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장. 건국기념제 (12/25)

제9장. 건국기념제

오드리는 어느덧 완벽한 아침형 인간이 되어 있었다. 간단한 세안을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러 나가려는 찰나.

─벌컥.

“좋은 아침이군.”

“……!”

기다렸다는 듯이 맞은편의 문이 열렸다.

벌써 며칠째였다. 매번 오드리가 문을 여는 타이밍에 맞춰 반복되는 우연이 절묘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각하?”

“…….”

“아, 아니, 데릭.”

“평안한 밤이었다. 아침부터 그대를 만나니 기분이 좋군.”

“…….”

“물론 친구로서 말이야.”

뜬금없는 친구 신청 이후로 프리트 공작은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일단 친구끼리는 이름을 불러야 한다며 ‘각하’라는 호칭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실수로라도 튀어나올라치면 곧바로 안색이 어두워지거나 시무룩해졌다. 오드리는 상심한 대형견에게 개껌을 내어 주는 심정으로 호칭을 정정하곤 했다.

그러나 매번 진땀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옆집 개 이름도 아니고. 도대체 어떻게 편하게 부르라는 거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프리트 공작은 아침마다 그녀에게 온갖 찬사를 건네 왔다.

“아아, 그대의 아름다움에 당장이라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군.”

“네? 세, 세수밖에 안 했는데…….”

“그래도 예쁘다.”

“…….”

“물론 친구로서 하는 말이다.”

친구 사이엔 어떤 비밀이나 거짓도 없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린 결과였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그 말을 빌미 삼아 하루에도 몇 번씩 친구와 연인 사이를 오갔다.

‘하. 참으로 사랑스럽다.’

‘꽉 깨물어 주고 싶군.’

‘그대는 어쩌면 이토록 깜찍하지?’

‘……미치겠군.’

그 뒤에 붙는 말은 한결같았다.

‘물론 친구로서.’

이쯤 되자 오드리는 도대체 ‘친구’가 뭔지에 대해 고심하게 되었다.

조금 극단적으로 프리트 공작 대신 한스를 대입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우, 우웩!”

한스가 저런 말을 한다고 상상하니 절로 토악질이 나왔다. 다만, 이건 친구의 문제가 아니라 한스의 문제인 것 같기도 했다. 클로드의 얼굴을 대입하니 그건 또 나름대로 좋았기 때문이다.

* * *

며칠간 신세를 졌던 프리트 공작은 건국기념제를 앞두고 공작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복귀를 앞두고 아주 작은 실랑이가 생겼다.

“이거 놔라. 아직 미열이-”

“각하! 더 이상은 안 됩니다. 가서 일하셔야지요!”

“내가 아직 아프다지 않나. 열이 펄펄 끓는다. 두통도 있다.”

“주치의 말로는 진작 완쾌하셨답니다!”

“완전 돌팔이로군.”

“케벨슨 백작님, 그리고 케벨슨 영애. 그간 신세가 많았습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루카스는 목숨을 걸고 프리트 공작을 데려갔다. 그간 공작 대신 모든 업무를 처리하느라 거의 산송장에 가까운 몰골이었다.

배웅을 마치고 돌아선 케벨슨 백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부터 저택이 휑한 것 같구나.”

“…….”

그렇게 느낄 만도 했다. 오드리의 뒤를 따라 백작가를 활보하던 거대한 덩치 하나가 사라졌으니.

“참, 건국기념제 말이다.”

“……!”

“아직 몸도 안 좋은데 올해는 쉬는 게 낫지 않겠느냐?”

서재로 향하려던 케벨슨 백작이 슬쩍 운을 띄웠다.

어느덧 건국기념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뜻밖의 소식도 들려왔다.

‘클로드가 결혼한다고?’

친우의 아들은 분명 제 신부가 될 여자와 참석할 것이다. 그렇다면 필히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

“하지만 아버지는요?”

“이 나이에 파트너 없는 건 흠이 아니니 걱정 말거라.”

“…….”

“언제나 네 건강이 우선이지.”

케벨슨 백작은 딸이 원치 않는다면 굳이 참석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차치하고서라도, 딸에게 마음 아플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눈치챈 오드리가 당장 아버지의 품을 파고들었다.

“죄송해요…….”

“죄송하긴.”

“얼른 나을게요.”

“그래. 그거면 됐다.”

케벨슨 백작은 아무것도 모르는 양, 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 * *

건국기념제의 날이 밝았다. 크리앙트 제국엔 거리마다 환호성과 즐거운 노랫소리가 가득했다.

케벨슨 백작가도 별 다를 바는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늦지 않게 와서 교대해 줘야 해. 알았지? 늦으면 안 된다?”

“알았으니까 그만 좀 보채!”

반나절의 휴가를 받은 사용인들이 들뜬 얼굴로 저택을 나섰다. 오랜만에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연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백작가에 남은 인원은 평소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오드리였다.

“심심해…….”

홀로 남은 오드리는 침대에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이나 구경했다.

작년만 해도 예쁜 옷을 챙겨 입고 거리로 나가 축제를 한껏 즐기고 있을 시간이었다. 점심 식사는 늘 그랬듯 에밀튼 백작가에서 대접받았겠지. 그러다 저녁이 되면 황성으로 가서 무도회를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그럴 수가 없었다. 클로드와 그의 신부가 될 여자를 눈물 없인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휴…….”

이 좋은 날 혼자 침대에 누워 있는 처지가 참으로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때, 익숙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와!”

오드리는 신이 나서 당장 문 앞까지 뛰어나갔다.

“알폰소! 안 나갔네?”

“예. 저는 저녁 교대조라서요. 그나저나 프리트 공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응?”

“방으로 모셔올까요? 아님, 응접실로 안내할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손님이었다.

‘이상하다? 낮엔 황성에서 티파티가 열린다고 했는데.’

오드리는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황성에 있어야 할 주요 인물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의문이었다.

“이, 일단 방으로……?”

“네. 알겠습니다.”

“…….”

하지만 할 일도 없는 마당에 오히려 잘된 일일 지도 모른다.

얼마 후. 캐모마일 꽃다발을 한 아름 든 프리트 공작이 열린 문 위로 작게 노크했다.

“들어가도 되나.”

“아, 네!”

“그대가 아프다고 하여 병문안을 왔다. 이거.”

“감사합니다.”

그가 불쑥 꽃다발을 내밀었다. 두 팔로 받쳐야 겨우 들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꽃다발이었다.

하녀가 꽃을 화병으로 옮겨 담는 동안, 두 사람은 테이블 앞에 자리 잡았다.

‘완전 다른 사람 같아.’

오드리는 새삼스럽게 그를 흘끔댔다. 시원하게 이마를 드러낸 정복 차림의 그가 낯설게 느껴진 까닭이다.

백작가에서 머무는 동안은 유독 온순하게 느껴지지 않았던가. 특히, 비 맞은 강아지처럼 내린 앞머리와 가벼운 셔츠 차림이 한몫을 했다.

그런데 다시 앞머리를 넘기고 정복을 차려입자, 아니나 다를까. 프리트 공작은 프리트 공작이었다.

그래도 예전만큼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이미 무장해제된 모습을 봐 버렸기 때문일까?

“왜 그러지?”

“네?”

“그대가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기에.”

“제가요?”

“그래.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했다.”

“……!”

“물론 친구로서.”

오드리는 파드득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놈의 친구 타령.’

만능 소스도 아니고, 온갖 닭살스러운 말마다 친구라는 핑계를 갖다 붙이는 게 참으로 기가 막혔다.

“제, 제가 언제 그랬어요!”

“분명 그랬다. 심장이 멎을 뻔했다니까.”

