도토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라? 선배님? 어디 가십니까?’

‘도토리가, 도토리가 도망갔어!’

아놀드는 허겁지겁 마력의 흔적을 뒤쫓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으로 향한 곳은 외진 곳에 덩그러니 위치한 풍차였다.

‘……이런 곳에 도토리가 있다고?’

‘해 질 무렵의 풍차라. 아주 낭만적이네요.’

‘흥. 낭만은 무슨.’

‘그래도 한밤중보단 낫지 않습니까? 그땐 낭만이 아니라 외설이 될 텐데요.’

‘우리 도토리가 그럴 리 없어!’

아놀드는 주춤주춤 풍차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 도토리가 없어서 어찌나 다행이던지.

대신, 도토리가 마지막으로 열었던 포털의 좌표를 알아냈다. 보다시피 목적지는 공작성이었고.

“분명 오라비랑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잖아!”

“……정말 너무해요.”

“뭐, 뭐어? 지금 오라비 보고 하는 소리야?”

“네! 오라버니요!”

“……!”

오드리는 혹여나 데릭에게 불똥이 튈까 싶어 그의 앞을 든든하게 막아섰다. 아놀드를 바라보는 눈빛엔 억울함과 서러움이 가득했다.

“어쩜 이럴 수가 있어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거 뻔히 알면서! 열흘 동안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편지도 못 쓰게 하고…….”

“도, 도토리, 그건-”

“정말 너무해요!”

오드리의 어깨가 요란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얼굴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웬만해선 아놀드의 편을 들었을 켈리도 이번만큼은 고개를 내저었다.

“선배님이 심하셨습니다.”

“뭐어? 켈리, 너까지-”

“원래 사랑에 빠지면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은 법입니다. 그런데 아주 생이별을 시키셨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아놀드는 의기소침하게 세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려던 게 아닌데.’

동생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맹세코 두 사람을 방해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이 결혼을 너무 서두르는 것 같기에, 머리를 식히며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을 벌어 주고 싶었던 것뿐이다.

“도돌이, 괜찮다. 응? 울지 마라.”

“흐흑…….”

아놀드는 서로 애틋하게 눈을 맞추는 프리트 공작과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파렴치한 방해꾼 된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초조하게 양손을 모은 그가 오드리를 향해 사과를 건넸다.

“도토리, 미안해.”

“오라버니랑 여행하는 게, 흐흐흑, 싫은 게 아니에요…….”

“알아. 내가 잘못했어. 으응?”

“편지는, 흑, 쓰게 해 주세요. 통신구도요.”

“당연하지! 앞으론 저얼대로 방해 안 할 거야! 오라비가 어리석었어.”

“킁.”

데릭의 품에 안겨 코를 훌쩍이던 오드리가 슬쩍 아놀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럼, 조금만 더 있다 가도 돼요?”

“어?”

“선배님, 앞으론 절대로 방해 안 하신다면서요.”

“그, 그러엄! 그래야지! 오라비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인걸! 그런데, 그렇지만…….”

“저는 더 있다 갈게요. 오라버니 먼저 가세요.”

아놀드의 발걸음은 쉽사리 떨어지질 않았다. 미적거리는 그를 보다 못한 켈리가 작게 귓속말을 했다.

“선배님. 지금 가시면 초코케이크를 혼자서 다 드실 수 있습니다.”

“초코케이크?”

“제 몫까지 전부 드리겠습니다.”

“……!”

모두의 등쌀에 떠밀린 아놀드는 프리트 공작과 한 몸이 된 동생을 향해 마지못해 마지막 주의를 주었다.

“한 시간, 아니, 삼십 분만이야! 늦지 않게 와야 해. 알았지?”

“네!”

그러나 아놀드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으니. 그리움이 쌓인 연인들에게 30분이란, 농밀한 역사가 이루어지고도 충분히 남을 시간이라는 점이었다.

* * *

한 달간의 여행을 마친 오드리가 돌아왔을 때, 수도에서 그녀와 프리트 공작의 결혼 소식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데릭이 아주 착실하게 홍보에 임한 까닭이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신문마다 기사를 싣는 것은 기본. 수도 전역의 거리를 두 사람의 초상화로 도배한 탓에, 오드리는 말 그대로 빼도 박도 못한 신세가 되었다.

물론, 애초에 결혼을 물릴 생각도 없었지만.

오드리를 마주한 사람들은 그녀에게 걱정 어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케벨슨 영애, 결혼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저…… 결혼은 합의하에 하시는 거 맞죠?”

“네?”

“어맛, 내 정신 좀 봐! 호호,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

오드리는 도저히 찝찝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 * *

두 사람의 결혼이 어느덧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프리트 공작은 본인에게 주어진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려면 우선 행복한 부부가 되어야 한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며, 항상 일 순위에…….”

