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데릭은 멈추지 않아
에밀튼 백작 부인은 여느 때와 같이 반가운 얼굴로 오드리를 맞았다.
“어머, 오드리?”
“에밀튼 백작 부인! 백작님은요?”
“곧 나오실 거야. 굳이 인사까진 안 해도 된단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어쩐 일이니?”
“아, 이 집 아들들한테 줄 게 있어서요.”
“그래? 착하기도 하지. 어서 올라가 보렴.”
“네!”
오드리는 자연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제집처럼 오가던 곳이라 안내는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계단 모퉁이를 돌 때쯤엔 아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성 기사단장인 에밀튼 백작이었다.
“메이, 나와 함께 아침 산책이나 하지 않겠소?”
“세상에! 정말 너무해요.”
“무엇이……?”
“어떻게 크라바트를 당신 혼자 맬 수 있어요? 저 좀 서운해지려고 해요!”
“……그게, 당신이 너무 곤히 자고 있기에.”
“그래도요.”
“내 사랑, 기분 푸시오. 응? 당신이 새로 매 주어.”
“당연히 그래야지요. 어서 이리 와요, 윌리.”
등 뒤로 에밀튼 백작 부부의 사랑스러운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좋으시네.’
장성한 아들을 둘씩이나 두고도 주말 아침부터 저렇게 달콤할 수 있다니. 클로드의 다정함이 어디서 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돌연변이 같은 한스는 예외였지만.
어쨌든, 오늘은 통신구 출시 기념으로 에밀튼 백작가의 두 남자에게 하나씩 선물할 생각이었다. 나름 투자자 특전이었다.
오드리는 익숙한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노크도 없이 벌컥 열어젖혔다.
“클로드 오라버니는?”
“야, 야이, 미, 미친 계집애야!”
마침 옷을 갈아입던 한스가 기겁하여 뒤돌아섰다. 옷가지를 집어 들고 허둥지둥 벌거벗은 몸을 가려 보았으나, 그 모습이 되려 요염해 보였다.
“클로드 오라버니는 어디 있냐니까?”
“야!”
하지만 오드리는 소꿉친구의 농밀한 자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왜 대답을 안 해?”
“미쳤냐? 얼른 닫아!”
“이게 누구더러, 하여간 못됐어!”
─쾅!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
쟤는 어쩜 저럴까?
황당한 얼굴로 서 있던 한스는 아차 싶었는지 급히 제 상태를 점검했다.
‘좋아. 나름 완벽했어.’
순간적으로 취한 것 치고는 포즈도 쿨했고, 믿음직한 팔뚝 사이로 비치는 복근은 더 없이 섹시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한단 말인가? 저 계집애는 눈독도 안 들이는데. 남의 반나체를 훔쳐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가 사람을 질리게 했다.
“……됐다, 됐어.”
어쩐지 방금까지만 해도 단단하고 듬직해 보였던 제 몸이 생닭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오라버니! 어디 있어요?”
“하아…….”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저건 사람이 아니라 후진을 모르는 폭주 기관차였다.
오드리는 한스가 남자라는 사실을 자주 깜빡하는 듯했다.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지만, 엄연히 이성 아니던가. 그런데도 이렇게 허물없이 대할 때마다 괜히 마음이 심란해졌다. 바지춤을 슬쩍 잡아당겨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잘 있나 확인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절대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그의 성별이 바뀐 건 아닌가 의심이 들어서.
‘쟤는 날 동성쯤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붙어 있어야 할 것이 어디론가 똑 떨어진 것은 아닌지, 주기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 *
“통신구라고?”
“네. 멀리서도 얼굴을 마주하고 연락할 수 있게 만들었대요.”
“록트에선 이런 걸 만들 수도 있어? 아무튼 고마워. 잘 쓸게.”
“헤헤.”
어느새 세 사람은 클로드의 서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클로드는 선물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니 어찌나 뿌듯한지.
한편, 한스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대체 뭐야? 그래서 차인 거야, 아니야?’
저놈의 도토리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낯짝이 두꺼운 건지 뻔뻔한 건지. 그만큼 울고 술까지 퍼부었으면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어째 이전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쫓아다니는 것이,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얼굴은 편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요 며칠 프리트 공작에게 눌려 사느라 죽상이더니.
“아, 맞다! 얼마 전에 재밌는 걸 배워 왔는데.”
“재밌는 거? 뭔데?”
“구대륙엔 손금이란 게 있대요! 실금의 모양에 따라 운명을 알 수 있다던가?”
“손금만 보고? 와, 되게 신기하다.”
한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번엔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벌써부터 수상한 냄새가 났다.
“오라버니 손금도 봐 드릴까요?”
“나야 좋지. 기대된다.”
“그럼 손 주세요!”
“……!”
저, 저, 영악한 계집애!
한스는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오드리가 손금을 보는 척 자연스럽게 클로드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저거, 저거 아주 흑심이 가득하네!’
가까이 마주하고 앉아 머리까지 맞댄 채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꼴이 썩 다정해 보였다.
“이건 생명선이래요. 그 사람의 수명을 알려 주는 거예요.”
“그래? 이 정도면 적당한 건가?”
“그럼요!”
자그마한 손가락이 실금을 따라 손바닥을 길게 훑었다. 음흉한 손끝에서 흑심이 묻어나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여기는…… 감정선. 끊기지 않고 위로 길게 이어지면 한 사람만 바라보는 순정파래요.”
“…….”
“오라버니 부인 될 사람은 좋겠다.”
클로드가 말없이 웃었다.
오드리는 진지한 얼굴로 손금을 보다가, 별안간 그의 손바닥을 장난스럽게 간질였다.
“아, 간지러워.”
“이렇게 하면요?”
“앗, 오드리!”
커다란 손이 이리저리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손이 그 뒤를 짓궂게 쫓았다. 두 사람은 유치한 장난질을 하면서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그만, 그만! 항복!”
“간지럽죠? 응응?”
“제발, 푸흐흐, 오드리!”
얼씨구?
클로드의 손이 재빠르게 오드리의 양손을 낚아채면서 장난은 끝이 났다.
‘하! 세 살 먹은 애들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꾼이었던 한스는 잔뜩 골이 난 상태였다.
도대체가 두 사람은 성인이라는 자각이 없는 걸까? 저런 유치한 장난질을 핑계로 도대체 손을 몇 번이나 잡는단 말인가?
“야, 나는?”
“뭐?”
“나는 얼마나 사는데?”
“…….”
대뜸 들이민 손바닥이 생뚱맞았다. 오드리는 흥이 다 깨진 얼굴로 멀거니 한스의 손금을 대충 훑어봤다.
“응, 뭐, 대충 오래 살겠네.”
“그게 다야? 좀 성의 있게 봐 봐.”
“와아,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겠다! 축하해. 됐지?”
“이게, 너 진짜!”
“꺅! 징그럽게! 저리 가! 저리 가라고!”
클로드는 사이좋은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통신구를 들고 일어섰다.
‘흐음, 어디에 두지?’
두 동생이 서로 도와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그의 정신은 온통 통신구에 팔려 있었다.
‘아. 저기가 좋겠다.’
그렇게 한참이나 고민한 끝에 선택한 곳은 빈 편지지가 잔뜩 널브러진 책상 위였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서재는 온통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 * *
“각하. 도대체 밤새 어디를 다녀오셨-, 흐에엑!”
“…….”
프리트 공작은 거울 너머로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눈 밑이 거뭇거뭇한 것이, 마치 지옥에서 아득바득 기어 나온 악마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더 소름이 돋는 건 입꼬리를 기괴하게 들썩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 각하! 입꼬리에 경련이, 구안와사가, 아니, 경련이!”
“…….”
실망한 입꼬리가 순식간에 원래 자리를 되찾았다. 그의 얼굴에선 미처 숨기지 못한 시무룩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이상한가.”
“어휴, 놀라라! 예?”
“…….”
데릭은 어두운 낯빛으로 책을 들어 올렸다.
방금 막 ‘상대에게 호감을 주는 방법’을 따라 해 본 참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책은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밤새도록 기다렸는데도 그의 도돌이는 머리털 한 올 비추지 않았고, 호감을 준다던 표정은 괜한 걱정을 샀다.
아무래도 저자라는 놈이 수상했다.
“……허언증인가.”
프리트 공작은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눈으로 책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저자 소개란을 보는 순간, 험한 말을 읊조리며 책을 멀리 내던졌다.
“흐엑!”
“이 책을, 당장, 불태워라!”
“예? 하지만 각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책 아닌가요?”
“…….”
보좌관은 주군이 왜 저렇게까지 열을 내나 싶어 눈치를 보다 책을 주워 들었다.
그곳엔 이미 고인이 된 작가의 생애가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머텔 설런
: 향년 82세. 일평생 순결한 삶을 살다 성스러운 땅에 묻혔다. 그의 책은 여전히 많은 모태솔로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엥?”
일평생 순결한 삶을 살았다고? 성스러운 땅에 묻혀? 그런 자가 연애서를 썼단 말인가?
‘아차, 그래서 화가 나셨구나!’
데릭은 분노한 얼굴로 책을 쏘아보았다.
그가 2주 넘게 끼고 살았던 <늑대, 비켜! : 늑대보다 매력적인 필살 유혹법>이 사실 그와 별 다를 바 없던 모태솔로가 집필한 책이라니!
‘……그래, 전부 이 책 때문이다.’
드디어 원인을 찾았다. 이 엉터리 책 때문에 그의 사랑이 엉망으로 꼬여 버린 것이다. 그는 이 작자의 간계에 속았을 뿐이다.
“당장, 이자의 무덤을 찾아라.”
“각하! 진정하십시오. 아무리 화가 나셔도 고인 능욕은-”
“그리고 이 책, 전부 사들여라. 이건 존재할 가치가 없는 책이다.”
프리트 공작은 사탄이 쓴 책을 노려보며 다짐했다. 어떻게든 전부 사 모은 다음, 저 순결한 모태솔로의 무덤 앞에서 활활 태워 버리겠다고. 그의 사랑에 훼방을 놓은 대가는 무덤 속에서라도 치러야 할 것이다.
* * *
클로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남은 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책을 읽었다.
한스는 책 한 번, 친구 한 번 힐끔거리며 은근히 말을 걸었다.
“……넌 형이 그렇게 좋냐?”
“어쩜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해? 주말 점심부터 기분 나쁘게.”
“도대체 왜 좋은데?”
오드리는 들고 있던 책을 탁 덮어 버렸다. 제 친구를 보는 눈엔 한심함이 가득했다.
“왜라니? 클로드 오라버니는 다정하고, 잘생겼고…… 아니, 근데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웃겨 정말.”
“…….”
한스는 소파에 눕듯이 몸을 기댔다. 말없이 바닥을 툭툭 내려치는 것이 꽤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오드리는 기가 막혔다. 자기가 먼저 시비를 걸어 놓고 성질을 내는 인성은 도대체 무엇이람?
“너는 그냥 형이면 다 좋냐?”
“나쁠 게 뭐 있어.”
“여름만 되면 저택에서 웃통 벗고 돌아다니는데?”
“너 진짜…….”
“나는 일절 그런 거 없거든. 되게 야만적이잖아. 안 그래? 너라도 그건 좀 못 참아 주겠지? 그치?”
오드리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그 표정을 본 한스는 괜히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 좋은 걸 너 혼자만 보고 있었단 말이야?”
……응?
“왜 진작 말 안 했는데!”
씩씩대는 숨소리는 진짜로 화가 난 것 같았다. 오드리는 새끼 곰처럼 쿵쾅쿵쾅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걸음걸음마다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묻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여차하면 멱살이라도 쥐어 잡을 태세였다.
“진작 알았으면 작년 여름에 이미 너희 집으로 들어왔지! 그렇게 여름 내내 살았겠지!”
“……야. 네가 뭘 모르는데, 형 술주정도 심한 거 알아? 취하면 그냥 홀딱 벗고 자. 아주 그냥 생닭이 따로 없다니까? 어휴, 다 큰 남자가 그러는 꼴이 얼마나 흉한-”
“수, 술도 마셨겠지!”
오드리의 콧구멍이 빠르게 벌렁거렸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그러나 상대가 동조하지 않자, 한스는 괜한 오기가 생겼다. 왠지 저 맹목적인 감정을 제 입으로 부정하는 꼴을 봐야 성에 찰 것만 같지 뭔가.
“야. 잘 들어 봐. 세상에 남자라곤 둘밖에 안 남았어. 나랑 클로,”
“클로드 오라버니.”
“아 좀! 다 듣고 고르면 어디가 덧나냐? 하여간 성질만 급해서…….”
“그래도 안 변해. 클로드 오라버니.”
“…….”
야속한 계집애. 참으로 대쪽같은 순정이다.
“됐다, 됐어.”
도대체 형이 뭐라고. 형만큼은 아니더라도 한스 역시 어디 가서 뒤처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그를 발닦개쯤으로 여기는 것은 세상천지에 저 도토리 하나였다.
‘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허, 참. 누구는 뭐 좋다는 사람이 없는 줄 알고? 괜히 욱한 마음에 발걸음이 쿵쾅쿵쾅 요란해졌다. 그러든지 말든지, 오드리는 신경도 안 쓸 것을 뻔히 알면서도.
* * *
데릭이 소중하게 꽂아 놓았던 책들은 한바탕 물갈이가 되었다.
그는 보좌관을 시켜 저자들의 뒷조사를 한 뒤, 꼼꼼하게 검열하여 검증된 저자들의 책들만 남겼다. 나머지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머텔 설런의 책은 가장 잔인하게 찢겨 지옥불처럼 솟은 장작더미에 내던져졌다.
《연인 사이에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 1위 : ‘말없이 집 앞에 찾아가 무작정 기다리기’》
이보다 더 무례할 순 없다. 헤어지고 싶다면 가장 먼저 집을 찾아가라!
그 앞에서 밤까지 샌다고? 그건 영영 남으로 살자는 것과 같은 말이다.
당신의 이별에 축배를!
“…….”
데릭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는 새로운 책으로 다시 기초부터 다지는 중이었다. 이른바, <앙큼한 여우들을 사로잡는 비법>. 평생 1,000명 이상의 여자를 만난 바람둥이가 쓴 책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오직 도돌이뿐이니 1,000명이나 되는 여자를 유혹할 생각 따윈 결코 없었다. 하지만 도돌이의 입장은 다를 수도 있지 않은가.
만약 그에게 질려 버린다면? 교활하고 음탕한 놈들이 다가와 순진한 도돌이를 현혹한다면?
“……네놈들은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그들도 눈이 달렸으니 알 것이다. 도돌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우며 깜찍한지.
심지어 화수분 같은 매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야무지게 다문 입과 결연한 연두색 눈동자, 솜사탕 같은 분홍색 머리칼, 말도 안 되는 폭언까지 버텨 내는 인내심. 아, 이 얼마나 올곧고 믿음직한가.
“다들 도돌이를 가만두지 않으려 들 테지.”
아차.
잠시 도돌이의 매력에 풍덩 빠졌던 데릭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매섭게 빛냈다.
“전쟁이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인생에 두 번째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목표는 도돌이 평생 사수. 기간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적은 불특정 다수의 간악한 놈들. 핵심 전략은 도돌이 유혹하기.
현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자신만의 매력을 단련하는 일이었다. 포로도 아닌 도돌이를 잡아다가 억지로 묶어 놓을 수야 없지 않은가?