“착각하셨겠죠!”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대야 늘 한결같이 사랑스러우니까. 의심의 여지가 없지.”

“……!”

프리트 공작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직접 준비해 온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뭐예요?”

“그대가 심심해할 것 같기에. 함께 보드게임이나 할까 하고 가져왔다.”

“우와!”

“……가져오길 잘했군.”

그가 한쪽 입꼬리를 길게 휘었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이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역시. 도돌이를 만나러 오길 잘했다.’

뒤늦게라도 도돌이에게 파트너 신청을 하려던 찰나, 그녀의 불참 소식이 들려왔다.

데릭은 황성 티파티까지 뒤로한 채 곧장 케벨슨 백작가로 달려왔다. 도돌이가 아픈 그를 돌봐 주었듯, 이번엔 그가 도돌이의 곁을 지켜 줄 차례였으니까.

데릭은 상심했을 도돌이를 위해 이것저것 챙겨 왔다. 그중 하나가 보드게임이었다.

“두루마블?”

“먼 대륙에서 건너온 게임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주사위로 하는 땅따먹기라고 하더군.”

“아하.”

“그대가 먼저 하지.”

간단하게 설명을 마친 프리트 공작이 첫 순서를 양보했다.

신이 난 오드리는 게임판을 종횡무진 활보하며 무작정 땅을 사들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프리트 공작의 소유지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무려 랜드마크가 세워진 곳이었다.

“앗.”

“통행료가 10,482,436골드라고 하는군.”

“네에? 그, 그렇게나 비싸요?”

오드리는 어두운 얼굴로 남은 돈을 헤아려 보았다. 온갖 땅을 사들여서 개발하고 다닌 탓에 손에 쥔 현금이 얼마 없었다.

‘어떡하지?’

한숨을 쉬며 다른 땅이라도 팔아 보려는 찰나, 프리트 공작이 이를 만류했다.

“그냥 지나가도 좋다.”

“……?”

“통행료는 다른 이에게 받으면 된다. 그대는 그냥 지나가도 좋아.”

“…….”

“어서.”

오드리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게임의 룰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단둘이 하는 게임에서 그녀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한테 통행료를 받을 생각이란 말인가?

한편, 그녀의 표정을 오해한 프리트 공작은 심각한 얼굴로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기더니 슥 내밀었다.

≪권리양도서약서≫

나, 데릭 프리트(을)은 이 땅의 소유권과 랜드마크에 대한 모든 권리를 오드리 케벨슨(갑)에게 양도할 것을 서약한다.

“정 마음에 걸린다면야. 아예 그대가 가지면 되겠군.”

“……!”

“그럼 애초에 통행료를 낼 일도 없을 테니.”

프리트 공작은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살벌한 얼굴과는 달리, 왠지 모를 호구 느낌이 물씬 풍겼다.

당연히 게임이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통행료를 감면해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아예 자기 땅을 홀라당 넘겨 버리는 프리트 공작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반대의 상황에선 칼 같았다.

“통행료가 2,849,939골드래요. 저도 이번은 받지 않-”

“그럴 수는 없지.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건 확실히 해야 한다.”

“…….”

“자, 여기 있다. 통행료.”

데릭은 제 모든 재산을 끌어모아 통행료를 냈다.

시간이 갈수록 모든 땅과 건물은 오드리의 소유가 되었고, 현금 역시 오드리의 것이 되었다. 데릭은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이제 그만할까요?”

“한 바퀴만 더 돌지.”

“…….”

통행료는 뭐로 내시려고요?

이제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무인도밖에 없었다. 땅 부자 오드리는 난감한 듯 손을 꼼지락거렸다.

‘더 이상 세울 건물도 없는데.’

하지만 데릭은 고집을 부렸다. 신나게 보드게임을 꺼내 들던 도돌이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 탓이다.

‘그렇게나 하고 싶어 하지 않았나.’

도돌이에게 즐거움을 줄 수만 있다면 뭔들 못 하겠는가.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데릭은 또다시 도돌이의 사유지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더 이상 가진 것도 없었다.

“이제는 정말 그만해도 될 것 같아요!”

“잠깐.”

“……!”

─스윽.

그가 비장한 얼굴로 크라바트를 풀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흰색 실크 천이 어찌나 금욕적이면서도 야릇해 보이는지. 오드리는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모, 몸으로 때우려는 거야 뭐야?’

그녀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공작을 구경했다. 흰색 매듭을 풀어 헤치는 능숙한 손길에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듯했다.

“지금 당장은 통행료를 낼 돈이 없다. 그 대신-”

“……!”

“이걸 담보로 내어 주겠다.”

프리트 공작이 내민 것은 크라바트를 고정하던 최상급 루비 브로치였다.

오드리는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게임에 이렇게나 진심이었어?’

저 브로치 하나면 보드게임을 수만 개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작 게임에서 쓰는 종이돈 몇 푼이 없다고 고가의 현물을 내놓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프리트 공작의 아찔한 경제 관념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정말 괜찮아요!”

“하지만 통행료를-”

“그, 그냥 다른 게임을 하는 게 어떨까요?”

오드리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다른 게임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무슨 게임을 하든 결말은 똑같았다.

“이런, 내가 졌군.”

“…….”

프리트 공작은 빈털터리가 되었고, 오드리는 졸부가 되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 * *

시간이 갈수록 오드리가 창밖을 내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벌써 저녁이네. 곧 황성 무도회가 시작되겠어.’

프리트 공작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작복작한 사람들 틈에서 함께 어울리며 춤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데릭은 그런 도돌이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밖에 나가고 싶은 건가.’

식사를 마치면 산책이라도 하자고 제안하려던 찰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왜 그래?”

“제 무례를 용서하세요. 마부에게 연락이 왔는데, 주인님의 마차가 황성으로 향하다가 고랑에 빠졌대요!”

“뭐?”

놀란 오드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는? 괜찮으셔? 응?”

“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다고 하셔요.”

“지금, 지금 어디 계시는데?”

“일단 황성으로 가셨대요.”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뒤늦게 다리가 풀린 오드리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손이 잘게 떨렸다.

데릭은 곧장 그녀의 옆으로 달려갔다.

“케벨슨 백작이 타고 올 마차는 있나?”

“그게, 아무래도 대여소에서 빌려서 보내야 할 듯합니다. 다른 마차는 개조 중이라서 보낼 수가 없습니다.”

“…….”

데릭의 시선이 바로 옆의 도돌이를 향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니 케벨슨 백작의 상태를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안심할 것 같았다.

“어떡하지…….”

오드리는 지금이라도 황성에 가 봐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했다.

그러나 미혼의 귀족 영애가 파트너도 없이 무도회에 참석할 순 없는 노릇. 바로 옆의 프리트 공작에게 부탁하는 것도 염치가 없었다. 이미 고백도 거절한 마당에, 필요한 상황에서만 도움을 청하는 건 차마 못 할 짓이었다.

결국, 떠오르는 건 소꿉친구 한스뿐이었다.

“마리, 한스는? 걔 지금 저택에 있을까?”

“한스 도련님이요? 들리는 말로는 에밀튼 백작 부인께서 파트너를 붙여 주신 것 같던데요.”

“어떡한담…….”

그때, 심기 불편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에밀튼 영식은 왜 찾는 거지?”

“아, 그게.”

“……그자와 춤이라도 추고 싶은 건가?”

자신을 옆에 두고도 다른 남자를 먼저 찾는 도돌이가 참으로 야속했다. 프리트 공작의 핏빛 눈동자가 어느새 질투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절대 아니에요!”

“……다행이군.”

