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권에 계속공작님, 제 발목 좀 놓아주세요! 4권
제13장.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下
오드리는 오늘도 포털을 타고 저택 곳곳을 누볐다.
문어 빨판에 당한 듯한 입술은 그래도 붉은 기운이 많이 가신 상태였다. 통통한 붓기는 여전했지만.
“너무 빨리 낫는 것 같은데…….”
이러다간 당장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 무슨 낯으로 그를 본단 말인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그렇게 뜨겁게 키스해 놓고서! 프리트 공작의 입술도 똑같이 만들어 놓겠다던 당찬 복수 계획도 부끄러움 앞에서는 빛을 잃었다.
“으으응…….”
늦은 점심을 먹던 오드리가 눈을 꼭 감은 채 발을 동동거렸다.
그날 이후로 심장이 병적으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그날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통에,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일도 다반사였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것은 덤이었다.
‘이건 맞춤 제작한 건데요-’
‘……맞춤? 입맞춤?’
‘네?’
‘아, 아니야!’
“휴우.”
오드리가 한창 응큼한 상상을 이어 가던 찰나, 잠시 자리를 비웠던 제나가 돌아왔다.
“아가씨!”
“왜, 왜 그래?”
“그분이 또 오셨어요.”
“뭐?”
당황한 오드리가 벌떡 일어났다.
프리트 공작이라면 분명 오늘 아침에 허탕을 치고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또 찾아왔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다.
“어, 어떡하지?”
오드리는 일단 허둥지둥 식당 밖으로 뛰쳐나가고 보았다. 출입문을 지나 중앙홀로 들어서면 식당 내부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중앙 홀로 들어오기 전에 먼저 계단으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포털은 치워 놓을까요?”
“아차차!”
오드리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순간 당황한 나머지 식당에 설치해 놓은 포털을 까먹은 것이다.
그녀는 포털로 들어가기 직전, 제나에게 신신당부했다.
“나는, 어, 그냥 외출했다고 해!”
“네?”
“알았지? 부탁해!”
“…….”
홀로 남은 제나의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공작님만 왔다 하면 사자에 쫓기는 사슴처럼 호다닥 달아나고 보는 아가씨의 모습이 어딘지 수상했다.
“……공작님께서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게 확실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무서운 공작님이 애가 닳은 얼굴로 매일 같이 찾아오실 리 없지 않은가.
“사랑의 술래잡기인가?”
음, 그래. 아무래도 아가씨께서는 밀당의 고수인 듯하다.
* * *
막 출입문을 통과한 프리트 공작은 중앙홀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를 맞닥뜨렸다. 분명 도돌이의 시녀였다.
“흠흠. 아가씨께서는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외출?”
그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얼굴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조금 더 서두를 걸 그랬군.’
데릭은 쉽사리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다. 그러다 겨우 다음을 기약하며 등을 돌린 순간, 문득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도돌이?’
그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았다.
“아가씨께 전하실 말씀이라도?”
“…….”
그가 말없이 중앙홀을 배회했다. 식당 가까이 다가갈수록 도돌이의 복숭아 향이 더더욱 짙어졌다. 방금까지 이곳에 머물렀던 것처럼.
“나간 지 얼마나 되었지?”
“네? 으음, 한 시간, 아니 두 시간쯤이요? 아마 그, 그쯤 됐을 거예요.”
“…….”
거짓말이다. 2시간이나 되었다면 향이 이렇게나 짙을 리 없지. 분명 도돌이는 이 저택에 있다.
한편, 침실을 서성이던 오드리는 마차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갔나?’
프리트 공작이 드디어 성으로 돌아간 게 분명하다. 이제야 안심한 오드리가 슬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제나를 불러 이것저것 물어볼 참이었다.
물론, 문을 열기 직전에 귀를 대고 동태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도 없지?’
마침내 오드리가 살금살금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문이 열린 순간. 돌덩이처럼 단단한 가슴팍이 눈앞을 가로막음과 동시에, 익숙한 향기가 훅 끼쳐 들었다.
“……!”
오드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한참이나 분홍색 정수리만 내려다보던 프리트 공작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대는, 거짓말도 잘해.”
어쩐지 상처받은 듯한 말투였다.
오드리는 뭐라 변명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어, 어떡하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어떻게 마주하며, 아직도 붓기가 남아 통통해진 입술은 또 어떻게 보여 준단 말인가? 정말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 오드리의 행동을 오해한 데릭이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검지 하나를 얽어 왔다.
“이제는 얼굴도 보여 주지 않을 셈인가?”
“…….”
“응?”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는 남자가 두려워하는 건 오직 도돌이뿐이었다. 데릭은 어떻게든 그녀와 눈을 맞춰 보려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내가 전부 잘못했다.”
