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권에 계속공작님, 제 발목 좀 놓아주세요! 2권
재주감귤
제4장. 도돌이가 보내는 신호 下
공작성 4층 복도엔 아직 열어 보지도 않은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무려 10년 만에 개최한 생일 무도회의 흔적들이다.
루카스는 선물들 사이를 조심조심 밟으며 프리트 공작의 침실 앞으로 다가섰다.
─똑똑.
“각하. 루카스입니다.”
“들라.”
“복도에 아직도 선물들이-, 흐에에엑!”
“…….”
그러나 제 주군의 안색을 확인한 보좌관은 거의 기절할 듯한 얼굴이 되었다.
“각하! 바, 밤사이에 도대체 무, 무슨 일이!”
시커멓게 그늘이 진 눈 밑. 새빨갛게 핏발 선 두 눈. 물기라곤 하나도 없이 버석버석한 눈동자까지. 거의 산송장에 가까운 몰골이었다.
“아침부터 유난이군.”
“혹, 간밤에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습니까?”
“……그럴 일이 있었다.”
데릭은 밤새 만지작거리던 치유 마력석을 소중히 쥐고 일어섰다. 어째 받았을 때보다 더 맨들맨들 광이 나는 모양새였다.
“정리는 얼마나 남았지?”
“아마 저녁 전까지는 끝날 듯합니다. 내일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서두르라 이르겠습니다.”
“좋다. 바로 집무실로 가지.”
“예.”
공작성은 평소와 다르게 고요했다. 무도회 전후로 하루 간의 휴가를 내어 준 탓이다. 간간이 들리는 일꾼들의 목소리, 물건을 나르는 소리 외에는 이따금 울려 퍼지는 발소리가 전부였다.
‘괜히 휴가를 내어 줬군.’
텅 빈 집무실에 들어선 데릭은 벌써 후회했다. 보고 있어도 애가 타는 도돌이의 얼굴을 무려 하루나 보지 못하는 까닭이다.
‘아주 끔찍하기 이를 데 없어!’
당장이라도 휴가를 전면철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대충 골라 입은 옷은 왜 이리도 멋스럽단 말인가? 평소엔 새벽 댓바람부터 신경 써도 영 불만족스럽더니……. 그의 치장은 오늘따라 완벽했다. 보여 줄 사람이 없다는 게 유일한 흠이었다.
‘도돌이가 이 모습을 봤어야 한다.’
허리선에서 끝나는 짧은 재킷과 활동성 있는 바지. 이들은 푸른 마블링 옷감과 만나 더욱 빛을 발했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마치 시원한 파도가 물결치는 듯했다. 특히, 종이배 모양으로 말린 재킷 소매가 유난히 멋스러웠다.
그 안에 받쳐 입은 연하늘색 셔츠는 또 어떤가?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허리까지 사선으로 이어지는 프릴 장식이 대범하고 실험적이었다.
직접 고른 새하얀 승마 부츠 역시 완벽한 세트를 이루었다.
‘아껴 놨다 하루 뒤에 입을 것을!’
아아, 이 멋스러운 자태를 도돌이에게 뽐낼 수 없다니? 데릭으로선 몹시 통탄할 일이다.
그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제 차림새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동시에 눈앞으로 산더미 같은 일거리가 쌓이기 시작했다.
“처리가 시급한 서류들입니다.”
“전부?”
“그간 연애 사업 때문에 워낙 바쁘셔서 말이지요.”
“…….”
“이참에 날 잡고 해결하시면 될 듯합니다.”
데릭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가 잠시 잠깐 도돌이를 생각했기로서니, 일이 이만큼이나 쌓였을 리가.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서류 한 줄을 읽을 때마다 도돌이 얼굴을 한 번씩 슬쩍 떠올렸을 뿐. 본인의 업무에 소홀했던 기억은 없었다.
“이쪽 서류들은 급한 대로 서명만 하셔도 무방, 각하? 펜을 드셔야지요.”
“그럴 생각이다.”
데릭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치유 마력석을 황급히 왼손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 틈을 놓칠 루카스가 아니었다.
“그건 또 뭡니까? 언뜻 마력석 같기도 합니다만.”
“치유 마력석이다.”
“치유 마력석이요? 언제부터 그런 걸 쓰셨다고…….”
말아 쥐었던 왼쪽 주먹이 슬그머니 풀렸다. 동시에 연분홍색 마력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새다.
