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열병 上
신대륙에 마광산을 가진 국가는 단 한 곳뿐이었다. 크리앙트 제국의 동쪽에 있는 베르빌 연합국. 신대륙 유일의 마력석 공급처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횡포를 일삼는 곳이었다.
그런데 프리트 공작령에서 무려 두 번째 마광산이 발견된 것이다.
‘황실에서는 후회하겠군.’
불모의 땅인 줄로만 알았던 땅이 사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을 줄이야.
데릭은 얼른 이 사실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흠흠.”
“…….”
“호수는 어제부로 조사가 끝났다.”
“네에.”
“실종 사건에 마탑이 연루되었을 가능성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그러나 도돌이의 반응은 생각보다 뜨뜻미지근했다. 마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이게 아닌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호수 밑바닥을 조사하던 도돌이답지 않았다.
조바심이 난 데릭은 그녀가 묻기도 전에 먼저 나서서 줄줄이 실토하기에 이르렀다.
“호수 바닥에서 느껴졌던 마력은, 마광산의 힘이었을 것이다.”
“……마광산이요?”
“그래. 물이 빠진 호수 바닥에서 마광산이 발견되었다.”
“……!”
“신대륙에서는 두 번째이지.”
드디어 도돌이의 얼굴에 표정이랄 것이 깃들었다. 데릭은 그 작은 변화에도 마음이 들떠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외부 공개까지는 시일이 좀 걸릴 것이다. 아무래도 출처 문제가 있다 보니.”
“아, 네.”
“그대에겐 어떤 피해도 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겠다. 그리고…….”
그가 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마치 등 뒤로 커다란 꽃다발을 감추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좋아하는 여자를 기쁘게 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 딱 그 나이대의 청년처럼 보였다.
“광산엔, 그대의 이름을 붙이려 한다.”
“……!”
“그대가 허락한다면.”
하지만 오드리는 감동하기는커녕,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건 제국 역사서에 기록되고도 남을 정도의 위대한 발견 아닌가! 그런 뜻깊은 곳에 외간 여자의 이름을 붙이겠다고?
‘미쳤나 봐!’
벌써부터 두 사람을 둘러싼 온갖 구설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구,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오늘, 저녁이나 함께 들지.”
“네에?”
“할 말도 있고.”
그러나 프리트 공작의 머릿속엔 즐거운 상상이 가득했다.
‘아마 깜짝 놀라겠지.’
샐러드를 잘 먹는 도돌이를 본 순간 결심했다. 펠리오스의 요리사를 공작성으로 스카웃하고 말겠다고. 미래의 공작 부인을 위한 요리사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협상은 성공적이었다.
‘얼른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군.’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뻐할 도돌이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한편, 온종일 그의 눈치만 살피던 오드리의 얼굴은 사뭇 결연해졌다. 그의 마광산 이야기가 기폭제가 된 듯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뭐지?”
“그게…….”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프리트 공작을 밀어낼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어.’
어젯밤 내내 고민했지만, 결국 돌고 돌아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해결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오해를 푸는 것. 오드리는 여태껏 후환이 두렵다는 이유로 모른 척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프리트 공작이 소문처럼 분별없이 사람을 죽일 남자가 아니라는 걸.
“그 편지…… 말인데요.”
“편지?”
“죄, 죄송해요!”
오드리가 다짜고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이 순간에도 도돌이부터 달래고 보았다.
“그대가 나에게 죄송할 건 하나도-”
“제가 잘못 보낸 거예요!”
“…….”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의 얼굴에선 어떤 동요도 엿볼 수 없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줄곧 오드리에게만 고정된 시선은 여느 때처럼 올곧았다.
“……그게, 무슨.”
“다른 사람에게 쓴 편지인데, 잃어버리는 바람에…….”
“…….”
“각하께 갔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런데 일이 너무 커져서, 사실대로 말하는 게 겁이 났어요.”
“…….”
“지, 진작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
데릭은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도돌이에게 받은 사랑스러운 연애편지가, 실은 다른 이를 향한 고백이었다고? 그럼, 도돌이는 단 한순간도 그를 마음에 품은 적 없었단 말인가?
“…….”
어떤 순간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던 그의 몸이 작게 휘청였다. 마치 밑도 끝도 없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나의, 도돌이가…….’
지난 몇 개월간 차곡차곡 쌓아 온 그의 세상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속절없이.
* * *
“클로드 오라버니!”
“오드리?”
클로드는 재무부 앞에 서 있는 오드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 기다린 거야?”
“헤헤. 오라버니랑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해서요.”
“어쩌지? 오늘 저녁에도 약속이 있는데…….”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으음.”
한참 뜸을 들이던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예쁘게 웃었다.
“그래. 같이 가자.”
“야호!”
애써 밝은 척을 하는 오드리도 함께 마차에 올랐다.
‘……체했나?’
그런데 자꾸만 속이 답답했다. 프리트 공작과의 오해도 풀었으니 후련해져야 맞는데. 가슴속 어딘가에 죄책감이 얹힌 것처럼 불편했다.
‘괜찮아질 거야. 앞으론 볼일도 없는걸.’
오드리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안 그래도 공작성 수석 마법사직을 막 그만두고 나오는 길이었다. 여러모로 민폐를 끼친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만 마광산 건에 대해서는 필요할 경우 언제든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로 했다.
‘이젠 클로드 오라버니에게만 집중해야지!’
이제야 비로소 원래의 삶을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오드리의 평온은 오래 가지 못했으니.
“……오드리 케벨슨?”
“바바라 몬튼?”
레스토랑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를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코흘리개 시절 죽도록 싸웠던 상대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오드리, 아는 사이였어? 같이 오길 잘했네.”
“하하…….”
오드리는 억지웃음을 웃으며 자연스레 클로드의 옆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잠깐!”
“……?”
“호호! 오드리, 너도 참. 오랜만인데 정말 이럴 거야?”
“뭐?”
“넌 당연히 내 옆자리에 앉아야지! 그간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다고!”