그는 <행복한 가정을 위한 15법칙>, <아내를 사로잡을 50가지 그림자> 같은 책을 차례로 독파하며 완벽한 새신랑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각하, 또 이상한 책을 보시는 겁니까?”

“무례하군. 이건 지식의 보고다.”

데릭은 독서의 힘을 무시하는 보좌관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긴. 날 때부터 혼자인 루카스가 <정열의 붉은 밤>이란 책의 효험을 어찌 알겠는가?

‘이럴 시간이 없다.’

데릭은 촉박한 일정을 상기하며 남은 책의 권수를 헤아려보았다.

그러던 와중, 황금색으로 그어 놓은 선에 딱 걸쳐진 보좌관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프리트 공작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감히, 지금, 뭘 밟고 서 있는 건가.”

“예? 앗, 이게 뭡니까?”

“예로부터 황금색 선은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상징한다고 했지.”

“아하.”

“그런데 내 가정의 평화를, 네놈이 짓밟은 것이다.”

“……히익!”

데릭은 보좌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말해 봐라. 도대체 이걸 어떻게 책임질 셈이지?”

“가, 가, 각하. 잘못했습니다!”

“내가 도돌이에게 소박맞는다면 그건 전부 네 탓이다. 그땐 절대로 편히 눈 감을 수 없을 것이다.”

“……!”

“썩 꺼져라.”

“예, 예에!”

루카스는 기회가 왔을 때 재빨리 달아났다.

“휴우.”

결혼식을 앞두고 예민한 주군을 모시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통 안 그러시던 분이 왜 갑자기 속설에 눈을 뜨셔서는……. 결혼식 날까지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만 해도 대략 수만 가지는 되는 듯했다. 주군이 직접 그린 황금색 선을 누군가 밟는 것 역시 금기에 해당되었다.

‘가만, 그럼 성수로 목욕은 왜 하시는 거야?’

루카스는 아침마다 공작성으로 배달되는 성수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간절한 믿음 앞에서는 미신과 신을 구분하지 않는 것일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 *

드디어 결혼식날.

화사한 웨딩드레스를 차려입은 오드리는 방 안에 들어선 손님을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클로드 오라버니!”

“결혼 축하해, 오드리. 오늘 너무 예쁘다.”

“헤헤.”

한스는 괜히 한 번 시비를 거는 것도 잊은 채, 멀거니 서서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

웨딩드레스를 입은 도토리라니.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했던 소꿉친구가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이 자리에 멈춰 서 있는데, 도토리만 혼자서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이다.

한스는 잠시나마 저 앙증맞은 손을 붙잡고 도망치는 상상을 해 봤다.

‘그럼 행복할까?’

아니. 야속한 도토리는 원치 않는 사랑 따위 필요 없다며 단호하게 등을 돌리겠지. 그렇게 다시 프리트 공작에게 돌아오겠지.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조금 더 용기 내지 못한 과거의 자신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한스, 너도 인사해야지. 오드리가 기다리잖아. 어서.”

“……뭐, 아무튼. 축하한다.”

“뭐야? 성의는 어디다 버리고 왔어? 다시 해. 다시 해 줘!”

“아, 몰라! 형, 나 먼저 나간다.”

“응? 어어.”

한스는 황급히 방을 나서는 내내 속으로 투덜거렸다.

야속한 계집애.

‘아무것도 모르면서…….’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도 생살을 가르는 것처럼 얼마나 아팠는데. 저 계집애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 생각도 없으면서.

신전으로 향하는 한스의 눈시울이 점점 뜨거워졌다.

* * *

“신랑 입장하겠습니다.”

“……!”

데릭은 유난히 삐거덕대는 걸음으로 버진로드를 걸어 나갔다.

─끼익, 끼이익.

가만히 있어도 살벌한 얼굴은 오늘따라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새신랑 얼굴 좀 보세요. 눈 밑이 거뭇거뭇한 게, 아무래도 밤을 꼴딱 지새운 모양이에요.”

“어휴, 누가 보면 영혼결혼식인 줄 알겠어요…….”

“그나저나 왜 저렇게 얼어 있는 거래요?”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하객들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새신랑이 얼마나 기대를 했으면 그렇겠소. 기대한 만큼 긴장도 되는 게지. 원래 저 나이 땐 다 저런 거라오.”

“암, 밤잠을 설칠 만도 하지.”

잔뜩 긴장한 새신랑이 영 귀여운 눈치였다.

한편, 데릭의 심장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신부 입장하겠습니다.”

“……!”

드디어 도돌이가 그에게로 온다. 데릭은 버진로드의 끝에 서 있는 도돌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마주친 시선 너머로 두 사람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의 인연은 잘못 도착한 편지 한 통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인연을 운명으로 만든 것은 결국, 프리트 공작의 헌신적인 사랑과 무던한 노력이었다.