“절대 안 될 일이지.”
그러니 매력으로 승부를 볼 것이다. 도돌이가 단단히 빠져 평생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강력한 매력으로.
그 ‘매력’이라는 것이 상당히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이긴 하지만…… 검술 수련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매일 꾸준히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간다면, 언젠가는 흘린 땀방울만큼의 성취를 얻는다는 것.
《화해에 좋은 선물 : 꽃》
꽃만큼 로맨틱한 선물이 또 있을까. 보석, 옷, 액세서리는 흔하디흔한 선물이다.
그녀가 평소 좋아하거나 관심 있어 하는 것들을 꽃과 적절하게 섞어 선물해 보자.
꽃 주위로 예쁜 목걸이를 두른다거나, 안개꽃 대신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하는 것.
중요한 것은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나 관심이 있어요’라는 느낌을 물씬 풍겨야 한다.
평소에 그녀가 뭘 좋아했는지 신중하게 떠올려 보자. 그게 화해의 첫걸음이다.
“좋아하는 것…….”
데릭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시작부터 거대한 벽에 가로막혔다.
그의 도돌이는 뭘 좋아했더라? 이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터라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가 본 도돌이는 자고 있거나, 간식을 먹고 있거나, 실수하고 나서 우왕좌왕하던 깜찍한 모습뿐이던 것이다.
‘도대체 뭘 줘야 하지?’
잠이 많다고 해서 꽃에 수면향을 뿌려서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과자를 조잡하게 끼워 넣으면 선물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뭔가 색다른 걸 주고 싶은데…….’
밤새도록 고민하던 그는 설탕 꽃을 선물하기로 했다. 그녀는 달콤한 것을 좋아하니, 식용 꽃 위로 같은 색의 설탕 시럽을 발라 굳히는 것이다. 광택이 나는 꽃은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더불어 아주 달콤하겠지.
데릭은 도돌이가 마음을 풀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프리트 공작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지금은 막 여름으로 넘어가려는 5월 말이었다.
* * *
평화로운 월요일 아침.
케벨슨 백작가는 익명의 괴한으로부터 난데없는 협박을 받았다.
“꺄악!”
“아가씨! 물러나세요!”
오드리의 비명 소리에 사용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현관 앞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흉측한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붉은 꽃이 한가득 든 바구니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이들은 전부 겁에 질렸다.
“도대체 누가 이런걸……!”
낭만적인 꽃 위로 끈적한 붉은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모양새였다. 그 광경이 얼마나 참혹하던지, 몇몇은 헛구역질을 해 댔다.
“세상에…… 우욱.”
“아가씨부터 안전한 곳으로 모셔!”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빨리요!”
오드리는 사용인들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방으로 돌아갔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도대체…… 누가…….”
흉측하게 떨어져 내리는 붉은 액체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건 보통 원한으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범인의 주도면밀함은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피 묻은 칼날이 도착했다면 놀라지도 않았을 텐데. 전혀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꽃을 사용하여 사용인들의 의심까지 피한 준비성을 보라. 이 모든 건 철저히 계획된 협박임이 분명했다.
‘이럴 만한 사람이 없는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케벨슨 백작가는 딱히 원한을 산 적이 없었다. 특정 가문과 척을 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인지, 불길한 협박은 무려 며칠 동안이나 이어졌다.
“꺄악!”
현관 앞에는 아침마다 똑같은 바구니가 배달되었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날이 갈수록 꽃바구니의 크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는 것. 불안감은 꽃바구니만큼이나 커졌다.
‘저택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는데, 몸의 절반은 담벼락에 가려져서-’
‘마, 마치 층을 세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사람 같지가 않은, 굉장히 이상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어요.’
며칠이 지나니 목격담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케벨슨 백작의 고민은 나날이 깊어만 갔다.
“아무래도 침실을 옮기는 게 좋겠구나.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는 절대 혼자 돌아다니지 말아야 한다?”
“괜찮아요, 마도구도 있는걸요.”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두려운 것은 오드리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어.’
그날 밤.
자그마한 실루엣 하나가 저택 주위를 연신 기웃거렸다. 제 몸보다 큰 자루를 끌고 나온 오드리였다.
“너무 많은가? 아냐.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낑낑대는 걸음을 따라 특별 제작한 마도구가 하나둘 뿌리를 내렸다. 사용인과 지인을 제외한 침입자에게 자동으로 공격을 가하는 트랩이었다.
오드리는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 모종삽을 들고 밤새 저택 주위의 땅을 파헤쳤다. 손과 옷이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마지막 마도구가 묻힌 땅을 손으로 도닥거리고 일어난 후엔 흐뭇한 얼굴로 저택을 둘러보았다.
“다들 안심하고 자도록 해!”
오드리는 그 누구도 해를 입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 * *
수요일 아침.
케벨슨 백작가 앞에는 여지없이 설탕 꽃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커다란 상자도 함께였다. 도대체 언제 두고 간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 아가씨 앞으로 온 건데요?”
“그냥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불길해요…….”
“맞아요.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요! 제임스한테 얼른 버리라고 할게요.”
“으음. 잠깐만.”
오드리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상자를 살폈다.
뭔가 이상했다. 꽃에는 수취인 이름도 없더니, 상자에만 이름을 적어 놓았다고? 키만큼 솟은 나무 상자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같은 사람이 보낸 게 아닐지도 몰라.”
“네에? 하지만 바로 옆에 둔 게 어쩐지 좀 수상해요.”
“다들 잠깐 물러나 볼래?”
“뭘 하시려고…….”
오드리는 돋보기 같은 것을 꺼내 상자 주위를 세밀하게 살폈다. 위험을 감지하는 마도구였다. 구석구석 갖다 대 봤지만, 별다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위험한 건 아닌 것 같아. 로즈, 이것 좀 열어 줄래?”
하녀는 영 찜찜한 얼굴로 상자를 열었다.
그러나 덮인 천을 치우려는 순간, 뭔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튀어 올랐다.
“짜잔! 서프라이즈!”
“엄마야악!”
“……오라버니?”
오드리의 눈이 커졌다.
연한 분홍빛이 섞인 금발, 익숙한 푸른 눈, 통제가 안 될 정도로 커다란 몸뚱이.
“오드리이, 내 동생!”
“…….”
마탑에 있어야 할 아놀드였다. 그는 양팔을 쭉 뻗은 채로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안 본 사이 볼이 홀쭉해졌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부읍.”
“연락도 없이 웬일이냐고? 아아. 특별 휴가를 받았거든. 무려 이 주나!”
아놀드는 놀란 동생의 볼을 쥐고 이리저리 망가뜨리느라 바빴다.
“후우웁.”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상자에 들어 있었지! 다섯 시간밖에 안 기다렸는걸?”
“…….”
“역시 내 동생뿐이야!”
오드리는 망연자실했다.
‘이 주나 있다 간다고?’
1년에 겨우 며칠 보는 오라버니가 반갑긴 하지만, 벌써부터 피로가 몰려왔다. 아놀드는 지나치게 외로움을 많이 탔기 때문이다.
그는 단 1초도 혼자 있는 것을 못 견뎌 했다. 게다가 추위는 또 어찌나 타는지, 한여름에도 사람의 온기를 찾아다니지 않던가.
‘도대체 마탑에선 어떻게 지내는 거람?’
간단히 말해서 사람 구실 하기 어려운 성격이랄까? 이러다 노총각으로 늙어 죽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푸하! 맞다. 그런데 마탑에 괜찮은 여자는 없어요?”
“으응? 갑자기 왜?”
“오라버니도 벌써 스물일곱이잖아요. 더 늦기 전에 연애라도 해야죠!”
절대로 다른 여자에게 오라버니를 떠넘기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아놀드는 끔찍한 무언가를 떠올린 듯 아주 질색을 했다.
“하지만 마탑 사람들은 전부 이상한걸.”
“…….”
오드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마탑 사람들이 이상한 걸까? 그들은 오히려 아놀드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난 내 동생이랑 평생 살고 싶은데.”
“……!”
아니, 이게 무슨 끔찍한 소리야!
그런데 또 아놀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시집가는 오드리의 짐 마차에 몰래 숨어든 다음, 자기는 개집에서 자도 된다며 남의 신혼집 앞마당을 독차지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
아무리 소중한 오라버니라도 그건 사절이다.
“아차! 그나저나 이 오라비가 뭘 가져왔게? 응응? 우리 도토리 선물 가져왔지!”
아놀드는 방금까지 하던 말도 잊고, 온갖 호들갑과 함께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10살짜리 아이나 까르르 좋아할 법한 쇼맨십이다.
“궁금하지? 궁금한 사람 손!”
오드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아무래도 오라버니는 동생의 성장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 것 같다. 20살 동생 앞에서 광대 흉내가 가당키나 한가?
선물 상자를 이리저리 들썩이는 손놀림이 현란했다. 그 모습은 아놀드가 마탑에 들어가기 직전, 어린 오드리를 놀아 주던 때와 변함이 없었다.
* * *
데릭은 오늘도 케벨슨 백작가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도돌이가 싫어할까 봐 직접 앞에 나서지는 못하고, 담벼락 뒤에 숨어 하염없이 기다리는 눈이 애달팠다.
그런데 그때. 커다란 상자를 실은 짐 마차 한 대가 백작가 앞에 멈췄다.
‘저건 뭐지?’
데릭의 머릿속으로 본능적인 경고음이 울렸다. 짐꾼 몇 명이 옮겨야 할 정도로 커다란 상자는 그가 준비한 꽃바구니의 5배는 되어 보였다.
“…….”
날이 갈수록 커지는 꽃바구니가 어쩐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안 되겠군. 내일부터는 더 큰 걸 준비해야겠어.’
데릭은 괜한 승부욕을 불태웠다. 도돌이를 향한 성의와 마음만큼은 다른 사람들에게 질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저 상자는 뭘까 궁금증이 도졌다. 케벨슨 백작가에서 시킨 물건이라면 당연히 저택 내부까지 배달되는 게 맞을 텐데. 문 앞에 두고 가는 것은 선물이기 때문일까?
‘이상하군. 케벨슨 백작과 도돌이만 있는 집에 저렇게 큰 선물이?’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쉰이 다 되어 가는 백작에게 사람 키만 한 선물을 보낼 로맨티스트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나의 도돌이!’
순간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감히! 감히 어떤 놈이 그의 도돌이에게 꼬리를 친단 말인가? 두 사람이 ‘잠시 잠깐’ 멀어진 사이를 노리는 저열함이 기가 막혔다.
“……죽고 싶은가 보군.”
데릭의 등 뒤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도돌이가 발견하기 전에 상자째로 뎅강뎅강 조각을 내고 싶었다.
고작 며칠 사이에 날파리가 달라붙다니! 귀엽고 깜찍한 도돌이를 지키는 삶이란, 참으로 보람차면서도 피곤했다.
‘혹여 도돌이가 넘어가기라도 하면 어찌한다?’
머릿속으로는 불길한 상상이 끊이질 않았다. 죄 많은 남자는 아주 애가 타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우선은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인내했다. 이것 또한 신께서 그에게 내린 형벌이라고 생각하며.
몇 시간 뒤, 해가 뜨고 날이 밝았다.
오늘도 사랑스러운 도돌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평소와 같이 깜짝 놀란 기색이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군.’
데릭은 흐뭇하게 웃다가 정색했다. 도돌이의 관심이 그 옆의 상자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보나 마나 크기로만 승부하는 싸구려 물건이겠지.’
하지만 야속한 도돌이는 그의 속도 모르고 한참이나 싸구려 상자 근처를 서성였다. 그러더니 사용인 하나를 시켜 기어코 상자를 열어 버렸다. 그의 꽃엔 시선도 주지 않고.
“짜잔! 서프라이즈!”
“……!”
─콰직.
데릭은 저도 모르게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진작 썰어 버릴 것을. 사정없이 동강을 내 버릴 것을!’
별안간 상자 속에서 외간 남자 하나가 톡 튀어나온 것이다. 그의 도돌이를 꽉 껴안으며 몸을 치대는 것이, 살살 눈웃음을 치는 새끼 여우처럼 간교하기 그지없었다.
‘저런 교활한 놈을 봤나!’
데릭은 후회했다.
그는 왜 저런 창의적인 생각을 못 했을까? 꽃바구니 안에 꾸역꾸역 몸을 밀어 넣어 보기라도 할 것을!
그런데 도돌이는 데릭의 마음도 모르고, 새끼 여우 같은 놈을 저택으로 들였다.
‘어떤 놈인 줄 알고……!’
데릭은 시뻘건 눈동자로 한참이나 남의 집 대문을 노려봤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면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갈 태세였다.
“각하.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
더위에 지친 보좌관이 눈치도 없이 프리트 공작을 재촉했다. 집무실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생각하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주군은 오늘따라 요지부동이었다.
“각하?”
“오늘 일정은 전면 취소한다.”
“예?”
“…….”
“으앗, 각하! 같이 가시지요!”
보좌관의 말 따위 가볍게 무시한 채, 데릭은 아예 케벨슨 백작가 앞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5분 대기조와 같은 모습이었다.
칼자루를 움켜쥐고 한참이나 서 있던 데릭은 두 남녀의 외출까지 따라나서기에 이르렀다.
* * *
“……가깝군. 지나치게 가까워.”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이 화기애애한 한 쌍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날 때부터 혼자인 루카스는 그런 주군을 이해하지 못했다.
‘볼수록 마음만 아플 텐데, 왜 쫓아다니면서까지 눈에 담는 거지? 변태도 아니고 말이야.’
프리트 공작에게 스스로를 고문하는 취미가 있을 줄이야.
반면, 케벨슨 영애는 편해 보였다. 의상실에서 외간 남자의 옷을 직접 골라 주기도 하고, 가까이 붙어 서서 장난을 치기도 했다. 아무래도 꽤 친숙한 사이 같았다.
‘각하껜 과분할 정도로 좋은 분이시지.’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오드리의 편을 들었다.
가짜 사연인 줄도 모르고 아기 장난감까지 챙겨 주던 분 아니던가. 험악한 프리트 공작 옆에 있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사람이다.
데릭은 제 보좌관이 불경한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가슴께를 더듬었다. 꽉 조여드는 심장이 갑갑했다. 폐까지 꽁꽁 묶인 듯 숨쉬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아무리 미간을 찌푸려도 고통이 줄지 않았다.
“…….”
분명 겉으론 상처 하나 없는데도 마치 속이 썩어 가는 기분이다.
두 사람이 지나치게 잘 어울려서 더욱 그랬다. 남자는 어두컴컴한 데릭과 달리 밝은 사람이었다. 도돌이를 닮아 환하고 귀여운 미소도 프리트 공작의 삐딱한 비웃음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돌아가지.”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데릭이 힘없이 돌아섰다. 한 걸음 한 걸음 도돌이와 멀어질수록 심장에 못이 박히는 것만 같았다.
이 모든 건 그가 도돌이를 아프게 한 죗값이리라.
그러다 문득 불안함이 도졌다.
‘도돌이가 이대로 평생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어떡하지? 돌아오지 않겠다면?’
조용히 죗값을 치른다고 해서 도돌이가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는 까닭이다. 이러다 영영 도돌이를 잃을까 두려워졌다.
─멈칫.