쟤가 왜 저런담? 유학을 다녀오더니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오드리는 난데없이 친근한 척 구는 바바라를 영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와. 얼르은~”
“으앗!”
그러나 강한 힘에 이끌려 결국 바바라의 옆에 앉고 말았다.
클로드의 맞은편은 당연히 바바라의 차지였다.
“넌 눈치도 없이 이런 델 따라오니?”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야?”
“하여간, 멍청해서는.”
오드리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이는 말엔 가시가 가득했다.
물론 그렇다고 쉽게 기죽을 오드리가 아니었다. 훼방을 놓기로 마음먹었으면 이 정도 비난쯤은 기꺼이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바바라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촤악.
“어머!”
“앗!”
“미안해, 오드리! 이걸 어쩌지? 화장실에 가서 좀 닦아야겠다!”
“…….”
식사가 나오자마자 실수인 척 와인을 쏟는 솜씨 좀 보라지. 아주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이런다고 물러날 줄 알아?’
오드리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겨우 진정시켰다.
두 사람만 남겨 두고 자리를 비우는 건 죽어도 싫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하지만 얼룩이 너무 흉한걸? 사람들 눈엔 칠칠치 못한 애처럼 보일 거야.”
“어차피 마차 타고 갈 거라서.”
“그래도! 너는 어쩜 애가-”
그때, 클로드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 건넸다.
“오드리. 이거라도 걸칠래? 혹시 많이 신경 쓰이면 집에 데려다줄게.”
“에밀튼 소백작님!”
이때다 싶은 오드리는 애써 시무룩한 척을 하였다.
“좀 아끼는 옷이긴 한데…….”
“안 되겠다.”
“……!”
클로드는 곧바로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저, 저기요!”
“값은 지불하고 갈 테니, 저희 몫까지 즐겨 주세요.”
“허! 제가 돈이 없는 줄 아세요?”
“그럴 리가요. 사죄의 의미였습니다. 다음번에 만나면 그때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보세요!”
“다음에 보자, 바바라!”
“너……!”
오드리는 재빨리 클로드를 따라 나갔다. 큼지막한 겉옷에서 전해지는 온기 탓에, 마치 그에게 안겨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먼저 타.”
“네!”
그런데 클로드는 마차에 탄 뒤로 줄곧 창문 밖만 바라보았다.
‘저 밖은 어둠뿐인데…….’
혹시 그 여자 생각을 하는 건가 싶어 문득 불안해졌다. 그 뒤엔 결혼 생각이 이어질 게 뻔했으니까. 오드리는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아무 말이나 던지고 보았다.
“오라버니, 바바라랑 결혼할 거예요?”
“내가?”
“네.”
클로드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면서.”
“……!”
“너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을 하겠어?”
오드리는 마치 출구가 없는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도무지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어느 날은 에밀리아를 좋아하는 듯하다가도, 어떤 날은 꼭 오드리를 좋아하는 것만 같다. 이런 모호함이 더는 싫었다.
“오라버니.”
“응?”
“…….”
지난 몇 년간 꺼내지 못했던 말들이 입안을 맴돌았다.
그러나 클로드는 영 걱정스러운 얼굴로 순서를 가로챘다.
“혹시 아직도 아픈 거야?”
“그게 아니라…….”
“약이라도 지어서 보내 줄 걸 그랬어. 마침 좋은 약초도 들어왔는데.”
“제가 오라버니를-”
“아, 거의 다 왔네. 겉옷은 그냥 다음에 돌려줘. 오늘은 푹 자고. 알았지?”
“…….”
클로드는 오드리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긴 싫었다.
“제가 오라버니를 많이-”
“오드리.”
그가 습관처럼 웃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얼굴이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그 말을 꺼낸다면 결코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너는 언제나 나에게 소중한 사람일 거야.”
“…….”
“설령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참으로 다정하면서도 잔인한 말이었다. 평생을 변치 않을 것처럼 말하지만, 지금 이상의 발전은 없을 거란 소리 아닌가.
차라리 싫으면 싫다고 하지. 어떻게든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는 그의 다정함이 되레 야속했다.
동시에 안개가 낀 듯 불명확하게 보이던 것들이 한층 또렷해졌다.
“……다 알고 있었어요?”
“오드리.”
“도대체 언제부터?”
클로드는 오드리의 마음을 전부 알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감쪽같이 모른 척을 해 왔나 싶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의 의미 없는 행동 하나에 울고 웃었던 그녀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얼마나,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
“널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오라버니는 내 마음도 모르면서!”
“오드리.”
온 세상이 눈물로 번져 갔다. 뿌연 시야 너머의 그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의 목소리도 오드리만큼이나 괴롭게 들린다는 점이었다.
“네 마음, 누구보다 잘 알아.”
“…….”
“나도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 너한테만 이야기하는 거야.”
“흑……!”
클로드가 힘없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마치 모든 걸 포기한 사람 같은 허탈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세상엔 고백조차 할 수 없는 마음이 있더라.”
“…….”
“상대방에게 폐가 되거든.”
“그 사람이죠? 아카데미 동기생이라던.”
“에밀리아?”
오드리의 어깨가 요란하게 들썩였다. 가쁘게 들이마시는 숨을 따라 중간중간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부정하지 않아도 돼요. 킁, 결혼해서 아이가 있다는 것도 아는걸요. 그래서 오라버니가 결혼을 서두르는 거잖아요…….”
“에밀리아가 결혼한 건 또 어떻게 알았어?”
“어차피 사랑 없는 결혼이라면, 그냥 나랑 하면 안 돼요?”
“오드리.”
“평생 그 사람을 사랑한대도 괜찮아요. 짝사랑이 새삼스럽지도 않은걸요. 그러니까…….”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애절했다.
오드리는 모든 자존심을 내던져서라도 그를 가지고 싶었다. 어차피 아플 거라면, 적어도 그의 옆에서 아픈 게 낫지 않겠는가. 평생을 가짜 부부로 살아도 좋았다. 오히려 그가 자신을 이용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단호했다.
