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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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 야트막한 무덤 위에 소복하게 쌓이고 있었다.

비석 하나 없는 무덤이었다.

그 아래 묻힌 것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는 그런 무덤이었다.

그 무덤 위로 소복하게 쌓이는 눈을 바라보던 남자가 그 위에 술 한병을 뿌린다.

술이 뿌려지는 곳마다 눈이 점점이 녹아 움푹 패인다.

“미안하다...”

남자가 쓴 갓 위로도 새하얀 눈이 쌓이고 있었다.

“날 원망하거라. 네게 그 사실을 알려준 나를...”

술 한 병을 전부 뿌린 다음 남자가 돌아섰다.

느티나무 기둥에 기대어 서 있던 문한이 남자가 술 한병을 전부 뿌리고 돌아서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킨다.

“끝났어?”

“그 아이 묻힌 곳을 가르쳐줘서 고맙네.”

갓을 살짝 들어올리며 시영이 문한에게 고맙다는 고개짓을 한다.

조금 전에 문한의 방 문을 두드린 시영이었다.

간다는 말도 없이 가버린 이가 온다는 말도 없이 찾아와 꺼낸 말이 단이 무덤이 어디냐, 였다.

그 말에 문한이 왜 왔냐, 왜 갔냐, 는 물음도 하지 않고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둘 중 누구도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지금은 애도할 때인 것이다.

“산호 놈이 네 원망을 많이 하고 있다. 그 놈 하고 마주치면 그 놈이 널 가만 두지 않을 지도 몰라.”

“자네는?”

“나도 네 놈 얼굴을 구분도 못하게 패주고 싶지만, 나도 공범이니 그러지는 못하지. 그 년에게 칼 잡는 법을 가르쳐준 나도 공범이니...”

“나는 늘...후회했어.”

중얼거리는 시영의 갓 위로 하얀 눈이 떨어진다.

“그를 그렇게 보낸 후에 계속 후회했어. 그를 살렸어야 했는데...그가 죽지 않게 무슨 일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햇병아리 주제에 무슨...그땐 다들 그랬어. 이경세 대감도 그땐 힘이 없었지. 너도, 나도 마찬가지고.”

“아니, 살릴 수 있었어. 살리고자 마음만 먹으면 살릴 수 있었어. 내가 아버님께 무릎 꿇고 제발 그이를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했으면 살릴 수 있었어.”

“...”

“아버님 말씀대로 혼인도 하고, 출사도 하고, 더 이상 다른 곳에 한눈도 팔지 않는 착한 아들이 된다고 무릎 꿇고 그 앞에서 빌며 애걸복걸 사정했으면 내 아버님이 그 힘 있는 손 한번 들어 그 이를 살릴 수 있었을 걸세. 하지만 난 그리 하지 않았지.”

“...”

“그 이 때문에 굴레를 쓰기는 싫었어. 그 이를 살리고자 내 평생 벗어버리지 못할 굴레 안으로 들어가는 건 싫었어. 그 이 하나를 살리려고 내 소중한 이 곁을 떠나는 것이 싫었어. 그래서 죽게 내버려두었어.”

“쓸데없는 소리.”

“자네 곁에 있고 싶어서 그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외면하고 모른척 해버렸어. 결국 그를 죽게 만든 것은 바로 나였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니까.”

“단이에게 내가 아비의 일을 가르쳐준 것은 그 때문이었어. 그렇게라도 알려주지 않으면 내 안에 가득찬 죄책감이 날 죽일 것 같아서 말해버렸어. 누구가의 그이의 복수를 해주길 원했어.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었고, 단이의 등을 떠밀어 버렸어. 내가 했어야 하는 일을 그 아이에게 떠맡기고, 내가 하지 못한 일을 그 아이에게 던져 버렸어. 결국에는 이 모든 원흉은 바로 나였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만 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그때로 돌아가서 모든 걸 다 내려놓고 그 이를 살렸을 텐데...그러면 지금의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비틀거리는 듯 걸어서 시영이 문한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젖은 눈동자가 문한을 향해 있었다.

“이런 내가 자네를 좋아해서 미안해. 이렇게 추한 내가 감히 자네를 마음에 담아서 미안해...”

늘 미안했다.

지워도 지지 않는 그 길의 피를 볼 때마다 늘 미안했다.

살려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모른 척 해서 미안했다.

그래서 그 남긴 피붙이를 볼 때마다 미안했다.

그리고 그 피묻은 마음으로 사랑해버린 이 남자에게 미안했다.

그런 추한 피가 묻은 자신이 이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미안했다.

벗의 피를 묻힌 마음으로 감히 사랑한다는 것이 미안했다.

그런데도, 미안한데도 사랑하는 마음은 멈추지 못했다.

“그를 죽여 가면서까지 자네를 사랑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하면 남은 일을 책임져. 아직 추영이가 남았어. 정말 미안하면 추영이를 책임 져.”

비틀거리는 시영의 어깨를 문한의 두 손이 잡는다.

“정말 미안하면 도망가지 마.”

문한이 갓 아래의 시영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정말 미안하면...이제 내 손을 놓지 마.”

바람이 불었다.

갑작스럽게 부는 눈바람과 함께 시영의 갓이 허공을 날았다.

벗겨진 갓이 눈바람이 이는 허공으로 날았다.

그리고 그 새하얀 눈바람 아래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두 명의 남자가 간절하게 서로의 입술을 찾고 있었다.

차가운 눈바람이 어디에서 불고 있느냐는 듯 겹쳐진 입술에서 따뜻한 온기가 서로의 입술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눈바람 속에도 온기는 있었다.

그렇게 추운 겨울이었지만 그래도 온기는 있었다.

*

“부자 연은 어찌 끊는 것인지 좀 가르쳐 주십시오.”

수윤의 말에 병조판서 대감의 눈이 일그러진다.

좀 철이 들었나 싶었는데 어김없이 철 없는 말을 내뱉는 아들의 목소리에 눈이 일그러진다.

그런데 철없는 소리를 내뱉는 아들의 눈이 전에 없이 진지하다.

“소자 목숨 하나야 없어도 그만이지만 불초소자 한 놈 때문에 가문이 멸문지화 당하면 아니 되지 않겠습니까?”

철없는 말을 하며 이렇게 당당한 까닭을 알지 못한다.

5대 독자라서 이렇게 당당한 것일까?

“무슨 일이냐?”

“아버님은 모르셔도 되는 일입니다. 부자 연만 끊어주시면 됩니다.”

점입가경이다.

몇 달 후면 아비가 된다는 놈이 이렇게 철이 없다.

“그리고 소자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오지랖 한번 부려보렵니다.”

수윤이 부친을 향해 넌지시 말한다.

“어머님도 알고 보면 여린 분이십니다.”

늘 투기로 가득 차 있던 정부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남편의 그치지 않는 여색으로 인해 질투의 화신이 된 그녀.

“자주 자주 찾아주십시오. 외로운 분이시니...”

거기까지 말한 수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물러나겠습니다.”

구차하게 모든 것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친구를 위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한가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고 싶었고, 그 일로 인해 또 다른 사랑하는 이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기 때문이다.

아마 추영도 그러한 마음으로 혼자 갔을 것이다.

그 마음이나 이 마음이나 무엇이 다를까.

탁.

수윤이 문을 닫고 나자가 병조 판서 대감이 입술을 달싹였다.

한참 동안 무엇을 생각하던 병조판서가 외출 준비를 한 것은 그로부터 반식경 정도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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