‘도돌이를 잃어? 저자에게?’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 살기 위해 다른 이의 목숨을 거둬 냈던 무자비한 손끝이 죽음보다 더한 공포로 떨려 왔다. 새하얗게 질린 프리트 공작은 떨리는 손을 말아 쥐었다.
“……저자를, 샅샅이 털어라.”
“털어요?”
잡아서 족치라는 건가?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대꾸가 없었다.
‘척하면 척이지!’
제 나름대로 알아들은 루카스는 당장 납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오호. 감히 각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겠다?
‘넌 이제 죽었다, 요놈아!’
저놈은 어마어마한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 * *
“역시 집이 최고라니까!”
아놀드는 기분 좋게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1년에 고작 한두 번 돌아오는 게 전부지만, 집은 여전히 그의 안식처였다.
“새소리도 오랜만에 듣는 것 같네.”
시끄러운 마탑과 달리 고요한 아침이 좋았다. 몇 대에 걸쳐 가꾸어진 정원도 고즈넉하니 멋스러웠다.
“맞다, 저 나무 위에 오두막집이 있었지? 도토리가 좋아했었는데! 태풍이 부는 날 저기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아버지께 잔뜩 혼이 났었지. 퉁퉁 부은 얼굴이 복어처럼 귀여웠는데.”
아놀드는 킥킥 웃으며 어린 날의 두 사람을 떠올렸다. 집안 곳곳엔 사랑하는 동생과의 추억이 가득했다. 동생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와의 추억까지도 그가 가족 대표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사삭. 사사삭.
정원의 풀들이 바람을 맞는 소리마저 정겹지 않은가.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마탑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케벨슨 백작가는 참으로 변한 게 없었다.
아놀드는 기분 좋게 웃으며 풀숲 근처로 다가섰다.
“흥, 흥, 흥. 냄새나 한번 맡아 볼-, 흐읍!”
그때, 수풀에서 튀어나온 낯선 손 하나가 그의 입을 틀어막은 채 끌어당겼다.
“으으읍!”
“닥쳐라, 요놈아.”
“읍읍!”
─사삭. 사사삭.
한참이나 바동대던 아놀드는 수풀 너머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엉망으로 흩어진 잎사귀뿐이었다.
─사삭. 사사삭.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면서 케벨슨 백작가는 다시 죽음 같은 침묵에 휩싸였다.
여느 때와 같은 고요한 아침이었다.
* * *
“으음…….”
잠시 정신을 잃었던 아놀드가 깨어난 곳은 공작성의 지하 감옥이었다. 눈앞에는 심상치 않은 인상의 거구 10명이 서 있었다. 불끈거리는 팔뚝은 거의 성인 남성의 머리통만 했다.
“촤!”
그중 가장 ‘험악한 척’을 하는 루카스가 앞으로 나섰다.
“넌 이제 공작 각하가 오시면 죽을 목숨이다!”
“으…… 제가 여긴 왜…….”
“요놈 보게? 네 잘못을 몰라?”
“으으.”
루카스는 그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끌어당겼다. 의자에 묶인 아놀드가 마지막 잎새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응? 상대를 보고 덤벼야지. 감히 각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
“그분이 어떤 분이신 줄 알고! 각하께 참교육을 받으면 정신이 번쩍 들 거다, 요놈아!”
─끼이익.
그때, 듣기 싫은 쇳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단정한 발걸음으로 등장한 것은 데릭이었다.
루카스는 용맹한 사냥개처럼 어깨를 쫙 펴고 의기양양하게 제 주군을 돌아보았다.
“각하! 안 그래도 요놈을 막 조지려던 찰나입니다.”
“……이자를, 왜.”
“샅샅이 털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주 눈물 콧물 쏙 빼놓을 작정입니다!”
“…….”
데릭은 묶여 있는 남자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가끔 그의 보좌관은 멍청하게 굴 때가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털라’는 것은 몰래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무작정 납치를 하면 대체 어쩌자는 건가?
이젠 곱게 돌려보낸다 해도 문제였다. 저놈은 이미 그의 도돌이와 아는 사이 아니던가. 괜히 말이라도 잘못 꺼내는 순간, 데릭은 도돌이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럼 영원히 남남이 되겠지.’
보좌관을 노려보는 눈엔 숨길 수 없는 분노와 한심함이 가득했다. 그렇게 당당하게 윽박을 지르더니. 정작 루카스는 아놀드보다도 더 주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눈치도 없이 우쭐대고 있었다.
“물부터 뿌릴까요?”
“하……. 됐다.”
“예? 그럼 오랜만에 인두로 시작할까요? 저놈이 실토할 때까지 아주 살갗을 맨들맨들하게 지져-”
“…….”
“각하?”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왜 저러시지? 너무 곱게 데려온 걸까? 손발을 전부 부러뜨렸어야 하는 건가?
한편, 아놀드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겁먹은 초식동물 같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 벌벌 떠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데릭은 밀려드는 찝찝함을 애써 무시하며 그에게 다가섰다. 의도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여우 같은 놈에게 대단히 미안한 것도 아니었다.
“저, 저기, 왜 저를.”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있더군.”
“예?”
“심지어는 끌어안기까지 하고.”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다신 도돌이의 주위에서 얼쩡대지 못하도록 단단히 겁을 줘야겠다.
데릭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싸늘하게 추궁했다.
“상자까지 준비하는 치졸함은 대체 어디서 배워 왔지?”
“상자?”
“사내로 태어나 어찌 그리도 비겁한 수를 쓰느냔 말이다. 떳떳하지 못하게.”
“상자라니…… 호, 혹시 오드리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흐읍.”
불시에 서늘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날카롭게 벼려진 공기가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아놀드는 벌벌 떨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일반인에게 마법을 쓰는 건 금기였기 때문이다.
“네 이름이 무엇이지?”
“으윽, 아, 아놀드.”
“아놀드? 평민인가? 감히 평민 따위가,”
“아놀드 케, 케벨슨…….”
“…….”
“아, 아놀드 케벨슨입니다. 도대체 저에게 왜, 왜 이러시는 건지 전 도무지-”
“……!”
제국에 ‘케벨슨’이라는 성을 가진 가문이 또 있던가? 아니.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없지.
지하 감옥은 순식간에 합동 장례식장이 되고 말았다. 상을 당한 것은 ‘프리트 공작의 사랑’과 ‘루카스’. 상주는 넋이 나가 버린 데릭이었다.
* * *
“흐억! 가, 각하!”
“아주 제멋대로 남의 사랑을 망쳐 놓는군!”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알고 그랬다면 진작 목이 잘렸겠지.”
“자, 잘못했습니다…….”
“…….”
데릭은 여전히 분노한 상태였다.
‘어쩐지.’
억울한 눈으로 울먹이는 모습이 묘하게 익숙하다 싶더니. 그녀의 오라비는 도돌이와 ‘깜찍함’을 공유하고 있었다. 사내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려니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도돌이와 피를 나눈 남매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무튼 그랬다.
“눈이 삐었나 보군. 딱 봐도 도돌이의 오라비인 것을. 그런 깜찍함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이를 어쩐다?”
데릭은 다시 복잡해졌다.
도돌이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바쁜 와중에 그녀의 오라비에게까지 폐를 끼치고 말았다.
일단 급한 대로 아놀드를 풀어준 다음, 손님방으로 안내하긴 했다.
‘저, 어디로 가는 건가요?’
‘특별…… 환대의 방으로.’
‘특별 환대? 아! 파티인가요?’
‘그, 비슷하다.’
‘야호!’
‘…….’
‘앗, 그런데 펜과 종이를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미처 초대장을 준비하지 못해서요!’
이대로 돌려보낼 순 없으니 잠시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일단 아놀드가 있는 방으로 음식들과 포도주, 케이크, 폭죽 등을 급히 밀어 넣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도 적당한 변명이 떠오르질 않았다.
도대체 뭐라고 둘러댄단 말인가? 사람을 착각했다고? 오해가 있었다고? 그것도 아니면…… 깜짝 파티였다고?
물론 아놀드는 정말 이 모든 것이 깜짝 파티라고 믿는 듯했다. 도돌이를 닮아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자, 자! 다들 손 높이 뻗으시고!”
“이렇게요?”
“저와 비기거나 지면 손을 내리는 거예요!”
“어머, 떨려라.”
“자~ 준비하시고! 가위, 바위, 보!”
“와아아아!”
아놀드는 손님방에서 공작성 고용인들과 신나게 놀고 있었다. 문 너머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걸로 보아, 사교성 하나는 최고였다.
“일단 저렇게 좋아하는데 실컷 놀다 가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
“에밀튼 백작가의 영식들과도 친하다고 하니, 전부 들여보내면 될 것 같습니다. 케벨슨 백작님도요.”
“우선 그렇게 하지.”
“예!”
한창 일에 집중하고 있던 세 남자는 영문도 모른 채 환대의 방으로 불려갔다. 아놀드 덕에 의도치 않은 휴가를 받은 셈이었다.
“아버지! 클로드! 한스!”
“네가 왜, 집에 있지 않고…….”
“아놀드 형님?”
“뭐야, 언제 나왔어요?”
어느새 고용인들과 통성명까지 마친 아놀드는 신나게 노느라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다 같이 노는 거예요!”
“와아아아아아!”
“나 원 참.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낮부터 이어진 파티에 포도주가 무려 80병이나 투입되었고, 저녁 식탁에 올랐어야 할 칠면조도 동이 났다.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도돌이의 오라비가 신났다면 그걸로 되었다.’
이렇게라도 실수를 만회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니까.
그는 아놀드가 지하 감옥에서의 섭섭함을 잊고 파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특별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성원에 힘입어 파티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아놀드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 * *
늦은 밤.
공작성으로 심부름꾼 하나가 도착했다.
“케벨슨 백작님께서 보낸 와인입니다.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신 환대에 감사드린다고 하셨습니다.”
“…….”
케벨슨 백작은 귀가하자마자 선물을 보내왔다. 그 집 귀한 아들을 납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멱살잡이까지 한 보좌관은 참으로 면목이 없었다. 데릭은 장차 마법부를 이끌어 나갈 인재에게 그 정도의 환영식은 당연하다는 공치사를 곁들이며 일을 잘 마무리하였다.
덕분에 루카스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나의 도돌이만 신경 쓸 게 아니야.”
“…….”
“결혼이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인데, 당연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겠지.”
보좌관은 할 말은 많았으나 꾹 참았다.
그의 주군은 걷지도 못하는데 뛸 생각부터 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 머릿속으로는 자식이며 손주, 심지어는 증손주들 이름까지 전부 정해 놨을 게 분명하다.
“케벨슨 백작은…… 그래. 법무부에서 일하려면 답답할 테지. 한 부서의 수장에게 별도의 집무실도 내주지 않다니, 나도 참 무심했어.”
데릭의 말이 길어질수록 어쩐지 불안해졌다.
“당장 사 층에 케벨슨 백작의 집무실을 하나 마련해라. 적어도 이번 주 안에 사용할 수 있도록.”
“각하. 사 층엔 그럴 만한 공간이 없습니다.”
“뭐든 하나 없애면 되는 것 아닌가.”
“…….”
전부 각하께서 사용하시는 방인데요?
그러나 사랑에 빠진 남자는 제 편의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자주 마주치다 보면 백작도 나를 친숙하게 느끼겠지. 마치…… 사위처럼.’
데릭은 제멋대로 단란한 가족을 상상했다.
인품이 훌륭한 외할아버지와 사랑스러운 어머니, 엄하지만 누구보다도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 사교성이 출중한 외삼촌까지. 그 밑에서 자라날 아이는 분명 총명하고 사랑이 넘칠 것이다.
‘우리 이름을 한 글자씩 합치는 것도 좋겠군. 남자아이라면 데드릭, 아니, 데드가 좋겠군. 여자아이라면 오데트…….’
그는 두 사람의 얼굴을 섞어 가며 아이들의 얼굴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를 닮은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도돌이_최종1’, ‘도돌이_진짜_최종’과 다름없는 도돌이의 복사본들만 있을 뿐. 이쯤 되면 데릭은 거의 이름만 빌려주는 꼴이었다.
‘황새가 잘 물어다 주어야 할 텐데…….’
마음으로 몇 년 일찍 낳은 아이들은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이 모든 건 도돌이를 닮은 덕분이리라. 정말 상상만으로도 황홀한 도돌이 일가였다.
* * *
케벨슨 백작가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각하께서 다음 주부터는 근무지를 옮기라고 하시더구나. 사 층으로.”
“법무부 전체가 이동하는 건가요?”
“아니. 나만 오라고 하셨단다.”
“……!”
“분명 사 층에는 집무실이 없는데, 참 이상하구나.”
오드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프리트 공작이 아버지를 4층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곳엔 집무실이 없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디로 가는 걸까?
문득 한스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사 층엔 어차피 갈 일도 없겠지만, 실수로라도 가지 마. 그 층에 침실이며 집무실이며 서재며 다 몰려있거든. 심지어 고문실까지.’
‘괜히 알짱거리다가 험한 꼴 당하지 말고.’
“……!”
오드리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아무래도 프리트 공작은 편지를 보낸 것이 그녀임을 알아챈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버지를 고문실이 있는 4층으로 데려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혹시…… 아놀드 오라버니의 환영회도 미리 계획된 일이 아니었을까?
‘사전 조사였던 거야!’
오드리는 허망한 얼굴로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 하나 때문에 케벨슨 백작가가 위험한 남자와 얽혀 버렸다. 얼마 뒤면 찾아올 끔찍한 미래가 절로 보이는 듯했다. 나란히 누워 뎅강뎅강 목이 잘릴 ‘케벨슨 일가의 처형식’이.
‘안 돼!’
안 된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 * *
밤새 잠을 설친 오드리는 날이 밝자마자 공작성으로 향했다.
“각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바쁘다. 돌려보내라.”
“그게, 케벨슨 영애께서-”
“……!”
─벌떡.
데릭은 급하게 일어섰다. 넘어진 잉크병에서 꿀렁꿀렁 잉크가 새어 나왔다. 중요한 서류가 검은 얼룩으로 엉망이 되는데도 그는 멍청하게 서서 꼼짝을 못 했다.
‘나의 도돌이가? 왜? 설마…… 납치 사건을 알아 버린 건가?’
찔리는 게 많은 터라 당연히 나쁜 생각이 먼저 들었다. 목 위쪽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험악한데, 목 아래로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각하. 영애께서 기다리십니다.”
“어떡한다. 오늘은 또 얼마나 깜찍할, 아니, 그 전에 뭐라고 해명을…….”
“…….”
루카스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먼 산을 바라보았다. 가끔 주군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진 않았다.
그러는 동안 데릭은 가진 책을 전부 꺼내 급하게 벼락치기를 시작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화법은 한 번씩 되묻는 것.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
그리곤 도돌이를 집무실로 들이기에 앞서 제 상태를 점검했다.
‘창가에 서 있는 게 낫나? 아니야, 위압적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책상에 앉아 있을까? 그래. 이지적인 매력이 한껏 풍길 테지.’
마지막으로 <아슬리타 제국의 보호무역에 관련된 법률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수혜자의 관점에서 비평한 책>을 꺼내 놓았다.
“들라.”
“고,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
아, 그의 도돌이는 오늘따라 더 깜찍한 옷차림으로 등장했다.
‘읏.’
데릭은 남몰래 가슴께를 붙잡았다. 말간 눈으로 오롯이 그만을 바라보는 모습이 오늘따라 심장을 아프게 했다.