“내가 어떻게 그래.”
“…….”
“어떻게 감히 널 아프게 해?”
“…….”
“네가 날 버릴 순 있어도, 나는 절대로 너를 버릴 수 없는걸.”
“오라버니…….”
“말했잖아. 널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거절을 위한 변명이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엔 오드리를 향한 걱정과 애정이 가득했다. 정말로 소중한 이를 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문득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세 살짜리 애처럼 떼쓰듯 그의 사랑을 갈구하려던 게 아니었다. 상대방에게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는 사랑을 꿈꾸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오드리는 말도 안 되는 고집으로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말하지 말걸.’
그녀만 입을 다물었더라면, 평생 이 마음을 숨겼더라면 모두가 좋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가 몰려들었다. 오드리를 둘러싼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내가 다 망쳐 버렸네요…….”
“그런 게 아니야.”
“내 잘못이에요…….”
문득 두려웠다. 오늘의 고백으로 지난 추억들이 퇴색되진 않을까? 두 사람이 정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굴 수 있을까?
“날 봐, 오드리.”
“…….”
“네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지.”
클로드는 눈물에 젖은 오드리의 양쪽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다정하게 볼을 쓸어 주는 엄지손가락이 모두 다 괜찮을 거라고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흐윽…….”
오드리는 마차 안에서 한참이나 울었다. 그러나 그를 원망하진 않았다. 본인의 숨겨 왔던 이야기까지 솔직히 털어놓고 양해를 구하는데, 이보다 다정한 거절이 어디 있겠는가.
클로드는 오드리에게 너무도 완벽한 첫사랑이었다.
* * *
데릭은 공작성을 나서는 도돌이의 뒷모습을 창문 너머로 뒤쫓았다.
그녀의 옆엔 에밀튼 소백작이 함께였다.
‘제가 잘못 보낸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쓴 편지인데,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머릿속에선 자꾸만 아까의 장면이 반복되었다.
‘……좋아한다던 사람이, 에밀튼 소백작인가.’
그래, 생각해 보니 두 사람은 그의 생일 무도회에도 파트너로 참석했었다. 때로는 함께 마차를 타고 오기도 했었지. 게다가 그의 옆에 선 도돌이가 저렇게 환하게 웃고 있지 않나.
편지의 주인공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에밀튼 소백작인 듯했다.
“…….”
데릭은 어두운 얼굴로 뒤돌아섰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편지의 진짜 주인을 찾는다 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는 남은 일을 마저 처리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런데 잘 어울리는 한 쌍 같던 오드리와 클로드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
도저히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탁.
데릭은 만년필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도돌이는 단 한 번도 그의 것이었던 적이 없는데도, 왠지 에밀튼 소백작에게 도돌이를 빼앗긴 듯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못내 자존심이 상했다. 도돌이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그가 아니었다는 게.
‘……내가 헛꿈을 꾸었군.’
데릭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삶을 꿈꿨다. 누군가의 남자가 되고 또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는 그런 소박한 삶. 도돌이와 함께라면 모든 게 완벽할 것 같았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주인공이 아니라 한낱 방해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도돌이의 사랑은 줄곧 에밀튼 소백작을 향해 있던 거다. 그게 못내 가슴이 아팠지만, 이제 데릭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도돌이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죄 없는 도돌이를 흔들어 놓을 순 없었다.
‘이게 다 내 탓이다.’
프리트 공작은 자조했다. 지나고 보니 편지 한 장에 호들갑을 떤 스스로가 한심한 머저리처럼 느껴진 까닭이다.
세상에 어떤 여자가 그를 좋아하겠는가? 할 줄 아는 거라곤 누군가를 죽이거나 고문하는 일뿐인데. 게다가 좋은 말동무도 못 된다. 우는 여자 하나도 못 달랠뿐더러, 프러포즈도 혼자 못 하는 한심한 사내이기도 하다.
‘도돌이가 이런 나를 좋아할 리가 없지.’
반면 도돌이는 너무도 완벽한 여자였다. 포근한 머리칼도, 맑은 눈동자도, 달콤한 향기도, 높다란 목소리도, 단풍잎 같은 손도, 통밀빵 같은 발도. 세상의 모든 깜찍함과 앙증맞음과 사랑스러움을 뭉쳐 놓은 존재였다.
그런 도돌이가 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를 좋아한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했군.’
데릭은 뒤늦게 현실을 자각했다. 그리곤 천천히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벽에 붙여 놓았던 순결 보증서와 스크랩 기사들을 전부 떼어 냈다. 전부 도돌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 준비한 것이었다.
그런데 드러난 벽면이 왠지 허전해 보였다. 그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뿐인데도.
‘……익숙해질 것이다.’
데릭은 애써 모른 척하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맨 밑 칸엔 도돌이의 연애편지가 담긴 순금 액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마치 불시의 습격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
데릭은 저도 모르게 액자를 매만졌다.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꼬부랑 글씨. 당장이라도 줄줄 읊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내용. 처음으로 그에게 설렘이라는 것을 알려 준 편지였다.
‘그래 봤자 내 것이 아닌 것을.’
데릭은 망설임 없이 액자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쉽사리 치울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그는 액자를 다시 내려놓았다.
‘마지막에 치우면 된다.’
그리곤 다른 서랍을 열어 몰래 숨겨 놓았던 연애서를 전부 꺼냈다. 장장 스무 권에 달하는 책이었다.
─똑똑!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을 무렵,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루카스일 게 뻔했다.
“들어와라.”
“각하! 이것 좀 보십시오!”
역시. 씩씩대며 들어온 보좌관이 신문 뭉텅이를 내밀었다. 그러나 데릭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얼굴로 책상 정리에만 몰두했다.
“바쁘니 용건만 말해라.”
“이것들이 글쎄, 말도 안 되는 루머를- 그런데 지금 뭐 하십니까?”
“책상 정리를 하고 있다.”
“갑자기요?”
“……그럴 일이 있다. 마침 잘 왔군.”
“으헤엑?”
