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도돌이가 보내는 신호 上
클로드와 에밀리아가 사라진 후. 테이블엔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오드리는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었다. 에밀리아가 클로드의 팔을 쓸며 얼른 가자고 재촉하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나는, 나는…… 손끝만 스쳐도 좋아서, 그래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오드리는 손금을 본다는 핑계로 은근슬쩍 손을 잡아 본 게 전부였다. 아니, 정확히는 만진 것이었지.
그런데 에밀리아는 모든 게 쉽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 것도, 기대는 것도, 심지어는 그의 팔을 다정하게 쓰다듬는 것도.
‘게임이 안 되잖아…….’
오드리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잠시나마 질투 작전이 성공했다고 착각한 스스로가 참 우습게 느껴졌다.
한편, 그러는 동안 이미 눈이 맞은 핫가이들과 두 여자는 은근한 신호를 주고받았다.
“저희 식사도 끝났으니 이제 둘씩 찢어지는 게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야. 서로를 알아 가려면 둘만의 로맨틱한 시간의 필요한 법이지, 베이비.”
“이제야 비로소 둘만의 파라다이스로 떠나는 거라구.”
“저기, 괜찮으세요?”
“어어……? 아, 네.”
멍하게 앉아 있던 오드리는 얼떨결에 동조하고 말았다.
그 뒤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자기들끼리 미리 입이라도 맞췄는지, 여자들이 남자 쪽 소지품을 고르는 것으로 의견이 모인 것이다.
“먼저 하나 골라 보세요.”
그 첫 번째 주자는 오드리였다. 한가로이 앉아 물건이나 고를 때가 아니었으나, 그래도 살펴는 보았다.
턱받이 2개, 도토리 모양 브로치 하나, 그리고 유난히 그녀의 앞에 놓인 단도 한 자루.
‘무슨 틀린 그림 찾기도 아니고!’
물건 위로 주인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이미 답이 정해진 것 같다면 착각일까?
“어서 골라 보세요.”
“…….”
자연스럽게 도토리 모양의 브로치로 향하던 손이 멈칫했다.
‘아차! 내가 오라버니를 선택하면 안 되지?’
이러면 그녀의 오라비를 미팅에 데려온 의미가 없지 않은가. 아놀드는 서운한 기색이었지만, 이게 다 그를 위한 일이었다.
이번엔 턱받이가 눈에 띄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뜨거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턱받이는 안 돼, 안 돼요!’
‘제발 그 옆으로 가 주세요…….’
핫가이들에겐 이미 임자가 있던 것이다.
“…….”
오드리의 시선은 돌고 돌아 눈앞에 놓인 단도로 돌아왔다. 선택지가 이것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그러자 애가 타는 건 프리트 공작이었다.
‘그래, 그거다! 집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만 하면 돼.’
그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도돌이의 손끝만 응시했다. 그 물건이 바로 제 것이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도돌이의 손끝이 단도를 빗겨 나갈라치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시선이 필요 이상으로 무서웠다.
“저는.”
“…….”
“……이, 이거요.”
결국, 오드리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턱받이를 고르자니 왠지 몹쓸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
이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데릭은 테이블 아래로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것은 운명이다!’
어쩌면 수많은 물건 중 딱 그의 것을 골랐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이건 운명이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되질 않았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날 때부터 서로를 사랑할 운명이었나 보다.
* * *
“오늘 즐거웠어. 이제 각자 운명의 나침반을 따라 헤어질 시간이야!”
“도토리, 오라비랑 같이 가지 않을래?”
“……그게 무슨 소리예요? 로지 님이랑 오붓하게 놀다 오세요.”
“넷이서 함께 놀면 더 재미있을 거야. 응?”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할 것 같군.”
프리트 공작은 곧바로 선을 그었다. 미팅 내내 유독 아놀드에게만 관대했던 사람답지 않았다.
“체스는 둘이서 하는 게임이니 말이야. 우린 체스를 둘 거거든.”
“하지만, 팀을 나누면-”
“재미도 반감되겠지.”
“…….”
아놀드의 억지는 프리트 공작 선에서 말끔히 정리되었다.
“타지.”
“……네.”
오드리는 제 오라비에게 마차를 양보하고 대신 직장 상사의 마차에 올랐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
“……!”
─사사삭.
무심결에 마주 앉으려던 두 사람은 서로의 무릎이 닿자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프리트 공작은 창문에, 오드리는 문 쪽에 찰싹 붙은 꼴이 마치 같은 극을 갖다 댄 자석 같았다.
“……자리를, 바꾸지.”
“저, 저, 저는 괘, 괜찮은데요.”
데릭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만약 도돌이가 문밖으로 데굴데굴 굴러간다면? 혹여 달리는 마차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온몸이, 산산조각날 것이다.”
“히익!”
그러나 잔뜩 겁에 질린 오드리는 마차 구석을 파고들었다.
‘아, 아니! 분명 계약했는데……!’
이게 무슨 난데없는 살해 협박이란 말인가? 고작 자리 하나 안 바꿔 준다고 온몸을 산산조각내겠다니!
참으로 변덕스러운 남자다.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
‘혹시…… 다른 사람과 짝이 되고 싶었던 건가?’
단도를 선택하자마자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응시하던 시뻘건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래. 그건 분명 원한이 가득한 눈이었지.
“…….”
오드리는 잠자코 일어나 자리를 바꿨다. 괜히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목줄이 있는 사냥개는 그냥 사납게 생긴 개에 불과하단 말 취소야.’
사냥개는 그저 사냥개에 불과한 것을. 오드리는 저가 부적처럼 믿은 ‘수석 마법사직 계약서’가 사실은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사냥개에게 물리기 전에 얼른 집에 가는 수밖에.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나.”
“아니요!”
“…….”
오드리는 단박에 거절했다. 하지만 자기가 너무 무례했나 싶어 구구절절 변명을 덧붙었다.
“제, 제가 통금이 있어서요.”
“몇 시?”
“어, 음, 아홉 시요?”
“지금은 일곱 시 반이군.”
“그런데 오늘은 왠지 여덟 시일 것 같아서요!”
“그렇군.”
데릭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통금 시간이란 건 이렇게 들쭉날쭉 바뀌는 것 아니던가. 괜한 욕심으로 도돌이를 곤란하게 만들기는 싫었다.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일 뿐이니까.
“케벨슨 백작가로 가지.”
“예. 출발하겠습니다.”
마차가 출발한 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밀폐된 마차에 갇혀 있으려니 숨소리 하나까지 어색하게 느껴진 탓이다. 뻣뻣하게 굳은 채로 텅 빈 앞자리만 응시하는 둘의 모습이 마치 목각인형 같았다.
‘어찌 말을 꺼낸다?’
그러나 데릭은 속으로 말을 고르는 중이었다. 어제 도돌이의 미팅 소식을 듣고 다짐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가 죄인이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도돌이가 그의 진심을 알아줄 때까지 바라만 보다간, 멍청하게 그녀를 놓칠 것 같단 불안감이 들었다.
‘내 눈에도 이리 예쁘고 깜찍한데, 하물며 남들 눈에도 똑같겠지.’
눈은 데릭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더 끔찍한 사실은, 이번 미팅이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데릭은 자신이 미련했음을 인정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이라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을.’
그는 도돌이와 팬터마임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그의 진심을 알아줄 때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때론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그대는, 절대로 쓸모없는 식충이가 아니다.”
“……네?”
“굼벵이도, 베짱이도 아니다.”
오드리는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오랜만에 듣는 곤충 타령이 생뚱맞은 까닭이다.
프리트 공작은 잔뜩 굳은 얼굴로 고집스럽게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꼭 사과하고 싶었다. 그대를 알아보지 못하고 말로 상처 준 것.”
“…….”
“마음을 아프게 한 것.”
“어, 마음이 막,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았는데요…….”
“일부러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그대의 입장이 되어 보니 알겠더군.”
프리트 공작이 씁쓸하게 웃었다.
“좋아하는 이에게 외면받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네에?”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람?
오드리는 자기가 뭘 잘못 들었나 싶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과 같기는 한데, 어째 사과의 뉘앙스가 이상했다.
“나는 하루에도 수천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그대도 그랬겠지.”
“……아니, 저기.”
“그 심정을 알기에 차마 억지를 부리지 못해. 그저 기다리겠다는 말밖엔 할 수가 없다.”
연두색 눈동자가 어색하게 상대방을 곁눈질했다. 어쩐지 불안하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
“처음 시작은 그대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내가 그대를 더 많이 좋아한다는 것.”
“……!”
“그러니 기다리겠다. 우리가 함께 편지를 읽으며 웃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아, 오드리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 * *
난데없는 폭탄 고백 이후, 마차는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
지진이라도 난 듯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엔 충격과 공포가 가득했다. 오드리는 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대체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협박 편지라더니,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더니!’
프리트 공작이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이유가 이제야 납득갔다.
고백으로 단단히 혼내 주기 위함인 것이다!
‘어떡하지?’
결과적으로 오드리는 엉뚱한 남자에게 고백한 꼴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아니라고, 내가 미쳤냐고,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구구절절 쏟아내고 싶었지만…….
‘그러다 괘씸죄라도 더해지면 어떡해?’
감히 공작에게 레터피싱을 시도한 죄로 목이 나가떨어진대도 할 말이 없었다.
오드리가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 속앓이를 하는 동안, 마차는 케벨슨 백작가에 당도했다.
─끼익.
“잠시.”
“……?”
문이 열리자마자 프리트 공작이 난데없는 새치기를 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그는 구둣발로 바닥을 한 번 다졌다. 혹시라도 도돌이의 통밀빵 같은 발에 돌이라도 박히면 안 되니까.
“되었다. 이제 내려도 된다.”
그리고는 마차에서 내리려는 그녀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오드리가 막 마차에서 내리려던 찰나, 데릭은 약이라도 올리듯 손을 무르고 말았다.
‘이런 음흉한 변태 같으니!’
뒤늦게 아차 싶은 것이다. 마치 도돌이의 손을 잡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지 않은가?
그는 대신 구부정한 팔을 내밀었다. 마치 전서구라도 맞이하는 모양새였다.
“…….”
오드리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전완근을 붙잡고서 내렸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잠깐.”
“네에?”
“…….”
프리트 공작은 그녀를 먼저 붙잡아 놓고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어스름한 여름밤. 당장이라도 비가 내릴 듯 습한 공기 사이로 마차 등의 불빛이 뿌옇게 번졌다. 그 아래에 선 남녀는 마치 헤어지기 싫은 연인처럼 애틋해 보였다.
데릭은 차라리 시원하게 비라도 내렸으면 했다. 그렇다면 길이 위험하단 핑계로 조금 더 같이 있을 수 있을 테니.
“저, 저기…….”
“어어!”
그러다 불시에 돌풍이 불어닥쳤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마부는 문고리를 놓쳐 버렸고, 활짝 열려 있던 마차 문이 오드리의 등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위험하다!”
“꺄악!”
데릭은 그녀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채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쿵!
단단한 마차 문은 데릭의 손등에 부딪힌 뒤, 그 반동으로 다시 튕겨 나갔다.
“두, 두 분 다 괜찮으십-, 아이코! 제가 눈치도 없이!”
“……!”
“……!”
그러나 데릭은 아픈 줄도 모르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지레 겁을 먹고 머리통을 감싼 도돌이의 손. 그 위로 한 박자 늦게 포개진 커다란 두 손.
“아.”
