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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수신 오류 (7/25)

제5장. 수신 오류

토요일의 늦은 아침.

에밀튼 백작가의 마차가 수도 근교 컨트리 하우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3개월에 한 번씩 개최되는 사교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꾸벅.

“…….”

한스는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바로 앞에서 흔들리는 분홍색 머리통에 온 신경이 쏠린 까닭이다.

‘……참 태평해서 좋겠다.’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마차 안. 오드리는 맞은편에 앉아 병든 닭처럼 졸고 있었다.

불규칙적인 고갯짓을 따라 솜털 같은 머리카락이 스르륵 춤을 췄다. 올올이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마치 꿀타래처럼 보드라워, 애꿎은 한스의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저러다 목이 부러져 봐야 정신을 차리지?’

괜히 불퉁한 생각을 해 봐도 별 소용은 없었다. 오드리가 앞으로 고꾸라질라치면 자기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했기 때문이다.

─덜컹.

마차가 다시 한번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오드리를 향해 몸을 기울이던 한스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툭.

“……!”

눈앞에 아른거리던 머리통이 그의 왼쪽 심장께를 향해 날아든 탓이다. 갈 길을 잃은 양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허공에 멈춰 있었다.

어깨에 와 닿은 동그란 이마. 가슴팍으로 쏟아지는 포근한 숨결.

일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야, 야.”

한스는 잔뜩 당황하여 고개를 모로 꺾었다. 길게 뻗은 목선을 물들인 열기가 훤히 드러난 턱선 바로 밑까지 차올랐다. 목덜미에서도 쿵쿵 맥박이 치는 기분이었다.

“이, 일어나 봐.”

“…….”

누가 보면 오해할지도 모른다.마치 오드리가 한스의 품에 폭 안겨 있는 모양새 아닌가.

“이게 지, 진짜…….”

푸른 눈동자는 고집스럽게 마차 천장만 바라보았다.

이대로 매몰차게 몸을 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분홍색 머리통이 허벅지를 향해 떨어질 테고, 더 곤란한 상황을 마주하게 될 테니까.

“이, 일어나 보라니까?”

하지만 잠자코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었다. 평소엔 잠잠하던 심장 박동마저 아주 작정한 듯이 야단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제발 좀 멈춰라!’

한스는 괜한 오해를 살까 두려워 가슴께를 열심히 움찔거렸다.

“으음.”

“…….”

그러나 깊은 잠에 빠진 오드리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모든 고뇌와 당혹스러움은 한스의 몫이었다.

‘……이 둔한 계집애.’

무방비한 얼굴을 좀 보라지. 남의 가문 마차에서 이렇게나 편하게 잠들 일인가? 그것도, 서로의 무릎이 맞닿는 거리에서?

“하아…….”

한스는 고개를 뒤로 꺾은 채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마음을 가라앉힌 뒤, 조심히 몸을 앞으로 기울여 오드리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뒤통수가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직접 손을 대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도롱도롱 잠든 얼굴이 괜스레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게 남의 속도 모르고.’

─끼이익.

한스가 거친 손길로 마차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답답한 속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신경은 시야 밖의 오드리를 향해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 * *

도스턴 백작가의 컨트리 하우스는 자작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거진 숲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다 보면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글로리 하우스’라 불리는 3층짜리 석조 저택이 우뚝 서 있었다.

레아 도스턴은 반가운 얼굴로 손님을 맞이했다.

“오드리, 오랜만이에요!”

“레아!”

“어머? 에밀튼 영식도 함께 오셨군요.”

“……오랜만입니다. 형님은 오늘 일 때문에 참석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군요. 신사분들은 카드룸에 모여 있답니다. 오드리는 저와 함께 살롱으로 가요!”

“네.”

백작가의 미혼 남녀로 구성된 사교클럽은 한 번 모일 때마다 저녁까지 시간을 보냈다. 엄격히 성별을 구분한 탓에 남녀가 함께하는 건 저녁 만찬뿐이었다.

그러나 만찬 전까지 서로의 공간에서 오간 이야기들은 절대 발설할 수 없었다. 비밀 엄수 규칙 때문이었다. 그 룰을 어기는 것은 사회적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오드리, 오늘 모임은 굉장히 재미있을 거예요.”

“네? 왜요?”

“제가 아주 특별한 음료를 준비했거든요!”

레아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속닥였다.

“글쎄, 바다 건너에서는 홍차에 위스키를 넣어 마신다지 뭐예요?”

“네? 낮, 낮술을 한다는…….”

“쉿! 뭐 어때요? 저기 신사분들도 하는걸.”

“…….”

“우리도 여자들만의 시간을 즐겨 보자구요!”

오드리는 불안한 얼굴로 2층 살롱 문을 열었다. 그러자 진한 홍차 향과 함께 강렬한 위스키 냄새가 훅 끼쳐 들었다.

“여러분, 오드리가 왔어요!”

“오드리!”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얼른 이쪽으로 앉아요!”

다들 들뜬 것 같다면 착각일까?

오드리는 위스키 향에 취하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모임에 참석한 진짜 목적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너, 주말에 사교클럽 모임이 있다고 했지? 이건 기회야!’

‘기회?’

‘온갖 치정 사건을 섭렵하는 데 사교모임만큼 좋은 것도 없거든.’

‘왜 그런 걸-.’

‘뻥 차이고 싶다며?’

‘……으응. 그랬지.’

‘그럼 가서 한 수 배워 와.’

‘……?’

‘감히 네 머리로는 상상조차 못 할 막장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오드리는 샬롯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배워서, 그걸 또 어디에 쓰란 말인가? 게다가 치정 로맨스는 평소 오드리의 관심 분야도 아니었다.

가 보면 안다며 의미심장하게 웃던 친구의 얼굴이 새삼 원망스러워졌다.

“오드리, 이것 좀 마셔 봐요. 몽베르 위스키를 넣은 홍차에요.”

“아! 감사합-.”

“그놈의 몽베르!”

“……!”

─움찔.

단풍잎 같은 손이 잘게 떨렸다. 별안간 벼락같은 분노가 내려꽂힌 까닭이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세이라가 험악한 얼굴로 단숨에 위스키 잔을 비워 냈다.

“몽베르 출신 남자들은 결혼과 동시에 어딘가 낙인이라도 찍어야 해요. 안 그런가요?”

“……세이라, 오드리가 그런 이야기 불편해하는 거 잘 알잖아요. 우리 나중에 해요.”

“앗,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오드리는 입에 대지도 않은 찻잔을 냉큼 내려놓았다. 그리곤 바짝 정신을 차렸다.

‘세이라가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처음 봐.’

혹시…… 이게 말로만 듣던 ‘막장’의 서막인 걸까? 평소와 다르게 잔뜩 빈정거리는 세이라에게 자꾸만 눈이 갔다.

“몽베르 위스키보다 더 유명한 게 그쪽 남자들 바람기라는 거, 어차피 모르는 사람도 없을걸요?”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긴 하죠.”

“가엾은 셸비어 영애! 벌써 몇 달째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대요.”

“네에?”

“그 ‘잘난’ 몽베르 남자 때문에요!”

─쾅!

유리잔을 내려놓는 손길이 거칠었다. 오드리는 파드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셸비어 자작 영애라면 그녀도 건너건너 아는 얼굴이었다.

‘그때 분명 결혼한다지 않았나?’

작년 겨울.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식은 교제한 지 얼마 안 된 남자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때까지 소식이 없더라니……. 혹시, 그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하! 결혼하자고 그렇게 쫓아다니더니, 부인으로도 모자라 애가 넷이나 있었다지 뭐예요?”

“……!”

“세상에!”

“그런 놈이랑은 당장 헤어져야죠!”

“심지어 여자도 몇 명이나 더 있었대요. 요일마다 갈아치웠던 거죠! 정말, 그 더러운 피는 어디 안 간다니까요?”

세이라가 위스키를 한 잔 더 들이켰다. 비슷한 경험을 선사했던 몽베르 출신의 옛 애인이라도 떠오른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 분노한 여자들이 소파 근처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런 찢어 죽일 놈 같으니! 어머, 죄송해요. 제가 너무 상스러웠죠? 방금 한 말은 잊어 주세요.”

“상스럽긴요. 그런 머저리 같은 놈에게 예의가 웬 말이에요?”

“심지어 처음치곤 아주 훌륭하셨는걸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는 비속어는 하나도 없지만, 본인이 아는 가장 심한 말을 하나씩 내던지는 기세가 맹렬했다.

그러나 셸비어 자작 영애를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모두가 같았다.

“이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요. 셸비어 영애가 그 남자를 참 많이 좋아했는데……. 가엾기도 하지.”

“에휴. 그래도 뭘 어쩌겠어요? 안타깝지만 셸비어 영애가 포기하는 수밖에요.”

“포기라니요? 엄연히 셸비어 영애 측에서 먼저 이별을 고한 거지요.”

“맞아요. 차인 건 그 남자인걸요.”

“……!”

오드리는 그제야 샬롯의 큰 뜻을 이해했다.

‘차이는 방법을 배워 오라는 거였어!’

그래. 누군가에게 차이려면 이 정도의 충격요법이 필요한 게 틀림없다.

애가 넷이라거나. 혹은 요일마다 정해진 애인이 있다거나.

이렇게까지 하는데 정이 안 떨어지고 배기겠는가?

‘그래, 이거야!’

혼자서라면 분명 상상조차 못 했을 신박한 방법이었다. 오드리의 얼굴이 한껏 진지해졌다.

‘그런데 애가 있다고 하면 안 믿겠지?’

작위적인 거짓말은 결국 들통나기 마련. 둘 중 그나마 자연스러운 것은 난봉꾼 흉내였다.

오드리는 그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아아, 제 일곱 번째 애인이 되고 싶으시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어요.’

‘일곱 번째?’

‘원래 애인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잖아요.’

‘……애인이, 많다?’

‘흥, 흥, 흥. 가만 보자. 어쩌죠? 남는 시간이 일요일밖에 없네요.’

‘나는 그대를 매일 보고 싶다.’

‘네에? 그럼 찰리, 막심, 델프, 루이, 윌, 안드레스는 언제 만나요?’

‘……하.’

‘저도 양보할 수 없네요. 전부 매력적인 사내들이라.’

‘간단하군.’

상상 속 프리트 공작이 곧장 검을 빼 들고 다가왔다.

‘찰리? 막심? 그렇게 만나고 싶다면 얼굴은 보게 해 주겠다.’

‘……!’

‘매일 그들의 목을 베어 선물하지.’

안 돼!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프리트 공작의 정이 떨어지기도 전에 애꿎은 남자들 목이 먼저 나가떨어질 판이다.

‘정이 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오드리는 배움을 청하듯 다시 살롱으로 관심을 돌렸다.

홍차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느새 위스키가 자리를 잡았다. 옹기종기 모여앉은 테이블에선 남자 이야기와 신랄한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차라리 헤어지자고 했으면 그 정도로 화가 나진 않았을 거예요.”

“세상에! 애인에게 물건을 파는 사람이 어딨어요? 정말 치졸하네요.”

“말도 마세요.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연락 두절인 놈도 있는걸요.”

“아무렴 돈 밝히는 남자보단 낫죠. 그놈의 돈, 돈……. 사업한다며 매일 같이 빌려 달라는데, 어찌나 이골이 나던지!”

셸비어 자작 영애의 이야기가 도화선이 된 듯했다.

유일하게 이야깃거리가 없던 오드리는 장식품처럼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루하진 않았다.

‘오호. 저런 방법도 있단 말이지?’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황당한 이야기들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어쩜 하나 같이 정이 똑 떨어지는 사연들인지…….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노트에 받아 적고 싶었다.

“오드리도 한 잔!”

“앗, 네.”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었다. 배운 게 많아 신이 난 오드리는 어느새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프리트 공쟉! 아쥬 정이 똑 떨어지게 해 주게써!’

찻잔을 무려 두 잔이나 비운 뒤의 일이었다.

* * *

오드리는 반쯤 눈을 감은 채로 옷을 갈아입었다. 힘이 하나도 없는 몸뚱이가 시녀의 손길을 따라 맥없이 흔들렸다. 정말 지독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아가씨, 오늘 저녁엔 에밀튼 가문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오늘이었나…….”

“자! 다 되었어요.”

“으응…….”