프리트 공작이 다짜고짜 루카스에게 책을 떠넘겼다. 그간 너무도 아낀 나머지 손도 못 대게 한 것들이다.
“전부 내다 버려라.”
“예? 하, 하지만 이건 각하께서 아끼시던-”
“이젠 필요 없다.”
“예?”
영문을 모르는 보좌관이 바보처럼 눈만 깜빡였다. 주군의 행보가 영 수상한 까닭이다.
‘저 기사도 보셔야 하는데…….’
주말부터 프리트 공작의 이야기로 수도 전역이 시끄러웠다. 남자 배우 넷과 그린 초상화 한 점으로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지껄여 놓은 기사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군에겐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 듯했다.
“그래, 생각난 김에 저 책상도 치워야겠군.”
“……네?”
“오늘 안으로 치워라.”
프리트 공작이 가리킨 것은 케벨슨 영애의 책상이었다. 저걸 치워 버리면 케벨슨 영애는 앞으로 어디에 앉으란 말인가?
혹시, 주군은 덩치도 크면서 굳이 자기 책상에 케벨슨 영애와 붙어 앉으려는 건 아니겠지? 사이좋게 서로를 마주 보고 앉는다거나…….
“하, 하지만 케벨슨 영애도 자리는 있어야지요.”
“내일부터 안 나올 것이다.”
“네?”
“오늘부로 사직서를 냈다.”
“……!”
“새로 맞춘 옷들도 전부 버려라. 더 이상 입을 일이 없을 것이다.”
루카스는 중간이 뜯겨 나간 로맨스 소설 한 권을 읽은 얼굴이 되었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고작 하루 만에 루카스만 모르는 급 전개라니!
프리트 공작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책상을 비우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프리트 공작의 결근 소식이 공작성 전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작위를 물려받은 이래 첫 결근이었다.
* * *
당장이라도 비가 내릴 듯 우중충한 날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보낸 프리트 공작은 새벽녘부터 뒤늦게 열병을 앓았다. 얼마 전 영지에서 얻은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은 탓에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온몸이 불덩이입니다. 이러다 눈을 못 뜨실까 두렵습니다.”
“현재로선 손 쓸 도리가 없습니다.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요.”
“치유 마력석이라도 써 보는 게 어떨까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마음의 병은 마력석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하…….”
루카스는 발만 동동 굴렀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주군이 하루 만에 사경을 헤매게 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저녁 식사를 거르도록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점심까지 기다려 보지요.”
주치의는 프리트 공작의 상처를 살핀 뒤, 다시 한번 소독을 하고 물러났다.
이제 남은 것은 루카스뿐이었다. 그는 대야를 옆에 놓고 부지런히 물수건을 갈았다. 하지만 사랑이 피워 낸 불꽃은 쉽사리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똑똑.
“보좌관님. 황실에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각하께서 열병을 앓고 계신 탓에 입궁이 어려울 듯하다고 전하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루카스는 걱정스레 주군의 상태를 살폈다.
이 시간까지 눈을 감고 있는 주군의 모습이 낯설었다. 고작 하루 만에 수척해진 얼굴과 펄펄 끓는 이마 역시. 여태 단단한 철옹성처럼 느껴졌던 남자도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게 이제야 실감 났다.
동시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주군은 온몸이 찢어지고 베이는 고통 속에도 아픈 내색 한 번 안 하시던 분 아닌가. 그런 그마저도 굴복시킨 사랑이라는 게 도대체 다 뭔가 싶었다.
그때, 미동도 없던 프리트 공작의 얼굴에 미묘한 움직임이 생겼다.
“각하?”
“……도돌이?”
“각하! 정신이 드십니까? 루카스입니다! 앗, 이럴 때가 아니지. 주치의! 얼른 와 보십시오! 각하께서 눈을 뜨셨습니다!”
“…….”
루카스가 주치의를 부르러 나간 사이, 데릭은 멍하니 누워 있었다.
온몸에 쇳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마치 남의 몸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은 누가 아무렇게나 휘저어 놓은 것처럼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도돌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데릭은 잠결에 스친 목소리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를 좋아하지도 않는 도돌이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지. 데릭은 저도 모르게 실망하고 말았다.
“이만하길 정말 다행입니다. 보좌관님도 얼마나 걱정을 하시던지.”
“……호들갑은.”
“일단 해열제 먼저 드시고 간단하게 식사라도 하시지요.”
“되었다.”
“하지만 어제도 저녁을 거르셨다 들었습니다. 이럴수록 상처 회복만 더뎌집니다.”
“설마 죽기야 하겠나.”
“각하……!”
프리트 공작은 다시 눈을 감았다. 도돌이가 없는 세상 따윈 눈에 담고 싶지도 않았다.
‘꿈에서라도 만나면 좋을 텐데.’
캄캄한 어둠 너머로 도돌이의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다. 반가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번지려다가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저렸다. 참으로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똑똑.
“……도돌이?”
그는 노크 소리 한 번에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닫힌 문을 바라보는 얼굴엔 저도 모르게 피어난 기대와 긴장이 넘실거렸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식사를 챙겨 온 하인이었다. 도돌이가 찾아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데릭은 잔뜩 실망하고 말았다.
“각하. 황녀 저하께서 보양식을 보내셨습니다.”
“……필요 없다.”
“식사를 거르시면 약을 쓰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조금이라도-”
“치료하지 않아도 된다.”
“예?”
“수면제나 두고 가지.”
“각하…….”
데릭은 수척한 얼굴로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사랑 한번 지독하군.’
도돌이가 없는 생지옥을 맨정신으로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저 한숨 자고 일어난 뒤엔 이 고통이 끝나 있길 바라는 수밖에.
* * *
웬일로 아침 일찍 일어난 오드리는 여느 때보다도 바쁜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자수를 놓기도 하고, 오두막집에 올라가 책을 읽기도 했다. 그러다 뜬금없이 이젤을 꺼내 들더니 그림까지 그렸다.