“선물 받은 것이다.”
“예?”
“너도 잘 알겠지만, 치유 마력석은 아무에게나 선물하는 물건이 아니지. 그런데 나는 이걸 선물 받았다.”
“그게 무슨-.”
“아주 ‘각별한’ 사이에서나 주고받는 이 귀중한 물건을 말이다.”
“……예?”
치유 마력석이요? 돈만 있으면 록트에서 한 자루씩 쓸어 담을 수 있는 그 치유 마력석이요?
‘이건 좀 과대해석 같은데…….’
루카스는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이미 연분홍색 마력석에 잔뜩 심취해 있었다.
‘어쩌면 이리도 저 같은 것을 골라내서는.’
도돌이가 준 마력석은 다른 것들보다도 유난히 더 귀엽고, 매끈하고, 동글동글했다. 그냥 도돌이처럼 사랑스러웠다. 다른 사람의 눈엔 다 똑같은 마력석으로 보이겠지만.
반면, 데릭의 흐뭇한 얼굴을 포착한 루카스는 짜게 식었다.
‘저러느라 못 주무셨네. 뻔하다, 뻔해.’
밤새도록 마력석을 만지작거리며 구경했을 주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사랑하면 바보가 된다더니…….’
아니, 그래도 그렇지. 고작 저 돌덩이 하나 보느라 잠을 못 자는 게 말이 되나? 눈에 시뻘건 핏발이 설 때까지 쳐다보는 게 과연 정상이냔 말이다.
‘미치신 거야.’
그 집요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어쩐지 무덤에도 함께 묻어 달라며 고집을 부릴 기세였다.
하지만 프리트 공작의 기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으니.
─똑똑.
“각하, 새로운 깃발이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왔군. 여기로.”
“깃발은 또 언제 주문하셨-, 각하!”
루카스는 새로 도착한 깃발을 보고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세상에……!’
프리트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 옆. 신전의 ‘순결 보증서’를 10배쯤 확대한 깃발이 새로 자리를 잡았다. 도저히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는 존재감이었다.
“저게 뭡니까!”
“확실해서 나쁠 건 없지.”
“아니, 그래도 그렇죠!”
이럴 거면 차라리 신문에 광고도 내지 그랬냐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내가 미쳐!’
아, 사랑에 빠진 주군을 보좌하는 건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 주군이 글로 연애를 배운 모태솔로라면 더더욱.
루카스는 오늘도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 * *
금요일 아침.
“앗!”
“이거, 받아 주십시오.”
“기사님?”
오드리는 난데없는 꽃다발 세례를 받았다. 꽃줄기로 얼기설기 엮어진 걸 보니 직접 만든 모양새다. 턱시도를 입은 기사는 민망한 얼굴로 공연히 목덜미를 쓸어 댔다.
“저번에 제가 늦었지 않습니까. 사죄의 뜻입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래도 감사히 받을게요!”
이름 모를 꽃은 샛노란 수술과 자줏빛 꽃잎을 가지고 있었다. 오드리는 오랜만에 꽃 내음을 한껏 즐기며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러나 집무실 문을 여는 순간, 저도 모르게 기겁을 하고 말았다.
‘저, 저게 뭐람……!’
이전보다 거대해진 ‘순결 보증서’가 아예 집무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탓이었다.
프리트 공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왔군.”
“……!”
어쩐지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등 뒤로 펄럭이는 것이 ‘순결 보증서’가 아니라 승전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오드리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조, 좋은 아침입니다.”
“……도.”
“네?”
“나도…… 좋다.”
─휙.
제 할 말만 마친 프리트 공작은 화난 사람처럼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뚜벅뚜벅 제자리로 향했다. 걸음마다 삐거덕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왜 저러신담?’
오드리는 당최 그의 뻣뻣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무도회 날만 해도 그녀에게 아주 단단히 빠진 것 같더니. 오늘은 또 화난 사람처럼 구는 저의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오드리는 괜히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기사에게 받은 꽃다발을 작은 화병에 꽂은 뒤, 물까지 쪼로록 따라 주었다.
‘아이, 예쁘다.’
꽃 선물을 받는 건 참 오랜만이다. 4층 집무실엔 이미 커다란 벚꽃 나무가 있지만, 오드리의 시선은 책상 위 화병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화병에 정신 팔린 사람이 비단 오드리뿐만은 아니었으니.
‘웬 꽃이지?’