그의 모든 신경은 제 손바닥 아래, 잔뜩 옹송그린 단풍잎 같은 주먹에 쏠려 있었다.
* * *
오드리는 밤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처음 시작은 그대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내가 그대를 더 많이 좋아한다는 것.’
‘그러니 기다리겠다. 우리가 함께 편지를 읽으며 웃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자꾸만 프리트 공작의 난데없는 고백이 떠오른 탓이다. 아무런 전조증상도 없이 불쑥 비집고 들어온 고백은 다소 의외였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너무 귀여워도 문제라니까…….”
오드리는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프리트 공작의 마음을 영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었다. 그녀가 이렇게나 귀여운데, 과연 어떤 남자가 안 반하고 배기겠는가?
‘위험하다!’
참 웃긴 사람 아닌가? 위험하기는 자기가 제일 위험하면서.
그뿐만이 아니다.
“……언제는 굶어 죽고 싶냐고 하더니.”
다리가 부러지고 싶냐, 온몸이 산산조각나고 싶냐, 심지어는 눈앞에서 장검을 뽑아 들고 위협한 전적도 있었다. 나무 수레 같은 것을 준비하여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딜 봐서 날 좋아한다는 거야?”
아무리 봐도 호감 있는 상대에게 할 법한 행동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알고 나니 괜스레 다르게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밤을 꼴딱 새워 케벨슨 백작가 앞을 지키던 프리트 공작. 아놀드의 환영 파티. 그녀를 마중이라도 나온 듯 새벽부터 공작성 앞을 지키던 모습. 유난히 그녀를 응시하던 시선. 고작 다섯 걸음을 위해 대기시킨 마차. 줄줄 쏟아내던 본인의 인적사항. 너무도 쉽게 허락된 비밀 창고. 그녀가 마력 보유자임을 알고도 기꺼이 묻어 준 이유. 그리고, 득달같이 쫓아온 미팅.
신종 괴롭힘인 줄로만 알았던 것들은 다시 보니 ‘구애’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드리에겐 여전히 클로드뿐이고, 애초에 프리트 공작과 만날 생각 따윈 없었으니까.
“에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야…….”
이 모든 건 그저 수많은 우연이 만들어 낸 사고였다. 그러나 일이 너무 커진 탓에, 차마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하필 프리트 공작이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야겠지?”
하지만 본인이 착각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 기분이 어떨까? 이미 오드리에게 고백은 해 버린 상황이니,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아주 민망할 것이다. 게다가 공작을 속인 것이 괘씸하다며 칼이라도 빼 들면?
“…….”
아무래도 솔직히 말하는 건 서로에게 좋은 해결 방법이 아닌 듯하다.
아, 그렇다면 마음이 바뀌었다고 그를 거절하는 건 어떨까?
“……그럴 수 있나?”
그의 마음을 안 받아 줬다는 이유로 앙심이라도 품으면 곤란하다. 일단 오드리는 그에게 약점이 잡힌 상태이고, 가족이며 친구며 전부 공작성과 인연이 깊다. 그들에게 불이익이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나?
“…….”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이대로 얌전히 프리트 공작의 포로가 되거나, 요절하여 땅에 묻히거나 둘 중 하나밖에는. 죽지 않고서는 그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없어 보였다.
“내가 미쳤지. 왜 안 쓰던 편지를 쓰겠다고 나서서는……!”
아,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그놈의 편지를 당장 찢어 버릴 텐데!
차라리 프리트 공작이 스스로 포기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오드리가 귀여워도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 * *
“각하! 괜찮으십니까?”
“소란 떨 것 없다.”
“하지만!”
“별 유난을 다 떠는군.”
데릭은 멍한 얼굴로 주치의에게 냉찜질을 받았다. 손등엔 감각이 없어졌지만, 손바닥엔 여전히 단풍잎 같은 손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리도 손이 작을 수가 있지?’
다친 건 손등인데 엉뚱한 귀가 터질 듯이 붉었다. 사람들이 물러난 뒤에도 데릭은 제 가슴께를 움켜쥔 채 한참이나 방 안을 서성거렸다.
불쑥 가까워진 거리. 고작 한 뼘을 사이에 두고 뒤섞인 두 사람의 향기.
‘어쩌면 그리도 자기 같은 향기가 날까.’
폐부를 간질이던 복숭아 향이 도돌이의 머리 색만큼이나 달았다. 사실은 폐가 아닌 심장으로 잘못 들어온 듯했지만, 괜찮다. 도돌이가 그의 심장으로 들어왔다면 올바로 찾아온 것이니.
그때, 상념을 방해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저, 각하. 길버트입니다.”
마차 문을 놓쳐 하마터면 도돌이를 다치게 할 뻔한 마부였다.
“무슨 일이지?”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감히 각하의 옥체에 상해를!”
“되었다.”
평소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주의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예외였다. 데릭은 따로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손등을 내어 주고 손을 취했으니.”
“예?”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만 나가 봐라.”
“각하의 자비에 감, 감사드립니다!”
이상하게 도돌이와 관련된 일이면 데릭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한없이 자비로워지기도 하고, 반대로 한없이 무자비해지기도 했다. 마치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춘기 아이처럼.
“하아…….”
데릭은 마른세수를 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귓전을 때리는 심장 박동이 여전히 소란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잘한 편 아닌가.’
오늘은 꽤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연적이 될 뻔한 야만인 둘을 물리쳤으며, 유익한 질문으로 서로를 알아 가는 아주 뜻깊은 하루였지 않나.
화룡점정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그의 매너였다.
‘역시 공부한 보람이 있어.’
도돌이에게 건넸던 메뉴판. 레스토랑을 나설 때 슬쩍 잡아 줬던 문. 창가 쪽을 양보하는 다정함. 마차에서 먼저 내려 지면을 고르는 꼼꼼함.
‘그런데 어쩐다. 손을…… 손을 잡아 버렸으니!’
하지만 엉겁결에 도돌이를 감싸 안 듯 끌어당긴 장면이 떠오르자, 데릭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그는 불안하게 침대 주변을 서성거렸다.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았다.
‘감히, 감히 도돌이의 손을!’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그가 얼마나 저질스러운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벌써 손을 잡다니! 진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혹시 이런 그의 모습이 욕정에 눈이 먼 짐승처럼 보이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본능에 충실한 손은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딱 그녀의 주먹 크기만큼이었다.
‘이 정도였지. 아주 작고 보드라운-, 젠장!’
이 더러운 욕구 같으니라고!
그는 쑥대밭이 된 제 마음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미약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도돌이가 오해하면 어떡하지?’
오늘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연애 놀음에 능숙한 사내지 않은가.
농익은 매너. 물 흐르듯 손을 포개는, 아주 저질스러운 능숙함! 아. 세기의 난봉꾼이라 오해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나에게 여자란 도돌이뿐인데…… 이걸 어찌한다?’
데릭은 절망했다. 바람둥이를 좋아하는 여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왜 그는 하나를 잘 해내면 다른 하나를 꼭 망치고 마는 것일까? 그녀 앞에만 서면 마치 고장 난 꼭두각시 인형처럼 삐거덕거리는 스스로가 참으로 답답했다.
‘안 되겠군.’
별안간 핏빛 눈동자가 결연한 빛을 띠었다.
아무래도 도돌이에게 이실직고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스물다섯이 먹도록 순결한 몸이며, 세상에 여자라곤 오직 그녀뿐이라고.
이를 증명할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 * *
대신관 에토스는 귀한 손님의 방문에 버선발로 마중 나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데 신전까진 어쩐 일로……?”
“신전에서 ‘순결보증서’라는 걸 발급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맞는가?”
“예에. 신관이 되기 전에 준비하는 필수 서류 중 하나이지요.”
“그것이 필요하다.”
“……!”
에토스는 난감했다.
무려 7년간 전쟁터를 휘저으며 살상을 자행한 남자가 신관이 되겠다니? 신은 어떤 이유에서도 살인을 허용하지 않았다.
“저, 공작님. 아시다시피 신관이 되기 위해선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것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살상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신의 뜻을 받들고자 하시는 것 아닙니까?”
데릭은 끔찍한 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
“나는 ‘순결보증서’만 있으면 된다.”
신관이 웬 말인가? 평생 깊은 산속 신전에 처박혀 도돌이와 생이별을 하라고? 딱히 신성모독을 할 생각은 없었으나, 데릭은 그 정도로 신을 추종하진 않았다.
“아, 하하. 그러시군요. 제가 말도 안 되는 오해를.”
“…….”
“그러실 리가 없는데. 어휴. 이쪽으로 따라오시지요!”
대신관은 묵은 체증이 싹 가라앉은 얼굴로 그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 * *
잠시 후.
검사실을 나서는 데릭의 얼굴이 영 불쾌했다.
“많이 생소하셨을 텐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걸 받아 가시면 됩니다.”
“…….”
“그럼 살펴 가십시오.”
25년을 살면서 이토록 찝찝하고 기분 나쁜 경험은 처음이었다. 다신 겪고 싶지 않은 악몽 같았달까.
그러나 데릭은 오로지 도돌이를 위해서라는 일념 하나로 그 시간을 견뎌 냈다. 신전의 직인이 찍힌 서류 봉투를 들고 멀어지는 뒷모습이 어쩐지 허탈해 보였다.
“각하. 검사는 다 끝나셨습니까?”
“…….”
“참으로 신기합니다. 순결 여부를 확인하여 확인증을 받을 수 있다니요!”
루카스는 호들갑을 떨며 주군을 맞이했다.
순결보증서라니! 막혔던 혼삿길이 다시금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아차, 그런데 순결 여부는 도대체 어떻게 판단하는 건가요?”
“…….”
데릭의 얼굴이 싸해졌다.
눈치도 없이 조잘대던 루카스는 여전히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게 그렇게도 궁금한가.”
“예! 아무래도 생소한-”
“그럼 너도 한번 해 보면 되겠군.”
“……아닙니다! 실언이었습니다!”
루카스가 뒤늦게 눈치를 챙겼다. 주군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썩 유쾌한 과정은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내가 직접 해 보지 뭐.’
보좌관은 다음을 기약하며 ‘순결보증서’라는 이름의 서류를 몇 번이고 되새겼다.
그렇게 온갖 우여곡절이 담긴 데릭의 ‘순결보증서’는 마치 전시되듯 프리트 공작의 책상 위를 장식했다. 오드리의 자리에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였다.
* * *
“경도 들지 그러나.”
“…….”
데릭은 무표정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또 속았군.’
크리앙트 제국의 황가에는 거짓말쟁이의 피가 흐르는 것이 분명하다.
국경 지대의 분쟁 때문에 상의할 일이 있다더니. 정작 다이안 황녀가 준비한 것은 대규모 티파티였다.
“이렇게 주말에 얼굴을 보니 더 좋은 것 같군.”
“저희도 너무 영광입니다, 저하.”
“앞으로 더 자주 뵈면 얼마나 좋을까요?”
“…….”
황녀의 추종자들은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듣기 좋은 소리만 조잘댔다.
그러나 데릭은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자기들끼리 참새처럼 입방아나 찧을 것이지, 굳이 그까지 부르는 심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끔찍한 개미 떼가 따로 없군.’
테이블엔 초대받은 이들이 우글우글 앉아 있었다. 그런데 다들 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인형처럼 웃고 있는 광경이 참으로 기괴했다.