사용인들은 오늘따라 이상한 아가씨를 예의주시하였다.
“아가씨 말이야. 좀 달라 보이지 않아?”
“맞아. 음, 뭔가…… 철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좀 성숙해진 느낌이야.”
“젖살이 빠지셨나?”
웃음을 잃어버린 얼굴은 성숙해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삶의 낙을 잃어버린 사람 같기도 했다. 실제로 오드리는 원래의 생활을 되찾으려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이제 겨우 점심이야? 말도 안 돼!’
하지만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자꾸만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클로드를 도려낸 탓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작성의 근무 패턴에 저도 모르게 익숙해졌는지, 한가한 하루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도대체 예전에는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오드리는 포기하지 않고 이것저것 일을 벌였다.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한스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았다.
-야, 너……. 놀라지 마.
“뭔데?”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한스가 마지못해 클로드의 소식을 전했다.
-저녁 식사하는데 형이 다짜고짜 폭탄을 터뜨렸어.
“클로드 오라버니가?”
-어. 뭐라는 줄 알아? 결혼하겠대. 벌써 프러포즈까지 했다더라! 진짜 미친 거 아니야?
“…….”
-심지어 그 여자는 냅다 동의했단다! 와, 이런 졸속 결혼이 어딨냐?
오드리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클로드가 결혼을 서두를 거란 사실은 이미 짐작한 바였다. 그런데도 막상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선득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익숙해져야 해. 괜찮을 거야.’
한스는 웬일로 얌전한 친구가 영 이상했는지, 의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너 괜찮냐?
“응.”
-거짓말 같은데.
“진짜거든? 하여간, 의심만 많아서는.”
-…….
“더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일, 이, 삼, 사, 오.
숫자 다섯을 센 오드리가 단호하게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통신구를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이 차올랐다. 오드리는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로 다시 통신구를 두드렸다.
─톡, 톡, 톡.
“아놀, 흑, 아놀드 오라버니…….”
그러나 하나뿐인 오라비는 동생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몇 번이고 더 두드려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놀드의 목소리를 못 들은 지도 벌써 몇 주가 되어 갔다.
* * *
데릭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몸은 여전히 천근만근이었다.
고열을 앓는 와중에도 이놈의 지독한 사랑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도돌이가 보고 싶었다.
“…….”
반쯤 몸을 일으킨 그가 한쪽 팔로 휘적휘적 협탁 서랍을 뒤졌다.
얼마 가지 않아 손끝에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남겨 놓길 잘했군.’
펠리오스 시찰을 나갔을 때 화가가 그려 준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데릭은 그림 속의 도돌이를 퍽 애틋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그대가 많이 보고 싶다.’
우연히 굴러들어 온 사랑은 그의 심장에 박혀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랑이란 참으로 가혹했다. 빠져들 때는 순식간이더니, 왜 빠져나오는 것은 한세월인 걸까?
딱 도돌이를 좋아했던 시간만큼만 기다리면 괜찮아질까? 그럼 더 이상 도돌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힘겹게 몸을 일으킨 데릭이 미처 치우지 못한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곳엔 도돌이가 선물해 준 치유 마력석이 들어 있었다.
“…….”
데릭은 이미 수천 번을 만지작거렸던 마력석을 움켜쥔 채 도돌이를 떠올렸다. 그러자 열이 끓는 와중에도 절로 웃음이 났다.
‘……중증이로군.’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인제 와서 도돌이에게서 빠져나오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는 것을.
시작이 어땠는지, 누가 먼저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도돌이 없이는 도저히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었다.
데릭은 캄캄한 창밖을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방을 나섰다.
“각하? 간단히 요깃거리라도-”
“되었다. 외출을 해야겠어.”
내내 문 앞을 지키던 루카스가 경악했다.
“안 됩니다!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 하십니까?”
“급한 일이다.”
“정 그러시면 마차를 대기 시킬 테니, 제발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릴 시간이 없다.”
“각하!”
보좌관을 뿌리친 프리트 공작이 곧장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꾸벅꾸벅 졸던 하인 하나가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맞이했다.
“가, 각하! 여기까진 어쩐 일로…….”
“마구는 어디 있지?”
“여, 여기 있습니다. 하온데-”
“비켜라.”
─히이잉!
능숙하게 마구를 장착한 프리트 공작이 곧장 말을 타고 공작성을 나섰다. 머릿속엔 온통 도돌이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소나기로 번졌다. 펄펄 끓던 몸이 빗물에 싸늘히 식어 갔다.
‘조금만 더…….’
데릭은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이끌고 열심히 말을 달렸다. 그러는 동안 겨우 아물었던 상처가 벌어지며 그의 몸은 또다시 만신창이가 되었다.
마침내 케벨슨 백작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쫄딱 젖어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도돌이를, 도돌이를 봐야 한다.”
“히익! 프, 프리트 공작님! 얼른 안으로 드시지요!”
마구의 인장을 확인한 하인이 곧바로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데릭은 다시 열이 끓는 와중에도 습관처럼 ‘도돌이’ 타령을 반복했다.
“도돌이를 봐야 해…… 도돌이를…….”
“도돌이? 도토리? 아, 오드리 아가씨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금방 모셔오겠습니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편한 차림의 오드리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프리트 공작의 몰골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피, 피가……!”
흠뻑 젖은 옷 위로 군데군데 핏자국이 배어 나온 까닭이다. 마치 어디선가 채찍질이라도 당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데릭은 전혀 개의치 않고 보고 싶었던 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안 된다.”
“네?”
“이미 늦었단 말이다.”
“야밤에 그게 무슨-”
“나는 그대를 안 좋아할 수가 없어. 불가능해.”
“……!”
다짜고짜 들이닥친 프리트 공작은 밑도 끝도 없는 고백을 늘어놓았다.
“단풍잎 같은 손도, 통밀빵 같은 발도, 보검의 손잡이 같은 연두색 눈동자도.”
“…….”
“다 좋은데 어떡하라는 건가.”
