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上
그 시각.
마탑주와의 독대를 끝낸 황제가 곧바로 다이안 황녀를 불러들였다.
“폐하, 저를 부르셨다고-”
“대체 정신이 있는 게야, 없는 게야?”
딸의 얼굴을 보자마자 불뚝 터져 나온 노성이 황성 복도까지 뻗어 나갔다. 시종들은 황급히 알현실 문을 닫았다.
“너의 섣부른 입방정 때문에 하마터면 귀족들을 전부 적으로 돌릴 뻔했다! 알긴 아는 것이냐?”
“…….”
“말조심하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황족의 말 한마디가 가지는 무게감을 아직도 이리 몰라서야, 쯧!”
속이 탄 황제가 냉수를 쭉 들이켰다.
딸이라곤 하나 있는 게 여태 시집도 가지 않아 속을 썩이더니, 이젠 아비를 망신시키려 작정한 듯했다. 황제는 본인의 말실수는 생각도 않고 황녀를 몰아세웠다. 마치 이 모든 게 딸의 탓인 것처럼.
“증거? 도대체 무슨 증거가 있기에 그리도 무모하게 끼어들었단 말이냐?”
“폐하.”
“황녀에겐 짐과 황실의 체면 따윈 안중에도 없는 게야?”
“그건…….”
다이안이 곤란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아바마마 몰래 주술사와 내통했다는 걸 알면 분명 화내실 테지.’
조금 더 확실한 증거를 잡기 전까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억울해 미칠 노릇이지만.
“보나 마나 뻔하지. 네 패악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이젠 놀랍지도 않다.”
“폐하!”
“어렸을 땐 총명하던 것이 어찌 이렇게 자라서는…….”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딸을 향한 시선엔 불량품을 보는 듯한 경멸이 가득했다.
다이안은 황좌에 앉은 아버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왜긴요. 황태자가 태어난 뒤로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바마마 탓이지요.’
남들이 다 아는 사실을 왜 황제만 모르는 걸까?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져라!”
“……예.”
그러나 황녀는 한마디도 못 한 채 물러났다. 괜히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쫓겨나듯 시집가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아바마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실 테지.’
알현실 문밖에는 마침 황태자 부부가 서 있었다. 안에서 오간 말들을 전부 엿들은 눈치였다.
“……누님.”
“화, 황녀 저하.”
새파랗게 어린 것들에게 받는 동정 어린 시선이 어찌나 사람을 미치게 하던지. 황녀는 말아쥔 주먹에 힘을 주며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혼자만 타박을 듣는 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왕녀는 어디 수도원이라도 들어가나 보지? 옷이 그게 뭔가?”
“아…….”
카타리나는 멋쩍은 얼굴로 자신의 드레스를 괜히 쓸어 보았다. 살결 하나 내놓지 않아 답답하고 우중충한 드레스는 그런 오해를 받을 법도 했다.
그런데 그때. 눈치도 없는 황태자가 끼어들었다.
“흠흠. 이젠 왕녀가 아니라 황태자비라고 부르셔야지요.”
“뭐?”
“누님도 제 결혼식에 오셨으니 잘 아실 것 아닙니까?”
“…….”
“그리고 제 눈엔 뭘 입든 예쁘기만 합니다.”
황태자는 카타리나를 보며 실없이 헤죽거렸다. 이를 질린 눈으로 쏘아보던 황녀는 인사도 없이 휙 등을 돌렸다.
‘저런 한심한 게 황태자라니!’
그녀의 등 뒤로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황제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아들 부부를 반겼다.
“오, 그래.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왔군.”
다이안만 빼면 참으로 화목한 가족 같았다. 그게 못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바마마의 딸은 나인데, 왜?’
황녀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지미의 방으로 향했다.
“저하?”
“너까지 그렇게 부르지 마라.”
“다이안, 무슨 일 있었습니까?”
황녀는 말없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베개에 파묻힌 입에선 그동안 참고 참았던 본심이 불쑥 튀어나왔다.
“모두가 나만 미워한다. 전부 다 내 탓이라고만 해.”
“다이안.”
“난 그저 황자가 아닌 황녀로 태어난 죄밖에 없는데…….”
가만히 바라보던 지미가 조용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원래 가까운 존재일수록 서로의 소중함을 모르는 법입니다.”
“아니. 황성의 그 누구도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그렇지 않습니다.”
일정한 속도로 다이안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이 퍽 다정했다. 지미는 마치 최면을 거는 것처럼 나긋하게 속삭였다.
“그들도 한 번 잃고 나면 깨달을 겁니다.”
“…….”
“다이안의 소중함을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던 황녀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못되게 굴었던 것도 분명 후회할 겁니다.”
“…….”
“그리곤 제발 돌아와 달라고 싹싹 빌겠지요.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지미는 아까보다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그 사과를 받아 주는 건 온전히 다이안의 선택일 겁니다.”
황녀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대로 사라져 버릴까 싶은 생각도 아주 잠깐 들었다. 하지만 한 줌 남은 이성이 강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그런 충동에 몸을 맡기기엔 걸리는 게 많은 나이였으니.
“……내가 다섯 살만 어렸어도 정말 그리했을 텐데. 참으로 아쉽다.”
“저야 언제든 다이안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지미는 그녀의 완곡한 거절에도 민망한 기색 하나 없이 웃었다. 다이안이 지미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 * *
점심 식사 장소는 에밀튼 백작가로 정해졌다. 점심부터 체하기 싫다며 내뺀 루카스를 제외한 여섯 사람은 아놀드가 만든 포털을 타고 이동했다.
“엣헴!”
물론 아놀드는 포털을 열기 전 어깨를 으쓱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마침 에밀튼 백작가에선 식사 준비가 한창이라, 먹는 입이 늘어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러나 오드리에겐 걱정이 생겼다.
‘왜 저러지?’
프리트 공작이 그녀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까닭이다. 안절부절못하고 커다란 손만 쥐었다 펴는 게, 꼭 바라는 것이라도 있는 눈치였다. 애타는 시선은 줄곧 단풍잎 같은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잡으면…… 혼나겠지.’
데릭은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저 앙증맞은 손을 잡을 수 없다니! 왠지 모르게 속이 답답하고, 한편으로는 억울하고, 자꾸만 안달이 났다. 원래 제 것이었던 반쪽을 도둑맞은 사람처럼.
‘……그래도 체험판 애인인 주제에 도돌이를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다.’
데릭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식사 시간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땐 테이블 밑으로 은근슬쩍 손을 맞잡아도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식당으로 이동하시죠.”
드디어!
데릭은 기다렸다는 듯이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중간중간 신호를 보내듯 도돌이를 슬쩍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물론 오드리로선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쪽이다. 이쪽으로 오면 돼.’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데릭이 막 식당으로 들어서는 도돌이를 향해 아주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
“비, 빈자리가 저기밖에 없네!”
오드리는 테이블을 대충 둘러본 뒤, 어색한 연기와 함께 그의 곁으로 향했다.
마침내 데릭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나려던 찰나.
“오, 오드리, 제 옆자리도 있어요!”
“……!”
눈치도 없는 아네트가 끼어들었다. 이미 일어서서 의자까지 뺀 데릭도, 자연스럽게 앉으려던 오드리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런데 그때.
“제,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은 주로 이쪽에 나와서요!”
“아…… 그런가요?”
우물쭈물하던 오드리가 썩 당돌하게 외쳤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까지 지어냈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
데릭 역시 무작정 고개를 주억거리고 보았다.
