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장. 한여름 밤의 꿈 (8/25)

제6장. 한여름 밤의 꿈

데릭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달빛이 내려앉은 호수에서 배를 타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일순간 신경이 곤두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응?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맞은편엔 도돌이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단박에 눈치챘다. 도돌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겐 저렇게 웃어 준 적이 없었지.’

순식간에 긴장이 풀렸다. 꿈이라면 다행이다. 자는 동안이라도 도돌이의 얼굴을 실컷 볼 수 있다면 좋은 것이니.

“내가 하겠다.”

“아앗.”

금세 정신을 차린 그가 도돌이의 손에 들린 노를 부드럽게 낚아챘다. 그리고는 직접 노를 젓기 시작했다. 꿈에서라도 도돌이를 고생시키고 싶진 않았으니.

─촤악.

두 사람이 탄 배가 고요한 호수를 가르며 유유히 떠다녔다. 도돌이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호수에 비친 별빛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데릭은 그런 도돌이를 보는 것이 더 즐거웠다.

“데릭, 이거 봐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예쁘다.”

“아이참. 나 말고요!”

“……아, 별. 별도 예쁘다.”

“하여튼.”

“…….”

도돌이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데릭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나 사랑스럽게 웃는군.’

꿈에서 깨면 못 볼 모습을 실컷 눈에 담아 놓고 싶었다.

어느새 두 사람이 탄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도착했다. 그는 손에 들린 노를 가지런히 내려놓고 잔잔한 평화를 즐겼다.

“어? 저기 꽃송이가 있어요.”

문득 그녀의 시선이 어디론가 향했다. 데릭은 어쩐지 불안해졌다. 꽃송이를 잡으려는 듯 몸을 들썩이는 도돌이 때문이었다.

“그러다 빠진다.”

“연꽃인가?”

“조심-!”

“헤헤, 잡았다.”

“……하아.”

도돌이는 참으로 겁도 없지. 그깟 꽃송이가 뭐가 그리 대수라고 저렇게 배 밖으로 몸을 기울인단 말인가? 위험하게.

꿈인 걸 알면서도 괜히 가슴이 철렁했다.

“그대는 너무 조심성이 없다.”

“하지만 연꽃은 처음 본단 말이에요. 책으로만 봤었는데.”

“그렇게 보고 싶다면 공작성 온실에 한가득 들여놓겠다. 그대가 원할 때마다 얼마든지 볼 수 있도록.”

“맨날 볼 수 있다면 이렇게 반갑지 않을 거예요.”

“…….”

꿈이라서 그런 걸까? 도돌이 앞에만 서면 삐거덕대던 데릭도 한결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에 시선을 빼앗겼다.

‘많이 간지러울 텐데.’

달을 향해 연꽃을 들어 올린 도돌이는 그걸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볼이 간지러운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데릭은 도돌이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스윽.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치워 주려는데, 문득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

데릭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동시에 그의 세상도 멈췄다.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침묵했다.

‘이것은, 꿈.’

도돌이의 말간 눈동자가 마치 그를 조종하는 것만 같다. 데릭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몸을 일으켰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안 된다. 안 돼.’

어떻게든 멈춰 보려 했지만, 꿈속의 프리트 공작은 그대로 도돌이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가 읽었던 소설의 한 장면처럼.

“읍.”

도돌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동시에 데릭은 참담해졌다. 이건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는 행동 아닌가.

“……!”

그러나 도돌이는 그를 밀어내기는커녕, 오히려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어쩐지 마음이 벅차올랐다.

‘꿈. 정말 꿈이 맞나?’

데릭은 몽롱한 가운데 생각했다.

꿈에서는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다는데, 참 이상하지. 도돌이의 입술은 유난히 달았다. 복숭아, 체리, 딸기가 한데 뒤섞인 듯한 달콤함이 그의 혼을 쏙 빼놓았다.

이 모든 게 그의 상상이 만들어 낸 착각인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대충 꽂아 놓은 노가 삐걱대는 소리. 이어서 퉁, 하고 수면을 내리치는 소리. 어렴풋이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 목덜미에 닿는 가벼운 바람까지.

‘하긴. 그게 뭐 대수라고.’

데릭은 생각이라는 걸 포기했다. 입술에 와 닿는 포근하고 말랑한 감촉을 잊고 싶지 않았다.

아직 입맞춤이라는 걸 어떻게 하는지는 몰랐지만, 꿈속의 데릭은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능숙하게.

“읍!”

그가 참지 못하고 거세게 파고들 때마다 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배가 기우뚱 흔들렸다. 그럴 때면 오드리는 데릭의 옷깃을 움켜쥔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

─끼이익. 끽.

당장이라도 뒤집힐 듯 이리저리 기우는 배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했다. 하지만 데릭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커다란 손으로 도돌이의 목덜미를 감싼 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입술은 완벽한 퍼즐 조각처럼 맞물려 한참이나 온기를 나누었다.

─퉁.

“……!”

배 전체에 둔탁한 울림이 퍼졌다. 유유히 호수를 가로지른 배가 어느덧 나루터에 닿은 것이다.

“하아.”

“하…….”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입술이 아쉽게 멀어졌다. 두 사람은 아주 오랜만에 숨을 골랐다.

데릭은 발그레하게 열이 오른 도돌이의 뺨을 다정히 쓸어 주기도 했다. 입술만큼이나 부드러운 볼이 자꾸만 그의 본능을 충동질했다. 책으로만 접했던 키스라는 것이 이리도 기분 좋은 것이었나?

‘……꿈. 그래, 꿈이니까.’

생각을 굳힌 데릭이 다른 한쪽 팔로 나루터 기둥을 힘껏 밀어냈다. 그러자 두 사람을 태운 배가 다시 호수 중앙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읍!”

그와 동시에 데릭이 오드리의 입술을 훔쳤다. 이번엔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의지였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호수 한가운데든 가장자리든, 혹은 우주 너머의 그 어떤 곳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들이 함께 있다는 것. 그리고 아직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는 것.

두 사람이 탄 배는 한참을 기우뚱거리며 아슬아슬한 항해를 계속하였다.

* * *

“각하.”

“…….”

“각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 아니다.”

데릭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오드리와 루카스는 그런 그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히 루카스는 유독 눈치를 봤다.

‘악몽이라도 꾸셨나? 자, 잠자리가 불편해서?’

아침부터 분위기가 이렇게 흉흉할 줄 알았더라면 그냥 어제 실토할 걸 그랬다.

프리트 공작은 어딘지 넋이 나간 얼굴로 재촉했다.

“……얼른 출발하지.”

“예. 아, 마침 저기 마차가 옵니다!”

그러나 데릭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두 사람이 타고 갈 마차는 좌석이 매우 비좁아 딱 붙어서 이동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마차를 바꾸라고 한다는 것을 깜빡했군.’

이게 다 숙소를 제대로 예약하지 못한 루카스 탓이었다.

“잠시만요.”

“……!”

데릭은 차마 도돌이 쪽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먼 산만 바라보았다.

‘젠장!’

아무것도 모르는 도돌이는 그저 편한 자세를 찾는 것뿐이겠지만, 그는 온기가 스칠 때마다 죽을 맛이었다. 자꾸만 어젯밤 꿈에서의 감각이 되살아난 까닭이다.

‘빌어먹을 몸뚱이 같으니!’

상하좌우로 거대하게 발달된 몸이 이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왜소했다면 이런 불상사 따위 겪지 않았을 텐데!

아니, 그보다도 일평생을 순결하게 살던 그가 왜 그런 꿈을 꿨는지 모르겠다.

‘……설마. 그 책 때문인가.’

의심이 가는 거라곤 루카스가 빌려준 로맨스 소설뿐이었다.

도돌이와 닿지 않기 위해 최대한 몸을 구긴 데릭은 매서운 눈으로 보좌관을 노려보았다. 마부 옆자리에 앉아 일정표를 점검하는 뒤통수가 참으로 태평했다. 누군 하루 종일 도돌이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심란한데!

‘도돌이의 얼굴을 제대로 못 본 지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13박 14일의 일정은 둘째 날부터 커다란 고비를 맞았다.

한편, 영문을 모르는 오드리는 짐짝처럼 실려 이동하는 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좌석이 어제보다 더 넓게 느껴졌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만큼 다른 이들에게 노출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엄마. 저 사람이 공작 부인이에요?”

“로키! 저‘분’이라고 해야지! 그리고 손가락질하면 못써!”

“공작 부인! 여기요, 여기!”

“…….”

새까맣게 탄 말라깽이 아이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너무도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니 차마 무시할 수가 없어서 오드리도 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엄마! 엄마! 봤어요? 공작 부인이 저한테 인사했어요!”

“나도 공작 부인이랑 인사할래!”

“뭐? 공작 부인? 어디?”

“……!”

그러나 단단히 오해한 사람들이 점차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호의로 손을 흔들던 오드리도 이쯤 되니 당황스러워졌다.

‘날 진짜 공작 부인으로 착각하는 거 아니야……?’

마차가 향하는 길목에는 어느새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들은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높이 치켜들고 오드리를 향해 열심히 흔들었다.

“와, 공작 부인이셔!”

“여기도 봐 주세요!”

“공작 부인! 공작 부인!”

잔뜩 당황한 오드리는 어쩔 줄을 모르고 일단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상대방이 인사하는데 무시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나 손을 마주 흔들어 줄수록 환호성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심지어는 마차를 쫓아오는 이들도 생겼다.

루카스는 그런 광경이 신기한지 오드리에게 장난스레 농담을 건넸다.

“와, 벌써부터 인기가 대단하신데요?”

“하, 하, 하.”

‘벌써부터’라니? 어쩐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오드리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무래도 이건 단순한 영지 시찰이 아닌 듯했다. 이건 온 영지민들이 힘을 모아 그녀를 공작 부인으로 추대하는 꼴 아닌가?

‘마차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새하얀 백마가 이끄는 크림색의 아기자기한 마차. 거기에 탄 두 사람은 웨딩 퍼레이드를 하는 신혼부부처럼 보이고도 남았다. 심지어 프리트 공작은 오늘따라 평범한 턱시도를 갖춰 입은 상태였다. 그가 오드리 대신 준비한 옷도 웨딩드레스를 연상시키는 새하얗고 하늘하늘한 원피스였다. 이게 정말 우연일까?

‘옷도 챙길 필요 없다더니…….’

오드리는 작정한 듯 몰아치는 프리트 공작의 계략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저 멀리 보이던 탈출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흐릿해지는 것 같다. 어쩐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차올랐다.

* * *

2주간의 영지 시찰 계획에 예기치 못한 차질이 생겼다.

“베르나르 님은 내일 오후쯤 돌아오실 예정입니다.”

“예?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오늘 방문하기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만.”

“그게…….”

하급 관리 하나가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어젯밤 갑자기 제 숙소로 찾아오셔서는, 모레 오후쯤 돌아올 거라는 말만 남기고 그대로 나가셨습니다.”

“보안관이 자리를 비웠다는 말입니까?”

“아! 그리고 각하께서 방문하시거든 이 편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

데릭은 무표정한 얼굴로 편지를 받아 들었다.

펠리오스의 베르나르입니다.

일전에 보고드린 사건과 관련하여 급히 조사할 것이 있어 자리를 비웁니다. 미리 알리지 못한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돌아가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곧 만나 뵙기를 고대하며 이만 줄입니다.

시간에 쫓기듯 대충 휘갈겨 쓴 글씨였다.

이어서 편지를 확인한 루카스 역시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일이 복잡해지겠는걸.’

군사작전처럼 초 단위로 빽빽하게 기록된 일정표가 뇌리를 스쳤다. 데이트라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주군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각하, 어찌할까요?”

“…….”

“마지막에 펠리오스를 다시 들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만.”

“……한밤중에 나갔다면 그만큼 심각한 사안이라는 뜻이겠지.”

“아무래도 그렇지요.”

“…….”

골똘히 생각하던 데릭은 곧바로 결론을 내렸다.

“펠리오스에서 하루 더 머문다.”

“알겠습니다.”

“도돌이와 갈 만한 레스토랑 목록도 다시 정리해서 올리도록.”

“……예에.”

어쨌든 보고를 받은 이상, 한 번쯤은 보안관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얼른 해치우고 떠나려 했건만.’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 영 마뜩잖았으나, 별도리가 없었다. 언젠간 불로 번질 것이 분명한 불씨를 발견하고도 못 본 척 돌아설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다만, 도돌이의 얼굴을 떠올리려니 못내 속이 상했다.

‘보여 주고 싶은 곳이 많았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군.’

도돌이가 이 척박한 땅이 공작령의 전부라고 오해하진 않을까? 아직 가 보지 못한 곳, 함께 가고 싶은 멋진 곳이 얼마나 많은데.

‘……펠리오스는 마지막에 들를 걸 그랬나.’

데릭은 뒤늦게 후회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다.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빨리 끝내 놓는 편이 낫겠지.’

이런 불편한 마음으로 어떻게 프러포즈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겠는가? 프러포즈를 향해 가는 길은 순결하고도 경건해야만 했다. 아주 작은 번뇌조차 끼어들 틈이 없게.

‘결혼이란 신성한 것이니까.’

데릭은 지상 최고의 프러포즈를 꿈꾸며 한쪽 입꼬리를 슬쩍 휘었다.

* * *

─우웅. 우우우웅.

