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4장. 마중 (18/25)

제14장. 마중

긴 잠에서 깨어난 다이안은 낯선 풍경에 흠칫 놀랐다. 그러다 코 높이에서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발견하고서는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헤집었다.

“아아악!”

머리카락은 왼쪽 옆부분만 성의 없이 싹둑 잘려 있었다.

한참을 부들거리던 황녀는 무릎걸음으로 문을 향해 기어갔다.

‘이 찢어 죽일 놈들 같으니!’

마침 문 아래쪽에는 배식구로 추정되는 덮개가 달려 있었다.

─끼익.

“……!”

나름 조심히 들어 올린다고 했는데도 듣기 싫은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이안은 뱀처럼 바닥에 몸을 바짝 붙인 채, 배식구 너머의 상황을 빠르게 살폈다.

좁은 틈으로 보이는 건 수많은 문이었다. 똑같이 배식구가 달린 문들. 아무래도 이곳은 수많은 독방으로 이루어진 공간인 듯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테이블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도망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봐.’

문득,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놈들은 다이안의 눈을 가리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은신처로 끌고 왔다. 절대 도망가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 찬 태도였다.

그녀는 이곳으로 향하는 내내 몇 번이고 도움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오는 길에 마주한 이들은 전부 죽은 사람들처럼 눈이 텅 비어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왈프는 은신처에 도착하자마자 거친 손길로 그녀를 떠밀었다.

‘그럼, 잘 자라고.’

‘……!’

그게 다이안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문턱을 넘자마자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저들이 뭔가 손을 써 놓은 것이 분명했다.

‘이대론 안 된다.’

다급해진 황녀가 황급히 방을 둘러봤다.

하지만 창문도 없는 작은 독방에 탈출구라곤 출입문뿐이었다. 게다가 방을 나간다 한들, 기껏해야 기본 검술 정도만 배운 그녀가 무사히 빠져나갈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대로 주저앉은 다이안이 불안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아니, 아니다. 죽일 거면 진작에 죽였겠지.’

지금 그녀가 믿을 거라곤 고귀한 신분뿐이었다. 저들이 황녀를 납치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터. 다이안은 저들이 그녀를 해칠 생각 따위 하지 말고, 차라리 몸값이나 요구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거기, 너!”

문밖에서 수상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황녀는 귀를 쫑긋 세웠다.

“울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야.”

“…….”

“다섯 명씩 들어가. 어서.”

곧이어 여러 쌍의 발소리가 들렸다. 오래된 나무 바닥 위를 맨발로 자박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왈프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지금쯤이면 그 여자가 깨어났을 시간 아니야?”

“확인해 봐야지.”

“……!”

상대는 지미였다.

화들짝 놀란 다이안이 저도 모르게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곧이어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깨어났네?”

“…….”

“머리카락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안 물어봐?”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를 내려다보는 오만한 눈빛. 몇 번을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일순간 낯빛을 바꾸었다.

“다이안, 정말 미안해요.”

“……!”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반드시 다이안을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약속해요.”

바깥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속삭이는 얼굴엔 긴장이 가득했다. 꼭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사람처럼.

다이안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거짓말이라기엔 그의 얼굴이 너무도 절박했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누구라도 믿고 싶었다.

“……거짓말하지 마.”

“제발 저를 믿어 주세요. 우리가 믿을 건 서로뿐이에요. 네?”

“…….”

한참을 망설이던 황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지미의 입가엔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뭐야. 말할 줄 아네?”

“……!”

“난 또 벙어리가 됐나 했지.”

맞잡았던 손이 대충 내팽개쳐졌다. 다이안은 자신이 속았다는 걸 이제야 눈치챘다.

‘감히……!’

문밖에서 몰래 상황을 지켜보던 왈프가 참지 못하고 낄낄댔다.

“역시 연기파 배우.”

“몰래 훔쳐 들으란 소리는 안 했던 것 같은데?”

“다 같이 포커나 치자고. 얼른 나와.”

지미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힌 황녀를 뒤로한 채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다이안은 눈을 떴을 때처럼 다시 혼자가 되었다.

“밖의 상황은 어때?”

“황제가 공국 근처로 정예군을 보냈다는데, 걱정할 수준은 아니야.”

“쯧쯧. 매정한 아비네. 협상도 하기 전에 군사 먼저 보내다니. 이래서야 머리카락을 보낸 보람이 없잖아.”

정예군? 협상?

황녀는 소리가 나지 않게 엉금엉금 기어가 문 위로 귀를 바짝 붙였다.

“이 빌어먹을 로빈 같으니!”

“멍청하게 속은 네 잘못이지.”

“이래서 너희들이랑 포커 치기 싫다니까! 다들 쓸데없이 연기만 잘해서는…….”

“시끄럽고, 얼른 돈이나 내놔.”

그들은 한동안 포커만 쳤다. 그러다 한 판이 끝날 때쯤에야 다시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그나저나 펠리오스는 어쩔 예정이야?”

“황제라면 금방 내어 줄 거야. 누가 봐도 버려진 땅이니까 몸값치고는 싸다고 생각할걸.”

“프리트 공작이 가만히 있을까?”

“여태껏 발표 안 한 거 보면 몰라? 이제 와 밝혔다가 무슨 죄를 뒤집어쓰려고.”

“어휴. 지겨워 죽겠네. 그놈의 마광산, 얼른 막아 버리든가 해야지…….”

“마법사 놈들보다 더 지겨울까.”

다이안은 저도 모르게 문에서 한 뼘 정도 물러났다.

‘……마광산? 펠리오스에 마광산이 있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신대륙에 마광산을 가진 건 베르빌 연합국뿐이니, 진작 공개했다면 프리트 공작은 분명 큰 이득을 봤을 것이다.

‘대체 왜?’

다이안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도 잊은 채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들이 그녀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것은 곧, 그녀가 살아서 나가지 못할 거란 위험신호라는 걸 잊은 눈치였다.

* * *

“마리, 지금 몇 시야?”

“정오 일 분 전이요!”

“뭐? 벌써? 제나, 얼른! 얼르은!”

오드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시녀를 재촉했다. 화장에 너무 많은 공을 들인 탓에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촉박했다.

“아가씨, 일단 앉으세요!”

“하지만 아직 치마가-”

“자리에서만 안 일어나시면 돼요. 상반신까지는 아주 완벽하시거든요.”

“…….”

기적의 논리에 설득당한 오드리는 얌전히 책상 앞에 앉았다. 그 아래로 감춰진 치마는 제대로 여며지지도 않고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우웅.

곧이어 통신구 속으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데릭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오드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왔다! 왔어!”

“저희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시녀들은 흥분해서 팔다리를 파닥거리는 아가씨를 뒤로한 채 후다닥 방을 나섰다.

“흠흠!”

오드리는 몇 번이나 목을 가다듬은 후에야 연락을 받았다.

“데, 데릭.”

―도돌이.

그의 얼굴이 책상 위로 두둥실 떠 올랐다.

‘앗……!’

평소와 달리 갑옷을 전부 갖춰 입은 자태가 근사하기 이를 데 없다. 겨우 한 뼘 거리에서 그와 눈을 맞춘 오드리는 괜한 부끄러움에 책상 아래로 손만 꼼지락거렸다.

―식사는 했나?

“이, 이따 하려고요.”

―나도 이따 하려던 참이다.

“…….”

―우린 운명인가 보군.

“그, 그, 그러게요!”

아차. 자연스럽게 대꾸하려던 것이 삑사리를 내고 말았다.

‘앗!’

종달새 같은 목소리를 들려줘도 모자랄 판에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어쩐지 당장이라도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데릭은 비웃기는커녕,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입매를 휘었다.

―그대에게 이런 목소리도 있었군.

“아, 아니-”

―참으로 사랑스럽다.

“……!”

오드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얌전히 모아놓은 발가락 끝은 천천히 곱아들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입술을 짓씹으며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그녀가 수줍게 대꾸했다.

“데릭도요…….”

―응?

“사, 사랑스럽다고요.”

―……내가?

데릭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내려다보았다.

어디 하나 작은 곳이 없었다. 키부터 어깨, 등판, 팔뚝, 손, 발, 하물며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곳까지. 그는 앙증맞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 아니던가. 프리트 공작에게 어울리는 표현은 흉포하다, 늠름하다, 강인하다, 단단하다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도돌이에게 사랑스러워 보인다면 그로선 잘된 일 아닌가.

그 뒤로 오드리는 데릭 없이 보낸 하루를 조잘조잘 떠들었다. 친구를 만난 이야기, 록트에 간 이야기, 심지어는 간식으로 먹은 음식 이야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그는 전혀 지루한 기색 하나 없이 이를 경청했다.

그런데 그때.

─뻐꾹!

오후 1시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벌써?’

오드리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꺼내지도 못한 이야기가 한 보따리 아니던가. 하지만 그의 식사 시간까지 빼앗아 가면서까지 붙잡아 둘 순 없는 노릇.

‘임무 수행 중이잖아. 방해해선 안 돼.’

한참을 미적거리던 오드리가 먼저 작별을 고했다.

“그, 그럼…… 내일 또 봐요!”

―잠깐, 도돌…!

“안녕.”

그는 배를 곯더라도 기꺼이 그녀를 선택했을 텐데. 데릭은 허공을 응시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반칙이다.’

고 깜찍한 얼굴을 고작 1시간만 보여 주는 법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불만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자고로 무슨 무슨 법에 따르면, 귀엽고 예쁜 것은 적어도 2시간 이상 보여 줘야 한다고 이렇게 저렇게 규정되어 있다는데!

그러나 데릭은 차마 오드리를 신고할 수 없었다. 다만 얼른 복귀해서 저 앙증맞은 범법자에게 그대가 이런저런 법을 위반했노라고, 그러니 앞으로는 그 얼굴을 꼭 2시간 이상 보여 달라고 단단히 일러둘 참이었다.

“하아.”

갑옷 속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던 데릭이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넣어 둔 사진첩이었다.

“도돌이…….”

그리고 방금까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했던 게 꿈이었던 것처럼, 또다시 도돌이를 앓기 시작했다. 사진 속 그녀의 얼굴을 쓸어 보는 손길이 퍽 애틋하고 조심스러웠다.

* * *

≪황성, 벌써 열 번째 군사 파견≫

≪‘황녀 납치 사주’는 공국이 아닌 주술사들? 이젠 설명이 필요할 때≫

≪주연 배우 대거 ‘행방불명 상태’ 프레이아 극단, 운영 차질 불가피≫

≪오늘의 이슈 : 협상 중이라던 황성, 왜 입을 닫았나?≫

며칠 만에 상황이 급변했다.

테수스 공국 근처로 파견되는 군사 규모는 전쟁을 방불케 했고, 민간에서는 수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황녀를 납치한 세력이 주술사라는 것이다.

≪[단독] 마력석 폭발은 ‘주술’ 때문…… 민간 주술 경계령≫

때마침 발표된 아놀드의 조사 결과 역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황성은 ‘마탑주 개인의 성급한 판단일 뿐’이라며 에둘러 아놀드를 비난했지만, 아놀드는 코털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데릭은 어김없이 정오만 되면 연락을 걸어 왔다.

―도돌이.

“데릭, 그쪽 상황은 어때요?”

―여전하다. 그대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나서 많이 좋아졌어요! 록트도 이번 주 안으로 다시 업종 변경하려고요.”

―다행이군.

그는 잔뜩 상기된 도돌이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놈이 제대로 하고 있나 보군.’

원래는 제국민들의 분노가 정점을 찍었을 때, 모든 사실을 공개하며 반전을 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뜬금없는 황녀 납치 사건이 터지며 모든 관심이 그쪽으로 옮겨 갔다.

고민하던 데릭은 출정식 전날 찾아온 안토니오에게 제안했다.

‘주술사를 몰아내자고 했지.’

‘드디어 내 말을 믿어 주는 거야?’

‘협조하겠다.’

‘잘 생각했어!’

‘대신 조건이 있다.’

‘뭔데?’

‘네가 소문을 좀 만들어 줘야겠어.’

잠입에 능하고 말이 많은 안토니오에게 딱 맞는 역할이었다.

예상대로 그는 아주 능청스럽게 크리앙트 제국 곳곳을 휘젓고 다니는 듯했다. 이제 황녀 납치 사건이 주술사의 소행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충 무마하려던 황실 입장에선 아주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겠지.

“그나저나 잠은 제대로 자는 거예요?”

오드리가 걱정스레 데릭의 안색을 살폈다.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얼굴이 그의 고단함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익숙해져서 괜찮다.

“그래도요. 힘든 건 없어요?”

―하나 있긴 하다.

“뭐, 뭔데요?”

―그대가 보고 싶어.

“……!”

―통신구를 통해서 말고, 실제로 보고 싶다.

새빨개진 오드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곤 입을 앙다문 채 사랑스럽게 웅얼거렸다.

“저, 저도요.”

―……뭐?