“…….”
“그대가 싫다면, 앞으로 다시는 키스를 조르지 않겠다.”
“……!”
오드리로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도 쉽게 키스를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는 막, 막, 잡아먹을 것처럼 굴더니…….’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문득 억울함이 샘솟기도 했다.
‘내 입술은 이렇게 붕어처럼 만들어 놓고! 자기 혼자 빠져나가겠다는 거야?’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씩씩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저 남자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할듯싶다. 암. 혼자만 당하고 있을 순 없지.
─챱.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든 오드리가 다짜고짜 힘껏 까치발을 든 채 그의 양쪽 뺨을 붙잡고 끌어 내렸다.
“……도돌이?”
그리고는 눈을 꼭 감고, 그의 아랫입술을 앙- 베어 물었다.
“……!”
데릭은 제 입술을 물고 늘어진 도돌이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의 입술을 삼킨 말캉한 촉감과 포근한 숨결은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마치 그날처럼.
“흐.”
“……!”
발뒤꿈치를 들고 아등바등 애쓰던 오드리가 제풀에 지쳐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데릭은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받쳐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뒤로 쏠리는 무게 중심을 따라 엉거주춤 침실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탁.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히자, 이제 침실엔 두 사람뿐이었다.
오드리는 그의 입술이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심히 빨아 댔다. 어떻게든 공작도 붕어 입술로 만들어서 곤란했던 그녀의 상황을 되돌려 주겠단 심보다.
하지만 데릭은 온몸이 펄펄 끓는 듯했다. 도돌이가 아무런 생각 없이 뱉어 내는 소리가 그에겐 너무도 자극적인 까닭이다.
“으앗.”
계속 뒤로만 물러나던 두 사람은 결국 침대 위로 나란히 쓰러지고 말았다. 오드리는 그 충격으로 열심히 물고 있던 데릭의 입술을 놓쳐 버렸다.
“…….”
“…….”
불시에 마주친 시선 사이로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당돌하게 그의 얼굴을 잡아끌었던 게 언제였냐는 듯 그녀의 손이 꼼질꼼질 그의 어깨를 향해 내려갔다. 여차하면 도망가겠다는 뜻이었다.
데릭은 한참이나 도돌이를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목 주위로 친절하게 둘러 주었다.
“……!”
과한 친절함이 이토록 오싹하게 느껴질 수 있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저…… 그, 그게-읍!”
데릭의 입술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오드리를 집어삼켰다. 입술만 물고 늘어지는 그녀의 장난질을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끈적하고 집요한 움직임이었다.
‘뭐, 뭐야?’
오드리는 내심 당황했다. 고작 며칠 사이에 그의 움직임이 한결 능숙하고 농밀해져 있는 까닭이다. 그가 입안 깊숙이 파고들 때마다 온몸의 솜털이 오소소 일어나는 것 같았다. 동시에 불안감이 차올랐다.
이러다 또 그녀만 잔뜩 붓는 거 아닐까?
‘안 돼!’
정신을 차린 오드리도 전투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황한 것은 데릭이었다.
“……!”
그는 엉거주춤 몸을 물리기 시작하더니, 짧은 입맞춤과 함께 급히 입술을 떼었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얼굴이 핼쑥한 듯도 하였다.
“나는 도무지, 그대를 종잡을 수가 없다.”
“…….”
“그날 이후로 자꾸만 나를 피하기에 영 별로였나 싶었더니.”
“그, 그건…….”
“오늘은 또 나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들지 않나.”
숨을 헐떡이던 오드리가 별안간 눈을 치켜떴다. 아주 억울한 눈치였다.
“제 입술을 좀 보세요!”
“……또 해 달라는 건가?”
그러나 눈치도 없는 데릭은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홀린 듯 내려다보았다. 여차하면 한 번 더 달려들 기세였다.
“아, 아니요! 데릭 때문에 이렇게 부었잖아요!”
“…….”
“하루 종일 키스했다고 동네방네 소문내는 것도 아니고…… 창피해서 밖을 어떻게 돌아다녀요?”
“아.”
데릭은 도돌이가 그를 피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참으로 깜찍하기 그지없다.’
아아, 이런 사랑스러운 이유 때문이었다니!
그는 도돌이의 입술을 엄지로 살살 쓸어 주었다. 이 와중에도 들썩이는 입매를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입은 웃고 있는데요.”
“내가 싫은 게 아니라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데릭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그녀의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당장이라도 도돌이를 와락 끌어안은 채 침대를 백서른다섯 바퀴 정도 구르고 싶어졌다.