“앗, 아가씨! 잠시만요!”

막 단장을 마친 제나가 다시금 오드리에게 다가왔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폼이 유난히도 부산스러웠다.

‘왜 저러지?’

어리둥절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찰나, 제나가 꺼내 든 건 나비 모양의 머리핀이었다.

“머리에 꽂아 드릴게요.”

“…….”

“헤헤.”

시원하게 땋아 올린 머리칼 위로 앙증맞은 크림색 머리핀들이 얹어졌다. 마치 연분홍색 꽃 위로 나비 떼가 모여앉은 듯한 형상이었다.

“그거 아세요? 흰 나비 모양 머리 장식을 하면 연애 운이 들어온대요.”

“으응? 누가 그래?”

“점성술사랬나, 예언가랬나? 아무튼. 유명한 사람이 알려 준 거래요.”

“…….”

“이제 아가씨 주위로 남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 거예요! 제 친구가 직접 효과를 보고 알려 준 거거든요.”

묘하게 익숙한 패턴. 어째 고백 성사율이 99.99999%에 달한다던 고백 데이가 절로 떠올랐다.

‘……수상해.’

당연히 오드리의 얼굴엔 불신이 팽배했다. 말도 안 되는 기사 하나를 믿은 이유로 얼마나 큰 곤욕을 치렀던가?

이를 알 리 없는 제나는 들뜬 얼굴로 조잘거렸다.

“아가씨께서도 머지않아 결혼하실 텐데, 좋은 분을 고르셔야죠!”

“…….”

“일단 여러 명이 몰리면 그중 한 명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확률적으로요.”

“……!”

여러 명이 몰려? 그럼 프리트 공작 같은 남자가 여럿이 된다는 걸까?

‘무,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오드리는 잠이 확 깬 얼굴로 시녀를 종용했다.

“제, 제나! 이거 빼 줘, 얼른!”

“네? 무슨-.”

“그럼 안 된단 말이야!”

아무리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지만 마음이 선득해졌다. 한 사람의 정을 똑 떼는 것도 이렇게나 곤혹스러운데……. 더 이상의 방해꾼은 사절이다.

“아차차! 죄, 죄송해요. 금방 빼 드릴게요!”

제나 역시 뒤늦게 클로드를 떠올린 모양이다. 민첩한 손길을 따라 분홍 머리칼 위에서 노닐던 나비 떼가 자취를 감추었다. 오드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모로 정신없는 한 주의 시작이었다.

* * *

‘지금. 지금이다.’

─서걱.

데릭은 월요일 새벽부터 칼부림 중이었다.

정확한 각도를 따라 시퍼런 칼날이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완벽하게 잘린 신문 조각이 못내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당겨 웃자, 악당 같은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아주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관절 도돌이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제국신문 설문 조사》

Q. 평생 내 편이었으면 하는 남자는?

1위. 데릭 프리트

데릭은 막 스크랩한 기사 조각을 내려놓으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도돌이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참 좋으련만.’

도돌이를 사랑한 뒤로 그는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든 적이 없었다. 남들은 다 좋기만 하다는 사랑이 그에겐 조금 벅차고 힘들었다. 마력석 하나에 잠을 못 잘 만큼 설레다가도, 꽃에 담긴 메시지 하나에 심장이 뚝 떨어져 내렸다.

‘원래 사랑이란 이리도 어려운 것인가?’

도돌이는 가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엔 마음이 풀린 듯하다가, 또 다음 날엔 그의 마음을 산산조각내 버린다. 시소를 타듯 데릭의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모양새가 참으로 당돌했다.

“하아…….”

프리트 공작은 심란한 얼굴로 책상 위의 화병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의 아네모네에 화답하듯 가득 담긴 천일홍이 유난히도 탐스러웠다.

‘그래. 이 꽃을 본다면 알게 되겠지. 나에겐 오로지 도돌이뿐이라는 사실을.’

데릭은 도돌이가 그의 진심을 알아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꽃말을 빌려 은근하게나마 마음을 전하는 것이 두 사람만의 비밀 신호 아니던가.

천일홍은 그가 고심 끝에 고른 꽃이었다.

천일홍의 꽃말 : 변치 않은 사랑.

이것이야말로 그가 도돌이에게 진정으로 전하고 싶었던 말이다. 아무리 도돌이가 야속하게 등을 돌린다 해도, 데릭은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거라는 말.

물론 도돌이를 홀랑 낚아채 간 사내까지 지켜 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똑똑.

“각하, 루카스입니다. 급히 확인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디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벌컥.

루카스는 프리트 공작이 대답하기도 전에 들이닥쳤다.

막 신문 조각을 벽에 붙이려던 데릭이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무슨 일이지?”

“펠리오스의 보안관이 전서구를 보내왔습니다.”

“…….”

이 새벽부터?

데릭은 곧바로 종이를 받아 들었다.

펠리오스의 베르나르입니다.

최근 들어 지역 내 실종 사건이 끊이질 않습니다. 대부분은 실종일로부터 약 3일 이내에 귀가하지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일단 자료가 정리되는 대로 종합하여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펠리오스를 살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며,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내용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실종 사건이라.”

“이건 최근 일 년간 펠리오스에서 보내온 보고서입니다. 간간이 실종 사건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하지만, 발생 빈도가 잦지는 않았습니다.”

“최근엔 어떻지?”

“지난주만 해도 벌써 열 명입니다.”

데릭은 1년 치 보고서를 빠르게 훑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머나먼 불모의 땅, 펠리오스는 황제가 직접 하사한 땅이었다. 반세기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비록 수입보다 유지비가 더 많이 드는 험지였지만, 데릭은 대리인까지 파견하며 펠리오스를 살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구대륙과 바로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사건과의 연관성은?”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삼 일을 넘기지 않고 멀쩡하게 돌아온다는 점이나, 아동이 대상이라는 것 또한 유사합니다.”

“……삼 일.”

프리트 공작이 생각에 잠겼다.

펠리오스는 척박한 암석 지대라 거주민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보안관까지 주시할 정도로 실종 사건이 잦다는 건 결코 좌시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보통의 실종 사건과 다르게, 특정 시간이 지나면 실종 아동이 멀쩡히 돌아온다는 점도 수상했다.

‘삼 일이라면 꽤 긴 시간이지.’

3일. 이동 포털만 있다면 가지 못할 곳이 없고, 심지어는 배를 타고 구대륙을 다녀와도 하루가 남는 시간.

그렇다는 건, 곧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에게 앙심을 품은 자라면 얼마든지. 지금으로선 용의자를 특정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였다.

“일단 보안관의 추후 보고를 기다려보도록 하지.”

“예. 연락이 오면 신속히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만 나가 봐라.”

할 일을 마친 루카스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데릭은 아주 심각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타이밍이 좋지 않군.’

작위를 세습한 이래로 프리트 공작의 삶이 항상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이보다 더한 사건 사고도 많았다.

그런데 유독 이번만큼은 본인의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도돌이에게 온 정성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국이건만…….’

마땅히 견뎌야 할 무게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마치 물을 잔뜩 머금은 짐처럼 버겁게 느껴진 까닭이다.

밤마다 살수가 찾아드는 게 당연한 삶. 예고도 없이 다가오는 위협들이 익숙한 삶.

만약 지금처럼 산다면, 그가 도돌이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 깜찍한 얼굴을 볼 새도 없겠지.’

그뿐만이 아니다. 그 모든 위험이 자칫 도돌이를 향하기라도 한다면?

예전의 그가 그랬듯, 그때도 태연하게 넘길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그가 도돌이와 함께하고 싶은 삶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잔뜩 겁먹은 연두색 눈동자를 상상하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나의 도돌이가……!’

이래선 안 된다. 원래도 자비나 관용 따윈 없었지만, 도돌이를 위해서라도 더욱 잔인해질 필요가 있어 보였다. 어떤 후환도 남지 않도록.

‘아예 싹을 잘라 버리면 된다.’

그러니 어디 한번 해 보라지.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무조건 결단을 내 버릴 테니. 감히 도돌이와의 시간을 방해하거나, 도돌이의 솜털 하나라도 스쳤다간 평생 생지옥에서 울부짖게 될 것이다.

데릭은 벽에 붙이다 만 신문 조각을 마저 붙이며 투지를 불태웠다.

* * *

묵직한 여행 가방에 꽂힌 시선이 따가웠다. 그러나 오드리는 전혀 개의치 않고 가방을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쿵.

움찔. 생각보다 큰 소음에 놀란 오드리가 파드득 몸을 떨었다.

“…….”

조금 전의 패기는 어디로 갔는지, 프리트 공작의 눈치만 살피는 눈동자가 한껏 위축되어 있었다. 남의 집무실에 더부살이하는 처지에 너무 염치가 없었나 싶어서.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할 뿐, 유감은 없어 보였다.

‘휴…….’

안심한 오드리가 그제야 가방을 펼쳤다. 그리고는 야무지게 챙겨 온 물건들을 하나둘 늘어놓기 시작했다.

‘거울은 여기에, 보석 볼펜은 여기에…….’

어떻게든 정이 떨어지게 만들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창피함을 무릅쓰고 준비한 것들이다.

이 모든 계획은 사교 클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 그 영식이라면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던데요?’

‘그 남자는 그냥 나르시시즘 환자예요! 하루에 거울을 삼만 번은 볼걸요? 뭐 할 때마다 자기 잘생겼냐고 묻는데, 그 입을 때려 버리고 싶었어요.’

‘풉! 아, 죄송해요.’

‘그뿐만 아니에요. 자기 미모를 상하게 하는 건 안 하려고 어찌나 용을 쓰던지!’

‘네에? 미모요?’

‘자기 피부가 타면 안 된다고 제 양산까지 빼앗아 쓰는 남자예요. 아우, 정떨어져!’

‘……!’

듣자마자 바로 느낌이 왔다. 웬만큼 미쳐서는 절대로 상대방을 떼어 낼 수 없다는 걸.

그런 이유로, 오늘 오드리의 콘셉트는 ‘자기애가 충만한 공주병 말기 환자’였다.

결연한 눈동자가 가지런히 정돈된 책상 위를 천천히 훑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설마 정이 안 떨어지고 배기겠어?’

조명을 받을 때마다 화려한 빛을 뿜어내는 탁상 거울. 리본으로 도배한 작은 손거울. 프릴이 잔뜩 달린 자그마한 수첩. 이유 없이 올려놓은 토끼 장식품.

‘완벽해.’

오드리는 새끼손가락을 야무지게 올린 채 레이스 장갑을 꼈다. 이어서 머리에 새빨간 리본도 매달았다.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였다.

“여, 역시. 오드리는 리본이 좋아!”

“……!”

프리트 공작의 당혹스러운 시선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오드리 역시 수치스러워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에 힘을 준 채 사력을 다해 버텼다.

‘차, 참아야 해!’

여기서 포기하면 이도 저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흥, 흥, 흥.”

오드리는 애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작은 손거울을 집어 들었다. 온갖 예쁜 척을 하는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시야가 절로 흐려졌다.

“고, 공작님.”

“……?”

“오드리 너어무 예쁘죠?”

마침내 오드리가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어제 하루 내내 연습한 결과물이었다.

“……!”

그러나 난데없이 뼈를 맞은 데릭은 괜스레 가슴이 철렁했다. 자기 속마음을 들켰나 싶어서였다.

‘티가, 났나.’

어쩜 그의 도돌이는 눈치마저 빠르단 말인가? 뽈뽈거리는 다람쥐처럼 기민하기도 하지.

프리트 공작은 넋이 나간 얼굴로 냉큼 대답했다.

“……항상. 매일.”

양쪽 귓불이 터질 듯이 붉었다.

* * *

시간이 갈수록 오드리는 불안해졌다.

‘효과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제아무리 기를 써 봐도 프리트 공작의 태도에 변화가 없는 탓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오늘 그녀가 한 일이라곤 자기애를 과시하는 것밖에 없었다. 업무 시간 중 10초에 한 번씩 거울을 보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심지어는 손톱까지 다듬었다.

그런데도 프리트 공작은 이런 모습에 정이 똑 떨어지기는커녕,

“안녕하십니까! 귀한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프린세스 살롱의 대표, 에뛰아르입니다.”

“……오드리도 반가워요.”

“어머! 이웃 나라 공주님께선 손톱마저 앙증맞으시군요? 제가 더 예쁘게 다듬어 드릴게요!”