자리에서 일어난 데릭이 급한 대로 화병 안의 꽃 한 송이를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곧장 도돌이를 향해 내밀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무도회에 가지 않겠나?”

“……!”

“물론 친구로서 말이야.”

오드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꽃을 받아 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연분홍색의 복사꽃이었다.

* * *

데릭과 오드리는 뒤늦게 무도회장으로 들어섰다. 미리 맞추기라도 한 듯, 완벽한 한 쌍 같은 차림새였다.

‘안 버리고 처박아 두길 잘했군.’

데릭은 언젠가 황녀에게 선물 받은 연한 베이지색의 예복을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평생 입을 일 따윈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돌이가 사랑스러운 베이지색 드레스를 고르자마자 번뜩 떠오르지 뭔가.

데릭은 곧장 마도구로 포털을 열고 공작성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도돌이와 연인처럼 보일 것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평소에 그가 선호하는 옷 색깔은 아니지만.

물론, 치장을 마친 도돌이는 놀란 눈치였다.

‘데, 데릭? 입고 있던 옷은 어디로 가고…….’

‘불편해서 갈아입고 왔다.’

‘제 드레스와 색이 너무 비슷한데, 괜한 오해를 사진 않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다. 아주 가깝고, 믿음직하고,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처럼 보이겠지.’

‘…….’

‘이러다 늦겠군. 어서 서두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는 역시나 친구 타령을 하며 도돌이의 의심을 피했다.

데릭은 천천히 무도회장을 둘러보았다. 황실에서 이번 건국기념제에 꽤 공을 들인 듯했다.

‘황태자의 결혼을 발표하는 자리라고 그런 건가.’

무도회장 입구에서부터 물과 빛을 뿜어내는 마력석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커다란 마력석을 통으로 조각하여 전시해 놓은 것이었다. 천장 곳곳에도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장식들이 한가득 붙어 있었다. 답답한 실내에 쾌적한 공기를 불어넣어 주는 마력석이었다.

그러는 사이, 오드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케벨슨 백작을 찾아다녔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어느새 무도회장 앞까지 발걸음이 닿았다.

귀족들은 반원 모양으로 동그랗게 모여 있었다. 구경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때, 인파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입술은 나를 미치게 만들어!”

“귀여운 루이. 그런다고 내가 허락할 것 같나요?”

“오, 록시! 당신이 내게 이럴 수는 없어!”

“쪽. 오늘은 여기까지예요, 달링.”

“아아, 록시.”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프레이아 극단? 지미?’

바로 옆에서 지옥불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당장이라도 무도회장을 쑥대밭으로 만들 듯한 프리트 공작이 보였다.

“……그놈들이로군.”

“히익.”

“…….”

“저, 저희는 이미 본 내용이니까 저쪽으로 가요! 아버지를 찾아야죠!”

“…….”

오드리는 안광이 흉흉해진 프리트 공작을 이끌고 발걸음을 옮겼다. 남들의 감상을 방해할 순 없었으니.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서 케벨슨 백작을 발견했다.

“아버지!”

“오드리? 네가 여길 어떻게…….”

오드리는 당장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총총 뛰어갔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마부는요?”

“나는 멀쩡하단다. 마부도 무사해.”

“다행이다…….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이런. 내가 괜히 연락했나 보구나. 그런데 여긴 어떻게 왔느냐? 마차도 없었을 텐데.”

“아, 그게-”

“백작이 무사하다니 다행이군.”

“각하?”

오드리의 등 뒤에서 비슷한 차림의 프리트 공작이 홀연히 등장했다. 케벨슨 백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 각하께서 병문안을 오셨어요.”

“아하. 그렇게 된 것-”

“……또.”

데릭은 서운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오드리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믿고 싶지는 않지만, 마치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였다.

“또 실수했다. 각하가 아니래도.”

“……데, 데릭. 맞다. 죄송해요.”

“옳지.”

프리트 공작은 만족한 듯 곧바로 얼굴을 풀었다. 공적인 자리에서도 사적인 호칭을 요구하는 태도가 참으로 뻔뻔했다.

한편, 케벨슨 백작은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얼이 빠졌다.

‘내가 노망이 났나?’

옷까지 맞춰 입은 듯한 주군과 딸 아이 사이가 퍽 가까워 보인 탓이다. 프리트 공작은 듬직한 사위처럼 오드리의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참, 마차는 걱정할 필요 없다. 갈 땐 내 마차를 함께 타고 가지.”

“하지만 번거롭지 않으시겠습니까?”

“어차피 가는 길이지 않나. 그 정도는 괜찮다.”

“……?”

케벨슨 백작가에 들렀다 공작성으로 가려면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마차가 없는 가신에게 베푸는 호의라기엔 과분할 정도였다. 게다가, 남들은 평생 가도 한 번 탈까 말까 한 공작가의 마차를 무려 두 번이나 타다니.

‘나 원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군.’

케벨슨 백작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샴페인을 들이켰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몰려와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때마침 무도회장 앞쪽에서 커다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프레이아 극단의 연극이 막을 내린 듯했다.

오드리는 문득 궁금증이 치솟았다.

“그나저나 웬 연극이에요?”

“황녀 저하께서 카타리나 왕녀를 위해 극단을 부르셨다고 하더구나.”

“아.”

“앞으로 가족이 될 사이니 살뜰히 챙기시는 게지.”

이윽고 일렬로 선 배우들이 군중을 향해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중 대표 격으로 나선 지미가 황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름답고 자애로우신 황녀 저하께 이 모든 영광을 바칩니다.”

“과연 배우는 배우로군.”

그는 귀중한 것을 대하듯 황녀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손등 위로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

황녀는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발칙한 눈동자가 싫지 않았다. 야살스럽게 휘어지는 눈꼬리 역시.

마주한 시선 사이로 잠시나마 묘한 기류가 흘렀다.

─쪽.

그러나 입술이 떨어질 때쯤엔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윽고 황녀의 시선이 군중 속의 데릭을 향했다.

“……프리트 공작?”

연락도 없이 찾아온 깜짝 손님이 퍽 반가운 눈치였다. 그러다 눈에 익은 옷차림을 발견하고서는 더더욱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이런 우연이. 누가 보면 우리 둘이서 미리 옷을 맞추기라도 한 줄 알겠군.”

“…….”

“그렇지 않나?”

황녀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제 드레스와 공작의 예복을 번갈아 보았다. 같은 원단으로 제작한 연베이지색의 드레스와 예복은 마치 한 벌 같았다. 애초에 이런 구도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까닭이다.

“그나저나 파트너도 없이 왔을 텐데. 내 옆으로 오지.”

“괜찮습니다.”

“공작이 혼자 민망할까 봐 그래.”

“함께 온 파트너가 있습니다.”

“……뭐?”

데릭에게 가려졌던 오드리를 발견하자마자 황녀의 표정은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그 여자였다. 프리트 공작과 함께 영지 시찰을 나갔다던.

“황녀 저하를 뵙습니다. 오드리 케벨슨입니다.”

“…….”

“저하?”

“아. 케벨슨 영애.”

황녀는 애써 여유로운 척을 했다. 그러나 이미 오드리의 연베이지색 드레스가 눈에 거슬린 후였다.

“그래. 데뷔탕트 때 본 것도 같군. 그 후로는 영 눈에 띄질 않아서.”

“……?”

“혹시 영애가 구석을 좋아해서 그런 건가?”

“아니요. 딱히 그렇지는-”

“농담일세. 그렇게 진지하게 반응할 것까지야.”

“…….”

오드리는 황녀의 뜬금없는 악의가 당황스러웠다.

‘왜 저러시지?’

그간 마주할 일도 없던 황녀에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라도 했나 싶을 정도였다.