데릭의 앞머리에 맺혀 있던 빗방울이 천천히 볼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그가 애처롭게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제발 곁을 내어 달라고.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대가 이미 마음속에 누군가를 품고 있다는 것도 알아.”
“……!”
“그래도 내가 그대를 좋아해.”
“…….”
“그냥 좋아해.”
데릭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눈앞에 놓인 게 가시밭길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그냥 걷고 싶었다. 미친 사람처럼.
“나 혼자 죽을 것처럼 좋아만 하겠다.”
“…….”
“그대의 마음이 변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혼자 멋대로 저지른 일이니, 그대를 원망하지 않아.”
“…….”
“그러나 먼 훗날 언젠가, 만약에, 혹시라도.”
그가 가정한 상황은 너무도 불확실하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시선만큼은 언제나 그렇듯이 올곧았다.
“그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변한다면, 주저 없이 나에게 알려 줬으면 한다.”
“…….”
“내가 빈틈을 파고들 수 있도록.”
오드리는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쏟아지는 빗속에서 상처 입은 짐승 한 마리를 주운 기분이었다. 저 짐승이 기력을 회복하면 잡아먹힐지도 모르는데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저 미련한 모습이 마치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그러는 동안 프리트 공작의 셔츠는 점점 피로 물들어 갔다.
‘……안 되겠어.’
보다 못한 오드리가 그에게 다가갔다. 고백이고 뭐고, 환자를 계속 세워 둘 순 없는 노릇이다.
“일단 다친 곳부터-”
“…….”
“각하?”
그러나 중심을 잃은 몸이 서서히 오드리를 향해 기울어졌다.
─풀썩.
“악.”
프리트 공작은 마침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미련 없이 정신을 잃었다. 거대한 몸뚱이로 오드리를 한껏 짜부라뜨린 채.
─똑똑.
“공작님께서 쓰실 수건을 가져-, 세상에! 아가씨!”
“사, 살려 줘…….”
그의 가슴팍에 짓눌린 오드리가 시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게 사람인지 철근인지. 우그러진 한쪽 볼이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는 점이었다.
* *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원래 이런 분이 아니신데, 어휴. 정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뒤늦게 마차를 타고 등장한 루카스가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우리 개가 사나워도 사람을 물진 않는다고 변명하는 주인 같았다.
그러는 동안 프리트 공작의 상태를 살핀 주치의가 고개를 내저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부은 꼴입니다.”
“많이 심각한가요?”
“예. 아마 며칠간 고생하실 겁니다. 식사라도 잘 챙겨 드셔야 하는데, 어제부턴 그마저도 안 하시니…….”
오드리가 멈칫했다.
‘어제부터 식사를 안 해?’
왠지 그의 상태에 그녀가 한몫한 듯한 죄책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쪼록 우선은 열을 내리는 게 관건입니다.”
“……네에.”
“큼. 그나저나 제대로 모셔갈 수 있을지 걱정이군요. 밖에 비도 오고,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하는데.”
주치의가 곤란한 듯 눈을 굴렸다.
이렇게 엉망인 몸을 이끌고 올 정도라면 저 여인이 열병의 원인일 터. 그런데 마침 눈앞에 완벽한 치료제가 있다. 주치의는 며칠간 임시 보호라도 맡기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래도…… 옮겨야겠지요?”
“각하께서 안정을 취하신 뒤에 옮기는 게 좋겠네.”
“아버지!”
때마침 케벨슨 백작이 등장했다. 막 야근을 마치고 퇴근한 참이었다. 공작성에서도 못 본 프리트 공작이 백작가에 와 있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던지.
“아놀드의 방이 비었으니 일단 그쪽으로 모시자꾸나.”
“케벨슨 백작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루카스가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그러는 동안, 하인 여럿이 달라붙어 응접실 소파에 누운 프리트 공작을 옮겼다. 케벨슨 백작 역시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가 보구나.”
“……그러게요.”
“오늘 공작성이 난리가 났단다. 여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분이 웬일로 일을 다 쉬기까지 하시고.”
“…….”
“아무튼,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려무나.”
“저는 괜찮아요.”
“환자가 있으니 내일부턴 식사에 더욱 신경을 써야겠어. 카밀 부인은 분명 좋아할 게다.”
케벨슨 백작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놀드의 방으로 향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오드리도 뒤따랐다.
“보좌관님.”
“아, 케벨슨 영애.”
“상처는 치료하신 건가요? 피가 많이 나는 것 같던데…….”
“안 그래도 상처가 전부 벌어져서 다시 봉합해 놓았습니다. 그나마 다리 쪽은 멀쩡해서 다행이지요.”
“…….”
다리 쪽은 멀쩡하다고?
‘도대체 상처가 어디까지 있는 거야?’
봉합까지 할 정도면 꽤 깊은 상처일 텐데. 살짝 벌어진 셔츠 사이로는 옅게 핏물이 든 붕대만 보였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다치신 건가?”
“저도 궁금해 죽겠습니다. 그런데 도통 말씀을 안 하십니다.”
“흠. 각하께서도 뭔가 사정이 있으시겠지. 오늘 밤에는 내가 있을 테니 자네는 좀 쉬시게.”
“아휴, 아닙니다! 이 이상 신세를 질 순 없지요.”
“명색이 백작가의 손님이신데, 주인이 곁을 지켜야지. 자네도 우리에겐 손님일세.”
“그렇지만-”
“제, 제가 있을게요!”
지지부진한 줄다리기가 이어질 무렵, 난데없이 오드리가 끼어들었다. 케벨슨 백작의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오드리?”
“아버지는 내일도 출근하셔야 하잖아요.”
“하지만-”
“제가 잘 살필 테니, 조금이라도 눈 좀 붙이세요. 아셨죠?”
딸의 등쌀에 떠밀린 백작은 곧장 침실로 보내졌다. 프리트 공작의 잠자리를 살피는 오드리를 보며 주치의와 루카스는 그제야 안도했다.
“이건 해열제입니다. 새벽에 열이 많이 오른다 싶으면 한 번 더 투약하시면 됩니다.”