기다렸다는 듯이 돈쭐을 내주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한 얼굴이었다.

“…….”

오드리는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톡톡.

문득 창가에서 익숙한 소음이 들려왔다.

“……메시앙?”

─구룩! 구루루룩!

아놀드의 전서구가 부리로 창문을 찧은 소리였다.

놀란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아니, 여기까진 어떻게…….”

본능적으로 창문을 열어젖히려던 찰나, 단풍잎 같은 손이 멈칫했다.

‘아차.’

이곳은 케벨슨 백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함부로 들였다가 죄 없는 메시앙이 사살이라도 당하면 어쩐단 말인가?

─톡톡! 톡!

그러나 성질 급한 전서구는 자꾸만 그녀를 재촉했다.

‘허락을 받아야 하겠지?’

할 수 없이 프리트 공작의 눈치를 살피려는데, 별안간 익숙한 향기가 훅 치고 들어왔다.

“……!”

햇빛에 잘 마른 세탁물 냄새.

“내가, 하겠다.”

프리트 공작이었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그는 어쩐지 오드리 곁으로 붙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아, 비켜 드릴게요!”

“…….”

창문을 막고 서 있던 오드리가 눈치껏 비켜섰다.

데릭은 그제야 숨을 편히 몰아쉬었다. 턱밑에서 아른거리는 분홍색 머리통을 붙잡고 쪽쪽 입을 맞추고 싶은 걸 참느라 어찌나 고역이었는지.

‘……저렇게까지 멀리 갈 필요는 없었는데.’

그러나 막상 멀어진 도돌이를 보자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그가 나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되, 언제든 고 깜찍한 눈코입을 낱낱이 뜯어볼 수 있도록 가까이에 있으면 좋으련만. 대뜸 비켜서는 모습이 야속했다.

어떻게 80cm나 멀어질 수 있단 말인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했다.

‘긴장할 필요는 없다. 고작 창문을 여는 것뿐.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열면 된다.’

데릭은 오래된 기계처럼 삐거덕대는 움직임으로 창문을 열어젖혔다.

─구루루룩!

그와 동시에 전서구 한 마리가 힘차게 날아들었다.

“메시앙.”

“……!”

프리트 공작은 다시금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코끝을 간질이는 도돌이의 향기 때문이었다.

‘젠장!’

도돌이는 대체 뭘 믿고 저리도 당돌하단 말인가? 어쩜 예고도 없이 그의 이산화탄소 존으로 불쑥 파고드냔 이 말이다.

프리트 공작의 머릿속에선 적색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커다란 손이 더듬더듬 벽을 짚었다. 당장이라도 도돌이를 와락 안은 채 저 달콤한 향기에 취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 복숭아 내음에 얽힌 기억들도 하나둘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케벨슨 백작가 앞에서 처음으로 손을 포갠 두 사람.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오래도록 춤을 추던 두 사람.

“…….”

어쩐지 열이 나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마치 잠 못 이뤘던 지난날들처럼.

‘이대론, 이대론 안 된다.’

프리트 공작은 다급한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각하? 어디 가십니까?”

“……알 것 없다. 마저 일 봐라.”

그리고는 웬일로 보좌관까지 뿌리친 채 저만치 멀어졌다.

“어라?”

덩그러니 남은 루카스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시간 햇빛에 노출된 것처럼 새빨갛게 익은 주군의 목덜미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누가 보면 화상이라도 입은 모양새다.

“밖에 나가지도 않으셨는데…… 이상하다?”

한편, 침대에 드러누운 데릭은 넋이 나간 얼굴로 얼음찜질을 하는 중이었다. 주방에서 막 받아 온 얼음주머니는 벌써 반쯤 녹은 듯 미지근했다. 열기가 쉬이 가라앉지 않은 탓이었다.

“……아주 불덩이가 따로 없군.”

어쩐지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덥게 느껴졌다. 그로선 난생처음 겪는 무더위였다.

* * *

─구루루룩…….

아예 열어 놓은 창문 너머로 메시앙이 비틀비틀 날아왔다.

‘아니, 이 오라버니가 진짜!’

오드리는 식겁한 얼굴로 물을 챙겨 준 뒤, 오늘만 해도 벌써 스물세 번째인 편지를 받아들었다.

……점심은 뭘 먹을 거야?

……이 오라비는 가리비 샌드위치를 먹고 싶은데!

아니, 정정한다. 정확히는 스물세 번째 편지와 스물네 번째 편지였다.

이래서는 통신구를 선물한 보람이 없었다.

‘사용법을 모르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분홍색 깃펜을 잡은 오드리가 사각사각 통신구 사용법을 적어 나갔다.

통신구를 세 번 두드린 다음 제 이름을 말하면 돼요. 참 쉽죠?

그리고는 꼼꼼히 접어 불쌍한 전서구의 발목에 묶어 주었다.

‘메시앙, 조금만 참아 줘. 알겠지?’

─구룩…….

전서구는 창틀 위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날개를 펼쳤다. 푸드덕대는 뒷모습이 지쳐 보였다.

‘이 정도 했으면 오라버니도 알아들었을 거야.’

걱정스레 그 모습을 살피던 오드리가 한숨과 함께 손거울을 집어 들었다. 온갖 예쁜 척을 하기 위해서였다.

“루카스 님.”

“예.”

“오드리는 예뻐서 이런 거 못 해요.”

“……예?”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서류 하나를 쭉 밀어냈다. 도도한 표정은 덤이었다.

“오드리의 예쁜 손이 상하기라도 하면 책임지실 거예요?”

“그게, 갑자기 무슨-”

“종이가 너무 거칠어요. 오드리는 그냥 거울이나 볼래요.”

“…….”

제멋대로 몸을 돌린 오드리가 콧노래와 함께 손거울을 들여다봤다.

‘좋아, 완벽했어!’

빵빵해진 볼이 기대감으로 들썩거렸다. 이 정도라면 분명 정이 떨어지고도 남았으리라. 오드리는 곁눈질로 프리트 공작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새빨간 눈동자는 그녀가 아닌 애꿎은 보좌관만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감히 도돌이에게 거친 종이 따위를 내어 줄 수 있냐는 듯이.

“……!”

그러자 당황한 것은 오드리였다.

‘이, 이게 아닌데?’

영문도 모른 채 두 사람 사이에 낀 보좌관이 대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그러나 루카스는 도리어 본인이 사과를 건네 왔다.

“죄송합니다.”

“……!”

“제가 그것까진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아,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불편할 수 있을까?

당장 턱 끝까지 죄송하다는 말이 차올랐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흐, 흥! 예쁜 오드리가 이번 한 번만 참을게요.”

“내일은 반드시 부드러운 종이를 준비하겠습니다.”

“……좋아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집무실은 표면적으로나마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무심결에 맞은편을 바라본 오드리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흠칫 놀랐다.

‘……저 꽃은 왜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지?’

누군가의 눈처럼 시뻘건 꽃이 슬슬 그녀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보란 듯이.

프리트 공작의 눈빛도 영 수상했다. 분명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눈치였다.

그렇게 기묘한 대치가 이어지려는 찰나, 기진맥진한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구…….

“메시앙!”

오드리는 당장 창가로 달려 나갔다.

─구룩, 구…….

잔뜩 지친 전서구가 다짜고짜 한쪽 발을 들어 올렸다. 어서 편지나 확인하라는 듯이.

오드리는 재빨리 편지를 펼쳤다.

……와, 정말 유용하네!

그래서 도토리는 점심으로 뭘 먹을 셈이야? 이 오라비가 맞춰 볼까? 응응?

“…….”

흘깃 메시앙을 보니 날아갈 기력도 없어 보였다.

‘안 되겠어.’

오드리는 답장을 쓰는 대신 통신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톡, 톡, 톡.

“아놀드 오라버니.”

투명하던 통신구 속으로 빛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상대방은 응답이 없었다.

‘으응?’

의아함을 느낀 오드리는 연달아 다섯 번이나 아놀드를 호출했다. 그러나 통신구 너머로 오라비의 얼굴이 보이기도 전에 집무실 문이 먼저 열렸다.

“케벨슨 영애. 집무실로 전서구 한 마리가 더 도착했습니다.”

“……오드리에게요?”

“소속을 확인할 수 없어서요. 한 번만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드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러자 팔팔한 전서구 한 마리가 반갑게 날갯짓을 했다.

─구룩! 구루루룩!

“메르바?”

아놀드의 또 다른 전서구였다.

통신구는 받지도 않으면서, 전서구를 보낼 시간은 있단 말인가? 참으로 기가 막혔다.

“……오드리에게 도착한 게 맞아요.”

“아, 확인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편지에 무슨 대단한 내용이 적혀 있는 건 아니었다.

……도토리, 메시앙이 돌아오질 않아. 혹시 아직도 거기 있는 거야?

오드리는 지체 없이 답장을 썼다.

오라버니, 통신구는 어디에 있어요? 왜 제 연락을 받지 않는 거예요? 이 편지를 받으면 통신구로 연락해 주세요.

아놀드와 친남매라는 것이 여실히 티가 나는 내용이었다.

한편,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프리트 공작은 생각이 많아졌다.

‘도대체 누구기에?’

오전 내내 편지를 휘갈기느라 바쁜 도돌이가 그에겐 관심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편지지가 분홍색인 것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그가 받은 연애편지와 똑같은 색 아닌가.

‘……혹시.’

자연히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세상 깜찍하고, 능력 있고, 매력 넘치고, 예쁘고, 발랄하고, 긍정적이고, 착한 도돌이에게 연애편지가 빗발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전히 도돌이의 책상에 놓인 열세 송이의 아네모네까지 마음에 걸렸다.

─드르륵!

마음이 급해진 데릭은 대놓고 화병을 들이밀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해서든 도돌이의 관심을 끌어 보겠다는 심보였다.

‘천일홍이다. 절대로 변치 않겠다는 내 사랑의 맹세란 말이다.’

그러나 도돌이는 그가 보내는 신호 따위에 관심 없어 보였다.

도대체 저 편지가 뭐기에, 작고 소중한 손이 잉크 범벅이 될 때까지 답장을 써 준단 말인가?

‘……세상에 검은 단풍잎은 없다.’

데릭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얼마 뒤.

─구룩!

메르바가 양쪽 발목에 새로운 편지를 주렁주렁 매단 채 돌아왔다. 마법사의 전서구답게 빠른 속도였다.

오드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편지를 받아 들었다. 프리트 공작의 애달픈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통신구보다 편지가 더 좋은걸. 왜냐면, 업무 시간에 몰래 쓸 수 있거든!

……이 오라비는 지금도 편지를 쓰면서 돈을 벌고 있는 거야.

……통신구를 썼다면 금방 들통나고 말았겠지.

……도토리는 오라비가 하루 내내 일만 했으면 좋겠어? 정말로? 응?

“…….”

대놓고 월급도둑을 하겠다는 태도가 참으로 당당했다. 하루 내내 거울이나 보던 오드리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아놀드의 전서구가 사사로이 공작성을 드나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마탑에서는 뭐라 하는 사람이 없나?’

이곳은 엄연히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슬슬 프리트 공작의 눈치도 보이기 시작했다.

오드리는 포악한 맹수에 쫓기는 초식동물처럼 허겁지겁 답장을 썼다.

오라버니.

급한 연락이 아니라면, 편지는 전부 집으로 보내 놓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통신구를 사용하지 않을 거라면요.

답장은 퇴근 후에 몰아서 할게요.

그리고는 어느덧 기력을 회복한 메시앙과 메르바를 원래 주인에게로 날려 보냈다.

─구루루룩!

얼마 후, 아놀드에게서 마지막 편지가 도착했다.

……우리 도토리가 원한다면 그래야지! 사랑한다, 내 동생.

“응?”

오드리는 의아하게 눈을 끔뻑였다. 혹시 놓친 내용이라도 있나 싶어 편지지를 구석구석 살펴보기까지 했다.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오라버니가 보낸 답장이 맞나?’

평소의 아놀드라면 이렇게 쉽게 포기했을 리가 없다. 전서구를 못 보내게 하면 아쉬워서라도 통신구를 쓸 위인 아니던가. 웬일로 얌전히 물러나는 모습이 영 의심스러웠다.