데릭은 순간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듯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도돌이가 그를 보고 싶어 하다니!

갑자기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하며 호흡이 가빠 왔다. 얼굴은 이미 넋이 나가 있었다.

“호, 혹시 마도구 안 필요하세요?”

―…….

“아니, 그냥, 혹시 다 쓰셨으면 가져다드릴까 해서……. 포털로 가면 금방인데! 정말 순식간인데. 제가 거기로 갈까요?”

―아니, 아니다. 절대 안 된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데릭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였다. 도무지 서운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진짜로 보고 싶은 거 맞아?’

참으로 눈치도 없는 남자다. 그녀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가겠다고 하면, 그냥 모른 척 알겠다고 하면 될 일 아닌가.

‘단박에 거절할 건 또 뭐람?’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무려 15일이나 만나지도 못했단 말인가! 이것 참. 포털용 마도구를 개발한 보람이 없었다.

데릭은 토라진 듯한 오드리를 발견하고 뒤늦게 쩔쩔맸다.

―아직 이곳 상황이 좋지 않다.

“…….”

―그대를 조금이라도 위험하게 만들 순 없어.

그녀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마법사라는 사실은 깜빡 잊은 눈치였다.

―도돌이, 응?

그런데 그때. 통신구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기습입니다!

데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이만 나가 봐야 할 듯하다. 정말 미안하다.

“조심-”

―내일 다시 연락하지.

미처 인사를 건넬 틈도 없었다.

─슈웅.

그녀의 책상 위로 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홀로 남은 오드리는 발만 동동 굴렀다.

“……조심하시라고요.”

벌써 며칠째다.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도중에 연락이 끊기는 일이 잦아졌다.

오드리는 심란한 얼굴로 신문을 뒤적거렸다.

‘다치지 말아야 할 텐데.’

데릭이 걱정되어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내일 정오에도 어김없이 연락이 오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 *

황녀는 날짜를 세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그들의 대화를 듣고 지레짐작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창문도 없는 방에 갇혀 낮과 밤을 모른 채 살다 보니 마치 가축이 된 기분이었다.

문 너머에서는 매일 같이 끔찍한 소리만 들려왔다. 아이들의 울음소리, 밤새도록 벽을 긁는 소름 끼치는 소리……. 이대로 있다간 분명 미치고 말 것이다.

그때,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

─끼익.

“남기지 말고 다 먹어.”

“…….”

식사를 들고 나타난 로빈이었다.

다이안은 말라비틀어진 채소만 둥둥 떠다니는 묽은 수프를 영 꺼림칙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곁들여진 빵은 딱 봐도 오래된 밀가루로 만든 것이었다.

“어라? 먹기 싫어?”

“……!”

로빈이 쟁반을 슬쩍 뒤로 빼자, 다이안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일단 살고 봐야 한다.’

그녀는 맛을 느낄 새도 없이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이곳에 갇힌 사람 중 그나마 그녀에게만 식사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음식 냄새를 맡은 아이들이 쾅쾅 문을 두드리고 벽을 긁기 시작했다.

“저것들 또 시작이네.”

“…….”

로빈은 다이안이 갇힌 방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맞은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슨 수작이지?’

황녀는 활짝 열린 문을 바라보며 갈등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까 싶다가도, 분명 이유가 있으니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 거란 의심이 들었다.

‘뭔 짓을 해 놨을지도 몰라.’

그녀는 오늘도 일단 지켜보는 것을 선택했다.

곧이어 맞은편 방의 문이 열렸다. 다이안으로서는 다른 방의 광경을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끼익.

“얘들아, 형을 화나게 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응?”

“……!”

“네 친구처럼 되고 싶어?”

맞은편 독방엔 삐쩍 마른 5명의 아이가 갇혀 있었다. 다이안은 그중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며칠을 굶주린 나머지 당장이라도 그녀의 것을 훔칠 것 같은 얼굴이었다.

“……!”

다이안은 남은 음식을 허겁지겁 집어삼켰다.

‘꼬마야, 나를 원망하지 마라. 원래 목숨에도 있는 귀천이 법이다.’

저 볼품없는 꼬마 하나가 살아서 나가는 것보단 황녀가 살아서 나가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겠는가. 제국민들도 그러길 바랄 것이다.

‘탓하려거든 천한 네 부모를 탓해야지.’

다이안은 제국민의 경외를 받는 황녀였으니까.

“진짜로 황녀 맞나 몰라. 꼭 뒷골목 비렁뱅이처럼 먹네. 개처럼 핥아먹은 거야?”

“…….”

“뭐, 살고 싶으면 그래야지.”

로빈은 건더기 하나 남지 않은 그릇과 접시를 털어 보며 다이안을 비웃었다.

황녀의 눈이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돌아가기만 하면 기필코…….’

지금의 그녀를 지탱하는 힘은 미래의 복수를 계획하는 것뿐이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미지수였지만.

* * *

잊지 않고 편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결 마음이 놓여요.

보좌관님도 다치지 않고 돌아오시길 바랄게요!

“이 정도쯤이야, 뭘.”

오드리의 답장을 받아든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최근 들어 케벨슨 영애의 수족이 되어 주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전달하고 있었다. 걸리는 날엔 각하에게 죽을 목숨이겠지만, 큰 걱정은 없었다.

‘케벨슨 영애께서 막아 주시겠지.’

더 튼튼한 동아줄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부부의 실권은 아내의 손에 있는 법. 눈치 빠른 루카스는 재빨리 라인을 바꿔탄 것뿐이다.

‘어디 가서 군사 기밀을 떠들고 다니실 분도 아니고 말이야.’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걱정하고 있을 케벨슨 영애를 위해 대략적으로라도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 줄 참이었다.

“적들의 기습 뒤, 각하께서 실종된 상태인 것으로 위장하여 매복을-”

그런데 미처 내용을 다 쓰기도 전에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혼자서 뭘 중얼거리는 거지?”

“히익! 가, 각하!”

“전보라도 쓰는 건가?”

“그, 그게…….”

지레 찔린 루카스는 그대로 편지를 대충 접어 버렸다.

“안 그래도 막 보내려던 참입니다! 하하!”

“…….”

“보자 보자하~”

“……수상한데.”

“저허언서구가 어허디이 있을까아아아~”

보좌관은 다소 어색한 흥얼거림과 함께 자신의 처소를 빠져나갔다. 그 뒤로 데릭의 날카로운 시선이 따라붙었다.

“어, 어휴.”

중앙 막사에 도착한 루카스가 떨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하마터면 주군에게 들킬 뻔했다.

“……그랬다면 나를 고기 방패로 쓰셨을 거야.”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테이블 위에 잠시 편지를 내려놓자마자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경보. 경보. 경보.

“……!”

적들의 기습을 알리는 마도구 소리였다. 드디어 작전이 개시될 타이밍이란 뜻이다.

“각하!”

루카스는 편지를 마저 쓰는 것도 잊고 당장 주군을 찾아 달렸다.

“어라?”

뒤늦게 도착한 통신병은 덩그러니 놓인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당장 전서구의 발목에 묶어 날려 보냈다.

“와 보길 잘했네.”

통신병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마지막으로 기지를 빠져나갔다.

* * *

“뭐, 뭐어?”

편지를 받아 든 오드리는 당장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적들의 기습 뒤, 각하께서 실종된 상태

얼마나 위급한 상황에서 보낸 건지, 짧은 편지는 뒤로 갈수록 글씨가 엉망이었다.

오드리의 눈엔 생략된 뒷내용이 보이는 듯했다.

“데, 데릭이 실종된 상태라고?”

그녀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아, 안 돼……!”

이제야 겨우 마음을 깨달았는데, 이걸 전하지도 못했는데, 이럴 수는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 * *

다음 날이 되자, 프리트 공작의 실종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텅 빈 전초기지…… 제국군에게 대체 무슨 일이?≫

급히 파견된 종군기자가 대대적으로 공작의 실종을 보도했기 때문이다.

사라진 건 데릭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제국군들도 전부 실종 상태였다.

아직 병사들과 데릭의 죽음이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그 모든 일을 그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오드리는 핼쑥해진 얼굴로 쑥대밭이 된 처소 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 몰골을 하루 내내 흘끔거리던 한스도 마침내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이젠 한계였다.

“야, 너 그냥 들어가서 쉬어.”

“…….”

“가서 자든지 뭘 먹든지 하란 말이야.”

“……괜찮아.”

“진짜 돌아 버리겠네.”

도대체 어디가 괜찮다는 걸까? 오랜만에 북적이는 록트 구석에 처박혀 저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는데.

참다못한 한스는 상한 시금치처럼 축 늘어진 친구를 이끌고 장막 뒤편으로 향했다. 그리곤 아직 정리되지 못한 짐들을 대충 정리한 뒤, 한쪽에 간이침대를 펼쳐 주었다.

“여기서 눈이라도 붙여. 그놈의 신문 좀 그만 내려놓고.”

“괜찮다니까?”

“야, 너 진짜……!”

한스의 얼굴이 매서워졌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화가 터져 나왔다.

“눈 밑에 시커멓게 그늘이 졌는데 뭐가 괜찮아? 그대로 쓰러져서 콱 죽어 버리기라도 하려고?”

“…….”

“걱정하는 사람은 생각 안 하지? 너 지금 몰골이 어떤 줄은 알아? 그냥 산송장이야, 이 계집애야!”

가만히 듣고 있던 오드리도 울컥하여 되받아쳤다.

“네가 왜 화를 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 너어!”

“눈만 감으면 악몽을 꾸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자기 싫어! 싫다고!”

“…….”

억울한 듯 씩씩거리던 오드리는 신문을 집어 든 채 가게를 뛰쳐나갔다.

사용인들은 생각보다 일찍 들어온 아가씨를 보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

“혼자 있고 싶어.”

─쾅!

“…….”

곧장 방에 처박힌 그녀는 오후 내내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

‘어떻게 다들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 어떻게 나만 슬퍼할 수 있어?’

데릭이 임무 도중 실종되었다는데, 생사를 확인할 수도 없다는데. 잠 좀 자라고? 뭐라도 먹으라고?

오드리는 그들의 태평함이 도리어 서운하게 느껴졌다.

“으허엉……!”

새벽녘, 저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면 줄곧 악몽을 꾸지 않았던가. 꿈속에서 데릭은 그녀가 선물한 목걸이처럼 검붉게 피칠갑을 한 채 오드리의 눈앞에서 몇 번이고 죽어 나갔다. 그 장면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오드리는 바들바들 떨다가, 차라리 밤을 꼴딱 새우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다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흑.”

서럽게 우는 와중에도 데릭과의 마지막 인사가 떠올랐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사히 돌아오겠다. 죽더라도 그대의 곁에서 죽을 테니, 염치없지만 나를 기다려 줬으면 한다.’

“거짓말쟁이…… 흐으윽.”

그런 약속을 했으면 죽기 살기로 살아남아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기다려 달라고 했으면 돌아와야지!

‘그리고 그땐…… 체험판이 아니라, 온전히 그대의 연인이 되고 싶다.’

그건 오드리도 바라는 바였다. 체험 기간이 언제 끝날까 신경 쓸 필요 없이, 남들처럼 알콩달콩 연애하고 싶었다.

그녀는 새삼 데릭을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샬롯의 말이 맞았다. 이건 사랑이었다.

“킁…….”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한 오드리가 축축한 베갯잇에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코를 훌쩍이며 숨을 고르는 찰나, 어두워진 창밖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몇 시간이 지나 있는 것이다.

“…….”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이 귀중한 시간을 엉엉 우는 데 전부 써 버렸다니!

정신을 차린 오드리가 엉금엉금 침대를 기어 내려왔다.

“……이럴 때가 아니지.”

시원하게 울고 나니 모든 게 한결 명확해졌다.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한 채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오드리는 당장 짐을 싸기 시작했다.

“데릭이 죽었을 리 없어.”

그는 제국의 영웅 아니던가. 분명 사정이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 홀로 고립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만약 죽었으면 어떡하지?”

잠시 망연자실하던 오드리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시체라도 찾을 거야.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 안 믿어.”

그런데 방문을 열자, 곧바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차마 노크도 못 하고 문 앞을 서성이던 한스였다. 그는 눈이 퉁퉁 부은 친구를 보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누군가 그의 심장을 잘게 조각내는 듯했다.

“너…….”

“비켜 줄래?”

문득, 그녀의 손에 들린 수상한 짐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한스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곧장 오드리의 앞을 막아섰다.

“잠깐.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비키라니까?”

“너 설마…….”

“내가 가서 찾아올 거야.”

당연히 한스는 펄쩍 뛰었다.

“이 미친 계집애가! 너, 거기가 어딘 줄은 알아? 죽으려고 작정했어?”

“그럼 어떡해!”

오드리가 당당하게 고개를 들며 응수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실종 상태라는데! 너라면 가만히 있겠어?”

“……!”

좋아하는 사람.

한스가 눈에 띄게 휘청였다.