‘도돌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아주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 커플이었다.
“하지만 시종들을 시키면-”
“마음 편하게 먹고 싶어서 그래요. 아네트의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요!”
“오, 오드리가 그렇다면요.”
기어코 서로의 옆자리를 사수한 두 사람이 한숨을 돌렸다.
마침내 한스와 아놀드, 클로드까지 차례로 자리를 잡았을 무렵. 데릭이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슬쩍 손가락을 얽어 왔다.
“……!”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고 말았다.
‘데, 데릭!’
‘잠시만 잡고 있겠다.’
불시에 마주친 시선 너머로 은근한 대화가 오갔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어찌나 절박하던지.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는, 뭐.’
마음이 약해진 오드리는 애써 자기합리화를 했다. 데릭의 맞은편에 앉은 한스가 그런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는 줄도 모르고.
때마침 식사가 등장했다. 시작은 소고기와 브로콜리를 듬뿍 넣은 수프였다.
클로드는 분주하게 주위 사람을 챙기기 시작했다.
“형님, 이거 쓰세요.”
“으응. 고마워.”
버터나이프를 찾는 아놀드에게 기다렸다는 듯 건네주기도 하고,
“참. 오드리는 포도주 대신 사과주스로 부탁해.”
“예. 알겠습니다.”
시종을 시켜 오드리의 잔을 주스로 바꿔 주기도 했다. 보다 못한 한스가 “옆에 앉은 부인이나 좀 챙겨!”라고 타박할 정도였다.
“부인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
“네…….”
클로드의 식사는 항상 늦었다. 혹여 남들에게 불편한 점은 없는지 세심하게 살펴야 직성이 풀리는 다정한 성품 탓이었다. 그런데 그가 평소처럼 수프에 후추를 치려던 찰나.
“어? 후추가 어디 갔지?”
아까까지만 해도 놓여 있던 후추통이 보이질 않았다. 나머지 세 사람 역시 동조했다.
“저, 저도 못 찾아서 그냥 먹고 있었는데…….”
“으응? 앗, 나도 깜빡했다! 왠지 밍밍하더라니!”
“뭐야. 도대체 누가 병을-”
그때, 한쪽에서 타이밍에 맞지 않은 태평한 소리가 들렸다.
─착착.
후추를 치는 소리였다.
“으응?”
오드리가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야, 너…….”
한스는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테이블 위의 후추통이란 후추통이 몽땅 오드리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너 그거 다 뿌리면 죽어!’
범인이야 뻔했다. 설마 도토리가 미쳤다고 저런 짓을 벌였을 리는 없고. 오드리 앞에 놓인 후추통을 가져가면 당장이라도 물 것처럼 노려보는 프리트 공작이겠지.
“후추 쓰실 분?”
오드리가 발랄하게 물었다.
그녀의 수프에 적당량의 후추가 뿌려진 것을 확인한 데릭은 그제야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이제 후추통을 누가 가져가든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도돌이가 수프에 후추를 다 쳤으니. 그거면 되었다.
데릭의 유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햐, 오랜만에 칠면조를-”
─휙.
“……먹으려 했는데 어디 갔지?”
아놀드는 황망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먹기 좋게 익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칠면조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탓이었다.
때마침 근처에서 범인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기 전에 어서 먹도록 하지.”
“네.”
“…….”
아니나 다를까. 프리트 공작이 칠면조 접시를 냉큼 도토리 앞으로 갖다 바친 것이었다.
‘칠면조는 내가 더 좋아하는데!’
아놀드는 오라비 체면이 있어서 차마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앓았다.
그 사정을 뻔히 아는 클로드가 부드럽게 웃었다.
“형님. 칠면조 요리가 또 나올 겁니다.”
“뭐어? 정말?”
“예. 형님께서 좋아하시는 음식이잖아요. 넉넉히 준비하라 일러두었습니다.”
“역시! 클로드밖에 없다니까!”
“……그런가요.”
방금까지만 해도 전전긍긍하던 아놀드가 그제야 숨을 돌렸다.
그러는 동안, 또 다른 피해자가 속출했다.
“뭐야, 형이 내 냅킨 가져갔어?”
“무슨 소리야?”
“이상하네. 냅킨에 발이 달렸을 리도 없고.”
한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바로 맞은편, 프리트 공작의 손에 들린 두툼한 냅킨에 시선이 멈췄다.
“냅킨은 많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얼마든지 쓰도록 해.”
“네. 데릭도 식사하세요.”
“아니다. 그대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걸.”
“…….”
아무래도 테이블 위의 냅킨이란 냅킨은 저 남자가 전부 가져간 듯했다.
‘쟤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한스가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아니. 그렇다고 저렇게 하나하나 챙겨 주는 남자도 문제다. 덕분에 아놀드는 칠면조에 손도 못 댔으며, 한스는 3살짜리 아이처럼 입가를 더럽히지 않았는가.
“이것도 먹어 봐라. 아주 맛이 좋다.”
“네에.”
“…….”
두 사람 사이가 언제 저렇게 편해진 건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케벨슨 백작가에 머물 때 친해진 건가?’
한스는 어쩐지 속이 부글거렸다. 맞은편의 두 사람에게로 자꾸만 눈길이 갔다. 도토리와 더 오래 알고 지낸 것은 자신이라는 이상한 경쟁심마저 똬리를 트는 듯했다.
그때, 아놀드가 불쑥 클로드를 향해 물었다.
“참 참. 아이는 언제쯤 낳을 예정이야? 몇이나 낳을 건데? 응응?”
“……형님.”
“궁금해서 그러지! 도토리, 너는 안 그래? 나만 궁금해?”
“네? 아니…… 뭐.”
오드리는 어색한 얼굴로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질문을 받은 클로드 역시 헛기침을 하며 괜히 딴청을 피웠다. 그러자 얌전히 앉아 있던 아네트가 대신 대답했다.
“직접 나, 낳을 건 아니고요, 입양하기로 했어요!”
“입양?”
“네. 너무 예쁜 아이들도 많고, 저도 아이를 낳는 게 무서워서…….”
의외란 시선을 마주한 아네트가 괜스레 죄인처럼 움츠러들었다. 클로드는 그런 그녀를 감싸 주었다.
“부모님께도 말씀드렸어요. 저희 뜻을 존중하겠다고 하시던걸요.”
“뭐야, 나만 몰랐던 거야? 나는 가족 아니야?”
“한스 네가 형한테 이렇게나 관심이 있었다니, 아주 기쁜데?”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한창 대화가 무르익었을 때. 프리트 공작이 오드리에게 은밀한 신호를 보내왔다.
─꽈악, 톡 톡.
“……?”
테이블 밑으로 맞잡은 손에 한 번 힘을 주었다가, 손등을 가볍게 두 번 두드리는 것이었다.
‘뭐지?’
오드리가 영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그는 손등 위로 글씨를 썼다.
‘숫자 이?’
마침내 데릭이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홍빛으로 달아오른 얼굴이 퍽 쑥스러운 기색이었다.
‘두 명.’
‘……?’
‘적어도 두 명이다.’
‘……!’
뭐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건 프리트 공작의 자녀 계획임이 분명하다.
덩달아 새빨갛게 달아오른 오드리가 황급히 그의 손을 뿌리쳤다.
‘미쳤나 봐!’