오드리는 익숙한 진동 소리에 파드득 정신을 차렸다.

“오라버니?”

허겁지겁 통신구를 꺼내 들자, 투명한 구체 너머로 한스의 얼굴이 일렁이고 있었다.

“……뭐야.”

기다렸던 연락은 아니었다. 하지만 며칠 만에 보는 얼굴이라 그런지 금세 반가움이 밀려들었다.

“흥, 흥, 흥.”

오드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통신구를 톡톡 두드렸다.

-이 미친 계집애야악!

“까,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통신구를 떨어뜨릴 뻔했다.

‘저게 미쳤나!’

예의라곤 개미 더듬이만큼도 없는 한스 같으니! 어디다 대고 소리를 지른단 말인가? 록트의 바지사장 씩이나 되는 인간이 통신구를 저렇게 쓰면 되겠냔 말이다!

오드리는 단단히 뿔이 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통신구 개발자로서 통신구 사용 예절에 대해 아주 단단히 일러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너-.”

-영지 시찰? 거기가 어디라고 따라가? 이 정신 나간 계집애야! 안 보이길래 어딜 또 뽈뽈 싸돌아다니나 했더니……. 미쳤지. 미친 거지?

“…….”

하지만 왜인지 잔뜩 성이 난 한스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넌 생각이 없냐? 세상에 어떤 상사가 견습 보좌관한테 자기 땅을 보여 주는데! 어? 세 살짜리 애도 어떤 속셈인지 뻔히 알겠다!

“…….”

아주 작정한 듯 몰아치는 타박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자기가 딱따구리야 뭐야?’

오드리의 얼굴은 금세 부루퉁해졌다. 아버지도 허락한 마당에, 왜 생판 남인 한스가 저리도 난리란 말인가?

-하여간. 저 맹한 얼굴로 사람 마음 흔들어 놓는 덴 아주 선수라니까…….

“뭐어? 너 뭐라 그랬어? 내 욕했지!”

건너편의 웅얼거림을 오해한 오드리가 눈을 부라렸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는 듯이.

한스는 억울해 미칠 노릇이었다.

-내가? 내가 너한테? 와, 이게 진짜 사람을 뭐로 보고!

“흥, 좀 크게 말하든가.”

-넌 진짜…… 아오!

잔뜩 성이 난 손바닥이 제 분을 못 이겨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이 눈치도 없는 계집애. 야속한 계집애!’

아군도 몰라보는 작태가 아주 기가 막혔다. 저 도토리가 지금 누구한테 눈을 홉뜬단 말인가? 대놓고 플러팅을 하는 외간 남자는 홀랑 따라가 놓고!

‘아무리 겁이 없어도 그렇지…….’

조심성이라곤 없는 사고방식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프리트 공작은 제국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설마 할 일이 없어서 영지 시찰을 나갔겠는가? 애먼 도토리까지 주렁주렁 매단 채로?

‘자랑하려고 데려갔겠지, 멍청아.’

이 정도면 결혼 적령기를 맞이한 남성의 격렬한 구애가 아니냔 말이다. 게다가 본인의 토지 현황까지 서슴없이 오픈해 버리는 저 대범함을 보라. 클로드와 관련된 일이라면 일단 직진하고 보는 누구와 똑 닮아 있었다.

-……아주 그냥 짐승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갔네. 잡아 잡수라고 제 발로 걸어 들어갔어, 응?

“너어!”

오드리는 옹졸한 주먹을 움켜쥔 채 바들바들 떨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어서 뭐라 맞받아칠 수 없다는 점이 분했다.

-참나, 언제는 우리 형이 좋다더니. 이왕 발목 잡힌 김에 그대로 식장까지 들어가지 그래? 어차피 늦은 것 같은데.

“이…….”

-결혼 선물은 뭐로 해 줄까? 말만 해. 나 돈 많잖아. 네 덕분에.

“이게 진짜!”

참다못한 오드리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저놈의 심보가 영 고약하지 않은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난데없이 연락해서는 사람을 이렇게나 쪼아 대다니!

“네가 무슨 상관인데? 내가 발목을 잡히든 말든! 네가 보태 준 것 있어? 어? 있냐고!”

한스는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벙긋거렸다. 아주 피해자가 따로 없었다.

-허, 허어! 참! 너, 하!

무슨 상관이냐니? 보태 준 게 있냐니? 구구절절 맞는 말이건만, 어째 배신감이 들었다. 세상에 한스만큼 도토리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씩씩대는 도토리의 얼굴이 제법 사나운 것마저도 서운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때, 사무실 문 앞이 소란해졌다.

“……!”

로비에 앉아 있던 오드리는 화들짝 놀라 통신구를 꺼 버렸다. 한스에겐 설명할 겨를도 없었다.

─끼익.

곧이어 사무실을 나오는 프리트 공작의 안색이 어두웠다.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펠리오스에서 하루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다.”

“넵.”

“…….”

데릭이 슬쩍 도돌이의 눈치를 살폈다.

‘이상하군.’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온 짧은 대꾸가 영 서늘했던 까닭이다. 유독 뚱한 얼굴도 평소와 달랐다. 복어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모양새 역시 사랑스러웠지만, 그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설마…….’

일련의 상황은 프리트 공작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도돌이가 화난 게 분명하다!’

데릭은 충격에 휩싸였다. 머릿속에선 도돌이가 왜 화가 났는지에 대한 긴급 분석이 진행되었다.

첫째, 마차가 좁아서.

둘째, 로비에서 홀로 기다리게 한 것이 서운해서.

셋째, 척박한 땅에서 무려 하루를 더 머물게 되어서.

넷째, 배가 고파서.

‘고작 몇 시간 만에 이렇게도 많은 실수를 저질렀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절박해진 데릭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 채,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마차는 내가 더 양보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로비는…… 변명의 여지가 없군.’

아무래도 도돌이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미인가 보다. 그런데 저 넓은 로비에 덩그러니 남겨 놓다니! 어쩌면 이토록 무심했단 말인가?

‘내 생각이 짧았군. 다 내 잘못이야.’

데릭은 곧바로 반성했다.

앞으로 도돌이를 혼자 두는 일 따윈 결코 없을 것이다. 도돌이의 곁에 딱 붙어 앉아, 외로울 틈이 없도록 사랑만 듬뿍 퍼부어 주겠다.

……지금은 어젯밤 꿈의 여파로 조금 거리를 두어야겠지만. 아무튼.

‘분명 펠리오스에도 가 볼 만한 곳이 있겠지. 그래. 해안가는 나름 봐 줄 만할 것이다.’

그는 일정표를 빠르게 수정하기 시작했다.

해안가는 그나마 번화한 구역이니, 야경을 즐길 수 있도록 배라도 한 척 띄울 참이었다. 선상에서 오붓하게 저녁 식사까지 한다면 더더욱 로맨틱하겠지. 마치 어젯밤의 꿈처럼…….

‘젠장!’

잠시 낯 뜨거운 장면에 현혹되었던 데릭이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꿈 때문에 아주 죽을 맛이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점심, 그래, 점심을 먹어야지.’

그는 배고픈 도돌이에게만 집중하려 애썼다. 더 이상 허튼 생각이 들지 않도록.

“벌써 식사 때가 다 되었군.”

“저, 혹시 전서구 대여소에 들를 수 있을까요?”

“그래, 오늘 점심은 전서구-.”

“……!”

도돌이가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마치 야만인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젠장!’

데릭은 당장이라도 이 쓸모없는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하려던 말이 뒤섞여 끔찍한 혼종이 탄생하고 만 것이다.

“……그게 아니라.”

“…….”

“들러도, 좋다는 뜻이었다. 점심은 예약해 놓았으니.”

“네…….”

애써 변명하듯 덧붙였으나, 도돌이는 안 믿는 눈치였다.

이게 다 어젯밤의 꿈 때문이었다.

* * *

‘으응?’

전서구 대여소를 나오던 오드리가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기분 탓인가?’

자꾸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런데 둘러볼라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터라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리트 공작이 걱정스레 운을 떼었다.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니요!”

하지만 험상궂은 얼굴은 무언가를 독촉하기에 제격인 법. 그의 표정을 오해한 오드리는 되려 허둥지둥 발걸음을 재촉했다.

“…….”

그러는 동안 데릭은 남몰래 인파 사이를 노려보았다. 어쩐지 언짢은 기색이었다.

─우두두두.

막 계단에서 내려오던 오드리가 멈칫했다. 물소 떼라도 지나가는 것처럼 땅이 미세하게 울린 까닭이다.

‘뭐지?’

원인을 찾기 위해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쿵!

멀리서부터 달려오던 아이가 그대로 오드리에게 부딪혔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코!”

“앗!”

“케벨슨 영애! 괜찮으십니까?”

길 한복판에서 나란히 엉덩방아를 찧은 두 사람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아야야…….’

오드리는 찌르르한 꼬리뼈가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대답도 못 하고 한쪽 눈만 찡그리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다급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다친 곳은. 다친 곳은 없나?”

“……!”

바람처럼 달려온 프리트 공작이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그녀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폈다. 도대체 왜인지 모르겠으나, 혹시나 모를 골절까지 확인하는 모습이 유독 과하게 느껴졌다. 고작 엉덩방아를 찧은 것뿐인데.

“저, 저는 괜찮-.”

“손바닥은.”

“…….”

오드리는 그의 기세에 휩쓸려 엉겁결에 양쪽 손바닥까지 슥 내밀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아파야 할 건 그녀인데, 어째 프리트 공작의 얼굴이 더 괴로워 보였다.

‘저 조막만 한 손에 다칠 곳이 어디 있다고!’

도돌이의 작고 소중한 손이 군데군데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아, 도돌이는 얼마나 따가울 것인가? 눈앞에 들이밀어진 손바닥을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머뭇대는 모습이 애달팠다.

“……전부 까졌군.”

눈만 끔뻑이던 오드리도 그제야 시선을 내렸다.

‘그렇게 심한가?’

살짝 쓰라리다 했더니. 군데군데 작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클로드를 보겠다고 서두르다가 계단에서 굴렀을 때와 비교하면 엄살을 부리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

오드리는 의연한 얼굴로 손수건을 꺼내 들고선 대충 손바닥을 닦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가슴이 만삼천오백 갈래로 찢어지는 줄도 모르고.

다행히 아이도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넋이 나간 듯한 얼굴만 제외하면.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사탕 요정님이에요?”

“응?”

난데없는 물음이 순진무구했다. 아이는 보송하게 휘날리는 연분홍색 머리칼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데릭의 시선도 옆을 향했다.

‘……그래, 너로군.’

드디어 이 사태의 원흉을 찾았다. 감히 도돌이에게 몸통 박치기를 한 것으로도 모자라, 사과도 없이 은근슬쩍 넘어가려 해?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도 못 오는 아이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이럴 땐 사과부터 하는 거다.”

“아, 저는 괜찮-.”

“어서. 죄송하다고 해라.”

“정말 괜찮아요.”

“우와아.”

그러나 아이는 데릭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엄청 부드럽다!”

“아야.”

“……!”

오히려 약 올리듯 도돌이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죽 잡아당기는 것이다.

‘감히, 나도 함부로 못 만지는 것을!’

그러다 한 번씩 그와 눈이 마주치면 도돌이 몰래 씨익 웃는 꼴이 기가 막혔다.

‘……여간내기가 아니로군.’

데릭의 시선이 절로 매서워졌다.

무슨 저런 영악한 꼬마가 다 있단 말인가? 도돌이의 호의를 저런 식으로 악용하다니!

“사탕 요정님, 사탕 요정님! 우리 숲에 가서 놀아요!”

“으응?”

“숲이요! 거기 재밌는 게 많아요!”

이런 염치도 없는 꼬마를 봤나?

데릭은 곧바로 선을 그었다.

“안 된다. 우린 식사를 하러 가는 길이다. 상처도 치료해야 하고.”

“사탕 요정니임.”

“처음 보는 사람은 따라가면 안 된다고 부모님께 안 배웠나.”

“숲에 가서 놀아요, 네?”

“……버릇 한번 고약하군.”

참다못한 데릭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도돌이를 다리 뒤로 슬쩍 감추는 모양새였다.

절대로 저 꼬마가 남자애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일 뿐.

“네 부모는 어디에 있지?”

“…….”

“잘만 쫑알대더니, 불리할 땐 입을 꾹 다무는군.”

“각하. 그리 채근하시면 아이들은 겁을 먹습니다.”

“…….”

멀찍이 서서 관망하던 루카스가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겁을 먹어?’

도대체 저게 어딜 봐서 겁을 먹은 얼굴이란 말인가? 자기보다 3배는 거대한 성인 남성을 잘도 무시하고 있건만.

“그리고…… 대답하기 곤란할 수도 있습니다.”

“…….”

“아시잖습니까.”

루카스가 조심스레 아이 쪽을 곁눈질했다. 뒤따라 새빨간 눈동자 한 쌍도 아이의 옷차림을 훑었다.

대충 기워 입은 듯한 옷, 그리고 밑창이 다 떨어진 낡은 신발. 분명 둘 중 하나이리라. 부모가 모두 전쟁으로 사망했거나, 온종일 일을 해야 해서 아이에겐 신경 쓸 겨를이 없거나. 펠리오스는 그런 땅이었다.

“각하.”

“……하.”