친구의 당돌한 고백이 새삼스러울 일도 아닌데. 이미 지겹도록 많이 들어 왔는데.

‘……프리트 공작을 좋아한다고?’

왠지 도토리를 바라보는 프리트 공작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다 싶었지. 그러나 쌍방통행이었다는 건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

오드리는 힘없이 물러나는 한스를 뒤로한 채 저택을 나섰다. 도대체 얼마나 중무장을 했는지, 걸음마다 절그럭대는 마력석 소리가 요란하게 새어 나왔다.

“…….”

한스는 자신을 스쳐 지나간 오드리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에겐 너무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도토리의 화살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한스를 빗겨 나갔나 보다.

* * *

다이안은 적막 속에 홀로 앉아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문을 긁고 애원하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곳으로 끌려온 사람 중 황녀만 살아남았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거긴 어때?”

“다 죽었어.”

“좋아. 얼른 옮기자고.”

일당들은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시체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이안은 배식구 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애써 자기합리화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이건 자연의 섭리라고, 그녀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나 맞은편 방에서 익숙한 아이가 나왔을 땐,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하고 말았다.

‘그래 봤자 이미 죽은 아이인 것을.’

게걸스레 음식을 삼키는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던 말간 눈동자. 다이안은 그때 처음으로 모멸감을 느꼈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란다. 엄마, 아빠를 만나야지~”

일당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부지런히 시체를 옮겼다.

그리고 그날 밤.

─까득. 까드득.

문을 긁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분명 그녀뿐인데.

다이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배식구를 살짝 열었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문을 긁어 대는 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

분명 아까 시체가 되어 실려 나갔던 그 아이였다.

‘도대체 어떻게?’

죽은 아이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설마 복수하러 찾아온 걸까? 음식을 나눠 주지 않았다고?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다이안의 눈이 잘게 떨렸다.

그러다 불시에 등을 돌린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

그녀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 * *

“적들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발견 즉시 보고하도록.”

“예.”

데릭은 제국군을 이끌고 전초기지와 조금 떨어진 고원 지대 곳곳에 매복한 상태였다. 밀려오는 기습을 가만히 상대하고만 있기엔 끝이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주술사들은 목숨을 잃은 시신들을 병사로 썼다. 갑옷도 입지 않은 적들은 아무리 베고 찔러도 죽지 않았다. 그러다 목을 베면, 생명력이 일시에 빠져나간 것처럼 바싹 마른 시체 상태가 되었다. 펠리오스에서 보았던 아이처럼. 주술사들이 이미 죽은 자를 억지로 살아 움직이게 만든 게 분명했다.

‘분명 사특한 주술을 사용했겠지.’

얼마 가지 않아 이는 사실로 드러났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아군의 시체가 다음 날 적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잠시 기지를 비운 동안, 주술사 쪽 병사들이 그들의 기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빈 기지를 계속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데릭은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다.

저들은 그저 기지로 돌진하게 만들어진 게 아닐까? 제국군이 이곳에 고립되도록. 시간을 끌기 위해서.

하지만 이를 역이용하면 도리어 그들의 뒤를 밟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데릭은 이를 전제로 작전을 짰고, 종군기자의 눈까지 속여 가며 매복을 감행했다.

“각하!”

그때, 멀리서 루카스가 달려왔다.

“기지 상황은 어떻지?”

“어제와 같습니다. 저들이 빈 기지만 서성이고 있습니다. 아직까진 잠잠합니다.”

“……역시.”

데릭의 눈이 번뜩였다. 이를 살피던 루카스가 눈치껏 되물었다.

“추격 준비를 명할까요?”

“아니다. 오늘은 이만 기지로 복귀하여 저들을 정리하지.”

“하오면-”

“작전은 내일 수행한다. 대충 정비가 끝나면 밤사이 추격대를 따로 꾸려 양동작전을 펼친다.”

“예, 알겠습니다.”

─휘이익!

루카스가 호각을 불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한 곳으로 집결했다.

그런데 100여 명의 군사들이 열을 맞춰 기지로 복귀하려는 찰나.

─펑!

전초기지 쪽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화르륵!

이어서 불기둥이 치솟더니, 마치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가, 각하!”

“복귀를 서두른다. 알아서 뒤를 따르도록.”

“예!”

데릭과 루카스는 근처에 숨겨 두었던 말 위로 올라탔다.

‘벌써 눈치챈 건가?’

기지를 향해 달려가는 도중에도 폭발음과 비명은 끊이질 않았다. 여태 잠잠하던 적들에게 뭔가 변화가 생긴 게 분명했다.

하지만 초토화가 된 전초기지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거…… 케벨슨 영애 아닙니까?”

“…….”

케벨슨 백작가에 있어야 할 도돌이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전초기지를 휘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아아아아!”

─콰앙!

같잖은 기합 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마법들의 향연.

두 사람은 왠지 모르게 숙연해졌다.

뒤늦게 복귀한 병사들 역시 예상외의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린 이만 고향으로 돌아가도 되겠는데?”

“그러게.”

갑옷도 갖춰 입지 않은 자그마한 여자 하나가 분풀이를 하듯 기지 전체를 휘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적들은 여자 근처로 다가가지도 못했다.

─타닥.

“끄아아악!”

어쩌다 옷깃 한 번이라도 스쳤다간 괴로운 비명과 함께 타들어 갔기 때문이다. 징글징글하게 병사들을 괴롭히던 적들이 여자 앞에서 모기처럼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편, 병사들의 시선은 곳곳에서 타오르는 불기둥과 회오리바람으로 옮겨 갔다.

“……와. 저게 다 얼마야?”

비싼 마도구를 마법이 통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사용하다니! 돈이 정말 썩어 빠지게 많거나, 평생의 원수를 말살하고 말리라는 독한 각오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데릭은 곧장 전초기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도돌이!’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선득해졌다. 도돌이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적들이 그녀를 향해 다가갈 때마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이…… 이 사악한 것들! 돌려 내! 돌려 내란 말이야!”

데릭의 마음도 모른 채 도돌이는 겁도 없이 뛰어다녔다. 그럴 때마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갔다.

마침내 그녀의 뒤로 다가간 데릭이 겨우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내려는 순간.

“끄아아악!”

주술사의 병사 하나가 끔찍한 비명과 함께 도돌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도돌이!”

데릭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은 채, 등 뒤로 팔을 뻗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두 동강이 난 시체가 그의 발치로 툭 떨어졌다.

“……데, 데릭?”

“그대는 정말.”

“분명, 분명 실종 상태라고…….”

데릭의 얼굴을 확인한 오드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흐윽!”

새우처럼 흙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오열하는 모습이 그간의 걱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데구륵. 데구르륵.

등 뒤로 야무지게 동여맸던 짐가방에선 마도구와 마력석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대륙 하나는 그냥 날리겠군.’

아주 어마어마한 각오를 하고 온 모양새다.

“……하.”

“다시는, 다시는 못 보는 줄 알고, 흐윽!”

데릭은 마도구와 마력석 더미에 파묻혀 있던 도돌이를 달랑 들어 올려 재빨리 구조했다. 서럽게 울며 종알종알 하소연하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나를, 걱정한 건가.’

저러다 졸도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한 편으론 흐뭇하게 들썩이는 입매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데릭은 자신에게 매달려오는 도돌이를 꼬옥 마주 안았다. 그리고는 살벌한 눈빛으로 부하들을 향해 눈짓했다.

‘뭣들하고 있지?’

‘……!’

잔당들은 눈치껏 알아서 좀 처리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도, 도, 돌진!”

“이야아!”

멀거니 서서 구경만 하던 부하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기지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투 중에도 자꾸만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돌아온다고 했으면서! 왜, 왜 사람을 걱정시키고 그래요?”

“내가 미안하다. 이제 그만 눈물을 그쳐. 응?”

“이 거짓말쟁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약속하지.”

“흐윽.”

그의 허리까지 밖에 오지 앉는 자그마한 여자 앞에서 절절매는 프리트 공작이라니.

‘이봐,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나만 미친 게 아니라니 다행이야.’

적의 목을 베는 상황에서도 이런 진귀한 구경을 놓칠 수야 없었다.

* * *

황제는 심각한 얼굴로 눈앞의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나, 프레드릭 앙고트 로에르 크리앙트는 펠리오스 땅과 관련된 모든 권한을 ( )에게 양도하는 바이다.

주술사들과의 협상은 생각보다 지지부진했다.

그들의 요구는 단 두 가지. 황성 지하 감옥에 갇힌 주술사를 풀어주는 것과, 프리트 공작령의 일부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왜 저 쓸모없는 땅이냔 말이지.”

아주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아무리 황제라 한들, 뒷골목의 건달처럼 귀족들의 땅을 막무가내로 빼앗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나 전초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한 주술사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황제의 머리도 덩달아 빠르게 돌아갔다.

‘프리트 공작이 전사라도 한다면 어차피 황실에 귀속될 땅이긴 하지.’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본다고 해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프리트 공작이 황녀를 구해 오거나, 아니면 그대로 전사하여 주술사들과 협상하는 데 이바지하거나. 어떻게 되든 황제로선 좋은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황제가 답을 미루는 사이, 때마침 프리트 공작의 실종 소식이 전해졌다.

황제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전초기지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가?”

“예. 아무래도 생존을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 같습니다.”

“…….”

그렇다면 더 이상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프리트 공작이 시체로 돌아오길 바라는 수밖에.

─쾅.

마음을 굳힌 황제가 서류 아래로 인장을 찍었다.

“테수스 공국 측으로 전달해라.”

“예.”

젊은 기사는 황제의 칙서를 품에 안고 빠르게 알현실을 나섰다. 그러다 복도 끝에서 황태자를 딱 맞닥뜨렸다.

“잠깐.”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그게 뭐지?”

“폐하께서 테수스 공국으로 전달하는 칙서입니다.”

“……칙서?”

황태자는 곧바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설마, 그 상종 못 할 것들과 협상하시려는 건 아니겠지.’

사탕을 달라 조르는 아이에게는 하나를 내어 주면 다음번엔 두 개를 요구해 오는 법. 납치범들과의 협상이란 황태자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확인해 봐야겠다.”

“……예?”

“이리 내놓아라.”

“저, 저하. 이것은 제국의 태양이신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칙서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걸-”

“어차피 곧 있으면 내가 앉을 자리 아닌가.”

“저하……!”

“보아하니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은 듯하군.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에두른 협박에 못 이긴 기사가 결국 마지못해 칙서를 건넸다.

“반드시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안 그러면 저는 목이 잘릴 겁니다.”

“당연한 소리. 이렇게 충성스러운 기사를 어찌 그리 쉽게 잃겠는가.”

황태자는 한껏 근엄한 얼굴로 황제의 칙서를 몰래 펼쳐 보았다. 그러나 순식간에 표정이 무너졌다.

‘……뭐? 펠리오스를 넘긴다고?’

아바마마께선 노쇠하여 판단력이 흐려진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제국 최고의 검’이자 ‘수호자’를 적으로 돌릴 생각 따윈 하지 않으셨을 테니까. 프리트 공작은 황태자가 만들어 갈 미래의 제국에도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아바마마가 그와 척을 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이 칙서는 내가 가져가야겠군.”

“저하!”

“폐하께는 네가 알아서 둘러대라.”

황태자는 거의 졸도할 듯한 기사를 뒤로한 채 멀어졌다. 그에겐 프리트 공작이 반드시 살아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 * *

데릭은 축 늘어진 도돌이를 안아 든 채 성큼성큼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마실 만한 게-”

일단 도돌이를 의자에 앉혀 놓고 허둥지둥 주변을 살피려는 찰나.

─스윽.

익숙한 온기가 느껴졌다.

“도돌이?”

“…….”

도돌이가 손을 맞잡아 온 것이다. 말없이 그의 손만 주물럭거리는 모습이 그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를 눈치챈 데릭이 곧바로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얼마든지 만져 봐도 좋다. 그대가 안심할 때까지.”

“…….”

단풍잎 같은 손 위로 커다랗고 듬직한 손이 포개졌다.

그는 도돌이의 손을 자신의 얼굴로 이끌더니,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천천히 확인시켜 주었다. 목과 어깨, 가슴, 팔뚝도 전부 도돌이의 검사를 맡았다.

“흐윽…….”

그제야 안심한 오드리가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데릭 역시 와락 밀려드는 온기를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이 어딘지 모르게 뻣뻣하면서도 퍽 다정스러웠다.

“그대가 이렇게 자꾸 울면 나는 괜한 기대를 하게 된다.”

“…….”

“왠지 이번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면, 그토록 바라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그의 어깨에 턱을 걸친 채 훌쩍이던 오드리가 별안간 몸을 물렸다.

“싫어요, 지금 말할래요.”

“……도돌이?”

지난날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출정한 후로는 매일이 지옥 같았다. 실종 소식까지 들었을 땐 정말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를 못 한 게 어찌나 마음에 사무치던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긴 싫었다.

