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회: 또 꽃이 피고 -->
“여기서...”
추영이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그가 왜 웃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여기서 그대가 내 상처를 싸매주었지.”
“서방님도 참...아직도 그런 옛적 이야기를...”
유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잊을만 하면 꺼내는 추영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곳에서 그녀가 그의 상처를 싸매주어 인연이 시작되었다는 그런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유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건 비밀이지만...”
뭔가를 말할 듯하던 추영이 짓궂게 입을 다문다.
“뭐가 말입니까? 서방님?”
“비밀이라니까.”
추영 답지 않게 오늘따라 유난히 짓궂다.
두 사람이 송도에 내려온 지 닷새가 지난 날이었다.
나흘 동안 주변 정리를 하고 오늘에야 시간이 나 그동안 유경이 살았던 곳을 둘러보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면 저도 묻지 않겠어요.”
유경이 새침하니 돌아서자 그녀의 뒤로 다가선 추영이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는다.
“삐친 것이오?”
“아니요.”
“삐쳤구만.”
“아니라니까요.”
“실은 그때 내 상처를 싸매주었던 천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오.”
“네엣?”
유경이 놀란 토끼눈을 뜨고 추영을 돌아봤다.
“그건 제 속치마...”
그랬던 것이다.
속치마를 찢어 상처를 싸매주었었는데 그 속치마를 여지껏 간직하고 있다는 말에 유경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가 이내 붉어졌다.
“당장 버리셔요. 그런 것...”
“내 보물인데 그걸 버리라니, 참 야박도 하오.”
“버리시라니까요!”
달려들 것처럼 앙칼지게 눈을 치켜뜨는 유경을 추영이 한 아름에 끌어 안는다.
그리고 손을 들어 기슭을 가리켰다.
“저기서 떨어졌는데 여기로 떨어졌지. 난 그 때 이 놈의 말이 오늘따라 왜 이리 비틀거리나 싶었는데 그게 실은 하늘이 우리 인연을 엮어주려 그런 것이었지 뭐요.”
“그런 분이 첫날밤에 소박을 놓고 가셨어요?”
새침하니 대답하는 유경의 목소리에 추영이 껄껄 웃어버렸다.
“아녀자들 속이 좁다더니 대체 언제까지 그걸 들춰내서 사람을 무안주려는 건지...”
“아...”
추영의 품에 안긴 채로 유경이 작게 소리를 질렀다.
물동이를 이고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늙은 노파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할멈!”
유경이 반갑게 소리치며 노파를 향해 뛰어갔다.
뛰어가는 그녀의 뒤에서 추영이 천천히 그녀를 뒤따라간다.
서두를 것이 없었다.
이제 그녀는 항상 그의 옆에 있으니 서두를 것이 없는 것이다.
“할멈, 나요, 나. 유경이.”
반갑게 얼굴을 내미는 유경을 자글자글한 주름이 얼굴을 잔뜩 덮은 노파가 눈가를 찡그리며 쳐다본다.
몇 년 사이에 부쩍 늙은 노파였다.
“한양 갔던 그 유경이?”
“그래요, 그 유경이. 할멈 참 오래도 사셨소. 여지껏 하나도 변하지 않고...”
“늙은 게 변할 게 뭐 있나. 이미 다 늙어버렸는데. 그러는 자네도 하나도 안 변했네.”
“아직도 그 집에 사시우?”
“살지. 내가 갈 곳이 또 어디 있어서. 그러는 자네는 한양에서 아주 내려왔나?”
유경이 머리를 올리고 기생 첫걸음을 내딛을 때 그녀의 살림을 봐주었던 할멈이 아직도 물동이를 일 정도로 정정한 모습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몇 년 살다 다시 한양 갈 거예요. 그러지말고 할멈. 나하고 같이 살래요?”
“이젠 늙어서 기생 뒷바라지 못해.”
“저 이제 기생 노릇 그만 뒀어요.”
“그래? 어느 양반 첩실이라도 되었어?”
“네.”
“잘 됐구만. 그게 최고지. 아무리 기생으로 이름을 떨쳐도 한 사내 만나 자리 잡는 것이 최고지.”
“저하고 같이 살다가 제가 몸 풀면 아이 보는 것 좀 도와주세요. 아이는 친정에서 푼다고 하는데 전 친정도 없잖아요.”