“……도돌이.”

“데릭.”

두 사람은 팔짱을 끼는 대신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나란히 서서 손을 맞잡은 것뿐인데도 이상하게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데릭과 오드리가 하객들 몰래 손장난을 치는 동안, 어느덧 결혼식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럼, 맹세의 키스를 하십시오.”

오드리는 데릭에게 슬쩍 신호를 보냈다.

‘적당히 해야 해요. 알았죠?’

혹시나 이 남자가 평소처럼 폭주라도 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데릭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대로 허리를 굽혀 입술을 포갰다.

“이로써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엄숙히 선포합니다.”

─댕, 댕, 댕.

대신관이 종을 울림과 동시에 하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데릭은 환호성이 잦아들 때까지 입술을 떼지 않았다.

‘……조금만 더.’

신랑 신부의 입맞춤이 길수록 부부 생활이 길어진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하.”

한껏 폐활량을 뽐낸 데릭이 만족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데릭? 어디 안 좋아요?”

그가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걸음걸이는 다리 한쪽을 다친 사람처럼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이.”

결국, 참다못한 데릭이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오드리의 얼굴은 순식간에 홍당무가 되었다.

“데, 데릭!”

“의도한 건 아니었다. 정말이다.”

“…….”

“그러니 얼른, 방에 올라갔으면 한다. 응?”

─쪽.

버진로드를 걷던 그가 애원하듯 오드리에게 입을 맞췄다. 술렁이는 하객석 따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볼을 붉힌 채 입술을 앙다물고 있던 오드리도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알겠어요.”

“……!”

“어, 얼른 방으로 가요.”

“좋은 생각이다.”

버진로드를 가로지르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대로 세상 끝까지 걸어갈 기세였다.

“잠깐, 오드리! 부케요! 부케를 던져야죠!”

“앗.”

오드리는 아네트의 말을 듣고 마음이 급해졌다.

‘어떡하지?’

부케를 던지려면 또다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는 사이, 데릭뿐만 아니라 오드리의 애간장도 녹아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

‘에잇!’

오드리는 데릭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가로지르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그대로 냅다 부케를 내던졌다.

“……!”

누가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케까지 해치운 두 사람은 이제 거리낄 게 없었다.

“도돌이, 서둘러야 한다. 어서.”

“빨리, 빨리요!”

신혼부부는 서로의 손을 붙잡은 채 버진로드를 허둥지둥 뛰어나갔다.

─위잉.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두 사람을 별장으로 데려다줄 마차가 아니라, 침실로 향하는 포털이었다.

─슈욱.

그렇게 신혼부부는 순식간에 포털 너머로 사라졌다. 얼이 빠진 하객들만 남겨 놓은 채로.

아놀드의 옆에 앉아 있다가 엉겁결에 부케를 받은 켈리는 난감한 듯 눈을 굴렸다. 봉변이라도 당한 얼굴이다.

“이거 큰일인데요.”

“응? 어째서?”

“왜, 그런 속설이 있지 않습니까. 부케를 받은 사람이 반년 안에 결혼을 못 하면 평생을 혼자 산다는.”

“그럼 반년 안에 하면 되잖아.”

“……지금 농담하십니까?”

“왜? 못 할 게 뭐 있어?”

켈리가 답답하다는 듯 아놀드를 응시했다.

“제가 결혼하고 싶은 상대는 선배님뿐인데, 그럼 선배님이 저랑 결혼해 주실 겁니까?”

“뭐어?”

“설마, 다른 남자랑 하라는 책임감 없는 말씀을 하진 않으시겠죠.”

“그건…….”

아놀드가 당황한 듯 어물거렸다. 켈리는 그런 그를 보며 피식거렸다.

“프리트 공작님이 왜 오드리 님을 좋아하는지 알겠습니다.”

“……?”

“사랑스럽고 깜찍해서. 제게 선배님이 딱 그렇거든요.”

“그, 그게 무슨 건방진 말이야!”

아놀드가 방방 뛰거나 말거나. 켈리는 마치 선전포고와도 같은 말을 남겼다.

“두고 보십시오. 저는 꼭 선배님과 결혼하고 말 테니까.”

“……!”

켈리의 박력에 아놀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말았다.

* * *

그 시각.

공작성의 부부침실에서는 캉처르 나무로 만든 침대가 낱낱이 파괴되고 있었다.

“데, 데릭, 조금 천천히-”

“미안하지만 안 된다.”

“읍!”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똑같은 침대를 500개는 더 준비해 놓았으니까.

두 사람의 신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이제는 오드리의 집이기도 한 이곳, 공작성에서.

-<공작님, 제 발목 좀 놓아주세요!> 본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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