“조, 좋아해요!”

“……!”

“이 말을 못 전할까 봐, 흐으윽, 얼마나 무서웠는데.”

“……!”

데릭의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졌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왼쪽 가슴에서부터 솟아난 열기가 온몸으로 빠르게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볼을 답삭 붙들었다.

“그대가, 나를…… 나를 좋아한다고?”

─끄덕끄덕.

“정말인가?”

─끄덕끄덕.

아, 정말이지. 데릭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그의 입술이 곧장 도돌이를 향해 돌진했다.

“데, 데릭……!”

“하아.”

양쪽 뺨과 이마, 콧등, 도톰하게 부어 버린 눈꺼풀, 관자놀이까지. 부드러운 입술이 마치 도장을 찍듯 그녀의 얼굴 위를 바쁘게 돌아다녔다.

“으움!”

그러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입술이었다. 데릭은 위에서 내려찍듯 도돌이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이 들뜬 마음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세상에 그 어떤 말로도 이 기분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웁!”

그의 움직임이 급해졌다. 고개가 바짝 꺾인 오드리는 의자 팔걸이를 움켜쥔 채 간신히 버텼다. 그러나 무서울 정도로 돌진해 오는 이 남자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깊게 맞붙고 싶었다.

서서히 몸을 일으킨 오드리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동시에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이 천천히 허리를 향해 내려갔다. 데릭은 뒤로 꺾인 도돌이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채,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

마침내 두 사람의 몸이 완벽하게 밀착되었다.

─움찔.

순간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릴 뻔했다. 맞닿은 그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의 열기가 그녀에게까지 옮겨붙을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다시금 경쟁하듯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때로는 데릭의 입술이, 때로는 오드리의 입술이 고지를 점령했다. 그 숨 가쁜 강행군을 따라 막사 안의 공기도 한여름처럼 절절 끓는 듯했다.

데릭은 오드리를 품에 안은 그대로 한쪽 팔을 뻗어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을 몽땅 쓸어 버렸다.

─통, 통, 통.

작전 구상을 위해 지도 위로 얹어 놓았던 모형들이 볼품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릭은 도돌이의 허리를 붙잡은 채, 책상 위로 번쩍 올려 주었다.

“앗!”

“……하.”

마침내 두 사람의 눈높이가 맞아떨어졌다. 만족스러운 듯 한쪽 입매를 휜 데릭이 다시 한번 입술을 포개 왔다.

“자, 잠깐……!”

오드리의 몸이 점점 뒤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고 돌진해 오는 프리트 공작 때문이었다. 그러나 물러날 곳이 없었다. 오드리는 데릭의 팔 사이에 갇힌 채 한참이나 숨을 도둑 맞았다.

* * *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데릭의 막사에선 회의가 열렸다.

“작전을 변경한다.”

데릭은 미간을 찌푸린 채 테이블 위를 한참이나 두리번거렸다. 나무로 만든 모형 병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다 미친 사람처럼 테이블 위를 쓸어 버리던 자신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

“각하?”

“……바닥에, 떨어져 있군.”

“어라? 저게 왜 저기 있지?”

데릭은 흙바닥을 나뒹구는 모형 병사들을 말없이 줍기 시작했다. 공범인 오드리 역시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수상한 침묵을 이어 나갔다. 본인들이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를 했노라고 시인하는 꼴이었다.

─꿀꺽.

데릭의 목울대가 거세게 요동쳤다. 막 시작하는 연인답지 않게 농밀했던 입맞춤이 자꾸 떠오른 탓이다. 그는 제 몸속에 돌아다니는 불덩이를 겨우 진정시켰다.

‘후.’

그리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모형들을 원래 자리에 올려 두었다. 얼른 이 임무를 완수해야 도돌이를 하루 종일 독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린 적들을 추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곧바로 구출 작전까지 감행할 것이다.”

지휘관들은 갑자기 서두르는 프리트 공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심스레 반박했다.

“하지만 각하. 상대는 주술사입니다. 추격 인원은 절반도 되지 않을 텐데,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맞습니다. 어쨌거나 대부분은 기지에 남아 시선을 끌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그의 시선이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은 오드리를 향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날카롭던 눈빛이 그새 설탕물에 푹 절인 것처럼 애정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우리에겐 위대한 마법사가 있으니 말이다.”

“……!”

루카스가 깜짝 놀란 얼굴로 오드리와 프리트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뭐어? 케벨슨 영애께서 마법사셨어?’

그걸 혼자만 몰랐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낀 것도 잠시.

루카스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근데 그걸 여기서 말해 버리시면 어떡해요!’

케벨슨 영애가 마탑 출신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니던가. 그러니 이 중 한 명이라도 밀고한다면 감옥행을 피할 수 없을 터.

설마…… 자기가 독차지할 수 없다면 차라리 망가뜨려 버리겠다는 비뚤어진 소유욕 같은 걸까?

‘세상에! 누가 크리앙트의 피바다 아니랄까 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마법사?”

“혹시 저분이?”

“아아, 왠지……!”

프리트 공작은 당장이라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로 테이블을 빙 둘러보았다. 입이 간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이번 작전은 아주 앙증맞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우며, 야무지다 못해 믿음직스러운 도돌이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

“다들 불기둥과 회오리바람을 보았겠지. 그건 무려 도돌이가 ‘직접’ 만든 마도구와 마력석이다. 아무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지.”

“와아.”

오드리는 바로 옆에서 쏟아지는 낯간지러운 찬사에 볼을 붉혔다.

‘이, 이 남자가 진짜!’

도저히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녀는 제발 그만하라는 듯 프리트 공작의 팔을 뚱땅뚱땅 때려 댔지만, 데릭은 ‘적당히’를 모르는 남자였다. 도리어 흐뭇한 얼굴로 도돌이를 내려다보더니, 의기양양하게 소리친 것이다.

“도돌이는 신대륙 최고의 마도구 상점 ‘록트’를 만들기도 했다. 아마 다들 한 번쯤 들어 봤겠지?”

“저분이요?”

“앗, 저도 가 본 적 있습니다. 여기서 만나 뵐 줄이야!”

“……데릭.”

“이런 위대한 마법사 도돌이가 우리와 동행할 것이다.”

신이 나서 떠드는 이야기들이 아주 한 편의 대서사시를 방불케 했다.

정수리까지 빨개진 오드리는 익은 벼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네?’

‘우리의 힘만으론 주술사들과 대적할 수 없다. 가능하다 해도 아주 오랜 시간이 소요되겠지. 하지만 나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

저녁 식사 전, 데릭이 오드리에게 도움을 청해 왔다. 전초기지를 휘젓던 그녀를 보고 새로운 작전을 떠올린 것이다. 게다가 병사들 역시 오드리가 마력을 쓰는 것을 똑같이 목격했으니,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야만 했다.

‘황녀 저하를 무사히 데려간다면 황실에서도 그대에게 죄를 물을 수 없을 것이다.’

데릭은 짧은 순간에 가장 크고 완벽한 그림을 그려 냈다. 오드리의 마력을 활용하여 작전 시간을 단축함과 동시에, 그 공으로 면죄부를 요구할 생각까지 한 것이다.

오드리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추격대는 일단 날이 밝으면 기지를 빠져나가 근처에 매복한다.”

─스윽.

모형 병사 중 일부가 기지 주변으로 죽 밀려났다.

그리고 기지에 남은 것들은 현재 회의 중인 막사 위치로 몽땅 옮겨졌다.

“후발대는 적이 퇴각할 때까지 이 막사 안에서 대기한다.”

“그럼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는데,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니. 이 막사는 안전지대가 될 것이다.”

“예?”

데릭이 다시 한번 도돌이를 응시했다. 진지하게 집중한 얼굴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당장이라도 입 맞추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다.

“……도돌이가 막사 주위로 마력석을 심어 놓을 예정이다. 그러니 괜히 힘 빼지 말고 기다리면 된다.”

“아, 그렇군요!”

“적들의 은신처를 발견하면 즉시 좌표를 공유할 테니, 후발대는 그때 합류하도록.”

“알겠습니다.”

“회의는 여기까지다.”

지휘관들이 빠르게 막사를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데릭과 오드리뿐.

“…….”

“…….”

두 사람은 차마 먼저 일어서지도 못하고, 회의 내내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곁에 딱 붙어 앉아 있었다. 지도 위의 사람 모형처럼 뻣뻣하기 그지없는 모양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던 찰나.

─스윽.

“……!”

용기를 낸 오드리가 먼저 손가락을 얽어 왔다. 데릭은 유난히 몸을 움찔거리며 맞잡은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일부, 흠, 일부러 실종 상태로 위장한 거예요?”

“……그렇, 다.”

“왜요?”

“그러지 않았다면 작전이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을 테니까.”

그의 엄지가 오드리의 손등을 조심스레 쓸었다.

“크리앙트 제국 신문사엔 가이드라인이 없다. 그래서 진행 중인 군사 작전도 쉽게 노출되곤 하지.”

“아.”

“적들도 기지 소식을 전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신문은 누구든지 살 수 있으니까.”

“…….”

“그대에게 걱정을 끼친 건 정말 미안하다. 어쩔 수가 없었어.”

데릭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사과하듯 오드리의 손등 위로 잘게 입 맞추었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군.”

“네에?”

“그대가 이렇게 직접 와 주었지 않나.”

“……!”

분위기가 다시 묘해졌다.

프리트 공작의 그윽한 눈길은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뜨거웠다. 눈, 코, 그리고 입술.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화르륵 불길이 이는 듯했다.

“……시간이 늦었군.”

그런데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데릭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먼저 일어섰다.

“내가 밖을 지킬 테니, 그대는 안심하고 자도 된다.”

“네?”

“그대가 여기서 자도록 해.”

“…….”

오드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밖을 지켜?’

그는 날이 밝으면 중요한 작전을 수행해야 할 남자 아니던가. 그런데 밖에서 밤을 지새운다고? 막사 주인이?

오드리는 밖으로 나가려는 데릭을 덥석 붙잡았다.

“그냥 안에서 지키면 안 돼요?”

“……안에서, 지켜?”

데릭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불가능하다.”

“하지만-”

“잠이 안 온다면 군가라도 불러 주겠다.”

“네? 자장가가 아니라요?”

“아무튼, 어서.”

“앗!”

그는 자기가 뭐라고 지껄이는지도 모르는 듯, 오드리를 달랑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어쩐지 다급한 기색이었다.

“푹 자는 게 좋을 거다.”

“아니, 잠깐만요!”

그러더니 얇은 면 이불부터 흰색 담비 털까지 꼼꼼하게 덮어 주었다. 마치 봉인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내가 무슨 괴물이야?’

오드리는 항의하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그때.

─쪽.

데릭이 별안간 몸을 낮추더니, 그녀의 뺨에 짧게 입 맞췄다.

“어떤 나라에서는 저녁 인사로 볼에 입을 맞춘다더군.”

“……!”

“좋은 꿈을 꾸라는 의미로.”

오드리는 그대로 심장이 나가떨어지는 줄 알았다.

‘이건 반칙이야. 아무튼 반칙이야!’

쿵쿵거리는 심장을 따라 분홍색 속눈썹도 파르르 떨렸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그녀의 마음에 불을 질러 놓은 채 책임감도 없이 도망가려 하고 있었다. 오드리의 마음도 덩달아 급해졌다.

“그러면! 그럼 이것도 아세요?”

“무얼?”

앙증맞은 손이 이불을 빠져나와 그의 뒷덜미를 덥석 붙잡더니,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쪽.

“……!”

“어, 어떤 나라에서는 입을 맞추기도 한대요.”

오드리는 제 할 말만 마치고 허둥지둥 이불을 뒤집어썼다. 사실은 전부 거짓말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도대체 무슨 용기로 이런 사고를 쳤는지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자꾸만 나가려는 그에게 서운해서 반쯤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한편, 데릭은 넋이 나간 얼굴로 제 입술을 더듬거렸다.

‘방금, 무슨…….’

도돌이의 말캉한 입술에 화상을 입은 듯했다. 드러난 귓바퀴 역시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미 여러 번 숨결을 섞은 사이답지 않게도 참으로 유난스러운 반응이었다.

“부, 불 끄고 나가 주세요!”

“…….”

오드리는 이불 속으로 숨어든 주제에 당당히 외쳤다.

─스윽.

볼록한 이불 위를 뜨겁게 응시하던 데릭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느긋한 손길로 테이블 위의 불을 껐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밖으로 나가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가 못 들었나?’

오드리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불을 슬쩍 내렸다.

그런데 그때.

─뚜벅뚜벅.

“……!”

그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멀어져야 할 발소리는 점점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침대 한쪽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데, 데릭?”

오드리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애꿎은 이불만 꼬옥 움켜쥐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침내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대 말대로, 안에 있겠다.”

“……!”

지켜 주겠다는 말만 쏙 빼놓은 채.