“시,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저희 아버지를 사 층, 흑, 사 층으로 부르셨다 하여…….”
아차.
잠시 넋을 놓은 그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지금이 바로 되물어야 할 타이밍이다.
“불렀는데?”
“……!”
그러나 예상과 달리, 오드리는 세상을 다 잃은 얼굴이 되었다.
‘네까짓 게 뭘 어쩔 거냐’라며 되묻는 모습이 말투가 너무도 강압적이기 때문이다.
오드리는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부여잡고, 그녀가 이 자리에 온 이유를 당당하게 밝혔다.
“아버지 대신 저를……, 흑, 저를 데리고 가세요!”
“영애를?”
“흐윽!”
하지만 목소리는 새끼 염소처럼 엉망으로 떨리고 있었다.
반면, 의도치 않게 심장을 세게 얻어맞은 데릭은 거의 패닉 상태였다.
‘그러니까 지금, 도돌이를 사 층으로 보내 달라는 건가? 나와 같은 층으로?’
“……!”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순간이 왔다. 도돌이가 그에게 돌아오겠노라고 직접 선언한 것이다!
아, 프리트 공작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 * *
“읏차.”
공작성 재단사 앙드레는 약 20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프리트 공작이 제 봄옷 컬렉션을 완성한 포상으로 기나긴 휴가를 안겨 준 덕택이었다.
“순식간에 지나갔군, 그래.”
앙드레는 제 목에 걸린 꽃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남쪽 왕국의 여운을 즐겼다.
그런데 항구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한 여자가 무섭게 돌진해 왔다.
“안녕하십니까. 트래시 일보의 니콜 뵈기시르 기자입니다. 지난 이십 일간 행방이 묘연하여 제국민의 걱정을 사셨는데요, 혹시 프리트 공작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예?”
앙드레는 당황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제국민들이 그를 걱정해 준다니, 이것 참 성원에 감사하기는 한데……. 도대체 일개 재단사인 그를 왜 걱정한단 말인가?
“이쪽 좀 봐 주세요!”
“여기도요!”
“어엇?”
뒤늦게 합류한 일행들이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 댔다.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앙드레는 저도 모르게 오만상을 찡그리며 팔로 눈을 가렸다.
“그간의 실종이 프리트 공작과 관련된 것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그게…… 각하께서 이십 일간 국외 휴가를-”
“프리트 공작이 국외로 보냈다는 말씀입니까?”
“예에, 뭐. 그렇긴 하죠. 덕분에 남쪽 왕국에서 잘 먹고 잘 놀다가-”
“머나먼 남쪽 왕국까지 쫓겨난 심정이 어떠십니까?”
“쫓겨나다니요? 그냥 휴가차 방문-”
“적응이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뭐, 음식이 약간 입에 안 맞기는 했는데-”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해 주시죠!”
“어. 가, 감사합니다?”
용건이 끝난 기자들은 순식간에 짐을 챙겨 사라졌다.
홀로 남은 앙드레는 진이 빠진 얼굴로 풀썩 주저앉았다.
“에휴.”
유명인의 삶이란 이런 것일까? 너무 갑작스러운 탓에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나저나 사진이 잘 나왔어야 할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세수라도 하고 올 걸 그랬다. 그래도 명색이 공작성 재단사인데, 체면이 말도 아니었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신경 써야겠어.’
앙드레는 괜히 주위를 의식하며 후다닥 마차에 올랐다.
이제 꿈 같던 휴가를 뒤로하고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저를 데리고 가세요…….’
데릭은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덮은 채 뜨뜻한 숨을 몰아쉬었다. 예상치도 못한 도발에 아주 거하게 치어 버린 참이었다.
‘하……. 둘 중 하나만 해야 할 것 아닌가.’
고작 그의 어깨 밑에서 아른거리는 주제에, 도돌이는 매력이 한도 끝도 없다. 치사량을 넘은 깜찍함과 더불어 숨겨진 당돌함까지. 그의 심장을 난도질하려고 작정한 걸까?
그를 바라보던 청초한 연두색 눈동자, 벚꽃잎처럼 흩날리는 부드러운 분홍빛의 머리칼, 아기 염소 같은 연약한 목소리, 거기다 올망졸망한 생김새까지. 도대체 뭐 하나 평범한 것이 없었다.
‘이렇게 앓다 죽는 건가.’
이상하다. 도돌이를 생각하면 자꾸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 소리가 유난히도 소란스러워서 벌써 이틀째 밤잠을 설치는 중이었다.
그에게 도돌이란, 커피 서른 잔 뺨치는 각성제였다. 데릭은 눈 밑이 시꺼멓게 변할 때까지 자기가 피곤한 줄도 몰랐다. 사랑의 힘이란 이렇게도 위대했다.
그렇게 날밤을 꼬박 새워 월요일 새벽이 찾아왔다. 드디어 그의 도돌이가 돌아오는 날이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음이 들뜨고 싱숭생숭했다.
‘아직도 세 시밖에 안 됐군.’
1분 간격으로 시계를 확인하던 데릭은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미 잠은 다 잔 듯했다.
그는 설렁줄을 당겨 이른 치장을 시작했다.
오늘을 위해 맞춘 개나리색 옷은 평소보다도 훨씬 화려하고 정교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도돌이를 유혹해야 하니,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멋진 옷을 준비한 참이다.
그러나 겹겹이 쌓은 프릴 때문인지 팔과 목을 집어넣기도 힘들었다.
“가, 각하. 너무 힘을 주시면 옷감이 찢어집니다……!”
“그렇군.”
힘으로 욱여넣던 프리트 공작은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미리 준비하길 잘했군.’
5시에 일어났다간 마음만 급할 뻔하지 않았는가? 허둥지둥하다가 초라한 몰골로 도돌이를 마주하긴 싫었다. 그녀에겐 가장 멋지고 완벽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땐 3시 반이었다.
데릭은 완벽한 옷차림으로 침실을 서성거리다가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한쪽에는 그가 키우는 식물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그런데 평소처럼 물을 주고 잎을 하나하나 닦아 보아도 시간이 안 갔다.
‘아직 네 시군. 저놈의 해는 오늘따라 왜 늦게 뜨는 거지?’
험악한 시선이 괜히 창밖을 쏘아봤다. 그러나 태양의 멱살을 잡고 끌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데릭은 혀를 차며 닦은 잎을 닦고, 또 닦았다. 왠지 푸른 잎사귀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꺄아악! 차라리 죽여 줘!’
표피가 쓸려 나가는 뜨거운 고통 속에서 잎사귀들은 울부짖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정성 덕분에 식물들은 오늘따라 광이 났다.
또 한참이나 집무실을 서성거리던 데릭은 결국 복도로 나왔다.
“쯧.”
아직도 공사가 한창인 옆방을 보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벌써 삼 일째인데 여전하군.’
아마 완벽하게 단장하려면 며칠은 더 걸릴 듯하다.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사용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데릭은 가장 완벽하고, 환하고, 예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무려 ‘그의’ 도돌이가 머물 공간 아닌가.
그의 집무실과 완전히 벽을 터서 최소한의 가림막만 설치할 예정이었다. 마치 부부침실처럼.
‘우리는 이제 같은 공기를 마시게 되겠지. 숨결도 함께 공유하는…… 그런 사이가 되는 것이다.’
벌써부터 귀가 뜨거워졌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복작복작한 재무부에서 부대끼는 것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것마저도 도돌이와 함께라면 기꺼웠다.
‘다섯 시. 곧 있으면 도돌이가 오겠군.’
이제 남은 시간은 3시간 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 30분이 지났을 무렵, 다급한 얼굴의 보좌관이 들이닥쳤다.
“각하! 오늘 아침 신문 보셨습니까?”
“그럴 시간 없다.”
“하지만 기사가!”
“나가라. 안 그래도 떨리니까.”
“…….”
“정신 사납기는.”
루카스는 신문 뭉텅이를 쥐고 안절부절못했다.
‘각하, 지금 연애나 하실 때가 아니라고요!’
그러나 데릭은 초조하게 손끝을 두드리느라 신문엔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도돌이의 마음을 되돌려 놓겠다.’
도돌이가 마지막으로 준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이미 신문사에 정식 항의까지 한 루카스는 답답함에 발만 동동 굴렀다.
《공작성 재단사 충격 고백 “프리트 공작에 의해 국외로 추방당해… 고통의 시간”》
《미스터리 : 재단사의 뜨거운 눈물》
《실종 재단사, 눈물의 기자회견 “와 주셔서 감사해”》
《끊이질 않는 말, 말, 말… 공작성 인근 숲 변사체 발견?》
‘나중에 알면 분명 화내실 것 같은데…….’
최근 들어 프리트 공작을 향한 악의적인 기사가 유독 끊이질 않았다. 데릭이야 익숙한 일이라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보좌관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건 내 선에서 해결해야겠어.’
하늘 높은 공작가 체면이 말도 아니지 않은가. 주군은 사랑의 도끼질이나 열심히 하시라지. 그분의 명예를 되찾는 건 그의 몫이니. 이래 봬도 루카스는 자칭 언론 플레이의 제왕이었다. 물론 아무도 몰랐지만.
* * *
“제나. 만약, 아주 만약 내가 오늘 돌아오지 못한다면…….”
“네? 외박하실 건가요?”
“아무 말 말고 이 상자를 열어 봐. 알았지?”
“으음? 네.”
오드리는 슬픈 눈으로 비밀 상자를 응시했다. 그곳엔 어젯밤에 쓴 유언장과 재산 목록이 들어 있었다. 남은 이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
결연한 얼굴로 골라 든 옷도 새카만 원피스였다.
‘핏자국을 잘 가려 주렴…….’
마지막 모습이 피투성이인 건 싫었다. 너무 참혹하지 않은가. 게다가 분명 남은 이들에게도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아버지껜 먼저 갔다고 전해 줘.”
“예, 아가씨.”
“그동안…… 고마웠어.”
“네?”
“…….”
오드리는 마지막으로 시녀를 꽉 끌어안은 뒤 돌아섰다.
아직 날도 밝지 않았지만, 오늘은 일찍 출발하려 한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마주치면 괜히 미련만 남을 것 같고, 모두가 잠든 새벽을 틈타 고요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아버지, 오라버니…… 죄송해요.’
오드리는 도망치듯 먼저 출발했다. 제나는 그 초연한 뒷모습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다그닥 다그닥. 끼익.
“히익!”
마차에서 내리던 오드리는 그대로 나자빠질 뻔했다. 프리트 공작이 성문 밖으로 친히 마중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왔군.”
“……!”
그의 한쪽 입꼬리가 경련이라도 난 듯 잘게 씰룩거렸다.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매우 힘겨운 기색이다.
프리트 공작은 말도 없이 한참이나 오드리를 내려다보더니, 별안간 뒤를 돌아 저 혼자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건가?’
잔뜩 겁먹은 오드리는 새끼 오리처럼 그 뒤를 졸졸 따랐다.
저벅저벅 멀어지는 넓은 보폭을 따라잡으려면 거의 반쯤 뛰어야 했다. 오드리는 그와 속도를 맞추는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의 목 위쪽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몰랐다.
프리트 공작의 귀는 용암처럼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 여긴…….’
두 사람의 발걸음은 익숙한 곳에서 멈췄다.
분명 4층으로 갈 줄 알았는데. 정작 그가 안내한 곳은 6층 재무부였다.
‘왜 재무부로 온 거지?’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가타부타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냥 제자리에 앉아서 죽일듯한 눈으로 오드리만 노려볼 뿐. 아무래도 눈빛으로 까맣게 태워 죽이려는 심산 같았다.
‘흐으윽.’
고작 둘뿐인 공간에서 일방적으로 시선을 받고 있으려니 오금이 다 저렸다. 오드리는 애써 바닥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오들오들 떨었다.
‘……초연한 죽음은 무슨.’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닥치자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프리트 공작은 해가 뜨고 날이 밝을 때까지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난 후. 숨 막히는 정적을 뚫고 아는 얼굴 하나가 들어섰다.
“어? 오드리? 각하?”
“클로드 오라버니!”
“네가 여긴 웬일로…….”
울컥 설움이 차올랐다. 오드리는 진이 다 빠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
그 장면을 목격한 데릭은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고 말았다. 그에게는 눈길 한번 안 주던 도돌이가 다른 사내에게 저런 맹목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이 영 못마땅한 탓이다.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시선이 클로드에게로 옮겨 갔다.
‘감히 도돌이의 시선을 독차지하다니!’
왠지 제 것을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돌이는 단 한 번도 그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그의 도돌이는 밀당의 고수가 맞았다.
‘하아. 절대 쉽게 잡혀 주는 법이 없군.’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이 사람을 미치게 했다. 게다가 철철 흘러넘치는 깜찍함과 발랄함은 또 어떤가? 아주 블랙홀처럼 뭇 남성들을 끌어당겼다.
‘위험하군. 아주 위험해.’
데릭은 문득 위기감을 느꼈다.
재무부에도 젊은 청년들이 꽤 있지 않은가. 그런데 과연 그중 도돌이에게 반한 이가 단 한 명도 없을까?
‘……아무래도 공사를 서둘러야겠군.’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 * *
재무부 사람들은 월요일 아침부터 죽상이었다. 끝난 줄로만 알았던 더부살이를 새로이 시작한 프리트 공작 때문이었다. 성 주인의 눈치를 보느라 반가운 얼굴인 오드리에게 인사도 못 하는 것이 참으로 고역이었다.
한편, 한스는 프리트 공작의 옷차림을 보고 남몰래 경악했다.
‘와…… 저게 진짜 구애하는 수컷 공작새구나.’
요 며칠간 자숙이라도 하듯 새까만 옷을 챙겨입더니. 오늘은 다시 화려함의 정점을 찍었다.
연한 개나리색의 옷감과 평소보다 2배는 과한 프릴들의 조화. 특히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목 쪽 프릴은 마치 중성화를 마친 동물들이나 두를 법한 넥카라 같았다. 주렁주렁 달린 보석들도 유난히 과했다. 프리트 공작을 저대로 천장에 달아 놓는다면 미러볼이 따로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의외는 오드리였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네.’
저 겁쟁이가 왜 공작성에 다시 발을 붙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계약 기간도 끝나가는 마당에 잘렸으면 그냥 그대로 버틸 것이지. 잠시나마 좋아졌던 안색이 몇 배는 더 나빠진 것 같아서 괜스레 걱정되었다.
* * *
한편, 오드리는 불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곱게 죽긴 그른 것 같다.
와인도 그러지 않나. 눈으로 한 번 즐기고, 코로 한 번 즐기고, 마지막으로 그 맛을 즐긴다. 프리트 공작에게 오드리가 그렇다. 어린 양처럼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눈으로 실컷 즐긴 다음, 천천히 피를 말려 죽이려는 속셈이 분명하다.
‘이런 극악무도한 남자 같으니!’
프리트 공작은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 딴에는 티를 안 낸다고 하는 것 같은데, 하던 일도 멈추고 넋을 놓고 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데릭은 아주 대놓고 그녀의 손을 훔쳐보는 중이었다.
‘……단풍잎인가?’
저 조막만 한 것이 사람 손일 리가 없다. 저렇게 앙증맞아서야,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간단 말인가? 검은 고사하더라도 펜이나 제대로 쥘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여태 저런 귀여운 손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니…….’
