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권에 계속공작님, 제 발목 좀 놓아주세요! 3권
제8장. 열병 下
케벨슨 백작은 루카스와 주치의까지 몽땅 마차에 실어 공작성으로 향했다.
이제 백작가에 남은 것은 데릭과 오드리뿐.
“…….”
“…….”
그런데 아놀드의 침실로 향하는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뒤따르는 사람도 없이 오롯이 두 사람만 덩그러니 있는 까닭이다.
‘그냥 시종을 시킬걸.’
오드리는 뒤늦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다.
반면, 프리트 공작은 얌전히 따라 걷는 와중에도 간간이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시커먼 눈 밑이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안색이 좋지 않군.”
“그, 그런가요!”
“…….”
“…….”
“나 때문인가? 어젯밤, 나 때문에 잠을 못 자서?”
“무, 무슨!”
잔뜩 당황한 오드리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프리트 공작의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 아닌가! 누가 오해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한편, 그녀의 표정을 오해한 데릭은 심각한 얼굴로 의미심장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간밤에 그대를 너무 괴롭혔나 보군.”
“아니, 무슨 말이……!”
“적당히 해야 했는데.”
“……!”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조절할 수가 없었어.”
참다못한 오드리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미쳤나 봐!’
저 남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실제로 프리트 공작은 미련하게 병을 앓아 도돌이를 고생시킨 스스로를 원망하느라 바빴다.
‘이런 민폐가 또 없다.’
그놈의 사랑이란 게 어찌나 제멋대로이던지. 애써 가둬 놓았던 마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열병을 앓고 말았다.
그런데 마음씨 착한 도돌이는 무려 새벽 내내 그를 간호해 준 것이다. 어쩐지 그의 존재 자체가 도돌이를 괴롭힌 것 같다는 죄책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다. 당장은 참기 힘들겠지만, 조금씩 노력하면-”
“아, 알았으니 제발 그만 좀……!”
“…….”
도돌이의 타박 한 번에 그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오드리는 프리트 공작을 살살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각하 때문에 그런 것 아니에요.”
“…….”
“정말로 사과 안 하셔도 돼요.”
데릭 때문이 아니라니. 그럼 답이야 뻔했다.
‘에밀튼 소백작 때문이로군.’
혼자서만 좋아하겠다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아팠다. 도돌이 역시도 열병을 앓는 중이라는 사실을 잠시 깜빡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리기 전에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대의 오라비가 곧 마탑에서 나온다지.”
“……아놀드 오라버니가요?”
도돌이는 처음 듣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퇴근 후에 도착한 소식이니 그럴 법도 했다.
“지난주 월요일, 마탑에서 소식이 왔더군. 아직까지는 재무부와 마법부만 알고 있을 것이다.”
“…….”
연분홍색 머리통이 의아한 듯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왜 두 사람 다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지?’
이 사실을 알고도 입을 꾹 다문 에밀튼 백작가의 남자들이 이상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한편, 데릭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듯한 도돌이를 보며 아차 싶었다.
‘관심을 끌어야만 한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아주 찰나. 그마저도 다른 이에게 빼앗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급해진 데릭이 다짜고짜 이마를 짚은 채 멈춰 섰다. 험악한 얼굴은 도돌이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듯 한껏 구겨진 상태였다.
“……아.”
“각하!”
그의 노림수는 제대로 통했다. 놀란 얼굴로 이곳저곳 살피는 도돌이를 보고 있으려니 괜스레 마음이 들떴다.
‘도돌이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꾀병을 들킬 순 없는 노릇. 데릭은 들썩이려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별것 아니다. 놀랄 것 없어.”
“하지만!”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군.”
“……!”
그가 티 나게 몸을 휘청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오드리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난데없이 덮쳐든 그의 가슴팍에 한껏 짜부라진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치유 마력석을 가져올게요!”
“……그보다 방까지 부축해 주면 좋겠는데.”
“아. 그럼 당장 가서 하인을!”
─덥석.
커다란 손이 다급하게 오드리의 팔목을 붙잡았다.
“방이 코앞이지 않나.”
“네?”
“그게, 굳이 번거롭게 오갈 필요가 있느냔 말이야. 하인도 나름대로 바쁜 일이 있을 테고.”
“…….”
“그대가 자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
“또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거나, 뭐, 위급 상황이 찾아온다거나 하는.”
오드리가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설마, 지금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저 거대한 덩치를 그녀가 무슨 수로 부축한단 말인가?