험악하던 얼굴이 한결 누그러졌다. 프리트 공작은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힌 채 최대한 아이와 시선을 맞추려 애썼다. 그러나 내뱉는 말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너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

“대신 이걸 주도록 하지.”

그는 공작가의 인장이 찍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프리트 공작의 이름으로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증표였다.

“행정관을 찾아가 보여 주면 된다. 그가 언제고 너를 도와줄 것이다.”

“…….”

“그리고 한 가지 더.”

“…….”

“모르는 사람은 함부로 따라가는 게 아니다. 네가 데려가는 것도 마찬가지.”

아이의 손에 종이를 쥐여 준 프리트 공작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세상엔 선한 이들만 있는 게 아니거든.”

“…….”

저 꼬마가 오늘 도돌이를 만난 것은 천운이었다. 요즘같이 아동 실종 사건이 잦은 시기라면 더더욱.

‘그나마 사람 보는 눈은 있군.’

이렇게 깜찍한 데다 악의 없고, 마음까지 너른 사람을 또 어디서 만나겠는가? 혹여 음침한 자였다면 뭣 모르는 꼬마를 납치하고도 남았겠지.

“각하, 예약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의원에게 들렀다 가려면 서둘러야겠군.”

데릭과 오드리는 바쁜 일정을 마저 소화하기 위해 마차에 올라탔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있긴 했지만, 그의 완벽한 계획엔 차질이 없어야 했다.

“…….”

아이는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버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루카스는 그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려 한참을 머뭇거렸다.

“뭐 하고 있나. 이만 출발하지.”

“……예.”

세 사람을 태운 마차는 순식간에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찌익. 찍.

자그마한 손이 프리트 공작의 증표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러자 산산조각이 난 종이 쪼가리가 쓰레기와 뒤섞여 길바닥을 나뒹굴었다.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그러더니 이내 그것을 짓밟고 사라졌다.

* * *

프리트 공작은 생각보다 건강 염려증이 과한 남자였다. 의원을 찾아가자마자 그 무뚝뚝한 얼굴로 어찌나 유난을 떨어 대던지.

‘이게 뭐람…….’

밖으로 나온 오드리의 양손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그나마 손가락까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하마터면 불가사리처럼 뭉툭한 손을 가질 뻔했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프리트 공작의 유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으니.

“들것을 가져와라.”

“……!”

얼마 지나지 않아 실크로 뒤덮인 들것 하나가 등장했다. 거기에 탑승할 만한 사람은 당연히 오드리밖에 없었다.

“저, 저는 정말 괜찮아요!”

“마차에서 내리다가 손바닥을 잘못 짚기라도 하면 큰일 난다.”

“아니, 그 정도는-.”

“……손을 영영 못 쓰게 되면 어쩌려고.”

이건 협박일까, 걱정일까? 오드리는 결국 마차에서부터 들것에 실려 레스토랑 안까지 운반되었다.

프리트 공작 딴에는 나름 그녀를 배려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아직 ‘공주님 안기’라는 끈적한 스킨십을 하기엔 풋풋한 사이 아니던가? 괜히 조급하게 굴고 싶진 않았다.

“그럼, 오붓한 추억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그가 예약해 놓은 곳은 전면이 유리로 된 온실 형태의 레스토랑이었다. 곳곳에 놓인 식물 덕분인지, 마치 숲속에서 식사를 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유리 천장으로 들이치는 한날의 햇살도 완벽한 분위기에 일조했다.

“들지.”

“……네.”

오드리는 용을 쓰며 포크를 들었다. 잠시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그가 당장이라도 먹여 주겠다며 나설 것 같지 뭔가.

게다가 그녀에게는 오늘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업이 있었다.

일명 ‘프리트 공작에게 실연당하기’.

특히, 오만 정이 떨어지는 데 특효약이라는 ‘게걸스럽게 식사하기’로 쐐기를 박을 작정이었다. 식탐까지 부리면 더욱 완벽하겠지.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어.’

아무리 프리트 공작의 기세가 맹렬하다 하더라도 속단하긴 일렀다. 샬롯의 말마따나, 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는 것이 남녀관계 아니던가? 아직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아주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식사 예절을 교육받은 오드리에게는 ‘게걸스럽다’란 단어가 굉장히 추상적이라는 점이었다.

‘그냥 빨리, 많이 먹으면 되는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이를 잘못 이해한 오드리는 고개를 번쩍 든 채로 입만 요란하게 움직였다. 입가에 뭘 잔뜩 묻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세요! 제가 이렇게나 게걸스럽게 먹는다고요!’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정이 떨어지기는커녕, 애꿎은 심장만 발끝까지 떨어져 내렸다.

‘……왜, 저러는 거지.’

오늘따라 초롱초롱한 연두색 눈동자가 그를 사랑스럽게 올려다보는 까닭이다.

밤새 그를 미치게 했던 입술도 보란 듯이 오물대고 있었다. 그가 간밤에 어떤 꿈을 꿨는지 전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

순간, 그의 목덜미로 열이 올랐다. 데릭은 들킬까 두려워 황급히 고개를 모로 꺾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도돌이를 쫓는 시선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아!’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이제는 도돌이의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마저 별빛을 뿌려 놓은 듯 황홀해 보였다.

‘……은하수가, 저렇게 생겼겠지.’

도돌이의 깜찍한 얼굴엔 우주가 담겨 있었다. 블랙홀같이 사람을 빨아들이는 눈동자. 태양의 열기를 받아 발그레한 양쪽 뺨. 데릭은 그 황홀한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듯한 얼굴이었다.

한편, 오드리는 위험을 감지했다.

‘……눈을 왜 저렇게 뜨는 거지?’

험상궂은 생김과 어울리지 않게 힘없이 풀린 동공에서 기이한 광기가 넘실거린 탓이다. 마치 한 달을 굶은 맹수가 먹잇감을 눈앞에 두었을 때의 표정이랄까. 한마디로, 제정신은 아니라는 뜻.

‘아니,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거야!’

오드리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남들은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면 없던 정까지 떨어진다는데. 어째 이 남자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지독하게 얽혀드는 것만 같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괜스레 오기가 생긴 오드리는 샐러드도 우걱우걱 먹어 보았다. 데릭의 눈엔 그 모습마저 토끼처럼 깜찍해 보이는 줄도 모르고.

─딸랑.

별안간 프리트 공작이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중년의 남성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혹시 불편하신 점이라도……?”

“샐러드가 마음에 드는군.”

“아! 여, 역시 미각이 남다르십니다. 저희 레스토랑은 온실에서 당일 수확한 아주 신선한 채소만 사용하고 있습죠!”

“그렇군. 스무 접시를 더 내와라.”

“스, 스무 접시나……? 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

오드리의 포크가 툭 떨어졌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세상에 샐러드를 스무 접시나 주문하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풀숲 사이에 반려 코끼리라도 매어 놨다면 이해가 갔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엔 프리트 공작과 그녀밖에 없었다.

“넉넉하게 주문했으니 천천히 먹어도 된다.”

“……네?”

“이렇게나 샐러드를 좋아하는지 미처 몰랐군.”

“……!”

오드리는 목이라도 졸린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자꾸만 헛기침이 나왔다.

‘설, 설마 내 거야?’

─도로로록.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문하신 유기농 샐러드 스무 접시 나왔습니다.”

“마침 잘됐군. 이쪽으로.”

“흐엑……!”

아니나 다를까. 샐러드 접시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오드리 앞으로 서빙되었다.

아무래도 프리트 공작이 키우는 코끼리는 그녀였나보다.

* * *

“오호, 이런 것도 있었지.”

아놀드는 마탑에 돌아온 뒤로 벌써 일주일째 칩거 중이었다. 유일하게 하는 일이라곤 여태껏 받은 편지를 몽땅 꺼내 다시 읽는 것. 작은 독방은 상자와 편지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똑똑.

“누구세요?”

“선배님, 접니다.”

“켈리?”

“문 좀 열어 주시죠. 체감상 일 억 년은 못 본 것 같습니다만.”

“…….”

“선배님이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도 가져왔습니다.”

─꼴깍.

아놀드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핫! 이러면 안 되지!’

하마터면 초코케이크에 넘어가 문을 열 뻔했다. 칩거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으응, 나, 나는 안 먹어도 돼.”

“예?”

“너 많이 먹어.”

“…….”

켈리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초코케이크를 마다해? 선배님이?’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그의 휴가까지 더하면 벌써 3주째 얼굴을 못 보고 있는데, 이건 켈리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그녀가 못 보는 사이에도 아놀드는 분명 매일 멋졌을 텐데! 이러다간 금단증상이 나타날 판이다.

“밀레나가 또 사인해 달라고 졸랐습니까?”

“아니.”

“아! 멍청한 문어 대가리 짓입니까? 설마 선배님 칭찬을 삼 절까지 했어요? 이 절까지만 하라고 분명히 주의 줬는데…….”

“그런 거 아니래도.”

“그럼 대체 왜 그러십니까? 벌써 일주일째 나오지도 않으시고.”

“으응, 그냥. 그런 게 있어. 비밀.”

“하아.”

켈리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회심의 일격으로 초코케이크까지 사 들고 왔건만.

‘쳇.’

오늘도 문을 여는 데 실패했다.

마법사 놈들이 아무리 귀찮게 달라붙어도 이렇게까지 방구석에 틀어박힌 적은 없었는데. 도대체 어떤 머저리의 소행인지 찾기만 해 봐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정말 안 나오실 겁니까?”

“안 나간대도. 그만 좀 찾아와. 귀찮기만 한걸.”

“참 너무하십니다. 선배님 때문에 요즘 통 집중도 못 하는 건 알고 계십니까?”

“으응?”

“제 연구가 망하면 그건 전부 선배님 탓이라는 말입니다!”

“뭐어? 그게 왜!”

“나오기 싫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서운함을 느낀 켈리가 곧바로 등을 돌렸다.

그러나 채 다섯 발자국을 가기도 전에 멈춰 섰다.

“……하.”

손에 든 케이크 상자가 마음에 걸린 탓이다. 그녀는 할 수 없이 다시 등을 돌려 아놀드의 방 앞으로 향했다.

“그래도 케이크는 드십시오. 문 앞에 두고 가겠습니다.”

“…….”

“보고 싶으니까 내일은 꼭 나오시고요. 이제 정말로 가 보겠습니다.”

켈리의 어깨는 한눈에 봐도 축 처져 있었다. 터덜터덜 연구동으로 향하는 발걸음 역시 힘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뿐인가? 야무지게 올려 묶은 머리도 오늘따라 무겁게 늘어졌다.

‘이게 다 선배님 얼굴을 못 봐서야.’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지 어언 3주째. 켈리는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켈리!”

“바크 님.”

“설마, 설마! 와핫!”

프리트 공작성에서 파견 나왔다던 마법사 하나가 입을 틀어막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와 숙소동을 번갈아 보는 눈동자는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또 시작이네.’

마탑에선 아주 익숙한 풍경이었다.

“너 설마, 아놀드 님을 만나고 온 거야?”

“예. 정확히는 얼굴도 못 보고 나왔지요. 그냥 대화만-.”

“세상에! 아아아악! 아놀드 님을 만날 수 있다니! 와악!”

“…….”

바크는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쿵쾅쿵쾅 발을 굴렀다. 나이는 바크가 2살 더 많았으나, 마법사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려 차기 마탑주가 되실 분이라고! 내가 그런 분과 함께 연구를, 세상에!’

차기 마탑주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온 바였다. 다소 괴짜 같은 면이 있으나 실력만큼은 역대 최고라고.

폐쇄적 성향이 강한 마법사들이 이토록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고 열광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각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바크는 자신을 기꺼이 마탑으로 보내 준 주군에게 새삼 감사를 느꼈다.

이제야 비로소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한 달 내내 밤을 새우며 연구를 할 수도 있고, 동료 마법사들과 무박 5일간 토론을 할 수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벌써부터 피가 끓는데, 아놀드 님까지 만날 수 있다니!

‘이곳이 바로 천국이구나…….’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안 되겠다, 가서 인사라도 나눠야겠어!”

“어차피 방 밖으로 안 나오실걸요. 그리고 아놀드 님 방이 어딘지도 모르시지 않습니까?”

“1004호잖아.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다 방법이 있지.”

암암리에 떠도는 <아놀드 정보집>을 미리 구매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바크를 보며 켈리가 영 꺼림칙한 얼굴로 경고했다.

“문 앞에 케이크 상자가 하나 놓여 있을 겁니다.”

“어라, 환영 선물이야?”

“그럴 리가요.”

“정색은.”

“손대면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왜, 초코케이크야? 아놀드 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게 초코케이크라던데.”

“……그건 또 어떻게 아셨는지.”

“다 방법이 있다니까.”

“…….”

“아무튼, 수고!”

바크는 들뜬 발걸음으로 숙소동에 들어섰다. 비록 9년 전이지만, 무려 10년을 살았던 곳이라 제집 드나들 듯 자연스러웠다. 그는 로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이야, 이렇게 좋아졌단 말이야?”

층별로 마련된 포털이 빽빽하게 줄지어 있는 까닭이다.

포탈을 통과하니 10층으로 이동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룰루-, 응?”

막 모퉁이를 돌던 바크가 멈칫했다. 1004호 앞에 짙은 보라색 후드를 쓴 수상한 자가 서 있던 것이다. 그의 눈빛이 절로 매서워졌다.

‘이상하다. 저긴 아놀드 님 방인데?’