“애도 생겼어?”
“아직 낳으려면 멀었어요.”
“복을 있는 대로 두루 두루 받았구만. 복 받았어. 내가 복 받을 줄 알았지.”
늙은 노파가 머리의 물동이를 내려놓고 허리를 툭툭 친다.
그리고 유경의 뒤에 서 있는 추영을 힐끗 쳐다본다.
“저 양반인가 보네. 허우대도 좋고 다 좋네. 복이 넘쳤어, 넘쳤어.”
“그러게요. 어렸을 때는 세상에서 제가 제일 복 없는 아이인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제가 세상에서 가장 복이 많은 사람이네요.”
노파의 시선을 따라 등 뒤로 다가온 추영을 바라보던 유경이 빙그레 웃는다.
버려지고, 또 버려져서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고,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된 것이다.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떠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곳을 떠날 때의 결심을 그녀가 기억했다.
어차피 한번 피었다면 세찬 바람일지라도 꽃잎을 한번 활짝 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곳을 떠났다.
세상의 그 어떤 바람이라도 온 몸으로 맞으며 당당하게 스스로의 발로 서서 그 불어오는 바람에 꽃을 피우고 싶다는 각오로 이곳을 떠났다.
모질어도, 시려도, 저리듯이 아파도 그 바람을 맞고 그 바람에 지는 꽃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이곳을 떠났다.
바람이 불어오면 그 바람을 휘어감고, 그 바람에 향기를 퍼뜨리다, 그 바람에 지는 꽃이 되고 싶다는 바램을 품고 이곳을 떠났다.
그리고 돌아왔다.
이추영이라는 바람에 진 꽃이 되어, 그의 품에 진 꽃이 되어, 그의 가슴에 진한 향을 남기며 뿌리를 내린 꽃이 되어 돌아왔다.
앞으로 어떤 바람이 또 불어올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가지는 알고 있다.
어떤 바람이 불어온다 하더라도, 이미 두 발로 당당히 서는 법을 알았기에, 이미 그 바람 속에서 꽃잎을 피우는 법을 알았기에 더 이상은 두렵지 않다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알기에, 더 이상은 무섭지 않다는 것을.
*
“앗...”
작은 공기의 흔들림에 촛불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촛불 하나를 은은하게 밝혀 놓은 방 안에서 유경이 그녀의 비녀를 빼주는 사내의 손길에 몸을 움츠렸다.
“조심해야 될 때라니까요.”
그녀의 저고리를 벗기는 사내의 의도를 알기에 유경이 나무라는 듯 말해본다.
의원이 그토록이나 조심하라고 했건만 이 사내의 손길이 그녀의 저고리를 벗겨오는 것이다.
“조심할 것이니...”
“서방님...”
“내가 조심한다니까. 아주 조심, 조심 조심...조심할 것이니 조금만...”
아마도 몸이 달아오른 것이리라.
젊은 피가 그 몸에서 끓어오르는 데 누가 참을 수 있을까.
꽃처럼 피어나는 아내를 곁에 두고 어느 사내가 참을 수 있을까.
“서방님, 이러시면...”
“약속하오. 절대 내 삽입은 하지 않으리다. 만지기만...만지기만 할 것이니...”
“믿을 수 없어요.”
“믿어보시오,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성급한 손에 저고리가 벗겨 나가자 그녀의 뽀얀 어깨가 촛불에 드러났다.
불그스레한 촛불에 뽀얀 어깨가 비쳐 사뭇 아름답게만 보인다.
“자, 누워 있으면 내가 조심해서 만지기만 할 것이니, 걱정 말고 누워보시오.”
도무지 믿지 못할 말이지만 한번 믿어보자 생각하며 유경이 그 손이 이끄는 대로 금침 위에 눕는다.
이 손길이 그리운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두 번 실패했기 때문에 세 번째는 아이가 완전히 안전하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는 부부 관계는 없다고 선언했던 유경이었다.
하지만 관계가 끊어진 두 달 동안 앓는 소리를 내는 추영의 모습에 그녀의 마음도 약해지기 마련.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도 그 몸의 체온이 그리운 것이다.
그래서 조심한다는 그의 말을 믿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