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회: 달맞이 -->
바람이 산들 산들...
봄 향기가 물씬 물씬...
봄이라서 좋은 날씨였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봄이라서 좋더라는 개뿔이겠지만.
“아앗, 앗, 앗...”
“허어, 아픈 것이냐?”
지그시 물렁거리는 살을 한번 눌러 본다.
“자, 여기를 눌러도 아픈 것이냐?”
이번에는 치마를 슬쩍 올리고 그 안에 야들야들한 볼기짝을 한번 만져본다.
“아아아! 나으리! 왜 그런 곳을...!”
야단이 났다.
손만 슬쩍 갖다 댔는데도 이 계집의 입에서 나오는 뜨거운 숨소리를 보라.
아주 야단이 났다.
그 야단스런 목소리에 수윤이 점잖게 대답했다.
“왜? 젖었느냐?”
점잖은 목소리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음란한 말이 새어나온다.
“에그머니! 남사스러워라!”
아직 벌건 대낮에 대놓고 수작을 거는 수윤의 모습에 평상에 엎어져서 볼기짝을 내보이던 계집이 얼른 치맛단을 추스르고 달아난다.
오늘 아침에 논두렁에서 굴러 허리가 아프다며 엉거주춤 사립문 열고 들어오기에 수윤이 옳구나 싶어 수작을 한번 걸어본 것이다.
일찌감치 공갈로 한양에서 의원 해먹던 솜씨가 있다 후려쳐 놓았으니 지겨운 마당에 재미있는 일이나 한번 해볼까 싶었던 것이다.
이 대낮에 설마 덮칠까 싶어 얼른 내빼는 계집의 꼴이 우스워서 수윤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이제 곧 한야에서 귀양 온 양반이 멀쩡한 아낙 덮치는 놈이더라는 소문이 자자할 것이다.
“재미없네.”
겨울도, 봄도, 여름도, 가을도 매 한가지 어느 것 하나 재미난 것 없는 이 깡촌에서 무료함을 달래려니 느는 것은 장난질 밖에 없다.
한양에서 정부인 마나님이 보내온 물건들 중에서 진주, 호박 노리개로 이 깡촌에서 제법 얼굴이 반반하다는 계집들의 치마는 다 들쳐보았다.
치마만 들쳐 봤을까. 살살 꼬셔서 치마도 들추고 그 속살 구경도 실컷 했다.
계집 치마 들추기가 얼마나 쉬운지 한양이나 여기나 매 한가지여서 번쩍거리는 노리개면 알아서 치마를 올리고, 노리개로 넘어오지 않는 고고한 것들은 나중에 귀양살이 풀리면 한양으로 데려가서 첩실로 삼아주마는 빈말 한번에 그 허연 속살들을 쩍쩍 벌리니 세상 사는 법을 너무 잘 아는 것이 계집들이다.
어줍짢은 농군 정실보다는 잘나가는 한양 양반 첩실이 몇 배나 더 낫다는 것을 몸으로 익힌 계집들 치마 자락 들추기도 이제 신물이 나고 있던 수윤이었다.
그리고 이젠 들출 치마도 없다.
돌팔이 의원짓도 신물이 나고 계집질도 신물이 나고 뭘 하면서 이 깡촌에서 귀양살이를 버텨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미쳤지...내가 미쳤지...어쩌다가 그런 몹쓸 년에게 마음을 줘서 내 팔자가 이 모양이냐...”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잘 살고 있겠지...’
“그런 년을 왜 좋아해 가지고...”
‘나 같은 건 다 잊고 잘 살고 있겠지...’
“에이 망할 놈, 망할 년. 잘 먹고 잘 살아라.”
여전히 생각나는 그 고운 눈가.
맑게 웃는 미소.
“앞길이 창창하던 단수윤이 어쩌다가 이리 뒤웅박 신세가 되어서...죽을 지경이다, 내 팔자야...”
어느 달밤, 몰래 눈물로 달래보는 그리움.