데릭은 양쪽 귓바퀴에 불이 난 줄도 모르고 티 나게 앞자리를 흘끔댔다.
자줏빛의 꽃. 그 너머로 보이는 몽글몽글한 도돌이의 얼굴.
‘읏……!’
아아, 야속한 도돌이는 그의 숨을 멎게 만들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앙큼한 암살자 같으니라고!
‘젠장.’
데릭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마음 같아서는 왼쪽 가슴팍을 마구 내려치고 싶었다. 심장에 쥐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벌레가 기어 다니듯 간지럽기도 했다.
‘또 시작이군.’
숨을 깊게 몰아쉬어도 원인 모를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도돌이는 단 하루만이라도 덜 사랑스러울 수는 없나? 숨 막힐 듯한 깜찍함으로 수십 번이나 그를 위험에 몰아넣더니, 이젠 아예 저세상으로 보내려는 것인가?
프리트 공작은 업무 시간 내내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간 목소리보다 심장이 먼저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도돌이 앓이는 퇴근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
“주, 주말 잘 보내세요!”
“……!”
오후 6시. 짤막한 인사를 남긴 오드리는 도망치듯 집무실을 나섰다.
데릭은 애끓는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쫓았다.
“하…….”
그러다 도돌이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정신이 들었다.
프리트 공작은 열이 오른 얼굴을 멋쩍게 쓸어내리며 마음 편히 숨을 몰아쉬었다.
‘주말을 잘 보내라고 했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도돌이의 얼굴도 못 보는데 어떻게 잘 보낼 수 있겠는가? 아주 끔찍한 주말이 될 것이다. 맞은편 책상은 벌써부터 휑뎅그렁하게 느껴졌다. 그저 도돌이 하나 없을 뿐인데도.
그러다 문득 화병에 시선이 닿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벌떡 일어선 데릭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화병을 관찰했다. 평소에 소지품 하나 없던 도돌이가 오늘따라 꽃을 들고 나타난 것이 무언가 수상했다.
아네모네꽃 열세 송이. 그리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자꾸만 꽃을 바라보던 도돌이.
“……!”
데릭은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은 필시 도돌이가 보내는 신호다!
“각하,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
“비켜라.”
“에? 어디 가십니까? 각하!”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프리트 공작은 당장 서재로 향했다. 그러더니 저녁 식사까지 무른 채 틀어박혀서는 한참이나 책꽂이를 뒤졌다.
“드디어 찾았군.”
마침내 2층 구석에서 발견한 책은 <식물도감 1001>이었다. 데릭은 퍽 신중한 눈으로 목차를 훑었다.
“아네모네, 아네모네…… 그래. 사십사 페이지란 말이지?”
드디어 도돌이의 암호에 한 발짝 다가선 기분이다.
그러나 데릭의 설렘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열두 번째 꽃, 아네모네》
다양한 생김새로 화려함을 뽐내는 아네모네!
하지만 아름다운 생김새와 달리 슬픈 사연이 가득하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
다른 꽃들과 달리 한참이나 이어지는 슬픈 사연들이 어쩐지 찜찜하게 느껴진 탓이다. 하필이면 13이란 숫자가 불길함을 의미한다는 낭설까지 뇌리를 스쳤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데릭은 애써 시야를 흐렸다. 그리고는 슬픈 이야기들을 모조리 건너뛰어 버렸다.
그러다 마침내 짤막한 꽃말이 눈에 들어왔다.
꽃말 : 배신, 속절없는 사랑
“……!”
─툭.
프리트 공작은 충격으로 책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도돌이가, 도돌이가 그에게 이럴 수는 없었다.
* * *
공작성 원예사 조쉬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애써 키운 아네모네들에 별안간 강제 퇴거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이고, 피 같은 내 새끼들…….”
“이쪽으로 옮기지. 하나, 둘.”
“조심, 조심하십시오! 뿌리를 다치면 안 된단 말입니다!”
토요일 아침부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예고도 없이 온실로 들이닥친 하인들이 그가 힘겹게 일군 꽃들을 모조리 파헤쳐 수레로 옮겨 실었다.
모종삽을 든 조쉬가 헐레벌떡 달려들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아니, 각하께서 말 못 하는 꽃들에 무슨 앙심이라도 품으셨단 말입니까?”
“각하의 명령이십니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그러니 제발…….”
“각하의 명령을 어길 순 없습니다.”
“아이고, 내 새끼들!”