심지어 참석자 중 남자는 데릭밖에 없었다. 마치 연회장의 조각상처럼 전시 거리가 된 기분이라 몹시도 불쾌했다.
“그나저나 황녀 저하,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우십니다.”
“저는 연보라색이 이리도 잘 어울리시는 분은 또 처음 봅니다. 평소 즐겨 입으시던 검은색 옷들도 아름다웠지만요.”
“너무 띄워 주는군.”
“띄우다니요, 저희는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마치 수백 송이의 꽃이 개화한 듯하여 보기만 해도 절로 황홀해지는걸요.”
“…….”
아주 놀고들 있다. 도대체 남의 옷차림에 왜 저렇게 관심들이 많단 말인가?
“저하, 저도 같은 색의 드레스를 맞춰도 될까요?”
“허락을 구할 게 뭐 있나. 본인이 원하면 입는 게지.”
“아아, 역시…… 자비로우십니다!”
그들은 마치 하루 할당량이라도 정해진 것처럼 아부를 떨어 댔다. 칭찬 한마디를 하면서도 황녀의 눈치를 살살 살피는 꼴이 참으로 우스웠다.
하지만 데릭은 한마디도 보태지 않고 꿋꿋하게 제 찻잔만 응시했다. 신전까지 들러 피곤한 마당에 얼른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그나저나 프리트 공작. 오늘 의상이 굉장히 독특하군.”
“……그렇습니까.”
“처음 보는 원단인 것 같은데.”
“재단사가 남쪽 왕국에서 들여온 것입니다.”
“호오, 남쪽 왕국? 멀리도 갔군. 특이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들어.”
“그렇습니까.”
황녀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최근 들어 프리트 공작의 옷차림이 과감해지고 있었다. 평소 즐겨 입던 검은색 옷은 사라지고, 파스텔톤이나 원색, 화려한 패턴과 같은 도전적인 옷차림을 즐겼다.
‘검은색 옷만 입으려니 아주 질린 참이었는데.’
덩달아 황녀의 옷차림도 과감해졌다. 프리트 공작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잘된 일이었다.
“이런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도 독특하고 좋을 것 같군.”
오늘은 열대 느낌이 물씬 나는 옷감 위로 프릴이 정신 사납게 달려 있었다. 저런 원단으로 드레스를 만들어 봤자 입을 일은 없겠지만, 그냥 한 벌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꾹 다문 입술은 어째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이안 황녀는 은근슬쩍 눈치를 줬다.
“다음 달에 있을 무도회에서 입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교역상을 보내십시오.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공작이 참으로 아끼는 원단인가 봐?”
“예. 이참에 한 벌 더 지을 생각입니다.”
“…….”
황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야속한 사내 같으니.’
제 옷 한 벌 지어 입을 원단은 있으면서. 빈말로라도 원단을 바치겠노라 약속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그다웠다.
주최자의 기분을 따라 티파티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해졌다. 참새처럼 조잘대던 이들 역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두 사람의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그렇군. 나도 교역상이나 보내 볼까.”
“그러십시오.”
“…….”
결국, 황녀는 굳은 얼굴로 말없이 차를 들이켰다.
그러는 동안 데릭은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제국의 황녀란 작자가 일개 공작의 재물을 탐내는 것이 괘씸했다.
‘저리도 탐욕스러워서야.’
공작이 황녀에게 넙죽 재물을 바치기 시작하면 당연히 그 밑의 귀족들은 반강제로 따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는 고위 귀족으로서 본보기가 될 참이었다.
그러나 황녀의 말을 듣고 보니 문득 낭만적인 계획 하나가 떠올랐다.
‘남은 원단으로 도돌이의 드레스나 한 벌 만들까.’
그와 같은 원단으로 만든 옷을 입은 도돌이라니…….
─쨍그랑!
“어머, 세상에!”
“공작!”
“…….”
고 깜찍한 장면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찻잔 손잡이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놀란 황녀가 다급하게 주치의를 불러오라 명했다. 하지만 데릭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시도 때도 없이 치솟는 폭력성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의 도돌이만 생각하면 자꾸만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껴안아 버리고 싶고, 말랑해 보이는 볼을 잔뜩 찌부러뜨린 채 쪽쪽 입을 맞추고 싶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충동이었다. 식사할 때만 쓰이는 줄 알았던 이 입술로 다른 일을 꿈꾸는 날이 올 줄이야.
‘이게 다 도돌이가 귀여운 탓이다.’
순식간에 귓바퀴로 뜨뜻한 열이 올랐다. 도돌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오늘도 저 혼자 도돌이를 앓느라 하루가 모자랐다.
“다행히 피가 나지 않아 크게 우려하실 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제대로 본 게 확실한가? 찻잔 손잡이가 산산조각났다. 그런데 파편 하나 박히지 않았다고?”
“……예.”
데릭은 아무렇지 않게 제 손을 한 번 털고 말았다. 하지만 황녀는 주치의가 물러난 이후에도 쉬이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당연히 파티가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그러다 분위기의 반전을 노린 추종자 하나가 새로운 제물을 찾아냈다.
“어머, 베볼리턴 영애! 이 귀한 걸 왜 안 드세요?”
“아, 그것이…….”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소녀였다.
황녀의 시선도 그쪽으로 쏠렸다.
“무슨 일이지?”
“글쎄, 베볼리턴 영애가 황녀 저하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쿠키에 손도 대지 않기에 권하던 참이었습니다.”
“아니……!”
“…….”
추종자의 제보대로 개인 접시에 놓인 쿠키는 하나도 줄지 않았다.
그걸 본 황녀의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질 않은데, 제 성의가 무시당한 것이 몹시도 불쾌한 눈치다.
“왜, 내가 영애의 쿠키에 독이라도 넣었을 것 같나?”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하. 정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준비한 쿠키가 영애의 입맛에 맞지 않나 보군. 주최자로서 세세히 살피지 못한 내 불찰이야. 그렇지?”
“…….”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소녀에겐 너무도 가혹한 상황이었다. 여기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그녀를 도와줄 사람 하나 없다니. 심지어는 그녀를 데리고 온 먼 친척마저도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곧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것이. 제가, 땅콩 알레르기가 있어서…….”
“어머.”
“알레르기요?”
“세상에.”
솔직한 고백과 동시에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은근히 곁눈질하는 시선이 따가웠다.
크리앙트 제국에선 음식 알레르기가 ‘편식쟁이나 걸리는 불명예스러운 병’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인가?”
“……네.”
하필이면 오늘 준비된 쿠키는 전부 땅콩을 주재료로 하는 것들이었다. 주최자인 황녀가 좋아했기 때문이다.
다이안 황녀는 방금 막 사정을 들은 것이 무색하게도 직접 쿠키 하나를 건넸다.
“하나만 먹어 보아라. 괜찮을 것이다.”
“예? 하, 하지만.”
“한 번 먹고 아프다고 아예 안 먹어 버리니 계속 낫질 않는 게야. 먹어버릇하면 몸도 적응할 것이다.”
“…….”
“이 맛있는 것을 평생 못 먹고 살 수야 있나. 어서 들래도?”
“…….”
황녀가 직접 건네는 쿠키를 거절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어느새 주위 사람들도 하나둘 동조하기 시작했다.
“맞아요. 오히려 한 번 크게 앓고 나면 면역이 생길지도 몰라요.”
“알레르기 정도는 충분히 정신력으로 이겨 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베볼리턴 영애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요. 이런 쿠키 하나쯤은 괜찮은걸요.”
“…….”
결국, 재촉하는 시선에 못 이겨 쿠키 하나를 삼켰다. 그제야 비로소 테이블 위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소녀는 독극물이라도 마신 듯 창백한 얼굴이었다.
“어떤가? 생각보다 괜찮지?”
“……으, 네에.”
“거보래도. 알레르기도 공포심이 만들어 낸 마음의 병일 뿐이야.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지.”
“…….”
“베볼리턴 영애, 얼른 저하께 감사 인사를 드리지 않고 뭐 하는 거예요? 황녀 저하 덕분에 알레르기를 이겨 냈잖아요.”
“화, 황녀 저하의 은혜에 감사……윽!”
그런데 그때,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소녀가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꺄악!”
“흐윽, 숨이……!”
“저, 저하! 제가 가서 황성 주치의를 불러올까요?”
찻잔과 찻주전자가 엉망으로 나뒹구는 난장판 속. 황녀는 숨이 넘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태연히 차를 따랐다.
“소란 떨 것 없다. 이것도 다 치료 과정이거늘.”
“…….”
“이 아이를 데려온 자가 누구지?”
“스테이시 팔든입니다.”
“그래. 자네가 이 아이를 집으로 좀 데려다주어야겠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의원에게 보이지 않아도 정말 괜찮을까요?”
“괜찮대도. 고작 이 정도로 사람이 죽진 않는다.”
“…….”
그러나 쇠로 긁듯 쌕쌕대는 숨소리가 영 심상치 않았다. 팔뚝부터 손등까지는 벌써 붉은 두드러기가 잔뜩 올라왔다.
‘아주 야만인들이 따로 없군.’
한껏 도돌이 생각에 빠져 있던 데릭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는 얼굴을 찌푸린 채 조용히 보좌관을 불러들였다.
“저들을 그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 제3 기사단의 몰리라는 자에게 데려가 응급처치를 받도록 해라.”
“예.”
“생명이 위독할 수 있으니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
“알겠습니다.”
알레르기를 겪어 보지도 않은 자들이 도대체 뭘 안다고 저렇게 한마디씩 거드는지. 그깟 쿠키 좀 안 먹으면 어디가 어떻게 된다던가? 꼭 이 사달을 내야 했던 걸까?
황녀는 책임을 회피하듯 곧바로 티파티를 파해 버렸다.
“오늘은 이만하는 게 좋겠군. 흥이 다 깨져서 말이야. 다들 물러가도 좋네.”
눈치를 보던 추종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둘 짹짹거렸다.
“저희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황녀 저하.”
“정말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신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데릭 역시 못마땅한 얼굴로 가볍게 묵례를 한 뒤 돌아섰다.
“잠깐!”
“…….”
“공작은 나를 좀 보고 가지.”
그러나 황녀가 그를 붙잡았다. 국경 지대 분쟁에 대해 이제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려나 싶었다.
하지만 얼마 후. 시종이 들고 나타난 것은 커다란 금색 상자였다. 데릭은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이게 뭡니까.”
“곧 경의 생일이지 않나. 당일엔 순방 일정 때문에 직접 전하지 못할 듯하여.”
“굳이 안 주셔도 됩니다만.”
“사람이 야속하게 어찌 그러겠나. 나도 그저 받은 만큼 주는 거니 부담 갖진 말게.”
“…….”
“어서 열어 보지 않고?”
꺼림칙한 얼굴로 상자를 열자 단정한 옷 한 벌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의 프리트 공작이라면 절대 입지 않았을 연한 베이지색의 예복이었다.
‘심심하군.’
그러나 프릴이나 레이스 하나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모양새가 영 성에 안 찼다.
“경의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잘 보관하겠습니다.”
“입겠다는 말은 없군.”
“…….”
데릭은 완고했다. 이젠 저런 밋밋한 옷 따윈 입을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옷이란 최소한 소매에 프릴이 두 겹은 달려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 * *
월요일 아침.
공작성에 들어선 오드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의자 카트에 앉았다. 그런데 평소라면 옆을 지키고 서 있을 기사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 어디 가셨나?’