한편, 프리트 공작은 진지한 얼굴로 도돌이를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운 연분홍색 머리칼, 총명한 눈동자, 밀가루 반죽 같은 말랑한 뺨, 그리고 자그마한 체구까지.

‘참으로 유별난 깜찍함이다.’

그녀를 몰래 눈독 들이던 놈들이 있진 않을까 싶어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그의 한쪽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었다.

“다들 눈이 멀었나 보군. 그래도 다행이다. 그대가 내 눈에만 띈다니 말이야.”

“……데릭.”

아차. 뒤늦게 제 발이 저린 데릭이 오드리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물론, 친구로서 말이다.”

그러나 그 장면은 남들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데릭?’

다이안 황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주 사적이면서도 친밀한 호칭이 여름밤의 모깃소리처럼 거슬린 까닭이다.

저 철옹성 같은 남자가 남에게 자신의 이름을 허락한 적 있던가? 아니. 단 한 번도 없었다.

‘고작 견습 보좌관 주제에…….’

황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나 두 사람을 이대로 풀어놓을 순 없었다. 곳곳에 심어 놓은 기자들의 펜대가 이미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마침 잘되었군. 영애에게 내 측근들을 소개해 주겠다.”

“……네? 저에게요?”

“또래 영애들과 어울려서 나쁠 건 없으니 말이야. 어서.”

“…….”

다이안 황녀가 두 사람을 이끌고 향한 곳은 어린 영애들이 모여 있는 테라스 앞이었다. 꺄르륵 웃고 떠들던 영애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화, 황녀 저하.”

“새로운 친구를 소개하지. 케벨슨 백작 영애다. 앞으로 티파티에서 자주 보게 될 거야.”

“반갑습니다.”

“……네에. 저도 반가워요.”

“참.”

황녀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프리트 공작을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공작은 걱정이 많겠어. 요즘 따라 악의적인 기사가 쏟아지던데.”

“…….”

“인근 숲에서 심장에 검이 꽂혀 죽은 자가 발견되었다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안 그런가?”

“……!”

어린 영애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프리트 공작은 도저히 다가가려야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 살벌할 정도로 잘생겼으나, 무서운 분위기와 함께 그만큼 흉흉한 소문이 끊이질 않는 남자 아니던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 진짜인지, 혹은 가짜인지.

“전부 사실입니다.”

“……!”

“하지만 심장에 박힌 검은 죽은 뒤에 꽂아 넣은 겁니다.”

“세, 세상에…….”

“확인사살차.”

데릭은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의 소행임을 인정했다. 그러더니 곧바로 살벌한 혼잣말을 읊조렸다.

“……지금쯤이면 들개 밥이 되었겠군.”

“……!”

잠깐이나마 그의 외모에 홀릴 뻔했던 영애들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어머, 그럼 역시 그 소문들이 전부…….”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쉿. 다 들리겠어요.”

황녀는 썩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이런. 내가 괜한 이야기를 꺼내 그대를 곤란하게 만들었군. 다들 못 들은 것으로 하지.”

“……하하.”

하지만 황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한번 쏟아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괴이한 소문은 더더욱 빨리 퍼진다는 것. 이것이 지난 몇 년간 그녀가 프리트 공작을 독차지한 방식이었으니까.

* * *

“머나먼 드마르코 왕국에서 온 카타리나 왕녀다. 앞으로 우리 황실의 가족이 될 사람이지.”

다이안 황녀가 우아한 미소와 함께 왕녀를 소개했다. 그러자 연이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따, 따뜻한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사람들 앞에 나선 왕녀는 영 쑥스러운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 옆에 선 황태자는 체면도 잊은 채 헤벌쭉 웃고 있었다. 입이 근지러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흠흠, 폐하. 법도에 어긋난 줄은 압니다만, 이번만큼은 제가 직접 전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황태자의 뜻대로 하라.”

“감사합니다.”

황제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인 황태자가 연단 위로 올라섰다. 귀족들을 내려다보는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세등등했다.

“오늘, 뜻깊은 건국기념제를 맞이하여 내가 그대들에게 전할 소식이 있다.”

“…….”

“아마 여기 있는 모두가 간절히 기다려 온 소식이겠지.”

이윽고, 황태자의 눈짓을 따라 왕녀가 연단 위로 올라섰다. 황태자는 주춤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확 끌어당겼다. 얼른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기색이었다.

“나와 왕녀는 건국기념제가 마무리되는 대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와아!”

“황태자 저하, 감축드립니다!”

“제국의 앞날에 무궁한 영광을!”

무도회장은 순식간에 축하의 물결로 가득 찼다. 황태자는 그 광경을 흐뭇하게 둘러보았다. 벌써부터 자기가 제국의 주인이라도 된 듯한 태도였다.

그런데 그때, 손뼉을 치던 오드리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린 채 귀를 막았다.

“으…….”

“도돌이?”

─삐이이이이이.

귀청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온 까닭이다.

‘이, 이게 뭐지?’

마치 손톱으로 매끄러운 돌판을 긁는 것처럼 가느다랗고 소름 끼치는 소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샴페인을 터뜨리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걱정스레 오드리의 상태를 살피는 데릭 역시 멀쩡해 보였다.

“도돌이, 어디가 아픈 건가? 응?”

“……으윽!”

삽시간에 귓구멍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잔뜩 웅크렸다. 무도회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그녀만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도돌이!”

데릭은 점점 주저앉는 도돌이를 따라 함께 몸을 낮췄다.

뒤늦게 이를 목격한 황녀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지? 볼썽사납게 바닥에서 뭘 하는 거야?”

“도돌이, 도돌이…….”

“공작. 내가 묻지 않나.”

그러나 데릭은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얼굴로 부지런히 도돌이의 얼굴이며 손을 쓸어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평소의 싸늘하던 그답지 않게도.

순식간에 제삼자로 전락한 황녀가 아니꼬운 듯 코웃음을 쳤다.

“더 볼 것도 없군. 분명 꾀병일 것이다.”

“도돌이…….”

“가끔 그런 영애들이 있지. 모든 관심을 자기가 독차지해야 성에 차는 족속들이라고나 할까.”

“내가 옆에 있다. 그대의 곁에 딱 붙어 있어. 응?”

“애초에 관심을 주지 않는 게 약이다. 공작도 신경을 끄도록 해.”

하지만 프리트 공작은 황녀의 트집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타닥.

그러는 사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무도회장 입구에서부터 미세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시작은 입구에 놓인 커다란 마력석이었다. 찬란한 빛을 뿜으며 물줄기를 쏟아내던 마력석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러더니 그 사이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틱.

천장의 마력석까지 튄 불꽃은 시끄러운 환호성에 파묻혀 무도회장 전체로 번져 갔다. 도미노가 무너지듯 아주 빠른 속도였다.

─탁. 타탁.

그제야 불길하게 요동치는 마력석을 발견한 몇몇 이들이 웅성거렸다.

“어어?”

“가만. 저게 원래 빨간색이었나?”

“글쎄.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위험한 거 아니야?”

그러나 이상함을 느꼈을 땐 이미 늦었다.

─콰앙!

“꺄악!”

곳곳에 배치된 마력석들이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하나둘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들떠 있던 무도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폐하, 이쪽으로 오십시오!”

“전하와 왕녀를 모셔라!”

“도돌이!”

데릭은 본능적으로 도돌이를 안아 든 채 테라스로 달려 나갔다.

─쾅!

─콰앙!

천장의 마력석이 심지에 불이 붙듯 점점 중앙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황녀 저하!”

“누가, 나 좀…….”