‘새로운 펜팔 친구라도 생겼나?’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남은 시간 동안 프리트 공작의 정을 똑 떼는 일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오드리는 일단 바닥을 뒹구는 리본부터 주워 들었다.

* * *

데릭은 다시 거울만 들여다보는 오드리를 확인하고서는 내심 안도했다.

‘역시 도돌이다.’

전서구는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똑 부러진 도돌이가 음흉한 놈들을 칼같이 잘라 낸 게 분명하다. 맺고 끊음이 확실한 게 역시 도돌이다웠다.

‘이제야 비로소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겠군.’

흐뭇한 얼굴로 시계를 확인하려던 찰나,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네 시? 벌써?’

별로 한 것도 없건만. 두 사람이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데릭은 죄 없는 시계만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도대체 하루는 왜 이리도 짧단 말인가?’

시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부조리했다. 하루가 무려 24시간이나 되는데, 그중 도돌이를 볼 수 있는 건 고작 9시간 정도에 불과하다니!

그는 도돌이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어 애가 탔다.

‘밤새도록 함께 있고 싶다고 하면…… 분명 저급해 보이겠지.’

하지만 흑심을 품었다고 오해받는 것은 사절이다. 도돌이와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어떤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가만, 이상하군.’

공작성 복도는 퇴근 시간인 저녁 6시 이후로도 무척이나 붐빈다. 때로는 저녁 10시가 되도록 불이 켜져 있기도 했다. 특히, 보좌관이나 그 외 몇의 얼굴은 거의 질릴 때까지 보곤 한다.

‘도돌이는 고작 아홉 시간 보는 게 전부이건만!’

엉뚱한 자들만 온종일 그의 곁을 지키는 형국이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데릭은 심각한 얼굴로 ‘공작성 지박령’들의 공통점을 분석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결론에 도달했다.

‘……야근!’

프리트 공작은 속으로 환호했다.

도돌이에게 저속해 보이지 않으면서, 밤늦도록 함께 있을 만한 핑계를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한 시간 밖에 남았군.’

조급한 발걸음은 곧장 마법부를 향했다.

“각하!”

공작성 마법부는 수석 마법사 바크를 잃고도 어떻게든 굴러가는 중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문제였지만.

“여, 여기는 어쩐 일로-”

“일거리가 필요하다.”

“예?”

“뭐든 좋다.”

“…….”

다짜고짜 나타나서는 일거리를 요구하는 모습이 다소 황당했다.

부서원들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그,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당장 급하지 않은 서류들은 어디에 있지?”

“아, 그건 여기에 있습니다만!”

“좋군. 하루만 빌리겠다.”

“……네?”

“이것도 함께 가져가지.”

데릭은 서류 뭉텅이를 대충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오드리의 마력을 훔쳐 갔던 몹쓸 가보 역시 챙겨 들었다.

“내일 다시 가져다주겠다.”

“…….”

“마저 일 보도록.”

그리고는 빠른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이 정도면 됐군.’

프리트 공작은 산더미 같은 서류를 내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휘었다. 수석 마법사였던 바크조차도 절대 하루 만에 끝낼 수 없는 양이었다.

‘분명 도돌이도 늦게까지 남겠지.’

아, 이 얼마나 로맨틱한 방법이란 말인가?

그는 자신의 센스에 감탄했다.

‘연애서를 독파한 보람이 있군.’

물론 도돌이가 진짜 격무에 시달리길 바라는 건 아니다. 이 일거리들은 끝내도 그만, 못 끝내도 그만이었으니까. 어차피 내일이면 마법부로 돌아갈 서류들 아니던가?

도돌이는 그저 야근을 구실 삼아 데릭과 알콩달콩 시간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통금 따위는 잊어버리고.

‘와인을 준비하라 이를까? 아니면, 따뜻한 차?’

오랜만에 도돌이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겠지. 특히, 고작 열세 송이의 아네모네로 그를 휘저어 놓은 도돌이의 속내를 알고 싶었다.

* * *

데릭은 집무실로 돌아가자마자 도돌이의 책상 위로 서류 더미를 올려놓았다.

─쿵!

“……!”

“오늘까지 오붓, 아니 완벽하게 끝내도록.”

“네에?”

그리고는 신중하게 대답을 골랐다.

‘집에 갈 생각을 말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오늘 집에 안 보내 줄 거라고?’

하지만 어째 저질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말들이다.

남모르게 허둥대던 데릭은 최대한 힘을 빼고 담백하게 내뱉었다.

“가족이, 보고 싶을 거다.”

“……!”

케벨슨 백작이 걱정할지도 모르니 미리 연락해 놓으라고.

그는 고장 난 목각인형처럼 뻣뻣한 걸음걸이로 제자리를 향했다.

한편, 난데없이 서류 폭탄을 맞은 오드리는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이게 다 뭐야?’

지금 시간은 오후 5시 30분. 퇴근까진 겨우 30분이 남았다. 그리고 7시에는 에밀튼 가족과 저녁 식사 약속이 있다. 늦어도 6시 30분에는 출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다짜고짜 오늘까지 끝내 놓으라니? 집에 가지 말란 소리나 다름없었다.

“…….”

오드리는 고집스레 입을 앙다물었다.

‘내가 못 할 줄 알고?’

도대체 무슨 심보인지 몰라도 프리트 공작은 사람을 잘못 봤다. 그녀는 클로드 한정, 포기를 모르는 폭주 기관차 아니던가. 어떻게든 제시간에 귀가해서 클로드와 하하호호 스테이크를 썰고 말겠다는 오기가 샘솟았다.

‘공주 놀이는 끝났어.’

오드리는 얌전히 레이스 장갑을 벗었다. 그 옆으로는 휘황찬란한 반지며 팔찌, 거대 리본까지 차례대로 줄을 지어 늘어놓았다.

‘클로드 오라버니, 기다려요!’

사랑의 힘은 위대했다.

* * *

“어라? 케벨슨 영애는 벌써 가셨어요?”

“…….”

루카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밤샘 확정이나 다름없던 오드리가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그녀의 책상을 둘러보니, 그 많던 서류가 보기 좋게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루카스는 설마설마했다.

“헤엑! 이 많은 걸 다 끝내고요?”

“시끄럽다.”

“헙.”

종이가 거칠다며 하루 내내 일도 안 하시던 분이 저걸 다 처리하고 가셨다니!

‘얼마나 지긋지긋하셨으면…….’

그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여자와 오래 있고 싶어서 야근을 시키는 남자가 정상은 아닐 테니까.

한편, 프리트 공작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서명을 휘갈겼다. 순식간에 일을 끝마친 도돌이가 정확히 6시 30분에 퇴근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무정하지. 참으로 눈치도 없지.’

그의 계획은 몽땅 수포로 돌아갔다. 도돌이와 사이좋게 나눠 먹으려던 야식은 사용인들의 간식이 되었고, 심사숙고하여 골라 놓은 와인은 속상한 마음에 홀로 까마셨다.

‘이것도 쓸모가 없어졌군.’

데릭은 <(이성을 사로잡는) 일상대화 300선>이라는 책 역시 허망하게 내려놓았다. 도돌이 앞에만 서면 긴장을 하는 탓에 참고나 할까 싶었더니…….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는 전쟁영웅답게 적의 공격을 예측하고, 이에 맞서 작전을 수립하는 것엔 자신이 있었다. 집요할 정도로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것이 특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랑엔 변수가 너무도 많았다.

“하아…….”

결국, 프리트 공작은 한숨과 함께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가장 깊은 서랍을 열어 두툼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식물도감 1001>이었다.

‘이건 아니다. 이것도.’

데릭은 무언가를 찾는 듯 한참이나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 문득 한 페이지에 시선이 멈췄다.

《예순세 번째 꽃, 리나리아》

금붕어를 닮은 자줏빛의 꽃, 리나리아! 동글동글 앙증맞은 생김새가 참으로 귀엽지 않나요?

‘깜찍함이라면 나의 도돌이도 뒤지지 않지.’

분홍색에 가까운 색깔이며, 올망졸망한 꽃의 생김새가 마치 도돌이를 연상시켰다. 그는 퍽 진지한 얼굴로 꽃말을 확인했다.

리나리아의 꽃말 : 내 마음을 알아주세요.

“……!”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데릭의 몸이 떨렸다.

그래, 바로 이거다. 도돌이를 닮은 깜찍함과 더불어 그의 마음을 그대로 녹여 낸 꽃말까지.

“루카스.”

“예. 여기 있습니다.”

“원예사에게 일러 내일 아침엔 이 꽃을 화병에 꽂아 놓도록.”

내일 그가 도돌이에게 보낼 신호는, 제발 내 마음을 알아 달라는 간절한 애원이었다.

* * *

“오드리, 이것 좀 먹어 봐.”

“네, 네에.”

오드리는 바로 옆에 앉은 클로드의 관심이 기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향수라도 뿌리는 건데!’

식사 시간에 거의 딱 맞춰 도착한 까닭에 몸을 단장할 시간도 없었다.

혹시 몸에서 역한 잉크 냄새가 나는 건 아닐까? 얼룩덜룩한 잉크 자국이 흉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잔뜩 움츠러든 오드리의 칼질이 눈에 띄게 어색해졌다. 자연히 모든 불만과 원망은 가장 만만한 한스에게로 향했다.

‘이런 날이나 방해를 할 것이지…….’

오늘따라 순순히 클로드 오라버니의 옆자리를 허락하는 꼴이 괜스레 원망스러웠다.

평소엔 아주 방해하지 못해서 안달이더니. 정작 필요할 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참으로 한스다웠다. 오드리는 에밀튼 가에서 가져왔다는 푸딩을 먹으며 치를 떨었다.

그러는 동안, 케벨슨 백작과 에밀튼 백작 부부도 편히 대화를 나누었다.

“노먼, 너도 참. 그 나이 먹도록 푸딩 못 먹는 건 여전해.”

“크흠.”

“꼭 개구리를 입에 물고 있는 것 같다잖소. 진짜 개구리를 먹어 봤으니 저리 싫어할 만도 하지.”

“손도 안 댈 거면서 푸딩 가져오란 소리는 왜 하는지 몰라. 그렇지 않아요, 여보?”

“내 사랑, 당신 말이 전부 맞아.”

“우리 딸이 푸딩을 좋아하니 그렇지. 이거 참……. 부인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나이를 먹은 뒤에도 여전히 티격대는 모습에서 소꿉친구인 것이 여실히 티가 났다.

“하여간, 자기 딸은 끔찍이도 생각해요.”

“아무렴. 귀한 딸인데.”

“윌리, 우리도 딸 하나 더 낳을 걸 그랬어요.”

“……딱히.”

“당신도 딸 갖고 싶지 않았어요?”

“아들 둘 있으면 됐지. 당신이 고생만 하는걸.”

“그래도요. 오드리 같은 딸이 있으면 너무 좋았을 텐데.”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식들을 향했다.

“너! 내 푸딩 훔쳐 먹었지?”

“네 푸딩은 네가 먹어 놓고 왜 나한테 난리야?”

“클로드 오라버니가 나 먹으라고 하나 더 줬단 말이야!”

“야, 푸딩에 네 거 내 거가 어딨어? 먼저 먹은 사람이 임자지.”

“이……!”

누구 자식들 아니랄까 봐. 별거 아닌 일로 투닥대는 모습이 부모들과 똑 닮아 있었다.

결국, 클로드가 끼어들면서 다툼은 마무리되었다. 다음번엔 오드리에게만 푸딩 10개를 더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에밀튼 백작 부인은 소회가 가득한 얼굴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네. 애들 태어나기 전에, 서로 아들딸 낳으면 결혼시키자고 약속했었잖아.”

“큼. 그랬던가.”

“응. 분명히 그랬어.”

먼 옛날 농담처럼 했던 약속이 떠오른 탓이다.

4명의 소꿉친구는 둘씩 짝을 지어 결혼하면서, 언젠가 자식을 낳거든 결혼을 시키자고 약속했었다.

가장 먼저 세상에 나온 것은 아놀드였다. 케벨슨 백작은 승자의 미소와 함께 몇 년간 에밀튼 백작을 놀려 댔다.

‘윌리, 너도 분발해.’

‘……알아서 할 거다.’

‘아들딸 낳으면 결혼시키자며? 딸 낳아 줄 거지? 약속 지켜.’

‘…….’