“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 아파하시거든 진통제는 여기 있습니다.”
“네.”
“이건 소염제인데-”
“크흠. 주치의, 그 정도면 됐습니다.”
“아이쿠. 내 정신 좀 봐.”
“그럼 저희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네.”
유난을 떠는 주치의를 붙잡고 방을 나서던 루카스가 문득 등을 돌렸다.
“맞다, 케벨슨 영애.”
“네?”
“안 그래도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저한테요?”
“예. 잠시만요.”
주치의를 먼저 내보낸 루카스가 넌지시 운을 띄웠다.
“그날. 그러니까, 펠리오스 숲에 갔던 날 말입니다.”
“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그, 그건 왜…….”
“각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셔서요.”
“…….”
당연히 말할 수 없었을 거다. 그녀가 마력 보유자란 사실을 발설하지 않기로 합의를 했으니.
오드리는 막막함에 눈만 끔뻑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 걸까?
“영애께서는 정신을 잃었지, 각하께서는 온몸이 피투성이시지. 제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피투성이요?”
“예. 그 상태로 영애를 안고 나타나셨습니다.”
“…….”
“처음엔 영애께서 짐승에게 습격이라도 받으신 줄 알았다니까요.”
오드리의 시선이 절로 침대 위 남자를 향했다.
“…….”
마력 폭주를 일으키고 졸도한 그녀와 상처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프리트 공작. 아무래도 그의 상처는 오드리의 몸에서 나온 빛 입자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프리트 공작님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오드리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마력 폭주가 이전보다 강력해지기라도 한 걸까? 그녀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케벨슨 영애?”
“아! 그, 글쎄요. 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군요.”
“…….”
“밤늦게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각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네.”
홀로 남은 오드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감히 프리트 공작의 몸에 상처를 내다니! 목이 뎅강 잘려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기는커녕, 되레 비를 뚫고 달려온 그의 행동이 이해되질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도대체 왜 나를 좋아하는 거야?’
고작 잘못 배달된 편지 한 통 때문이라고 하기엔 과하지 않은가.
겨우 몸을 일으킨 오드리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클로드의 결혼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하루였다. 그런데 그녀보다 더 상태가 심각한 프리트 공작을 보고 있으려니 괜스레 마음이 뒤숭숭했다.
아마 누구보다도 그의 처지에 공감하기 때문이겠지. 프리트 공작은 지난 몇 년간 오드리가 겪었던 열병을 똑같이 앓고 있는 듯했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몇 년을 죽어라 좋아한 사람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던데. 어쩌다 낚인 이 남자는 대체 그녀가 뭐라고 이렇게나 공을 들인단 말인가?
그녀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던 클로드의 마음을 조금쯤 알 것도 같았다.
‘오라버니도 이렇게 힘들었을까?’
지난 몇 년간, 오드리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막상 누군가를 내쳐야 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이것도 나름대로 괴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도 마음 편한 사람이 없다. 이래서 흔히들 사랑을 열병이라고 하는가 보다.
* * *
“각하, 정신이 좀 드십니까? 식사를 좀 하셔야지요.”
“……되었다.”
“안 드신대요?”
“네. 아무래도 백작님과 영애 먼저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도돌이?”
프리트 공작이 번쩍 눈을 떴다. 그런데 온통 새까맣던 그의 방과는 정반대인 풍경이 펼쳐졌다.
‘여기가 어디지?’
세상의 모든 색을 끌어다 쓴 듯 휘황찬란한 것이, 한때 그가 즐겨 입던 옷 같았다.
데릭은 본능적으로 눈을 굴렸다. 열에 들뜬 와중에도 보고 싶던 얼굴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보좌관만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각하! 정신이 드십니까?”
“……그 얼굴 치워라. 당장.”
“앗. 이럴 때가 아니지! 저는 케벨슨 백작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케벨슨 백작?”
“어라? 기억 안 나십니까? 어젯밤에 갑자기 말을 타고 케벨슨 백작가로 달려오시지 않으셨습니까.”
“……!”
데릭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곳이, 케벨슨 백작가란 말인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세련된 방이었다. 그렇다면 식사 자리에는 당연히 도돌이도 함께일 터!
“케벨슨 백작님을 모셔올-”
“그럴 필요 없다.”
벌떡 일어난 프리트 공작이 다급하게 몸단장을 했다.
“내가 가지. 식사도 할 겸.”
“…….”
성큼성큼 멀어지는 뒷모습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던 남자답지 않게 기운이 넘쳤다.
* * *
막 첫술을 뜨려던 케벨슨 백작이 기척도 없이 등장한 프리트 공작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하? 식사를 거르신다고 전해 들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착오가 있었나 보군.”
데릭은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침 식사는 건강을 유지하고 일의 능률을 높이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는 중요한 활동이 아닌가.”
“예, 그렇지요.”
“그 중요한 걸 거를 수야 없지.”
“금방 준비시키겠습니다. 루시, 얼른 카밀 부인에게 가서 전하거라.”
“예.”
케벨슨 백작은 어린 하녀 하나에게 식사 준비를 명했다. 그러는 동안 프리트 공작과 루카스가 뒤늦게 자리를 잡았다.
오드리의 맞은편은 이미 주치의의 차지였으나, 다행히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데릭은 뻣뻣한 움직임으로 곧장 그녀의 옆에 앉았다. 조금만 움직이면 곧바로 팔뚝이 스칠 듯한 아주 아찔한 거리였다.
“열은 좀 내리셨는지요?”
“…….”
“크흠! 각하?”
“……아. 간밤에 실례가 많았군.”
프리트 공작이 케벨슨 백작의 물음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어쩐지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감사 인사는 제가 아니라 저희 딸아이에게 하셔야지요.”
“……도돌이?”
“예. 각하의 상태를 살핀다고 오드리가 밤새 곁을 지켰습니다.”
“……!”
데릭 시선이 바로 옆의 도돌이를 향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건 도토리처럼 사랑스럽고 동글동글한 정수리뿐이었다.