바크는 일단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주시했다. 9년간 공작성 수석 마법사로 근무했던 경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오늘도 나오지 않을 셈이냐?”

“…….”

“……녀석, 고집하고는. 아직도 이 늙은이에게 화가 난 게야?”

바크는 수상한 자의 정체를 곧바로 눈치챘다.

‘그레고리 님이잖아!’

현 마탑주, 그레고리였다.

그러나 바크는 수상함을 느끼기도 전에 일단 감탄부터 하고 보았다.

‘세상에. 차기 마탑주는 역시 다르구나! 벌써부터 그레고리 님과 회동이라니!’

어째 그레고리가 아놀드에게 절절매는 형국이었지만, 아무튼.

“아놀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단다.”

“…….”

“네가 원치 않는다면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어.”

“…….”

“괜히 너에게 커다란 짐을 떠넘긴 것 같아 나도 마음이 무겁구나.”

거리가 먼 탓에 문 너머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벌써 400년을 넘게 살았다는 마법사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문 앞을 서성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충분히 열고 들어갈 수 있으시면서.’

마탑주의 허리춤에는 항상 열쇠 꾸러미가 달려 있지 않던가.

그러나 그레고리는 열쇠엔 손도 대지 않았다. 그저 아놀드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기만을 기다려 주었다.

“……그래, 오늘은 아닌가 보구나.”

“…….”

“언제든 괜찮으니 나오기만 하려무나.”

“…….”

“내일 보자.”

한참을 기다리던 마탑주가 별 소득 없이 등을 돌렸다.

“콜록, 콜록.”

“……!”

마른기침을 따라 들썩이는 몸이 오늘따라 쇠약해 보였다.

바크는 놀란 눈으로 그 장면을 훔쳐보았다. 어쩐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 * *

─촤아아.

물결을 가르는 뱃소리가 시원했다. 갑판에 나온 오드리는 난간을 붙잡고 펠리오스의 야경을 눈에 담았다.

‘꼭 다른 도시 같네.’

여기저기 불을 밝힌 가게와 집들이 해안가를 따라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어쩐지 황량하게 느껴졌던 시내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얼핏 보면 다른 도시라고 착각할 정도로.

다만, 벌써 몇 시간째 배에 갇혀 있는 터라 속이 울렁거렸다.

그 시각.

‘이건 꿈이 아니다.’

데릭은 손을 꼬집으면서까지 현실 감각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혹여 꿈으로 착각해 불순하고, 음탕하며, 대단히 무례한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입맞춤 같은.

‘젠장……!’

이젠 놀랍지도 않다. 도돌이를 만난 뒤로 그의 얼굴엔 발그레한 홍조가 가실 날이 없었다.

데릭은 바람결에 볼을 식히며 생과 사의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던 전쟁터를 떠올렸다. 뭉근한 열기를 잠재우기엔 그만한 게 또 없었기 때문이다.

“각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꽤 빠르군.”

“저흰 물러나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그러도록 하지.”

루카스와 하인들이 인사와 함께 물러났다. 자연히 선상 위엔 데릭과 오드리만 남았다.

“큼.”

한참 떨어진 데릭은 남몰래 목을 가다듬었다. 선상의 로맨틱한 분위기 탓인지, 초저녁에 걸맞은 목소리를 내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주 다정한 호칭과 함께.

드디어 몇 달에 걸쳐 공부한 것을 활용할 순간이 온 것이다!

“음식이 식기 전에 얼른 들지.”

“아, 저는 안 먹어도 괜찮-.”

“나의…….”

“네?”

“아기 고양이.”

“……!”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려 제 손발이 잘 붙어 있는지 확인했다.

‘눌어붙은 줄 알았네!’

프리트 공작은 도대체 부끄러움이라곤 모르는 사람인가? 안 그래도 뱃멀미로 울렁이는 속이 더 거세게 요동쳤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바닷물에 귀를 담그고 바락바락 씻어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어째 오드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지나치게 그윽했다.

‘설마…….’

마치 인생의 중대발표를 앞둔 듯한 진중함이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간파한 오드리가 초조하게 옷자락을 쥐어 뜯었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아직 프리트 공작에게 직접적인 말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뿐.

게걸스럽게 식사하기 작전도 실패로 돌아간 마당에 이판사판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의지를 꺾어야만 한다.

한편, 데릭은 조금 쑥스러웠으나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도돌이는 부끄럼쟁이군.’

그의 관심은 온통 도돌이뿐이었다.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눈도 못 마주치는 모습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저런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치도 기꺼이 감내하리라.

‘좋은 시도였다.’

이로써 두 사람은 조금 더 깊은 관계를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그 끝에 있는 것은 ‘결혼’이었다.

“특별히 샐러드를 추가했다. 그대가 잘 먹는 것 같기에.”

“…….”

“어디 불편한 데라도?”

“그게…….”

방금까지만 해도 들떴던 데릭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혹, 어디가 아픈 것인가?’

도돌이의 안색이 유난히 안 좋았다. 마치 말 못 할 고민이라도 품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좋아하던 샐러드에 손도 못 대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무너졌다.

‘고민은 함께 나누면 좋으련만.’

하지만 도돌이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진 믿고 기다려 줘야겠지. 아무리 두 사람이 부부가 될 운명이라고 해도.

데릭은 능숙하게 분위기를 전환했다.

“와인이라도 한잔하지. 저녁인데.”

“…….”

오드리는 와인 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맨정신엔 못 할 것 같으니 술이라도 마시자.’

그녀에게 허락된 마지노선은 딱 거기까지였다. 정상인과 개 사이의 그 어떤 지점. 이 한 잔을 비워 내면 혀는 조금 꼬일지언정, 적당히 사람다운 생각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짜랑.

두 와인 잔이 부딪히며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데릭은 단숨에 잔을 비우는 그녀를 짐짓 모른 체하며 입만 축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는 그가 먼저 분위기를 주도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나는 아이 욕심이 없다.”

“코, 콜록!”

“아마 둘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지금 저한테 말씀하시는……?”

“분명 화목한 가정을 이룰 것이다. 함께 고민도 나누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그런 가정.”

데릭이 은근슬쩍 도돌이에게 신호를 보냈다. 어차피 우리는 가족이 될 사이니, 고민이 있다면 언제든 마음 편히 이야기해도 된다고.

그러나 오드리에겐 지금이야말로 데릭으로부터 벗어날 기회였다. 와인 한잔에 용기를 얻은 그녀 역시 은근슬쩍 미끼를 던졌다.

“하, 하하. 정말 생각만 해도 부럽네요! 저는 평생 결혼도 못 할 신세라서 더더욱요.”

“……그게, 무슨.”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린가?

도돌이가 결혼을 못 하다니! 그럼 데릭은 누구와 결혼한단 말인가?

혼란에 빠진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드리는 말도 안 되는 쐐기를 박았다.

“저, 저는 아주 음탕하기 이를 데 없는 여자거든요!”

“……!”

가장 타격이 크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 언젠가 신문에서 본 ‘배우자 결격 사유 1위’를 그대로 녹여 낸 것이었다.

예상대로 프리트 공작은 잔뜩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때다 싶은 오드리는 더욱 과감하게 나가기로 했다.

“제 머릿속엔 온통 더러운 생각뿐이에요!”

“…….”

“누가 제 시커먼 속내를 알아챌까 두려울 정도랍니다.”

“…….”

“이런 제가 결혼을 한다면, 아마 세상 사람들이 제 가족들에게까지 손가락질하겠죠?”

“…….”

오드리는 온 힘을 다해 본인이 그의 짝으로는 어울리지 않은 상대임을 어필했다. 구구절절 이어지는 인격적 결함에는 끝이 없었다.

‘됐어!’

할 말을 잃은 프리트 공작을 보니, 이번엔 제대로 먹혀든 것 같다.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음탕함이란 게, 혹시 상상이나 꿈도 포함이 되는 건가?”

도대체 저건 왜 묻는 걸까? 하지만 조금 더 완벽하게 정리당하고 싶던 오드리는 냉큼 대답했다.

“네에. 그, 그렇겠죠?”

“그렇다면…… 나 또한.”

“……?”

“음탕함이라면, 나도 뒤지지 않는다.”

“……!”

데릭이 진심으로 고백했다.

안 그래도 간밤에 꾼 꿈 때문에 스스로가 혐오스럽게 느껴지고, 죄를 지은 것 같이 느껴지던 참이다. 그런데 도돌이 앞에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기회가 찾아오다니! 하루 내내 불편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도돌이도 나와 같았다. 이것은 운명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돼.’

비정상이 아니라고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도돌이와의 유대감은 밑도 끝없이 깊어졌다.

“우린……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겠군.”

“……!”

오드리는 이쯤 되니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이걸 이렇게 받아들인다고?’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온 힘을 다해 회심의 일격을 날리면, 그는 매번 아무렇지도 않게 맞받아치는 것이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하, 하지만 제가 공작 부인이 된다면, 분명 사람들이 손가락질-.”

“……나는 내 가족이 손가락질받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데릭은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초조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도돌이가 뭘 알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어떻게?’

영지 방문 일정 내내 품고 다니던 안주머니 속의 반지를 도돌이가 눈치챈 건가 싶어서.

반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3명뿐이었다. 그와 루카스, 그리고 보석 세공사.

‘……영문을 모르겠군.’

어쨌거나 그가 준비한 반지는 다이아몬드 세공에만 무려 2개월이 소요된 희대의 역작이었다.

도돌이의 연애편지를 받자마자 준비에 돌입해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제때 프러포즈도 못 할 뻔하지 않았는가?

두 반지를 겹쳤을 때 비로소 하나가 되는 다이아몬드 장식은 두 사람의 운명을 상징했다. 동시에, 사랑이 아니면 죽음뿐이라는 아주 단호한 결의이기도 했다.

데릭은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가까스로 삼켜 냈다.

‘분위기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프러포즈를 해선 안 될 일이지.’

고작 이런 선상에서, 이런 로맨틱한 조명을 지원군 삼아, 마침 와인 한잔을 기울이며, 그윽한 눈빛으로 프러포즈를 해선 안 된다.

그에겐 다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사나 마저 하-.”

“망해따!”

“……나의, 아기 고양이?”

“망해써!”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일까?

프리트 공작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사랑과 신뢰가 가득한 눈빛을 주고받던 도돌이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잔뜩 꼬부라진 혀로 깽판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태어나는 게 더 빠르게써.”

“……무엇이.”

“공쟉님이 알아서 머 하시게?”

“……!”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훅 치고 들어오는 반존대에 심장이 떨렸다.

‘읏.’

참으로 당돌하기도 하지. 아주 그를 손바닥에 놓고 쥐락펴락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전부 다 내어 주고 싶을 정도로 아찔했다.

그러다 문득 와인 병에 시선이 닿았다.

‘가만. 저게 왜 저기에…….’

분명 2잔을 따랐을 뿐인데, 반쯤 비어 있는 것이 영 수상했다. 마치 3잔을 따라 마신 것처럼.

‘……그렇군.’

데릭은 뒤늦게서야 상황 파악을 마쳤다.

그가 아주 잠시 반지에 정신이 팔린 사이, 깜찍한 도돌이가 홀로 술잔을 비운 것이다!

어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저 자그마한 머리통에는 온통 귀여운 생각밖에 없는 건가?

프리트 공작은 눈 밑까지 발그레하게 열이 오른 도돌이를 퍽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순 없지만, 옹알대는 모습이 참으로 앙증맞군.’

그런 모습이 귀여워 뭣도 모른 채 와인을 더 권하기도 했다.

“한잔 더 하지.”

“공쟉님이 따라 바여.”

“그래. 그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데릭은 체면도 잊고 열심히 술 시중을 들었다. 그 성원에 보답하듯 꼴딱꼴딱 받아마신 오드리는 얼마 가지 않아 쓰러지고 말았다.

“……왕.”

“더, 가까이 가란 말인가? 그대에게로?”

“…….”

프리트 공작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보는 눈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긴장된 까닭이다.

‘흑심을 품은 사내처럼 보이진 않겠지?’

그래도 도돌이가 오라는데 어쩌겠는가. 그는 삐거덕대는 움직임으로 점점 그녀와 가까워졌다.

“내가 왔다.”

“…….”

“……나의 아기 고양이?”

“…….”

하지만 도돌이는 어느새 테이블을 베개 삼아 도롱도롱 잠들어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실망하고 말았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남의 속도 모르고 곤히 잠든 도돌이가 야속하게 느껴졌을 뿐.

“……하아.”

이 와중에도 자는 모습이 꼭 천사 같아서 차마 원망할 수도 없었다.

‘바람이 조금 쌀쌀하군.’

데릭은 혹여 도돌이가 깨기라도 할까 조심조심 겉옷을 벗어 어깨 위로 덮어 주었다. 그리곤 발걸음을 죽여 조타실로 향했다.

“각하!”

“쉿. 그러다 도돌이가 깨겠다.”

“……저렇게나 멀리 계시는데요?”

“아무튼.”

“…….”

“정박하려면 얼마나 남았지?”

“대략 10분 이내입니다.”

“좋군. 루카스, 지금 당장 항구에 들것을 준비시켜라.”

“예? 알겠습니다.”

데릭은 다시 등을 돌려 갑판으로 향했다. 홀로 잠든 도돌이의 곁을 지켜 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우리 사이가 얼른 바다처럼 깊어졌으면 한다.”