그리고 정확히 2년 뒤 클로드가 태어났다. 다시 2년 뒤엔 한스가 태어나면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하지만 두 가문에서 아들만 줄줄이 태어난 탓에, 이들의 약속은 흐지부지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던 찰나에 태어난 게 오드리였다.

‘어머, 귀엽기도 하지! 플로라를 똑 닮았네?’

‘그래? 노먼은 자꾸 자기를 닮았다고 우기던데…….’

‘걘 대체 양심이 어딨는 거야? 이렇게나 귀여운데 자길 닮기는.’

두 가문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늦둥이 딸은 어른들과 아이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특히, 에밀튼 백작 부부는 남의 집 딸의 매력에 홀딱 빠져 버렸다.

‘안 되겠다. 더 늦기 전에 신전 가서 서약서라도 쓰자.’

‘서약서라니?’

‘뭐긴. 아들딸 낳으면 결혼시키기로 했잖아. 남편은 오드리가 크면 직접 고르라고 하자.’

‘난 그런 약속한 기억이 없는데. 증거 있어?’

‘넌 정말…… 친구 뒤통수치려고 법 공부했니?’

하지만 케벨슨 백작은 뒤늦게 태세를 전환했다. 막상 딸을 낳고 보니 아무에게도 내어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물론 오드리는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렇단다. 너희 아버지가 갑자기 오리발을 내미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었지만.”

“아.”

“오드리 네가 우리 아들 중 한 명이랑 결혼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

결혼? 클로드 오라버니와?

오드리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엔 원망이 가득했다.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본의 아니게 죄인이 된 케벨슨 백작은 은근슬쩍 딸의 시선을 회피했다.

“아무래도 클로드가 결혼할 나이도 되고 하니까 그때 생각이 나나 봐.”

“네에? 겨, 겨, 결혼이요? 벌써요?”

“어머, 벌써라니? 늦은 편이지.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괜찮은 영애들을 물색하고 있단다.”

“……!”

오드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어떡하지?’

에밀튼 백작 부부가 클로드 오라버니의 결혼을 신경 쓰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러다가 갑작스레 결혼 소식이 들려오는 거 아닐까? 제대로 애써 보기도 전에 클로드 오라버니를 빼앗기게 생긴 것이다!

오드리의 마음이 급해졌다.

‘아버지, 뭐라도 해 보세요! 제발요…….’

애써 딴청을 피우던 케벨슨 백작도 더 이상 모른 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뿐인 딸의 시선이 워낙 따갑고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 떨떠름한 얼굴로 한마디를 보탰다.

“크흠. 우리 딸도 성인이고…… 약속 같은 것보단 뭐, 본인들의 마음이 더 중요한 법이니까.”

“어머. 웬 변덕? 오드리라면 우리야 당연히 좋지. 당신도 그렇죠?”

“그럼.”

“……!”

에밀튼 백작 부부의 반응이 생각보다 좋았다.

오드리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마음만큼은 이미 에밀튼 백작가의 담장을 넘어 단란한 가정을 꾸린 지 오래였다.

이제 남은 것은 클로드 오라버니의 대답뿐.

“클로드, 너는 어떠니?”

조용히 와인 잔을 내려놓은 클로드가 선하게 웃었다.

“저에게 오드리는 너무 과분하죠.”

“무, 무슨!”

오드리는 혹여 그가 거절이라도 할세라 다급히 반박했다.

“과분하다니요! 이 정도면 아주, 아주 적절한 것 같은데……!”

“오드리. 날 너무 좋게 봐주는 거 아니야?”

클로드가 장난스레 웃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차마 따라 웃지 못하고 혼자서 애를 태웠다.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르고, 클로드가 다정히 속삭였다.

“오드리는 나보다 훨씬 좋은 남자를 만나야지. 평생 너만 사랑하고 아껴 주는 그런 남자.”

“…….”

“그런 남자를 찾으면 꼭 나한테도 데려와야 해. 알았지?”

오드리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좋은 남자를 만나라고?’

클로드 오라버니보다 좋은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냥 평생 혼자 살라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하는 걸까? 아니,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에밀리아밖에 없는 게 분명하다.

다정히 공작성 뒤뜰을 걷던 두 사람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대론 안 돼.’

오드리는 절로 마음이 급해졌다. 그때처럼 그가 에밀리아에게 가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었다.

* * *

‘이 정도면 완벽하군.’

데릭은 오늘도 화병을 가득 채운 꽃과 함께 도돌이를 맞을 준비를 하였다. 어제 스크랩한 기사는 조금 더 잘 보이는 위치로 옮겨 놓았다.

그러니 이제 도돌이만 오면 된다.

─도로로록.

‘드디어……!’

곧이어 익숙한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맞춰 프리트 공작의 심장도 콩콩 뛰기 시작했다. 어제의 실망감은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여기에 둘까? 아니면 여기?’

데릭은 마지막으로 화병의 위치를 정하느라 우왕좌왕하였다.

결국, 화병을 미세하게 앞으로 내밀어 놓고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후다닥 자리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도돌이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왔군.”

“…….”

어제와 달리 수수한 옷차림. 화장기 없는 얼굴.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연분홍색 머리카락. 3초에 한 번씩 터져 나오는 한숨.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 같다고나 할까?

‘도돌이는 팔색조가 분명하다.’

데릭은 저도 모르게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어제는 화려한 모습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더니, 오늘은 처연한 매력으로 그의 애간장을 녹여 버리는 것을 좀 보라지. 이게 팔색조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팔색조란 말인가? 내일은 또 어떤 매력으로 그를 쥐락펴락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하아…….’

프리트 공작이 한창 도돌이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대려는 찰나, 어쩐지 머뭇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도돌이의 단풍잎 같은 손이었다.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돌이가? 나에게? 할 말?’

설마 그토록 기다리던 말을 해 주려는 걸까? 이제야 그의 진심을 알았노라고, 그러니 모든 오해를 풀고 정식으로 만나 보자고?

데릭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 앞에서 한참이나 손만 꼼지락대던 도돌이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제가, 좋다고 하셨죠?”

“그렇다.”

“……저, 그럼.”

데릭은 당장이라도 좋다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도돌이는 그저 말만 하면 된다.

‘어서.’

앙증맞은 입술이 드디어 떨어졌다. 숨결이 말소리가 실리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좋-, 뭐?”

“돈을 좀 빌렸으면 해요. 제가 도박 빚이 약간 있는데…… 아버지께서는 모르시거든요. 이런 부탁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

데릭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그가 도돌이에게 기대했던 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죽하면 그에게 부탁했을까 싶어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얼마나?”

“아, 그게, 한…… 이십만 골드요?”

“그거면 되나?”

“……!”

오드리는 화들짝 놀랐다. 이십만 골드가 결코 적은 돈도 아니건만. 어째 이 남자는 당장이라도 금고를 열어 줄 기세였다.

‘이, 이상하다? 돈 이야기만 꺼내도 바로 정리당할 거라 했는데…….’

혹시 금액이 적었나 싶어 은근슬쩍 올려 보기도 했다.

“아, 이자까지 하면 오십만 골드예요. 제가 분별없이 고리대금을 쓰는 바람에…….”

“오십만 골드라.”

혼자서 읊조리던 프리트 공작이 별안간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홀로 남은 오드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금액이 커야 하는구나!’

그녀를 내려다보던 냉철한 눈동자. 그건 분명 도박쟁이를 향한 경멸과 혐오가 가득한 시선이었다.

‘진작 이렇게 할걸.’

드디어 프리트 공작에게 완전히 정리당했다는 후련함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승리의 초콜릿이라도 한 입 베어 물려던 순간.

“긴히 할 말이 있다.”

그가 난데없이 두툼한 법전을 들고 나타났다.

“그대도 알다시피 오십만 골드는 꽤 큰돈이다. 그래서 온전히 전달하는 게 쉽지 않아.”

“……네에.”

“건물을 증여하는 방법도 생각해 봤는데, 매매 수익을 그대가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선 적어도 십 년이 필요하다는군. 세금은 별도고.”

“네에?”

……이게 다 무슨 말이람? 설마 그 돈을 정말로 빌려주려는 걸까? 공작성을 한 채 더 지을 만큼 어마어마한 돈을?

‘왜 이렇게까지…….’

프리트 공작은 퍽 심각한 얼굴로 본인이 조사한 바를 낱낱이 늘어놓았다.

대리 변제를 택하더라도 워낙 거액이라 황실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는 것. 그러면 자연히 변제 시기가 늦춰지니 우려스럽다는 것.

석연찮은 도박 빚에 대해선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프리트 공작이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저하였다. 양쪽 귀며 얼굴,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양새가 영 수상쩍었다.

“제국법상, 부부……가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오드리는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만 같았다. 어쭙잖게 프리트 공작의 정을 떼 놓으려다 되려 발목이 잡히게 생긴 것이다! 남의 도박 빚 갚아 주려고 결혼까지 하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데릭은 아예 작정한 듯 쐐기를 박았다.

“그대와 내가, 결혼하면 돼.”

거대한 손이 긴장으로 축축해졌다. 폭탄을 터뜨리고 나서야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은 답지 않게 조심스러웠다.

‘지금인가?’

이제 남은 것은 정식 프러포즈뿐.

두 사람의 결혼에 어떤 이유와 핑계가 붙더라도 데릭은 상관없었다. 도박 빚? 그까짓 게 뭐 대수일까. 중요한 건 남은 인생을 도돌이와 함께 걸을 수 있단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눈을 감는 날까지 평생.

“부디, 나와 결혼-”

그런데 막 진중한 이야기를 꺼내려던 찰나,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

보좌관 루카스였다. 의아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눈동자엔 눈치라곤 개똥만큼도 없었다.

“어라? 그런데 두 분께선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나누시는 겁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요!”

“하핫! 농담이었습, 각하?”

“이젠 노크도 없이 막 들어오는군.”

“……!”

보좌관이 눈에 띄게 흠칫했다. 주군의 서슬 퍼런 기세에 숨이 막혀 온 까닭이다.

‘도대체 왜 저러시지? 내가 뭘 잘못했나?’

저건 마치 침입자라도 맞닥뜨린 듯한 눈빛 아닌가. 이미 지난 2년간 집무실을 함께 써 왔던 루카스로선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되었다. 일이나 하지.”

“……예!”

한참이나 못마땅하게 루카스를 바라보던 데릭이 등을 돌렸다.

그 짧은 순간, 보좌관의 눈을 피해 도돌이와 애틋한 시선을 주고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가 보면 아찔한 비밀 연애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잠시 정신이 나갔었군.’

데릭은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분위기에 휩쓸려 도돌이에게 하잘것없는 프러포즈를 할 뻔하지 않았는가! 심지어는 변변찮은 반지 하나 준비하지 못했다.

‘……최악의 사내가 될 뻔했군.’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 한들, 평생에 한 번뿐인 프러포즈를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대충할 순 없었다.

나중에 아이들에겐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어머니랑 아버지는 어떻게 결혼했어요?’

‘아버지가 프러포즈했지.’

‘프러포즈? 어떻게요?’

‘법 조항을 읊으며 도박 빚을 갚아 주겠다고 했다.’

‘으, 으아앙!’

먼 훗날을 상상하던 데릭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큰일 날 뻔했어.’

그는 말주변이 좋은 것도 아니고, 부드럽거나 다정한 사람도 아니다. 무언가를 근사하게 꾸며 내는 능력도 없다. 하지만 프러포즈를 하는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아무래도 준비가 필요하겠지.

‘너무 늦지 않아야 할 텐데.’

데릭은 어쩐지 시름시름 앓는 듯한 도돌이를 보며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동시에 얼굴도 모르는 고리대금업자를 향한 분노가 치솟았다.

‘감히 순진한 도돌이를 속인 것으로도 모자라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그들도 눈이 있으니 알 것이다. 도돌이가 얼마나 섬세하고, 깜찍하고, 여린 사람인지. 도대체 괴롭힐 구석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못살게 구냐 이 말이다.

게다가 도돌이의 책상은 오늘따라 왜 이리도 휑한 것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한 몸 같았던 리본과 거울이 전부 자취를 감추었다.

어떻게 되었을지는 뻔했다.

‘아주 벼룩의 간을 내어 먹었군!’

도대체 그 악독한 것들이 얼마나 숨 막히게 들들 볶아 댔으면…….