어쩌면 이리도 앙증맞은 생명체가 있단 말인가?
‘하…….’
오늘 밤도 제시간에 잠들기는 그른 듯했다.
* * *
황제는 거만하게 앉아 아놀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마탑주가 새로 알아낸 사실은 뭐요?”
“아마 까암짝 놀라실 겁니다.”
아놀드 역시 뻔뻔한 대꾸로 응수했다.
그는 도토리가 전해 준 노트 내용을 바탕으로 폭발 사고 현장을 모조리 둘러본 참이었다. 그러다 아주 뜻밖의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다.
모든 폭발 사고 현장에 있었던 특정 사람들이었다. 아무런 규칙성도, 전조 증상도 없는 폭발 사고를 전부 목격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배후 세력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찾은 것 같거든요.”
“배후 세력?”
그러나 황제는 영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폭발의 원인을 먼저 밝히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겠소?”
“그건 배후 세력을 조사하면 자연히 밝혀질 일입니다.”
“…….”
아놀드는 자연스럽게 정보를 차단했다. 도토리가 넘겨준 노트 첫 장에 쓰인 내용 때문이었다.
황실을 너무 믿지 말 것 – 지하 감옥에 주술사 은폐 중. (극비사항)
그게 영 마음에 걸렸던 아놀드는 황제에게 모든 정보를 다 넘겨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황실과 주술사가 한패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후 세력이 누구란 말이오?”
“프레이아 극단입니다.”
“……뭐?”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프레이아 극단이라면, 건국기념제 무도회 당시 황성으로 초빙한 이들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곳에서 첫 번째 마력석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가장 큰 문제는…… 다이안이 손을 잡고 도망친 남자 역시 프레이아 극단 소속의 배우라는 점이었다.
문득 프리트 공작과의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납치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공작, 이곳은 황성이다. 납치는 절대로 불가능해. 분명 도망을 간 것이다. 천한 배우 놈 하나에 미쳐서는!’
황제가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만약 황녀가 도망을 간 게 아니라 진짜로 납치를 당한 거라면…….’
그렇다면 일이 곤란해진다. 지금은 마력석 폭발 사고 이야기나 듣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에 나누는 게 좋겠소.”
“예?”
황제는 아놀드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재빨리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비상, 비상이었다.
* * *
아침이 밝자마자 국경을 넘은 황녀 일행은 루자니아 왕국도 빠르게 통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원래 목적지인 테수스 공국에 도착했다.
지미는 다이안에게 신문 하나를 내밀었다.
“드디어 다이안의 납치 기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참 늦게도 실으셨군.”
그녀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읽는 듯한 얼굴로 기사를 대강 훑었다. 그러다 한곳에 시선이 멈췄다.
……프리트 공작(25)을 필두로 한 정예부대를 파견하여 황녀의 무사 생환을 책임……
“프리트 공작을?”
다이안은 내심 놀랐다. 대충 근위대나 보낼 줄 알았더니, 아바마마가 웬일일까?
머릿속에선 벌써 헤드라인 한 줄이 탄생했다.
≪흑마 탄 공작과 황녀≫
아, 얼마나 동화 같은 이야기인가. 위험에 빠진 황녀를 구하러 달려오는 흑마 탄 공작이라니! 모든 신문은 두 사람의 운명적인 이야기로 도배될 게 분명하다.
‘그럼 프리트 공작도 더 이상 뻣뻣하게 굴 수 없겠지.’
들뜬 다이안이 지미의 뺨에 짧게 키스했다.
“이게 전부 너의 덕이다.”
“…….”
“네 말을 따르길 잘했어.”
“저도 다이안이 제 뜻에 따라 줘서 기쁜걸요.”
“내가 프리트 공작과 결혼하더라도 우린 평생 함께일 거다. 내 정부로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해 주지.”
그런데 선심 쓰는 듯한 다이안의 말에 방금까지만 해도 천사처럼 웃던 지미가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정부는 무슨.”
“지미?”
“헛소리 그만하고 얌전히 마차에 타는 게 좋을 거야. 짜증 나게 하지 말고.”
“……!”
다이안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무례한 남자가 본래 그녀가 알던 지미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어차피 여긴 우리 땅이라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늘 달콤한 말만 속삭이던 그 아니던가. 지미는 그런 그녀에게 확인 사살하듯 천천히 읊조렸다.
“멍청한 황녀.”
“……!”
다이안은 재빨리 등을 돌렸다. 왠지 본능적으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봐?”
“너, 너희……!”
로브를 벗은 일행들이 어느새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황녀는 잔뜩 충격을 받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직접 섭외했던 극단, 프레이아의 주연 배우들이 그녀를 향해 점점 거리를 좁혀 왔다.