식사하다 말고 자녀 계획을 세우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엄밀히 말하자면 오드리는 체험판 애인 아니냔 말이다!
‘누, 누, 누가 결혼해 준대?’
괜히 민망해진 손이 빨라졌다.
옆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으나, 차마 고개를 돌릴 용기는 없었다. 오드리는 애꿎은 칠면조를 실오라기 굵기로 산산조각 냈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 * *
점심 식사가 끝난 후.
데릭은 괜히 도돌이의 근처에서 미적거렸다. 오늘은 이만 돌아서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벌써 헤어져야 한다니!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어.’
그런데 야속한 도돌이는 함께 아쉬움을 토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타박했다.
“그, 그렇게 티를 내면 어떡해요!”
“무엇을?”
“아까 식사할 때요. 막, 칠면조도 가져다주고, 냅킨도 주고…….”
아아, 어쩌면 이리도 야속할 수 있단 말인가?
내심 서운했던 데릭은 답지 않게 툴툴거렸다.
“원래 사랑은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
험상궂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다소 뻔뻔한 대꾸가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줄도 모르고.
그때, 마침 포털 하나가 생성되었다.
“짜잔! 손짓 한 번에 포털을 만들었지요. 엣헴!”
공작성으로 향하는 포털이었다. 아쉽지만 더 이상 미적거릴 핑계 따윈 없었다.
“……이만, 가 보겠다.”
“내일 봬요.”
“…….”
데릭은 포털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몇 번이고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영영 못 만날 사이인 것처럼.
그러나 아놀드는 데릭이 한 번 더 돌아보기 전에 얼른 포털을 닫아 버렸다.
‘흥.’
클로드야 나이가 찼다지만, 도토리는 아직 어리지 않은가.
‘어딜 홀랑 데려가려고!’
식사 시간 내내 호시탐탐 제 동생을 노리던 시선을 모를 줄 알고?
“오라버니, 우리도 이만 돌아가요.”
“그래. 응응. 그래야지.”
아놀드는 재빨리 포털 하나를 더 만들었다. 이번엔 케벨슨 백작가로 향하는 것이었다.
“클로드, 한스, 그리고 부인! 다음에 시간 될 때 또 봐요! 안녕!”
“형-”
─슈우욱.
아놀드는 클로드의 말이 끝맺기도 전에 빛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졌다.
졸지에 덩그러니 남은 오드리가 마지막 인사를 대신 건넸다.
“다,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그래. 참, 오드리.”
“네?”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정말로.”
클로드가 환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프리트 공작과 오드리의 관계를 오해한 눈치였다.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오드리 역시 마주 웃어 주었다.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다는 것도,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체험판 연애나 하고 있다는 말도 굳이 꺼낼 필요가 없을 테니까.
─슈우욱.
오드리도 아놀드를 따라 포털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짜잔!”
“엄마야!”
사람 크기만 한 봉제 인형이 그녀를 향해 와다닥 달려들었다. 자세히 보니 오드리가 어린 시절 주로 가지고 놀던 인형 ‘덩덩이’였다.
“……오라버니.”
“안뇽? 나는 덩덩이야!”
“마법 능력을 이런 데 쓰는 사람이 어딨어요?”
“오라비가 이젠 이런 것도 할 수 있다고. 어때? 마탑주 태가 좀 나는 것 같아? 응응?”
“…….”
오드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거대 인형으로 변신한 오라버니를 꼬옥 안아 주었다.
“왜 진작 말 안 했어요?”
이 미련한 오라버니는 늘 모든 걸 혼자 끌어안으려 해서 문제다. 심지어는 차기 마탑주가 된다는 엄청나게 중요한 결정도 혼자-
“어? 그, 그게, 내가 일부러 덩덩이 다리를 잘랐던 건 절대 아니고!”
“……네?”
“이크!”
오드리가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십삼 년 전에 덩덩이 다리를 자른 범인이 오라버니였어요?”
“그, 그게.”
“오라버니!”
오라비를 똑 닮은 연두색 눈동자에 배신감이 넘실거렸다.
애착 인형 ‘덩덩이’의 다리가 덜렁이는 걸 발견한 날, 오드리는 까무러칠 정도로 오열하지 않았던가.
‘그게 오라버니 소행이었다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던 시기라 상실감은 더 컸다. 7살의 오드리에겐 평생을 함께한 어머니와 애착 인형을 동시에 잃은 비극 아니었던가.
“다 이 오라비 잘못이야. 오라비가 멍청한 탓이었어.”
“…….”
“오라비는 너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착각- 합! 아니, 그게.”
그러나 애써 상황을 수습하려던 아놀드는 더 큰 폭탄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리 지나간 일이라도 그렇지. 7살이나 많은 오라비 주제에, 어떻게 어린 동생을 미워했다는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일부러 하루에 세 시간밖에 안 놀아 줬다는 걸 알면 실망할 거야.’
아놀드는 충격으로 굳은 동생 앞에서 쩔쩔맸다.
“그게, 어머니는 너를 낳은 뒤로 계속 아프셨으니까……. 그래서 오라비는 전부 너 때문이라고 착각한 거지! 그땐 오라비도 너무 어렸잖아. 응응.”
“…….”
“무, 물론 지금은 당연히 네 탓이 아니라는 걸 알아! 어머니가 그렇게 된 데에는 내 책임도 있으니까.”
“오라버니의 책임이요?”
오드리는 이게 다 무슨 소리냐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한참이나 우물쭈물하던 아놀드가 조용히 운을 떼었다.
“그야…….”
“네.”
“우리 둘 다 마력 보유자니까.”
“……!”
오드리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오라버니가 어떻게?’
가장 숨기고 싶던 사람에게 마력 보유자임을 들켜 버렸다.
어쩐지 이대로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아놀드는 진작부터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던 것이다.
* * *
오드리는 날이 밝자마자 공작성으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마차 소음 사이로 어제의 일이 악몽처럼 되풀이되었다.
‘어머니의 몸은 이미 나를 낳는 순간부터 망가지고 있었어. 마법사가 아니셨거든.’
‘어머니의 몸은 우리의 마력을 견디지 못했던 거야.’
‘마력이 없는 어머니는 생명력을 써서 우릴 키워 낼 수밖에 없었어.’
결국, 오드리와 아놀드 두 남매는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난 아이들이란 뜻 아닌가.
아놀드는 애써 오드리를 다독였다. 어머니라면 그 사실을 미리 알았어도 자식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을 분이라고, 그의 기억 속 어머니라면 분명 그러셨을 거라고.
하지만 오드리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도 보고 싶지 않았다.
“……도돌이?”
꼭두새벽부터 공작성 입구를 서성이던 데릭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예상보다 이른 만남이 기꺼운 까닭만은 아니었다.
“흑.”
“……!”
도돌이가 그를 보자마자 당장 눈물을 쏟아 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마주한 데릭은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턱선을 따라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돌덩이처럼 데릭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는 성큼성큼 도돌이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지 물어야겠다는 생각도, 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들썩이며 안쓰럽게 울고 있는 도돌이를 안아 주어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데, 데릭?”
“괜찮다.”
“……흑.”
그의 품에 쏙 안긴 도돌이의 몸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작았다.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안긴 듯 만 듯 허전하기도 했다. 데릭은 엉거주춤 허리를 굽힌 채로 도돌이를 가둔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눈치도 없는 심장은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요란스레 쿵쿵댔다.
“갈 곳이 있다.”
“흐……네?”