참으로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루카스.”

“예!”

“상인을 불러야겠다.”

“무기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잡화상이다. 보석상도 함께.”

“아. 그럼 오후쯤 방문하라 이르겠-”

“아니, 아니다. 그냥 상단을 부르는 게 낫겠어.”

“…….”

그날 오후. 거대한 짐 마차 여러 대가 공작성으로 줄줄이 들어왔다. 크리앙트 제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사치스럽기로 유명한 ‘몰타 상단’이었다.

“성으로 직접 초대해 주시다니, 가문에 길이 남을 영광입니다. 지시하신 대로 예쁜 리본과 거울을 위주로 꾸려 보았습니다. 편히 둘러보시지요.”

도돌이의 눈은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감동한 눈치다.

‘상단을 부른 보람이 있군.’

데릭은 남몰래 흐뭇한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는 도돌이를 향해 은근히 눈짓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골라 보라는 뜻이었다.

“…….”

하지만 오드리는 선뜻 고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글대는 붉은 눈동자가 마치 ‘그걸 집으면 우린 결혼하는 거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이제는 별 쓸모도 없는 거울 하나를 탐내다가 또 다른 곤경에 처하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오해한 데릭은 단숨에 결단을 내렸다.

“전부 사겠다.”

“네? 이 많은 걸……!”

“역시,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진정한 주인은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는 법이지요.”

그의 도돌이에게 고민은 필요치 않았다. 갖고 싶으면 마땅히 갖게 될 것이고, 갖기 싫어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데릭이 도돌이에게 약속하고 싶은 삶이었다.

“전부 그대의 것이다.”

“……!”

나조차도.

데릭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삭이며 조용히 귀를 붉혔다.

아, 석양을 바라보며 속삭이기에 딱 좋은 말이지 않은가.

‘잊기 전에 어디든 적어 놔야겠군.’

언젠가 두 사람이 그려 낼 로맨틱한 장면을 상상하며, 데릭은 입꼬리를 슬쩍 휘었다.

* * *

점심 시간. 공작성의 지하 회의실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프리트 공작의 성공적인 프러포즈를 위해 최측근들이 강제 동원된 것이다.

“이번만큼은 믿어 보도록 하지.”

그들의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각하께서 프러포즈를? 이게 다 무슨 말인가?’

‘저번에 그 협박범을 잡으신 건가?’

‘설마, 그렇다면 그게 진짜로 연애편지였단 말인가?’

‘아이고! 하마터면 목이 달아날 뻔했구먼!’

‘가만.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 있나?’

‘성 밖으로 나가지도 않으시는데, 혹여 상상 속의 여인은 아닐지…….’

데릭은 답이 없는 최측근들을 둘러보며 다시 한번 재촉했다.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면 된다.”

“…….”

“설마 프러포즈도 못 해 보진 않았을 테지.”

“…….”

그러나 분위기는 숙연했다. 저래서 결혼은 어떻게 했고, 또 애는 어떻게 낳았나 싶을 정도로.

“본인의 경험이라도 꺼내 보란 말이다.”

“아! 저는 부모님을 통해 청혼서를 보냈습니다. 그런 일은 어른들께 맡겨야 한다시기에.”

“…….”

제정신인가?

이글대는 핏빛 눈동자 한 쌍이 최측근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건 어렵겠군. 무덤에 계신 분들이 걸어 나올 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

아차.

최측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선대 프리트 공작 부부는 이미 세상을 떠나지 않았던가. 그 앞에다 대고 본인은 부모가 있다며 약 올리는 꼴이 된 것이다.

“그, 그런 뜻이 아니오라……!”

“청혼까지 부모님의 손을 빌리다니,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군.”

“죄송합니다!”

“되었다. 다른 의견은 없나?”

“흠흠. 아무래도 프러포즈는 이벤트적인 성격이 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벤트?”

두 번째로 나선 최측근 하나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연애할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저 같은 경우는 소문을 활용했습니다. 일단 당사자 모르게 주위로 소문을 내고 보는 것이지요.”

“소문? 어떤 내용의?”

“제가 곧 고백할지도 모른다, 제가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한다더라, 뭐 이런 내용이지요.”

“…….”

“그렇게 흘러 흘러 전달받도록 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경쟁자는 눈치껏 물러날 테고요. 나름 기발하지 않습니까?”

“최악이다.”

데릭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치졸하게 남의 입을 빌려 마음을 전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입 뒀다가 뭐 한단 말인가?

“다른 의견은 없나?”

“저는 술에 취해 있던 터라 기억이 잘…….”

“일생에 단 한 번뿐인 프러포즈를 기억조차 못 한다는 건가? 심각하군.”

“…….”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중 루카스만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내가 필요한 것 같지?’

자신이 나서야 할 차례임을 직감한 것이다. 마치 난세의 영웅처럼. 비록 아직 미혼이지만, 루카스는 미래의 부인을 위해 프러포즈까지 미리 계획해 놓은 몸이 아니던가.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

프리트 공작이 어디 한번 해 보라는 얼굴로 대충 고갯짓을 했다.

“다년간의 로맨스 소설 탐독 결과, 프러포즈의 핵심은 아무래도 ‘스케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걸 잘도 읽고 있었군.”

“자료 조사차,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남자 주인공이라면 프러포즈할 때 모름지기 섬 하나는 빌려줘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공개 프러포즈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

최측근들이 바쁘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각하의 체면이 있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냐는 의견과, 최고의 프러포즈라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행여 결과가 안 좋기라도 하면 무슨 망신이란 말입니까?”

“이 사람아. 군중 심리도 모르나? 바람잡이를 잔뜩 심어 놓으면 되지!”

“암. 옆에서 받아 주라고 환호하는데 어찌 거절하겠는가.”

“군중의 축복 속에서 결혼을 약속한 커플이라…… 벌써 아름다운 이야기 한 편이 완성되는군요.”

“그런데 미처 거절할 수 없다면 그건 프러포즈가 아니라 협박 아닌가?”

“얼렐레. 이렇게 로맨틱한 협박이 어딨다고 그러나?”

“맞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고백한 각하의 용기와 진심에 감동하겠지요.”

“…….”

데릭 역시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공개 프러포즈? 군중의 축복?’

어쩐지 솔깃했다. 상상만으로도 벌써 달콤하지 않은가. 도돌이는 얼마나 감동할 것이며, 그런 도돌이를 보며 그는 또 얼마나 가슴 벅차 할지!

“웬일로 쓸모가 있군.”

만족스럽게 웃은 데릭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회의를 마무리하고선 집무실로 향했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야 해.’

마침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참이다. 어차피 도돌이에게도 여유가 없을 테니, 굳이 결혼을 망설일 필요는 없겠지.

─벌컥.

급하게 집무실 문을 열어젖힌 데릭이 다짜고짜 제 용건을 내던졌다.

“내일부터, 영지 시찰을 나갈 것이다.”

“……!”

놀란 도돌이를 배려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새하얗게 변한 지 오래였다.

“하나도 숨김없이 낱낱이 보여 주겠다.”

“가, 갑자기 무슨, 아니, 제가 왜 영지를.”

“……가 보면 안다.”

데릭이 슬며시 눈을 피했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모습이었다. 마치 오드리를 공작성 메모리얼 룸에 데려가던 그 날처럼.

하지만 데릭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영지민이 공작 부인의 얼굴조차 몰라선 안 될 일이지.’

약혼식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귀족 사회에서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뭔가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게 아니라면 서두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약혼 후 2년 정도를 왕래하며 여기저기 눈도장을 찍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럴 여유 따위 없었으므로, 당장 영지민들에게 얼굴을 비추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때…… 프러포즈하는 거다.’

아, 상상만으로도 황홀했다. 환호하는 군중 속에서 영원을 약속하는 두 사람이라니! 읽어 보진 않았지만, 마치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아무래도 한 권 빌려야겠군.’

데릭은 루카스의 책을 한 권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준비는 완벽할수록 좋을 테니까.

* * *

한편, 오드리는 제 꾀에 빠진 꼴이 되고 말았다.

‘어, 어떡하지?’

얌전히 영지 시찰에 따라나선다면 정말 빼도 박도 못 할 것만 같다.

수십만 골드에 달하는 도박 빚 따윈 없었다. 프리트 공작과 결혼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적당히 정이 떨어지게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걸까?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에 마음이 떠나고도 남았을 텐데, 어째서 프리트 공작은 그럴 기미가 안 보이는 걸까?

오드리는 분명 최선을 다했다. 재수 없는 공주병 환자 행세에다, 빚더미에 앉은 도박쟁이 노릇까지.

‘어떻게 이보다 더할 수가 있냐고!’

하지만 이런 허물까지도 덮어 주려는 성숙한 참사랑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다.

어쩐지 영영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불길함이 치솟았다. 누구 하나가 감방에 들어가거나, 먼저 눈을 감지 않는 이상은.

‘……감방?’

오드리는 문득 위험한 상상을 했다.

‘기다리겠다. 그대가 나올 때까지, 언제까지고.’

‘……하.’

상상 속의 그녀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리곤 잘근잘근 씹던 이쑤시개를 성의 없이 퉤 뱉었다.

‘이보세요, 공작님.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요.’

‘끼니마다 잊지 않고 특식도 넣어 주겠다.’

‘전 굉장히 위험한 여자거든요?’

‘그러니 부디 건강하게만 돌아와.’

‘무려 사람을 죽였다고요!’

거친 몸짓을 따라 듣기 싫은 쇠사슬 소리가 짤랑거렸다.

프리트 공작은 그 장면이 못내 가슴 아픈 듯, 인상을 찡그리며 안타까워했다.

‘……그대의 가족들은 내가 챙길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이보세요!’

‘원한다면 지금 결혼식을 올려도 좋다. 손을 이리 줘.’

‘뭐, 뭐, 뭐 하시는 건데요!’

‘죽음이 우릴 갈라 놓을 때까지, 나는 절대 변치 않을 것이다. 평생 그대의 곁을 지키며…….’

‘미쳤나 봐! 이거 놓으세요! 놓으시라고요!’

“…….”

음, 기분 탓일까? 왠지 감방에 가더라도 별 소용은 없을 듯하다. 프리트 공작이라면 분명 옥바라지라도 하겠다며 나설 테니까.

‘어떡하지? 이걸 어떡, 아!’

초조하게 머리를 굴리던 오드리가 문득 묘책을 떠올렸다.

“죄송하지만…… 저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어째서?”

“아버지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집무실은 제가 잘 지킬 테니, 편히 둘러보고 오세요!”

“…….”

오드리가 씩씩하게 대꾸했다.

데릭은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젠장!’

도돌이는 지금 자기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깨물어 주고 싶은지 알고 있을까?

모르겠지. 모르니까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그의 심장을 조여 오겠지.

‘아주 강아지가 따로 없군!’

집무실은 자기가 지키겠다며 씩씩하게 눈을 빛내는 모습이 꼭 새끼강아지 같았다.

문제는 그 모습이 하나도 미덥지 않다는 것. 저 조막만 한 몸으로 대체 어떻게 집무실을 지키겠단 말인가? 그래서 더더욱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애초에 도돌이와의 결혼을 알리기 위해 방문하는 것이기도 했고.

“케벨슨 백작만 허락하면 된다는 건가?”

“……네? 그, 그렇죠?”

“좋군.”

데릭이 미련 없이 등을 돌리더니, 빠른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 오드리의 불안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 * *

“잠시 이야기 좀 나누지.”

“예.”

케벨슨 백작은 하던 일을 내려놓고 상사의 호출에 응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째였다.

‘허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프리트 공작이 법무부를 이리 자주 드나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침부터 들이닥쳐서 묻는다는 게 50만 골드를 타인에게 증여하는 방법이라니. 참으로 의아하지 않은가. 심지어는 스쳐 지나가듯 말한 ‘결혼’이란 단어에 조용히 얼굴을 붉히는 모습도 퍽 낯설었다.

‘장가가실 때도 되신 게지.’

케벨슨 백작은 알만 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프리트 공작이 아무리 목석같다고 한들, 그 역시 피 끓는 청춘 아니던가. 원래 결혼 적령기를 맞이하면 마음이 싱숭생숭한 법. 안 하던 짓을 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이거, 곧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 모르겠어.’