다이안은 패닉에 빠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 *
“……왔군.”
데릭은 공작성으로 들어오는 익숙한 마차 한 대를 보자마자 입매를 휘었다.
지금 시각은 오전 6시 반. 도돌이의 출근 시간이 점점 빨라지는 것이 너무도 기꺼웠다.
─꽈악.
데릭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심장은 익숙해지지 못했나 보다. 도돌이만 곁에 있으면 데릭의 심장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거세게 뛰었다.
“입술은…….”
“아직 부, 붓기가 남았어요.”
데릭은 슬쩍 도돌이의 입술을 훔쳐보았다. 평소보다 더 붉고 도톰해 보이는 것이, 목울대를 절로 요동치게 하지 뭔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기도 하고, 목이 메는 것 같기도 했다.
“……보기 좋다.”
“……!”
그는 저도 모르게 본심을 슬쩍 흘리고 말았다. 파드득 놀란 오드리는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응수했다.
이른 아침 공작성 복도를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특히, 붕어처럼 퉁퉁 부은 입술이.
데릭은 집무실로 가자마자 미리 준비한 향유를 도돌이의 입술에 조심조심 발라 주었다.
“앗!”
“……아픈가.”
그의 얼굴엔 뒤늦은 후회와 자책이 가득했다.
‘내가 도돌이를 아프게 하다니!’
눈을 잔뜩 내리깐 도돌이는 향유를 바른 손가락이 입술을 슬쩍 스칠 때마다 몸을 움찔거렸다. 파들거리는 속눈썹엔 그녀의 고통이 여실히 묻어나는 듯했다.
결국, 오드리는 눈을 꼬옥 감아 버렸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키스를 조르는 것처럼 보이지 뭔가.
“…….”
데릭의 손가락이 점차 느려졌다. 이미 향유 범벅이 된 입술을 미련스레 지분거리는 손끝이 어쩐지 뜨거운 듯도 했다.
‘이제 다 된 것 같은데.’
이상함을 느낀 오드리가 부스스 눈을 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
데릭의 눈엔 이미 초점이 없었다. 그녀의 입술로 쏟아지는 시선은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저, 저도 발라 줄게요!”
“……아니다. 그보다도-”
“얼른요!”
오드리는 당장이라도 제게로 기울어질 듯한 얼굴을 붙잡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곤 요령 없이 데릭의 입술에 향유를 덕지덕지 발랐다.
“됐다. 이제 일을 시, 시작하면 되겠죠?”
“…….”
그러나 데릭의 시선은 한참이나 도돌이의 입술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루카스는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던 주군의 비밀을 눈치채 버렸다.
어쩐지 지난 며칠간 주군의 입술이 유난히 통통하다 싶었다. 생전 안 그러시던 분이 매일 아침 입술에 향유까지 듬뿍 바르는 게 영 수상하다 했지.
“보좌관님?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의외의 곳에서 답을 찾은 루카스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많고 많은 사람 중, 저 두 사람만 입술이 도톰하게 부풀어 있는 게 과연 우연일까? 나란히 향유 범벅이 된 입술도 마찬가지다.
‘저렇게 티를 내셔야 했나?’
아주 별스럽다. 이런 유난이 또 없다.
“괜히 쳐다보지 마라. 아니면, 일이 부족한가?”
“아, 아닙니다!”
루카스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기로 했다. 저 두 사람은 정말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으니까.
참다못한 루카스가 잠시 집무실에서 탈주한 사이, 오드리는 발그레한 얼굴로 데릭의 어깨를 콩콩 때렸다.
“제, 제 입술 좀 그만 쳐다보세요!”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들켰군.’
어떻게 알았나 싶은 표정이다. 나름 티 안 나게 훔쳐봤다고 생각했는데, 요령이 부족했던 걸까? 그러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속눈썹이 엄한 곳으로 내리깔려 있으니, 오드리로선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저, 저희가 키스한 거 세,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겠어요!”
“……!”
타박하는 듯한 말에 데릭의 얼굴이 빠르게 끓어올랐다.
‘키스라니!’
도돌이는 저런 은밀하고 야릇한 단어를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뱉는단 말인가?
당황한 그가 커다란 손으로 도돌이의 입을 살포시 덮어 버렸다.
“우움!”
“쉬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
“부끄럽단 말이다.”
오드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혹시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었다.
‘부끄러워?’
그렇게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키스만 하면 폭주 기관차처럼 돌진한단 말인가? 당장 어제만 해도 침대에 눕자마자 휘몰아치던 게 아직도 생생한데!
“하…….”
그가 작은 한숨과 함께 몸을 물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싶단 욕망이 솟구쳤다.
