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님, 제 발목 좀 놓아주세요! 1권
재주감귤
프롤로그
“들지.”
“…….”
화려한 음식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러나 오드리는 마음 놓고 즐길 수가 없었다.
‘혹시…… 최후의 만찬인가?’
사형수들도 죽기 직전에 가장 거한 상을 받는다지 않나.
겁에 질린 손이 볼품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을 따라 유리잔 안의 물도 잘게 진동했다.
칼질을 하던 데릭은 서늘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유리잔만 들고 있는 것이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어디가 아픈 건가.’
식욕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새하얀 얼굴이 걱정스러웠다.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가는 몸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는 비쩍 마른 손목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걱정스레 식사를 권했다.
“……굶어 죽고 싶은 건가.”
“아, 아, 아, 아니요!”
그러나 어째 오드리는 더더욱 창백해졌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살해 협박에 오금이 저린 탓이다. 이제는 테이블 아래 감춰진 무릎까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이 무시무시하고 극악무도한 공작은 생명에 대한 존중 따위 없는 게 분명하다. 수많은 죽음 중 아사라니? 곱게 죽여 주진 않을 거란 경고일까?
데릭은 하얗게 질려 가는 그녀를 보며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히익!’
오드리는 다시 한번 겁에 질렸다. 저 고요한 움직임은 ‘그럼 다른 방법으로 죽고 싶냐’고 묻는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칼날 같은 시선에 떠밀려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하필이면 나이프였다.
‘……갈 때 가더라도 저항은 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희망에 찼던 얼굴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물들었다. 온갖 경우의 수를 따져 봐도 그를 무찌르고 두 발로 살아 나갈 확률이 0에 수렴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녀가 마법사라고 한들, 생활 마법이나 쓰는 미천한 재주로는 최연소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가 스스로를 결박하고 얌전히 칼에 찔려 주지 않는 이상은.
한편, 데릭은 마지못해 식사를 깨작거리는 오드리를 슬쩍 보고선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그 ‘흡족한 얼굴’이라는 게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과는 아주 많이 동떨어져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가 준비한 저녁을 저렇게나 열심히 깨작거리는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양상추를 깜찍하게도 썰어 놨군.’
심장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도돌이는 도대체 뭘 먹고 자랐기에 숨만 쉬어도 저렇게나 사랑스러운 걸까? 포크와 나이프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콰직.
머나먼 대륙에서 난 최고급 강철로 만들었다던 쇳덩이가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런데도 성에 차질 않았다. 당장 벽이라도 내려쳐야 이 기묘한 간지러움이 사라질 것 같았다.
‘……잠시 나갔다 올까.’
데릭은 연무장에 꽂힌 허수아비들을 전부 뿌리째 뽑고 댕강댕강 베는 상상을 했다. 도돌이만 보면 자꾸 내면에서 알 수 없는 폭력성이 치솟아 미칠 노릇이었다. 심지어 얼마 전엔 도돌이를 생각하다가 맨손으로 집무실 책상을 두 동강 내 버렸지 뭔가.
공작성이 우르르 무너져내릴 날도 머지않은 듯했다.
그러나 오드리는 눈앞의 남자가 저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줄도 모르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생의 마지막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삼십 분? 한 시간?’
아마 이 식사가 끝날 때쯤엔,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죄목은 공갈 협박. 절절한 연애편지를 잘못 부쳐 본의 아니게 공작을 협박한 잘못이었다.
고백 못 한 것도 억울하고 서러운 마당에 협박죄까지 뒤집어쓰다니! 참으로 재수 없는 인생이다.
‘아버지, 오라버니…….’
남겨질 가족들을 생각하니 벌써 와락 눈물이 차올랐다. 오드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하면서 제 앞의 접시를 아무렇게나 헤집었다. 시야가 흐려져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그렇지만 입을 앙다물고 최대한 열심히 칼질을 했다. 뭐라도 썰어서 시간을 벌어야 하지 않겠는가.
“흡, 흐윽.”
그러나 목구멍에서는 눈치도 없이 자꾸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러다간 식사 끝나기도 전에 목이 잘리게 생겼다. 힐끔힐끔 그의 눈치를 살피던 오드리는 얼른 음식을 집어넣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이 와중에도 데릭은 아주 뿌듯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나 보군.’
저렇게나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 더 먹일 걸 그랬다. 복스럽게 와구와구 먹는 모습이 새끼 돼지처럼 깜찍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직접 만든 요리도 아닌데 괜한 뿌듯함이 차올랐다. 어쩐지 뭔가를 더 주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는 맛있는 것들만 골라 그녀 쪽으로 슬그머니 밀어 주었다. 다정한 권유와 함께.
“다 먹는 게 좋을 거다.”
왜냐하면, 하나 같이 귀하고 맛있는 것들이거든.
데릭은 기뻐할 그녀를 상상하며 씨익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다정해 보이기는커녕, 희대의 사이코패스 같은 기괴한 느낌만 물씬 풍겼다.
“……!”
아니나 다를까. 오드리는 사자 앞에 놓인 토끼처럼 흠칫 굳어 버렸다. 울망울망한 눈동자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넘실거렸다.