오드리는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이면서도 그가 올 때까지 얌전히 앉아서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막상 익숙해지니 이만큼 편한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어김없이 턱시도를 입은 기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침 훈련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제 불찰입니다.”
“괜찮아요. 얼마 안 기다렸는걸요.”
“늦은 만큼 아주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기사는 열과 성을 다했다. 그녀가 심심하지 않도록 이동 중에 적절한 스몰토크를 가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의자 카트는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4층 집무실 앞까지 운행되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앞으론 절대 늦지 않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네, 기사님도요!”
곧이어 요란한 돌돌돌돌 소리와 함께 카트가 멀어졌다. 그러나 오드리는 집무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괜히 문 앞을 서성였다.
“휴…….”
며칠 전 그녀에게 고백한 사람을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할지 모르는 까닭이다. 평생 누굴 좋아하기만 해 봤지, 고백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 더 어려웠다. 이미 거절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더 미안하고, 머쓱하고, 민망한 걸까?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뭐야,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담?’
생각해 보니 이런 고민은 프리트 공작의 몫 아니던가. 정작 고백한 사람은 두 발 뻗고 잘 잤을 텐데, 엉뚱한 오드리만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이 우스웠다.
‘그냥 평소처럼 하자, 평소처럼.’
마음을 다잡은 오드리는 심호흡과 함께 문을 열었다.
“으응?”
그런데 예상과 달리 집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문 앞에서 한참이나 망설였던 것이 무색하게도.
오드리는 허탈하게 서서 집무실을 둘러보다가 얌전히 제 자리에 앉았다.
“어딜 가셨나?”
그러다가 맞은편 책상 위, 못 보던 물건 하나에 눈이 갔다. 마치 그녀더러 보란 듯이 세워 놓은 황금 액자였다.
“……순결보증서?”
오드리는 제 눈을 의심했다. 자기가 잘못 봤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직접 읽어 보기까지 했다.
이 문서는 대신관의 직권으로 본 인물의 순결을 검사한 결과, 내/외부적으로 이상 소견이 없음을 확인하여 약 ‘9129’일간 이어진 A등급 순결을 보증하는 보증서입니다.
since 1309.07.09.
“미, 미친 거 아니야?”
벼락같은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아니, 사람들이 드나드는 집무실 책상 위에 누가 저런 숭한 걸 올려놓는단 말인가! 소문내는 것도 아니고!
오드리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재빨리 물러섰다. 별로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던 프리트 공작의 낯 뜨거운 비밀을 알아 버리고 말았다.
“진짜, 아니, 누, 누가 뭐! 궁금하대?”
저 ‘순결보증서’라는 것이 등장한 타이밍 한번 얄궂었다. 그 의도가 빤히 보이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오드리는 민망한 마음에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댔다.
─똑똑.
“각하, 윌리 에밀튼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손님이 찾아왔다. 공작성 기사단장인 에밀튼 백작이었다.
오드리는 나쁜 짓이라도 하다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는 한참을 우왕좌왕하다가 슬며시 문을 열었다.
“백작님!”
“오드리? 각하께선, 아. 그렇군. 황성에 가셨지.”
“황성이요?”
“아마 심문 때문일 거다. 오늘 아침에 국경 지대 포로들이 황성으로 이송되었거든.”
“그렇구나.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각하의 생일 무도회 때문에…… 기사단 배치 문제로 상의 좀 할 겸. 아무래도 나중에 다시 와야겠구나.”
“생일 무도회요?”
오드리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같은 집무실을 쓰고 있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올해는 무슨 변덕인지 생일 무도회를 여시겠다더구나. 거의 십 년 만이지.”
“…….”
“아마 공식 발표는 오늘 점심쯤에 나올 거다. 내일 하루는 준비를 위해 성문을 닫고, 수요일 밤에 무도회가 있을 예정이야.”
“그럼 내일은 쉬겠네요?”
“기사단을 제외하면 그렇지. 그나저나 파트너 동반 무도회라던데, 메이 곁을 지킬 사람이 없어 큰일이야.”
“……!”
오드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파트너 동반이라고?’
아직 공식 발표가 나지 않았으니 클로드도 파트너를 정하지 않았을 터. 그가 에밀리아인지 뭔지 하는 여자에게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래서 아들들에게 부탁을-”
“한스! 한스가 좋을 것 같아요.”
“한스?”
“네!”
“하지만 영 뻣뻣한 놈이라.”
“분명 한스도 좋아할 거예요!”
클로드 오라버니는 제가 독차지할 예정이거든요!
오드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한스를 추천한 다음, 에밀튼 백작을 따라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는 후다닥 재무부로 달려갔다.
“헥, 클로드 오라버니!”
“오드리? 아침부터 무슨-”
“수요일이, 헥, 프리트 공작 각하, 헥, 생일 무도회래요!”
“그러다 숨넘어가겠어.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이야기해. 응?”
“아니, 같이, 흐엑…….”
마음은 급한데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아 속이 상했다.
그런 사정을 눈치챈 듯, 클로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도회에 같이 가자고?”
─끄덕끄덕.
그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더없이 간절했다. 마치 간식을 조르는 강아지처럼. 그 모습을 본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고 말았다.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끄덕.
헐레벌떡 뛰어오느라 엉망이 된 분홍색 머리가 어찌나 사고뭉치 같은지. 그러나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워서 보는 사람을 꼭 웃게 만든다.
“그렇다면 당연히 같이 가야지.”
“……!”
“오드리랑.”
야호!
오드리는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그와 동행하는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 클로드의 선택이 에밀리아가 아닌 그녀라는 게 미치도록 좋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불퉁한 목소리 하나가 초를 치려 들었다. 한스였다.
“형. 그럼 어머니는?”
“응?”
“아버지는 자리를 지켜야 할 거 아니야. 그럼 어머니는? 그냥 혼자 있어?”
“아.”
의외의 복병이 등장했다. 동시에 오드리의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같은 소리 하네……!’
평소에나 잘할 것이지, 왜 꼭 이럴 때만 부모님을 끔찍이 생각하는 아들 노릇을 하고 그런담?
그 이중성이 아주 기가 막혔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오드리가 아니었다.
“호호! 너는 뭐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자식이게?”
“야, 너 말이-”
“그러니까 너도 이참에 아들 노릇 좀 해. 황새가 물어다 준 자식도 그렇게 매정하진 않겠다.”
“너……!”
“어머니 손 꼬옥, 잡고 참석하면 분명 좋아하실 거야. 그렇죠, 오라버니?”
오드리는 말간 얼굴로 클로드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동생의 무뚝뚝함이 마음에 걸린 눈치다.
“오드리 말이 맞아. 넌 어머니랑 오붓한 시간을 좀 보내야 해. 맨날 일 핑계만 대면서 밖으로 나돌기만 하잖아.”
“아니, 그건!”
“어머니도 많이 서운하셨을 거야. 내색은 안 하셨지만.”
“…….”
한스는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다.
누군 밖으로 나돌고 싶어서 그러나? 저 계집애 때문에, 저거 쫓아다니느라 그런 건데!
그러거나 말거나 혼자 딴청을 부리는 얼굴이 참으로 얄미웠다. 또다시 불퉁한 마음이 샘솟았다.
“너야말로 ‘죽여주는 남자들’이 서운해하겠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로버트 님께 다 들었어. 미팅 상대가 그렇게 끝내줬다며? 그냥 그 사람들이랑 가지, 왜 굳이 형이랑 가려고 그래?”
“……!”
미팅. 그 한 단어가 몰고 온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클로드와 클로드의 그녀, 프리트 공작의 고백까지 주마등처럼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한스는 도대체 무슨 오해를 했는지, 저가 먼저 시비를 걸어 놓고도 기가 막힌 얼굴이 되었다.
“너, 너어, 하! 이거 봐. 아주 그냥 넋이 나갔네.”
인생에 도움이라곤 안 되는 한스 같으니라고.
오드리의 눈이 대번에 뾰족해졌다.
“……흥. 자기가 무슨 상관이람?”
“이게!”
“오라버니, 그럼 수요일에 봐요!”
“그래. 내가 데리러 갈게.”
“야! 이젠 인사도 안 하냐? 어? 나는 안 보이지?”
이미 원하는 것을 얻어 낸 오드리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프리트 공작 역시 그녀에게 파트너 신청을 할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 한 채. 그녀의 정신은 온통 클로드에게만 팔려 있었다.
* * *
데릭은 포로들의 심문을 끝내고 점심 즈음 귀가하자마자 곧바로 장미꽃을 잔뜩 띄운 물에 목욕부터 했다.
‘도돌이는 비위가 약하다고 했지.’
미세하게 남아 있을지도 모를 피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목욕이 끝난 후. 이성을 사로잡는다고 명성이 자자한 향수까지 아낌없이 뿌렸다.
‘아차. 괜히 다른 여자들이 엮이면 어떡한다?’
그러나 실컷 뿌린 뒤에는 지나친 효과가 있을 것을 우려하며, 당장 창문 밖으로 냄새를 날려 보내 버렸다.
머리를 손질할 땐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시종의 손놀림을 감시하기도 했다. 머리카락이 한 올이라도 비뚤어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 되었군.”
마침내 옷까지 갖춰 입은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루카스의 심정은 그렇지 못했다.
‘세상에…….’
흑표범의 목에 깜찍한 리본을 매달아도 저렇게 끔찍하진 않을 것이다.
크나큰 몸통에 비해 너무도 작고 소중한 크라바트, 너른 가슴팍을 견디지 못하고 벌어진 연하늘색 레이스 셔츠의 틈새. 양쪽 천 조각을 겨우 붙들고 있는 단추들이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소매에서 요란하게 나풀거리는 3단 프릴은 또 어떤가? 아마 저들에게도 자아가 있었다면 이미 오바이트를 55번은 했을 것이다.
“후. 이게 뭐라고 떨리는군.”
“…….”
그러나 프리트 공작의 관심은 오로지 도돌이뿐이었다. 당장 집무실로 달려간 뒤, 도돌이에게 그의 생일 무도회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청할 참이기 때문이다. 제 마음을 낱낱이 고백했으니 도돌이에게도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지 모른다.
그는 마지막으로 풍성한 소매를 점검한 뒤 들뜬 마음으로 침실을 나섰다.
하지만 얼마 후.
데릭은 절망한 얼굴을 감추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야 했다.
“……파트너가, 있다고.”
“네.”
“…….”
그의 도돌이에게 벌써 파트너가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 짐작 못 한 바도 아니다. 당연히…… 있겠지.”
도대체 어떤 놈일까? 어떤 음흉한 놈이 무도회 소식이 알려지기도 전에 도돌이를 가로챘냐, 이 말이다!
‘일부러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건만.’
데릭은 나름 여우처럼 굴었다. 도돌이와의 추억을 위해 무도회를 열겠다 결정해 놓고도 발표를 최대한 미뤘다. 그가 황성에 있는 사이 다른 누군가가 도돌이를 낚아챌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도돌이에게 제일 처음으로 파트너 요청을 하고 싶었는데…….’
웬 날강도 하나가 그의 로맨틱한 계획을 몽땅 망쳐 버릴 줄이야.
‘어떡한다? 어떡하지?’
프리트 공작은 어쩔 줄을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물론 얼굴은 당장 누군가를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살벌했다.
그런 그에게 의외의 해결책을 제시한 건 보좌관 루카스였다.
“각하. 뒷골목엔 ‘휴지가 없으면 나뭇잎으로 해결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러운 소리를 하는군.”