한편, 뒤늦게 제 손의 위치를 파악한 데릭은 자기가 더 놀란 얼굴로 황급히 손을 떼었다. 귓바퀴가 붉은 듯도 하였다.
“……일단 기대 보세요.”
“고맙군.”
“합.”
바짝 붙어 선 오드리가 마지못해 그의 한쪽 팔을 지탱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자꾸만 그의 무게에 밀려났다.
‘하는 수 없지.’
오드리는 낑낑대며 그의 왼쪽 팔을 둘러멨다. 마치 프리트 공작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듯한 모양새였다.
“뭐, 뭘 하는……!”
잔뜩 당황한 데릭이 저도 모르게 상반신을 비틀었다.
도돌이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엄살을 부렸다가 도리어 천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깃털로 그의 옆구리를 짓궂게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고작 도돌이의 몸이 옆구리에 와 닿았을 뿐인데.
‘왜 이러지?’
점점 숨이 가빠 오고, 찌르르한 고양감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둥둥 귓전을 때려 대는 심장 박동 소리가 고막을 터뜨릴 듯했다.
‘……급소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 반응인가.’
옆구리가 이토록 위험한 부위였을 줄이야. 도돌이 덕에 여태껏 몰랐던 약점 하나를 새로이 알게 된 꼴이었다.
데릭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슬쩍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죽을 둥 살 둥 그를 부축하던 오드리는 더욱 휘청거렸다.
“으앗, 이, 이쪽으로 오세요!”
“……!”
자그마한 손이 그의 반대쪽 옆구리를 쭉 잡아끌었다. 정확히는 옷자락을 붙잡아 당긴 것이지만. 불시에 양쪽 옆구리를 점령당한 프리트 공작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왼쪽 옆구리엔 도돌이의 몸이, 오른쪽 옆구리엔 도돌이의 손이 있었다. 어디든 그가 도망갈 곳은 없었다.
“그만!”
“네?”
“이제, 혼자 걸을 수 있을 듯하다.”
“……?”
“하…….”
저도 모르게 벽을 짚은 데릭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돌이는 죽어도 모를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서 우렁찬 군가가 울려 퍼지고 있단 사실을.
* * *
에밀리아는 망아지처럼 날뛰는 아들을 보며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로빈, 엄마가 뭐라고 했지?”
“에베베베!”
“계속 이러면 다음엔 안 데리고 올 거야. 무서운 유모한테 맡기고 온다?”
“……칫.”
로빈은 불퉁한 얼굴로 제자리에 앉았다. 짤막한 다리를 이리저리 흔드는 꼴이 불만 가득한 모양새다. 겨우 한숨을 돌린 에밀리아가 클로드에게 사과했다.
“미안. 좀 정신이 없지?”
“괜찮아. 귀엽기만 한걸.”
“귀엽기는? 꼬마 악당이 따로 없는데.”
색유리를 통과한 빛은 아이의 짧은 머리칼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연두색 눈동자까지 더해지자 그 위로 익숙한 얼굴 하나가 겹쳤다.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그나저나 너무 섣부르게 결정한 거 아니야? 난 네가 평생 결혼도 안 할 줄 알았는데.”
“왜?”
“워낙 한결같아서?”
“…….”
“네 성격에 보여 주기식 결혼을 할 줄은 더더욱 몰랐지. 대단하다.”
클로드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그러는 동안 에밀리아는 아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 왼손 약지에서 빛나는 결혼반지가 오늘따라 유독 클로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결혼하면 행복해?”
“순서가 잘못됐잖아. 결혼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니까 행복한 거지.”
“정말 너무한다.”
“그나저나 아네트는? 오늘 같이 온다더니.”
“곧 올 거야. 좋은 사람이니까 친절히 대해 줘.”
─딸랑.
멀리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클로드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 사이, 에밀리아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정말 고백 안 해 봐도 괜찮겠어? 오래 좋아했잖아.”
“새삼스럽게.”
“그럼 절대로 들키지 마. 죽을 때까지 평생.”
“……그래야지.”
“참. 그리고 오드리라고 했나?”
“응?”
“네 눈 좀 어떻게 해 봐. 그러다 괜히 오해하겠던데.”
“…….”
“그럼 서로 곤란하지 않겠어? 꿩 대신 닭도 아니고.”