* * *

추격대는 날이 밝자마자 고원지대에 매복했다.

담요를 나눠 주던 루카스는 오드리의 입술을 보고 놀란 듯 멈춰 섰다.

“어라? 초겨울인데도 산모기가 기승을 부리나 보네요.”

“네?”

“입술이 잔뜩 부으셨습니다. 밤사이에 모기한테 당하셨나 봐요.”

“……!”

“이럴 줄 알았으면 막사에 모기 퇴치 향이라도 피워 드리는 건데!”

“……어차피 소용없었을 거예요.”

“예?”

“아, 아니에요!”

루카스는 오늘따라 말을 얼버무리는 오드리를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각하, 담요를-”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모기에 물린 피해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어라? 각하께서도 당하셨군요.”

“무슨 말이지?”

“산모기 말입니다. 하여간, 지독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산모기?”

“예. 케벨슨 영애도 각하처럼 입술을 물렸더라고요. 아무래도 막사 안에 모기가 있었나 봅니다.”

데릭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물렸다니, 틀린 말은 아니군.”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기분 탓일까? 어쩐 일인지 주군의 입꼬리가 들썩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루카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기에 물린 게 왜? 저렇게 즐거울 일인가?’

보나 마나 뻔하지, 뭐. 날 때부터 쭉 혼자였기 때문일까? 주군은 그저 케벨슨 영애와 함께라면 뭐든 좋은 듯했다. 산모기에 나란히 물린 것마저도 운명이라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으휴. 각하도 참.’

완전히 질려 버린 루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주 닭살이 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 * *

하늘이 점점 주황빛으로 물들어 갈 무렵. 드디어 주술사의 병사들이 전초기지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각하, 적들이 몰려옵니다!”

“추격 준비를 시작하라.”

“예!”

드디어 때가 되었다.

─휘이익.

곳곳에 숨겨 놓았던 말들이 휘파람 소리를 듣고 빠르게 다가왔다. 데릭은 오드리를 먼저 안장에 올린 다음, 그 뒤로 훌쩍 올라탔다.

“내가 뒤에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혹, 무섭다면 갈기를 붙잡고 몸을 낮추면 된다.”

“네.”

얼마 가지 않아 기지 쪽에서 폭발음과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마력석을 심어 놓았던 막사 주위에서 적들이 타들어 가는 소리였다.

“으아아악!”

“……!”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이곳은 당장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전쟁터란 사실이.

─둥, 둥.

누군가 귀에다 대고 커다란 북을 치는 것 같았다. 오드리는 그게 자신의 심장 소리라는 걸 깨닫고, 곧장 말의 갈기를 움켜쥐었다.

아무리 마법사라고 해도 그렇지. 데릭의 생사를 확인하겠다고 곧장 이곳으로 달려 온 스스로가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땐 데릭에 대한 걱정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각하, 적들이 퇴각합니다! 막사에서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드디어 적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데릭은 하얗게 질린 도돌이의 손등을 다정히 토닥여 준 뒤, 바로 고삐를 말아쥐었다.

“추격을 시작한다. 다들 알아서 잘 따라오도록.”

“예!”

─히이잉!

삐걱대며 도망치는 적군 뒤로 수십 개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추격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아주 집요하게 뒤를 쫓았다. 오드리는 난생처음 겪어 보는 질주 속도에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적들과 간격을 유지하라. 절대로 발각되어서는 안 된다!”

“예!”

거의 30분을 전속력으로 달린 후에야 도착한 곳은 평범한 시골 마을이었다. 언덕 위로 집결한 추격대는 난감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대로 쳐들어간다면 전쟁법을 위반하게 됩니다.”

“잘 알고 있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데릭은 발밑으로 펼쳐진 광경을 고요히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잠깐.”

“…….”

“저들을 자세히 살펴보아라.”

“예?”

“마을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들 말이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마을 안의 주민들을 차례로 훑었다. 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움직임이 하나같이 생기가 없고 뻣뻣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주민이 저렇게나 많은데 굴뚝에 연기 하나 솟지 않는 것도 수상했다. 지금쯤이면 저녁을 차려 먹을 시간 아니던가.

그런데 그때.

“앗!”

“도돌이?”

얌전히 말 위에 앉아 있던 오드리가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데릭은 마을의 동태를 살피던 것도 잊고 당장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지? 어디 다친 데라도 있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좀 이상해서요.”

“무엇이?”

“혹시나 해서 땅으로 마력을 흘려보내 봤는데, 자꾸만 반발이 생겨요.”

“주술의 힘이 느껴진다는 건가?”

오드리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사람들에게서요.”

“……!”

데릭은 곧장 언덕 끝으로 향했다. 그리곤 의미심장한 눈으로 발밑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랬던 거군.’

유난히 생기 없던 움직임과 마을 전체에 감돌던 기묘한 분위기. 거기다 주술의 흔적까지.

─히이잉.

그가 망설임 없이 말에 올라탔다.

“……마을로 내려가 마저 추적한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야 한다.”

“하지만 전쟁법에 따르면-”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예에?”

데릭이 마을을 향해 턱짓했다.

“저들의 움직임을 잘 살펴보아라. 전초기지를 기습하던 병사들과 다를 바가 없지.”

“……!”

“저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다. 주술사들이 시체를 억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

그의 말대로 마을 사람들의 움직임은 어딘지 어색했다. 전초기지로 몰려들던 병사들처럼 뻣뻣하고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저게 다 시체라고?’

추격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데릭 역시 마음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주술사들이 테수스 공국을 점령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마을 주민들까지 몰살했을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점령 방법이군.’

데릭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래도 서둘러야 할 듯싶었다. 무사히 데려가야 할 황녀가 저들처럼 산송장이 되기 전에.

“다들 도돌이 앞에 일렬로 서라. 마법 보호막을 둘러 줄 것이다.”

“우와.”

“마을에 내려가면 모든 걸 조심해야 한다. 특히, 정전기처럼 따가움이 느껴진다면 더더욱.”

데릭은 도돌이에게 들었던 것을 바탕으로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그러는 동안, 추격대는 괜히 몸을 더듬거려 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신기한 기색이다.

─꼬옥.

오드리가 마지막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다른 이들에겐 멀찍이 떨어진 상태로 주문만 읊어 주더니, 프리트 공작에게만 예외였다. 데릭은 분홍빛 뒤통수에 다정히 입을 맞추었다.

“금방 끝날 것이다.”

“……네.”

그가 말고삐를 바짝 당겨 쥐었다.

지난 몇 년간 데릭은 집 없는 사람처럼 전쟁터를 떠돌지 않았던가. 남들이 두고 온 가족을 떠올리며 고향을 그리워할 때, 혼자만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나에겐 도돌이가 있다.’

그들이 왜 한시바삐 돌아가고 싶어 했었는지. 돌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데릭은 앞으로 도돌이와 함께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래서 무사히 돌아가고 싶었다. 도돌이와의 다정하고 안락한 삶이 기다리는 크리앙트 제국으로.

* * *

주술사들의 은신처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데릭이 언덕 위에서부터 집요하게 눈으로 뒤쫓았기 때문이다.

오드리는 건물 근처로 마력석 하나를 던져 보았다.

─푸슈슉!

마력석 ‘해피 배스 타임’은 은신처 벽에 닿자마자 게거품 같은 것을 흩뿌리며 빠른 속도로 밀려 나왔다.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여기에도 주술을 걸어 놨어요. 이대로 들어가면 위험해요.”

“인간 폭탄이 될 뻔했군.”

“주술의 매개체를 찾아 파괴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주술의 매개체?”

“네. 주술은 마력과 달라서 매개체가 있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거든요. 분명 곳곳에 숨겨 놨을 거예요.”

“반드시 찾아내겠다.”

데릭이 추격대를 향해 돌아섰다.

“지금부터 주변을 수색하여 주술의 매개체를 찾아낸다.”

“예.”

“수색 도중, 절대로 건물에 몸이 닿아선 안 된다. 그대로 터져 나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

“주술의 매개체는 찾아내는 즉시 파괴한다. 이때도 반드시 검을 이용하도록.”

“알겠습니다.”

추격대는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주술의 재료가 되는 것은 동물의 뼈나 가죽, 그리고 피. 그런 재료로 만들어진 물건이라면 도저히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을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곳곳에서 발견 소식이 들려왔다.

“찾았습니다!”

“여기에도 있습니다!”

“여기도요!”

“좋다. 그대로 물러서서 검을 사용해라.”

“예.”

─뽀각!

마치 장식처럼 은신처 곳곳에 달아 두었던 매개체가 줄줄이 파괴되었다. 오드리는 계속 은신처 주위로 마력석을 던지며 주술 상태를 확인했다.

막 열 번째 마력석을 던졌을 무렵.

“됐어요!”

마침내 아무런 반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은신처 주위로 걸려 있던 주술이 전부 무력화된 것이다.

─스릉.

데릭은 길게 검을 뽑아냈다.

“생각보다 늦어졌군. 당장 후발대에게 좌표를 전송해라.”

“예.”

“나머지는 이대로 진입한다. 신속하게 움직여 황녀 저하를 구출하도록.”

“예!”

“너희 셋은 후발대가 올 때까지 밖에서 도돌이를 보호해라.”

─끼이익.

만능열쇠로 출입구를 연 병사 하나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데릭은 한 손에 검을 든 채 망설임 없이 앞장섰다.

‘드디어.’

길고 긴 접전의 끝이 보였다.

황녀의 안위야 알 바가 아니었지만, 그게 도돌이의 안위와 연결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반드시 황녀를 산 채로 데려갈 것이다.

* * *

주술사 왈프는 일행들을 이끌고 대저택의 응접실로 들어섰다.

“뭐야, 왜 이렇게 어두침침해? 초상났다고 광고라도 하는 거야?”

“……추모 기간이라 그렇습니다.”

“쯧.”

늙은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곳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그거야 간단하지.”

─사각사각.

왈프는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

‘쓸데없이 오래 살아서는 말이야.’

몽베르 공국에서 가장 부유한 미망인, 베르미어 백작 부인. 예순이 훌쩍 넘은 노인은 야성적인 정부의 매력에 푹 빠진 나머지, 그의 이름을 유언장에 올려 주었다.

그런데 오늘내일할 줄 알았던 노인네가 얼마나 오래 살던지.

‘돈 많은 할망구라 그런가?’

하마터면 지도부의 지령도 무시한 채 모조리 엎어 버릴 뻔했다. 그런데 며칠 전. 그토록 기다렸던 소식이 도착했다.

베르미어 백작 부인께서 작고하셨습니다.

유언장에 따라 재산 분배를 진행하고자 하오니, 번거로우시겠지만 방문을 부탁드립니다.

-흰 장미 저택으로부터

가을의 초입부터 독감을 앓던 그녀가 드디어 죽었다는 것이었다. 다이안 황녀를 납치할 겸 잠시 은신처로 도망쳤던 왈프는 기다렸다는 듯이 몽베르 공국으로 되돌아왔다.

“그럼 이제 파로니 협곡은 내 소유가 되는 건가?”

“예. 서명하는 즉시 효력이 발효됩니다.”

“간병비 치고는 센데. 안 그래?”

“…….”

“농담이야, 농담.”

왈프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주술사들이 반세기 동안 추적한 끝에 발견한 마광산은 신대륙에만 총 열 곳. 파로니 협곡은 그중 여덟 번째로 손에 넣은 마광산이었다.

‘이제 펠리오스와 세니아리아만 남았군.’

그간 8개의 마광산을 얻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악령이 나타난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땅값을 곤두박질치게 한 뒤, 헐값에 사들이는 것은 기본. 땅 소유주의 정부가 되어 갖은 아양 끝에 상속받기도 했다.

‘펠리오스 프로젝트는 조금 아쉽지만…… 세니아리아에 그대로 쓰게 되었으니 다행인가?’

그들은 나머지 2개의 마광산도 거의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펠리오스는 황녀의 몸값으로, 세니아리아는 우범 지역으로 몰아간 뒤 땅값이 떨어졌을 때 사들이면 그만이다. 어느 누가 아동 납치·사망 사건의 온상지를 손에 넣고 싶어 하겠는가?

“로빈, 마를린. 이제 돌아가자.”

“잠깐, 무덤엔 안 들르실 겁니까?”

“무덤?”

“부인께선 눈을 감는 순간에도 왈프 님을 많이 그리워하셨습니다.”

“…….”

왈프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늙은 집사의 에두른 부탁이 영 마뜩잖은 눈치였다.

“원래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야. 난 무덤 앞에다 대고 혼잣말하는 취미 없어.”

“하지만…… 예. 알겠습니다.”

왈프 일행은 대저택에서 나오자마자 즉시 상부에 상황을 보고한 후, 주점으로 향했다.

─쨍!

“캬. 역시 몽베르 위스키야!”

“쯧쯧. 불쌍한 할망구 같으니라고. 얼마나 외로웠으면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정부한테 땅을 상속해?”