어쩐지 얼굴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참으로 사랑스럽다. 참으로 깨물어 주고 싶었다.
이번엔 그의 시선이 책상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빼꼼 튀어나온 발이 눈에 들어왔다.
‘발은 또 왜 저렇게 작은 거지?’
마치 자그마한 통밀빵 같지 않은가. 사람 다리에 붙은 통밀빵이라니! 걸을 때마다 뽀작뽀작 귀여운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어쩜 그의 도돌이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렇게나 사랑스럽단 말인가? 도무지 안면근육을 주체할 수 없던 데릭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일련의 상황을 목격한 오드리는 잔뜩 겁에 질렸다.
‘왜,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섬뜩한 핏빛 눈동자가 그녀의 손목과 발목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는 까닭이다. 마치 뼈마디마다 견적을 내는 듯한 시선 아닌가.
‘자르려는 거구나! 자르려는 거야!’
그가 제 손목과 발목을 자를 것이라 확신한 오드리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 그가 인상이라도 살짝 찌푸릴라치면, 바들바들 떨리는 손발을 진정시키려 안간힘을 썼다. 벌써부터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다.
‘울면 안 돼……. 울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울지 마!’
오드리는 사력을 다해 눈물을 참았다. 하지만 또렷하던 그녀의 손과 발이 점점 흐리게 번져 가기 시작했다. 애써 눈을 부릅뜨고 침착하려 노력했지만, 새빨갛게 달아오른 코는 쉬이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쿠당탕.
“……!”
그런데 프리트 공작이 별안간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각하?”
“…….”
그는 한참이나 죄 없는 오드리를 쏘아보더니, 아무 말 없이 재무부를 빠져나갔다.
돌발상황에 놀란 사람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위험하다, 위험해.’
데릭은 태어난 이래 가장 빠른 속도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재무부에 조금이라도 더 앉아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이건 전부 그의 도돌이가 깜찍한 탓이었다.
‘정말 참을 수가 없군!’
그 모습을 훔쳐보고 있노라니, 이유 모를 폭력성이 치솟은 것이다. 당장 연무장으로 달려가 허수아비를 사정없이 베고 싶었다. 눈에 보이는 벽이란 벽은 전부 다 부수고 싶기도 했다.
‘내가 미쳐 가는 건가.’
분명 어딘가가 간지러운데 정확히 짚을 수가 없어 답답했다. 무언가를 뎅강뎅강 베다 보면 이 기묘한 간지러움도 사라지지 않을까? 도돌이의 사랑스러움이 감당이 안 되니 참으로 큰일이었다.
─수컹! 수컹!
연무장에 도착한 데릭은 폭주했다. 그의 무자비한 칼질을 따라 훈련용 허수아비들이 잔인하게 산산조각났다. 분명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연무장 전체에 널린 지푸라기 잔해들을 보니 절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누가 또 각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담?’
루카스는 멀거니 서서 그 꼴을 구경만 했다.
잔뜩 화가 난 프리트 공작은 허수아비를 토막 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칼 대신 주먹을 메다꽂기도 했다.
대관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재무부에 앉아만 계시던 분이 갑자기 왜 저렇게 화가 나셨을까?
슬슬 눈치만 보던 루카스는 아주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
“각하. 혹시 무슨 언짢으신 일이라도…….”
“하아. 그런 것 없다. 그냥.”
“……!”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데릭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산산조각이 난 허수아비를 뒤로한 채 장검을 들고 돌진하는 모습이 퍽 잘 어울렸다. 마치 적군의 숨통을 끊으러 오는 장수 같다고나 할까.
‘히, 히익! 가까이 오지 마세요!’
사색이 된 보좌관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눈앞까지 다가온 데릭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애를 먹는 눈치였다.
“손이…….”
“예?”
“손이 단풍잎만 하다. 사람 손인데.”
“각하?”
“……단풍잎만 해.”
프리트 공작은 넋이 나간 얼굴로 보좌관을 다그쳤다. 어쩐지 분풀이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너는 본 적이 없겠지만, 단풍잎만 한 손이 있다.”
“아, 그러시구나.”
“단풍잎만 한 손이.”
“…….”
그래서 어쩌라고요? ‘너는 그런 것 본 적 없지?’라며 뽐내기라도 하고 싶으신 걸까?
프리트 공작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서, 무언가를 떠올리듯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 * *
‘아무래도 안 되겠군.’
데릭은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도돌이를 눈앞에 두면 이 애타는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조바심이 생기고, 다른 이들도 도돌이를 노리진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서둘러야겠어.’
아무래도 4층에서 진행 중인 대공사를 중공사 정도로 변경해야 할 것 같다.
“현재 인부가 몇이나 되지?”
“투입된 인원은 열 명입니다.”
“느려 터진 이유가 있었군.”
프리트 공작은 신중한 눈으로 4층 집무실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러더니 휴식 중인 인부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겠나?”
“……서, 서둘러 보겠지만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일손도 부족할뿐더러, 무엇보다도-”
“몇이나 더 필요하지?”
“예? 하, 한 스무 명만 더 있어도 수월하긴 하겠지마는-”
“좋다. 루카스, 사 층으로 인부 서른 명을 더 투입해라.”
“……!”
프리트 공작은 진심이었다.
“무리한 요구임을 알고 있다. 그러니 나도 맨입으로 부탁하진 않겠다.”
“…….”
“이번 공사에서는 특별히 봉급의 열 배를 지급할 것이다.”
“……!”
“그러나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 자들은 힘닿는 데까지만 하고 들어가 봐도 좋다.”
루카스는 제 주군이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고작 며칠을 못 기다려서 돈과 사람을 쏟아붓다니! 절대 맨정신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은 아니었다.
“가능한 자들은 밤을 새워서라도 힘써 주길 바란다. 공사 소음엔 일절 상관하지 않을 테니.”
“예! 알겠습니다!”
보좌관의 의심 가득한 시선이 제 주군을 향했다.
‘……설마 케벨슨 영애 때문인 건가?’
평생 불평불만이라는 걸 모르던 남자가 갑자기 공사를 명했다. 처음엔 분명 케벨슨 백작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 케벨슨 영애의 방문 이후로 공사는 영 수상하게 진행되었다.
일단 옆방과 벽을 텄다. 그리고 세상을 전부 뒤져 거대한 벚꽃 나무 하나를 들여왔다. 뿌리 내릴 흙도 없는 실내에 나무라니,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프리트 공작은 돈으로 그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벚꽃 나무의 뿌리에 값비싼 마력석 수십 개를 때려 박은 것이다.
‘도돌이의 머리 색을 똑 닮았군.’
고작 머리 색과 같다는 이유로 나무를 옮겨 심는 추진력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미치신 거야.’
저건 누가 봐도 케벨슨 영애를 위한 것이었다. 쉰이 다 되어 가는 백작에게 돈 먹는 벚꽃 나무를 선물할 리는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주군은 케벨슨 백작 대신 ‘그의’ 도돌이와 집무실을 공유할 작정 같았다.
이상한 명령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뭔가를 만들었으면 하는데. 이를테면…… 카트 같은 거.”
“어디에 쓰시려고요?”
“도돌이에게 주려고 한다.”
“예?”
루카스는 온갖 상상력을 발휘했다.
케벨슨 영애에게 카트가 필요하던가? 짐꾼으로 부리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벚꽃 나무에 비하면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선물이었다.
그러나 데릭은 퍽 진지한 얼굴이었다.
“사람도 하나 붙여 줘야겠군.”
“예에?”
“그 자그마한 발로 걸어 다니려면 힘들지 않겠나.”
자고로 작고 귀여운 것은 소중히 대해야 하는 법이다. 데릭은 그 앙증맞은 발을 떠올리다 말고 다시 한번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한편, 루카스는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카트에다가 사람까지?’
어쩐지 주군의 행보가 수상했다.
설마, 설마 저 모태솔로가…… 화물용 카트에 케벨슨 영애를 태우려는 것일까? 그녀의 발이 아플까 봐?
‘오, 신이시여!’
카트에 실린 오드리가 온 공작성을 누비는 장면이 절로 눈앞에 그려졌다. 그 장면은 프리트 공작의 상상과 달리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돌돌돌 요란한 바퀴 소리와 함께 짐짝처럼 옮겨지는 케벨슨 영애.
‘그냥 동상을 운반하는 모습이잖아!’
울상으로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리는 얼굴이 벌써 보이는 듯했다.
아니, 이런 식으로 구애하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저, 각하. 다시 한번 생각을-”
“네가 본 적이 없어 그런다. 사람 발이 통밀빵만 해.”
“아니 통밀빵이고 호밀빵이고-”
“그 자그마한 발을 혹사시킬 순 없다.”
데릭은 선대 공작들의 초상화를 한 점 한 점 떠올리며 혀를 찼다.
‘주거 공간이면 적당히 좀 지을 것이지.’
공작성을 이렇게 무식할 정도로 크게 지어 놓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이러다 미래 공작 부인 발이 까진 통밀빵이 되게 생겼지 않나!
모태솔로는 이상한 쪽으로만 머리가 비상했다.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의자 모양의 카트도 괜찮을 것 같군.”
“……각하.”
“테이블을 달면 이동 중에도 간단한 디저트를 먹을 수 있겠지. 도돌이는 단 걸 좋아하니까 분명 좋아할 거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만.”
“…….”
또다.
‘네까짓 게 뭘 아냐’는 듯, 저 업신여기는 눈빛.
“네가 도돌이에 대해 뭘 안다고. 분명 좋아할 거다. 발이 통밀빵이니까.”
보좌관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저놈의 통밀빵 타령!’
아무래도 신은 프리트 공작에게 전투력을 주는 대신 연애 세포를 몽땅 빼앗은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나 정성을 들이는데 결과물이 하나같이 시궁창일 수가 없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만…….’
미치광이 같은 옷. 믿기진 않겠지만, 집 앞에서 밤새 용서를 비는 중인 험악한 얼굴. 흉측한 설탕 꽃. 죽일 듯이 노려보는 뜨거운 시선. 거기다 이젠 케벨슨 영애 전용 운반 카트까지.
과연 이런 걸 구애로 받아들일 사람이 있기는 할까?
‘기절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전쟁 영웅의 구애란, 정성스러운 살해 협박과 한 끗 차이였다.
* * *
그러나 보좌관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도로로로록.
“어, 어머.”
“헉!”
“…….”
공작성 복도는 아침부터 요란한 바퀴 소리로 시끄러웠다.
오드리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아, 아버지!’
공작성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철갑옷을 입은 기사 하나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나무로 만든 무언가에 태운 것이다.
사방에 창살을 세워 놓은 모습이 익숙했다. 이것은 마치…….
‘처, 천장만 없는 나무 감옥이잖아!’
죄인을 호송할 때나 쓰는 나무 수레 같았다.
그러나 이 요상한 이동수단은 나름 과학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설계된 것이었다.
데릭은 소중한 도돌이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무리 날고 기는 프리트 공작이라도 관성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깃털 같은 도돌이가 행여 튕겨 나가지 않도록, 사방에 안전한 난간을 세워 주었다.
‘이 정도면 되었군. 조심히 밀고 다녀야 한다.’
‘어디로 호송하면 됩니까?’
‘사 층 집무실로. 털끝 하나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다.’
‘존명!’
명령을 받은 기사는 이를 수행하기에 앞서 자발적으로 무장을 했다. 수레의 생김으로 보아 흉악범을 호송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막상 범죄자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약해질 뻔하기도 했지만…….
‘흉악범. 생포. 죽음.’
그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동시에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하마터면 베테랑 기사인 그마저도 깜박 속을 뻔하지 않았는가? 저 순한 얼굴을 무기 삼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질렀을지!
‘아주 위험한 죄인이로군.’
그 악독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다. 그는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펼치고 공작성 복도를 행진했다.
─도로로로록.
주위를 둘러보는 눈빛엔 용맹함과 자부심이 일렁였다.
한편, 오드리는 나무 의자에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요란한 바퀴 소리며, 따가운 시선들도 이젠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너, 사람이 언제 죽는지 알아?’
‘심장이 멎으면 죽지.’
‘틀렸어.’
‘응?’
‘숨이 멎었을 때 한 번, 영혼이 떠났을 때 한 번, 그리고…… 쪽팔릴 때 한 번. 그때 비로소 죽는 거야.’
언젠가 한스가 했던 말엔 틀린 것이 없었다.
프리트 공작은 ‘크리앙트의 피바다’라는 명성에 걸맞게 진정으로 사람을 죽일 줄 아는 남자인 것이다.
꽃다운 나이 20살. 오드리의 사인은 수치사였다.
* * *
“흐익!”
“왔군.”
나무 수레에 실려 도착한 4층 집무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커튼 같은 연분홍색의 프릴이었다. 분명 그 위로는 흉악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겠지.
오드리는 혹여나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고개를 푹 숙였다.
“프, 프리트 공작 각하를 뵙습-”
“인사는 그쯤 하지.”
“…….”
프리트 공작은 새하얗게 질린 귀여운 정수리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러더니 당장 찔러 죽이지 않고 휙, 몸을 돌렸다. 제자리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도돌이가 왔다! 도돌이가 왔어!’
그러나 홀로 남은 오드리는 여전히 문간 앞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들어오란 말도, 이만 가 보란 말도 없으니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편, 홀로 자리에 앉은 데릭에겐 그 모습이 상처로 다가왔다.
‘나와……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다는 건가?’
방금까지만 해도 붕 떴던 기분이 금세 가라앉았다.
도돌이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이 선을 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읏.’
또다.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도돌이의 얼굴에 잠깐 스치는 표정 하나에도 흉부가 칼로 관통당한 것처럼 아팠다.
데릭은 제 가슴께를 더듬었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에선 본인만 알 수 있는 미약한 슬픔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 모습은 의도치 않은 오해를 사고 말았다.
‘다, 단도를 던지려는 거야!’
그가 마치 안주머니를 뒤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드리는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오들오들 떨었다.
그래, 프리트 공작이라면 옷 안쪽에 흉기 컬렉션을 품고 다닌다 해도 이상할 게 없지. 날카로운 단도는 아주 손쉽게 오드리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다.
“계속, 거기 있을 건가.”
“……!”
“…….”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단도를 날리는 대신 맞은편 의자를 눈짓했다.
‘저, 저기 앉으라는 건가?’
한껏 눈치를 보던 오드리가 게걸음으로 그쪽을 향했다. 혹시 방심한 사이를 노릴까 싶어, 섣불리 등을 보이지는 않았다.
데릭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고 깜찍한 얼굴을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었으니까.
‘고문 의자 같지는 않은데.’
오드리는 프리트 공작을 잔뜩 경계하면서 더듬더듬 의자를 살폈다. 책상도 없이 덩그러니 놓인 것이 영 수상했다.
그런데 유독 폭신한 방석이며, 팔걸이 주위로 알알이 박힌 크리스털이 협박범에겐 과분해 보였다.
‘새, 생각하는 의자인가?’
여기에 앉아 그간의 죄를 낱낱이 고하고 반성하라는 걸까?
이 와중에도 험악한 핏빛 눈동자는 지독할 정도로 오드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뒤.
휑뎅그렁하던 오드리 앞으로 드디어 책상이 놓였다.
“케벨슨 영애, 저쪽 신사분께서 보내신 책상입니다.”
“왜, 왜, 왜 이러세요?”