믿었던 친구에게 한 방을 얻어맞은 사이, 잔뜩 긴장한 아네트가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아네트 맞죠? 결혼 미리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
그러나 클로드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쩐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 * *
오드리는 프리트 공작의 약을 챙겨 준 뒤, 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침대 주위를 서성였다. 그러다 뒤늦게 물었다.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때 호수에서 다치셨잖아요.”
“…….”
“안 다치셨다면서…….”
피로 물들었던 그의 셔츠가 자꾸만 떠오른 탓이다. 펠리오스에서 쓰러지던 날 밤, 코끝을 스치던 비릿한 혈향도 자연스레 생각났다. 오드리는 진작 눈치채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죄송해요.”
“그대가 나에게 미안할 건 없다.”
“하지만-”
“오히려 사과해야 할 건 나지.”
그런데 어째 그녀를 올려다보는 프리트 공작의 눈이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이었다.
“최대한 가둬 두려 했으나 많이 놓쳐 버렸다.”
“네?”
“그대의 회복이 느린 것도,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탓이다.”
“무슨…….”
오드리는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도대체 뭘 가두려 했다는 거야? 뭘 잃어버렸고?’
어쩐지 아주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서 그대가 산산이 부서지는데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그대를 이루던 것들을 제대로 붙잡지 못해 놓쳐 버렸어.”
“……!”
“전부 나의 잘못이다.”
뒤늦게 사건의 전말을 파악한 오드리가 경악했다.
‘미쳤나 봐!’
저 미련한 남자는 본인을 할퀴는 빛 입자들을 가둬 두려 했나 보다. 온몸에 깊은 자상을 입으면서까지.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나 싶어 답답하면서도 속이 불편해졌다.
“그런 게 아니에요……!”
오드리는 한사코 자책하는 프리트 공작에게 한참이나 마력 폭주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모든 설명을 들은 뒤에도 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둘 다 잘못한 것으로 하지. 나는 무모했고, 그대는 깜빡한 거야.”
“…….”
“그럼, 오해도 풀었으니 이젠 친구가 될 일만 남은 건가?”
“친구요?”
난데없는 친구 타령이 다소 쌩뚱맞았다.
그래도 한때는 고용주였던 남자와 친구라니. 이게 가당키는 한가? 게다가 그는 오드리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어?’
선후 관계가 뒤바뀐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나름대로 다 계획이 있었다. 이름하여,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친구 사이란, 언제든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라 했다.’
남녀 사이에 친구라는 이름만큼 좋은 핑곗거리도 없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곁을 맴돌 수도 있으며, 호시탐탐 빈틈을 노릴 수 있으니까.
‘혼자 좋아만 한다고 했지, 손 놓고 구경만 하겠다고 하진 않았다.’
데릭은 망설이는 듯한 도돌이를 보며 쐐기를 박았다.
“우린 피차 비슷한 처지 아닌가. 분명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마음을 바라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편히 생각하도록 해.”
“…….”
“힘들 때면 언제든 나에게 털어놓아도 좋다. 무슨 이야기든 전부 들어 줄 테니.”
“…….”
“옆에만 있어 줘. 친구라는 이름으로도 좋다.”
오드리는 자신 때문에 누워 있는 프리트 공작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어차피 케벨슨 백작가가 프리트 공작가의 가신인 이상, 두 사람은 평생 얽힐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애매하고 불편한 관계보단 차라리 친구 사이가 낫지 않을까?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그의 감정도 무뎌져 진짜로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젯밤의 절절한 고백도 먼 훗날 곱씹을 추억거리가 될지도 모르지. 클로드를 향한 오드리의 마음도 분명 그럴 테니까.
“…….”
데릭이 간절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오드리는 마음을 정했다. 저렇게 미련할 정도로 바보 같은 남자에게 더 이상 모질게 굴 수는 없다고.
“……좋아요. 친구 해요, 우리.”
“나도 좋다.”
방금까지만 해도 누워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으응?’
그러더니 다짜고짜 오드리의 양손을 잡고 깍지를 끼는 게 아닌가.
“저, 저기, 이건 좀……!”
“오해할 것 없다. 이건 친구끼리 나누는 우정의 악수니까.”
“네?”
악수를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던가? 그것도 친구 사이에?
지독하게 얽힌 열 손가락이 평생 풀어지지 않을 족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데릭은 ‘우정의 악수’라는 말을 방패처럼 내세우며 한참이나 오드리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참으로 허울 좋은 핑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