“한양 어여쁜 기생년들 달만 보고 내 생각만 하고 있을 것인데, 그 년들이 무슨 죄여. 내가 잘 난게 죄지. 이 죄많은 사내가 문제지.”
겨울이 가고 봄이 벌써 서너번도 더 다녀갔는데 왜 아직까지 그리움은 가벼워지지 않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벌써 해가 서너번은 바뀌었는데 왜 마음은 멀어지지 않는 것인지 그 이유를 모를 일이다.
계절이 가듯 마음도 간다면 벌써 사그라들었을 마음인데...
왜 마음은 계절처럼 가지 못하는 것일까.
왜 마음은 달이 지듯 지지 않는 것일까.
“유경이 년과 애새끼들 주렁 주렁 달고 사느라 추영이 그 놈도 이제 볼 짱 다 본 인생이지. 그저 사내란 모름지기 한평생 바람처럼 홀로 가야 제 맛이지. 죽네 사네 달라붙는 년들 돌아보면 인생 종 치는 것 순식간이니. 그저 한번 정 주고 다시 돌아보지 않는 고고한 바람처럼 유유자적 즐기며 사는 것이 진짜 사내지. 암, 그렇고 말고.”
‘유경이도 내 생각하고 있을까...지나가는 바람에라도 내 이름 석자, 떠올려나 줄까...’
“오늘은 또 어떤 년 치마를 들쳐 볼까나. 강 나루터 사공 놈 마누라가 엉덩이를 살랑 살랑 흔드는 꼴이 꼭 한번 잡아 먹어달라고 꼬리 치던데 오늘은 그 년이나 깨물어 먹어봐야 겠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술병을 흔드니 빈 병이다.
그새 다 마신 것이다.
“술 받아오는 놈이 중간에 빼돌리나? 무슨 술이 한모금 마시면 바닥이야? 술 처먹어서 술병인가? 나 한모금 저 세 모금. 하, 이 지랄 맞은 깡촌, 후진 깡촌에 술병도 지랄 맞네. 어디 보자, 이 포졸 놈이 어디 가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다시 술 받아오라 부려먹으려니 귀양 살이 지키는 포졸 놈은 머리 카락도 보이지 않는다.
“이 놈이 또 얼마나 얻어 터지려고. 내가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 양반인지 보여줘야 하나?”
그때였다.
저벅.
사립문 들어서는 발소리에 수윤이 옳구나 싶었다.
“네 이놈! 어딜 싸돌아 다니느라...”
포졸 놈이 언제 저렇게 얼굴이 허여멀건 해졌을까.
“허어, 술 반 모금에 취해 헛 게 다 보이니 이제 염라대왕 면담할 때가 된 건가? 이것 참, 아직 창창한 나이에...허 참...”
상투만 튼 머리를 긁적이고 있으니 그 헛것이 한걸음 다가선다.
“여전하시어요.”
‘여전하기는 네 년 목소리가 여전하다.’
“낮부터 무슨 약주를 그리 과하게 드십니까?”
“왜? 직접 보니 내 꼴이 우스우냐?”
수윤의 퉁명스러운 말에 그녀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경치가 좋네요.”
그 새침한 눈이 웃는다.
그런데 그 새침하니 웃는 눈이 참 곱다고 수윤이 생각했다.
여전히 곱다고...
그리 고우니 자신이 그리 미친 것이다.
그리 고우니 자신이 지금까지 미친 것이다.
“경치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네 서방 더러 가서 술이나 받아오라 해라.”
그 말을 하며 수윤이 빈 술병을 휙 던지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추영이 그걸 또 가볍게 받는다.
술병을 들고 빙그레 웃으며 돌아서는 추영의 뒷모습에 수윤이 한마디 던진다.
“해지기 전에 와라.”
돌아서는 추영의 등이 웃는 듯 흔들렸다.
여전히 수윤을 바라보고 서 있는 유경의 입가에 고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