지난 몇 년간 아네모네가 장식했던 구역은 순식간에 휑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란 튤립부터 시작하여 아스틸베, 금잔화, 알리움 등등, 다른 많은 꽃도 퇴거 대상이 되었다.
“이 가엾은 꽃들은 전부 어디로 가란 말씀이십니까? 각하께서도 너무하시지!”
“너무 슬퍼 마시게. 버리는 게 아니라 거처를 옮기는 거라지 않나.”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내쫓으시면…… 흑.”
“어허, 사람 참.”
정원사 닉이 조쉬를 위로했다. 정성으로 키운 꽃들을 하루아침에 잃는 심정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식처럼 키웠다 한들, 성 주인의 명령을 거역할 순 없었다.
이윽고 엉망이 된 온실에 프리트 공작이 나타났다.
“각하.”
“인사는 되었다.”
그는 한바탕 갈아엎은 화단을 둘러보며 살벌하게 읊조렸다.
“하나도 남김없이 처리했겠지?”
“예. 전부 수레에 실었습니다.”
“저것들이 공작성에 뿌리내리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할 것이다.”
“아, 아이고……!”
─털썩.
절망한 조쉬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프리트 공작에게 다가갔다. 흙투성이가 된 장갑 때문에 바짓가랑이를 붙잡지도 못하고 땅만 더듬는 손끝이 참으로 허망했다.
“각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
“혹여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 꽃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조쉬는 무려 20년째 공작성의 온실을 담당하고 있었다. 모종을 주문하는 것부터 분갈이, 심지어는 인공수정까지. 이 온실에서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그간 프리트 공작이 온실에 무관심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멀쩡한 장미들을 두고 화훼 상인에게 루비 로즈를 대량으로 주문한 사건도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다짜고짜 꽃들을 뽑아내라니?
조쉬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하지만 프리트 공작은 서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보았다.
“꽃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펴, 평생 온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것들이 무슨 죄를 짓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이 책을 모르진 않겠지.”
데릭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꺼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식물도감 1001>. 원예사인 조쉬에겐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이미 수백 번도 더 읽은 책입니다. 그런데 이걸 왜…….”
“그렇다면 잘 알겠군.”
“……?”
“저것들의 꽃말을 말이야.”
프리트 공작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노란 튤립,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아스틸베, 기약 없는 사랑. 금잔화, 이별의 슬픔. 알리움, 멀어지는 마음.”
“……!”
“이 끔찍한 걸 내 입으로 더 읊어야겠나?”
조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저 꽃말이 어쨌다는 거지?’
꽃이란 건 단순히 꽃말을 즐기기 위해 키우는 식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프리트 공작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나는 저렇게 잔인하고, 부정적이며, 극악무도한 꽃말을 지닌 꽃을 키울 생각이 없다.”
“…….”
“그러니 저 악랄한 것들을 전부 뿌리 뽑는 수밖에.”
“하지만-.”
“각하!”
그때,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와 함께 보좌관 루카스가 등장했다.
“헤엑, 주문하신 모종들이 도착했습니다. 후,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한데 어디로 놓을까요?”
“원예사와 상의하는 게 빠를 것 같군.”
“세, 세상에……!”
끝없는 수레 행렬을 목격한 조쉬가 입을 떡 벌렸다.
공작성 온실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모종이 물 밀 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맨드라미부터 패랭이꽃, 버베나까지. 생육 환경이며 개화 시기, 생김새가 각기 다른 꽃들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오래전부터 탐났으나 심을 자리가 없어 단념해야 했던 꽃들이다.
“빈자리에 대충 심으면 될 것이다.”
“이 많은 걸 어떻게……!”
“키우는 건 알아서 잘하겠지. 필요한 게 있다면 루카스를 통해 전달하도록.”
“아아……!”
조쉬는 떨리는 손으로 모종들을 쓸었다.
아, 이 손끝에 퍼지는 충만한 생명력! 원예사의 피가 뜨겁게 들끓었다. 당장이라도 저 것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내어 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조쉬는 단숨에 표정을 싹 바꿨다.
“맡겨만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 당장 작업을 시작해도 될까요?”
“편할 대로.”
“감사합니다!”
떨어진 모종삽을 다시 주워든 손이 야무졌다.
데릭은 폭주하는 원예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리를 떴다.
‘금방 끝나겠군.’
공작성 온실이 충만한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찰 날도 머지않은 듯했다.