홀로 남은 다이안 황녀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빛줄기가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건국기념제 무도회서 의문의 연쇄 폭발…… “특이점 없어”≫

≪‘마법 역사 겨우 100년’ 마도구 안정성 논란 불가피≫

≪마력의 위험성 주장했던 80년 전 기사, 뒤늦게 화제≫

≪황성 마력석 사고는 불량 마력석 때문? 마탑 책임론 ‘솔솔’…… 마탑 해체 요구 서명까지 등장≫

오드리는 속상한 얼굴로 신문을 내려놓았다.

“……온통 마력석 이야기뿐이네.”

어제의 사건과 관련하여 밝혀진 건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이 벌써 진실처럼 퍼져 나갔다. 마력은 사실 저주받은 힘이라거나, 마탑에서 황실도 모르게 위험한 연구를 한다는 음모론도 등장했다. 사악한 힘의 원천인 마탑에 혈세를 낭비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있었다.

“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의 축복’이라 불리던 마력이 졸지에 사악한 힘이라고 매도되었다.

오드리는 아놀드가 걱정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대의 오라비가 곧 마탑에서 나온다지.’

‘지난주 월요일, 마탑에서 소식이 왔더군. 아직까지는 재무부와 마법부만 알고 있을 것이다.’

10년간 마탑에 갇혀 있다가 나와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 경멸 가득한 시선이라니……. 오드리에겐 이 모든 상황이 가혹하게 느껴졌다. 이 크리앙트 제국에서 마력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한 명도 없겠지.’

누군가가 마력 보유자라는 이유로 마탑에 잡혀가서 기약 없는 기다림에 몸부림칠 동안 그들은 뭘 했나?

대의를 위해 희생하라고 했다. 가장 큰 수혜자인 그들은 정작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은 채 여태껏 편리함만 누려 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마탑이 사악한 집단이므로 당장 없애야 한단다.

“하…….”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주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일까?

그때,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

─벌컥.

“도토리!”

“한스?”

“너무 놀라진 말고. 일단 나갈 준비부터 해.”

“갑자기 왜?”

“하아. 그게…….”

한스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바람결에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그의 황망함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아무래도 당장 록트에 가 봐야 할 것 같다.”

“…….”

“얼른.”

“아, 알았어.”

오드리의 심장이 불길하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제나의 도움으로 정신없이 옷을 꿰입는 와중에도 나쁜 상상만 줄을 이었다.

‘아닐 거야. 설마.’

애써 마음을 다잡아 봤지만, 울렁이는 속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 * *

황성 회의실엔 각 가문의 수장들이 빽빽하게 모여 앉아 있었다. 긴 테이블을 따라 양옆으로 나눠 앉은 귀족들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이건 제국을 향한 선전포고입니다!”

“맞습니다. 보나 마나 좀스러운 세니아 왕국 짓이겠지요! 국경 문제로 앙심을 품은 게 틀림없습니다. 이참에 본때를 보여 줘야 합니다!”

“토버 백작, 전쟁이라도 하자는 소리로 들립니다?”

“못 할 것도 없지요!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 아닙니까?”

“자기 진영도 못 지키고 줄행랑친 토버 백작이 할 말은 아니지.”

“무, 뭐, 말 다 했습니까?”

분위기가 과열되자, 회의실을 빙 둘러 서 있던 귀족들이 중재에 나섰다. 자리에 앉지 않고 중립에 선 이들이었다.

“진정들 하십시오. 건국기념제가 이제 겨우 하루 지났습니다. 심증만으로 섣불리 행동하기엔 이릅니다.”

“철저한 진상 조사가 우선되어야지요. 그게 곧 제국 정신 아닙니까?”

“이 사람아, 여기서 제국 정신이 왜 나오나?”

“어디서 이 사람, 저 사람 삿대질을 해? 가정교사도 없이 자랐나?”

“뭐어? 보자 보자 하니까!”

그나마 체면을 지키던 귀족들이 격분하여 일어서자, 참다못한 황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 그만!”

“…….”

“이쯤에서 프리트 공작의 의견을 들어 보지. 공작의 생각은 어떤가?”

수십 쌍의 눈동자가 곧바로 데릭을 향했다. 회의실 문 앞에서 내내 침묵을 지키던 그가 무덤덤한 얼굴로 황제를 응시했다.

“세니아 왕국의 소행으로 밝혀지더라도 보복성 전쟁은 안 됩니다.”

“그럼?”

“일단 신대륙조정위원회에 제소하고, 합의하고, 보상을 받고, 재발 방지를 위한 협약을 맺어야 합니다.”

“공작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참 의외로군.”

“폐하, 전쟁은 어떤 순간에도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전쟁을 주장하던 극단주의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프리트 공작을 향한 원색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사내가 되어서는…… 쯧. 세 살배기 아이도 공작처럼 소심하진 않을 거요.”

“반세기 전쟁으로 가장 덕을 본 게 프리트 공작가 아닙니까. 그런데 인제 와서 발을 빼시겠단 겁니까?”

데릭 역시 무덤덤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하나만 묻지.”

“…….”

“밀리엄 공작, 토버 백작. 제대로 된 전투를 치러 본 적은 있나?”

“프리트 공작! 이 무슨 실례되는 말이요?”

“알 만하군. 없겠지.”

새빨간 눈동자엔 상대를 향한 환멸이 넘실거렸다.

데릭은 저들이 주장하는 ‘전쟁’이란 게 무엇인지 알았다. 멋진 계급장을 달고 출정하여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가장 귀한 갑옷을 입고 승전 소식만을 기다리는 것. 반세기 전쟁에서 수도 없이 목격한 바였다. 그러는 동안 최전방에 깔리고 죽는 것은 평민들과 이름 없는 농노들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공을 나눠 갖는 것은 누구였나? 온갖 명분을 들먹이며 전쟁을 발발시킨 귀족들이었다. 제국민을 위한 승전 기념 축제는 목숨값을 대신한 적선일 뿐이었다.

평민과 농노들이 겨우 남은 한쪽 팔로 거리 음식을 사 먹는 동안, 귀족들은 그들만의 전쟁을 벌였다. 더 많은 봉토를 하사받고 더 높은 작위를 하사받기 위해서였다. 수많은 전사자 중 귀족은 단 3명에 불과하다는 것 역시 부끄러울 일이었다.

“그러니 이렇게나 경솔하게 전쟁을 주장하는 거 아닌가.”

“프리트 공작, 그만하면 됐다.”

내내 관망하던 황제가 재빨리 상황을 무마시켰다. 이미 판도는 한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짐의 생각도 그대들과 다를 바는 없다. 제국을 향한 도발을 결코 좌시하진 않을 것이야.”

“…….”

“그러나 확실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판단을 보류하겠다.”

세니아 왕국과의 전쟁은 상황을 지켜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자 자연히 황태자의 결혼식으로 관심이 쏠렸다. 황제는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황태자의 결혼식이 문제인데…….”

“제 결혼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황태자도 알다시피 상황이 좋질 않다. 결혼식을 강행하더라도 축복은커녕, 민심만 들끓을 게 뻔하지.”

“폐하!”

“안 그래도 요동치는 벌집을 굳이 들쑤실 필요는 없지 않으냐?”

몇몇 귀족들 역시 동조했다. 전쟁 이야기까지 오가는 시국에 호사스러운 결혼식은 제국민의 반감만 살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오매불망 결혼식만 기다렸던 황태자는 물러나지 않았다.

“도대체 전쟁과 결혼식이 무슨 상관입니까?”

“눈치껏 행동하란 말이다.”

“전쟁 통에도 아이는 잘만 태어나지 않습니까? 결혼식이라고 못 올릴 이유는 없지요!”

“누가 황태자더러 천 년을 기다리라 하였나? 잠시 미루는 것뿐이다.”