“이게 다 내가 잘한 덕 아니겠냐.”

“그 할망구가 호구인 거겠지.”

세 사람은 즐거운 얼굴로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때.

“……!”

“……!”

왈프와 로빈이 갑작스레 얼굴을 굳혔다. 매달려 있던 동아줄이 뚝 끊어지는 기묘한 감각.

“……주술이 풀렸어.”

“뭐?”

은신처에 걸어 두었던 그들의 주술이 파훼되었다.

마를린은 당황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기지엔 지미랑 돌턴밖에 없는데…….”

“일단 상황을 살펴볼게.”

로빈은 곧장 칠면조 뼈로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이상한 주문을 따라 그의 동공이 뒤로 천천히 넘어갔다. 마치 억지로 눈을 뒤집어 까는 것처럼. 흰자만 남은 눈알이 무언가를 찾듯 괴이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록. 도로로록. 도로록.

“…….”

마침내 그의 눈이 한곳에 멈췄다.

* * *

추격대는 총 세 팀으로 찢어졌다.

그중 지하실 탐색을 맡은 이들은 조명 마력석을 켜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저거 다 시체야?”

“우욱.”

“시체 소각장이 따로 없구먼.”

지하실 한가득 시체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전초기지로 쳐들어오는 병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이는데.”

“마력석도 반응 없어?”

“어. 여긴 아무것도 안 했나 봐.”

“그럼 이만 올라가자.”

“좋아.”

그들은 별다른 소득 없이 1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예병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깃털처럼 가볍고 조용한 몸놀림이었다.

“일 층은 어때?”

“그냥 평범한 생활 공간이야.”

“와, 얘네는 비위 안 상하나? 지하에 시체로 탑을 쌓아 놓고 밥을 잘도 처먹네.”

그들이 주술사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치를 떠는 동안, 데릭과 나머지 병사들이 2층 출입로를 확보했다.

─콰직.

“이게 마지막인가?”

“예. 마력석을 던져도 반응이 없습니다.”

“좋다.”

데릭이 1층에 모인 병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수색이 끝났으면 전부 이 층으로 이동한다.”

“예.”

그들은 쥐를 구석으로 모는 고양이처럼 점차 수사망을 좁혀 갔다.

이제 남은 것은 2층과 3층뿐. 그런데 2층의 첫 번째 문을 연 병사 하나가 당황한 나머지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가, 가, 각하. 여길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그러지?”

“웬 아이들이…… 잔뜩 있습니다.”

“아이들?”

주술사의 은신처에 숨어있는 아이들이라니.

‘그들의 자식인가?’

데릭은 영 찜찜한 얼굴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도다다닥.

문을 향해 다가오는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 서 있던 병사는 자연스레 허리를 굽혔다.

“꼬마야, 위험한데 여기서 뭘-”

“으꺅!”

순간, 짧은 비명과 함께 아이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튕겨 나간 것처럼. 그러더니 단 몇 초 만에 삐쩍 마른 시체 상태가 되었다.

“……!”

당황한 병사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물러서라.”

“가, 각하.”

“……세니아 왕국의 복식이로군.”

“예?”

데릭은 방 안에 가득 찬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대충 어림잡아도 20명은 되어 보였다.

‘아이들에게도 주술을 쓴 건가.’

전초기지를 향해 달려 온 상대 병사 중 이렇게 어린아이는 없었다. 게다가 이 많은 아이가 제 발로 걸어왔을 리 없으니,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납치해 온 게 분명했다.

“서, 설마, 이 아이들의 목도 베어야 하는 겁니까?”

“확실히 숨통을 끊으려면 그래야겠지.”

“……!”

병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기 몸의 절반도 안 되는 아이들을 제 손으로 직접 죽여야 한다니! 아무리 주술사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지만, 어른으로서 못 할 짓 아닌가.

“각하, 다시 한번 생각을-”

“하지만 도돌이라면 다른 생각이 있을지도 모른다.”

“…….”

데릭이 계단에 서 있던 병사 하나에게 눈짓했다.

“도돌이를 데려와라.”

“예.”

“반드시 안전하게 데려와야 한다.”

“예.”

그저 2층 계단만 오르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건만. 혹여 도돌이가 털끝 하나 다칠까 싶어 신신당부하는 모습이 유난스러웠다.

‘어찌한다.’

데릭은 도저히 마음을 놓지 못해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러다 결심한 듯, 막 계단을 내려가려던 병사를 불러세웠다.

“잠깐.”

“예?”

“그냥 내가 데리러 가겠다.”

“…….”

“그동안 이 층의 다른 방들을 수색하고 있도록.”

그새 얼굴이 보고 싶어서 생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었다. 절대로.

‘나는 그런 치졸한 사내가 아니다.’

통신병과 함께 후발대를 기다리던 오드리는 난데없이 등장한 데릭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끝난 거예요?”

“아니.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제 도움이요?”

“이 층에 아이들이 있다. 아무래도 주술에 걸린 것 같더군.”

“……!”

오드리는 상황의 심각성을 단번에 눈치챘다.

주술에 걸린 꼭두각시를 처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 목을 통째로 베거나, 마력의 반발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데릭은 오드리의 마력으로 처리해 주길 바라는 듯했다.

‘어떡하지?’

아이들이 단순한 꼭두각시라면 그나마 나았다. 시체를 살아 움직이게 만들던 주술만 튕겨 나가면서 온전한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격을 하도록 설정되어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 주술이 도리어 시전자에게 치명상을 입히겠지.’

아이들은 전초기지로 돌진하던 병사들처럼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직접 보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하지.”

막 은신처로 들어가려던 오드리가 별안간 통신병들을 돌아보았다.

“맞다. 마법 보호막 없이 은신처로 들어오는 건 위험해요.”

“예?”

“혹시 제가 나오기 전에 후발대가 먼저 도착하면, 일단 은신처 밖에 대기시켜 주세요!”

“알겠습니다.”

데릭은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비죽 솟으려는 입매를 단단히 붙잡았다.

‘……참으로 야무지다.’

저렇게 자그맣고 올망졸망한 데다 야무지기까지 하다니! 도대체 도돌이는 매력의 끝이 어디란 말인가? 아주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데릭은 도돌이와 함께 2층으로 향하는 내내 그녀를 슬쩍슬쩍 훔쳐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방인가요?”

“예.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끼익.

마침내 방 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수십 명의 아이가 여유 공간도 없이 꽉 들어차 있는 모습이.

“…….”

오드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조심하십시오. 가끔 달려오는 아이가 있습니다.”

“아까도 그랬나요?”

“예. 그런데…… 제 몸에 부딪히자마자 저렇게 되었습니다.”

오드리의 시선이 바로 옆을 향했다. 그곳엔 펠리오스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아이 시체가 하나 놓여 있었다.

“휴.”

그나마 다행이다. 아이들에겐 따로 공격 주술이 새겨지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시체라도 온전히 수습할 수 있겠지.

“데릭, 아이들을 여기에 남겨 놓고 갈 건가요?”

“……가능하다면 임무가 끝난 후 부모를 찾아 주려 한다.”

“다행이에요.”

오드리는 본인이 직접 처리하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하지만 데릭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정말 혼자서도 괜찮은 건가?”

“네. 일단 일 층에 마법 함정을 설치하고, 거기로 아이들을 유인하기만 하면 돼요.”

당장 황녀를 찾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도돌이가 눈에 밟힌 까닭이다.

“……그냥 여기서 하면 안 되나.”

“아직 수색이 안 끝났잖아요.”

“그대가 눈에서 멀어지면 나도 모르게 걱정이 되어 그런다.”

오드리는 병사들 몰래 그의 손을 슬쩍 잡았다가 놓았다.

“금방 올게요.”

“…….”

“알았죠?”

데릭은 1층으로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불안한 듯 응시했다.

* * *

오드리는 대충 1층을 훑어본 뒤 적당히 넓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아직 마법이 새겨지지 않은 마력석을 손에 쥔 채 한참이나 고민했다.

‘저대로 돌아가면 부모님이 슬퍼할 거야.’

죽은 아이들을 되살리진 못하지만, 최대한 멀끔한 모습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오드리는 고심 끝에 이중 마법 함정을 설치하기로 했다.

“이제 내려오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그녀의 신호를 들은 병사 하나가 아이들을 줄줄이 이끌고 1층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자, 이쪽으로 오렴. 이거 봐. 반짝거리는 게 신기하지?”

그의 손엔 아이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빛나는 마력석이 들려 있었다.

이윽고 20명의 아이들이 마법 함정 가운데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순간.

─풀썩.

“…….”

아이들이 끈 떨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하나둘 힘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2층에서 보았던 아이와는 다르게 아주 곤히 잠든 얼굴이었다. 당장이라도 깨우면 일어나 움직일 것처럼.

“어라? 이 아이들은 왜 미라처럼 변하지 않는 겁니까?”

“……이중마법이라서 그래요. 일차적으로 주술을 날린 다음, 이차적으로 복구 마법을 걸었거든요.”

“아하! 와아아.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핫. 어렵군요.”

병사는 아이들을 반듯하게 뉘어 준 뒤 2층으로 올라갔다.

“이제 밖에서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에.”

오드리는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은신처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끼익.

“응?”

어디선가 나무가 삐거덕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1층엔 오드리와 아이들의 시체뿐 아니던가. 그녀 외엔 살아 움직일 만한 게 없었다.

“……!”

그걸 깨달은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끼익. 끼이익.

“누, 누, 누구 있어요?”

─끼이이익.

“……!”

오드리는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응시했다.

‘아차!’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계단 입구에 방어막을 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악!”

“저, 저게 뭐야!”

오드리는 방어막을 향해 달려드는 시체들을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대부분은 방어막에 불타 사라졌지만, 그중 유독 한 존재가 눈에 띄었다. 멀찍이 서서 그녀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눈동자. 새하얀 흰자만 가득한 모습이 왠지 모르게 섬찟했다. 속까지 꿰뚫어 볼 듯한 시선이 불쾌하기도 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오드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계단으로 달려갔다. 이 사실을 데릭에게도 알려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막 2층에 발을 디딘 순간. 익숙한 얼굴 하나가 불쑥 오드리에게 어깨동무를 해 왔다.

“안녕, 아가씨. 우리 구면이지?”

“……!”

연극 <사랑의 의미>에서 여자주인공 ‘록시’ 역할을 맡았던 배우, 마를린이었다.

* * *

─찌익.

다이안은 돌벽 위로 작대기 하나를 더 그렸다.

“…….”

벌써 이곳에 감금된 지도 2주가 넘어간다. 그간 그녀는 몰라볼 정도로 변했다. 퀭하고 푸석푸석한 얼굴부터, 거지꼴을 면치 못한 머리칼. 엉망으로 물어뜯은 손톱까지. 식사 때가 되면 일단 게걸스레 먹고 보는 모습은 황녀의 위엄과 거리가 멀었다. 그녀가 자랑하던 ‘태생적 고귀함’도 절망적인 상황에선 맥을 못 추는 것이다.

“황녀 저하!”

“…….”

멀리서부터 그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몸을 웅크리고 앉은 다이안은 미동이 없었다.

‘또 환청이겠지.’

더 이상은 미련하게 속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이번 환청은 유독 길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그녀를 찾고 말 것처럼.

“저쪽은 다 뒤져 봤어?”

“저긴 전부 빈방이야. 누가 머물렀던 흔적도 없어.”

“참 이상하네.”

여태까지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다이안은 허둥지둥 일어나 문에 귀를 댔다.

“황녀 저하?”

“……!”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정말로 누군가 그녀를 잊지 않고 찾으러 왔다.

절박해진 다이안이 온 힘을 다해 철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쾅쾅!

“여기다! 여기야!”

“황녀 저하!”

─쾅쾅쾅쾅쾅쾅!

그 소리를 듣고 주술사들이 몰려올 수도 있다는 생각까진 못 한 눈치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병사들이 밖에서 자물쇠를 부수려 노력하는 동안. 독방의 가장 그늘진 곳에서 그림자 같은 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녹은 젤리처럼 꿀렁이던 것은 그녀의 등 뒤에서 점점 크기를 키워 갔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다이안은 미친 사람처럼 문을 쾅쾅 두드리며 환호했다.

“드디어 왔어! 드디어!”

“저하, 거의 다 되었습니다.”

“그 간악한 놈들의 목을 전부 베어 버려야지…… 감히 제국의 황녀를 납치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 사람 키보다도 훌쩍 커진 검은 인영이 위에서부터 천천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미였다.

“아바마마께서도 절대 가만히 계시지 않을-”

“다이안.”

“……!”

황녀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 굳고 말았다.

“‘그자’라면, 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

“왜 대답이 없어요?”

지미가 점점 그녀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긴 어떻, 아니, 분명 독방인데……!’

다이안의 뒤에 딱 붙어 선 그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으로 그녀를 옭아맸다.

─콰앙!

“황녀 저하!”