“원래는 나중에 데려가려고 했는, 아니, 아니다. 어쨌든.”
“…….”
“그곳에 가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 거다.”
단단한 돌처럼 오드리를 감싸 주던 몸이 드디어 떨어져 나갔다. 데릭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말랑한 뺨을 흠뻑 적신 눈물을 부지런히 닦아 주었다. 주머니 속에 손수건이 있다는 건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한편, 오드리는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에 코만 훌쩍거렸다. 눈물을 닦아 주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단 사실도 지금에서야 눈치챘다.
‘막, 막 끌어안을 때는 언제고…….’
참으로 웃기는 남자 아닌가. 깃털처럼 조심스럽다가도, 이상한 순간에 파리지옥 같은 박력이 흘러넘친다. 그런데도 그 모습이 싫지 않으니 문제였다.
“잠시.”
“……!”
이제는 하다 하다 그녀의 콧물까지 닦아 줄 기세였다.
‘이, 이건 아니야!’
다행히 위험을 감지한 오드리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이건 인간으로서 존엄성이 달린 문제 아니던가!
“이제 괜찮아요.”
“하지만.”
“저, 정말 괜찮아요!”
“…….”
데릭은 단호한 거절이 영 서운한 눈치였지만, 오드리에겐 그의 기분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어떡하지?’
물러서고 보니 그의 가슴팍이 온통 눈물범벅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특히, 축축한 동그라미 네 개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누가 봐도 눈물과 콧물 아닌가.
“…….”
오드리는 그가 발견하기 전에 슬쩍 닦아 보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
─움찔.
“……!”
여태 잠잠하던 가슴 근육이 눈에 띄게 불끈거렸다. 데릭은 곤란한 얼굴로 오드리의 손을 낚아챘다.
“아, 그게, 눈물이-”
“거긴 안 된다.”
“네?”
“……그런 게 있다.”
불친절한 설명에는 아주 많은 게 생략되어 있었다.
“어서, 가지.”
데릭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앞장섰다. 그러나 이미 온몸이 불덩이였다. 도돌이를 끌어안은 팔과 가슴팍, 하물며 맞잡은 손바닥까지. 그의 걸음걸이는 오늘따라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 * *
황녀의 침실 밖에선 이른 아침부터 소란이 일었다.
“당장 문을 열어라.”
“폐하, 황녀 저하께서는 아직-”
“당장 열래도!”
“예, 예에!”
황제의 불호령을 이기지 못한 시종 하나가 곧 죽을 듯한 얼굴로 침실 문을 열었다. 다 큰 딸의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황제의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하.”
황제는 침대 주위로 정신없이 널브러진 옷가지를 발견하고선 이마를 짚었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신문 뭉텅이가 엉망으로 구겨졌다.
침대 근처로 다가선 황제는 잠이 든 딸의 얼굴 위로 신문을 내던졌다.
“황녀, 지금 제정신인가?”
“……폐, 폐하?”
벌떡 일어난 다이안이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상의를 헐벗은 지미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아뿔싸.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 아침 자로 나갈 신문 기사다. 황녀도 이 정도 각오는 했겠지?”
“……!”
≪황녀의 은밀한 일탈, 매일 밤 황녀의 침실을 드나드는 남성의 정체는?≫
기사를 확인한 다이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폐, 폐하, 아니, 아바마마!”
“감히 황성에 짐의 허락도 없이 남자를 들여?”
“그게, 상처가 나을 때까지만-”
“여봐라! 당장 이놈을 황성 밖으로 내쫓아라!”
“폐하!”
완전 무장한 기사 둘이 들어와 잠든 지미를 마구잡이로 끌어냈다. 막 잠에서 깬 지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발버둥을 쳤다.
“다이안? 다이안!”
“지미! 아바마마, 안 됩니다!”
“얼른 치워라!”
“폐하!”
다이안이 황제의 발치에 매달려 빌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제는 싸늘한 얼굴로 내려다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짐이 황녀를 너무 풀어줘서 이리도 방종하게 구는 거겠지.”
“폐하!”
“앞으로 한 달간은 침실 밖으로 나올 생각도 말아라!”
“……!”
“혹, 복도라도 돌아다니는 날엔 먼 대륙의 후처로라도 시집을 보내고 말 것이다. 알겠느냐?”
“폐, 폐하…….”
황제가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그 뒤로 거대한 침실 문이 굳게 닫혔다.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덩그러니 남은 황녀는 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정신없이 울었다.
‘분명 철저하게 숨겼는데……!’
황녀의 성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는 황제, 그리고 폐쇄적인 황성. 도대체 어떻게 말이 퍼져 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익숙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저하, 그간 감사했습니다.’
며칠 전 그만둔 시녀. 그 아이는 유모의 딸이기도 했다.
“……!”
10년을 넘게 시녀 생활을 했지만, 다이안은 이유조차 묻지 않고 그냥 내보냈다. 딱 그 정도의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 아이야. 그 아이가 분명해!’
범인을 확신한 그녀의 얼굴이 악에 받쳤다.
그 아이는 그녀 덕분에 황성에서 맛있는 것만 먹고, 좋은 옷을 입고, 편안한 생활을 했다. 그런데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다니!
다이안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나마 기사가 나기 전에 황제의 손에 들어간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다이안의 생각과 달리, 기사는 날이 밝자마자 전국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지미의 초상화와 함께.
이 모든 것이 공개 재판에 대한 책임을 피하고 백성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황제의 계책이었다.
* * *
데릭은 사랑하는 도돌이와 손을 맞잡은 채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등 뒤로는 널따란 평원이 펼쳐지고, 거대한 직사각형 분수대에서는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옆엔 ‘ㄷ’자 모양의 대저택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외부로 공개되지 않은 별장이라 그렇다. 이곳 외에도 몇 군데 더 있지.”
“……아.”
“가끔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들르곤 한다.”
역시 공작가는 달랐다. 남들은 메인 저택으로 쓸 법한 곳을 1년에 한두 번 방문하는 별장으로 쓰다니.
“이쪽으로 가지.”
데릭은 나무로 둘러싸인 넓은 공터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곳엔 급하게 운반된 듯한 티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과녁판이 준비되어 있었다.
“활을 쏘아 본 적 있나?”
“음, 어렸을 때 몇 번이요.”
“다행이군. 기분전환엔 활쏘기만큼 좋은 게 없지.”
“…….”
“모든 고민거리가 화살 깃을 타고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데릭은 시범을 보이듯 그의 키만 한 장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화살을 걸고 활시위를 당겼다.
─슉.
눈앞에 있던 화살촉이 멀리 떨어진 과녁판의 중앙에 명중할 때까진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데릭이 흡족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대는 이걸 쓰면 되겠군.”
“…….”
어느새 오드리의 손엔 그의 것보다 짧은 활 하나와 화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어떻게 했더라?’
오드리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대충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활시위를 놓았을 때.
─톡.
“…….”
화살은 볼품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고작 한 발짝 거리였다.
힐끔 눈치를 본 오드리가 두 번째 화살을 주워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톡.
“왜, 왜 이러지?”
오드리의 화살은 앞으로 뻗어나갈 생각을 못 했다.
“다시 한번 해 보도록.”
“…….”
데릭은 ‘도돌이의 기분전환’이라는 원래의 목표도 잊은 채,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자세를 살폈다. 마치 부하를 대하는 눈빛이었다.
“활과 활시위를 당기는 힘이 같아야 한다.”