“천 년이 될지, 만 년이 될지 누가 안단 말입니까?”

“…….”

“저는 이 결혼식을 반드시 올려야겠습니다!”

황제는 고집을 부리는 아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차라리 난봉꾼이었으면 편했을 것을…….’

여자 문제로 사고 한 번 안 치더니, 이런 식으로 속을 썩일 줄이야.

그러나 황태자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사내가 카타리나 왕녀를 보고도 눈이 안 돌아가겠는가?

‘내가 십 년만 더 젊었어도…….’

황제는 얌전한 왕녀를 상상하며 저도 모르게 턱을 쓸었다.

* * *

“세, 세상에. 이게 뭐야!”

“대표니임…….”

록트에 도착한 오드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전면 유리창은 전부 깨져 있고, 유일한 점원인 아멜리는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머리채라도 쥐어 잡힌 모양새였다.

“아멜리, 괜찮아?”

“저는 괜찮은데, 물건들이…….”

“…….”

애써 만든 마도구들이 유리 조각과 함께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전부 이전에는 없어서 못 팔던 물건들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유리창을 내려치는 바람에…… 말릴 틈이 없었어요. 죄송해요.”

“죄송하기는? 너 혼자 있었는데 안 다친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이거 다 어떡해요? 아까워서 어떡해……!”

아멜리가 두 동강 난 마도구를 보며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한스와 오드리가 올 때까지 혼자서 어떻게든 수습해 보겠다고 애쓴 탓에 손은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아멜리, 정말 괜찮으니까 그만해.”

“대표님, 흐어엉……!”

“여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치료 먼저 받아.”

“하지만, 하지만-”

“맞다. 혹시 집까지 찾아가서 해코지할지도 몰라. 그러니 일단은 우리 집에 가 있어. 알았지?”

“네, 그럴게요…….”

오드리는 당장 마차를 불러 아멜리를 태워 보냈다.

그러는 동안, 록트 앞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구경만 했다. 대낮에 괴한들이 활개를 치는 걸 뻔히 보고서도 말리는 사람 하나 없었다는 게 충격이었다.

‘아멜리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오드리는 험악한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태가 진정되면 아주아주 덩치 크고 무서운 점원을 한 명 더 고용하고 말 테다.

마침 록트 밖으로 나오던 한스가 그 몰골을 목격하고 비웃었다.

“뭘 그렇게 험악하게 서 있어?”

“내부 상태는 어때?”

“다 털렸지, 뭐.”

“…….”

“우리 개털 됐네.”

가벼운 농담에도 분위기는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뒤늦게 아멜리의 눈물이 전염되기라도 한 걸까? 오드리는 울컥 차오르는 설움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우리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어?’

그녀가 한 것이라고는 다양한 마도구를 생산하여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 것밖에 없었다. 이젠 마도구 없이 못 살겠다는 말이 얼마나 기쁘고 보람찼는데.

“야, 우냐?”

“……킁.”

오드리는 작게 코를 먹으며 결심했다.

‘누가 이대로 포기할 줄 알고?’

비록 절대다수의 의견이 마력을 반대하는 쪽일지라도 상관없다. 분명 어딘가엔 마도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우리, 킁, 이제 업종 바꿀 거야.”

“갑자기? 뭘로?”

“산지 직송 고구마 가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오드리는 절대로 록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잠시 위장 영업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 * *

소식을 전해 들은 데릭 역시 회의가 끝나자마자 록트로 향했다.

새카만 마차가 갓길에 멈춤과 동시에, 공작가의 문양을 알아본 구경꾼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와그작.

“…….”

데릭은 서늘한 눈으로 발밑을 응시했다.

‘생각보다 심각하군.’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이 건너편 인도까지 널브러져 있었다. 도로에 깔린 잔해를 보며 하나하나 퍼즐을 맞춰 가던 그는 이 사건을 명백한 테러라 규정했다.

‘……감히.’

정체 모를 괴한들이 둔기를 휘두르는 장면이 절로 눈앞에 펼쳐졌다. 영문도 모른 채 공포에 떨었을 도돌이를 생각하니,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데릭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루카스.”

“예, 각하.”

“명령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놈들을 전부 잡아들여라.”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 한번 음산했다. 단단히 화가 난 기색이다.

“어디 하나가 떨어져 나가도 상관없다.”

“……!”

“숨만 붙어 있다면.”

“아, 알겠습니다!”

바짝 군기가 든 루카스는 재빨리 통신구를 꺼내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못 본 체하였다. 록트가 습격당하자 통쾌한 듯 구경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한편, 가게로 향하는 프리트 공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다친 곳이 없어야 할 텐데…….’

그의 머릿속엔 온통 도돌이 걱정뿐이었다. 얼른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지 뭔가.

─쨍그랑!

“…….”

“각하!”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문틀에 붙어 있던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손목을 베일 뻔한 데릭은 이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그나마 동체 시력이 뛰어난 그였기에 망정이지! 군사 훈련도 받지 않은 도돌이가 대체 무슨 재주로 이를 피하겠는가?

데릭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각목 하나를 주워 들었다.

“세상에!”

“어머머, 각목을 들었어요.”

“그, 그래도 저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구경꾼들은 난리가 났다. 각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은 탓이다. 당장 누구 하나 내려칠 것처럼.

“……데릭?”

“……!”

마침 가게 안쪽에서 오드리가 걸어 나왔다.

프리트 공작은 영 수상한 눈빛으로 각목과 그녀를 번갈아 보더니, 다짜고짜 각목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와장창!

“꺄악!”

살벌한 타격음이 몇 번이고 이어졌다.

그러다 구경꾼들이 눈을 떴을 때쯤엔 의외의 풍경이 펼쳐졌다.

“……?”

바닥에 쓰러져 있어야 할 오드리가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이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문틀에 고드름처럼 달려 있던 파편들이 전부 떨어져 나가 있었다.

─끼익. 끼이이익.

프리트 공작은 몇 번이고 문을 여닫아 본 뒤에야 만족한 얼굴로 각목을 내던졌다. 오드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의기양양했다.

“내가 전부 처리했다.”

“…….”

“그대가 다칠 듯하여, 친구로서.”

어쩐지 거대한 몸집 뒤로 붕붕 흔들리는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 * *

다이안 황녀는 오늘따라 멍한 얼굴로 깃펜을 대충 휘갈겼다.

“여기, 그리고 이 부분만 수정하면 되겠어.”

“니콜 기자에게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화가는?”

“이미 신문사로 완성본을 보냈답니다. 큰 문제 없을 듯합니다.”

“그래. 반드시 오늘 점심 신문에 실려야 할 것이야.”

“예.”

시종이 물러가고 홀로 남은 황녀는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심장의 색깔은 연.베.이.지 – 황녀와 프리트 공작의 비밀 신호≫

≪“‘아직은’ 말할 수 없다.” 다이안 황녀, ‘사실상’ 스캔들 인정? 줄줄이 국혼 이어지나……≫

문득 헛웃음이 터졌다.

그가 공작성으로 돌아온 뒤, 벌써 몇 년째 황녀 혼자서만 열심히 불씨를 지피고 있지 않은가. 그마저도 없었으면 진작 사그라들었을 스캔들이다. 하지만 그의 곁엔 여자도 없으니,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자연히 제 짝이 될 거라 믿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방해꾼 하나가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데릭.’

‘물론, 친구로서 말이다.’

고작 백작가의 영애가 프리트 공작의 이름을 사사로이 부르다니. 게다가 친구? 엄연히 작위가 다르고 나이가 다르건만.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지만 콩알만 한 여자를 내려다보던 프리트 공작의 시선이 자꾸 신경 쓰였다.