드디어 약 2주 만에 독방의 문이 열렸다. 그러나 다이안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저하?”

“물러나.”

“……!”

꼼짝없이 지미의 인질이 되었기 때문이다.

* * *

데릭은 아주 곤란한 얼굴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물러나는 게 좋을 거야. 황녀를 산 채로 데려가고 싶다면.”

“…….”

“설마 시신만 수습할 생각은 아니지? 난 이런 식의 뒤통수는 못 참거든.”

“……!”

다이안이 겁에 질려 소리쳤다.

“이자가 원하는 대로 해 주어라!”

“저하.”

“어서!”

지미라면 진짜로 그녀를 죽이고도 남는다는 걸 너무도 잘 아는 까닭이다.

그러나 데릭은 영 마뜩잖은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일이 귀찮아졌군.’

황녀의 생사는 데릭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돌이를 위해서라도 황녀를 산 채로 데려가야 하는 상황 아니던가.

그런데 한창 추격대와 대치 중인 지미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운 광경이라도 발견한 얼굴이었다.

“인질이 한 명으로는 부족한가 보지?”

“…….”

“만약 인질이 두 명이라면 선택이 조금 쉬워질까?”

“무슨-”

데릭은 지미의 고갯짓을 따라 계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도돌이!”

“데, 데릭.”

마력 제어장치로 손목을 결박당한 도돌이가 서 있었다. 그새 주술사의 인질이 된 것이다.

데릭은 그대로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안 된다. 안 돼!’

불규칙한 심장 박동을 따라 그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려 갔다.

프리트 공작은 웬만해선 적과의 협상에서 양보를 하지 않는 편이지만, 도돌이의 목숨이 걸려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아주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어졌다.

“마를린, 딱 좋은 타이밍에 왔는걸.”

“주술이 깨졌다는데 술이나 퍼마시고 있을 순 없지. 그래서 미개한 주술사 둘은 버리고, 나 혼자 포털 타고 왔어. 돌턴은?”

“곧 들어올 거야.”

“좋아.”

오드리는 흘러가는 대화를 통해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전부 주술사인 줄 알았는데…….’

포털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여자 배우는 주술사가 아니다. 그러니 마력 보호막을 두르고 있는 오드리를 아무런 타격 없이 제압한 거겠지. 상대방이 전부 주술사일 거라고 착각한 것이 패인이었다.

“자, 일단 검부터 내려놓는 게 어때?”

“…….”

─툭.

데릭은 망설임 없이 검집을 앞으로 내던졌다. 황녀의 목숨을 협박받던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성적으로 굴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너희들도 얼른.”

“…….”

병사들도 데릭을 따라 하나둘 검집을 풀기 시작했다.

지미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러게 세니아 왕국과 전쟁이나 하면 좋았잖아. 응? 펠리오스에는 왜 가서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펠리오스?”

“뭐, 이젠 상관없어. 황녀의 몸값으로 펠리오스 숲을 받기로 했거든.”

“…….”

“이제 그 쪽한테는 유감없어.”

데릭은 이게 다 무슨 말인가 싶었다.

‘황녀의 몸값으로 펠리오스 숲을 받아?’

그곳은 프리트 공작령 아니던가. 엄연히 데릭의 소유였다. 그런데 황제가 상의도 없이 그 땅을 주술사들에게 넘기려 했다고? 그것도, 신대륙에 몇 없는 마광산을?

“아무튼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문턱을 넘고도 잠들지 않다니, 정신력 한번 대단한데?”

“잔말 말고 도돌이를 풀어줘라.”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이만 헤어져야겠어.”

“……!”

순간, 데릭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자들은 아직 마법 방어막의 존재를 모르는 건가?’

어쩌면 이걸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릭은 곧장 부하들에게 명했다.

“저들에게 길을 터 주어라.”

“하지만-”

“어서.”

“…….”

부하들은 마지 못 해 물러섰다. 거의 성공에 가까웠던 임무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 영 아쉽고 속상한 눈치다.

그러나 데릭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절대 몸이 닿아서는 안 된다.’

주술사가 마법 방어막의 존재를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질 터. 그는 지미가 부하들 사이를 무사히 통과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안심한 주술사 일행이 막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타다다다닥!

데릭은 발소리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

빠른 속도로 뒤를 돌아본 지미가 반사적으로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예상대로군.’

데릭의 눈동자엔 승리에 대한 확신이 넘실거렸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윽!”

“지미?”

황녀를 앞장세워 계단을 내려가던 지미가 별안간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그대로 계단을 굴렀다. 등이 떠밀려 중심을 잃은 다이안도 함께였다.

─쿵, 쿵, 쿵!

“지, 지미!”

“으윽…….”

층계참에 처박힌 다이안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감쌌다. 짧은 비명조차 나오질 않았다.

‘살려 줘!’

황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편, 바로 옆에 처박힌 지미는 가슴께를 붙잡은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대체…… 무슨 짓을…… 윽!”

지금 타박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프리트 공작을 향했어야 할 저주가 대체 어째서 시전자인 지미의 심장을 파먹고 있는 걸까? 심장 위로 거미줄이 퍼지듯 새카만 주술이 새겨지는 게 느껴졌다. 세차게 박동하던 심장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갔다.

“지미! 괜찮아?”

“마를…….”

프리트 공작이 달려오는 순간, 지미는 본능적으로 혀를 깨물어 자신의 피로 주술을 완성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자기 꾀에 걸린 꼴이 되어 버렸으니. 이 주술을 파훼하기 위해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밖에 없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마를린이 헐레벌떡 계단을 내려갔다. 그사이, 병사의 도움을 받아 마력 제어장치에서 벗어난 오드리가 마를린을 향해 속박 마법을 걸었다.

─우웅.

“앗!”

막 층계참에 발을 디딘 찰나. 마를린은 당황스럽게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결박된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까닭이다.

“뭐야, 이게 뭐야?”

사력을 다해 바둥거려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지미! 지미!”

“으윽…….”

만신창이가 된 그들 앞에 프리트 공작이 나타났다. 새파란 기운을 내뿜으며 무섭게 진동하는 검을 든 채로.

“으…….”

“뭘 하려는 거야! 저리 가!”

그는 싸늘한 얼굴로 지미를 내려다보았다.

“감히 도돌이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

“죽을 각오쯤은 했어야지.”

“안 돼!”

“납치범을 생포하라는 명령은 없었다.”

지미를 향해 겨눠지는 칼날을 보며 마를린이 다급하게 외쳤다.

“납치범이라니? 뭔가 오해를 했나 본데, 우린 납치범이 아니야!”

일단 지미부터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황녀가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서 우린 그냥 도와준 것뿐이라고! 황녀를 도와준 대가로 펠리오스 숲을 주겠다고 약속한 거야!”

“마를…… 윽! 그만…….”

“들을 가치도 없군.”

“화, 황녀의 목에 풀피리가 있어. 확인해 보면 되잖아! 진짜라니까?”

데릭이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들이 납치범이든 공범이든, 내가 신경이나 쓸 것 같은가.”

“뭐?”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그때, 층계참에 쓰러져 있던 지미가 맨손으로 시퍼런 칼날을 움켜쥐었다.

“지미!”

“죽음을 재촉하는군. 손부터 잘라 달라는 건가?”

“으…….”

지미는 주술이 실패한 이유가 마법 때문이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다.

어차피 그에게 남은 건 죽음뿐. 그러니 눈앞의 남자에게 직접적으로 주술을 걸 수 없다면, 검에라도 흔적을 남길 참이었다.

‘아차.’

데릭은 지미의 숨통을 끊기 직전, 도돌이를 바라보았다.

“……썩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닐 것이다.”

“네?”

“아무래도 고개를 돌리는 게 좋을 듯하여.”

혹시라도 도돌이가 피를 보고 놀랄까 염려된 탓이었다.

그러는 동안 검붉은 피가 칼날을 적셔 갔다. 지미는 흐려지려는 의식을 붙잡고 입술을 달싹였다. 이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오드리는 문득 데릭의 검에 마법 보호막을 씌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앗, 맞다!’

악당들은 꼭 죽기 전에 죽음의 저주를 남기지 않나. 오드리는 어렸을 적 봤던 동화책 속 주술사를 떠올리며 아무도 몰래 데릭의 검에 잽싸게 보호막을 씌웠다.

“어서.”

“네!”

그녀가 몸을 돌리자마자 잘 벼려진 칼날이 무언가를 관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를린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아아악! 지미!”

“……이게 무슨.”

“지미! 지미!”

한편, 데릭은 당황한 듯 층계참을 내려다보았다. 심장을 꿰뚫린 남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새까만 재가 되어 사라졌다.

‘주술을 쓴 건가.’

그가 자연스럽게 도돌이를 돌아보았다.

보호막을 몸에만 씌워 놓은 줄 알았더니, 대체 언제 검에도 씌워 놨단 말인가? 귀엽고 사랑스러운데다 빈틈없이 유능하기까지 하다니!

데릭은 아주 흐뭇한 얼굴로 도돌이를 바라보았다. 본인이 재가 되어 사라질 뻔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때맞춰 건물 전체를 울릴 듯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두두.

“벌써 후발대가 도착한 걸까요?”

“후발대는 도돌이가 밖에서 대기하라 일러두었다.”

“예? 그럼-”

“여어!”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건, 뜻밖에도 안토니오였다. 데릭은 완전무장 한 안토니오 일행을 보며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네놈이 여긴 왜 왔지?”

“이런, 한발 늦었네.”

“…….”

“이웃 나라의 황녀께서 납치를 당했다는데, 이웃 된 도리로 가만히 있을 수야 있나!”

“장난질은 그만해라.”

안토니오는 결백함을 증명하려는 듯 검을 내던지고 곧장 만세 자세를 취했다.

“나야 뭐, 테수스 공국을 주시하고 있었지.”

“네놈이 왜?”

“그때 말했잖아!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고.”

“…….”

“안 그래도 이놈들을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아무튼 덕분에 고맙게 됐어.”

“이대로 숟가락만 얹을 셈인가?”

“으응?”

데릭은 세니아 왕국 측의 넉넉한 군사를 향해 고갯짓했다.

“일 층의 시체는 보았겠지?”

“당연하지! 우리도 눈이 있는걸.”

“세니아 왕국의 복식이더군. 너희가 책임지고 부모에게 돌려보내라.”

“그럼 우리 공도 인정해 주는 거야?”

“알아서 해라.”

“호!”

“우리는 일단 기지로 복귀한다. 황녀 저하를 모셔라.”

“예, 알겠습니다!”

데릭은 도돌이의 손을 다정하게 붙잡고 사이좋게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 남은 것은 뒷정리뿐.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여정이 드디어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크리앙트 제국을 뒤흔들었다.

≪새로운 전술? 실종되었던 제국군의 화려한 귀환…… “황녀 무사 구출 성공”≫

주술사들의 소식도 전해졌다. 한 명은 프리트 공작의 칼날에, 나머지 셋은 국경 경비대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주술사가 아닌 자는 조사를 위해 공작성으로 이송되었다.

“제국군의 복귀 일정이 어떻게 되지?”

“황성까지 사나흘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사나흘?”

황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포털을 이용하지 않는 게야?”

“제국민들에게 황녀 저하가 무사하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게 아닐까요?”

“흐음…… 그럴 만도 하군.”

아무렴, ‘출신도 모르는 남자에 미쳐 도망간 황녀’보다는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어 돌아온 황녀’로 보이는 게 낫겠지.

금세 기분이 풀린 황제는 곧바로 산책에 나섰다. 그런데 열 발자국을 채 걷기도 전에 불편한 얼굴을 마주하고 말았다.

“폐하, 여기서 다 보네요!”

“……마탑주.”

벌써 며칠째 그가 있는 곳마다 나타나는 아놀드였다.

“오늘 날씨가 참 좋지요? 그래서, 특별법 개정은 생각해 보셨나요?”

“그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소만.”

“아하! 그럼 내일 다시 만나지요.”

“…….”

“안녕히 계세요!”

저 해맑은 얼굴로 보통 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얼마 전, 뜬금없이 독대를 청한 마탑주는 황제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 마력 보유자에 대한 관리와 처벌이 담긴 특별법을 개정하자는 것이다.

당연히 황제는 반대했다.

‘대체 인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요? 지난 백 년간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소.’

‘그래서 제가 하는 겁니다. 마탑을 아카데미화 하고, 처벌을 없애야 한다고요.’

‘특별법마저 없으면 제국의 마법사 수는 현저히 줄어들 것이오.’

‘아니, 오히려 늘어나겠지요. 애초에 마탑의 폐쇄성 때문에 마력 보유자임을 숨기는 것 아닙니까.’

‘마탑주, 모르나 본데-’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대답은 내일 듣지요.’

‘이보시오, 마탑주!’

제 할 말만 마친 아놀드는 그대로 황성을 떠났다. 그러더니 우연을 가장하여 매일같이 황제 앞에 나타나 황제의 피를 말렸다.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미친개가 따로 없군.”