‘어차피 둘 다 향유 칠을 했으니 티가 나진 않을 텐데.’
무의식중에 루카스가 돌아올 시간까지 계산하던 데릭은 이런 자신의 모습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 정도면 병이다. 하루 종일 도돌이의 입술만 보이고, 틈만 났다 하면 입을 맞출 생각뿐이지 않은가. 머릿속이 온통 까맣게 물들어 가는 듯했다.
─벌컥!
그때, 집무실 문이 노크도 없이 열리며 루카스가 달려 들어왔다.
“각하, 폐하의 전언입니다. 당장 황성으로 가셔야 합니다!”
“…….”
눈치 없이 나타난 보좌관이 방해꾼 같다가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하마터면 도돌이에게 짐승처럼 달려들 뻔하지 않았는가.
“급보입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알았다.”
데릭은 하는 수 없이 도돌이의 손을 놓고 일어났다.
“금방 돌아오겠다.”
“네, 네에.”
“오늘 저녁은…… 가능하면 함께 먹지.”
오후 일정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저녁이라도 독차지할 생각이었다. 황성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은 오늘따라 천근만근 늘어지는 듯했다.
* * *
다이안 황녀의 납치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다음 날. 황제 앞으로 수상한 편지 하나가 도착했다. 기껏해야 협박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황제는 봉투를 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후두둑.
“……!”
딸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빛 머리카락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막스!”
분노한 황제는 곧바로 시종을 호출했다. 그리곤 우편국의 소인 외엔 아무것도 없는 편지 봉투를 들이밀었다.
“당장 가서 이 편지의 출처를 알아 와라. 어서!”
“예!”
아주 괘씸해서 손이 다 떨릴 지경이다. 차라리 돈이며 보석을 요구했다면 모른다. 그런데 감히 신성한 황족의 몸에 손을 대다니!
“편히 눈을 감지는 못할 것이다.”
이건 황실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뒤늦게 찾아온 다이안의 전속 시녀는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휘청거렸다.
“화, 황녀 저하의 머리카락이 확실합니다.”
“나가 봐라.”
시녀를 물린 뒤, 황제는 얼음장 같은 얼굴로 프리트 공작을 기다렸다. 머릿속으로는 혼자 이것저것 계산해 보기 바빴다.
‘세니아 왕국? 베르빌 연합국?’
황족이 모욕당했다는 사실에 불쾌했던 것도 잠시, 차분히 생각해 보니 황제로선 나쁠 게 없는 상황이다. 아니, 오히려 이득이라고나 할까.
중요한 건 프레이아 극단과 연결된 게 어느 쪽이냐는 점이었다. 마력석 폭발로도 모자라서 황족을 납치했다면, 어떤 핑계로도 빠져나가지 못할 터.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
전운이 감도는 시기에 이보다 더 확실한 명분은 없었다.
“폐하, 프리트 공작의 마차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도착하는 즉시 들여보내라.”
“예.”
황제는 탐욕스러운 눈을 번뜩이며 웃었다. 그러나 프리트 공작이 알현실로 들어선 순간, 재빨리 걱정을 가면처럼 뒤집어썼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공작, 슬픈 소식이네. 납치범들에게 편지가 도착했어.”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황제는 굳은 얼굴로 머리카락을 들어 보였다.
“황녀의 머리카락이다.”
“…….”
“짐은 어제 마탑주와 독대했다. 마력석 폭발 사건의 배후로 프레이아 극단을 지목하더군. 황녀를 유혹한 자도 마침 그 극단 소속 아닌가.”
데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프레이아 극단?’
말도 안 되는 막장 연극으로 순회공연을 하던 이들 아닌가. 도돌이와 팔꿈치를 맞댄 채 아찔한 온기를 나누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풀어질 뻔했던 데릭이 다시 무게를 잡았다.
“그들이 납치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거의 그렇다. 하지만 일개 극단이 감당하기엔 무모할 정도로 큰 사건이기도 해.”
“그 말씀은.”
“다른 세력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침 편지 봉투를 들고 사라졌던 막스가 헐레벌떡 알현실로 뛰어들었다.
“폐하. 발송지 파악엔 실패했지만, 봉투에 찍히 소인으로 발송국을 알아냈습니다.”
발송국! 이로써 프레이아 극단과 연결된 진짜 배후가 밝혀질 것이다.
“그래, 어서 말해 보아라. 어디지?”
“테수스 공국입니다.”
“……뭐라?”
잔뜩 기대했던 황제의 얼굴엔 실망감이 차올랐다. 반대로 데릭은 딱딱하게 굳었다.