“제발 그냥 받아 주세요……. 사람 하나 살리신다 치고, 부탁드립니다.”
이상한 턱시도 차림의 루카스는 책상을 내려놓고서는 후다닥 사라졌다. 본인도 많이 창피한 눈치였다.
저 멀리 앉은 프리트 공작은 눈이 마주치자 오만하게 눈썹을 들썩였다. 어쩐지 물질적 풍요와 넉넉함이 흘러넘치는 얼굴이었다.
‘왜, 왜 저렇게 쳐다보신담?’
그러나 되려 겁에 질린 오드리는 고개를 밑으로 처박아 버렸다.
프리트 공작의 기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케벨슨 영애? 어디 가십니까?”
“어제 비품 받아 놓는 걸 깜빡해서…….”
“아, 그러시군요.”
그때, 싸늘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남쪽 성벽으로 가는군.”
“……!”
프리트 공작이었다. 그는 제 보좌관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멍청하게 서서 뭐 하는 거냐고 닦달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루카스는 정말로 영문을 몰랐다.
‘아니, 남쪽 성벽에 간다는 게 왜? 도대체 뭐가 어쨌다는 거야?’
답답한 듯 얼굴을 찌푸리던 데릭은 결국 직접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마차.”
“아하! ……예?”
설마, 지금, 마차를 준비하라는 걸까? 고작 동쪽 성에서 남쪽 성벽에 간다고 마차를?
루카스는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문질렀다. 그런데 저 이글대는 눈동자를 보니 저건 진심이었다. 순간 팔에 닭살이 돋았다.
‘아니, 별 유난을 다……!’
주군만 아니었다면 정말 가지가지 한다고 혀라도 찼을 것이다.
통밀빵이니 호밀빵이니 그 난리를 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래 봤자 바로 코앞 아니던가? 걸어서 5분 거리였다. 말이 5분이지, 계단 내려가는 시간을 빼면 사실상 1~2분 거리였다.
“루카스.”
하지만 저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크흠! 케, 케벨슨 영애. 마차를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하지만 바로 앞인데요.”
참으로 눈치도 없지.
안절부절못하던 데릭은 결국 한마디 거들고 말았다.
“……다리가, 부러지고 싶은 건가.”
“……!”
도돌이는 강심장이 분명하다. 저 통밀빵 같은 발로 무려 5분 거리를 걸어가겠다고? 그러다 연약한 발목이 똑 부러지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한편, 오드리는 다른 의미로 바들바들 떨었다.
‘마, 말을 안 들으면 다리를 부러뜨리겠다는 거야!’
불시에 치고 들어온 협박이 살 떨리게 무서웠다.
일교차에 가까운 온도 차이를 번갈아 보던 루카스는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금방 대기시키겠습니다!”
2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루카스가 잔뜩 지친 얼굴로 돌아왔다.
“헥, 밑에, 마차를, 헉, 준비해 놨습니다.”
“감사……해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오드리는 도망치듯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려 공작가의 인장이 찍힌 마차였다. 믿음직한 흑마들은 푸르르 갈기를 털며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듯했다.
“케벨슨 영애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 이쪽으로.”
“고, 고맙습니다.”
마부 역시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다. 분명히 행선지를 들었을 텐데, 당황한 기색 하나 없는 것이 과연 프로다웠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오드리는 마차에 오르고서도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프리트 공작은 왜 마차를 내줬을까?
‘느이 집엔 이거 없지?’라고 으스대고 싶던 걸까?
물론 자랑하고 싶을 만큼 훌륭한 마차이기는 했다. 하지만 고작 이렇게 쓰려고 주문한 마차는 아닐 것이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를 가는 데 마차라니……. 요란하게 불끈거리던 흑마들의 근육이 민망할 정도였다.
오드리는 누가 볼까 두려워 커튼을 꼼꼼하게 닫았다.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의 신호와 함께 마차가 느린 속도로 출발했다. 그러나 여정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도착했습니다.”
“…….”
말은 고작 다섯 발자국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오드리는 너무 창피해서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똑똑.
“영애?”
아, 이 다섯 발자국을 편하자고 마차를 타다니!
마차 문은 한참이나 열리지 않았다. 오드리의 얼굴은 막 오븐에서 나온 통밀빵만큼이나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 * *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프리트 공작은 어느 때보다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게 좋을 텐데.”
“……!”
젠장!
데릭은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함께 식사를 하면 좋을 텐데’라고 말하려던 걸 잘못 꺼냈다. 빌어먹을 긴장 때문이다. 그래도 주어며 서술어 순서는 엇비슷하니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었을 거라 믿는다.
책상 아래 숨겨진 손과 다리가 초조하게 떨렸다.
“그게…….”
한참이나 눈동자만 굴리며 애를 태우던 도돌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럼을 타는가 보다. 그런 모습마저도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네, 네에.”
“……!”
염소같이 떨리는 허락의 말이 데릭의 심장을 마구 때려 댔다.
─벌떡.
“……루카스를 따라오면 된다.”
“네에, 흑.”
결국, 그는 먼저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연무장에서 허수아비를 20개쯤 썰고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명색이 첫 데이트인데 이렇게 추레하게 나갈 수야 있나.
데릭은 광대처럼 우스꽝스러운 제 옷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목에서 나풀거리는 프릴이며 레이스가 모자라도 아직 한참 모자랐다. 그는 아끼고 아끼던 옷을 꺼내 입을 작정이었다. 특별한 오늘을 위해.
“……롸?”
“허억!”
경악에 찬 시선이 익숙하게 달라붙었다.
프리트 공작은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괴상한 옷차림으로 만찬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어느 하나를 콕 집어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복잡한 문양의 패턴. 목 전체를 두르는 빳빳한 프릴. 프릴 밑으로 모빌처럼 달랑거리는 보석들. 온갖 레이스로 도배가 된 분홍색의 바지. 끝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요정 구두까지.
어째 얼굴 빼고는 정상인 곳이 하나도 없던 것이다.
‘일단 의자를 빼 주고, 식사 속도를 맞춰서…….’
그러나 이를 눈치채지 못한 데릭은 잔뜩 굳은 얼굴로 배운 것을 복습했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태어난 이래 가장 긴장한 모습이었다.
* * *
하지만 약 2시간 후.
‘……한심하기 그지없군.’
데릭은 절망적으로 침대에 몸을 묻었다. 그토록 기대했던 도돌이와의 저녁 식사가 엉망으로 끝난 까닭이다.
분명 첫 시작은 좋았다. 분위기는 단란했고, 적당히 긴장감이 흘렀다. 그는 미리 공부한 대로 식사 내내 도돌이를 아주 살뜰하게 챙겼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 그냥, 흐윽, 죽여 주세요!’
‘머리는, 흐으으윽, 여기에 두면, 흑, 되나요?’
‘호, 호, 혹시 독살을 계획하신 건가요?’
‘아니면 사, 사지를 찢어 죽이실 건가요?’
‘흐윽, 얼른 죽여 주세요!’
도돌이가 그의 속도 모르고 식사 내내 죽여 달라 청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리둥절한 데릭은 도돌이를 달래 보려 쩔쩔맸다. 그러나 도돌이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여, 영애!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가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결국, 루카스가 혼절 직전인 도돌이를 대피시키면서 역사적인 첫 데이트는 막을 내렸다.
데릭은 저가 뭘 잘못했는지 하나하나 되짚으며 자책하기 시작했다.
‘더 자상한 모습을 보였어야 했어.’
감히 그 자그마한 손으로 스테이크를 직접 썰게 하다니! 이파리 같은 손가락들이 똑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써는 것도, 먹여 주는 것도 전부 그의 손으로 해 줬어야 했다.
심지어 그 앙증맞은 손으로 물잔을 들게 하다니, 제정신인가? 어쩌면 이토록 매정했는지!
‘더 다정한 말을 건넬 것을.’
그는 도돌이를 다정하게 부르지도 않았다. ‘나의 아기 고양이’라든가, 하다못해 ‘나의 사랑스러운 도돌이’라고도.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자기가 뭐라고 지껄였는지 기억도 안 났다. 아마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겠지.
‘……다시 보니 옷도 별로인 것 같군.’
옷은 또 어떤가. 만찬장에 들어서면 그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다. 도돌이의 옷차림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만 잔뜩 멋 부린 꼴이었다. 아주 욕심쟁이가 따로 없다. 두 사람은 한 쌍의 꾀꼬리는커녕, 미치광이 광대와 서커스단장처럼 보였을 게 분명하다.
“하아…….”
데릭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세상에 데릭만큼이나 어리숙한 사내는 또 없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지난날들이 미치도록 후회되었다. 도돌이가 그를 좋다고 했을 때 홀랑 넘어가 버릴 것을……. 편지를 받자마자 당장 결혼식이라도 올려 버릴 걸 그랬다.
벌떡.
“……결혼식?”
데릭이 눈을 번뜩였다. 뭔가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표정이었다.
* * *
기사 해리엇과 몽테가 수상한 소음을 포착한 것은 새벽 2시 경이었다.
“누구냐!”
“꼼짝 마!”
“…….”
정시순찰을 돌던 와중에 1층 ‘메모리얼 룸’에서 난데없이 물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쏜살같이 달려간 두 사람은 어둠 속 실루엣을 향해 등불을 비췄다. 그곳엔 눈 밑이 시꺼먼 프리트 공작이 서 있었다.
“가, 각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두 사람은 유령이라도 본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차라리 유령이었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 등잔 빛이 넓게 퍼지며 선대 공작들의 초상화와 조각상에 드리워진 기이한 음영. 그 오싹한 광경 한가운데 프리트 공작이 서 있었다.
“…….”
그는 기사들을 한 번 돌아보더니, 아무런 말 없이 메모리얼 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모양새였다.
-J구역. 여기는 본부. 왜 보고가 없나?
아뿔싸. 몽테는 통신구와 프리트 공작을 번갈아 보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작은 오해가 있었다. J구역 이상 무. L구역까지 순찰 후 복귀하겠다. 이상.”
조용히 눈치를 살피던 두 사람은 짧은 인사와 함께 다음 구역을 순찰하러 떠났다.
메모리얼 룸에서 흘러나오는 둔탁한 소음은 해가 뜰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 * *
오늘도 오드리는 돌돌이 카트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나마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루카스의 의견이 반영된 덕에 의자 형태로 변화가 생겼다는 것.
‘그나마 감옥보다는 낫네…….’
아무렴. 뭐든 죄인 신세보단 나을 테지.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어제까지만 해도 눈을 부라리던 기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보기만 해도 시린 갑옷 대신 턱시도를 챙겨 입은 것부터가 그랬다. 그는 웃는 낯으로 오드리를 맞이하더니, 아주 부드럽게 카트를 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불편한 건 없는지 물어보는 태도 역시 더없이 친절했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공작성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하루하루 변덕이 심한 걸까?
당장이라도 칼을 들이밀 줄 알았던 프리트 공작은 그녀의 처형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으로도 모자라, 호의와 협박을 반복했다. 오드리의 입에서 제발 죽여 달라는 소리가 먼저 나올 때까지.
만약 이 모든 게 신종 괴롭힘이라면 그들은 성공한 것이었다.
“조, 좋은 아침입니다.”
“……왔군.”
오드리는 머쓱하게 들어섰다. 제발 죽여 달라고 난리 난리를 칠 땐 언제고, 좋은 아침이라며 인사를 건네는 게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한편, 오드리의 퉁퉁 부은 두 눈을 본 데릭은 마음이 아파 죽을 것만 같았다.
‘의원은 불렀나?’
아니다, 의원을 불렀다면 아직도 저렇게 귀여운 붕어 눈을 하고 있진 않았겠지. 하루 내내 게슴츠레한 눈으로 세상을 보려면 얼마나 불편할 것인가.
참다못한 데릭은 남몰래 보좌관을 불러들여 붓기에 좋은 약을 구해 오라 지시했다.
“서둘러야 한다.”
“예.”
집무실엔 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 들었다. 데릭은 오늘도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도돌이의 눈치를 살폈다.
‘……이젠 내가 그렇게도 싫은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제발 죽여 달라’는 말이 나왔다. 아, 이렇게 잔혹한 말이 또 있을까? 도돌이에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따뜻하고, 헌신적인 남자가 되어 주고 싶었는데…….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
데릭은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도돌이에게 보여 주지 못한 것이 많았다. 끝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적어도 후회가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다 쏟아붓고 난 다음 생각하자.
“갈 곳이 있다.”
“……!”
“함께.”
데릭은 어제 읽었던 책 구절을 떠올렸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법!》
‘솔직함’을 무기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자. 매력은 들키면 큰일 나는 약점 같은 게 아니다. 그러니 숨길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드러내야 할 것이다.
……(중략)……
진정한 사랑이란 곳간 열쇠까지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이다. 사랑은 이런 감정이다. 상대방에게만큼은 아무런 비밀도 없는 것.
그대,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데릭은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 보이리라 다짐했다. 그게 매력이든, 곳간 열쇠든, 그의 심장이든 그냥 전부 다.
물론 그 이후의 선택은 온전히 도돌이의 몫이었다.
* * *
“저기, 이곳엔 왜…….”
“공작성의 역사가 담긴 곳이다.”
“…….”
오드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갈 곳이 있다더니, 프리트 공작이 데려온 곳은 ‘메모리얼 룸’이었다.
“이분이 내 아버지시다. 선대 프리트 공작 되시는 분이지.”
“……네에.”
“남들은 우리더러 많이 닮았다고 하더군.”
프리트 공작은 제 아버지의 초상화 앞에 서서 오드리를 돌아보았다. 친절하게 비교라도 해 주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나는 아닌 듯하다.”
“…….”
“아버지는 좋은 기사였을지 몰라도, 좋은 남편은 아니었거든. 가족보단 제국이 우선인 분이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많이 외로워하셨지.”
데릭은 바로 옆의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연약해 보이는 여인이 있었다. 얼굴은 웃고 있으나 꼭 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절대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프리트 공작은 곧바로 옆을 향했다. 얼마 전에 만들어졌는지 아직도 새것 티가 많이 나는 공간이었다.
‘데릭 프리트의 일생……?’
그곳은 유난히 넓었다. 프리트 공작의 소장품부터, 기념할 만한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 마치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선대 공작들의 초상화와는 영 딴판이었다.
“나는 제국력 천삼백구 년 칠월 구 일, 사 킬로그램의 우량아로 태어났다.”
“……?”
“그리고 이건 내 배냇저고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은 옷이지.”
“……!”
오드리는 자기가 뭘 들었나 싶어 정신이 아찔해졌다.
‘뭐, 뭐야. 나한테 이런 걸 왜 말하는 거야?’
다짜고짜 정보의 바다 한가운데 내던져진 꼴이었다.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퍽 진지한 얼굴로 다음 소장품을 집어 들었다.
“이건 두 살 때 쓰던 그릇이다. 태어날 때부터 편식 같은 건 일절 없었다더군.”
“…….”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발육이 ‘엄청나게’ 좋았다. 덕분에 잔병치레도 없었고, 크게 아픈 경험도 없지. 선천적으로 아주 건강하고 튼튼한 몸이다.”
오드리는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일까? 어쩐지 뿌듯해 보이는 얼굴이 자꾸만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 칭찬을 기다리는 사냥개처럼.