“이, 이렇게요?”
“몸은 더 옆으로 틀고.”
“더는 안 될 것 같은데…….”
팔을 부들부들 떨던 오드리가 활을 내려놓았다.
“헥, 아무래도 저는 안 될 것-”
“내가 자세를 잡아 주겠다.”
“아니, 그럴 필요는-”
데릭이 거절할 새도 없이 그녀의 뒤로 바짝 다가섰다. 그러더니 백허그를 하듯 몸을 밀착해 왔다.
“왼손에 너무 힘을 주면 나중에 줄에 쓸려 다칠 수도 있다.”
“……!”
그의 왼손이 오드리의 왼쪽 전완근을 부드럽게 감쌌다.
─움찔.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란 걸 아는데도, 왠지 모르게 힘이 쭉 빠져나갔다.
“지금은 너무 힘을 풀었다. 다시 밀어 보도록.”
“……네.”
오드리는 등 뒤에 닿는 단단한 몸을 의식하지 않으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뜨겁게 전해지는 온기에 얼굴이 절로 새빨개졌다.
‘내가 미쳤나 봐…….’
그러나 데릭은 여느 때와 달리 사심 없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자세를 고쳐 주었다. 눈앞에 있는 게 오드리란 것도 잠시 잊은 눈치였다.
“왼손 검지로 화살을 감싸면 멀리 나가지 못한다.”
“……네.”
“검지도 화살 밑으로 내려야 해.”
“앗!”
이번엔 그의 손가락이 오드리의 검지를 길게 훑었다. 깜짝 놀란 오드리는 그대로 활시위를 놓고 말았다.
─톡.
“그, 그게!”
“괜찮다. 다시 해 보면 돼.”
“아, 아니요!”
“내가 활시위를 함께 잡아 주겠다.”
데릭은 활시위를 당겨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본격적으로 과녁을 조준하려는 듯 볼까지 맞붙여 왔다.
“……!”
오드리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거리에 바로 그의 입술이 있는 까닭이다.
‘어, 어떡하지?’
고개를 잘못 돌리기라도 하는 날엔 두 입술이 스치는 불상사가 일어날 것 같았다.
─두근두근.
과녁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드리의 관심사는 그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속도뿐이었다.
“지금이다.”
“……!”
─슝!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온전히 데릭의 손에 의존한 화살이 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중앙을 명중하진 못했지만, 과녁 안에 정확히 들어갔다.
“와!”
오드리는 그의 숨결을 의식하던 것도 잊고 잔뜩 신이 났다.
“제 화살이 과녁에 박혔어요!”
“그래.”
“과녁판이 저렇게나 먼데!”
“……후. 그래.”
“우와! 와!”
그러나 오드리가 방방 뛸수록 데릭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이게 다 데릭 덕분-”
“인제 그만-”
오드리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완벽히 마주쳤다.
“……!”
“……!”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마주친 게 눈뿐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두 입술 사이의 거리는 고작 손가락 한 마디 남짓.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뒤섞인 숨결이 유난히도 뜨거웠다.
저 귀여운 입술을 집어삼키는 덴 1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꽈악.
데릭은 활이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은, 아니다.’
단호하게 물러나는 행동과는 달리 그의 얼굴엔 감출 수 없는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이곳에도 서재가 있다.”
“……네?”
어쩐지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던 데릭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가지.”
“…….”
오드리가 몸을 돌린 순간, 등 뒤로 무언가 우드득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응?’
단단한 나무 조각 같은 것을 맨손으로 두 동강 내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녀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데릭이 습관처럼 손을 맞잡아 왔다.
“분명 마음에 들 것이다.”
무뚝뚝한 얼굴도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사이를 그러잡는 힘이 어쩐지 평소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사람 키만 한 장궁도 한 손으로 부러뜨릴 수 있을 것처럼.
* * *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다.”
“네.”
데릭은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탈주를 시도했다. 오드리로선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프리트 공작은 오늘따라 유난히 변덕스러웠다. 서재에 도착하자마자 창문이란 창문을 활짝 연 것으로도 모자라,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찬바람을 맞으며 잔뜩 찌푸린 얼굴은 분명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오드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가려고 하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하지 뭔가.
그러더니 결국 서재를 박차고 나가기에 이르렀다.
‘배탈이라도 나셨나?’
오드리는 멀찍이 떨어진 빈자리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생각해 보니 저것도 이상했다. 평소에는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붙고 싶어서 안달이더니…….
바로 옆에 놓인 의자를 굳이 저 멀리까지 끌고 가던 모습이 떠오르자, 왠지 모를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흥.’
부루퉁해진 오드리는 죄 없는 책장만 부지런히 넘겼다.
내용은 진작부터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까 전의 분위기를 의식하는 건 그녀밖에 없는 듯해서 다소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했다.
‘저렇게까지 멀리 떨어져 앉을 건 뭐람?’
괜히 혼자만 바보가 된 기분이다.
째깍 째깍 째깍.
그러는 사이 벌써 10분이 지났다. 잠시 바람을 쐰다던 데릭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드리는 괜히 창가 근처를 기웃거리며 그를 찾다가 다시 의자로 돌아왔다.
‘이렇게 늦지는 않았는데…….’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새벽녘에 저택을 뛰쳐나온 까닭이다.
“하암.”
결국, 그녀는 무릎 위에 책을 대충 엎어 놓은 채 병든 닭처럼 졸기 시작했다.
데릭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20분이나 지난 뒤였다.
“……도돌이?”
“…….”
용광로처럼 들끓는 마음을 도무지 진정시킬 수가 없어서 찬물로 샤워를 하고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 도돌이가 도롱도롱 잠들어 있지 뭔가.
‘어찌한다?’
지금 시각은 오후 5시.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잠든 그녀를 케벨슨 백작가로 데려다주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대로 헤어지기엔 너무도 아쉬웠다.
“…….”
데릭은 난감한 듯 물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다 문득, 도돌이의 무릎에 엎어진 책이 눈에 들어왔다.
≪별의 역사≫
그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휘었다. 적당한 핑곗거리라도 찾은 사람처럼.
데릭은 일단 마도구로 포털을 열었다. 그리고는 잠든 도돌이의 귓가에 허락을 구하듯 작게 속삭였다.
“잠시, 실례하겠다.”
“…….”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도돌이를 의자째로 번쩍 든 그가 포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최대한 흔들림 없이 편하도록 신경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똑.
그러는 사이, 그의 머리카락 끝에 매달려있던 물방울이 그녀의 옷 위로 떨어져 내렸다. 오드리의 옷에 그가 만들어 낸 얼룩들이 짙게 번져 나갔다.
* * *
“으응? 헛!”
막 잠에서 깬 오드리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앞에 온통 별 밭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수만 개의 별들이 당장이라도 그녀의 얼굴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깼군.”
“여, 여기가 어디예요?”
“근처 언덕이다.”
“…….”
“그대에게도 보여 주고 싶어서.”
─스르륵.
몸을 일으키자 오드리를 뒤덮고 있던 것들이 차례로 흘러내렸다. 무려 다섯 장의 담요와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겉옷이었다.
데릭은 레몬 조각이 담긴 찻잔에 펄펄 끓는 물을 들이부었다.
“레몬차다.”
“감사합니다.”
“……뜨거우니 조심해라.”
요령 없는 남자는 도돌이가 언제 깨어날지 몰라 몇 번이고 물을 비운 뒤 새로 끓여 냈다. 그 덕에 주전자의 밑판은 새까맣게 타 있었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스윽.