케벨슨 백작은 흐뭇하게 웃었다. 딸 가진 아빠로서 미래의 공작 부인을 생각하면 안쓰러움이 밀려들었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였다.

“양해를 구하고 싶은 것이 있다.”

“뭐든 말씀하시지요.”

“영지 시찰을, 나갈까 하는데.”

“그러시군요. 그런데 왜 제 양해를……?”

케벨슨 백작이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 앞에서 잠시 뜸을 들이던 데릭은 무뚝뚝한 얼굴로 통보했다.

“도돌, 아니, 케벨슨 영애와 동행하려 한다.”

“……예?”

“그런데 백작의 허락이 필요하다기에.”

“예?”

뭔가 이상하다. 그의 딸 오드리라면 굳이 아버지의 허락 없이도 사방팔방을 잘 돌아다니는 귀여운 망아지 아니던가.

‘녀석, 언제부터 내 허락을 맡았다고.’

다 큰 딸이 뒤늦게 응석이라도 부리고 싶은 걸까?

‘……잠깐.’

그러다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

영 타이밍이 묘했다. 결혼 이야기에 얼굴을 붉힌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거늘. 갑자기 그의 딸과 영지 시찰을 나가겠다고? 한창 좋을 때인 두 남녀가? 이게 정말 우연일까?

어쩐지 이해할 수 없던 생일 무도회 날도 떠올랐다.

‘나에게 파트너 요청을 하신 게 이상하다 싶었지!’

다 늙은 가신에게 파트너 신청이 웬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흙먼지를 휘날리며 달려와 케벨슨 일가를 몽땅 실어 나르던 마차, 그리고 그의 딸을 향한 뜨거운 시선. 뒤늦게 그 모든 것이 마음에 걸렸다.

“크흠! 저, 저희 딸아이와는 어째서 동행을 하시려는 건지요?”

“…….”

“아직 철이 없어서 분명 짐만 될 겁니다.”

데릭은 곤란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도돌이에게도 말을 못 했는데……. 혹여 케벨슨 백작이 말실수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이 비밀스러운 계획을 들키고픈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늘한 얼굴로 대충 둘러댔다.

“……견습 보좌관이니 마땅히 함께 가야지.”

“아!”

순간, 케벨슨 백작의 얼굴에 깨달음의 미소가 번졌다.

‘나도 참. 무슨 오해를.’

혹여 프리트 공작이 제 딸을 결혼 상대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견습 보좌관으로서의 일정이라면 안심이다.

백작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허허. 저는 또 뭐라고! 그나저나 저희 딸 아이가 일은 잘하고 있습니까? 각하께 방해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무척 잘하고 있다.”

데릭은 많은 말을 속으로 삼켰다. 도돌이가 특히나 그의 심장을 폭행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것도, 영지 방문 일정이 장장 2주에 달한다는 사실도. 먼저 묻질 않으니 딱히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까닭이다.

“각하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는 거겠지요. 아직 많이 부족할 겁니다.”

“……도돌이는 식충이가 아니다.”

“예?”

“공작성에 꼭 필요한 인재이지.”

에두른 자식 자랑을 잘못 받아들인 프리트 공작이 곧바로 정색했다. 그 얼굴이 어찌나 단호하던지, 케벨슨 백작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녀석. 그래도 나를 닮아 잘 해내고 있는 것 같구나! 역시 내 딸이야.’

도대체 얼마나 유능하길래 벌써부터 영지 시찰까지 동행할 정도란 말인가?

‘이러다 공작성의 첫 여성 보좌관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입이 간지러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자랑을 좀 해야겠다.

“아무쪼록 아낌없는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영지 시찰이 오드리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허락하는 건가?”

“물론이지요! 부모가 자식의 날개를 꺾을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래. 그럼 일정은 출발하기 전에 따로 전하도록 하지.”

“예!”

두 사람 모두 들뜬 얼굴로 돌아섰다. 만족할 만한 합의점에 도달하여 흡족해하는 협상가들 같았다.

‘우리 딸이 그렇게나 유능하단 말이지?’

케벨슨 백작은 당장이라도 딸 자랑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이었고,

‘최고의 프러포즈를 선사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해.’

프리트 공작은 결연한 얼굴로 전의를 불태웠다.

서로의 생각이 어긋나 있다는 사실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 * *

데릭은 끝이 안 보이는 양피지를 펼쳐 들고 하나하나 꼼꼼히 체크했다.

“마차 장식은?”

“온실의 생화로 장식할 예정입니다.”

“특별히 신경 쓰도록. 숙소는 마련되었나?”

“저만 믿으십시오. 제대로 힘써 보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다행히 옆에서 루카스가 거든 덕에 준비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주간 갈아입을 멋스러운 옷들까지 전부 정하고 나자, 이제 남은 것은 레스토랑 선정뿐이었다.

“식사만 결정하면 되겠군. 근처 레스토랑 조사는 모두 끝났겠지?”

“예. 총 스물일곱 곳 중 세 곳을 추렸습니다. 메뉴판을 보여 드릴까요?”

“아니, 직접 방문해서 확인하겠다.”

프리트 공작의 지시를 따라 순식간에 이동용 포털이 준비되었다. 록트의 마도구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포털을 넘어 단숨에 레스토랑에 도착한 그는 꼼꼼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군. 카펫도 적당히 고풍스럽고.”

“요즘 데이트의 성지로 떠오르는 레스토랑이라고 합니다. 조명이 적당히 어둑해서 분위기 잡기도 좋다는 평이 대부분이더군요.”

“하지만 무엇보다 맛이 중요하지 않겠나.”

“그럴 줄 알고 미리 주문해 놓았습니다. 아, 저기 나오는군요.”

“…….”

수석 쉐프가 5단 카트를 끌고 걸어 나왔다. 삐걱거리는 움직임엔 긴장한 기색이 여실히 묻어났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데릭은 어쩐지 얼굴을 굳혔다.

“이곳은 특히 부드러운 식전 빵으로 유명-, 각하?”

“…….”

─벌떡.

예고도 없이 일어선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포털로 향했다. 당황한 루카스는 허둥지둥 따라나섰다.

“각하! 어딜 가십니까?”

“아무래도 다른 곳이 좋겠다.”

“맛도 안 보시고요?”

“그럴 필요도 없다. 그나저나 왜 말을 하지 않았지?”

“예? 무엇을요?”

데릭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쉐프가 젊은 남자라는 말은 없었지 않나.”

“…….”

보좌관은 할 말을 잃었다.

레스토랑을 고르는 데 쉐프의 성별과 나이까지 따져야 한단 말인가? 인테리어부터 조명, 좌석 간의 간격, 동선, 심지어는 의자의 푹신함까지 전부 조사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런 게 사랑이라면 나는 못 해.’

루카스는 이럴 바엔 그냥 혼자 살고 말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다음 날 아침.

오드리는 영지 시찰 일정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 이게 뭐람……!’

─빰! 빠바바밤! 빠바바바, 빠바바, 빠, 바, 밤!

레드카펫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정렬한 군악대가 힘찬 연주를 시작했다.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금관악기 소리가 마치 출정식을 연상케 했다. 출근하던 이들은 가던 길도 멈추고 웅성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군악대까지 나온 걸 보니 보통 일이 아닌가 본데.”

“도대체 저게 다 뭐요?”

……전쟁이라도 났나 싶은 거겠지.

레드카펫 앞에 선 데릭은 그녀를 향해 무심히 물었다.

“혹여 발이 아프다면 카트를-”

“괘, 괜찮아요!”

“…….”

그러나 오드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후다닥 앞질러 갔다. 양옆으로 때려 박듯 꽂히는 악기 소리가 어찌나 요란하던지, 고막이 똑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프리트 공작은 그 사랑스러운 뒷모습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마 깜짝 놀랄 테지.’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세상에.”

줄줄이 늘어선 마차를 본 오드리가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 8명 정도는 거뜬히 탈 듯한 마차 크기에 놀란 게 아니었다. 다만…….

‘영지 시찰이 아니라 어디 피난이라도 가는 거 아니야?’

세 대나 준비된 짐 마차가 당일치기 일정치고는 조금 과해 보였다. 누가 보면 한 달 정도 머무르다 오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그냥 내가 챙긴다고 할걸.’

짐은 알아서 꾸릴 테니 가벼운 마음으로 편하게 오라더니. 공작성의 세간살이를 전부 쓸어 담은 듯한 광경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끼익.

“까, 깜짝이야.”

한쪽에서 대기 중이던 마부가 절도 있게 문을 열어젖혔다.

동시에 오드리의 시선이 다시 마차로 향했다. 짐 마차가 워낙 심해서 그렇지, 두 사람이 타고 갈 마차도 절대 범상치는 않았다.

‘도대체 꽃을 얼마나 좋아하시는 거야?’

성벽에 장미 장식을 둘러놓는 것으론 성에 안 찼던 걸까? 공작성의 흑단 마차 역시 온통 검은 장미로 뒤덮여 있었다. 꽃장식을 해 놓은 관에 가까운 모양새여서인지, 저세상으로 들어가는 듯한 찜찜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편, 데릭은 흘끗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지 검은 장미를 살피는 도돌이의 얼굴이 영 께름칙해 보인 까닭이다.

‘아무래도 내가 앞서 나갔나 보군.’

하긴. 정식 프러포즈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검은 장미가 웬 말인가?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이라니!

벌써부터 집착을 한다고 오해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괜스레 마음이 선득해졌다.

‘도돌이의 관심을 돌려야만 한다!’

그는 도돌이가 더 이상 검은 장미를 보지 못하도록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들어가지. 영지를 다 둘러보려면 이 주도 촉박하다.”

“……네? 바, 방금 무슨, 이 주요? 당일치기가 아니라요?”

계단을 오르던 오드리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무슨 영지 시찰에 2주나 걸린단 말인가? 포털을 이용하면 반나절 안에 제국 순회도 할 수 있는 세상인데!

그러나 데릭은 모른 척 시치미를 떼었다.

“당일치기는 불가능하다. 영지가 워낙 넓어서.”

“하지만 포털을 사용하면-”

“안타깝게도, 그럴 예산이 없다.”

“…….”

프리트 공작이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어딘지 석연치 않은 핑계였다.

도박 빚을 대신 갚아 줄 50만 골드는 있으면서, 정작 포털을 열 예산이 없다고?

‘말도 안 돼.’

공작가의 재정이 그리도 허술할 리 없다.

그러나 오드리는 당황하거나 따져 묻는 대신, 고상하게 가방을 들어 올렸다.

‘흥, 록트 사장 체면이 있지.’

그리고는 프리트 공작을 향해 활짝 열어 주었다.

“혹시 몰라서 챙겨 온 건데…… 마침 쓸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

“헤헤.”

그곳엔 이동용 포털을 열 수 있는 마도구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그러나 도돌이의 해맑은 미소를 마주한 데릭은 속이 상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참으로 야속하다.’

설마 공작성에 진짜로 예산이 없겠는가? 이건 다 도돌이와 오붓하게, 느긋하게 즐기다 오고 싶어서 지어낸 거짓부렁이었다. 그런데 어쩜 그의 도돌이는 이리도 그의 마음을 몰라준단 말인가?

‘도돌이가 순진하기 때문이다. 그건 도돌이의 잘못이 아니야.’

데릭은 곧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도돌이가 연애 놀음에 익숙하지 않다면, 조금 더 능숙한 그가 이끌어 가면 될 일.

“그건 어려울 듯하군.”

“네? 어째서요?”

“내가 마도구 울렁증이…… 있어서.”

“……?”

“포털을 넘을 수가 없다.”

데릭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였다. 어마어마하게 양심에 찔렸으나, 별다른 도리는 없었다.

‘그대에게 하는 거짓말은 이게 마지막이 될 거다. 정말이야. 약속하지.’

한편, 오드리는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마도구 울렁증?’

살다 살다 처음 듣는 증상이었다. 하지만 마력 폭주도 있는 마당에, 과연 마도구 울렁증이라고 없을까?

저 많은 짐 마차들도 뒤늦게 이해가 되었다. 프리트 공작이 어제까지만 해도 포털을 멀쩡히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오드리는 그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러나 속이 답답한 건 별개였다. 저 마차를 타고 무려 2주간 공작령 시찰에 나서야 한다니! 이렇게나 긴 일정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당연히 허락 안 하실 줄 알았는데.’