“…….”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거든.”

“…….”

“나는 잠든 그대를 업고 갈 수도 없다. 그저 지켜보는 수밖엔.”

“…….”

“그대가 한 걸음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면 참 좋을 텐데.”

잠든 상대에게 속삭인 말은 바람을 타고 그대로 흘러가 버렸다. 프리트 공작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한참이나 도돌이에게 말을 건넸다.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까지.

“각하. 이제 내리시면 됩니다.”

“도돌이가 우선이다.”

그는 도돌이가 들것에 실리는 것까지 지켜본 후에야 발을 떼었다.

심신미약 상태의 도돌이는 들것에 실려 숙소까지 운반되었다.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듯 크림색의 천으로 온몸이 가려진 채로.

* * *

늦은 저녁.

프리트 공작의 방으로 수상한 손님이 찾아왔다. 온몸을 새카만 로브로 꽁꽁 싸맨 미지의 인물이었다. 데릭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왔군.”

“……죄송합니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게 그만. 제가 일을 망칠 뻔했습니다.”

“되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넘어가지. 그러나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 유념하겠습니다.”

“물건은?”

“천천히 살펴보시지요.”

로브 속에서 반들반들 윤이 나는 목각 상자 하나가 등장했다.

─달칵.

데릭은 미리 준비한 열쇠를 사용하여 잠금장치를 풀었다. 이어서 상자 속 물건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얼굴이 퍽 신중했다.

“……이게 전부인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고, 일종의 샘플이라 보시면 됩니다.”

“…….”

“살펴보시고 수정 사항이 있으면 일러 주십시오.”

“그리하지.”

데릭이 꺼내 든 것은 돌돌 말린 종이 뭉텅이였다. 그는 종이를 하나하나 펼쳐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곳엔 그와 도돌이의 다정한 한때가 그림으로 녹아 있었다.

군악대의 환송 속에 공작성을 나서는 두 사람. 마차 밖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도돌이와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프리트 공작. 빈방과 나무의 갈림길에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마차 위에 잔뜩 구겨진 프리트 공작과 영문을 모르고 정면만 응시하는 도돌이. 연극의 한 장면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도돌이의 아픈 손바닥을 살피는 데릭. 잔뜩 감동한 얼굴로 샐러드를 먹는 도돌이. 로맨틱한 선상에서 와인 잔을 맞대는 두 사람. 마지막으로 들것에 실린 오드리 곁을 지켜 주는 프리트 공작까지.

“……마치 사진을 보는듯하군. 과연 캔버스 위의 마술사라는 명성다워.”

“과찬이십니다.”

스케치를 확인한 데릭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분명 도돌이도 감동하겠지.’

프리트 공작은 오직 도돌이를 위한 깜짝 이벤트를 계획한 바였다. 바로, 두 사람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그림첩을 만드는 것. 화가는 그들의 일정을 몰래 쫓아다니며 자연스러운 순간들을 그림에 담았다.

‘언젠가 그림첩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날이 오겠지.’

인생의 노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부부가 함께 나눌 만한 추억 하나 없다면 굉장히 서글프지 않겠는가. 더욱이 두 사람은 연애 시절의 추억이랄 게 없으니 더더욱 그랬다. 데릭은 이 아름다운 시간을 손 놓고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이런 연유로, 프러포즈 계획을 세움과 동시에 화가 하나를 고용한 바였다. 그게 바로 눈앞의 남자였다.

“이게 원본인가?”

“아닙니다. 원본은 다음 작업을 위해 화실로 보내 놓았습니다. 이것은 사본이고요.”

“혹, 사본을 쓸 일이 있나?”

“각하께서 보관하셔도 됩니다.”

“좋군.”

화가는 눈치가 빨랐다. 기분이 좋아진 데릭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마지막 당부를 건넸다.

“그리고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게 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아무리 그림이라 해도, 도돌이의 사랑스러움과 깜찍함이 세세하게 잘 드러나야 한다.”

“…….”

“물론 실물이 훨씬 요정 같지마는.”

“예,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쳐다보아선 안 된다.”

“…….”

화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수천 폭의 그림을 그렸지만, 이렇게 유난을 떠는 의뢰인은 또 처음이었다. 피사체를 자세히 보지 않고 어떻게 사실적인 묘사를 한단 말인가?

그런데 프리트 공작은 아예 그림을 펼쳐 놓고 하나하나 짚어 대기 시작했다.

“도돌이의 눈은 반짝이는 보석 같다. 이런 텅 빈 눈동자가 아니라, 더욱 총명하게 빛이 난단 말이다.”

“……예.”

“마치 깊은 산골에 흐르는 맑은 샘물처럼.”

그저 보이는 대로 그렸을 뿐인 화가는 다소 억울했다.

“그리고 손은 조금 더 단풍잎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앙증맞은 단풍잎이지.”

“시정하겠습니다.”

“머리칼은 특히 채색에 공을 들여야 한다. 솜털처럼 보드라운 느낌을 살리는 건 절대 쉽지 않을 거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그저 보이는 대로 그리기만 하면 돼.”

“…….”

“사랑스럽고, 깜찍하고, 총명하고, 매력적이고, 아주 작으면서도 소중하게.”

이런 진상이 있나? 도대체 이게 수정 사항을 의논하는 건지, 일방적인 자랑질을 듣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프리트 공작의 도돌이 자랑은 그 뒤로도 몇 시간 동안이나 이어졌다. 세상에서 자기 혼자 연애를 하는 것처럼. 아주 유별나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일 작업도 준비해야 해서요.”

“그래. 내일도 기대하지.”

“예.”

다시 로브를 뒤집어쓴 화가는 저도 모르게 귓구멍을 만지작거렸다.

‘피가 나는 것 같은데…….’

왠지 작업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한편, 홀로 남은 데릭은 사악한 미소와 함께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썩 마음에 든 표정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눈에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누가 보면 생판 남인 줄 알겠군.’

바로, 광활한 우주만큼이나 아득한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었다. 한 뼘 정도 떨어진 두 사람은 연인은커녕, 일행으로도 안 보였다. 길가는 행인 둘을 그려 넣어도 이토록 남남으로 보이진 않을 테지.

‘더 늦게 발견했으면 어쩔 뻔했나.’

데릭은 아주 신중한 얼굴로 종이를 접었다.

‘이 정도? 아니다, 여전히 멀어.’

그렇게 몇 번이고 접었다 폈다를 반복한 끝에야 두 사람은 완벽한 한 쌍이 되었다.

‘딱 좋군.’

마치 한 몸통에 머리가 두 개인 케르베로스 같은 모양새였다.

프리트 공작의 얼굴엔 비로소 안도의 미소가 감돌았다. 두 사람은 그 어느 곳에서라도 함께여야만 했으니까.

* * *

“끄아악…….”

오드리는 끔찍한 컨디션으로 눈을 떴다.

온몸에 성한 구석이 하나 없었다. 깨질 듯한 머리며 축축 늘어지는 몸뚱이, 으슬으슬 몰려드는 추위까지.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었다. 불덩이가 돌아다니는 듯 답답하고 뜨거운 명치도 불길했다.

‘마력석 남은 것 없나?’

문득 불안해진 오드리는 본능적으로 가방을 뒤적였다. 지금 상태가 마력 폭주 이전에 찾아오는 불쾌한 감각과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우르르.

“없어. 여기도 없고…….”

당장 마력을 배출하기 위해선 활성화되지 않은 마력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가방 속엔 이미 활성화가 끝난 이동 마력석과 방어용 마도구뿐.

“…….”

희망을 잃은 오드리는 망연자실하게 누워 버렸다.

그런데 문득 바닥을 굴러다니는 통신구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왜 저기 있지?’

하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어젯밤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

벌떡 일어나 앉은 오드리가 어제의 행적을 하나둘 되짚기 시작했다.

‘분명 전서구 대여소에 가서 아놀드 오라버니에게 편지를 보내고, 아이랑 부딪혀서, 샐러드 스무 접시를 먹고, 배를 타서…….’

그러다 와인을 마신 것까지 생각이 닿았다.

‘그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 해먹에 누운 듯한 과학적인 편안함을 느꼈던 기억뿐. 혹시라도 프리트 공작에게 하극상을 부린 건 아닌지 문득 걱정이 되었다.

─똑똑.

“……!”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마치 천둥 같았다.

“아가씨, 일어나셨는지요?”

“으, 으응!”

“지금 식사를 들일까요?”

“아니야. 오늘은 거를래. 속이 좀 불편해서…….”

“그럼 묽은 수프라도 준비하라 이를까요?”

“아니,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예. 그럼 치장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으응…….”

프리트 공작이 오드리를 위해 이끌고 온 사용인 중 한 명이었다.

‘욕을 하진 않았겠지. 그래, 내가 해 봤자 뭐라고 하겠어.’

오드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눈물 나는 자기합리화를 하였다.

누구누구의 말로는 그녀가 취하면 개가 된다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사람이 어떻게 개가 된단 말인가?

그러나 걱정되는 점이 하나 있었으니.

‘……진짜 개가 됐으면 어떡하지?’

개들은 아주 귀여운 존재 아니던가. 이미 충분히 귀여운 오드리가 개와 만났다면 그 모습은 분명 충격적일 정도로 귀여웠겠지.

‘어떡해.’

그렇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프리트 공작이 그녀의 매력에 홀딱 빠졌을 것 아닌가?

‘안 돼……!’

이 세상은 귀여운 오드리에게 너무도 가혹했다.

* * *

데릭과 오드리를 태운 마차는 시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여기서부터 걸어가시면 됩니다. 멀지 않은 곳에 호위를 배치해 두었으니, 편히 돌아다니셔도 좋습니다.”

“알겠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프리트 공작이 여느 때와 같이 전완근을 슥 내밀었다. 그러자 오드리 역시 자연스럽게 그의 팔뚝을 잡고 내렸다.

‘정말로 색다른 기분이 드는군.’

데릭은 들뜬 얼굴로 그들의 차림새를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은 평소와 달리 단출한 옷차림이었다. 칙칙한 무채색의 옷감은 뻣뻣하고 구김이 많이 졌으며, 아무런 장식도 찾아볼 수 없었다. 프리트 공작의 명령으로 루카스가 새벽녘에 급히 공수한 옷들이었다.

‘신분을 숨긴 채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이색 데이트라고 했던가.’

데릭은 일정표를 수정하던 도중, <만 개의 데이트>라는 책에서 시장 데이트를 처음 접했다. 그리곤 홀린 듯이 정독했다.

낯선 풍경, 낯선 옷차림, 그리고 낯선 경험이 빚어낸 설렘이라니! 분명 도돌이도 좋아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복숭아가 맛있어 보이는군.”

“고, 공작 각하?”

프리트 공작이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일개 평민이다. 이 옷차림을 보아라.”

“……!”

“아무래도 사람을 착각한 것 같군.”

“……아. 죄, 죄송합니다! 죽을 때가 됐나 눈앞이 영 가물가물해서, 하하!”

“어서 복숭아나 내어 주지.”

“예, 알겠습니다! 공작, 아니, 평민님…….”

크리앙트 제국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프리트 공작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주 감쪽같군.’

그는 도돌이와 함께 생애 첫 자유를 만끽했다. 영지민들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숨을 죽인 줄도 모르고.

오드리는 복잡미묘한 얼굴로 프리트 공작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 말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는 평민 놀이에 심취하여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남들이 본인을 못 알아본다고 철석같이 믿는 것처럼.

덕분에 애꿎은 영지민들만 잔뜩 겁에 질렸다.

‘제발, 우리 가게는 안 돼요!’

‘옆으로 가세요, 조금만 더. 더.’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 아무것도 못 본 거야.’

필사적으로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이 참으로 눈물겨웠다. 오드리는 어째 그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양상추가 싱싱해 보이는군.”

“아, 아이고! 아닙니다! 속은 전부 썩어 문드러져서 벌레가 득시글거립니다!”

“……감히, 버릴 채소를 팔고 있다는 건가?”

“그, 그것이, 아니, 막 장사를 접으려던 참입니다! 이것들은 전부 내다 버려야지요, 하하!”

“그렇군.”

채소 상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매대를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오드리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둘 중 하나만 하시지…….’

평민 옷을 입고 평민 행세를 하다가, 본체인 프리트 공작의 모습이 불쑥 튀어나오면 어쩐단 말인가. 아주 끔찍한 혼종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저렇게 살벌한 눈동자가 어디 흔하던가? 딱 봐도 프리트 공작, 아니면 최소 뒷골목의 청부살인업자 같은데. 저런 모습으로 일개 평민이라고 하면 도대체 누가 믿어 주냔 말이다.

“뭐 필요한 건 없나? 먹고 싶은 건?”

“아니요! 괜찮아요! 전혀요!”

“잘 생각해 봐.”

“…….”

연두색 눈동자가 슬며시 시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작은 행동은 시장 상인들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저는, 저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당황한 오드리가 죄 없는 눈망울로 결백을 호소해 보기도 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여기는 안 됩니다요!’

‘저에겐 토끼 같은 자식이 둘이나 있습니다!’

‘저희 노모가 편찮으십니다. 제발 숨 쉴 구멍은 남겨 주세요…….’

그들 눈엔 두 사람이 한패나 다를 바 없던 것이다. 졸지에 오드리는 이도 저도 아닌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응?’