데릭은 불에 탄 주전자를 등 뒤로 슬쩍 감추었다.
“그런데 지금 몇 시예요?”
“여덟 시 반이다.”
“버, 벌써요?”
“걱정하지 마라. 늦지 않게 데려다줄 테니.”
“…….”
오드리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이상하게도 프리트 공작과 함께 있으면 다른 곳에 한눈팔 겨를이 없다. 밤새 그녀를 괴롭히던 고민거리들도 사실은 별거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잠든 오드리를 의자째로 달랑 들어 언덕으로 데려올 생각을 하는 것부터 그렇다. 왠지 모르게 어설프면서도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동들이 조금은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펠리오스의 보안관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
“그때 이후로 더 이상의 실종 사건은 없다는군.”
데릭은 바로 옆에 놓인 오드리의 손을 쉬이 잡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어찌한다.’
평소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잡고 싶은 마음 반. 잡았다간 정말 큰일 날 것 같은 마음 반.
그러자 오드리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아 왔다.
“……!”
“다행이네요.”
마침 체험판 연인이라는 좋은 핑계도 있지 않은가. 데릭은 도돌이가 이렇게 먼저 손을 잡아 올 때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동시에 자꾸만 갈증이 일었다. 손을 잡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이 들끓었다.
이런 그를 부채질하듯 익숙한 구절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첫 키스는 반드시 별이 쏟아지는 언덕에서……
‘젠장!’
참다못한 데릭이 예고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더 늦기 전에 데려다주겠다.”
“네? 벌써요?”
“아홉 시가 다 되었다.”
“하지만.”
“어서.”
데릭의 속도 모르는 도돌이는 늑장을 부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애간장은 시시각각 닳아 없어지고 있었다.
“…….”
오드리는 포털 앞에 서서 망설였다. 왠지 이대로 돌아가긴 아쉬웠다.
“그냥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어서 들어가지 않고-”
비탈길에 선 오드리가 막 등을 돌린 순간, 한 발짝 아래에 있던 그와 절묘하게 눈이 마주쳤다.
“……!”
“……!”
아까 낮의 활터에서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데릭은 낮에 그랬던 것처럼 먼저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시선 끝엔 도돌이의 입술이 있었다.
긴장한 오드리가 슬쩍 입술을 고쳐 물자, 그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 어떡하지?’
오드리는 사자 앞에 놓인 쥐가 된 기분이었다. 속눈썹 아래 감춰진 그의 눈동자엔 미처 숨기지 못한 욕망이 넘실거렸다.
뒤로 물러나기에도 늦은 상황.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슬쩍 눈을 감았다.
“…….”
그러나 곧바로 후회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더 긴장된 것이다.
‘괜찮다는 건가.’
한참이나 미동이 없던 데릭이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닿은 것은 오뚝한 코끝이었다.
“……!”
눈을 꼭 감은 오드리는 그 작은 자극에도 몸을 움찔 떨었다.
데릭은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듯 코끝을 부드럽게 비볐다.
─톡.
‘싫다면 지금이라도 무르면 된다.’
그러나 이미 석상이 된 오드리는 미동이 없었다. 내심 긴장했던 데릭도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스윽.
맞닿아 있던 코끝이 옆으로 살짝 빗겨 난 순간.
“……!”
마침내 데릭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맞닿았다.
그러나 곧 정중하고 조심스럽던 입맞춤에 열기가 실렸다. 데릭은 장난스레 도돌이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윗입술을 집어삼키기도 했다. 언젠가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숨을 독차지한다는 건 상상보다도 훨씬 아찔한 일이었다. 훤히 드러난 목을 타고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아났다.
“읍, 잠깐!”
오드리가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도 데릭은 정신없이 돌진했다. 덕분에 오드리의 통통한 입술은 마를 새가 없었다.
도저히 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그를 미치게 했다.
‘부족하다, 부족해.’
이렇게나 도돌이를 몰아붙이는데도 대체 뭐가 부족한 걸까? 그 이상을 모르는 모태 솔로는 끙끙대며 애꿎은 도돌이의 입술만 고쳐 물었다.
오드리는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은 채 버텼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는지, 점점 숨이 가빠 왔다.
그런데 이 못된 남자는 그나마도 전부 훔쳐 가 버린다. 아니, 오히려 더 내놓으라고 달라붙는다.
─퉁.
어느새 오드리의 등이 나무에 닿았다.
데릭은 기다렸다는 듯이 더욱 열심히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녀의 고개는 점점 하늘을 향해 치켜올라가고, 반대로 그의 고개는 바닥을 향해 맹렬히 파고들었다.
데릭은 온몸에 불덩이가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손끝이 찌릿하며 당장이라도 도돌이와 더욱 가까이 맞붙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짐승이 아니다.’
데릭은 피어나는 음심을 억누르며 도돌이의 양손에 깍지를 꼈다. 그러다 참지 못할 정도가 되면, 무슨 신호라도 보내듯 더욱 강하게 맞잡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두 모태 솔로는 키스를 언제 끝내야 하는지 몰랐다.
입술이 떨어진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수, 숨이!”
“하…….”
오드리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사이에도 데릭은 그녀의 옆통수며 머리칼에 계속 입을 맞췄다. 그러다 애원하듯 속삭였다.
“……통금이, 몇 시라고 했지?”
알면서도 되묻는 얼굴은 비를 맞고 찾아온 그 날처럼 애처로웠다. 방금까지 된통 당해 놓고도 오드리는 순간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오, 오늘은 조금 늦어도-”
“잘되었군.”
“……!”
그러나 속았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법. 데릭이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향해 맹렬히 파고들었다.
지금 시각은 이미 밤 10시였다.
* * *
데릭은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눈을 떴다.
실제 수면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보약이라도 챙겨 먹은 사람처럼 온몸에 힘이 솟았다.
‘새벽 세 시.’
시계를 보다가도 웃음이 샜다. 들썩이는 입꼬리가 어제 첫 키스를 한 몸이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데릭은 아직도 화끈거리는 입술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그래도 쓸모는 있었군.’
살다 살다 누군가와 입을 맞추게 될 줄이야. 무려 25년간 순결하게 간직해 온 입술이 드디어 제 주인을 만났다.
‘이럴 때가 아니지.’
데릭은 재빨리 옷을 갖춰 입었다.
그런데 침실을 나가기 전. 어제까지만 해도 있는 줄도 몰랐던 향유 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슬쩍 입술에 향유를 발랐다.
‘기왕이면 부드러운 게 좋겠지.’
이윽고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온실이었다. 그는 신중한 손길로 가장 예쁜 꽃을 골라 들었다. 도돌이의 머리카락과 꼭 닮은 작약이었다.
* * *
오전 9시 정각.
데릭은 다시 한번 회중시계를 들어 보았다.
‘이상하군.’
7시가 지나고, 8시가 지나고, 9시가 되었는데도 도돌이가 오지 않는다.
“각하. 케벨슨 백작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도돌이가?”
“예. 개인적인 사유로 며칠간 결근이 불가피하다고 하십니다.”
“……!”
데릭은 세상의 종말을 마주한 얼굴이 되었다.
“그럴 수는, 그럴 수는 없다…….”
“어라. 근데 입술은 왜 그러십니까? 오늘따라 번들번들하고 아주 퉁퉁-”
“당장 도돌이에게 가 봐야겠다.”