“코, 콜록!”
다 안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음식을 조금이라도 남긴다면 곱게 죽지 못할 거라는 뜻이겠지?
겨우 앙다문 도톰한 입술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저런.”
그녀만 바라보고 있던 데릭은 재빨리 유리잔을 건넸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분명 자상한 행동임에도 그를 한 번 거쳐 가면 의도가 영 수상쩍어졌다. 마치 ‘내가 널 이렇게 쉽게 죽일 것 같냐’는 조롱 섞인 협박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오드리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단칼에 죽이지 않고 이리저리 굴리기만 하며 겁을 주는 심보가 참으로 악독했다. 용맹하게 울음을 참던 오드리는 결국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서럽게 울어 버렸다.
“그, 그냥, 흐윽, 죽여 주세요!”
“…….”
눈물범벅 된 얼굴이 테이블 위로 쿵, 떨어지고 목이 길게 늘어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제 목을 내려치라는 듯이. 교양 없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깡마른 어깨도 요란하게 들썩거렸다.
“머리는, 흐으으윽, 여기에 두면, 흑, 되나요?”
“……지금 무슨 말을.”
“호, 호, 혹시 독살을 계획하신 건가요?”
프리트 공작은 눈앞에서 사람이 오열을 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역시 ‘악귀’라는 이름값을 하는 남자였다.
오드리는 댕강 잘린 제 머리가 긴 테이블 끝까지 데굴데굴 굴러가는 상상을 하며 서럽게 끅끅댔다.
“아니면 사, 사지를 찢어 죽이실 건가요?”
“…….”
“흐윽, 얼른 죽여 주세요!”
그러나 데릭으로선 이 모든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의 도돌이는 왜 저리도 서럽게 흐느끼고 있는가? 어째서 식사를 하다 말고 죽여 달라는 것일까? 그녀가 없는 내일을 상상하면 당장이라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데, 왜 저런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지?
이 상황은 연애서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무정한 겉모습과 달리 한껏 당황한 데릭은 어쩔 줄을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테이블 밑으로 가려진 손은 초조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고르고 골라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 보려 노력했다.
“숨이…… 넘어가겠군.”
“……!”
어째 눈물은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그녀는 정말로 숨이 넘어갈 것처럼 통곡하기 시작했다.
‘내가 죽는 걸 구경하고 싶은 거야!’
그녀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는 핏빛 눈동자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했다. 오드리는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해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한편, 프리트 공작은 가려진 눈꺼풀 너머에서 혼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책을 가져와야 하나?’
그에게 믿을 구석이란 연애서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역사적인 첫 데이트 아니던가. 숙맥처럼 바로 옆에 책을 펼쳐 놓고 더듬더듬 따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몸 같은 것을 겨우 떼어 놓고 왔더니 이런 불상사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한 권쯤은 가까이 두었어야 했다.’
그는 스스로의 안일함을 자책했다. 그러는 중에도 도돌이는 세상 서럽게 오열하고 있었다.
울고 있는 도돌이를 혼자 두고 나갔다 와도 되는 걸까?
아니. 모태솔로의 짧은 식견으로도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문득, 연애서의 한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핵심23. 연인을 달래는 법》
달콤한 스킨십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
연인을 달래고 싶다면 달콤하고 진한 키스를 날려 보자. 사랑의 접촉 앞에서는 모든 문제도 날아가는 법!
-<앙큼한 여우들을 사로잡는 비법>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
두 사람은 아직 손끝도 스친 적이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달콤하고 진한 키스를 날리라고? 그녀가 놀라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그는 뜨거워진 귀를 만지작거리며 답지 않게 쑥스러워했다.
‘그럴 수는 없다. 첫 키스는 반드시 별이 쏟아지는 언덕에서 해야 한다고 했어.’
암. 평생 기억에 남을 첫 키스를 이런 식으로 홀랑 해 버릴 순 없지. 두 사람의 첫 키스는 나중에 자식들과 손자들에게까지 들려줄 이야깃거리 아닌가. 소록소록 잠이든 아이들에게 속삭여 줄 이야기는 분명 아름다워야 한다.
데릭이 잠깐 먼 미래를 상상하는 와중에도 오드리는 목 놓아 울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저러다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두려웠다.
‘나의 도돌이를 달래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혹시…… 그녀는 그의 마음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뚝뚝하고 서툰 그에게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걸지도 모른다.
‘일리가 있어.’
데릭은 일단 오드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최대한 다정하게 웃으면서,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자신의 사랑을 속삭였다.
“나는, 죽음까지 함께할 거다.”
“히익!”
그러나 잠시 눈을 떴던 그녀는 질겁했다. 동시에 못 볼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기괴하게 웃으며 속삭이는 저주의 말이 소름 끼치도록 집요했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거야……!’
저 남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오드리는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한편, 데릭은 저가 뭘 잘못 짚었나 싶어 심각해졌다.
‘이게 아닌가?’
어쩐지 그녀의 떨림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는 여자 하나 못 달래고 쩔쩔매는 스스로가 머저리처럼 느껴졌다.
모태솔로에게 연애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