확인 결과, 테수스 공국은 이미 구대륙 쪽으로 넘어간 것이 확실함.
이로써 안토니오가 전해 준 정보는 전부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 * *
황제는 당장 출정을 명했다. 정예병을 내어 줄 테니, 일단 날이 밝자마자 테수스 공국으로 진군하여 다음 명령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정예병은 30명 남짓. 황제가 이 사건을 얼마나 가벼이 여기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밤이 되어서야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데릭의 안색은 유독 어두웠다.
‘저는 꼭 살아서 돌아갈 겁니다. 애인과 결혼식을 올릴 거거든요.’
지긋지긋한 전투로 감정이란 것을 잃어 가던 7년 전의 어느 날. 앳된 기사 하나가 당차게 외쳤다. 그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엔 볼품없는 구리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전초기지는 초토화가 되었다. 새벽을 틈탄 기습이었다.
‘마야, 마야에게…… 반지를…… 전해 주세요…….’
결국, 애인 곁으로 돌아간 것은 주인 없는 구리반지뿐이었다. 이를 바로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기사들은 모두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애인에게 당장 이별을 통보했다.
부디 기다리지 마시오.
이별과 연인의 죽음 중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게 이별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다 운 좋게 살아서 돌아간다면, 그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겠다고 했다.
지금의 데릭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
그가 적의 칼에 목숨을 잃을 확률이야 아주 희박하겠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어떻게 감히 도돌이에게 기다려 달라고 할 수 있을까.
‘오늘 저녁은…… 가능하면 함께 먹지.’
불과 몇 시간 전에 했던 약속 하나도 못 지키는데.
지금 시각은 저녁 9시. 퇴근 시간을 3시간이나 훌쩍 넘긴 시점이다. 도돌이는 이미 백작저에 돌아갔을 것이다. 어쩌면 약속을 어겼다며 속상해할지도 모르지.
데릭은 텅 빈 집무실을 상상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데릭.”
“……!”
그곳엔 도돌이가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환하게 웃는 도돌이가…….
* * *
출정식은 이른 새벽에 치러졌다. 황성에서 파견된 정예병들과 이야기를 나눈 데릭은 마지막으로 군마와 수레를 점검했다.
“루자니아 왕국까지는 포털을 타고 이동한다. 그곳에서 하루 머문 뒤, 변복을 거쳐 테수스 공국으로 입성할 것이다.”
“예!”
“한순간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적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예!”
데릭이 가장 먼저 말에 올라탔다.
일단 그가 이끄는 선발대가 테수스 공국으로 잠입하면 뒤이어 공작성 기사단까지 파견될 예정이었다. 선발대 선에서 마무리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무엇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털그덕 털그덕.
돌바닥 위로 요란한 마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의아함을 느낀 데릭은 당장 말 고삐를 잡아당겼다.
‘……이상하군.’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이 시간에 대체 누가 공작성을 찾아온단 말인가?
캄캄한 어둠 저편에선 둔탁한 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안간힘을 쓰듯 낑낑대는 소리, 바퀴 구르는 소리 같은 것이 연달아 들려왔다.
─돌돌돌돌돌돌돌.
“……도돌이?”
“끙, 이, 이것 좀.”
데릭은 당장 말에서 뛰어내렸다. 지금쯤 곤히 자고 있어야 할 도돌이가 횃불과 바퀴 달린 상자 하나를 끌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에 놀란 것도 잠시.
“출정은 삼십 분 뒤로 미룬다. 알아서들 쉬고 있도록.”
“예!”
그는 성큼성큼 도돌이를 향해 다가갔다. 낯빛엔 걱정이 가득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다. 더 자지 않고서.”
“이걸 전해 주려고요.”
“대체 뭐기에?”
거의 도돌이의 허벅지까지 오는 거대한 가죽 상자였다. 오드리가 낑낑대며 끌고 온 그 상자를 데릭은 너무도 쉽게 잡아당겼다.
“큼, 저희는 안으로 들어가 있겠습니다!”
묘한 기류를 느낀 루카스와 병사들이 눈치껏 공작성 안으로 사라졌다. 데릭은 그제야 안심하고 상자를 열었다.
그런데.
“이게…….”
내용물을 확인한 그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거대한 상자 안에는 각종 마도구와 마력석이 가득 차 있던 것이다. 오드리는 별거 아니란 듯이 손가락만 꼼지락댔다.
“그냥, 오늘 출정하신다고 해서.”
“…….”
“포털도 많이 쓰일 것 같고, 또, 가끔 마도구가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포털을 여는 마도구부터 침입 경보를 울리는 마도구, 갑옷에 착용하는 일회용 방어 마력석, 범위와 시간을 조정 가능한 시야 방해 마력석까지. 그녀가 밤새도록 준비한 것이었다. 밤샘 작업 탓에 토끼처럼 빨갛게 충혈된 눈 아래에는 살짝 그늘까지 져 있었다.