“예? 각하!”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혹, 기분 상할 일이라도 있었나?’
데릭은 자신의 잘못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그런데 죄목이 한둘이 아니었다. 숨을 헐떡이는 도돌이에게 짐승처럼 돌진한 것은 물론이요, 마지막이라는 사탕발림으로 무려 2시간이나 더 괴롭히지 않았던가. 무너지려는 도돌이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집요하게 파고들기도 했다.
그뿐인가? 키스가 끝난 뒤엔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녀를 와락 끌어안아 버리기까지!
‘그건-’
데릭은 목을 옥죄는 크라바트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살살 달래고 구슬려도 모자랄 판에 이성을 잃고 달려들다니……. 겁먹은 도돌이가 괜히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하지만, 하지만 그건 불가항력이었다.’
아니, 어쩌면 도돌이는 그와의 키스 자체가 별로였던 건지도 모른다. 도무지 끝을 모르고 입안을 멋대로 휘저어 대는데 그럴 만도 하지. 참다못한 도돌이가 그의 가슴팍을 통통 내려쳤을 때 멈췄어야 했다.
‘……미리 공부나 좀 해 둘 것을.’
데릭은 절망으로 가득 찬 얼굴을 힘없이 쓸어내렸다.
“하아.”
도돌이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 애원이라도 할까?
그는 학습능력이 뛰어난 편 아니던가. 많이 하다 보면 자연스레 실력도 늘 것이다. 그러니 더 자주, 오래, 많이 입을 맞추자고 하고 싶었다. 데릭이 바란 건 하룻밤의 불장난 같은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에도 그의 머릿속엔 도돌이의 입술만 둥둥 떠다녔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드랍고 말랑한 감촉, 그 사이로 새어 나오던 뜨거운 숨결…….
‘젠장!’
아무래도 그가 미친 게 분명했다.
* * *
다이안 황녀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날이 밝으면 커튼을 치고 창문을 열던 것도 멈췄다. 근신이라 하기엔 호사스러울 정도로 넓은 방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어두컴컴했다.
‘대체 왜?’
황녀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을 미련스레 떠올려보았다.
완벽한 권력, 믿을 만한 측근, 프리트 공작, 그리고…… 지미.
이미 가진 것들이 훨씬 많은데도, 끝내 손에 넣지 못한 것들이 마음에 걸렸다.
‘제때 결혼만 했어도!’
황녀의 원망은 자연히 프리트 공작을 향했다.
그 융통성 없는 남자가 눈치껏 청혼만 했어도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황녀는 황실의 일원으로서 완벽히 자리 잡을 수 있었겠지. 뒤늦게 찾은 진짜 사랑을 허무하게 잃는 일 역시 없었을 것이다.
한창 프리트 공작을 원망하고 있던 찰나.
─똑, 똑.
“……!”
남쪽 창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사람 손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였다.
다이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잘못 들었나?’
남쪽엔 깎아지른 성벽뿐. 그러니 저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귀신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이안. 거기 있어요?”
“……지미?”
“쉬이. 나 좀 도와줘요.”
“지미!”
왈칵 눈물이 솟았다. 황녀는 어떻게 이곳까지 올라왔는지 의심하는 것도 잊은 채, 당장 창문을 열었다.
다시는 못 볼 거라 여겼던 남자가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미…….”
“미안해요. 보고 싶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다. 잘 왔어.”
두 사람은 서로를 강하게 부둥켜안았다.
그러다 천천히 몸을 뗀 지미가 어두컴컴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방이 왜 이리 어둡습니까?”
“…….”
“다이안?”
한참을 머뭇대던 다이안이 우울하게 읊조렸다.
“아바마마께서 나를 가두셨다.”
“예?”
“앞으로 한 달간은 꼼짝없이 갇힌 신세야. 한 발짝이라도 나왔다간 멀리 시집 보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셨거든.”
“……다이안.”
“아무래도 나는 아바마마께 안 아픈 손가락인 듯하다.”
황녀가 자조했다.
지미는 자못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의 양쪽 어깨를 부여잡았다.
“다이안, 당신은 절대로 이럴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
“누구보다 소중하고,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 존재예요.”
“내가?”
“당신이 가족들에게 멸시당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 마음이 너무 괴로워요.”
한참이나 방 안을 서성이던 지미가 문득 다이안과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엔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다이안, 제가 당신을 믿어도 됩니까?”
“당연한 소릴.”
“그럼 당신은요? 저를 믿습니까?”
“내 곁에 남은 건 너뿐이다.”
지미는 감동한 얼굴로 그녀의 목에 무언가를 걸어 주었다.
“자, 받아요.”
풀피리 같은 것이 달린 목걸이였다.
“이게 뭐지?”
“언제든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면 그것으로 신호를 주세요.”
“그게 무슨…….”
“저와 제 친구들에게만 들리는 소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제가 당신을 데리러 오겠습니다.”
다이안은 멍하니 풀피리를 만지작거렸다.
‘황녀가 황성을 떠난다니.’
하루 전까지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못 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실천하는 건 별개겠지만.
그래도 다이안을 짐짝처럼 여기던 이들이 그녀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녀의 빈자리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으면 좋겠다.
─똑똑.
“……!”
“황녀 저하, 황태자비 부부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갑작스러운 노크와 함께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황녀는 잔뜩 당황한 얼굴로 지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마지막 입맞춤을 건넸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지미-”
“기다릴게요.”
“잠깐, 또 언제-”
그리고 왔던 것과 똑같이 창문 너머로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
다이안은 커튼이 휘날리는 남쪽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황녀의 침실에서 극소수의 사람들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동시에 남쪽 성벽 밑으로 수상한 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들의 입가엔 하나 같이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아가씨께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
데릭은 크게 충격받은 얼굴로 더듬더듬 벽을 짚었다.
도돌이가 만남을 거부했다. 결근이야 그렇다 쳐도 얼굴조차 보여 주지 않는 건 정말 심각한 일이었다.
“윽.”
왼쪽 가슴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들었다. 그는 왼쪽 가슴을 부여잡은 채, 도돌이의 침실 문을 애타게 두드렸다.
─똑똑.
“……나다.”
역시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늘 만날 수 없어도 괜찮다.”
“…….”
“내일이 아니어도 괜찮다. 나는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니.”
“…….”
“그대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찾아오겠다.”
침실 문을 사이에 두고 절절하게 매달리는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그러나 침대에 누운 오드리는 시뻘게진 얼굴로 눈을 꼭 감았다.
‘저 남자가 진짜!’
누구는 뭐 칩거하고 싶어서 칩거를 하나? 그녀가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건 전적으로 프리트 공작의 탓이었다.
“이씨…….”
손거울을 들여다본 오드리의 얼굴이 곧바로 울상이 되었다. 앵두 같던 입술이 거대한 애벌레 두 마리처럼 퉁퉁 부어 있는 까닭이다. 그뿐이면 다행이다. 프리트 공작이 도대체 얼마나 물고 빨아 댔는지, 그녀의 입술은 아직도 새빨갰다.
“꼴이 이런데 어떻게 출근을 해……!”
오드리는 죄 없는 침대를 팡팡 내려쳤다.
이리저리 고개를 틀며 입술을 고쳐 물던 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응?’
갈급하게 파고들던 입술. 툭 불거진 그의 목젖이 위아래로 쉴 새 없이 요동쳤다. 그녀의 모든 걸 집어삼킬 듯이.