다이안 황녀는 음습한 눈길로 기사 초안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공작, 소꿉놀이는 그쯤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대는 부마가 될 사람이니까.

“그 영애에게도 좋을 게 없거든.”

인제 와서 프리트 공작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크리앙트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과 가장 작위가 높은 미혼 남성. 이보다 더 이상적인 그림은 없지 않은가.

그때, 황녀의 상념을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황녀 저하, 남배우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그래?”

다이안 황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지미가 누워 있는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도 분주했다.

“화, 황녀 저하.”

“남배우가 일어났다 하던데.”

“예. 안으로 드시지요.”

황녀는 아직도 어두컴컴한 방을 빙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쯧. 낫던 병도 안 낫겠군. 거기 커튼을 좀 걷어라.”

“네!”

뒤따라온 시녀가 커튼을 걷는 동안, 황녀는 곧장 침대맡으로 향했다.

─촤아악.

마침내 캄캄하던 침대 위로도 환한 빛이 쏟아졌다.

그러나 황녀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지미를 발견하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

“황녀 저하?”

그가 웃통을 벗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발견한 시녀 역시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다.

“세, 세상에! 아니, 옷은 언제 벗으셨담?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아, 상처를 확인하다 보니.”

“그래도 감히 황녀 저하 앞에서……!”

“되었다. 아픈 사람을 타박하고 싶진 않군.”

지미는 상반신을 드러내고도 전혀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황녀의 눈에도 그의 몸은 썩 보기 좋았다. 다부진 어깨와 새하얀 살결, 적재적소에 자리 잡은 탄탄한 근육들까지. 처음 볼 때만 해도 내심 놀란 황녀도 어느덧 평온을 가장하였다.

“너는 이만 나가 보아라.”

“……예.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십시오.”

시녀가 나간 뒤. 방엔 오롯이 두 사람만 남았다. 황녀는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미를 보며 어젯밤의 소란을 떠올렸다.

쉴 새 없이 터지던 마력석, 그 가운데 덩그러니 남아 있던 황녀. 본래 그녀를 구했어야 할 프리트 공작은 엉뚱하게 다른 여자만 데리고 대피했다. 위험이 닥칠 때까지 아무도 그녀를 구해 주지 않았다.

참 우스운 일이다. 황제, 황태자, 황태자비가 될 왕녀까지 챙긴 뒤에야 다이안에게 닥친 위험을 눈치채다니.

황녀를 구한 건, 그날 처음 본 남배우였다.

‘황녀 저하!’

마지막 폭발 직전, 그녀를 감싸던 온기가 아직도 생생했다. 근위대장도 그렇게 선뜻 몸을 내던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등을 보자꾸나.”

“보여 드릴 것이 못 됩니다.”

“나 때문에 다친 거 아닌가.”

“…….”

“어서.”

지미는 마지못해 쭈뼛쭈뼛 몸을 돌렸다. 그러자 마력석 파편이 박혀 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다이안 황녀는 저도 모르게 그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지미가 따가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읏.”

─스윽.

느린 손길이 지미의 상처를 차례로 훑었다. 잔인한 광경엔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나를 위해 다쳤단 말이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황녀는 여태껏 느껴 본 적 없던 커다란 희열을 느꼈다. 그 기분을 따라 입꼬리도 보기 좋게 휘었다.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뭐든지 말해라. 얼마든지 내어 줄 테니.”

“……그런 걸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닙니다.”

“마땅한 보상은 받아야지. 사양할 필요 없다.”

“황녀 저하를 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겐 큰 영광이었습니다.”

“…….”

“그러니 저는 이미 보상을 받은 셈이지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황녀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넌……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는 재주를 가졌구나. 귀신 같기도 하지.”

왠지 이 상처를 오래 두고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고, 새 살이 돋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새삼 깨닫겠지. 세상 어딘가엔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남자도 있다는 걸.

“치료가 끝날 때까진 황성에 머물도록 해라.”

“……예?”

“어차피 이 몸으론 연극도 힘들 텐데. 물론, 그에 대한 보상은 섭섭하지 않게 해 주겠다.”

“…….”

“그러니 몸이 다 나을 때까진 황성에 있어.”

“저하와 황성에 머물 수 있다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황성 주치의를 통해 몸에 좋은 약재들을 보내겠다.”

“예.”

황녀는 대놓고 쏟아지는 찬사가 기분 좋으면서도 낯설었다. 들뜬 기분을 주체하지 못한 그녀는 곧바로 등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꽈악.

지미가 슬며시 황녀의 소맷자락을 쥐어 왔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송구합니다. 감히 황녀 저하의 귀한 손을 잡을 순 없기에.”

“……할 말이 있거든 해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지?”

“황녀 저하가 보고 싶으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저를 보러 와 주실 겁니까?”

지미는 그대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반신을 덮고 있던 하얀 침대 시트가 그의 다리를 타고 스르륵 내려와 바닥에 떨어졌다.

“그걸, 왜…….”

황녀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 꽤 당황스러운 눈치다.

그러나 지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약속해 주십시오. 저를 보러 오시겠다고.”

“…….”

“예?”

헐벗은 상반신이 점점 가까워졌다.

다이안 황녀는 자존심 탓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노라고.

* * *

데릭은 벌써 몇 번째 오드리의 빗자루를 빼앗아 들었다.

“내가 하겠다.”

“앗……!”

“위험하니 저쪽에 앉아 있으래도.”

사방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드레스 자락으로 쓸고 다니는 도돌이가 영 신경 쓰인 까닭이다.

‘저러다 나중에 긁히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평소의 그녀였다면 마법 한 번으로 상황을 정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구경꾼들 앞에서 대놓고 마법을 쓸 순 없는 노릇. 덕분에 세 사람은 팔자에도 없는 빗자루질을 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도 한스는 내내 두 사람을 곁눈질했다. 의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수상하단 말이야.’

부하직원의 가게에 괴한이 난입했다고 찾아오는 상사도 있나? 게다가 빗자루질도 대신 해 준다고?

이건 정말 말도 안 되었다. 괜히 두 사람이 붙어 있기라도 하면 어찌나 신경이 쓰이던지. 참다못한 한스는 은근슬쩍 오드리에게 물었다.

“야, 도토리.”

“왜?”

“각하께선 도대체 왜 여기 계시냐?”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니까 그렇지.”

그러나 프리트 공작의 눈에도 딱 붙어 있는 두 사람이 거슬리긴 마찬가지였다.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하는 거지?’

데릭은 바닥을 쓰는 척하며 은근슬쩍 두 사람 근처로 다가갔다. 하지만 때마침 대화가 마무리된 탓에 별 소득은 없었다.

그렇게 기묘한 대치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두 사람이 암묵적 합의에 도달한 사항이 있었으니.

“으앗!”

오드리의 짧은 비명 한 마디에 곧바로 두 사람이 달려들었다.

“도돌이!”

“도토리!”

서로 견제했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그들은 오드리를 안전한 곳에 앉혀 놓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러다 다친다. 조심.”

“야, 너 저리 안 가?”

“그대는 안쪽에 앉아 있는 것이 좋겠군.”

“험한 꼴을 봐야 정신을 차리지? 고슴도치 되고 싶어서 환장했냐?”

아주 한패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다시 한번 묘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도토리? 감히 제멋대로 도돌이에게 별명을 붙였단 말인가?’

‘도돌이는 또 뭐야? 도토리도 아니고…….’

남의 빵이 더 커 보인다던가. 서로 엇갈리는 애칭이 퍽 친근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데릭은 심각한 얼굴로 매대를 정리했다.