그런데 그때, 시장 구석에 좌판을 벌여 놓은 노인에게 눈길이 갔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허허 웃는 얼굴이 유달리 평온해 보였다. 마치 그 어떤 편견도 없는 사람처럼.

‘저기다!’

오드리는 곧바로 반색하며 좌판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홀홀, 젊은 새댁이구먼.”

“네? 아니, 꼭 그런 건-.”

“아주 얼굴에 꽃이 폈어. 딱 보기 좋구먼. 자, 마음 편히 구경하시구랴!”

“……네.”

갑작스러운 새댁 취급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덕담을 건네는 노인의 말꼬리를 잡아 가며 하나하나 정정할 수도 없는 노릇. 오드리는 조용히 시선을 내려 좌판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는지 깨달았다.

‘죄다 아기용품이잖아?’

영양제부터 시작하여 간식, 신발, 옷, 장난감, 배냇저고리 등등. 이곳에서는 온갖 아기용품을 팔고 있던 것이다. 당연히 오드리에겐 하등의 쓸모도 없는 것들이었다.

‘아……!’

그러다 문득 루카스가 떠올랐다. 몰래 아기 선물을 보내야겠단 생각을 해 놓고도 여태껏 까먹고 있었지 뭔가.

‘가만, 몇 개월이라고 했지? 삼 개월이랬나?’

지금쯤이면 5개월이나 6개월이 되었을 것이다. 남의 아이는 참으로 빨리도 크지.

‘어떤 게 좋을까?’

오드리는 대충 구경하는 척만 하려던 것도 잊고 신중하게 선물을 골랐다.

한편, 오도도독 뛰어가는 도돌이의 뒷모습을 멀찍이 바라보던 데릭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복슬복슬한 토끼가 따로 없군.’

도돌이는 무채색의 옷 속에서도 빛이 났다. 몽글몽글한 머리칼이 햇살 아래 어찌나 황홀한 춤을 추던지. 솜털처럼 가볍게 흩날릴 때마다 사랑스러움이 잔뜩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하아…….’

데릭은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저 머리칼을 붙잡고 올올이 입 맞추고 싶은 걸 참느라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것도 주세요!”

아, 이번엔 종달새처럼 높다란 목소리가 그의 청각을 사로잡았다.

‘무엇을 골랐으려나.’

데릭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사코 거절만 하던 도돌이에게 드디어 돈쭐다운 돈쭐을 내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도돌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전부-.’

좌판을 훑어보던 프리트 공작이 우뚝 멈춰 섰다.

‘……아기, 용품?’

데릭은 골똘히 생각했다.

다 큰 도돌이에게 아기용품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머릿속으로는 ‘도돌이’, ‘아기’, ‘두 사람’, ‘결혼’과 같은 단어들이 난잡하게 떠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데릭은 불시에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의 아이……!’

순식간에 귓불이 불타올랐다.

아, 그의 도돌이는 어쩜 이리도 저돌적이란 말인가? 두 사람은 아직 손 한 번 제대로 맞잡은 적이 없건만, 벌써 아기용품을 준비하다니! 음탕한 커플임을 감안하더라도 진도가 너무 빨랐다.

프리트 공작은 도돌이에게만 들릴 정도로 수줍게 속삭였다.

“……너무, 이르다.”

“네?”

“그때 가서 구매해도 늦지 않아.”

“네에? 그게 무슨-.”

“식을…… 올리는 게 우선이니까.”

“……!”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다. 서두르지 않아도 돼.”

그런데 아기용품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궁금증이 도졌다.

‘황새는 언제 오는 거지?’

아무 황새나 포획하여 아이를 물어 오라 다그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찾아와도 난감할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와 주길 빌어야 하나.’

혹시, 두 사람의 사랑이 짙어지길 기다렸다가 아이를 물어다 주는 걸까? 마치 선물처럼?

하지만 황새는 겨울 철새였다. 매년 4월에 번식지로 이동하여 자기들도 할 일을 하고, 겨울이나 되어야 크리앙트 제국으로 날아온다. 그렇다면 모든 아이가 추운 겨울에 부모의 품으로 도착한단 말인가?

‘……나는 칠 월생이지.’

생각해 보니 어딘가 이상했다. 모든 아이가 겨울에 온다면, 그의 출생의 비밀은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데릭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 노인은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은근히 물었다.

“좋을 때구먼. 신혼인가?”

“아, 아니에요!”

물건을 고르던 오드리가 곧장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다른 생각에 심취한 듯했다.

“에잉? 아니긴. 이 늙은이가 산 세월이 있는데. 척하면 척이지!”

“그게 아닌-.”

“보아하니 새댁은 숨만 쉬어도 사랑받을 운명이구먼.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난 게야.”

“아니, 정말로 아닌-.”

“새신랑이 훤칠하니 힘깨나 쓰겠구먼? 큰일 하겠어. 껄껄!”

“……!”

그 순간, 상황을 관망하던 주변 상인들이 겁에 질렸다.

‘저 노인네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새빨간 눈동자 좀 보시라고 열심히 수신호를 보내 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나저나 젊은 부부 같은데, 벌써 아이 계획이 있는 게야? 새신랑이 급한가 봐?”

“……새신랑?”

이제 막 상념에서 깨어난 데릭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어쩐지 듣기 좋은 단어가 그의 귓가를 간지럽힌 까닭이다.

오드리는 그 모습을 영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참으로 보기 좋은 한 쌍이야. 으응. 그래. 행복하게 잘 살겠구먼. 내 장담하지.”

“……!”

데릭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인단 말인가?’

역시 연륜이라는 건 무시할 게 못 되었다. 사람 보는 눈이 있지 않은가.

기분이 좋아진 프리트 공작은 도돌이를 말리려던 것도 잊고 돈주머니 하나를 툭 올려놓았다. 평민답지 않은 묵직함이었다.

“이 물건들, 전부 구매하지.”

“……!”

“허허! 새신랑이 화끈하구먼! 이거, 곧 좋은 소식 기대해 봐도 되겠어.”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돈주머니를 열었다.

“세상에, 이 귀한 은화를!”

“은화가 아니라 금화다.”

“에에, 금화였던가……? 은화 같기도 했는데 말이지.”

눈이 침침한 듯 여러 번 비벼 대는 모양새가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면서요? 숨만 쉬어도 사랑받을 운명이라면서요?’

설마, 그게 다 상술이었던 건가?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한 치 앞의 화폐도 구분하지 못하는 시력으로 완판 신화를 만들어 낸 연륜이 대단하지 않은가.

“으응. 어쨌든 두 사람은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살 게야. 늙은이의 촉은 꽤 좋거든.”

“보는 눈이 있군.”

“…….”

“다복한 가정 꾸리시게! 서로 사랑하고!”

노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텅 빈 좌판을 정리하는 손길이 능숙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상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휴, 할아버지! 큰일 날 뻔하셨어요!”

“어쩜 그렇게 무모하세요?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에잉, 젊은것들이 비겁하게 노인네 하나 둘러싸고 뭐 하는 짓들이야?”

“방금 그분이 누구인지는 알고 그러신 거예요? 세상에. 프리트 공작님이세요. ‘그’ 프리트 공작님이요!”

“뭐?”

노인은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이어서 좌판 한 번, 상인들 한 번, 마지막으로 멀어지는 뒷모습까지 보다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먼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엔 생기가 없었다.

“어쩐지, 그럼 그게 착각이 아니었구먼…….”

“네? 뭐가요?”

“물건을 파는데, 자꾸 멀리서 시커먼 게 아른거리더라고.”

“파리 아니에요?”

“분명…… 먼저 간 할멈이었어.”

“……!”

“허, 죽다 살아났구먼…….”

노인이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른 오라고 손짓하던 아내의 형상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 * *

“…….”

“각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다.”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하군.’

어디선가 수상한 시선이 느껴진 까닭이다. 화가와 호위들의 위치까지 전부 확인했으나, 그쪽은 아니었다.

“보좌관님, 이거 받으세요.”

“……예?”

마침 주위를 경계하던 데릭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보지 말았어야 할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가, 각하!”

루카스의 손에 들려 있는 물건들이 낯설지 않았다. 그와 도돌이가 함께할 미래를 그리며 구매한 아기용품들이었으니까.

“……하.”

순진한 줄로만 알았던 보좌관이 뒤에서 호박씨를 까고 있던 것이다. 그것도, 바로 주군의 등 뒤에서.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군.”

“각하!”

프리트 공작이 싸늘한 눈으로 보좌관을 노려보았다. 잔뜩 당황한 듯한 루카스의 얼굴을 보니 찔리는 게 대단히 많아 보였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지?’

충직했던 신하가 호시탐탐 도돌이를 노리고 있었다니……. 그가 경계해야 했던 건 쓸모없는 식충이가 아니라, 발톱을 숨긴 호랑이 새끼였던 것이다!

“조금 떨어져서 걷지.”

“……!”

결국, 루카스에게는 3m 이내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그로서는 억울해 미칠 노릇이었다.

‘불쌍한 애 아빠 행세를 시킨 게 누군데요!’

혼삿길이 막힌 것도 모자라, 이젠 밥줄까지 끊기게 생겼다. 이건 전부 프리트 공작 탓이었다.

* * *

데릭이 화가에게 은밀히 눈짓했다.

‘단 한순간도 놓쳐서는 안 된다.’

하룻밤 사이 수척해진 화가가 눈치껏 망원경을 들어 올리며 화답했다. 프리트 공작은 그제야 만족한 듯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연극 감상은 원래 계획에 없던 일정이었다. 수정된 일정표에 의하면, 두 사람은 지금쯤 근처 언덕에 올라 하늘을 구경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호객꾼의 홍보 하나가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놨다.

‘올여름, 그들이 온다! 세상에서 제일 뜨거운 극단 프레이아의 순회공연! 지금이 아니면 만날 수 없다! 진정한 사랑을 찾아 떠나는 록시의 여정, <사랑의 의미>를 제국어로 만나 보시라! 믿고 보는 초호화 캐스팅에다, 배우진들과 특별 초상화의 기회까지? 펠리오스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 혜택!’

진정한 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분명 유익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일 것이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두 사람에겐 뜻깊은 경험이 되겠지. 철저히 계획에 따라 움직이던 프리트 공작은 답지 않게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특별석 둘, 노상석 하나.”

“정말 죄송하지만 방금 막 매진-, 프, 프리트 공작님?”

“아이고오! 이게 누구십니까!”

“…….”

매표 직원이 막 매진 소식을 전하는 찰나, 유들유들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이거,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프레이아 극단주 마시라고 합니다.”

“……그렇군.”

“아이구! 잠시만요! 어딜 가십니까? 여기까지 오셨는데 공작님께서 관람해 주셔야지요!”

“매진이라지 않나.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때 보도록 하지.”

“…….”

마시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이거, 신대륙의 유명인사로 관심 좀 끌면 제작비는 충당하겠는데?’

과연 사업가다운 발상이었다. 그는 쫓아낼 고객 명단을 머릿속으로 훑으면서 비즈니스용 미소를 장착했다.

“아닙니다. 방금 막! 취소 표가 생겨서 매표창구와 공유하려던 참입니다. 하하.”

“그래? 어떤 좌석이지?”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마침 특별석 둘, 노상석 하나군요. 자리가 제 주인을 찾아가나 봅니다.”

“잘되었군.”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좌석 번호를 적어 드릴 테니,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두 사람은 순조롭게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수도의 극장들과 달리 귀족들을 위한 박스석은 없었다. 대신 등급별로 구역이 나뉜 형태로, 아주 저렴하게 이용 가능한 노상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꼴 좋군.’

데릭은 노상석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루카스를 보며 혀를 찼다. 푹신하지도 않은 돗자리에 앉아 3시간을 견디려면 꽤 힘들 테지. 다정한 연인들 사이에 외딴 섬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 조금 짠하긴 했으나, 전부 자업자득이었다.

‘도돌이에 대한 마음은 스스로 정리해야 할 것이다.’

프리트 공작은 매서운 눈으로 보좌관을 노려보았다. 이 연극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도돌이를 향한 추악한 감정을 깨끗이 씻어 내길 바라며.

그러나 데릭에겐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옆좌석이 남자라는 언급은 없었지 않나.’

아무리 취소 표를 급히 잡았어도 그렇지. 두 사람에게 허락된 좌석은 썩 훌륭하지 못했다. 하나는 시커먼 사내놈의 옆자리였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번잡한 통로 쪽이었다.

‘어찌한다.’

데릭은 10m가 떨어진 지점에서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둘 다 도돌이에게 양보하고 싶은 좌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좌석 앞에 도착했을 무렵.

─사사삭.

데릭이 날렵하게 도돌이를 제치고 들어가 자리를 선점했다.

“……?”

“바깥쪽에 앉으면 멀미가 나서.”

“……아, 네에.”

만만한 멀미 핑계와 함께.

‘그냥 거기 앉고 싶다고 말씀을 하시지.’

오드리는 괜히 멋쩍어졌다. 동시에 프리트 공작이 생각보다 예민한 남자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 이렇게 안 되는 게 많담?’

마력석 포털도 못 써, 통로 쪽 좌석에도 못 앉아. 저렇게 멀미가 많은 사람이 대체 어떻게 말을 타고 신대륙을 호령했단 말인가?

또, 취향은 괴상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요란한 프릴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가슴팍에 연분홍색 소설책을 품고 다니는 것으로도 모자라, <사랑의 의미> 같은 문제작을 좋아할 줄이야.