“중요한 건 뜻입니다. 최선을 택할 수 없다면 차선을 택하라는 것이지요.”
최선이 아닌 차선.
“……!”
문득 깨달음을 얻은 데릭은 당장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 *
그리고 이틀 뒤 무도회 당일.
프리트 공작가의 마차가 사람을 한가득 태운 채 공작성으로 향했다. 그곳엔 서로 짝을 이룬 클로드와 오드리, 아놀드와 로지가 타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구석에는…….
“친히 마중까지 나와 주시니 영광입니다.”
“별말을.”
어색하게 서로를 마주한 프리트 공작과 케벨슨 백작이 앉아 있었다.
오드리는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남자에게 발목 잡혔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이, 이게 뭐람…….’
프리트 공작의 동행 제의를 반려한 것이 불과 이틀 전. 거절당한 사람답지 않게 덤덤한 얼굴을 보며 내심 잘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곧장 그녀의 아버지에게 달려가 파트너 신청을 할 줄이야!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백작님 덕분에 프리트 공작가의 마차를 다 얻어 타 보네요. 영광입니다.”
“굳이 영광까지야.”
“……허허. 아닙니다. 저도 어찌나 감사한지.”
“각하, 그런데 이건 진짜 금인가요? 아얏! 도토리, 너 왜 그래?”
“으르브느. 그므느 으쓰스으.”
“으응? 가만히 있으라고?”
“…….”
30분 전. 케벨슨 일가를 태우러 온 클로드는 자신의 마차를 돌려보내야 했다. 흑마 여덟 필이 이끄는 팔두마차를 타고 나타난 프리트 공작 때문이었다. 무도회의 주인공은 흙바람을 일으키며 등장해서는 난데없이 동석을 권했다.
“어차피 목적지도 같은데 함께 타지. 사양할 필요 없다.”
“…….”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동시에 프리트 공작의 짧은 일탈이 막을 내렸다.
“각하! 어딜 가셨나 했더니……!”
“소란을 떠는군.”
“손님들께서 한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원래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는 법이다.”
데릭은 자신의 거주지에 도착하자마자 보좌관에게 이끌려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은 다섯 사람은 익숙한 얼굴들과 함께 무도회가 열릴 홀로 향했다.
“에밀튼 백작 부인!”
“아놀드! 세상에, 이게 대체 얼마 만이니? 얼굴 상한 것 좀 봐!”
“예에? 이상하다, 도토리는 그런 말 없었는데……. 정말 상했어요? 많이요?”
“그래도 여전히 멋지지.”
오랜만에 만난 아놀드와 에밀튼 백작 부인은 정답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제 어머니와 함께 먼저 도착해 있던 한스도 불만 가득한 얼굴로 등장했다.
“아주 조오옿으셨겠다?”
“흥.”
“어쭈, 이젠 대답도 안 해?”
“오라버니! 우리 저기로 가 봐요!”
“야, 너, 그 손……!”
그러나 오드리는 클로드에게 팔짱을 낀 채 빠르게 한스의 곁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저게 진짜!’
벌써부터 팔짱을 끼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다. 무도회를 핑계 삼아 도대체 얼마나 스킨십을 해 댈지,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감시하고 싶었건만…….
“한스, 인사하렴. 여기는 록페타 자작가의 영애란다.”
홀로 남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안녕하세요. 오라버니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아, 예. 로버트 님의 동생분이시라고…….”
그러나 저도 모르게 오드리를 향하는 시선까지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 * *
무도회장으로 나서기 전, 데릭은 마지막으로 책을 탐독했다.
파티가 없이는 로맨틱을 논할 수 없다.
인파 사이로 주고받는 은근한 시선, 테라스를 넘으면 펼쳐지는 두 사람만의 세상, 그 어떤 조명보다 멋스러운 별빛, 거기다 낭만적인 춤까지!
역사상 가장 많은 남녀가 눈 맞은 장소가 어디인 줄 아는가? 바로 무도회장이나 연회장이다. 사랑의 치트키라고나 할 수 있다.
당신의 사랑에 미리 축하를 보낸다. 행운이 가득하기를!
“시선을 주고받은 다음 테라스로. 별을 구경하고. 춤을.”
사교 활동과는 거리가 먼 프리트 공작이 생일을 핑계로 무도회를 연 것은 오로지 도돌이 때문이었다.
로맨틱한 무도회라니……. 두 사람의 사랑이 다시 불타오르기에 딱 좋은 전환점 아닌가!
운명은 하늘에만 맡길 것이 아니다. 가끔은 적절한 설계와 의도성을 바탕으로 직접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었다.
“프리트 공작 각하 드십니다!”
그 운명의 끝에 있는 것은 도돌이. 데릭은 자신의 운명을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떼었다.
“……!”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심장을 아주 거하게 얻어맞고 말았다. 무려 일주일간 공들여 준비한 얼음조각상 앞에 그의 도돌이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봐도 미치게 사랑스러운 연두색 드레스와 덩굴장미 모양의 조각상이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제 것인 줄은 어찌 알고!’
아, 참으로 적절한 위치 선정이다. 거의 천장 높이인 얼음조각상엔 유지 마력석 비용까지 하여 거의 크리스털 샹들리에 하나 값이 들어갔다. 하지만 데릭은 전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돈은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것이다.’
저 사랑스러운 도돌이에겐 세상을 전부 안겨 줘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는 도돌이에게 주고 싶은 것, 먹이고 싶은 것, 데려가고 싶은 곳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건 ‘고작’ 천장 높이의 얼음조각상을 놓는 것뿐. 그게 못내 자존심이 상하고 안타까웠다.
‘……얼른 돈쭐을 내주고 싶건만.’
괜히 마음이 급해진 데릭은 빠른 발걸음으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제 할 일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한 다음, 저 거슬리는 에밀튼 소백작을 처치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참석해 줘서 기쁘군. 말을 길게 하진 않겠다. 즐기다 가도록. 이상.”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러나 생일 무도회라고는 처음 해 보는 데릭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생일 주인공은 케이크 위 장식품처럼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각하, 어디 가십니까? 손님들의 선물을 받으셔야지요.”
“필요 없다.”
“……생일 주인공이 선물을 안 받는 파티도 있답니까?”
“…….”
“손님들도 이미 줄을 섰습니다.”
결국, 프리트 공작은 하나도 기쁘지 않은 얼굴로 앉아 선물 공세를 받았다.
그러나 시선은 저 멀리 도돌이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정확히는 도돌이의 근처로 몰려드는 음흉한 남자들의 뒤통수에.
“각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 서적들은 전부 먼 바다를 건너온 귀한-”
“같잖군.”
“……예?”
막 선물을 전달하던 남자가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 혹시 저를 말씀하시는-”
“보아하니 명이 길진 않겠어.”
“……!”
하얗게 질린 남자는 생신 축하드린다는 비명과 함께 후다닥 물러났다.
그러나 그 뒤로도 상황은 비슷했다.
“각하를 처음 뵈었을 때가 아직도 생각납니다. 그때 저는-”
“죽고 싶나 보군.”
“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오드리의 반경 1m 내로 남자가 들어올라치면 데릭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마침 샴페인을 마시며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자 하나가 눈에 걸렸다. 데릭의 눈에는 만취 상태의 주정뱅이 하나가 도돌이에게 수작을 거는 것처럼 보였다.
‘감히, 알코올 중독자 따위가……!’
하지만 당장 달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보좌관은 애원과 협박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감시했으며, 입구까지 늘어진 줄은 사라질 기미가 안 보였기 때문이다.
“…….”
데릭은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듯한 시선으로 경고를 보내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한편, 시선을 받은 남자는 미친 듯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케, 켈룩! 크흡, 큽!”
별안간 살기가 가득한 눈과 마주한 까닭이다. 얼굴은 목이라도 졸린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어쩐지 살갗이 아린 것 같기도 했다.
“괜, 괜찮으세요?”
“켈룩!”
“자네 갑자기 왜 그런가?”
“물 좀 드셔야겠어요!”
“크, 크흡!”
남자의 시선이 오드리 너머의 핏빛 눈동자를 불안하게 흘끔거렸다.
‘흐어억!’
그리고 다시 한번 소름 끼치는 적의와 마주했다. 프리트 공작의 눈에는 경계심과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만약 오드리와 솜털 하나라도 스쳤다간 당장 목이라도 베어 버릴 기세였다. 그러다 별안간 애달픈 낯으로 분홍색 뒤통수만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뭐, 뭐야? 저 구질구질한 전 애인 같은 시선은…….’
자기 혼자 세기의 사랑이라도 하는 중인 걸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남자는 얼른 자리를 뜨려 하였다. 그러나 급한 마음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가슴팍으로 쏟고 말았다.
─촤락.
“으악.”
“앗! 괜찮으세요?”
놀란 오드리는 제 손수건을 꺼내 닦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작은 손이 가슴팍을 톡톡 두드리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남자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갔다.
“……!”
아니나 다를까. 잠깐 누그러졌던 핏빛 눈동자에 불꽃이 튀기 시작한 것이다.
아연실색한 남자는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고양이처럼, 오드리의 손을 피해 요리조리 몸을 틀어 댔다.
“괘, 괘, 괜찮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하지만…….”
“마음만으로 충분합니다!”
“아, 그럼 이걸로 닦으세요.”
헉!
분홍색 정수리 너머로 보이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 프리트 공작의 손에 들린 황금잔이 잔뜩 우그러져 있었다. 그게 그의 머리통으로 보인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눈앞의 손수건을 받아 드는 순간 네놈은 죽은 목숨이라고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저,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도…….”
“저쪽으로 가시죠. 제가 여벌 옷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오드리, 잠시만 여기 있을래?”
“네, 오라버니.”
“휴우…….”
클로드의 도움으로 남자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홀로 남은 오드리는 얌전히 서서 클로드를 기다렸다. 그녀의 호의가 상대방을 죽음으로 내몰 뻔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러는 동안 익숙한 얼굴들이 다가와 여러 번 춤을 청하기도 했다.
‘저런 저질스러운 손을 보았나……!’
그 모습을 하나하나 눈으로 좇던 데릭은 미칠 노릇이었다. 저 음흉한 자들이 도돌이와 몸을 딱 붙이고서는, 춤을 핑계로 지저분한 구애를 해 대는 까닭이다. 고작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인데도 속이 끓어 올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안 되겠군.’
─벌떡.
프리트 공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동시에 그의 보좌관의 눈엔 감출 수 없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각하?”
“선물은 누구든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게 무슨-”
“내 생일이라고 해서 꼭 내가 받을 이유는 없지.”
의자 옆으로 비켜선 데릭이 보좌관에게 눈짓했다.
“뭐 하나.”
“예?”
“어서 앉지 않고.”
“……!”
루카스는 거의 반강제로 프리트 공작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리고는 친절하게 웃으며 손님을 맞이할 것을 종용받았다.
“공작가의 체면을 실추해서는 안 된다.”
“각, 각하! 각하!”
보좌관은 휴가철을 맞아 조부모의 집에 강제로 맡겨진 아이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제 주군이 멀어지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발걸음마저 죽인 채 목표물에 접근하는 신중한 눈빛. 그 모습은 마치 왕좌를 노리는 사자의 형상이었다.
* * *
오드리는 에밀튼 백작 부인에게 이끌려 이리저리 인사를 다니는 한스를 보고서는 혀를 찼다.
‘쯧쯧, 불쌍하기도 해라.’
