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회: 달맞이 -->
“그래, 애는 서넛 낳았느냐?”
수윤의 퉁명스러운 말에 유경이 살며시 웃음을 터트렸다.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고 살며시 웃는 유경의 모습에 수윤의 입이 삐죽거린다.
“내가 첩으로 들이겠다 할 때는 오만가지 이유를 대면서 빼던 년이 추영이가 그리 말하니 넙죽 받아들이다니. 나보다 추영이가 더 밤일을 잘 할 것처럼 보여서 그랬던 것이냐?”
“말씀이 짓궂으셔요, 나으리.”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수윤의 마음을 알기에 유경이 너무한다, 싫다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과 추영을 생각하는 수윤, 이 사내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기에.
“내가 추영이에 비해 뭐가 빠지는 거냐? 내가 허리 힘이 딸리더냐, 아니면 인물이 빠지더냐? 네가 원한다면 내가 하늘의 별도 달도 다 따다가 네 치마폭에 안길 수도 있건만, 에이, 야박한 년.”
“그건 제가 져서 그런 것입니다.”
“뭐야?”
“나으리를 대함에 있어서는 제가 이겼고, 서방님을 대함에 있어서는 제가 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나으리께서 부족한 저를 너무 사랑해주셔서 그 마음을 밟고 제가 이겨버린 것일 뿐, 나으리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유경의 말을 들으며 수윤이 가슴 한 켠이 아스라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나으리고, 추영은 서방님이라 부르는 유경의 말에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이다.
- 서방님이라 부르거라.
한 때 그 호칭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렇게 되고 싶었다.
정말 그렇게 되고 싶었다.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 유경의 말처럼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인 것일까.
너무 사랑해서 져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부족해서 졌다고 하면 너무 가슴 아프지 않은가.
그렇다면 차라리 너무 사랑해서 졌다고 하자.
더 사랑해서 졌다고 하자.
더 사랑해서 양보했다 하자.
더 사랑해서...마음껏 사랑하게 물러나 주었다 하자...
“내려오기 전에 댁에 잠깐 들렀었는데 아이가 아주 예뻤어요.”
유경이 말하는 그 아이가 자신은 얼굴도 보지 못한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수윤이 알아차렸다.
자신이 이곳에 귀양 내려와 있는 사이에 태어나고 자란 아들.
이화가 낳은 아이가 낳자마자 죽었다는 말도 들었다.
물론 그 아이도 얼굴 보지 못했다.
이화에게도 미안했고 한양에 남겨두고 온 아내에게도 미안한 마음은 있었다.
아비의 얼굴도 보지 못한 아들에게도 미안했다.
그러고보니 자신은 언제나 저지르기만 할 뿐 모두에게 미안한 일만 남기는 것이다.
문득 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여인들에게 미안한 일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늘 미안한 일만 하던 자신이 딱 하나 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추영을 위해 활을 들었던 것, 그것 하나 뿐이었다고 수윤이 생각했다.
그것 하나로 지금껏 미안하게 만들었던 수많은 일들이 다 덮이지는 못하겠지만, 나머지 죄값은 남은 귀양살이로 치르면 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귀양살이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껏 자신이 울린 이들의 눈물 값을 치르는 것이라 그리 생각하자 하는 수윤이었다.
이것은 눈물 값이라고.
그러나 그 수많은 눈물 값을 치르더라도 지금 눈 앞에서 웃고 있는 웃음 하나 때문에 마음이 행복한 것은, 이것이 역시 사랑이기 때문이리라.
일생 자신에게는 연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사랑이기 때문이리라.
“서방님께서 태어나는 것이 딸이면 그 댁 아드님과 혼인시키면 좋겠다 그리 말씀하시던걸요. 나으리의 아드님이 어지간히 탐이 나신 것 같으셨어요.”
생긋 웃는 유경의 말에 수윤이 그녀의 아랫배를 쳐다본다.
“설마...”
수윤의 가늘어지는 눈매에 유경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조심해야 해요. 벌써 두 번이나 실패했는걸요. 의원이 이르기를 유산도 습관이라 자주 하면 좋지 않다 하니 이번에는 정말 조심해야 해요.”
“그런 년이 먼 길을 온 것이냐? 너도 네 서방도 정말 대책이 없구나. 그런 것이면 얌전히 집에 들어앉아서 몸조리나 하고 있을 것이지.”
그 안에 든 것이 마치 제 아이라도 되는양 수윤이 정색을 하고 말한다.
지금도 종종 그 생각을 하는 수윤이었다.
그 아이가 정말 누구의 아이였을까 하는 생각.
정말 추영의 아이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아이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사내의 아이였을까.
수윤의 마음에는 자꾸만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진실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지금 그 태 안에 아이를 품고 있다는 유경의 말에 수윤이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거렸다.
“나으리.”
유경이 다정하게 수윤을 부른다.
그 목소리처럼 그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다정하여 수윤이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어여쁜 얼굴이었던가.
이렇게 눈이 부시게 어여쁜 얼굴이었던가.
“나으리께서 말씀해주셨지요. 꽃이 져도 바람은 잊지 않는다고...저 또한 그리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바람이 가도 꽃은 잊지 않는다고. 어느 따뜻한 봄날 꽃잎을 살며시 들추고 흔들던 바람이 계절이 바뀌며 가버리더라도 그 바람의 기억을 꽃은 잊지 않는다 그리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사랑이 아니라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설레던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문득 문득 찾아오는 그리움이 사랑이 아니라 누가 말하겠는가.
사랑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하여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사랑의 기억이건만.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바람의 향기이건만.
사랑을 알게 한 사내.
사랑의 설레임과 사랑의 진한 여운을 알게 한 사내.
사랑 받는 기쁨과 사랑하는 아픔을 알게 한 사내.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도 알게 한 사내.
이 사내에게서 배운 사랑으로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이 사내는 알고 있을까.
그 사랑이 그녀의 마음에서 흘러 지금도 여전히 사랑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 사내의 마음에서 시작된 사랑이 그녀에게 흘러 이 사내의 벗에게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네 년 닮은 계집애면 못나서 싫다. 추영이라도 좀 닮으면...아니다, 그것도 인물은 아니되겠다.”
수윤이 끄응, 하며 고민하기 시작할 때 사립문 밖에서 추영이 술병을 들고 걸어들어오다 그 모습을 쳐다본다.
“무슨 고민 있는가?”
추영의 말에 수윤이 눈살을 찡그리며 한마디 툭 내던진다.
“인물들이 어째 다 그 모양이라서 이 고민이 들게 만드는가?”
“응?”
그저 추영만이 영문모를 소리에 어리둥절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