황제가 아놀드의 기행을 이해하게 된 건 불과 몇 시간 뒤였다. 정예병의 현장 보고서를 받아 든 그는 뜻밖의 소식을 마주했다.

‘케벨슨 백작가의 딸이 마법사라고?’

마탑주의 여동생 역시 마력 보유자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마탑에 들어간 건 마탑주뿐이니, 엄밀히 말하면 여동생은 특별법상 처벌 대상자였다.

‘그래서 동생이 오기 전에 얼른 특별법을 개정해 놓으려 한 것이군.’

막무가내로 개정을 주장하던 모습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그러나 황제가 정예병의 첩보를 통해 이 소식을 미리 접할 것이란 사실까진 몰랐겠지. 비죽 비웃음이 샜다.

‘참으로 눈물 나는 우애로군.’

아무리 마탑주라 해도 아직은 새파란 어린애에 불과한 것을. 잠시나마 그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이 못내 자존심 상했다.

동시에, 내일이면 찾아올 아놀드와의 만남이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황제는 마음 편히 잘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시종장이 영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전해 왔다.

“폐하, 일전에 주문하신 액자형 마법 금고 제작에 차질이 생겼다고 합니다.”

“또?”

벌써 반년이나 기다려 온 물건을 또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이상이 생겨 조사를 맡긴 상태인데, 마탑에 일이 많아 미뤄져서 그렇답니다.”

순간, 황제가 눈을 번뜩였다.

“내가 마탑주에게 직접 부탁하지.”

“예?”

“내 청이라면 들어줄 것이다.”

우연히 알게 된 비밀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 * *

그러나 다음 날.

황제의 계획은 모조리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프리트 공작의 깜짝 발언…… “케벨슨 영애의 마법이 황녀 구출에 결정적 역할” 새로운 영웅 탄생!≫

먼저 선수를 친 프리트 공작 때문이었다.

황성으로 오는 사나흘 동안, 프리트 공작이 이끄는 제국군은 곳곳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치렀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새로운 기삿거리는 덤이었다.

≪[단독] 프리트 공작-케벨슨 영애 ‘뜨거운’ 열애 중≫

≪“무덤까지 함께 들어갈 것”…… 순장도 불사한 전쟁영웅의 사랑≫

≪케벨슨 영애의 매력? “깜찍, 앙증, 똘똘, 사랑스러움, …(중략)…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어.”≫

황제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흙빛으로 변해 갔다.

“감히……!”

프리트 공작은 지난 10년간 황제의 충직한 검이지 않았나.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치면 황제의 입장이 곤란해질 거란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쾅!

분노한 황제가 책상을 내려쳤다. 앞으로 펼쳐질 상황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딸을 구한 영웅에게도 어김없이 족쇄를 채우는 황제라니! 아무리 지엄한 제국법을 핑계 삼더라도, 비정한 지도자란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경박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 또독. 똑똑똑! 똑똑똑똑!

“…….”

황성의 그 누구도 알현실 문을 저런 식으로 두드리지 않는다. 미치지 않고서야.

예상대로 문밖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아이고, 마탑주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으응? 내 노크가 어때서.”

“제, 제가 하겠습니다. 흠, 크흠!”

─똑, 똑, 똑.

“폐하, 마탑주가 뵙기를 청합니다.”

“……들라 하라.”

황제는 벌써부터 피곤한 얼굴로 아놀드를 맞이했다.

“폐하. 알현실 문이 상당히 두껍고 좋던데, 특별법 개정을 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마탑주. 지치지도 않소?”

“오늘도 답을 주지 않으신다면, 저도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예.”

아놀드가 다소 뻔뻔하게 대꾸했다.

“독립하겠습니다.”

“마탑주!”

황제는 체면도 잊은 채 윽박을 내질렀다.

‘아무리 새파랗게 어려도 그렇지……!’

한 기관의 우두머리라는 작자가 저렇게 융통성이 없어서야!

황제는 화를 가라앉히고,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말투로 살살 구슬렸다.

“마탑주가 잘 모르나 본데, 지난 백 년간 황실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소. 그 덕에 지금의 마탑이 이렇게까지 큰 것 아니오.”

“말씀은 바로 하셔야지요. 황실에 도움이 되니까 키운 것 아닙니까.”

“뭐라? 어떻게 마탑이 제국을 저버릴 수 있단 말이오!”

그러나 아놀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내일까지도 소식이 없다면 말씀드린 대로 하겠습니다.”

“다른 마법사들도 동의한 일이요?”

“그게 중요한가요? 어차피 제 뜻이 마법사들의 뜻인 것을.”

“……!”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벌써 마탑을 장악했단 말인가?’

1대 마탑주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였다. 황제는 뒤늦게서야 불안함을 느끼고 머리를 굴렸다.

“설마 치졸하게 보복 같은 걸 하진 않으시겠지요?”

“……!”

“예, 뭐. 원하신다면 마탑을 향해 대포도 쏘시고, 병사들도 보내고, 저희를 포위하세요.”

아놀드가 기분 좋게 웃었다.

“보란 듯이 무찔러 황실의 권위를 바닥으로 떨어뜨릴 테니.”

“마탑주!”

“마법사들의 출신 가문에 제재를 가하셔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조금의 불이익이라도 생긴다면 저희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이제 전세는 완전히 아놀드 쪽으로 기울었다.

“이 땅에 새로운 제국을 세우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지요.”

“……!”

“황성 고용인들도 제 역할을 못 하면 잘리는데, 하물며 황실이라고 예외가 있겠습니까. 그럼 이만!”

아놀드가 콧노래를 부르며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황제는 뒤늦게 깨달았다. 특별법 개정은 처음부터 제안이 아니라 협박이었음을.

“…….”

팔걸이를 꽉 움켜쥔 손 마디마디가 새하얗게 질려 갔다.

* * *

오드리는 수도에 도착하고 나서야 데릭의 만행을 깨달았다.

‘이, 이게 뭐야!’

온 신문마다 두 사람의 사진과 기사로 도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남자는 인터뷰를 하고 다닌 건지, 자랑을 하고 다닌 건지…….

‘주책이야 정말.’

애꿎은 오드리의 뺨만 뜨거워졌다.

“저기 케벨슨 영애다!”

“어디? 어디?”

“와아아아악!”

황성으로 향하는 대로변에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특히, 함께 흑마를 타고 선두에 선 두 사람을 향해 경외의 눈빛이 쏟아졌다.

‘암, 그럴 만도 하지.’

데릭은 도돌이의 동그란 뒤통수를 아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영애, 저랑 결혼해 주세요오옥!”

“……!”

농담처럼 던져진 말 한마디에, 그의 눈동자가 흠칫 떨렸다.

─스윽.

데릭은 저도 모르게 한쪽 팔로 도돌이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절대로 도돌이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이.

“데릭?”

“……그대가 떨어질까 하여.”

상대가 여자라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눈치였다.

그러나 상대방이 남자라면 상황은 훨씬 심각해졌다.

“케벨슨 영애! 이쪽도 좀 봐주- 히익!”

“…….”

데릭은 구름 같은 인파 속에서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단박에 찾아냈다.

‘갈색 머리와 눈동자. 키는 백칠십 중반의 보통 체형. 그리고 저 문양은…… 허티 용병단의 것이로군.’

시뻘건 눈동자가 인파 속의 남자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심지어는 남자를 지나친 후에도 끝까지 고개를 돌려 그를 눈에 담았다.

“……!”

번뜩이는 눈동자가 어찌나 살벌하던지. 당장 오늘 밤에라도 찾아와 숨통을 끊어 버릴 기세였다.

“킁, 킁. 어디서 이렇게 지린내가 나누?”

“어머니도 참. 기분 탓이겠죠.”

“애들은 벌써 다 잠들었는걸요. 전부 어른들 뿐인데요, 무슨.”

“…….”

다 큰 남자는 바지춤을 붙잡은 채 말없이 돌아섰다.

아무래도 당장 짐을 싸야 할 듯싶었다. 프리트 공작이 자신의 목을 베러 오기 전에…….

* * *

데릭은 황녀를 실은 마차를 황성에 대충 인계한 뒤, 황제를 알현하지 않고 돌아섰다.

“시간이 늦었으니 데려다주겠다.”

“괜찮아요. 포털을 이용하면 금방인걸요!”

“하지만,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그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두 사람은 이제 ‘진짜’ 연인 사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응당 남들 다 볶는 깨도 좀 볶고, 한 몸처럼 붙어 있고, 헤어지는 게 아쉬워 괜스레 서성거려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포털을 이용하겠다니. 이게 말이나 되나?

‘참으로 눈치도 없다.’

데려다주겠다고 했으니 못 이기는 척 고개만 끄덕이면 될 것을. 아무래도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운 건 그뿐인 듯했다. 데릭은 서운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데릭?”

“…….”

오드리는 어쩐지 뚱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눈만 끔뻑였다.

‘왜 저러지? 마도구가 없나?’

그녀야 뒤에서 잡아 주는 사람이 있으니 말 위에서도 잠깐 눈을 붙였다지만, 데릭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느긋하게 굴다니.

설마…… 내일은 만나지 않을 작정인 걸까?

‘말도 안 돼!’

오드리는 억울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연인이라면 당연히 하루가 멀다고 매일 만나야 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는 연애란 그랬다.

‘……어쩔 수 없지.’

오드리는 결연한 얼굴로 주섬주섬 마도구를 꺼내 들었다.

─덜그럭.

“앗! 포털을 두 개나 열어 버렸네?”

평소보다 높다란 목소리가 눈에 띄게 어색했다.

“이미 열려 버린 걸 닫을 수도 없고! 아! 그렇구나! 데릭이 들어가면 되겠어요!”

“…….”

그러나 데릭은 포털을 눈앞에 두고도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오드리만 내려다보았다. 루비 같은 눈동자엔 애달픈 호소가 가득했다.

‘이대로 헤어지기 싫다.’

하지만 순진한 도돌이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자, 이대로 들어가면 돼요!”

“잠깐, 아직-”

“내일 봐요!”

“도돌-”

그 자그마한 손으로 집채만 한 데릭의 몸을 떠밀고 만 것이다.

“휴.”

오드리는 포털이 닫힐 때까지 지켜보다가 흐뭇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런데 깜빡한 게 하나 있었으니.

“크흠! 저기.”

“앗, 보좌관님!”

“…….”

주군을 잃은 루카스가 미아처럼 덩그러니 서 있지 뭔가. 오드리는 민망한 듯 딴청을 부리는 그를 위해 부랴부랴 포털을 열어 주었다.

“여, 여기로 들어가시면 돼요.”

“……예. 감사히 들어가겠습니다.”

루카스는 포털로 걸어 들어가며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렸다.

‘몹쓸 커플 같으니라고…….’

도저히 혼자인 게 서러워서 살 수가 없었다.

* * *

다음 날, 오드리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던 아주 극단적인 시간에 일어났다.

‘새벽 두 시? 좋았어!’

오늘은 제대로 된 첫 데이트 날 아니던가.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당장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짤랑 짤랑 짤랑.

“흐아암, 부르셨어요?”

“아침부터 미안해.”

“네? 아침이요? 주무신 지 아직 네 시간밖에 안 되셨는데…….”

“헤헤. 일찍 나가 보려고.”

“아앗!”

순식간에 잠기운이 달아났다. 아가씨가 연애 중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떠오른 까닭이다.

게다가 무려 첫 연애 아니던가!

‘그럼 그럼. 한창 좋을 때지.’

제나는 다 안다는 듯이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가씨, 저한테 맡기세요.”

“응!”

“흐흐.”

수상한 웃음과 함께 새벽 댓바람부터 본격적인 단장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2시간이 지났을 무렵.

“제나, 이만하면 된 것 같아.”

“아니에요. 저는 이대로 만족할 수 없어요.”

“끄응…….”

“거의 다 했어요.”

오드리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얼른 보고 싶은데!’

지금 시각은 새벽 4시. 그러나 제나의 예술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단장은 그 뒤로도 1시간이나 더 이어졌다.

“아가씨, 이제 다 됐-”

“고마워!”

“……어요.”

오드리는 제나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바람처럼 침실을 나섰다.

─도도도도도.

“아가씨도 참.”

제나는 복도에 울려 퍼지는 사랑스러운 발소리를 들으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오드리가 막 1층 홀에 발을 디딘 찰나. 아주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도돌이.”

“……!”

공작성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데릭이 현관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에 놀란 것도 잠시.

“데릭!”

오드리는 당장 그를 향해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던 데릭도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내가 마중을 나왔다.”

“네에?”

“그대가 나를 데리러 왔듯이.”

오드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와 맞잡은 손에 꼬옥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도 살짝 힘이 들어갔다. 두 사람은 신호를 보내듯 한참이나 손장난을 쳤다. 이런 유치한 장난에도 절로 웃음이 나는 것을 보니, 드디어 제대로 된 연애가 시작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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