동시에 클로드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마터면 미혼 영애들과 안면을 트고 대화를 주고받는 저 사람이 클로드가 될 뻔하지 않았는가.
‘휴. 그때 뛰어가길 잘했어.’
오드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위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같은 시기에 임시직으로 들어왔던 이들과 재무부 사람들, 아버지의 지인들이었다.
“와아. 그 유명한 ‘록트’가 영애께서 운영하는 곳이라고요?”
“저는 그냥 이름만 올린 거예요. 엄밀히 말하면 제 친구 가게거든요! 한스 에밀튼이요.”
“제가 거기 단골입니다! 최근에 나온 통신구도 나오자마자 샀습니다.”
“정말요?”
“예. 그리고 제 동생은 ‘배스타임’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술 먹고 네발로 기어 오는 날엔 그만한 게 없다더군요.”
“사용법을 아주 제대로 아시네요! 씻고 자기 귀찮을 때 딱이죠.”
“이러다 게으름뱅이가 될까 두렵긴 합니다. 하핫.”
뜻밖의 단골을 만난 오드리는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록트’라는 이름처럼 장난스레 시작한 사업은 사람들의 삶에 큰 변화를 만들었다. 오드리는 그것이 아무래도 신기했다.
‘고작 마도구 하나일 뿐인데…….’
그녀의 미천한 재주 하나로 세상이 아주 약간은 달라진다는 게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한편, 저 멀리서부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프리트 공작의 안색이 흐려졌다.
‘감히 나도 모르는 것들을!’
데릭은 도돌이가 록트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여태 몰랐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돌이에 대해 모르는 게 여전히 많았다.
그런데 처음 보는 웬 놈팡이 하나가 그녀의 사생활을 집요하게 캐내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의도가 영 수상쩍었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어.’
데릭은 그들을 어떻게 도돌이의 곁에서 밀어낼지 고민했다. 그러다 고안해 낸 방법은 그와 도돌이의 친밀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난 너희들과 다르다.’
그간 섭렵한 연애서, 무려 14권. 저 가방끈이 짧은 자들 따위 손쉽게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연애 스킬 29. 그녀에게 칭찬을 퍼붓자!》
칭찬은 딱딱한 그녀의 마음도 말랑하게 녹여 버릴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움, 당당함, 능력, 성격 그 어떤 것도 좋다.
그녀만이 가진 특성을 아주 ‘특/별/한’ 물건에 빗대어 표현해 보자.
그녀의 마음은 곧 당신 것이 될 것이다!
데릭은 자신이 읽고 배운 그대로 다짜고짜 칭찬을 퍼부었다.
“그대의 눈동자는 꼭, 보검의 칼자루 같군.”
“……네?”
오드리로선 갑자기 등장한 생일 주인공에게 난데없는 도발을 당한 꼴이었다. 그러나 데릭은 아주 기세등등한 얼굴로 제 주위의 경쟁자들을 훑어보았다.
‘나와 도돌이는 이렇게 불쑥 칭찬을 건넬 정도로 각별한 사이다.’
굉장히 우쭐한 시선이었다.
“전쟁을 앞두고 폐하께서 하사하신 아름다운 검이었다. 파리가 내려앉기만 해도 즉시 두 동강이 났지.”
“……!”
검! 두 동강!
불길한 기운을 느낀 주위 사람들이 슬슬 멀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데릭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여기서 더러운 파리 이야기는 왜 꺼낸단 말인가! 연애 우등생답지 않은 초보적인 실수였다.
프리트 공작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 머리를 굴렸다.
‘도돌이의 눈. 보검의 칼자루. 도돌이의 눈. 보검의 칼자루…….’
가만, 그런데 그 검이 어떻게 되었더라?
“분명 아름다운 녹색의 칼자루였는데, 피로 물들면서 검붉게 변해 버렸지.”
아, 그렇다. 원래 색깔을 짐작도 못 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 버렸지. 마치 그의 눈동자처럼.
“사람 피는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더군.”
전쟁이란 참으로 지긋지긋한 것이다.
잠깐, 그런데 무슨 말을 하다가 전쟁 이야기가…….
“히익!”
“…….”
어느새 주위 사람들은 전부 사라진 뒤였다.
데릭은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계획대로 도돌이를 독차지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군.’
분명 루카스가 봤다면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 법’이라고 고개를 내저을 법한 생각이었다.
“저, 새, 생신 축하드립니다.”
“고맙군.”
“…….”
“레모네이드?”
“아, 네.”
술을 권하면 그녀에게 흑심을 품었다고 오해할 것 같아 아주 건전한 레모네이드를 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레모네이드, 빨리.’
‘헙!’
그의 시선을 받은 하인은 부리나케 달려가 귀여운 파라솔 모양 장식이 달린 잔을 대령했다.
“레모네이드를 대령했습니다.”
그런데 오드리가 막 레모네이드에 손을 뻗으려는 찰나, 커다란 손이 나타나 유리잔을 슥 훔쳐 갔다.
“……?”
바로 눈앞에 있던 프리트 공작이었다.
오드리의 단풍잎 같은 손은 길을 잃고 허공에서 둥실거렸다.
“저, 제 건데…….”
“알고 있다.”
“…….”
눈 뜨고 코를 베인 그녀는 눈만 끔뻑거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황당하다 못해 억울했다.
‘왜 남의 음료수를 훔쳐 가?’
있는 사람들이 더한다더니! 마시고 싶으면 자기도 하나 가져다 달라고 시킬 것이지, 남의 것을 낼름 훔쳐 가면 어쩐단 말인가? 파티의 주인공이란 남자가 쩨쩨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데릭은 저 나름대로 바빴다. 적당한 각도로 파라솔을 펼쳐야 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아니다. 너무 아래를 향하면 파라솔 느낌이 살지 않아.’
그는 중대한 발견을 앞둔 과학자처럼 신중하게 파라솔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시뮬레이션을 한 뒤에야 비로소 파라솔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들지.”
“…….”
음료잔을 건네받은 오드리는 눈만 깜빡였다.
눈앞의 남자는 참으로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음료수를 훔쳐 간 줄 알았는데, 고작 파라솔 장식을 펼쳐 돌려준 것이다. 어쩐지 그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반대로 프리트 공작의 기분은 날아갈 듯이 들떴다.
‘점수를 아주 제대로 땄군. 완벽해!’
커다란 손이 제 프릴 소매를 꽉 움켜쥐며 전율했다. 급한 마음에 자기가 산도적처럼 잔을 훔쳤다는 사실은 잊은 지 오래였다.
드디어 무언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프리트 공작은 홀린 듯한 얼굴로 도돌이를 훔쳐보았다.
‘어쩌면 저리도 깜찍할 수 있단 말인가.’
아, 도돌이는 존재만으로도 그를 흐물흐물 녹여 버렸다.
어쩐지 당장 공작성 연무장으로 뛰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허수아비를 3억 7,530개쯤 베고 싶었다.
‘위험해, 위험하다.’
캣닢에 취한 고양이가 이런 기분일까? 저 자그마한 몸을 꽉 껴안고 잔디밭을 엉망으로 뒹굴고 싶었다. 데릭에게 도돌이란, 제국법이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었으니까…….
* * *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왈츠 선율이 무도회장을 자유롭게 흘러 다녔다.
동시에 프리트 공작의 심장도 터질 듯이 쿵쿵거렸다. 그는 용기를 내어 도돌이에게 춤을 신청한 참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이걸 어찌한다.’
곰 발바닥 같은 손이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몇 년 만에 추는 춤보다도 옆에 있는 도돌이의 존재가 그를 더 긴장시킨 까닭이다.
데릭은 떨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저, 소, 손을…….”
“그렇군.”
그는 오드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풍잎 같은 손을 소중히 말아 쥐었다. 그러나 오드리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뺐다.
“그, 그게 아니라, 에스코트를……!”
“…….”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어야 할 남자가 슬며시 그녀의 손을 맞잡아 왔기 때문이다. 마치 연인 같은 모습으로.
‘젠장!’
머리가 온통 새하얘진 프리트 공작은 고장 난 꼭두각시 인형처럼 삐거덕거렸다. 이미 감각을 잃어버린 귀 역시 얼얼할 정도로 뜨거웠다.
데릭은 가까스로 떨리는 손을 내민 뒤, 도돌이를 중앙으로 이끌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커플들은 아주 낭패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이크, 다음에 나올걸!’
그들은 최대한 두 사람과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
“…….”
이윽고 새로운 왈츠가 시작되었다.
데릭과 오드리는 서로의 손과 어깨를 맞잡은 채 조심스레 돌기 시작했다.
‘오늘도 달콤한 향기가 나는군.’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운 거리. 프리트 공작은 제 코끝에서 사라질 줄을 모르던 복숭아 향에 다시 한번 취했다. 도돌이의 뺨이든, 통통한 입술이든, 보드라운 머리칼이든, 어디든 상관없었다. 다만 그의 입이 함뿍 젖도록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었다.
데릭은 제 눈이 완전히 풀리기 직전에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주 저열한 짐승이 따로 없군!’
깜찍한 도돌이를 앞에 두고 이 무슨 불순한 상상이란 말인가?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데릭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굳은 몸짓으로 춤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첫 번째 전조 구간이 찾아왔다. 원래대로라면 둥글게 모인 남녀가 한 칸씩 옆으로 비껴가 새로운 파트너를 맞이해야 할 차례다. 오드리는 바퀴라도 달린 듯 빙글빙글 돌며 자연스럽게 옆을 향했다.
‘으응?’
그런데 미처 두 바퀴를 돌기도 전, 강한 힘에 붙들렸다.
“어딜 가는 거지.”
“……!”
전조와 함께 헤어졌어야 할 프리트 공작이었다.
“나를 두고.”
오드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커플들은 자연스레 짝을 바꾼 상태였다. 마치 처음부터 두 사람이 없던 것처럼.
프리트 공작은 그녀를 끌어당기는 대신 자신이 직접 다가왔다. 그러더니 오드리의 손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옮겨 주었다. 그의 한쪽 손과 어깨 위로.
두 사람의 거리는 다시 처음과 같이 좁혀졌다. 그 사이로 달큰한 복숭아 향과 깨끗한 세탁물 냄새가 마구 뒤섞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섯 번째 곡이 끝날 때까지 함께 춤을 추었다. 가장 상석에 앉은 루카스는 아주 질린 눈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 * *
오드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무도회장을 배회했다.
‘클로드 오라버니는 아직 안 왔나?’
샴페인을 쏟은 남자에게 여벌 옷을 구해다 준다던 클로드가 아직도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프리트 공작의 생일 무도회는 어차피 초대 없이 들어 올 수 없었으니까. 에밀리아가 이곳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저, 괘, 괜찮으세요?”
“…….”
“열나시는 것 같은데…….”
오드리의 시선은 다시 데릭을 향했다.
춤이 끝난 지가 한참인데, 그는 여태까지 얼굴이 붉었다. 무뚝뚝한 표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빛이었다.
“……테라스.”
“네?”
“테라스가 좋을 것 같군.”
프리트 공작은 별안간 등을 돌려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움직임이었다.
‘으응?’
그러나 오드리는 영문을 모르고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으려니 그가 다시 등을 돌렸다.
“함께, 가지.”
“……아.”
“…….”
같이 가자는 뜻이었구나.
오드리는 다시 한번 무도회장을 둘러보았다.