* * *
공작성에서 출발한 수레는 제국 전역으로 흩어졌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생일 무도회에 참석했던 가문들이었다. 그러나 케벨슨 백작가로 향한 수레에는 꽃 대신 귀한 식재료가 가득 실려 있었다.
다음으로 향한 것은 황실이었다.
“황녀 저하, 프리트 공작가에서 꽃을 보내왔습니다.”
“프리트 공작이?”
침대에 앉아 수를 놓던 다이안 황녀가 급히 일어났다. 수틀과 바늘이 엉망으로 바닥을 뒹굴었으나, 그건 안중에도 없었다.
“세상에!”
문밖으로 나선 황녀는 절로 입을 틀어막았다.
커다란 수레에 가득 실린 꽃들이 하나같이 탐스러웠다. 누군가의 화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아직 들어오지도 못한 수레들도 많다고 합니다.”
“참…… 많이도 보냈군. 융통성이라곤 없는 사내야.”
흉을 보는 목소리와 달리 입꼬리가 기분 좋게 호선을 그렸다.
‘그렇게나 뻣뻣하게 굴더니. 이젠 제법 여자 마음을 훔칠 줄도 안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최근 프리트 공작의 변화는 매우 기꺼웠다. 새카만 목석같던 과거에 비하면 아주 장족의 발전이 아니던가.
사실 황녀는 데릭을 괘씸하게 여기던 중이었다. 생전 안 열던 생일 무도회를 개최할 생각이었으면서, 미리 선물까지 준비한 그녀에겐 한마디 언질도 않았기 때문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순방 일정을 취소했을 것 아닌가?
그렇게 무심한 사내가 ‘자발적’으로 보낸 첫 선물이 무려 꽃이라니. 생각보다 로맨틱한 구석이 있었다.
“저하의 정원으로 옮겨 심으라 이를까요?”
“아니, 그럴 수야 있나.”
“그럼 이 많은 꽃을 어떻게…….”
“마침 방을 단장하려던 참인데 잘되었다.”
황녀는 그 많은 꽃을 전부 방으로 들였다. 그리곤 가장 먼저 황성 마법사를 호출했다.
“저하,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드디어 왔군.”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
황녀는 흐뭇한 얼굴로 방을 둘러보았다.
“아, 내가 꽃 선물을 받았는데 말이야. 오래도록 놓고 볼 수 있으면 좋겠어. 어떻게 방법이 없겠나?”
“상태를 보존하신다는 겁니까?”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꽃은 너무 빨리 시들어 버리니까. 가능한 원형을 유지했으면 하는데.”
“마력석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그 정도는 제 능력으로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잘되었군.”
황성 마법사는 곧바로 꽃들을 향해 주문을 읊조렸다. 그러자 일반인의 눈엔 보이지 않는 작은 반짝이들이 꽃잎 위로 살포시 내려앉기 시작했다. 고위 마법사만 가능한 상급 보존 마법이었다.
황녀는 마법사와 꽃을 번갈아 보며 미세한 차이를 찾아내고자 애썼다.
“끝났습니다.”
“벌써? 별 변화가 없어 보이는데.”
“원래 보존 마법이라는 것은 겉으로 티가 나지 않습니다.”
“뭐, 자네 말이 그렇다면야. 믿어 보도록 하지.”
“아마 이틀만 지나도 충분히 효과를 알아보실 겁니다.”
“수고 많았네.”
“그럼 저는 이만.”
황녀는 곧이어 손재주가 좋은 하녀를 여럿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일부 꽃을 화분에 옮겨 심고, 나머지는 줄기만 잘라 생화 장식을 만들게 했다.
황녀의 침실은 순식간에 꽃으로 가득 찼다.
“이걸 어디에 거는 게 좋을까?”
노란 튤립으로 화관을 만들어 쓴 황녀가 같은 색의 금잔화 리스를 들고 서성였다. 침대는 이미 휘장 대신 아스틸베를 거꾸로 매달아 둘러놓은 상태였다. 그러다 한쪽 벽면의 헌팅 트로피까지 시선이 닿았다.
“하나 더 만들어 사슴뿔에 양쪽으로 걸어 놓을까?”
“탁월한 센스이십니다.”
“좋아. 그렇다면 금잔화 리스를 하나 더-.”
─똑똑.
“황녀 저하. 카타리나 왕녀가 뵙기를 청합니다.”
“……그 여자가?”