오드리는 문득 케벨슨 백작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아무리 가신이라도 그렇지. 딸이 외간 남자와 함께 2주를 보낸다는데, 너무도 쉽게 허락하신 것 아닌가?

그러나 인제 와 후회해 봤자 의미는 없었다.

마차 문 앞으로 다가온 프리트 공작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대 먼저.”

“……감사합니다.”

오드리가 먼저 자리를 잡은 후, 뒤이어 그가 들어섰다. 이어서 보좌관이 발을 디디려는 찰나.

─쾅.

“……각하?”

프리트 공작이 단호하게 문을 닫았다. 눈앞에서 버림받은 루카스는 애절하게 마차 문을 두드렸다. 혹시라도 자기를 못 보셨나 싶어서.

─똑똑똑.

“각하, 접니다. 루카스요.”

“안다.”

“이 문을 좀…….”

“자리가 없으니 다른 마차에 타라.”

“네?”

“…….”

오드리의 눈이 조용히 마차 내부를 둘러보았다. 정원이 8명인 마차는 두 사람밖에 앉지 않아 심히 쾌적하고 넓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자리가 없다고 고집을 부려 대니 왠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뭐, 뭐야……! 진짜 저승행 마차야?’

루카스의 목소리는 얼마 가지 않아 잦아들었다. 아무래도 포기하고 다른 짐 마차에 올라 탄 듯싶다.

“준비가 끝났으면 출발하지.”

“예!”

─히이잉!

데릭의 지시를 따라 마차가 힘차게 출발했다.

그들의 첫 목적지는 펠리오스였다.

한편, 케벨슨 백작에게 뒤늦은 일정표가 전달되었다.

“그래그래. 어디, 몇 시쯤 도착하려나.”

그러나 끝도 없이 이어진 종이를 확인하던 그가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이렇게나? 이, 이 주?”

벌떡 일어선 케벨슨 백작은 당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을 태운 흑단 마차는 공작성을 떠난 지 오래였다.

“아, 아이고! 내 딸!”

그는 그 자리에 망연히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귀한 딸을 짐승의 아가리로 직접 밀어 넣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 * *

두 사람이 펠리오스에 도착했을 땐 늦은 저녁이었다.

오드리는 마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정말로 이걸 타는 건가요?”

“그렇다.”

“…….”

이 모든 건 그들이 갈아탈 마차 때문이었다.

‘왜 하필 저런 마차를 준비해서는!’

백마 두 마리가 이끄는 새하얀 오픈형 마차는 꽃과 리본으로 사랑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나란히 앉으면 영락없는 신혼부부 한 쌍으로 보일 정도로. 심지어 창문이며 지붕도 없는 탓에 한 번 탑승하면 숨을 곳도 없었다.

─촤라락.

“펠리오스 방문을 환영합니다!”

“…….”

이 와중에 발 앞으로는 레드카펫이 길게 펼쳐졌다. 그 끝엔 새하얀 마차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마차를 준비토록 하겠다.”

“……아니에요.”

결국, 오드리는 체념한 얼굴로 레드카펫을 걸었다. 차라리 이 모든 수치를 견디고 얼른 집에 가는 게 나을 거라 판단한 까닭이다.

‘잠깐만 참으면 되겠지.’

하지만 막상 마차에 타자,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조금, 좁군.”

옆에 딱 붙어 앉은 프리트 공작의 귓바퀴는 그보다 더 뜨거웠다.

마부는 두 사람이 딱 붙어 앉은 것을 확인하고는 고삐를 쥐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이럇.”

“앗!”

“……!”

마차가 작게 덜컹거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팔뚝이 뭉개지듯 스쳤다.

‘젠장……!’

잔뜩 얼어 버린 데릭은 머나먼 어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숨을 골라야 했다. 도돌이의 체온이 자꾸만 신경 쓰인 탓이다.

하지만 마차가 협소한 탓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안 그래도 좁은 좌석을 혼자서 3/4이나 차지하고 있으면서, 왜 이리 좁게 느껴진단 말인가?

‘아동용 마차라고 해도 믿겠군.’

쓸데없이 우람한 몸을 이리저리 구겨 봐도 별소용이 없었다. 도돌이는 거의 짜부라져 있었다.

‘숨은 쉬고 있는 건가?’

데릭은 말이 없는 도돌이가 걱정스러워 자꾸만 옆을 돌아보았다. 거대한 그의 덩치가 가림막 역할을 해 준 덕에 그녀가 고마워하는 줄도 모르고.

새하얀 마차는 어둠 속을 한참이나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루카스가 미리 준비해 놓았다는 숙소 앞이었다.

“……내일은 더 편한 마차를 준비하지.”

“저는 괜찮은데요.”

“내가, 안 괜찮다.”

“……?”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긴 프리트 공작이 마차에서 훌쩍 내렸다.

─툭.

‘으응?’

오드리는 마차 바닥으로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 들었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소지품 같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부드러운 가죽 표지는 연분홍색처럼 보였다. 프리트 공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

“소설책 같은데.”

어쩐지 당황한 듯한 프리트 공작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소설, 그래, 맞다. 제국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함께 뛰어난 작가의 통찰을 보여 주는 아주 유익한 소설이지.”

“……아.”

“아주 가끔 읽는 것이다. 가끔. 애초에 내 책도 아니고.”

그는 오드리의 손에 들린 책을 황급히 낚아채 갔다. 묻지도 않은 내용까지 술술 설명해 주는 모습이 영 수상했다.

‘정정한다. 이게 그대에게 하는 진짜 마지막 거짓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오드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뭘 읽든, 그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마침 루카스가 뒤늦게 합류했다.

“어라? 아직 안 들어가셨어요?”

“들어갈 참이다.”

“와, 이 나무 좀 보세요! 무려 천 년이 넘은 나무라더니 정말 크네요!”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앞장서라.”

“…….”

웬일로 호들갑을 떨던 루카스가 짜게 식었다.

‘바람잡이라도 좀 하려고 했더니. 하여간, 숙맥이셔.’

보좌관의 큰 그림을 눈치채지 못한 주군이 안타까웠다.

이 숙소는 온갖 수소문 끝에 결정한 곳 아니던가. 일단 여관 뒤쪽으로 커다랗게 뻗은 천 년 나무가 멋스러웠다. 게다가 여관 뒤쪽은 어둑어둑한 탓에 분위기 한번 기가 막혔다. 그곳을 둘이서 걷는다고 생각해 보라.

‘……없던 정분도 절로 생길 텐데.’

바람이야 루카스가 잡아 놓았으니, 모르는 척 구경이라도 가자고 하면 될 것 아닌가? 그랬다면 오붓하게 산책이나 하면서 시시콜콜한 대화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어휴.’

루카스는 본인이 더 안타까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어서 오슈. 몇 분이신가?”

“세 사람입니다. 방은 따로따로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그런데 이걸 어쩌나…… 쯧.”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던 노부인이 별안간 혀를 찼다.

“방이 하나뿐인데.”

“…….”

데릭은 싸늘하게 보좌관을 돌아보았다. 눈치도 없는 루카스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은근히 눈썹을 들썩였다. 무슨 신호라도 보내는 것처럼. 그러나 새빨간 눈동자는 더더욱 매서워졌다.

‘정신을 못 차렸군.’

예약 하나 제대로 못 한 주제에 뺀질대는 보좌관의 얼굴이 꼴도 보기 싫었다.

“분명, 알아서 할 테니 믿고 맡기라지 않았나.”

“……예?”

“도대체가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군.”

저 자그마한 몸으로 하루 내내 마차를 탔으니 도돌이는 얼마나 고되었을 것인가?

‘더 이상 돌아다니는 건 무리다.’

데릭은 곧바로 결단을 내렸다.

“나는 나무 위에서 자겠다.”

“……!”

이, 이게 아닌데?

루카스와 노부인이 남몰래 시선을 교환했다.

‘내 살다 살다 저런 청년은 처음 보는구먼.’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못 이기는 척 한 방에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손만 잡고 자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과 함께.

그런데 하다못해 복도 바닥도 아니고, 나무 위에서 자겠다니!

‘거참…… 화끈한 젊은이일세.’

50년 넘게 여관을 운영하면서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처음이었다.

덕분에 오드리는 불편해 죽을 지경이 되었다.

땅 주인도 나무 위에서 자는 마당에, 그녀가 대체 무슨 염치로 침대에서 편히 잔단 말인가?

“저는 그냥 로비에서 자도-”

“안 된다.”

“…….”

“그런 고생을 시키자고 데려온 게 아니야.”

“…….”

“그러니 방은 그대가 쓰도록.”

프리트 공작이 너무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나는 야영에 익숙해서 괜찮다.”

“…….”

그 광경을 멀거니 지켜보고 있는 보좌관은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렇다고 나무 위에서 주무시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전쟁 경험을 이런 곳에 쓰는 남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때야 뭐 달리는 말 위에서도 자고, 거머리가 득실거리는 강가에서도 잘 잤겠지. 그런데 굳이 이런 날까지 야영을 하셔야겠냐는 말이다!

“각하. 다시 한번 생각을-”

“넌 길바닥에서 자든 마구간에서 자든 알아서 해라.”

“……!”

“한심한 것.”

데릭은 보좌관의 마지막 조언을 깡그리 무시한 채 2층으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도돌이의 숙소가 안전한지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창문은 튼튼하군. 침대도 두 사람이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어.’

그렇게 이불 천의 질감까지 꼼꼼히 확인한 뒤에야 안심하여 여관을 빠져나왔다.

루카스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며 그를 쫓아다녔다.

“각하, 정말로 거기서 주무실 겁니까?”

“그럼 별수가 있나.”

“하지만-”

“귀찮게 굴지 말고 썩 꺼져라.”

“……!”

이크. 뒤늦게 사실을 밝혀 봤자 분위기만 험악해질 기세다. 멀쩡한 빈방들을 놔두고 나무 위에 자리를 잡은 주군을 보니 마음이 한없이 불편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일은, 꼭,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아직도 안 갔나.”

“안녕히 주무-, 아니, 내일 뵙겠습니다!”

“…….”

루카스는 더 큰 불똥이 튀기 전에 황급히 물러났다.

‘드디어 방해꾼이 사라졌군.’

데릭은 그제야 조명구를 켜고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표지를 펼치기 전에 다시 한번 주위를 살피는 신중함도 잊지 않았다.

‘아무도 없군.’

드디어 연분홍색 가죽 표지가 넘어갔다. 곧이어 꽁꽁 감춰져 있던 제목이 드러났다.

《첫 키스만 103,850,659번째》

“……쓸데없이 자극적이어서는.”

아까 마차에서 표지라도 펼쳐졌으면 참 곤란했을 것이다. 하마터면 도돌이에게 괜한 오해를 살 뻔하지 않았는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하여간, 취향 한번 변태 같군.”

잔뜩 찌푸린 미간에서 보좌관을 향한 못마땅함이 가득 묻어나왔다.

빌려줘도 왜 하필 이런 음탕한 책을 빌려주느냔 말이다.

“…….”

그래도 유명한 로맨스 소설이라니 읽어는 볼 참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성공적인 프러포즈를 위한 것이니까.

‘아무렴 아무것도 안 읽는 것보단 낫겠지.’

하지만 처음으로 읽는 로맨스 소설은 순식간에 그를 홀려 버렸다. 새빨간 눈동자가 활자 위에서 빠르게 춤을 추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러다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주인공들이 뜨거운 키스를 나눌 순간이 다가왔다.

“……!”

데릭은 첫 문장을 읽자마자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으며 서로의 숨결이 섞여 들었다.

루카스가 강력 추천한 책은 제목만큼이나 자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던 것이다!

그는 저도 모르게 흘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나쁜 짓을 들킬까 두려운 아이처럼.

‘……벌써 이런 걸 읽어도 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책은 그의 수준에서는 너무 벅찬 듯했다. 평생에 스킨십이라고 할 만한 것은 고작 실수로 도돌이의 손을 덮은 것이 전부 아니던가.

하지만 은연중에 책으로 향하는 시선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지금은 비록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지만, 결국 언젠가는 알아야 할 것들 아닐까?

“그래. 미리 공부해서 나쁠 건 없지.”

데릭은 오늘따라 유독 치솟는 학구열에 지고 말았다. 새빨간 눈동자는 그렇게 한참이나 활자 위에서 춤을 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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