아놀드는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바빠 보였고, 프리트 공작의 파트너인 그녀의 아버지도 부서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나 클로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만 있다가 오면 되겠지?’
오드리는 혹시라도 프리트 공작의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일단은 테라스로 향했다.
“……!”
그러나 커튼을 걷은 데릭은 다시 닫아 버렸다.
‘책과는 내용이 다른데.’
둘만의 공간, 로맨틱함이 뚝뚝 묻어나는 공간으로 묘사되던 테라스는 그의 생각과 달랐다. 사랑을 속삭이기는커녕 몰래 오바이트를 하는 주정뱅이만 있는 것이다. 이런 끔찍한 광경을 도돌이에게 보여 줄 순 없다.
“……저쪽이 좋을 것 같군.”
데릭은 아주 자연스럽게 구석진 테라스로 도돌이를 안내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선객이 없어 다행이었다.
두꺼운 커튼을 치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둘만의 공간’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천 너머의 왁자지껄함과 대비되는 고요한 밤의 정적이 미묘한 긴장감을 빚어냈다.
“…….”
“…….”
두 사람은 테라스 난간에 기댄 채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뒷모습만 보면 일행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색함이 흘러넘쳤다.
오드리는 달을 올려다보는 척, 곁눈질로 그의 손등을 살폈다.
‘아직도 부어 있네.’
지난주 금요일, 마차 문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느라 생긴 부상이었다.
“…….”
오드리는 말없이 제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그를 위해 치유 마력석을 만든 참이다.
하지만 월요일부터 줄까 말까 수십 번을 망설이다가 결국 건네지 못했다. 혹시라도 그에게 괜한 여지를 주는 게 아닌가 싶어서. 의미 없는 희망 고문 따위는 하기 싫었다.
‘그래도 저렇게 부어 있는데.’
하지만 막상 별 차도가 없는 듯한 손등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그냥 생일 선물이라고 할까? 남들한테도 다 받는 거니까 괜한 오해를 하진 않겠지?’
그녀 때문에 다친 사람을 모르는 척할 순 없는 노릇이다.
“저기.”
“…….”
“치유 마력석이에요. 소, 손등에 쓰시라고…… 저 때문에 다치셨잖아요.”
결국, 오드리는 생일 선물을 핑계 삼아 치유 마력석을 건넸다. 오늘이 그의 생일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러나 받는 사람의 입장은 또 달랐다. 도돌이에게 생일 선물을 받을 거라 상상조차 못 한 그는 그대로 넋이 나가 버렸다.
‘도돌이가, 나에게, 생일 선물, 치유 마력석을…….’
동시에 금요일 밤의 일이 떠올랐다. 저 자그마한 손을 산도적처럼 거칠게 움켜쥐던 그의 모습이.
“……!”
참으로 낯부끄러웠다. 어떻게 여태껏 사과 한마디를 안 했단 말인가? 그런데도 도돌이는 서운한 말 한번 없이 치유 마력석까지 준비를 하고…….
‘아주 쓰레기가 따로 없군! 나의 도돌이는 천사가 분명하다.’
데릭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선물을 받아 들었다. 도돌이는 치료를 위해 쓰라지만, 아무래도 공작성 비밀 창고에 넣어 대대손손 가보로 전해야 할 것 같다. 무려 그가 도돌이에게 처음으로 받은 선물 아니던가!
“그날 밤.”
“네?”
“내가 무례했다. 전부 내 잘못이다.”
“……?”
데릭은 고해성사하듯 제 잘못을 줄줄 쏟아냈다. 마부가 한눈을 판 것도, 그날 밤 돌풍이 분 것도, 그녀가 문 쪽에 서 있던 것도 전부 본인 탓이라며. 특히, 두 사람 모두에게 갑작스러웠던 스킨십을 언급할 땐 귀까지 시뻘게지기도 했다.
‘그게 왜 자기 잘못이지?’
오드리는 영문을 몰라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연두색 눈동자가 한참이나 허공을 배회하다가 멀찍이 뒤뜰로 향했다.
‘으응?’
그런데 익숙한 차림새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클로드 오라버니?’
아까 나간 뒤로 소식이 없던 클로드였다.
심지어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웬 드레스 차림의 여자와 함께 거닐고 있었다.
‘설마……!’
오드리는 곧바로 눈을 부릅떴다.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 머리칼, 너무 작지 않은 키. 저 여자는 에밀리아 다날로가 분명하다!
순식간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도대체 어떻게 왔지? 초대가 없으면 못 올 텐데……! 오라버니는 나랑 왔는걸. 그렇다면 누가?’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가 에밀리아와 있지 않은가!
오드리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테라스에 서서 프리트 공작과 영양가 없는 이야기나 나눌 때가 아니었다.
“저기, 각하, 저는 이만-”
“아, 벌써 여덟 시 반이로군. 마차를 내어 주겠다.”
“네?”
“통금이 아홉 시라고 하지 않았나.”
“……!”
아차.
오드리는 제 꾀에 넘어가고 말았다. 변명처럼 갖다 붙인 핑계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하필이면 이런 때…….’
드레스 밑의 구둣발이 저도 모르게 동동거렸다.
“그, 그래도 오늘은 무도회 날인걸요.”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생일은 내년에도 찾아오는 것인데. 통금이 훨씬 중요하지.”
“아니-”
“무섭지 않도록 데려다주겠다.”
“……!”
프리트 공작은 곧장 하인을 불러 마차를 대기시켰다.
모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오드리는 프리트 공작과 함께 마차를 타고 케벨슨 백작가를 향하는 중이었다.
‘이게 뭐야!’
공작성에 남아 있을 클로드와 에밀리아를 생각하니 절로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이제 와 누굴 탓하겠는가? 이 모든 게 그녀가 편지를 잘못 전해 벌어진 불상사인데.
“딱 아홉 시로군.”
“…….”
“내일은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프리트 공작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어쩐지 뿌듯한 눈치였다.
그 앞에 대고 전부 거짓이라 고할 순 없는 노릇이라 답답했다.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럼 금요일에 보도록 하지.”
“네…….”
프리트 공작가의 마차는 오드리의 방에 불이 켜질 때까지 한참이나 제 자리를 지켰다.
“이만 출발하지.”
“예!”
의자에 등을 기댄 데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루 내내 공작성을 몇 번씩 오가느라 피곤했지만, 그보단 벅찬 감정이 앞섰다.
‘정말 미치겠군. 사람의 기분이 이렇게까지 좋을 수가 있나…….’
감긴 눈꺼풀 아래에선 도돌이의 잔상이 오랫동안 아른거렸다. 데릭은 저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오늘은 그의 생에 가장 행복한 생일이었다.
* * *
“고생했다.”
“…….”
루카스는 드디어 의자에서 탈출했다. 몇 시간이나 제 주군 대신 손님맞이를 한 얼굴은 그사이에 많이 상해 있었다. 자기가 쓰지도 않을 선물들에 감사 인사를 덧붙이느라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내일 하루는 쉬어도 좋다.”
“……감사합니다.”
“도돌이가 갔으니 이제 시작하지. 이 외에 이탈자는?”
“없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지금 준비시키겠습니다.”
오드리를 안전 귀가시킨 데릭은 마지막 피날레를 준비했다.
무도회는 도돌이와의 로맨틱한 추억을 위해 준비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을 한자리에 모으기 위한 구실이었다.
‘참으로 오래도 끌었군.’
그간 간자를 색출하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던가. 임시직의 계약이 만료되는 오늘이야말로 간자를 뿌리 뽑기에 아주 적절한 날이었다.
얼마 후.
제자리를 되찾은 데릭은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약 한 달 전, 한밤중 기습이 있었다. 공작성 고용인으로 둔갑한 간자였지.”
“……!”
“아주 철저하게 계획된 공격이었다. 그러나 그자 하나로 끝난다는 보장이 없었지.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고용한 이들을 모두 자르고, 가신들에게 임시직 자리를 내어 주었다.”
무도회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프리트 공작은 고용인을 대거 해고하면서도 별다른 이유를 덧붙이지 않아 오해를 샀다. 그러나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의 기행이 설명되었다.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공작성 전체를 돌아보게 되었다. 몇 년을 일해 온 자들도 간자일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각하!”
무도회장을 빙 둘러 배치된 기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몇 년간 충성을 바친 주인으로부터 의심을 받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제 결백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억울한 얼굴만으로는 간자를 가려낼 수 없는 법이다.
데릭은 이쯤에서 손을 들고 제안했다.
“곱게 죽을 기회를 주겠다. 진정 이 중에는 다른 이를 섬기는 자가 없는가?”
“…….”
당연히 앞으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데릭은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남몰래 보좌관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루카스가 묵직한 자루를 들고 등장했다. 록트에서 주문 제작한 자백 도구가 담긴 자루였다.
곧이어 자루를 거꾸로 뒤집자, 새빨간 카펫 위로 같은 색의 마력석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하지만 뒤에서 은밀히 이루어진 작업이라 이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다시 한번 묻지. 다른 이를 섬기는 자가 없는가?”
프리트 공작의 덤덤한 추궁에 무도회장은 다시 한번 침묵에 휩싸였다.
묻는다고 곧바로 실토할 것이면 그게 무슨 간자란 말인가? 다들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며 일어섰다.
“나다! 내가 간자다! 네 놈의 목을 자르러 왔다!”
“무, 무슨 저런…….”
“세상에!”
“저건 몰리 경 아닌가?”
당차게 외친 것은 신입 기사였다. 그러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달리, 얼굴엔 큰일 났다는 낭패만 가득했다.
“첫 번째 쥐새끼가 기어 나왔군.”
곧바로 에밀튼 백작과 기사 몇이 나서서 첫 번째 간자를 포승줄로 묶었다.
한 사람으로 끝날 줄 알았던 진실 고백은 이후로도 길게 이어졌다.
“무슨 소리냐! 저놈의 목은 내 것이다! 우리 사돈의 팔촌의 처남의 동생의 친구의 원수!”
“앞으로 사흘 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주지!”
“이 독으로 네 놈의 장기를 모조리 녹여 버리겠다!”
“애송이들. 나는 저놈의 목숨을 가지고 저승으로 함께 갈 것이다!”
간자들은 이제 끝이다 싶을 때마다 두더지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간자임을 당당하게 시인은 했으나, 자기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주방 보조부터 하인, 하녀, 심지어는 부서의 실무 담당자까지. 그들을 내려다보는 데릭의 얼굴이 싸늘했다.
“아주, 뜻깊은 생일 선물이 되겠군.”
그는 생일 선물로 살아 있는 허수아비를 받은 셈이 되었다.
* * *
목요일 저녁.
오드리는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샬롯을 찾아갔다. 그간 마음고생깨나 한 얼굴이다.
‘쯧쯧. 또 망했네, 망했어.’
실패를 직감한 샬롯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히 고르고 골라 마련해 준 미팅이 대차게 망했다는 건 이미 로버트를 통해 들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아무런 진전이 없다니. 정말 기함할 노릇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미팅은 내가 나가는 건데.’
샬롯은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아무래도 그녀의 친구는 파멸에 가까운 연애운을 가진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애를 쓰고 기를 쓰는데 하는 것마다 족족 망할 수가 있나.
“아놀드 님은 마탑으로 돌아갔어?”
“으응.”
“백작님은 또 한동안 허전해하시겠다.”
“늘 그렇지 뭐…….”
오드리는 텅 빈 눈으로 폭풍 같던 아침을 떠올렸다.