다이안 황녀가 짜증스러운 손길로 리스를 내려놓았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 달갑지 않은 기색이다.
‘무슨 꿍꿍이지?’
두 사람이 서로의 침실을 오갈 만큼 친밀한 관계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황녀에게 카타리나란, 멍청한 패트릭과 결혼할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저하? 다음에 다시 오라 전할까요?”
“…….”
하지만 리스를 내려다보던 황녀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럴 필요 없다. 지금 들여보내라.”
변두리 왕국 출신 왕녀와 크리앙트 제국 황녀의 차이를 제대로 알려 줄 기회 아닌가. 제까짓 게 황후의 관을 쓰고 으스대기 전에, 미리 기강을 잡아 놓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곧이어 잔뜩 주눅 든 왕녀가 수수한 옷차림으로 등장했다.
“황녀 저하를 뵙습니다.”
“그래, 왕녀가 여기까진 어쩐 일로?”
“마침 주말이지 않습니까? 여인들끼리 다, 담소라도 나눌까 하여.”
“담소? 나랑 왕녀가?”
“…….”
다이안 황녀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아아, 뻔하지. 왕녀의 아비든 오라비든 누군가가 닦달한 게 분명하다. 소심하게 굴지 말고 황가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라. 뭐 이런 내용이었겠지.
“그렇다면야, 뭐. 왕녀가 하고 싶은 말을 해 봐.”
“……저, 저어.”
“어서 해 보래도?”
왕녀는 공통의 대화 주제를 찾기 위해 부산스럽게 눈을 굴렸다. 그러다가 꽃향기를 따라 황녀의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아! 황녀 저하께도 꼬, 꽃이 왔군요.”
“나에게‘도’? 그게 무슨 말이지?”
“프, 프리트 공작가에서 황성에 꽃을 보냈다 들었는데…… 아닌가요?”
“…….”
황녀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나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었어?’
황성으로 보낸 거라면 눈앞의 왕녀 역시 받았을 터. 갑자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이 치밀었다.
“왕녀가 아는 것이 맞다.”
“아. 다행입니다. 제가 혹시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그래서, 왕녀는 어찌할 셈이지?”
“네?”
“꽃들 말이야.”
“아! 저에게는 오지 않았습니다. 저, 저는 아직, 황가의 일원도 아닌걸요.”
“……그래?”
다이안 황녀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온화해졌다. 황가의 일원에게만 보냈다면, 그의 꽃을 받은 여인은 황녀뿐일 테니까.
“앗, 그런데 꽃이 전부-.”
“화사하고 예쁘지? 방 전체를 장식하려고 해. 그런데 너무 많아서 탈이야.”
“그, 그게 아니라.”
“무슨 할 말이라도?”
한참이나 꽃을 보며 우물쭈물하던 왕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제가 아직 제국의 문화에 익숙지가 않아서……. 화, 확실한 것도 아닌걸요.”
“무엇이?”
“그게…….”
황녀는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참으로 답답하군. 말을 꺼냈으면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아닌가? 왕녀가 나를 놀리려는 것인가?”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말을 해 봐.”
“어, 이성에게 선물하기엔, 좀, 어울리지 않는 꽃 같아서요!”
노란 튤립 화관을 만지작거리던 황녀의 손이 우뚝 멈췄다. 아무래도 왕녀의 말이 거슬린 눈치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면박을 당한 왕녀는 차마 멈출 수가 없었다.
“저희 왕국에서는 전부 슬픈 꽃말을 가진 꽃들이라……. 물론 제, 제국에선 다르겠지만요.”
“…….”
“아,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별안간 황녀가 시종에게 눈짓했다. 서늘하게 굳은 얼굴 위로 마치 살얼음이 낀 듯했다.
“갑자기 피곤하군. 왕녀는 이만 물러갔으면 해.”
“……아.”
“다음을 기약하지.”
“네, 네에.”
억지로 끌려가듯 물러나는 왕녀가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황녀는 매몰차게 문을 닫았다. 방을 가득 채운 꽃들이 어쩐지 이전만큼 예뻐 보이지가 않았다.
“전부 갖다 버려라.”
“예?”
“뭣들 하고 있어?”
“명에 따르겠습니다!”
노란 튤립을 엮어 만든 화관이 아무렇게나 내던져졌다. 목이 잘린 꽃송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
이를 응시하던 황녀가 휙, 등을 돌리곤 밖으로 나갔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불쾌했다.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