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회: 눈 위에 붉은 꽃 -->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홍앵이 죽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어났던 방심에서 비롯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의 목을 노리던 홍앵이 죽었다는 생각에 주변을 소홀히 했던 것일까.
마음 놓고 기생들을 집안으로 불러들여 술판을 벌이던 형조 판서 대감의 목을 화살이 꿰뚫은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화살은 정확하게 형조 판서의 목을 뚫었다.
술잔을 입가에 가져가 대려던 형조 판서의 손 사이로 뭔가가 스쳤다 싶더니 붉은 피가 그의 옆에 앉았던 기생들의 얼굴에 훅, 끼친 것이다.
난데없이 앞에서 튀는 붉은 핏물에 기생들이 비명을 지르고 목에 화살이 박힌 채로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죽은 형조 판서를 향해 호위 무사들이 칼을 들고 뛰어 왔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죽은 형조 판서의 목에서는 시뻘건 핏물이 줄줄 흘러 그 손에 든 술 잔에 담기고 있었다.
술잔이 핏물로 가득 차서 바짓단을 적시고, 그 앉은 비단 보료까지 흠뻑 적셔나갔다.
화살은 담 위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잡아라-!”
누군가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담 위에서 뭔가가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을 모두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형조 판서를 죽인 원흉이라는 것도 모두 다 알 수 있었다.
*
“윽!”
추영이 달리던 발을 멈췄다.
시린 바람에 상처가 아파왔다.
등에 박힌 몇 발의 화살이 그의 등을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형조 판서의 호위들이 쏜 화살이었다.
저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쫓는 형조 판서 무리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단 한번에 그 목숨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었다.
하지만 그 한번으로 천운은 끝나고 소맷단을 적시는 붉은 핏물에 추영이 더 이상의 천운이 자신에게 없음을 실감했다.
그가 밟고 선 새하얀 눈이 붉게 물들어갔다.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핏물로 새하얀 눈이 붉게 물들어갔다.
날이 시렸다.
하지만 핏물까지 금새 얼어붙게 만드는 이 시린 바람이 차라리 더 낫다고 추영이 생각했다.
달도 없는 밤, 새하얀 눈바람에 달도 가리운 밤.
달리는 발자국도 눈바람이 가려주고, 흘리는 붉은 피도 눈 바람이 가려주는 밤.
돌아보고 싶은 그리움도 가려 주는, 눈 바람 날리는 밤.
그 바람에 추영이 마음을 실어 보낸다.
이 눈바람이 자신의 마음을 실어서 보내주기를 바래본다.
날아서...
날아서...
날아서...
훨훨 날아서...
은애하는 이에게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이라 그리 전해주기를...
자신이 몰랐던 아비.
자신이 몰랐던 어미.
그리고 자신이 몰랐던 누이...
마지막까지 다정했던 누이...
이것은 속죄였다.
이것은 원한을 갚는 것이 아니라 속죄였다.
자신이 몰랐던 누이의 그 고운 눈가의 붉은 눈물을 씻는 속죄였다.
자신이 몰랐던 세월, 혼자 힘들었던 누이에게 갚는 자신의 속죄였다.
그 차가운 눈 속에서 홀로 가게 두어야했던 누이에 대한 자신의 속죄였다.
“고이 눈 감으시기를...”
추영이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태어나게 해준 얼굴도 모르는 부모에 대해 알지도 못했던 불효를 갚는 것이다.
“고이 눈 감거라...”
이것으로 자신이 칼을 겨누었던,
그녀에게 다정하지 못했던.
그녀를 그리 보내었던 그의 죄가 다 씻어지려나...
“나도 곧 갈 것이니...”
추영이 활을 버리고 칼을 빼들었다.
그를 향해 저 멀리서 칼을 든 자들이 개를 앞세워 달려오고 있었다.
도망칠 길 따위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순식간에 에워싸일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약속했으니 마지막까지 칼을 놓지 않으려는 것이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다.
도망칠 일이 없으니 두려움은 없지만 남긴 것이 있어서 미련은 그 가슴에 차오르고 있었다.
지척이었다.
무서운 칼을 든 이들과 개 떼들이 추영의 앞으로 뛰어들기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휘릭-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추영의 귓전을 스쳤다.
뭔가가 추영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느낌을 추영은 알고 있었다.
화살이 그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놀란 추영이 돌아섰다.
누가 그를 위해 활을 당겨준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돌아선 추영의 눈 안에 그가 들어왔다.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그가 들어왔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그의 모습이 추영의 눈에 들어와 박혔다.
“수윤-!”
그는 여기 있어서는 안된다고 추영이 생각했다.
그는 여기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위해 활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싸움이지 그의 싸움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왜...
“바보 천치 같은 놈.”
수윤이 살 먹인 시위를 당겼다.
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경쾌한 소리가 귀를 적신다.
추영을 향해 미친 개처럼 몰려오는 놈들을 향해 한 발, 한 발 화살을 당기는 수윤의 손이 신명이 난다.
신명 나게 시위를 당기는 것은 한 발 한 발이 벗을 향한 마음이고, 한 발 한 발이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마음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멋져 보일 거다.”
‘암, 멋져 보여야지. 세상에 이렇게 멋진 사내가 흔한 줄 아느냐? 세상에 나처럼 고루 고루 갖춘 사내가 어디 흔해야 말이지. 그런 내가 이리 하게 만들었으니 너도, 유경이도 황송한 줄 알아야지. 내게 이리 사랑받으니 과분한 줄 알아야지. 멋지고 잘난 내가 모든 걸 다 버리고 너희 둘을 위해 여기에 서게 만들었으니 알아서 보답해야지. 둘이서 눈꼴시게 잘 사는 것으로 내게 보답해야지.’
“난 너무 잘 나서 탈이야.”
여간 잘나지 않아 이 고생이라고 수윤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여간했으면 사랑도 여간했을 텐데, 여간 잘나지 않아 사랑도 이리 험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엔 자신이 잘난 탓이다.
절대로 추영이 탓이 아니라고, 절대로 유경이 탓이 아니라고 수윤이 생각했다.
이게 다 자기가 잘난 탓이라고 생각할 뿐...
만약 자신이 죽어도 그건 추영이 탓도, 유경이 탓도 아니라고...
다 자기가 잘나 죽는 것이라고...그리 생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