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회: 여전히 꽃은 필 것이니 (完) -->
살금 살금 걸어가 꽃잎 위에 앉은 나비를 잡으려던 작은 손가락 위로 하얀 나비가 날개를 나풀거리며 날아갔다.
벌써 두 번째 실패한 소녀의 눈망울에 심통이 떠오른다.
“안녕.”
낯선 목소리에 소녀가 뒤를 돌아봤다.
처음 보는 낯선 소년이었다.
물론 이 작은 소녀의 눈에 낯설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사람이 낯선 나이인 것이다.
“나비를 잡으려고 하는 거니?”
서진이 작은 소녀 단이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오라버니가 잡아 줄 거야?”
일곱 살 단이 눈에는 열 세 살 서진이 딱 오라버니로 보일 것이다.
왜 자기는 오라버니가 없냐고 엄마를 졸랐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만 오라버니다.
또래의 동무들은 모두 오라버니가 있었다.
그것이 여간 부러운 것이 아닌 단이였다.
작년에 남동생 은이가 태어났지만 아직은 작은 아기.
단이의 뒤에서 든든한 오라버니처럼 있어주려면 아직 먼 것이다.
“나비는 날개가 약해. 재미로 잡았다가 놓아주면 다시 날지 못해서 죽어버릴 거야. 그래도 나비를 잡고 싶은 거니?”
“흐응...”
“예쁜 것은 예쁜 것대로 두자. 고운 꽃도 꺾어버리면 시들어 버리잖아? 정말 예쁘고 정말 고우면 그냥 눈으로만 보자. 내 보기에 예쁘다고 함부로 해버리면 나비도, 꽃도 굉장히 아플 거야. 나비가 아픈 것은 싫지?”
“응...”
서진의 말에 단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 봄에 꽃이 이쁘다고 꺾었더니 금방 시들어버린 기억이 단이에게도 있는 것이다.
물가에 그렇게 예쁘게 폈던 개나리가 집으로 꺾어 가져오니 금새 시들어버리는 것을 보고 엄청 울었던 기억이 있었다.
“네가 단이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난 서진이야. 이제 단이가 한양으로 이사 오면 우린 자주 볼 거야.”
“그럼 계속 같이 놀 수 있어?”
서진의 말에 단이의 눈이 반짝거린다.
“그럼.”
“그럼 오라버니가 내 오라버니가 되는 거야?”
“비슷한 거.”
“와아...”
단이의 얼굴에 함박 웃음이 번져나간다.
그렇게 오랫동안 소원을 빌었던 오라버니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예쁘게 생긴 오라버니가.
“나비 대신에 내가 연못의 물고기를 보여줄게. 갈래?”
“응, 갈래.”
서진이 내미는 손을 단이가 얼른 잡았다.
단이의 작은 손을 잡은 서진이 후원의 연못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마침 방에서 나오던 유경이 발견했다.
뭐가 그리 신나는 지 소년의 손을 잡고 깡총 깡총 뛰어가는 단이의 뒷모습에 아기를 안고 있던 유경이 살며시 웃었다.
그녀의 품에 아직 걸음마를 시작하지 못한 아이가 안겨 있었다.
젖을 달라고 보채는 바람에 잠시 방에서 젖을 물리고 나온 그 잠깐 사이에 소녀는 이미 손을 잡아줄 소년을 만나버린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어렸을 적 손을 잡아주던 산호의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다정하게 손 잡아주던 산호는 이제 뒷모습만 봐도 든든한 사내가 되어 자신의 상단을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기 싫어 점점 더 멀리, 더 먼 땅으로 나가는 산호의 모습에 가끔은 가슴이 아픈 유경이었지만 그것이 그 사내가 결정한 삶이기에 그저 응원할 뿐이었다.
언젠가 시영이 했던 말을 유경은 기억했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잡는 것이라는 그 말을...
어떤 삶을 살던지 간에 결국 그 삶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그 말을...
이제 저 작은 아이들도 자신들의 삶을 살아나갈 것이다.
어른들이 저 아이들의 삶에 어떤 결정을 내려도, 결국에는 살아가는 것은 저 아이들인 것이다.
저 아이들이 사랑하고, 저 아이들이 아파하고, 결국 삶에 꽃을 피워내는 것은 저 아이들인 것이다.
그렇게해서 피어난 꽃이라면, 어떤 모양일지라도 그 꽃은 아름다울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꽃이기에,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각자의 꽃이 가장 아름다운 법이기에.
“저것들이 벌써 정분이 나나보다.”
문한의 목소리에 유경이 살며시 웃는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문한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다.
“서진이가 아주 바르게 컸어요.”
“날 닮아서 그래.”
“어머.”
유경이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를 닮았다고 말하는 문한의 표정이 남들이 보면 그 말이 진짜로 들릴 만큼 능청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놈이 은이냐?”
문한이 유경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힐끗 들여다본다.
“제 아비 판박이구만.”
“저도 좀 닮았어요.”
“뭘, 딱 보니 제 애비 얼굴 밖에 없는데. 어디, 이리 줘 봐라. 한번 안아 보게.”
문한의 말에 유경이 품 안의 아이를 문한에게 안겨준다.
문한의 품에 안긴 아이가 낯선 것인지 얼굴이 점점 울상이 되어간다.
“어르신.”
유경이가 살며시 문한을 불러본다.
“참 좋은 날씨여요. 그렇죠?”
“싱겁기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문한의 눈 역시 웃고 있었다.
그 역시 참 좋은 날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참 좋은 날씨.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반갑게 안부를 나눌 수 있고, 서로의 행복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참 좋은 날씨.
오늘 밤에는 오랜만에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다과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떠들썩한 자리가 될 것이다.
수윤이 그의 처와 아이를 데리고 올 것이고, 오랜만에 한양에 돌아온 산호도 올 것이다.
그리고 추영과 유경과 그들의 아이들, 그리고 시영과 문한과 서진.
이 얼마나 떠들썩한 자리가 될까.
“날이 좋으니 달도 밝겠다.”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문한이 중얼거렸다.
밝은 달 아래 정다운 이들이 웃는 소리가 노랫소리처럼 퍼질 것이다.
그 웃음 안에 때로는 그리움도 담기고, 때로는 서글픔도 담기고, 때로는 남몰래 삼키는 아픔도 담기겠지만,
그래도 달 아래 주고받는 술잔에, 달 아래 주고받은 이야기에, 달 아래 주고 받는 웃음에 그 모든 것을 담아 흘려 보낼 수 있어 아름다운 밤이 아닐까.
더없이 아름다운 밤이 아닐까.
시간이 흘러 그들의 아이들이 다시 그렇게 모여 웃게 되는 그날에도 여전히 달밤은 아름답고 바람은 정겨울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이어져 가는 것이니.
그렇게 바람결에 여전히 이어져 가는 것이니.
============================ 작품 후기 ============================
끝이 났습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시고 후원해주시고 응원해주시고 아낌없이 코멘트를 달아주신 모든 고마운 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