“그리고…… 이거요.”
내내 망설이던 오드리가 불쑥 목걸이 하나를 건넸다. 그의 눈동자 색과 같은 마력석이 달린 것이었다.
“전투용으로 개조한 통신구에요.”
“…….”
“미리 시동어를 설정해 놓으면 손으로 조작하지 않아도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어요.”
“…….”
“호, 혹시 급한 연락 같은 게 필요하실까 봐요!”
프리트 공작은 넋이 나간 얼굴로 가죽 상자와 오드리의 손바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걸, 나에게 주려고.’
저 단풍잎 같은 손으로 이것들을 똑딱똑딱 만들었을 모습을 상상하니, 참으로 앙증맞고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다짐했다.
“목숨처럼 간직하겠다. 반드시.”
“네? 그럴 필요는-”
곧이어 착, 착, 착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목걸이형 통신구를 착용했다.
‘왜 저러신담?’
오드리는 투덜거리는 속마음과 달리 기분 좋게 얼굴을 붉혔다. 밤을 새워 피곤한 것도 잊을 정도로 뿌듯함이 몰려들었다.
한편, 데릭은 오늘따라 사랑스러운 도돌이를 유독 오래 바라보았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기다려 달라고 하면 기다려 줄까?’
얼마나 걸릴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 부탁을 해도 될까. 편지로 이별을 전하던 부하들의 심정을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고작 체험판 연인 주제에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할 순 없다.’
데릭은 애틋한 눈으로 도돌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두 사람 사이의 불문율을 깼다.
“체험판은…… 오늘까지다.”
“……네?”
그가 먼저 끝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 모두 의식적으로 언급을 회피하던 주제였다.
“분명 그대를 위한 일이었으나, 도움이 되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 그게 무슨-”
“혹여 기다리지 않았으면 한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
오드리는 황망히 서서 그를 올려다봤다. 마치 버림받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데릭의 마음 역시 편하진 않았다.
‘그대와 영원히 함께이고 싶다.’
아주 잠깐의 이별이 되겠지만, 그것을 고하는 게 왜 이리도 마음 아픈지. 잠시 망설이던 데릭은 작별의 키스 대신, 도돌이의 손을 한 번 움켜쥐고 물러났다.
낯선 땅에서 해와 달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저 온기를 그리워할 테지.
“…….”
오드리는 멍하니 서서 멀어져 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왜 저런 말을 해? 대체 왜?’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니. 저런 불길한 소리는 왜 한단 말인가? 그는 매번 출정 때마다 저런 생각을 했던 걸까?
오드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냥 임무잖아…….’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런 임무를 하다 죽는 사람도 있었다. 그 누군가가 데릭이 되면 어쩌지?
선봉장이 된 데릭은 야속하게 한 번을 돌아보지 않고 전진했다. 전열을 갖춘 병사들이 그를 뒤따랐다. 오드리는 흐린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뒤쫓았다. 앙다문 입술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저렇게 갈 수가 있어?’
참으로 매정한 남자다. 괜히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났다.
그런데 포털에 진입하기 직전. 참지 못한 프리트 공작이 오드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돌이.’
그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홀로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당장이라도 안아 주고 싶을 만큼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순간만큼은 체험판 연인 주제에 그녀를 기다리게 할 수 없다는 염치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돌이와의 이별이라니. 데릭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령 그것이 아주 잠깐이라 하더라도. 임무 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는 결코 도돌이를 혼자 남겨둔 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그곳이 지옥이라도 기필코 살아 돌아오고야 말겠지.
─히이잉!
데릭은 당장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바람처럼 도돌이 앞으로 달려갔다.
그제야 안심한 오드리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정정하겠다.”
“흐윽…….”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사히 돌아오겠다. 죽더라도 그대의 곁에서 죽을 테니,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나를 기다려 줬으면 한다.”
“킁.”
“그리고 그땐…… 체험판이 아니라, 온전히 그대의 연인이 되고 싶다.”
커다란 손이 말랑한 볼을 소중히 감싸 쥐었다.
“대답은 돌아온 뒤에 듣겠다.”
공작의 말에 오드리는 교양 없이 코를 훌쩍이며 오열했다. 벌써 누구 하나는 죽은 모양새다.
한편, 선봉장을 잃은 병사들은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루카스를 선두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사불란하게 포털 속으로 쏙쏙 사라졌다.
이제 집합 장소에 남은 것은 데릭과 오드리뿐.
“…….”