그냥 ‘크리앙트의 피바다’라고 뭉뚱그리기엔 생각보다 다채로운 사람 아닌가. 물론 그 색깔이 아름답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금부터 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즐거운 관람 되십시오.”

곧바로 극장의 불이 꺼지고 연극의 막이 올랐다.

프리트 공작은 잔뜩 기대한 나머지, 어두운 극장 속에서도 달라붙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오, 록시!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분명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사랑? 도대체 당신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육체적 종속이요? 서로의 살갗을 파고드는 족쇄요?”

“록시!”

“난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

“사랑은 배타적 감정이 아니랍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막심을 사랑하고, 델프를 사랑하고, 루이를 사랑하는 것처럼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뜨겁게 키스해 달란 말이에요!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오, 록시! 내 사랑!”

두 주인공은 들고 있던 물건을 내팽개치고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막 입을 맞추려는 찰나.

─스륵.

“…….”

곰 발바닥 같은 것이 오드리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눈을 꼭 감은 프리트 공작의 손이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보자고 한 거람?’

오드리는 벌써 스무 번째 키스신을 놓치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스킨십이 나올라치면 민첩하게 눈부터 가려 주고 보는 누구누구 때문이다.

손은 또 어찌나 큰지. 거의 얼굴 전체를 덮어 버린 탓에 슬쩍 고개를 빼는 것도 힘들었다.

덕분에 오드리의 상상력만 무럭무럭 자라났다.

한편, 프리트 공작은 속으로 땅을 치며 후회하는 중이었다.

‘……대체 이게 어딜 봐서 진정한 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란 거지?’

막이 오른 지 이제 1시간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20번의 키스신이 등장했다. 이렇게 저속한 연극인 줄 알았더라면 극장에 발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남자 주인공이 무려 4명이라니! 환장할 노릇이다.

그가 도돌이와 함께 고민하고 싶었던 ‘사랑의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숭고하고, 낭만적이며, 순수하다 못해 순결한…….

“내 입술은 하나이면서 네 개이기도 해요. 당신들의 숨결을 달콤하게 훔치기 위해서죠.”

“록시! 나의 숨결을 빼앗아 줘!”

“이대로 숨이 멎어도 좋아!”

“아, 당신의 삶을 독차지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테야, 내 사랑!”

젠장! 저치들의 입술엔 자석이라도 달려 있단 말인가?

데릭은 벌겋게 익은 얼굴로 또다시 도돌이의 눈을 가려 주었다.

그런데 새까만 시야 너머로 자꾸만 헛것이 보였다. 그와 도돌이가 저 두 사람처럼 뜨겁게 입을 맞추는 모습이었다. 어젯밤 고백한 것처럼 그가 음탕한 탓인지, 저 연극이 문제인 건지 알 수 없었다.

“난 드디어 진정한 사랑을 찾았어요!”

“그게 누구지, 록시? 우리 중 누구냔 말이야?”

“나요. 나 자신. 록시 피팅턴!”

“아니, 어떻게…….”

“결심했어요. 나는 오직 사랑만 존재하는 그곳에서, 평생 사랑만 하고 살기로!”

연극은 막장을 향해 치달았다. 4명의 남자 주인공은 처절하게 울며불며 매달렸다.

“안녕, 풀들아! 안녕, 대지야! 안녕, 끝내 사랑하지 못할 사람들아!”

“록시!”

“사랑, 그것은 나만의 것!”

“안 돼!”

3시간 동안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매던 록시의 여정은 다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도돌이를 철벽 방어하던 프리트 공작도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짝, 짝.

먹먹한 어둠에 잠긴 극장에서 서서히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다 완벽히 불이 들어왔을 땐 우레와 같은 찬사가 쏟아졌다.

“브라보!”

“록시의 용기에 축복을!”

“…….”

데릭은 사나운 눈으로 그 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감히 이딴 연극을 만들고도 박수갈채를 받는단 말인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프레이아 극단이야!”

“자자! 이만 진정들 하시고요. 대망의 초상화 이벤트를 빼먹을 순 없지요!”

“워후!”

마시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무려 남자 주인공 네 분과 초상화를 남길 기회입니다!”

“꺄악! 꺄아아아악!”

“잊지 마세요. 행운의 주인공은 단 한 분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릭은 저도 모르게 풀어 헤쳤던 셔츠를 잠그며 나갈 준비를 하였다. 마시가 탐욕스러운 눈으로 그들 좌석 근처를 바라보는 줄도 모르고.

“저는 마음을 정했습니다. 처음 방문한 극장이라 좌석 번호는 전~혀 모른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네에에에!”

“그렇다면 행운의 주인공을 무대로 모셔 볼까요?”

순식간에 비장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시는 이미 계산을 끝내 놓고도 짐짓 모른 척 연기를 하였다.

“E열의 사십 번! 어디 계십니까?”

“…….”

“E열이 저쪽인가요? 아, 그쪽이군요. 그럼 사십 번분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던 데릭이 멈칫했다.

‘설마.’

좌석 번호가 어쩐지 익숙하게 들린 탓이다. 그는 마시가 직접 건네준 티켓을 찾으려 분주히 옷을 뒤적거렸다.

“뭐 찾으세요?”

“……티켓이.”

“아, 저한테 있어요.”

오드리가 손가방을 펼쳤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의 시선은 도미노처럼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요.”

“…….”

티켓을 확인한 데릭은 그대로 얼어 버렸다.

E열 39번, 40번

“저분이군요! 거기 분홍색 머리의 숙녀분! 축하드립니다!”

“……네에?”

─팡!

때마침 실내용 종이 폭죽이 터지며 극장 전체를 아름답게 물들였다. 사방에선 행운의 주인공을 향한 높은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

그러나 데릭은 저도 모르게 티켓을 우그러뜨리고 말았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종이 쪼가리들이 마치 그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 * *

연극이 끝난 후에도 무대 뒤는 분주했다. 무대 장치를 해체하는 목수들부터 소품을 옮기는 일꾼들, 그리고 신문사와 인터뷰 중인 배우들까지. 오드리는 한쪽 구석에 서서 그 광경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있네.’

뜻밖의 행운에 괜스레 마음이 들뜬 까닭이다.

그러나 옆에 있는 프리트 공작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

혼자 가도 괜찮다는 걸 부득불 우겨 따라오더니. 벽에 기댄 채 분장실 쪽을 쏘아보는 눈빛이 다소 험악했다.

마시는 그런 그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아, 아이고! 공작님께서 왜 이런 누추한 곳에……. 제가 당장 방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러니-.”

“되었다. 얌전히 구경만 하지.”

“…….”

“얼른 서두르지 그러나.”

“흐, 흐흠! 곧 배우들이 나올 겁니다. 숙녀분께선 이쪽으로 가시죠.”

“네.”

“…….”

마시의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세력가에게 잘 보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당첨 조작까지 감행했건만! 어째 프리트 공작은 흡족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여차하면 극단을 쓸어 버릴 것처럼.

‘뭐 섭섭한 거라도 있으셨나?’

등 뒤로 박히는 시선이 뜨겁다 못해 불에 탈 지경이었다.

* * *

마시가 오드리를 데리고 향한 곳은 무대 뒤 한쪽에 마련된 미니 세트장이었다. 당장이라도 포스터 촬영을 해도 될 정도로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났다.

“컨셉은 총 다섯 종류입니다. 원하시는 배우와 단독으로 명장면을 재연하거나, 아니면 모두와 포스터를 재연하는 것 중 고르시면 됩니다.”

“그냥 초상화가 아니라요?”

“일종의 팬서비스 차원이지요.”

“…….”

오드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장면이랄 게 있었나?’

불후의 문제작이란 명성답게, 맥락 없는 키스신만 수도 없이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이 솟았다.

“하지만 저는 연기를 해 본 적이 없는데…… 잘 해낼 수 있을까요?”

“하핫!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모두 노련한 배우들이니 알아서 이끌어 줄 겁니다.”

“아하.”

“그럼 얼른 데리고 오겠습니다.”

“넹.”

오드리는 폭신한 의자에 앉아 발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특별한 경험을 한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좀처럼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누구랑 그려 달라고 하지?’

머릿속으로 연극 내용을 되뇌어 보기도 했다. 명장면도 몇 개 꼽아 보긴 했는데, 맞을지는 모르겠다. 오드리는 잔뜩 들뜬 얼굴로 괜히 머리며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낯선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안녕?”

“……!”

“뭘 그렇게 놀라. 이름이 뭐야?”

“오드리.”

“이름 예쁘네.”

“…….”

남자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다짜고짜 반말을 던지더니, 바로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기까지 하는 폼이 자연스러웠다. 하마터면 두 사람이 원래 알던 사이였나 착각할 정도였다.

“난 지미야. 무대 위에선 루이.”

“맞다. 그,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던!”

“뭐?”

지미가 불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엄청 열심히 봤나 보네.”

“……!”

“키스신도 내가 제일 죽여줬지?”

그의 어깨가 오드리의 어깨를 장난스레 툭 건드렸다.

하지만 오드리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못 봤는데…….’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해야 할까? 네가 최고였다고?

그런데 골똘히 생각하는 오드리를 보고 대체 무슨 오해를 했는지, 그가 또다시 웃었다.

“귀엽긴.”

아무래도 반말은 컨셉인가 보다.

그런데 뒤늦게 도착한 마시는 사색이 되어 그런 지미를 타박했다.

“너 이 녀석! 감히 반말을……!”

“아! 왜 때려요?”

“이분이 어떤 분이신 줄 알고!”

“당연히 알죠. 오드리잖아요.”

“너……! 이분은 프리트 공작님의 손님이시란 말이다! 예의를 갖춰야지!”

“……뭐야.”

지미의 얼떨떨한 시선이 오드리를 향했다.

“귀족이었어?”

“응.”

“근데 왜 평민 옷을 입고 있어? 사람 헷갈리게.”

“입고 싶어서 입은 건 아니야.”

“…….”

거짓말은 아니었다.

마시는 본인이 더 쩔쩔매며 용서를 구했다.

“아이고,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지미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아요.”

“참으로 자비로우십니다. 아, 내 정신 좀 봐! 여기 배우들을 데려왔습니다. 인사 나누시지요.”

나머지 3명의 남자 배우가 오드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시는 오드리에게 한 명을 고르라 했지만, 그건 굉장히 잔인한 일이었다.

‘괜히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게다가 오드리의 눈엔 다들 비슷해 보였다. 저 사이에 클로드가 끼어 있었다면 단번에 고를 수 있었을 텐데…….

‘응?’

그런데 그때, 한쪽에서 요란한 손놀림이 느껴졌다. 보란 듯이 관심을 끄는 지미였다.

‘나.’

‘……?’

‘나를 골라.’

그가 본인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씨익 웃는 얼굴이 아까와 같이 장난스러웠다.

귀족이라고 놀랄 땐 언제고. 사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아예 어색한 사람보단 낫겠지?’

오드리는 그의 뻔뻔함을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그럼 지미로 할게요.”

“역시. 보는 눈이 있다니까?”

“지미!”

“빡빡하게 좀 굴지 마세요. 이벤트잖아요, 이벤트.”

“너……!”

“가자. 저쪽에 서면 돼.”

지미는 능숙하게 오드리를 이젤 앞으로 이끌었다.

선택받지 못한 배우들이 분장실로 돌아간 뒤, 남은 것은 5명이었다. 이젤 앞에 선 두 사람과, 화가, 마시,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프리트 공작. 마시는 데릭에게 딱 붙어 아부를 떠느라 바빴다.

“뭐 마실 거라도 한 잔 드릴까요?”

“됐다.”

“어휴, 누가 여기에 이런 의자를……. 제 사무실로 가면 푹신~한 소파가 있는데, 초상화 그리는 동안만이라도 잠시-.”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아, 초상화는 또 구경하는 재미가 있지요. 하하!”

“…….”

그러는 사이, 오드리와 지미는 포즈를 잡을 준비를 했다.

“너 별로 안 무겁지?”

“그런 걸 왜 물어?”

“왜 묻긴.”

지미가 예고도 없이 오드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마치 나무라도 뽑는 것처럼 공중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

“이러려고 물었지.”

“뭐, 뭐, 뭐 하는 거야……!”

깜짝 놀란 오드리는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잠시 한쪽 팔을 푼 지미가 그녀의 팔을 자신의 목에 둘러 주었다.

“팔은 어깨가 아니라 목에.”

“……!”

“생각보다 잘하는데?”

오드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게 연극의 한 장면이었다는 걸. 설마 초상화로 그려 준다던 명장면이 이런 것일 줄이야.

‘다른 것도 많은데 굳이……!’

발밑이 휑한 것이 영 불안했다. 오드리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만 다리를 바르작거렸다. 그럴수록 지미는 웃음을 잃어 갔다.

“자꾸 그렇게 움직이면 후회할 텐데.”

“부, 불안하단 말이야.”

“얌전히 있어, 착하지.”

“그냥 밑에 발판 하나 놓으면 안 돼?”

“응. 안 돼.”

“왜?”

“그럼 안 설레잖아.”

지미가 여상히 대꾸했다. 과연 팬서비스에 능숙한 배우다웠다.

오드리는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너무 빠르게 수긍하는 거 아니야?”

“왜? 틀린 말도 아닌데.”