뜻밖의 자기 자랑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몇 살에 군사 전술을 터득했으며, 처음 검기를 느꼈을 때 기분이 어떠했는지, 심지어는 처음으로 만든 비상금의 액수가 얼마였는지까지도.
“물론, 다시는 비상금 따위 만들 생각이 없다. 서로 간의 신뢰를 훼손하는 일 아닌가.”
“…….”
“정말이다.”
“아, 네에…….”
굳이 여러 차례 강조하는 목소리엔 짙은 호소가 묻어났다.
프리트 공작이 비상금을 만들든, 비자금을 만들든 오드리는 알 바도 아닌데. 그는 오드리의 대답을 듣고서야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프리트 공작의 역사는 빠르게 흘러 어느덧 청소년기에 접어들었다. 그나마 작고 귀였던 물건들은 온데간데없고, 소름 돋을 정도로 흉흉한 무기들만 가득했다. 철갑옷의 검은 얼룩은 왠지 끔찍한 상상을 자아냈다.
‘바로 지금인가?’
데릭은 긴장으로 손을 떨었다.
가족 구성부터 태몽, 출생 등 기본적인 신상 정보는 이미 충분히 전달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그의 매력을 당당히 어필할 차례였다.
데릭은 다짜고짜 장검 하나를 길게 뽑아내었다.
─스르릉.
“히익!”
“이건 첫 전투를 앞두고 아버지께 선물 받은 검이다. 파이차르의 철로 만들었지.”
“……!”
날카로운 쇳소리가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동시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오드리는 석고상처럼 굳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견고하며 무거운 철이다. 그 무게 덕분에 안정적으로 목을 벨 수 있었지.”
“……!”
“이 검으로 ‘첫’ 전투에서만 무려 적군 이천백오십구 명을 해치웠다.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들 하더군.”
매끈한 검을 훑는 눈빛엔 그날의 광기가 번들거렸다.
오드리는 딱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쓸데없이 상세한 설명 덕분에 마치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코끝에 피비린내가 감도는 것 같다.
“그날, 이 갑옷은 온통 적들의 피로 물들었다.”
“……!”
“그리고 여기 보이는 커다란 얼룩은 뵈이르의 역사적인 장군 ‘말리다고르’의 피다. 언젠가 내 자식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남겨 놓았지.”
자신의 활약상을 구구절절 읊던 데릭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섰다. 분명 도돌이도 그의 용맹한 모습에 한껏 매력을 느꼈겠지.
그러나 기대와 달리, 도돌이의 안색은 파리했다.
“죄, 죄, 죄송한데, 소, 속이.”
“…….”
“제가, 비위가, 우욱! 야, 약해서…….”
“……!”
데릭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도돌이의 비위가 약하다는 건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그런 도돌이를 앞에 두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담이나 줄줄 읊어 댔다니!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는 특별한 매력이라곤 없는 남자였다. 그나마 뽐낼 것은 적들의 목을 베던 강인한 모습뿐.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나 싶어 끔찍한 자기혐오가 밀려들었다.
‘한심한 무지렁이 같으니!’
데릭은 남은 공간을 응시했다. 아직 꺼내지도 못한 이야깃거리가 못해도 100여 개는 되었다. 전부 그의 전쟁 활약상이었다.
그러나 데릭은 못 본 척 돌아섰다.
한참 뒤.
속을 가라앉힌 오드리는 공작성의 비밀 창고 앞에 서 있었다. 기존의 관행대로라면 공작과 공작 부인만 출입 가능한 공간이었다.
‘이, 이런 곳을 막 보여 줘도 되는 건가?’
그러나 프리트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쇠로 문을 열었다.
‘도돌이를 위해서라면 곳간 열쇠도 내어 줄 수 있다.’
매력을 어필하긴 글렀으니, 그의 마음만큼은 진심이라는 걸 알려 주고 싶어서였다. 어차피 전부 도돌이의 것이 될 물건 아니던가.
공작가의 비밀 창고엔 가보부터 시작하여 희귀한 보석과 장식품이 가득했다. 말은 창고라지만 응접실만큼이나 화려하고 웅장한 공간이었다. 재물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많은 오드리도 깜짝 놀랄 만큼.
“이것은 4대 공작께서 공작 부인께 청혼할 때 사용한 목걸이다. 아직도 이보다 큰 에메랄드는 발견되지 않았지.”
“네에…….”
프리트 공작은 귀중품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을 굳이 오드리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오드리는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왜 이러지? 분명 괜찮아졌었는데…….’
진정되었던 속이 다시금 울렁거리기 시작한 탓이다.
창고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랬다. 기분 나쁜 무력감과 함께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몰래 그녀의 기운을 훔쳐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 그것은 초대 공작의 유품이다. 마도구라고는 하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작동하지 않지.”
“……!”
어떻게든 버텨 보려 손을 짚은 곳엔 황금으로 만든 액자가 있었다. 마치 양쪽으로 열리기라도 할 것처럼 가운데가 갈라져 있으나, 그 위로 빛바랜 마력석이 자물쇠처럼 박혀 있는 형태였다.
감히 초대 공작의 유품에 멋대로 손을 대다니! 화들짝 놀란 오드리는 손을 떼고 물러났다.
그러나 그 순간,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강력한 무력감이 찾아왔다.
“……이상하군.”
데릭의 시선이 초대 공작의 유품에 멈췄다. 진작 수명이 다한 듯 새카맣게 변한 마력석에서 별안간 빛이 나기 시작한 탓이다.
그러다 눈을 못 뜰만큼 환한 빛이 쏟아진 순간.
“으흑!”
“……!”
오드리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어둠에 잠긴 침실. 새카만 휘장이 늘어진 침대 한가운데에 산송장 같은 오드리가 누워 있었다.
그런 그녀를 애타게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 있었으니.
“……나의, 아기 고양이.”
세상이 무너진 얼굴로 간병 중인 데릭이었다. 그는 정신을 잃은 도돌이를 제물처럼 앞에 두고 마치 주문 같은 반성을 쏟아내고 있었다.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아직 하지 못한 말들이 너무도 많다.”
“…….”
“그대에게 해 주고 싶은 것들도 많아. 그러니 제발…….”
그러나 도돌이는 쉬이 눈을 뜨지 못했다. 공작성의 주치의부터 시작하여 유명하다는 의원과 신관, 심지어는 점성술사까지 불러들였건만 차도가 없었다.
─똑똑.
“각하, 수석 마법사 바크입니다.”
“……나가겠다.”
데릭은 최후의 방법으로 공작성 수석 마법사를 불러들였다.
─쾅!
그리고는 초대 공작의 유품을 다짜고짜 테이블로 내던졌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새다.
“이것이다. 이 썩어 빠진 돌멩이 같은 것이 빛을 뿜으며 도돌이를 공격했다.”
“예? 하지만 마력석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공격형 마도구라면 모를까요.”
“아무튼, 빛이 나고 쓰러졌다. 무언가 연관이 있는 것이 확실해.”
“제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수석 마법사는 여러 도구를 이용해 초대 공작의 마력석을 진단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마력석엔 수명이 없습니다. 주입된 마력이 고갈되면 휴면에 들어가긴 하지만, 마력이 주입되면 언제든지 재활성화될 수 있는 상태지요.”
“그래서?”
“이 마력석은 휴면 상태에서 활성화된 것뿐입니다. 그러면서 빛을 뿜어냈을 거고요.”
“그렇다면…….”
“예. 마력석에 마력이 주입된 것뿐입니다. 정확히는 마력석 쪽에서 강탈한 것으로 보이지만요.”
데릭은 저도 모르게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마력? 주입? 빛?’
그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나 의심스러웠다.
그러니까…… 저 빌어먹을 돌덩이가 감히 도돌이의 마력을 흡수했으며, 마력을 잃은 도돌이가 쓰러진 거라고?
“하지만 도돌이는 마법사가 아니다. 도돌이의 오라비가 마법사지.”
“가족 중에 마법사가 있다면야 뭐. 도돌이 님도 마력 보유자일 가능성이 있겠네요.”
“……!”
데릭의 얼굴에 한껏 수심이 드리웠다.
‘도돌이가, 마력 보유자…….’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다.
크리앙트 제국에서는 마력 보유자를 전부 잡아다 악명 높은 마탑으로 처넣고 있지 않나. 도돌이의 오라비처럼. 보통은 그렇게 10년에서 15년을 보낸다.
그렇다면 도돌이 역시 마탑으로 가게 되는 걸까?
‘안 된다!’
데릭은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이대로 생이별을 할 순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혹시, 마력을 타인에게 주입하는 건-”
“크, 큰일 날 소리를 하십니다! 그러다 자칫 잘못하면 두 분 다 목숨을 잃습니다!”
“…….”
젠장. 마력 보유자로 위장하여 함께 들어가는 방법도 여의치가 않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는 것이다.
“왜, 왜 그렇게 보십니까?”
“…….”
물론, 그 ‘둘’에 수석 마법사 바크는 포함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라져 줘야겠군.’
핏빛 눈동자가 눈앞의 사냥감을 맹렬히 응시했다. 비밀을 지키는 것보다도 쉬운 건, 지킬 비밀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 * *
“으응?”
한밤중에 정신을 차린 오드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방이잖아?”
분명 공작성의 비밀 창고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뜨니 익숙한 공간이다. 가득 차 있어야 할 마력은 도둑이라도 맞은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오드리는 이 모든 일이 마력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임을 눈치채곤 곧바로 겁에 질려 버렸다.
‘어떡하지?’
프리트 공작에게 그녀가 마력 보유자임을 들키고 말았다. 한스는 오래된 친구이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비밀을 지켜 주었지만, 프리트 공작에겐 그럴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찢어 죽이려던 협박범 나부랭이 아니던가.
‘분명 밀고했을 거야!’
내일 아침이면 공작성으로 황실 기사단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프리트 공작이 만든 나무 수레에 실려 나가겠지.
“안 돼…….”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얼굴을 상상하니 절로 눈물이 터졌다. 클로드 오라버니 역시 충격을 받을 테고, 한스는 저도 잡혀갈까 두려움에 떨겠지.
오드리는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아침.
오늘도 카트에 실려 4층 집무실 앞으로 단번에 배송된 오드리는 어리둥절했다.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닐 거다.”
“…….”
다짜고짜 들이 밀어진 계약서 때문이었다.
‘수석 마법사 계약?’
프리트 공작은 그녀를 황실에 밀고하는 대신에 공작성 수석 마법사직을 제안했다. 의외였다.
“하지만 공작성엔 이미 수석 마법사님이-”
“어제부로, 실종되었다.”
“……!”
이런 기막힌 우연이 또 있을까? 굳이 협박범에게 수석 마법사직을 제안한 이유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마법사직을 공석으로 비워 놓기엔 프리트 공작도 신경이 쓰였겠지. 그분에겐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드리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서, 서명했습니다!”
그래도 수석 마법사라는 쓸모가 있으니, 협박범이라 하여 쉽게 죽일 순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한배를 탄 운명이라 황실에 밀고도 못 하겠지.
‘이게 무슨 횡재야?’
어떻게 보면 오드리는 생존권을 획득한 셈이다. 수석 마법사라는 직책으로 그와 함께 근무해야 하는 건 불편했으나, 아무리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은 법이다. 게다가 틈틈이 클로드를 볼 수 있으니 최적의 환경 아닌가!
“다른 이들에겐 견습 보좌관이라 일러두겠다. 그러니 마법사의 ‘마’ 자도 꺼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네!”
당연하죠!
오드리는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사냥개도 자신을 공격하려 들 때나 무섭지, 막상 목줄이 있다는 걸 알면 그냥 ‘사납게 생긴 개’에 불과하지 않은가. 프리트 공작이 딱 그런 경우였다.
‘저렇게나, 좋아하는군.’
당연히 데릭의 마음도 붕 떴다. 두 사람이 만난 이래로 가장 들뜬 듯한 도돌이를 보고 있노라니 절로 귀가 홧홧해졌다. 자기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한 착각이 든 것이다. 고작 도돌이를 환히 웃게 했을 뿐인데.
데릭의 입꼬리가 도돌이를 따라 들썩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의 심장도 그녀의 볼을 닮아 나날이 몰랑해지는 것 같다.
* * *
퇴근 후, 오드리는 오랜만에 샬롯을 만났다. 그간 밀린 연애 상담을 하기 위해서다.
“샬롯!”
“오, 오, 오드리!”
“잘 지냈어?”
“으응, 나야 뭐…… 근데 너는 괜찮아?”
“그럼!”
샬롯은 어색한 얼굴로 오드리를 구석구석 살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도 없었고, 거동이 불편해 보이지도 않는다. 얼굴 역시 여느 때처럼 밝았다.
‘휴, 다행이다.’
그날 제 친구를 홀랑 팔아넘기고 어찌나 후회했던지. 역시 사람이 죄를 짓고는 못 사는 법이었다.
“오늘은 내가 살게.”
“응? 하지만-”
“그냥! 내가 사고 싶어서 그래!”
샬롯은 미안한 마음에 괜한 억지를 부렸다. 도대체 무슨 염치로 오드리에게 얻어먹는단 말인가? 게다가 계산만으로는 부족했다.
‘클로드 에밀튼 씨, 죄송하지만 당신은 끝났습니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드리와 붙여 놓을 거거든요.’
연애 박사 샬롯은 자신의 재능으로 나름의 속죄를 할 참이었다.
“설마 그대로 끝난 거야?”
“아니이……. 내가 오라버니를 어떻게 잊어?”
“맞아. 벌써 포기하긴 이르지.”
그러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얌전히 오드리의 남자가 되어야 할 클로드 에밀튼 씨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흥, 식장 들어가기 전까진 남녀 사이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샬롯은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서로 죽고 못 사는 연인들도 헤어지는 판국에, 혼자 하는 짝사랑 정도야 언제 정리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정말 괴로웠다니까? 막, 막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고…….”
그 사람이 오드리처럼 지독하게 절절하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오드리.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너를 성인 여성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거야.”
“……응.”
“그런데 거기서 끝나면 안 돼. 널 ‘연애 대상’으로 느끼도록 만들어야지.”
“어떻게?”
“너, 남녀 사이에 언제 스파크가 튀는지 알아?”
샬롯이 요망하게 웃었다.
“긴장감이 흐를 때.”
“……!”
“그러면서, 왠지, 익숙하던 상대가 낯설어 보일 때.”
와인 잔 입구를 천천히 둥글리는 손끝이 어른스러웠다.
덩달아 몰입한 오드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수, 수, 술을 마실까!”
“…….”
신혼집이 아니라 개집에 들어가고 싶니? 잔뜩 들떠 엇나간 목소리까지 어설프기 그지없다. 뭐, 그런 면이 귀엽긴 했지만.
샬롯은 오드리의 손을 든든하게 잡아 주었다.
“너, 미팅 좀 해라.”
“누구랑? 클로드 오라버니랑?”
“아니. 핫가이랑.”
“……?”
핫가이? 미팅? 그게 본인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다음 날.
좋은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라던 샬롯의 말은 정확히 적중했다.
“어휴, 오랜만의 미팅인데 사람이 부족해서 큰일이에요.”
“……!”
짐을 정리하기 위해 들른 재무부에서 뜻밖의 미팅 소식을 들은 것이다.
“며칠 전부터 미팅한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어쩌다가?”
“갑자기 여자 측 주선자가 빠진다잖아요. 완전히 망했어요.”
“왜, 여자 자리 하나가 비어서?”