* * *
아놀드가 마탑으로 돌아가는 날은 항상 전쟁이었다.
“도토리! 얼른 일어나! 벌써 새벽 다섯 시란 말이야!”
“으으응.”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핫, 벌써 다섯 시 오 분인데? 아직 못 한 게 얼마나 많다고!”
“…….”
“도토리! 일어나, 응? 오라비와 시간을 보내야지!”
오드리는 분명 침대에서 일어난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호수 한가운데서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어때? 재밌지? 응응? 우리 도토리가 뱃놀이를 얼마나 좋아했다고! 옛날 생각나지 않아?”
“…….”
“헛! 저기 봐! 오리다! 꽥꽥! 도토리, 보여? 오리야!”
아놀드는 반쯤 잠들어 있는 오드리를 끌고 참 바쁘게도 쏘다녔다.
뱃놀이를 시작으로 신기한 버섯을 채집하고, 언덕 위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풀피리 실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다 수탉이 울면 다시 오드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 식사를 위해서였다.
“점심은 간단히 샌드위치를 싸 달라고 했어! 자, 그럼 이제 오두막집에서 같이 책을 읽는 거야!”
“…….”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 오라비랑 내기할까? 하나, 둘, 출발!”
그 뒤로는 항상 똑같은 패턴이었다. 오두막집에 올라가 이미 수십 번도 더 읽었던 책을 한 번 더 읽었다.
“이햐, 이거 보여? 도토리 네가 쓴 거야. 기억도 안 나지? 이 오라비는 다 기억나는데!”
“…….”
“우리 도토리가 무려 다섯 살에 한 낙서라고!”
그리곤 가수면 상태인 오드리를 앞에 두고 케벨슨 남매의 추억을 한참이나 조잘거렸다.
그렇게 10년간의 짧은 추억 여행이 끝나면, 다음 목적지는 앞마당이었다.
“이제 소화도 되었으니 술래잡기나 할까? 응응? 오라비가 먼저 술래하지, 뭐! 도토리는 도망가!”
“…….”
“핫, 잡았다! 이제 내가 도망칠 차례야!”
오드리는 보통 술래잡기가 끝날 때쯤 정신을 차리곤 했다. 그러면 두 사람은 분수대 근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사이좋게 점심 샌드위치를 꺼내 먹었다.
“참, 오후에는 화가를 불렀어.”
“하지만 아직 카드 게임이 남았는걸요?”
“오늘은 특별히 패스야.”
“……?”
오드리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 10년간 단 한 번의 예외도 없던 아놀드의 계획에 변화가 생긴 까닭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우리도 가족 초상화 하나쯤은 있어야지! 도토리가 이렇게나 컸는데 말이야.”
“오라버니가 마탑에서 나오면 그때 다시 그리기로 하지 않았어요?”
“으응. 생각난 김에 조금 더 일찍 그리면 좋을 것 같아서.”
“아.”
오드리는 남몰래 웃음을 참았다.
‘하여간, 거짓말을 못 한다니까?’
제 딴엔 열심히 딴청을 부리는데, 누가 봐도 거짓말인 게 티가 났다.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곧 마탑에서 나온다는 기분 좋은 소식 같은 거.
‘오라버니는 바보야.’
하지만 오드리는 기꺼이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아버지! 얼른 오세요!”
“그래, 간다. 가.”
초상화를 그리기 전, 케벨슨 일가는 한데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다. 무려 10년 만에 찍는 사진이었다.
케벨슨 백작은 별 유난이라며 멋쩍어했으나, 정작 30분 동안 브로치 2개를 놓고 한참이나 고민했다. 아놀드와 오드리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킥킥 웃을 뿐이었다.
“자, 찍겠습니다! 하나, 둘, 셋.”
밝은 플래시가 터진 후. 가장 먼저 일어선 것은 케벨슨 백작이었다. 그는 괜히 사진 기사 주위를 서성이다 은근히 운을 떼었다.
“큼. 너무 늙은이같이 나오진 않았나? 눈을 감았던 것 같기도 한데.”
“전혀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으십니다.”
“그렇다면 다행일세.”
“아버지도 참.”
“그냥 궁금해서 물은 것이다. 궁금해서.”
그때, 멀리서부터 아놀드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도토리! 화가가 왔어요!”
“나 원 참.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그러지 마시고 저쪽으로 같이 가요. 오라버니 소원이라잖아요.”
“우리 딸이 가자니까 가긴 해야지…….”
케벨슨 백작은 마지 못한 듯이 등 떠밀려 갔다. 그러나 배경을 고르는 덴 그 누구보다도 진심이었다.
“으음. ‘숲길’도 좋고, ‘어느 응접실’도 좋은 것 같은데…… 아버지는 뭐가 좋으세요?”
“후손들도 보게 될 그림인데 ‘어느 응접실’처럼 중후한 모습이 나을 것 같구나. 아무렴, 백작가 체면이 있지.”
“그럼 배경은 이걸로 할게요.”
“좋습니다. 그럼 세 분 다 배경 앞에 서 주십시오. 포즈 잡는 건 조수가 도와 드릴 겁니다.”
초상화 작업은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화가가 기본 스케치와 밑작업을 하는 동안 세 사람은 배경지 앞에 서서 시간을 죽였다.
그렇게 남은 반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도토리, 내 동생.”
“읍.”
마탑으로 떠나기 직전, 아놀드는 제 동생을 꽉 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조금 더 놀아 주고 싶었는데.”
“…….”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른 거야?”
하지만 오드리는 그런 오라버니를 타박하지 않고 얌전히 안겨 있었다. 그를 보낼 때마다 뒤늦게 밀려드는 후회 때문이었다.
‘오라버니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낼걸…….’
사실, 오드리는 아놀드에게 아주 커다란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그건 아버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14살. 아놀드는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격동의 사춘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어린 동생 앞에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오드리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집어 들고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를 흉내 내었다.
‘안뇨옹? 내 이름은 덩덩이야. 나는 응가 먹는 걸 좋아해. 냠냠!’
‘꺄악!’
‘너도 함께 응가를 먹지 않을래?’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은 까르륵 웃으며 온 방 안을 뛰어다녔다. 저와 놀아 주는 오라버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철없이 매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크고 나서야 보이는 것이 있다던가? 문득 그때의 아놀드가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오라버니는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나이대의 사내아이가 어린 여동생을 놀아 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쑥스럽거나 지루한 기색 없이 항상 곁을 지켜 준 아놀드가 고마웠다. 수호천사 같은 오라비 덕분에, 어린 동생은 어른들의 슬픔 따위 모르고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아놀드 역시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댈 곳이 없었다. 어린 동생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어렸고, 아버지는 슬픔에 잠겨 어찌할 줄을 몰랐으니까.
아놀드는 내내 혼자였다. 그러다 케벨슨 백작가에 드리워진 슬픔이 겨우 가실 때쯤엔,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마력이 발현된 까닭이다.
‘오라버니는 대체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았을까?’
그때의 아놀드를 생각하면 오드리는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1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날아오던 70통의 편지에 일일이 답하지 못한 것도 죄스럽게 느껴졌다.
“오라버니…….”
“응?”
“답장 많이 못 해서 미안해요.”
“으응? 괜찮아. 내가 많이 보내면 되는걸.”
“…….”
“정말 괜찮대도?”
오드리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제 오라버니를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한 통신구를 건넸다.
“이거, 통신구에요.”
“응?”
“이것만 있으면 전서구를 보내지 않아도 서로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어요.”
“오호. 우리 도토리가 준 선물이란 말이지?”
아놀드는 처음 보는 통신구가 신기한지 요리조리 살폈다. 그러더니 짐짓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난 전서구도 좋은걸. 가끔 옛날 편지들을 읽으면 얼마나 재미있다고.”
“그걸 다 모아 놨어요?”
“그러엄! 세상에 어떤 오라비가 그걸 버릴 수 있겠어? 동생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써 준 편지인데.”
“…….”
오라버니도 참.
결국, 두 사람은 전서구와 통신구를 적절히 섞어 쓰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항상 건강 잘 챙겨야 한다. 바빠도 식사 잘 챙기고, 괜히 편지 쓴다고 밤새거나 무리하지도 말고. 건강이 우선이야.”
“아버지도 차암, 제가 뭐 어린애인가요?”
“……그래. 그렇지.”
“다음에 볼 때까지 다들 건강하세요. 도토리도, 아버지도!”
아놀드는 마지막으로 케벨슨 백작과 오드리를 힘껏 껴안은 뒤 마탑으로 돌아갔다.
케벨슨 백작가는 2주간의 분주함을 뒤로하고 평범한 일상을 되찾았다. 그러나 아들을 보낸 케벨슨 백작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더 안 드세요?”
“그냥 입맛이 없구나.”
“…….”
“아놀드도 배가 고플 텐데, 식사라도 하고 보낼 걸 그랬어.”
자리에서 일어난 오드리는 씁쓸해 보이는 아버지를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시답잖은 이야기를 조잘대며 곁을 지켰다.
샬롯을 만나러 나온 것은 아버지가 일찍 잠자리에 든 후였다.
* * *
“샬롯, 어떡하지? 일이 조금 복잡해졌어.”
오드리는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상황을 보고했다.
영 석연찮은 에밀리아의 존재, 그리고 심중을 알 수 없는 클로드까지. 특히나 무섭게 돌진하는 프리트 공작은 오드리에게 방해꾼과도 같았다. 그녀를 좋아해 주는 건 정말 고맙지만, 그렇다고 매번 이렇게 훼방을 놓도록 내버려 둘 순 없는 노릇이다.
“……뭔가 대책이 필요해.”
“딱 봐도 그래 보인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을까? 응?”
이 모든 건 오드리를 향한 프리트 공작의 마음이 그녀의 생각보다도 큰 탓이었다.
‘정말 곤란해…….’
겨우 두 달 남짓한 시간, 고작 편지 한 통. 프리트 공작에게 잘못 전달된 불쏘시개는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그는 혼자서도 착실하게 불을 피웠다. 그리고는 커다란 장작불이 되어 오드리를 덮쳐 왔다. 아주 단단히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일단 진정해. 그러니까, 지금 문제는 그 살벌한 남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거잖아?”
“응, 그렇, 그런데 너도 본 적이 있던가?”
“……아무튼! 직접 거절하는 건?”
“조금 어려워.”
오드리는 그럴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늘어놓았다.
“일단 가문 간의 관계가 마음에 걸려. 혹시라도 아버지나 오라버니에게 불이익이 있으면 어떡해?”
“그렇긴 하다. 막말로 자기 안 받아 줬다고 검이라도 빼 들면 어떡할 거야?”
“……!”
“미안. 방금 건 잊어버려.”
그러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금이야 오드리를 좋아한다니 한없이 자비롭게 굴겠지만, 수틀리면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 괜히 프리트 공작을 자극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내가 차이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 같아.”
“그럼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네?”
“으, 으응? 왜?”
오드리는 잔뜩 당황한 얼굴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여태껏 협조적이던 샬롯이 별안간 선을 그은 까닭이다. 도도하게 다리를 꼬는 모습에선 연애의 정점에 오른 거장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미안하지만 차이는 건 내 전문이 아니라서.”
“…….”
“나는 뻥 차는 쪽이거든.”
여유롭게 휘어진 붉은 입술이 멋스러웠다.
‘스승님……!’
오드리는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배움을 청하고 싶어졌다. 역시, 믿을 구석은 샬롯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