“…….”
애틋한 연인이 진한 작별 인사를 나누기에 아주 적합한 상황이었다.
* * *
“잠깐, 그러니까. 없는 일까지 만들면서 야근을 했다고? 세 시간이나?”
“응? 그야, 같이 저녁 먹자고 했으니까…….”
“와!”
오드리의 말을 듣던 샬롯이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같이 식사나 하자는 상사의 한마디에 야근까지 자처하며 기다리는 부하 직원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보통의 경우라면 퇴근 시간을 핑계로 진작 도망가고 말았을 것이다.
“얘 진짜 안 되겠네?”
“뭐어?”
“그래, 어쩐지 얼굴이 좋아 보인다 싶었지.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샬롯은 즐거운 기색이었다.
‘제법 여우처럼 굴 줄도 아네?’
흐뭇한 눈이 친구의 차림새를 훑었다.
최근 들어 물이 오른 외모, 누가 봐도 신경 쓴 화장, 꾸민 듯 안 꾸민 듯 차려입은 옷까지.
‘아주 그냥 퐁당 빠졌네.’
이건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자였다. 본인은 아직 깨닫지 못한 눈치였지만.
“오드리? 이리 와서 거울 좀 봐 볼래?”
“으응? 갑자기?”
오드리는 샬롯의 손에 이끌려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얼굴은 별생각 없어 보였다.
“뭐 느끼는 점 없니?”
“……음.”
“어휴. 잘 봐.”
샬롯은 갑자기 자기 머리를 헝클이더니, 보기 좋게 화장된 눈과 입술도 아무렇게나 문질렀다. 매력적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미치광이 광대처럼 섬뜩해졌다.
“샤, 샬롯!”
“잘 봐. 이게 폐인이라는 거야. 실연당한 사람들의 기본 상태지.”
“……?”
“그런데 너를 봐. 사람다운 걸 넘어서서, 지나치게 화사하고 생기 넘친다는 생각 안 들어?”
“도대체 무슨 말을-”
샬롯은 여태껏 오드리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상한 점을 조목조목 짚어 주었다.
“자, 오드리 네가 아침잠을 포기하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지?”
“맞긴 맞는데…….”
“근데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출근했단 말이야. 심지어 제나를 닦달해서 화장도 몇 번씩 고치고, 옷도 몇 번씩이나 갈아입으면서.”
오드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너, 한스 만나면서 한 번이라도 그래 본 적 있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러니까. 그런 적 없잖아.”
“……으응.”
“체험판 연애도 그래. 만약 한스가 그런 개수작을 부리면서 손을 잡아 온다고 생각해 봐. 네가 가만히 있었겠어?”
“샬롯! 말이 너무 심하잖아!”
샬롯은 분개한 친구를 보며 요망하게 웃었다.
“이게 무슨 헛소리냐며 사람 취급도 안 했겠지.”
“그건 맞아!”
오드리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씩씩거렸다. 프리트 공작 대신 한스의 얼굴을 집어넣었을 뿐인데, 모든 행동이 영 끔찍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어쩐지 속이 안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샬롯은 오드리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거울 너머로 속삭였다.
“그런데 왜 프리트 공작은 괜찮은 걸까?”
“그건-”
“꼭 그때 같지 않아? 네가 에밀튼 소백작에게 빠져서 동동거리던 때.”
“……!”
오드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내가?’
문득 예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땐 클로드 오라버니의 얼굴을 생각하며 침대를 굴렀지…….’
그런데 지금의 그녀는 프리트 공작과의 키스를 되새기며 침대를 구르고 있다. 베개까지 꼭 끌어안은 채.
“새벽같이 일어나서 단장하고, 어떻게든 함께 있고 싶어서 공작성에 지원하기도 했잖아. 그런 정성이 또 없었지.”
“…….”
“그런데 말이야. 지금 네 모습이 그때랑 굉장히 비슷하지 않아?”
샬롯은 날카롭게 정곡을 찔러 왔다.
오드리는 입이 바짝 말랐다. 도무지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 어제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저녁에 그의 출정 소식을 듣자마자 꼴딱 밤을 새서 마도구와 마력석을 만들었다. 20년 인생에서 오드리가 밤을 샌 것은 단 두 번. 클로드 오라버니에게 보낼 연애편지를 쓴 날과 어제뿐이었다.
샬롯은 다 안다는 듯이 웃었다.
“난 네가 사랑에 빠진 것 같은데.”
“……!”
오드리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사, 사랑?’
마음에 벽을 치는 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순식간에 덮쳐들었다. 그녀를 통째로 집어삼킬 것처럼.
오드리는 망망대해 한가운데 표류하는 돛단배가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