‘분명 도돌이의 이름은 하나뿐이건만! 얼마나 깜찍하면 저리도 별칭이 많단 말인가?’

물론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었다. 프리트 공작만 하더라도 당장 도돌이에게 붙일 사랑스러운 별명 오조 오억 개 정도는 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괜스레 질투가 났다. 도돌이를 독점하고 싶다는 나쁜 욕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편, 유리 조각을 쓸어 담는 한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아주 별명 부자가 따로 없어요!’

별명이란 친근한 사이에서나 부르는 애칭 아니던가. 그런데 고작 알고 지낸 지 반년도 안 된 프리트 공작에게 ‘도돌이’라는 새로운 애칭을 허락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나쁜 계집애. 남이 만든 별명을 갖다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도토리’라는 별명과 어감이 비슷하다는 것도 분했다. 15년 전. 한스가 코찔찔이 오드리를 보며 직접 만든 별명 아니던가!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들었다.

괜히 불퉁해진 한스가 프리트 공작을 향해 예의 바른 선을 그었다.

“그나저나 각하께서는 한창 바쁘시지 않습니까?”

“그걸 왜 묻는 거지?”

“‘저희’가 각하께 괜한 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저희’ 가게이니, ‘저희’가 직접 치워야 맞는 건데. 각하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얄팍한 술수를 간파한 데릭은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희?’

굳이 여러 번 강조하는 단어가 영 거슬린 까닭이다. 한스의 의도대로였다.

그러나 프리트 공작 역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케벨슨 백작가에서 ‘며칠 밤’ 신세까지 졌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

“친구의 어려움은 곧 나의 어려움 아닌가.”

이 정신 나간 계집애가!

한스의 고개가 곧바로 휙 돌아갔다.

‘영지 시찰까지 따라나선 것도 모자라, 뭐? 치인구?’

태평하게 앉아 있는 오드리의 얼굴을 보아하니 절로 열불이 났다.

‘하…… 저걸 어쩌면 좋지?’

수틀리면 곧장 숨통을 끊어 버릴 관계도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저 멍청한 도토리는 형에게 실연을 당한 뒤로 정신줄을 놔 버린 게 분명했다.

* * *

국혼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타리나 왕녀는 패트릭 황태자가 싫지 않았다. 변두리 왕국 출신이라고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바쁜 시간을 쪼개 가며 꼬박꼬박 그녀를 만나러 와 주었기 때문이다.

“왕녀.”

“황태자 저하!”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 하지만 지금은 수업 시간이잖아요. 이러다 폐하께 들키기라도 하시면……!”

“쉿. 왕녀만 비밀로 하면 되지요.”

그녀를 마주할 때면 숨김없이 드러나는 표정들도 좋았다. 멍청하게 웃는 얼굴은 이제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우리의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될 겁니다.”

“그래도 되나요?”

“예. 제가 아버지께 조르고 온 참입니다. 국혼을 미루려 하시기에 결사반대를 했지요.”

“네? 저하!”

“하루라도 빨리 왕녀와 부부의 연을 맺고 싶어 그럽니다.”

“……그건 저, 저도 그렇지만.”

그때, 예고도 없이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똑똑.

“왕녀님, 들어가도 될까요?”

“……!”

카타리나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황태자는 곧바로 테이블 천을 걷어 올렸다.

“나는 이 밑으로 숨겠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들켜선 안 됩니다. 알았지요?”

“네!”

왕녀는 한참을 불쑥거리던 테이블 천이 잠잠해진 뒤에야 시녀를 들였다.

“드, 들어와.”

“왕녀님, 황제 폐하께서 독대를 청하십니다.”

“……!”

“어찌할까요?”

“폐, 폐하께서…….”

카타리나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와중, 테이블 밑으로 발등을 두드리는 장난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맞아. 황태자 저하께서 계시지?’

눈앞에 동아줄 하나가 드리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밖에서 기다려 줄래? 새, 생각을 좀 해 보고 싶어서.”

“예. 하지만 서둘러 주십시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으응.”

시녀가 문을 닫자마자 테이블 밑에 있던 황태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잔뜩 삐진 듯한 얼굴이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언제부터입니까?”

“네?”

“언제부터 나 몰래 아버지와 만나고 있었습니까?”

“두어 달쯤…….”

“참으로 불공평합니다. 나는 수업을 빼먹어야 왕녀를 겨우 보는데!”

“그렇다면 이번엔 저하께서도 함께 가요. 네?”

왕녀가 이때다 싶어 제안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농담이었다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두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오세요.”

“……전혀 오붓하지 않은걸요.”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왕녀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좋으신 분이란 건 알지만, 가끔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를 부르실 때마다 항상…….”

그러나 말문이 턱 막혔다.

도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 걸까? 황제의 손이 지나치게 어깨를 어루만지는 것 같다고?

그녀가 우물쭈물 망설이는 동안, 황태자는 전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왕녀와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시는 거겠지요.”

“네? 하지만-”

“앞으로 가족이 될 사이니까요.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이러다 수업 빼먹은 걸 들키겠습니다.”

“저하!”

─쪽.

“내일 또 찾아오겠습니다, 왕녀.”

“저, 저하……!”

“그럼 이만.”

황태자는 가벼운 입맞춤을 남긴 뒤 비밀통로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왕녀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똑똑.

“왕녀님, 어떻게 할까요?”

“…….”

“왕녀님?”

“황녀 저하께선 바쁘실까?”

“아마 큰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

타향살이의 유일한 문제점이라면 이런 것이었다. 혼약자는 그녀를 과분할 정도로 사랑해 주지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귀 기울여 줄 시간이 없다. 그나마 같은 여자인 황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카타리나를 피한다. 어디에도 기댈 곳 하나 없었다.

“……옷 입는 걸 좀 도와줄래?”

“얼마든지요.”

왕녀는 직접 드레스를 골라 들었다. 목덜미부터 손목까지, 보이는 살결이라곤 전부 뒤덮어 버리는 드레스였다. 그녀에겐 이것이 유일한 갑옷이나 다름없었다.

* * *

프리트 공작성에 환영받지 못할 밤손님 하나가 방문했다. 집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던 데릭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오우, 놀라라.”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발을 들였지?”

“살벌하기는. 오랜만인데 환영 좀 해 주라!”

안토니오는 요란하게 몸을 꺾으며 날카로운 검날에서 벗어났다. 데릭이 애초에 공격할 마음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주 제멋대로군.’

데릭은 화가 나기는커녕, 도리어 기가 막혔다.

‘또 할 말이 있으면 찾아올게. 아주 은밀하게.’

‘……끔찍한 소리.’

펠리오스에서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현실이 될 줄이야.

할 말이 있으면 적당히 전서구나 보내면 될 일 아닌가. 그런데 무작정 적진으로 돌진하고 보는 정신세계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별일이 아니라면 지하 감옥에서 사지가 찢길 각오쯤은 해야 할 거다.”

“분홍 머리 아가씨는 잘 있지?”

“네 놈이 신경 쓸 바 아니다.”

“혹시 무서워서 도망갔나 했지.”

“…….”

“아무튼, 이 말을 하려던 건 아니고.”

안토니오가 아직 치우지 못한 오드리의 책상 위에 제멋대로 걸터앉았다. 그러더니 품 안에서 작은 위스키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요즘 들려오는 이야기가 심상치 않던데.”

“……당장 그 책상에서 내려오는 게 좋을 거다.”

“왜, 우리 왕국이랑 전쟁이라도 하시려고?”

─벌떡.

데릭은 곧바로 검을 들고 일어섰다. 도돌이의 책상을 더럽히는 저 음탕한 엉덩이 두 쪽을 기필코 잘라 버릴 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