“네. 저만 빠져 주면 짝수는 맞는데, 저도 하고 싶단 말이에요…….”
“그럼 여자 한 명 구하면 되지. 머릿수만 맞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게 어디 쉽나요.”
오드리는 고뇌하는 로버트의 앞에서 티 나게 알짱거렸다.
‘저요! 여자 한 명 여기 있어요!’
그러다 마침내 그의 시선이 오드리를 향했다.
“어, 오드리 님 언제 오셨어요? 아참! 혹시 이번 주말에-”
“좋아요!”
“네?”
“할게요, 미팅!”
로버트와 오드리의 고민은 한 번에 해결되었다.
“오드리 님도 분명 걔네가 마음에 드실 거예요! 아카데미 동기들인데, 남쪽 왕국 출신이라 진짜 죽여주거든요!”
죽여주는 친구들……! 샬롯이 그렇게나 말하던 ‘핫가이’가 틀림없다. 오드리의 가슴이 기대로 부풀었다.
그런데 저 혼자만 좋은 일을 하려니, 온종일 그녀만 기다리는 오라비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오라버니도 심심할 텐데…….’
사실 진짜로 미팅이 필요한 건 그녀가 아니라 아놀드 아니던가. 다음 주 목요일이면 다시 마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여자를 만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오드리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저, 로버트 님. 혹시.”
“네?”
“저희 오라버니도 함께할 수 있을까요? 여자가 한 명 부족하다면 제 친구를-”
“아, 아, 아놀드 님이요? 세상에, 좋죠! 너무 좋죠! 제 여동생이 아놀드 님 완전 팬이거든요!”
로버트는 어차피 제 여동생이 나오려고 난리를 칠 테니, 머릿수 걱정은 말라며 오드리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청춘들의 미팅 소식은 재무부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외근을 나갔던 클로드 역시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선 오드리를 찾아왔다.
“오드리, 이상한 소문이 있던데.”
“아, 미팅이요? 저도 이제 좋은 사람 만나서 연애도 하고 그래야죠! ‘성인’인데. 헤헤.”
오드리는 그를 포기할 생각도 없으면서 입방정을 떨었다. 이 모든 건 샬롯의 계획이었다.
“……그렇구나.”
클로드가 습관처럼 웃었다.
그런데 어째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작위적이라고 해야 할까? 억지로 솟은 입꼬리가, 축 처지지 않도록 애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꼭 해야 하는 거지?”
“네?”
“아니,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혹시나 위험할 수도 있고.”
“……!”
분명히 말리고 싶은 눈치였다.
‘미팅 소식을 동네방네 떠벌려.’
‘뭐? 그러다 클로드 오라버니가 오해라도 하면!’
‘이게 바로 ‘질투심 작전’이라는 거란다. 나만 졸졸 따라다니던 애가 갑자기 미팅을? 왠지 남 주긴 싫어지는 게 사람 심리야. 아깝거든.’
오드리는 샬롯의 적중력에 새삼 감탄했다.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오드리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소문은 예기치 못한 인물에게까지 퍼진다는 것.
가령, 성의 주인이라거나, 데릭이라거나, 프리트 공작과 같은.
* * *
‘도돌이가 나에게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순 없어.’
데릭은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도 미팅이 뭔지는 안다. 아주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이 모여 도돌이처럼 순진한 사람들을 꼬여 내는 모임 아니던가!
‘어떻게 그런 위험한 곳을…….’
보나 마나 뻔했다.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인지와 같은 아주 저질스럽고 사적인 질문들이 난무하겠지. 서로 짝을 지어 아주 불건전한 가위바위보 따위도 할 것이 분명하다. 상상만 해도 벌써 속이 들끓어 참을 수가 없었다.
“가, 각하?”
“…….”
분노한 데릭은 당장 재무부로 들이닥쳤다. 그러더니 희대의 난봉꾼을 보는 듯한 눈으로 로버트를 한참이나 쏘아보았다.
‘내 평생 네놈의 얼굴을 잊지 않을 것이다.’
다시 집무실로 돌아와서는 아주 간절한 눈으로 도돌이를 응시했다. 오늘따라 유독 시뻘겋게 빛나는 눈동자에선 제발 그런 곳에 가지 말라는 애원이 뚝뚝 묻어났다.
하지만 야속한 도돌이는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마도구 수리 목록 작성에 심취한 모양새다.
“각하. 외람되오나 그럴 시간이-”
“알고 있다.”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할 서류도-”
“저리 가라.”
데릭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사랑도, 연애도, 도돌이도 그에겐 너무 어려웠다. 작은 병아리 앞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사자가 된 기분이었다.
도돌이가 칼퇴근을 한 뒤에도 프리트 공작의 한숨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재무부에 로버트라고, 아직 있나?”
“방금 복도에서 봤으니 그럴 겁니다.”
“재무부로 가야겠다.”
도돌이를 혼자 보낼 수 없다면, 데릭도 함께 가면 될 일이다.
* * *
토요일 저녁.
아놀드와 함께 약속 장소에 도착한 오드리는 화들짝 놀랐다.
“헤이, 베이비. 우릴 찾는 거야?”
“파라다이스는 바로 저쪽에 마련해 두었어. 함께 환상적인 시간을 보내자고.”
“……!”
“우와! 도토리, 저거 봐. 등이 꿀렁꿀렁 살아 있는 것 같아.”
로버트가 말한 ‘죽여주는 친구들’이 상상 이상의 핫가이였기 때문이다. 충분한 일조량으로 건강하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 여유와 나른함이 흘러넘치는 눈. 1년 중 약 360일간 해가 쏟아진다는 남쪽 왕국 출신다웠다.
‘나, 남쪽 왕국에는 윗옷이 없나?’
하지만 고급 레스토랑에 웃통을 벗고 입장하는 자유로움은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당황한 오드리의 눈은 한참이나 허공만 배회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참여자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당신의 햇살 같은 미소가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군.”
“혹시 제가 늦었-”
“쉬이. 이름은 천천히 나누어도 늦지 않아. 우리의 밤은 길 테니.”
“…….”
자기소개는 이따 한꺼번에 하자는 말이 저렇게까지 나른할 일인가?
하지만 다른 여자들은 핫가이의 매력에 풍덩 빠진 듯했다. 오드리의 오라버니만 훔쳐보는 로버트의 여동생은 빼고.
‘그나저나 로버트 님은 왜 안 오시지?’
오드리는 여태 비어 있는 자리 하나를 응시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설레발을 치기에 가장 먼저 와 있을 줄 알았더니. 로버트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렇게 약속 시각이 되자, 남쪽 왕국 핫가이들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았다.
“베이비들, 그냥 우리끼리 놀까?”
“분명 멋진 시간이 될 거야.”
오드리 맞은편의 로버트 자리를 아예 없애 버리고, 자기들의 의자 간격을 넓혀 앉은 것이다. 상대를 민망하게 만들 수는 없단 이유에서였다.
‘……괜찮은데.’
덕분에 오드리는 눈 둘 곳이 없어졌다.
그렇게 막 미팅이 시작되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등장했다.
“비켜라. 거긴 내 자리다.”
“……!”
오드리는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원래도 험상궂었지만, 오늘따라 더더욱 험악해 보이는 프리트 공작이 서 있었다. 싸늘한 눈동자는 구릿빛의 헐벗은 웃통만 죽어라 노려보았다.
‘아주 원시인이 따로 없군.’
데릭은 직접 나와 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음탕한 자들 사이에 사슴 같은 도돌이가 홀로 있을 뻔했다니! 가슴이 선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반면, 오드리는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여, 여기는 어쩐 일이시지?’
벌써부터 망한 기운이 솔솔 풍겼다. 다 된 미팅에 프리트 공작이라니? 미팅은커녕, 이팅(eating)만 하고 재빨리 해산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헤이, 친구. 반가워! 그런데 로버트는 어디 있지?”
“밥값을 하는 중이다. 하도 바빠 보이기에 내가 대신 나왔지.”
“밥값?”
“늦기 전에 얼른 식사나 하지.”
“……!”
프리트 공작은 핫가이의 메뉴판을 빼앗아 맞은편의 그녀에게 슥 밀어 주었다.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이었다.
“먹고 싶은 걸 골라라.”
한편, 데릭은 그의 소중한 도돌이가 배곯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치렁치렁한 프릴 소매를 걷어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런 음탕한 놈들에게 도돌이의 시선을 도둑맞을 수야 없었기 때문이다.
‘근육은 저들만 있나?’
청순한 프릴 아래로 데릭의 공격적인 전완근이 불끈거렸다. 사실은 그도 똑같이 웃통을 벗어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가까스로 참아 냈다.
‘나는 저들처럼 헤픈 사내가 아니다.’
그의 속살은 오로지 도돌이만 열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 프리트 공작은 ‘누구누구’와 달리 지조를 아는 남자였다.
간단한 통성명이 끝나 갈 무렵. 테이블 위로 식사가 세팅되었다.
데릭은 물러나려는 점원에게 한 가지 요청을 덧붙였다.
“이 난봉-, 신사들에게 턱받이가 필요할 것 같군.”
핫가이들은 그럴 필요 없다며 만류했으나, 그는 완고했다. 벌레를 보는 듯한 눈으로 그들의 맨살을 쏘아보며 일침을 가한 것이다.
“크리앙트 제국에 왔다면 마땅히 제국의 식사 예절을 따라야지.”
“듣고 보니 그렇군. 고마워, 친구!”
“스위티, 턱받이 두 개만 가져다주길 바라.”
결국, 장성한 남자 둘은 구릿빛 맨몸에 턱받이만 두른 꼴이 되었다. 그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흐엑……!’
어쩐지 변태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유아기가 눈앞에 절로 그려진달까. 여러모로 성인 남성에겐 어울리지 않는 끔찍함이었다.
하지만 데릭은 흡족하게 웃었다. 도돌이를 현혹하듯 꿀렁이는 근육들을 전부 가려 놓으니 한결 마음이 놓인 탓이다. 이제 남은 것은 도돌이를 향한 저들의 음심을 차단하는 일뿐.
“그럼 베이비는 취미가-”
“아주 저질스러운 질문이군.”
“가장 좋아하는 색깔-”
“음탕하기 이를 데가 없어.”
“…….”
데릭은 오드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날을 세웠다. 저 음흉한 놈들이 감히 도돌이에게 수준 낮은 질문을 던져 댔기 때문이다.
‘하! 저가 도돌이의 취미를 알아서 뭐 하려고? 좋아하는 색깔? 아주 정신이 나갔군.’
그러나 아놀드가 꺼내는 시시콜콜한 질문에는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럼 내 질문! 태어나서 가장 오래 굶어 본 시간은?”
“오라버니, 미팅에서 그게 무슨-”
“아주 흥미롭고 유용한 질문이로군.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야.”
“역시! 역시! 뭔가 통하시는군요!”
“…….”
당연히 아놀드만 신이 나서 이상한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오드리는 자연히 의심이 들었다.
‘미팅이 뭔지는 알고 나오신 건가?’
프리트 공작은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꼴을 못 봤다. 제법 미팅 분위기가 날라치면 묘한 기류를 원천 봉쇄해 버렸기 때문이다.
오드리로선 참 답답할 노릇이다. 이러다 하나뿐인 그녀의 오라비가 노총각으로 늙어 죽게 생기지 않았는가! 아무래도 프리트 공작은 이 미팅을 망치러 온 게 분명했다.
그가 던지는 질문에서도 확연히 티가 났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가 좋지?”
“……!”
“언제쯤 하고 싶은지 궁금하군. 따로 생각해 놓은 장소가 있는지도.”
아니, 누가 미팅 자리에서 결혼을 운운한단 말인가? 이러다 자녀 계획이며 노후 계획까지 전부 물어볼 기세다. 저 모습이 대체 어딜 봐서 ‘결혼 첫날밤 침대를 부술 것 같은 미혼 남성 1위’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하지만 나이프까지 내려놓은 채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은 오드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군.’
사실 데릭의 머릿속에선 이미 결혼식 종이 울린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부모가 되었고, 자식들이 장성한 뒤에는 도란도란 앉아 노을을 구경했다.
‘작위를 물려준 뒤에는 별장으로 내려가는 것도 좋겠군. 도돌이가 바다를 좋아한다면 말이야.’
그는 가슴 떨리는 상상을 하며 도돌이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막 그녀가 입을 떼려는 순간.
“오드리? 아놀드 형님?”
난데없이 웬 불청객 하나가 끼어들었다. 데릭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클로드!”
“……클로드 오라버니?”
그의 가신이자, 케벨슨 백작가와 아주 인연이 깊은 클로드 에밀튼.
오드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쏠려 버렸다.
“각하,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미처-”
“인사는 됐다.”
“…….”
어쩐지 심통이 났다. 데릭은 못마땅한 얼굴로 은근슬쩍 제 팔뚝을 더 걷어 올렸다. 이렇게 해서라도 도돌이의 시선을 끌어 보겠다는 심보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약속이 있어서. 그나저나, 미팅한다는 곳이 여기였어? 웬일로 아놀드 형님도 계시고.”
“나는 거의 도토리한테 끌려 나왔지 뭐. 요 귀여운 녀석이 글쎄, 안 놀아 줄 거라면서 막 협박을 하더라고!”
“그런데 저분들은…… 더우신가 보네.”
“남쪽 왕국에서는 저런 식으로 매력을 어필한대요! 독특하죠?”
“아. 그렇구나.”
클로드를 향한 오드리의 얼굴엔 남모를 기대감이 가득했다.
‘혹시 그 사람이 미팅 장소에 나타난다? 그럼 그냥 백 퍼센트야. 질투 작전이 제대로 성공한 거지.’
이번에도 샬롯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그러나 들뜬 마음에 찬물을 끼얹듯, 클로드의 어깨 위로 얹어지는 손이 하나 있었으니.
“왜?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
그의 어깨 너머에서 등장한 것은 매력적인 흑발 미인이었다. 오드리의 정보망엔 없는 새로운 인물. 그녀의 머릿속에 요란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 인사해. 여긴 내 아카데미 동기생 에밀리아 다날로.”
“……!”
“어머! 네가 혹시 ‘그’ 오드리니? 그리고 저쪽은 아놀드? 진짜 똑 닮았네!”
오드리는 머리 위로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그대로 굳었다.
‘아카데미 동기생?’
설마 클로드가 짝사랑한다던 그 사람일까 싶어 마음이 선득해졌다.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미안해요. 우리 초면이죠? 나도 모르게 그만.”
“…….”
“클로드한테 하도 많이 들었더니 꼭 내가 아는 사람들처럼 느껴졌지 뭐예요?”
두 사람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박혀 들었다. 그의 어깨에 한쪽 팔을 걸친 채 반쯤 기대있는 에밀리아. 그리고 그런 상황이 익숙해 보이는 클로드.
‘음, 나는 A일 것 같은데. 쾌활하고 발랄한 이성.’
‘나는 이번에도 A 같아. 익숙하고 편한 관계.’
에밀리아는 클로드가 말한 모습 그 자체였다.
그녀는 대답이 없는 오드리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뭔가 오해를 한 눈치다.
“음, 아무래도 우리가 방해한 것 같네.”
“…….”
“실례가 많았어요. 저흰 이만 가 볼 테니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러더니 재빠르게 클로드를 이끌고 사라졌다.
하지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미팅은 이미 파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