“……그러게. 그렇네.”

지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무심결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사악한 어둠의 기운과 맞닥뜨렸다.

“와.”

바로 맞은편에 앉아 스산하게 두 사람을 노려보는 프리트 공작이었다. 데릭은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떼어 놓고 싶어 안달이 났다.

‘감히…….’

깻잎 한 장 들어갈 틈이 없도록 밀착한 상반신이 눈에 거슬린 탓이다. 당장 저 불결한 몸뚱이를 도돌이로부터 멀리 치워 버리고 싶었다.

‘연극 따위 보지 말았어야 했다.’

프리트 공작의 후회는 끝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폭죽이 터지던 순간부터 당장 도돌이의 손을 붙잡고 나가고 싶었다. 다른 남자와 함께 초상화라니? 아직 그와도 제대로 된 초상화 한 장이 없는데!

하지만 막상 들떠 있는 도돌이를 보자 하려던 말이 쑥 들어가고 말았다. 꿈에서처럼 환히 웃는 모습이 지나치게 예쁜 탓이었다.

데릭은 ‘도돌이가 좋다면 나도 좋다’는 생각으로 한발 물러났다. 저런 식의 이벤트인 줄 알았더라면 맹세코 무슨 일이 있어도 도돌이를 빼냈을 것이다.

프리트 공작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눈치채고도 지미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저 남자 말이야.”

“누구?”

“저기 앉아서 눈으로 쌍욕 하는 사람.”

“……응.”

“애인이야?”

오히려 보란 듯이 오드리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무슨! 아니야! 아니거든?”

“그래?”

“그런 끔찍한 소리를……!”

화들짝 놀라 부정하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나 궁금해 죽겠지?’

아니나 다를까. 프리트 공작의 눈동자엔 살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벌써 놀라면 안 되실 텐데.’

지미는 목숨이 두 개인 사람처럼 아찔한 스릴을 즐겼다.

─꽈악.

“앗!”

오드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어, 꼼짝도 못 하게 끌어당긴 것이다. 마치 비단구렁이처럼.

“수, 숨 막히는데……!”

“너 떨어질 것 같아서. 다치면 안 되잖아.”

아니나 다를까. 프리트 공작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만.”

“예?”

“이런 팬서비스 따윈 필요 없다.”

당장 이젤 앞으로 들이닥친 데릭이 깽판을 부렸다. 특히 지미를 노려보는 눈동자가 유난히도 매서웠다.

어쩔 줄을 모르고 눈치만 보는 오드리와 달리, 지미는 여전히 팔을 풀지 않았다.

“그 팔, 풀지.”

“저는 제 의무를 이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잘라 버리기 전에.”

“아이고, 공작님!”

뒤늦게 마시까지 끼어들면서 분위기는 난장판이 되었다.

“대체 왜 이러십니까? 예?”

“비켜라.”

“저희에겐 이런 이벤트가 유일한 홍보 수단입니다! 그런데 이대로 가 버리겠다고 하시면…….”

“자네는 극단주인가, 아님 포주인가?”

“예? 그게 무슨-.”

“명장면을 초상화로 그려 준다더니, 아주 저속하기 짝이 없어.”

“……!”

마시는 프리트 공작이 분노한 이유를 깨달았다. 평소처럼 한다는 것이 그만, 그의 분노를 살 거란 생각을 미처 못 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좋아했는데.’

암. 평민과 귀족의 시각은 다를 법도 하지.

“그렇다면! 다른 장면으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

“최대한 접촉이 적은 것으로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던 마시는 입안의 혀처럼 굴며 프리트 공작을 설득했다.

그리고 한참 뒤.

“……어쩔 수 없군.”

들뜬 도돌이의 눈빛이 떠오른 데릭은 또다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흐응.’

지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 * *

프리트 공작의 삼엄한 감시 속, 오드리와 지미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사이가 여전히 가까웠으나, 아까에 비하면 건전하기 그지없었다. 맞붙는 것이라곤 오드리의 치맛자락뿐이었기 때문이다.

“아쉽네. 다른 포즈도 많이 준비했는데.”

“…….”

“다음엔 꼭 너 혼자 와. 알았지?”

프리트 공작에겐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이는 말이 은밀했다. 이것도 팬서비스의 일종이리라.

하지만 오드리의 얼굴은 발그레해지기는커녕, 되려 어두워졌다. 또 오라는 말이 악담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만약 오드리가 펠리오스에 다시 온다면, 그땐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일 테니까.

그러나 지미는 시무룩해진 오드리를 잠시도 가만히 두질 않았다.

─스륵.

“……!”

“이제야 보네.”

치맛자락 뒤로 은근슬쩍 손가락을 얽어 온 것이다. 프리트 공작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덥석 손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이 조심스레 새끼손가락만 얽어 오는 모습이 의외였다. 오드리는 눈치도 없이 되물었다.

“그런데 원래 이런 장면이었던가?”

“쉿. 그게 뭐가 중요해.”

“…….”

“왜, 설렜어?”

지미의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졌다. 양봉업자가 봤다면 헐레벌떡 달려와 벌통을 들이밀 정도로 아주 짙은 시선이었다.

그러나 오드리는 솔직했다.

“그러진 않았는데…….”

“안 설렜다고?”

“으응.”

“도대체 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당연하지!”

“…….”

지미는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여자만 보면 괜히 한번 놀리고 싶은 나쁜 버릇에 불이 붙었지 뭔가. 지미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입을 맞출 듯 고개를 모로 꺾었다.

“내가 이대로 키스하면?”

“뭐, 뭐 하는……!”

“응? 그래도 안 설레?”

싱글대는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 장면은 프리트 공작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으니.

‘이런 음흉한 놈을 봤나!’

─팟!

눈 깜짝할 새에 끼어든 프리트 공작이 도돌이에게서 지미를 거칠게 밀쳐 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엔 상대를 향한 적개심이 가득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명장면을 재연하고 있었죠.”

“멋대로 희롱해도 된다고 한 적은 없었을 텐데.”

데릭은 은근슬쩍 도돌이를 제 뒤로 감췄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마시도 다급히 중재에 나섰다.

“공작님! 작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일단 멱살 좀…….”

“아야.”

“으이구, 이 녀석아! 얼른 공작님께 사과드리지 못해?”

“왜요? 오늘은 입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그럼 평소에는 진짜로 입을 맞췄다는 건가?

데릭의 얼굴이 싸해졌다.

“공작님, 제발 극단의 입장도 생각해 주십시오! 이 초상화가 없으면-.”

“……그놈의 초상화, 아주 지긋지긋하군.”

대체 이따위 연극을 왜 봤는지 또다시 후회가 밀려들었다. 매진이라고 했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어야 했는데…….

데릭은 깜짝 놀란 듯한 도돌이 한 번, 뺀질뺀질한 지미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저 둘을 붙여 놓을 순 없었다. 욕망이 그득한 저 놈팡이가 도돌이에게 어떤 더러운 짓거리를 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필요하다면야.”

“…….”

“차라리, 내가 하겠다.”

“……!”

프리트 공작은 초상화 모델을 대신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 초상화가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꿈에도 모르고.

* * *

한스는 하루 종일 통신구만 붙들고 살았다. 끝인사도 없이 연락을 끊은 소꿉친구가 언제 다시 연락해 올지 모르는 까닭이다.

‘벌써 하루나 지났다. 이 야속한 도토리야.’

식사할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심지어는 목욕을 할 때도 늘 함께였다. 혹시라도 연락을 놓칠까 싶어서.

그러다 문득 걱정이 들었다.

‘……설마, 기분이 상했나?’

어젠 저도 모르게 툴툴거림만 잔뜩 늘어놓지 않았던가.

사실은 묻고 싶은 게 더 많았는데. 숙소는 괜찮은지, 잠은 잘 자는지, 음식은 입에 맞는지, 힘들진 않은지. 궁금한 것들투성이였다.

‘하긴. 오두막집에서도 잘 자던 도토리였지.’

소소하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도 미리 생각해 놓았다.

로버트가 드디어 4:4 미팅에 나간다는 것. 프리트 공작이 없는 공작성은 한결 평화롭다는 것. 모두의 삶의 질이 수직 상승하고 있다는 것.

반면에, 말할까 말까 고민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한스? 여기서 뭐 해?”

“…….”

마침 계단을 내려오던 클로드가 동생에게 아는 척을 해 왔다. 현관 계단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는 모양새가 의아한 눈치였다. 그러나 한스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성의 없이 대꾸했다.

“보면 몰라? 바람 쐬잖아.”

“이 저녁에? 그나저나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는 거야? 통신구 닳겠다.”

“…….”

진짜 몰라서 묻는 건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괜히 불퉁해진 한스가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오늘은 누구 만나러 가는데?”

“프링턴 자작 영애.”

“진짜 결혼이라도 하려는 거야?”

“해야지? 언젠간.”

“…….”

한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본인의 형이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그냥. 형 속내를 도통 모르겠어.”

가볍게 웃은 클로드가 다시 한번 옷차림을 점검했다.

“오늘 늦을지도 몰라.”

“그래놓고 또 일찍 들어올 거면서.”

“어머니껜 말하지 마. 알지?”

“다행인 줄 알아. 내가 그 정도로 형한테 관심이 있진 않거든.”

“하여간. 쑥스러움만 많아서는.”

“뭐? 이게 대체 어딜 봐서!”

“형은 이만 나갔다 올게. 일찍 자.”

“…….”

한스는 멀어지는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걸 도토리에게 말해야 할까? 형이 요즘 결혼 상대를 찾아다닌다고? 매일매일 다른 여자와 식사 약속이 있다고?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여태껏 애인 하나 안 만들고 평생을 혼자 살 것처럼 굴더니. 이제야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를 도통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보다도 도토리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서 그게 걱정이었다.

‘……참나, 내가 누구 걱정을 하는 거야?’

한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정작 그를 걱정해 주는 사람은 없는데, 그 혼자서만 나서서 남 걱정을 해 주는 꼴 아닌가?

그러나 사람 마음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톡, 톡, 톡.

“도토리.”

어쨌거나 결국은 아쉬운 쪽이 지는 법이었다.

* * *

‘토악질이 나오려 하는군.’

극장을 나오는 데릭의 안색이 유난히도 안 좋았다. 오드리와 루카스는 그의 눈치를 보며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특히, 무대 뒤에서의 일을 모르는 루카스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람?’

그가 아는 사실은 행운의 주인공이 케벨슨 영애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런데 어째 행운을 누리고 온 케벨슨 영애도, 부득불 우겨 따라나섰던 주군도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보안관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나?”

“예.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다.”

“이러다 하루를 더 머물게 생겼군.”

“일단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은 상태입니다. 그나저나, 식사 먼저 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래야지.”

세 사람은 근처 식당에서 가볍게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막 분수대를 지날 무렵, 광장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웅성거림은 금세 산불처럼 번져 광장 전체로 퍼져 나갔다.

“세상에, 그 집 아들이래요?”

“응. 어린 것이 참 안타깝게 됐지.”

“어휴, 나는 가슴 아파서 못 보겠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몰라.”

“…….”

식당으로 향하던 세 사람도 자연히 발걸음을 멈췄다. 여러 사람의 입을 타고 흘러온 이야기가 심상치 않은 탓이었다.

데릭의 얼굴이 굳었다.

“루카스.”

“금방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보좌관은 눈치껏 이야기의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아 다른 이들의 잡담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실종됐던 애 아니야?”

“맞아요. 사흘 만엔가 찾았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애 엄마는 소식 들었으려나 몰라.”

“이제 막 전하러 갔다나 봐요.”

“아휴, 짠해라. 애 엄마도 걱정이네.”

“그러게요. 제정신으로 살 수는 있을지…….”

“…….”

아무래도 보안관이 말한 아동 실종 사건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실종 말고도 뭔가가 더 있는 건가.’

데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광장 이곳저곳을 살폈다.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화가와 호위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던 중, 인파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장면 하나가 눈에 띄었다.

“……!”

커다란 들것 위로 볼록 튀어나온 자그마한 흰색 천.

“……각하.”

마침 복귀한 루카스가 숙연한 얼굴로 보고했다.

“시신을 운구하는 중입니다. 들것의 절반도 안 되는 아이고, 빈민가에서 나고 자랐다고 합니다.”

“…….”

“삐쩍 말라 죽어 있는 것을 지나가던 상인이 발견했고요.”

“…….”

“신고를 받은 행정관이 수습하여 아이의 집으로 운구하는 중이라 합니다.”

데릭은 할 말을 잃었다.

들것의 절반도 안 된다면, 그의 허리에도 못 미치는 키다. 그런데 심지어는 삐쩍 말라 있었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이의 엄마도 연락을 받고 급히 오는 중이랍니다.”

“…….”

“외람되오나, 아이의 집에 방문하여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영 꺼림칙합니다.”

루카스도 은연중에 아동 실종 사건과의 연관성을 느낀 것 같았다. 그러나 데릭은 도돌이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어찌한다.’

애초에 도돌이는 아동 실종 사건에 대해 몰랐지 않나. 분명 조사 과정에서 다소 잔인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비위가 약하다던 도돌이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도돌이가 서운함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히 말했다.

“……아무래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는 편이 나을 듯한데.”

“…….”

“그대는 굳이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호위를 붙여 줄 테니, 먼저 숙소에 가 있어도 좋아.”

하지만 도돌이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혹시……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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