‘도돌이가 내 곁을 지켜? 밤새?’
그 말은 곧, 두 사람이 함께 밤을 보냈다는 말인가?
“…….”
“각하?”
그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새벽녘에 겨우 내린 열이 다시 들끓는 것만 같았다. 양 볼이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화끈거렸다.
“실례합니다. 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
마침 타이밍 좋게 식사가 등장했다.
하마터면 도돌이에게 한심한 몰골을 들킬 뻔하지 않았는가! 데릭은 발그레한 얼굴을 숨기려 다급히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회복기엔 음식도 약이 된다지요. 저희 가문의 전속 요리사가 정성껏 준비한 것입니다.”
“……수프로군.”
“예. 얼마 전 각하께서 보내 주신 양상추를 넣고 끓인 것입니다.”
“…….”
프리트 공작의 맞은편에 앉은 루카스가 똥 마려운 개처럼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각하, 이 수프 좀 드셔 보십시오.’
‘음식이란 자고로 씹는 맛이 있어야지.’
‘예?’
‘세상에 수프만큼 끔찍한 음식은 또 없을 것이다.’
‘…….’
‘영양가도 없고 포만감도 없지. 이걸 먹을 바엔 차라리 바닷물을 마시고 말겠다.’
주군이 예전부터 수프라면 아주 끔찍하게 여기는 탓이었다.
프리트 공작은 기본적으로 육식 동물이었다. 거대한 몸을 움직이는 데 고기만큼 효율적인 에너지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케벨슨 백작가의 아침 식탁엔 샐러드, 야채수프, 과일뿐이었다. 간밤에 신세를 진 와중에 음식 투정까지 하려니 영 면목이 없었다.
“백작님의 호의엔 정말 감사드립니다만, 각하께서는 수프를 드시지-”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
“……예?”
“나는 수프를 매우 좋아한다.”
데릭은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당장 수프 한 숟가락을 떠먹었다. 맞은편의 보좌관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입을 떡 벌렸다.
“아주, 환상적인 맛이야. 아침마다 먹고 싶을 정도로군.”
“가, 각하…….”
“하하! 과찬이십니다. 수프야 많으니 얼마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카밀 부인도 기뻐할 것입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데릭이 맞은편의 보좌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뭐 하나. 너도 어서 들지 않고.”
“히익! 넵!”
아주 방해꾼이 따로 없었다. 지금 있는 곳은 무려 도돌이의 저택 아니던가. 잘 보이려 애써도 모자랄 판에, 눈치도 없는 보좌관이 되레 그의 치부를 들추고 있었다.
‘편식쟁이라고 광고를 하는군!’
데릭은 남몰래 이를 갈며 수프를 흡입했다. 세상엔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한편, 루카스는 바로 옆에 앉은 주치의에게 걱정스레 속닥거렸다.
“……주치의도 잘 알지 않습니까. 각하께서 수프를 얼마나 싫어하셨는지요.”
“예, 분명 그러셨지요.”
“저러다 괜히 더 안 나빠지실까 걱정입니다. 몸도 안 좋으신데……. 지금이라도 말리는 게 나을까요?”
“허허, 참.”
나이를 지긋이 먹은 주치의가 너털웃음과 함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지금 각하께서 단순히 수프를 드시는 것으로 보입니까?”
“그야, 실제로 수프를 드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틀렸습니다. 저것은 수프가 아닙니다.”
“예? 그럼 뭡니까?”
“사랑이란 거지요. 각하께서는 지금 ‘사랑’을 드시고계신 겁니다.”
“…….”
루카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양상추 수프인데, 저게 왜 사랑이라는 걸까? 몇 번이고 눈을 비벼 봐도 수프에 떠다니는 건 시퍼런 양상추 건더기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치의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각하께서 제대로 된 약을 찾으셨다는 말과 함께.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시계를 확인한 케벨슨 백작이 곤란한 얼굴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못하다간 지각할 판이다.
늑장을 부리던 프리트 공작도 더 이상 이곳에 머물 핑계가 없어졌다. 공작성에 케벨슨 백작을 보내 놓고, 정작 그는 케벨슨 백작가에 있는 것도 우습지 않겠는가. 주인을 맞바꾸는 것도 아니고.
“본의 아니게 신세를 졌군. 덕분에 많이 나아졌다.”
“그랬다면 다행입니다.”
“……이만 가 봐야겠군.”
데릭은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일어섰다. 그런데 막 식당을 나서려던 케벨슨 백작이 그런 그를 만류했다.
“이참에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며칠 더 머물다 가심이 어떤지요?”
“……!”
“당연히 공작성만큼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사용인들이 성심성의껏 모실 것입니다.”
“아, 아버지!”
“각하께선 지난 몇 년간 제대로 쉰 적도 없지 않으셨습니까?”
오드리는 갑작스레 생긴 군식구를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택이 넓어서 마주칠 일이야 적겠지만, 찝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제 막 고백받은 남자와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이게 무슨 막장 연극도 아니고!’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이마까지 짚어 가며 사뭇 심각한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안 그래도 미열이 있는 것도 같군.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이.”
“이거 큰일이로군요. 맥컬리, 당장 각하를 방으로 모시거라.”
“염치없지만 며칠간 더 신세를 지겠다.”
“…….”
오드리는 제집인 듯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아침 식사 전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 탓이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게냐?’
‘음, 제 이야기는 아니고 친구의 친구 이야기인데요. 정말로요.’
‘……그래.’
‘자기 때문에 다친 사람이 있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전혀 내색하지 않아서 먼저 아는 척하기 곤란한가 봐요.’
‘흠.’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려울 건 없구나.’
케벨슨 백작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해결책을 내놓았다.
‘어쨌든 자기 때문에 다쳤다면 그 사람이 나을 때까지 치료해 줘야지.’
완벽하게 꾸며 냈다고 생각했는데! 현명한 아버지는 딸의 발칙한 거짓말을 단숨에 간파한 듯하다.
누가 뭐래도 오드리의 실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