─꽈악.
오드리는 애꿎은 이불만 움켜쥐었다. 정말 억울해 미칠 노릇이다.
‘적당히’를 모르는 누구누구 덕분에 출근은커녕, 침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는 식사 시간에도 포털을 사용하여 식당과 침실을 오갔다. 나고 자란 저택에서 도둑처럼 몰래 돌아다녀야 한다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붓기는 대체 언제 가라앉는 거야?”
오드리는 이미 번들거리는 입술 위로 연고를 치덕치덕 발랐다. 오늘만 해도 벌써 열 번째였다.
“진짜! 나가기만 해 봐…….”
슬슬 오기가 치밀었다. 오드리는 똑같이 갚아 주겠다고 다짐했다.
“얼마나 쓰리고 아픈데……!”
데릭 역시 퉁퉁 부어 버린 시뻘건 입술로 곤욕을 치러 봐야 마땅하다.
그녀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붓고 쓰라린 입술을 문질렀다.
저도 모르게 그와의 다음 키스를 기약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 * *
자정에 가까운 깊은 밤.
황제는 여태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잠옷 차림으로 손님을 맞았다.
“프리트 공작!”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게 되었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다이안, 그 멍청한 것이……!”
황제가 문득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미혼인 공작에게 시집도 안 간 딸의 허물을 털어놓으려니 면구하기 그지없는 까닭이다.
“도망을…… 갔다.”
“…….”
“이게 말이나 되나? 제국의 황녀가 되어서는, 근본도 없는 것들처럼 야반도주가 말이나 되냔 말이야!”
“……납치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공작, 이곳은 황성이다. 납치는 절대로 불가능해. 분명 도망을 간 것이다. 천한 배우 놈 하나에 미쳐서는!”
데릭이 심각한 눈으로 되물었다.
“이 사실을 몇이나 알고 있습니까?”
“……아직은 몇 없네. 그러나 새어 나가는 건 시간 문제겠지.”
당분간은 근신을 핑계 삼아 어떻게든 숨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뿐. 어떻게든 도망간 황녀를 잡아 와야 한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황제는 이제야 안심이 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일단 추격대를 보내 놓은 상태네. 아직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
“그러니 추격대가 흔적을 찾으면 공작이 은밀히 데려와 주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배우 놈은…… 나중에라도 입을 열면 곤란하니, 그냥 죽여 버리는 게 좋겠어.”
노처녀 딸이 이제라도 시집을 간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 상대가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천한 연극배우여서는 안 될 일.
황제는 황녀가 돌아오면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시집을 보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설령, 남편감이 포크 들 힘도 없는 먼 나라 노인네라도.
* * *
다이안은 생각보다 열악한 환경에 살짝 짜증이 난 상태였다.
‘개, 돼지가 된 기분이군.’
냄새나고 더러운 소달구지에 실려 가는 신세라니. 고귀한 황녀 신분에 이게 말이나 되나?
지미의 친구들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포털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싸구려 마차와 소달구지만 벌써 몇 번째 바꾸어 탔다. 아주 원시인들이 따로 없다.
다른 이들은 소달구지마저도 못 타고 걸어왔지만, 그건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다이안, 여기서 마차로 갈아탈 겁니다.”
“……이번에는 탈 만한 마차였으면 좋겠군.”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국경을 넘으면 테수스 공국까진 금방이에요.”
황녀는 한숨과 함께 다인용 마차로 옮겨 탔다.
그녀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납치 자작극을 벌인 건 황태자 부부의 탓이 컸다.
‘누님, 제발 체통을 지키세요.’
‘뭐?’
‘동생으로서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불장난이나 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난데없이 들이닥친 황태자가 건방지게 훈수를 둔 것이다. 자기가 마치 뭐라도 된 듯이.
‘일주일이면 누님도 정신을 차릴 거라 믿습니다. 굳이 한 달이나 근신할 필요는 없겠지요.’
‘말버릇 한번 고약하군.’
‘제가 특별히 아바마마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하?’
‘저와 비의 부탁이라면 분명 들어주실 겁니다.’
다이안은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황제는 늘 황태자에게만 너그러운 아버지였으니까.
참다못한 그녀가 지미에게서 받은 풀피리를 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저녁은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국경을 넘을 겁니다.”
“…….”
어느새 마차는 낡아빠진 건물 앞에 멈춰 있었다. 황녀는 영 떨떠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폐가인지, 여관인지 모르겠군.’
─끼익.
썩은 나무 문을 열자 텅 빈 내부가 드러났다.
사람의 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주인은 자리를 비운 건가?”
“아, 저희가 통째로 빌렸습니다. 아무래도 다이안의 모습을 보이면 곤란할 듯하여서.”
“…….”
“식사는 왈프와 로빈이 담당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이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미는 어떻게든 그녀를 편안하게 해 주려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같이 성에 안 찼다. 자연히 황녀의 분노는 나머지 일행들을 향했다.
“그 로브는 대체 언제까지 쓰고 있을 작정이지?”
마침 몸이며 얼굴까지 꽁꽁 싸맨 모양새가 눈에 거슬린 터다.
“진짜 납치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까지 분위기 잡을 필요 있나? 보는 내가 다 답답하군.”
“거, 아가씨는 몰라도 돼.”
“뭐라?”
퉁명스러운 대답에 다이안의 눈에 번쩍 불이 튀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와 말도 못 섞을 밑바닥 인생 주제에, 어쩜 저리도 무례하게 군단 말인가?
“……내가 황성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기필코 네놈의 건방진 태도를 고쳐 놓고 말 것이다.”
그러나 왈프는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황성? 이봐, 황녀 저하. 당신이야 이대로 돌아가도 아무런 문제 없겠지만, 우리는 목이 날아갈걸?”
“이런 무뢰한을 보았나……!”
덩치 큰 남자가 그녀를 향해 위압적으로 걸어왔다. 신경질을 내려던 다이안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이곳엔 그녀의 호위가 없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참에 확실히 해 놓지. 문제가 생기거든, 황녀 저하가 우리 목숨을 구해 주겠다고 약속해.”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건가?”
“목숨 걸고 장단 맞춰 줬으면 저하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셔야지?”
“이 건방진……!”
그때, 뒤늦게 들어온 지미가 두 사람 사이로 재빨리 끼어들었다.
“왈프, 그만해! 다이안, 이 친구의 말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네 친구라는 작자는 왜 저 모양인지 모르겠군.”
“다들 다이안처럼 귀한 분을 모셔 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하…….”
“릴리가 시중을 들 겁니다. 피곤할 텐데 이만 올라가서 쉬세요.”
지미의 말에 릴리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시중?”
“서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너 이씨…… 두고 봐.”
그러나 여자는 그녀뿐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릴리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다이안을 따라가자, 지미는 서늘한 얼굴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다 망치려고 작정했어?”
“아니, 확실히 해 놓으면 좋잖아. 나중에 혼자 발 빼면 어떡해?”
“협상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하지만-”
“잊었어? 국경을 넘기 전엔 절대로 들켜선 안 돼. 일단 원하는 대로 다 해 줘.”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그게 쿤을 구하고 조직을 살리는 길이야.”
“……알았어.”
지미는 나머지 일행에게도 단단히 주의 준 뒤, 테이블 위로 지도를 펼쳤다. 지도 곳곳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빨간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중 유일하게 검은색으로 지워진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프리트 공작령에 해당하는 펠리오스 숲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