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회: 눈 위에 붉은 꽃 -->
“형판 대감 댁에 마가 낀 건지...”
수윤이 중얼거렸다.
마가 꼈다고 생각했다.
그 집 구석에 마가 낀 것이 아니라면 그런 사달이 일어날 리가 없다.
형판 대감 집에서 단이라는 계집이 죽었고, 그 형판 대감 집으로 지금 눈 앞의 사내가 죽을지 살지 모르는 걸음을 한다고 하니 그 집에 마가 낀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마가 자신에게도 옮겨 붙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냥 사는 것이 좋잖아. 유경이 년하고 정분났으면 그렇게 살면 될 것이지 뭐 하러 칼질 하러 간다고 그러는 거냐?”
자신을 찾아온 벗에게 수윤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놈 아이 어쩌고 하면서 내 가슴에 대못 박으면서, 머리 올려준 인연이라며 내 가슴에 피멍 들게 해놓고 갔으면 둘이 잘 살아야지, 뭐 하러 이런 짓을 하려는 거냐?”
“미안하다 말하고 싶었네.”
마지막 가는 길에 걸리는 것이 이 친구였다.
믿어주었던 벗의 가슴에 대못 박아 놓았던 것이 마음에 걸려 형판 대감 댁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벗을 만나러 온 것이다.
미안했다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하면 내내 마음이 아플 것이 분명해서였다.
그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끝내 미련으로 남을 것이 분명해서였다.
“미안한 짓을 왜 해?”
“미안하네.”
“하나도 미안한 표정이 아닌데?”
수윤이 계속 빈정거린다.
빈정거리는 그 속내까지 빈정거리는 것이 아니라는 건 추영이 더 잘 안다.
좋으면 퉁명스럽게 굴고, 미안하면 더 매몰차게 구는 것이 이 친구의 성격이라는 걸 추영은 잘 안다.
“미안하면 가지 마.”
수윤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에 추영이 시선을 돌린다.
“정말 미안하면 유경이하고 딱 백년만 살아. 더도 말고 딱 둘이서 백년만 살아. 그러면 용서해줄 테니까.”
“갈 수 밖에 없네.”
“그 잘난 한성 판윤 대감은 아무것도 못해주신다더냐?”
수윤이 마침내 추영의 부친까지 들먹인다.
속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 잘난 한성 판윤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으면 다 뭣하겠는가.
아들이 사지로 간다는 데 그것 하나 막지 못한다면.
“내 일 때문에 내 아버님까지 고초를 당하게 할 수는 없네.”
“아무리 형판의 세도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나 한성 판윤 대감이 맘 먹고 나서면 당해내지 못할 리도 없고.”
“그동안 내 아버님께서 쌓아오신 덕을 내가 무너뜨리고 싶지는 않아. 이건 내 일이니 내가 해결할 것이네.”
“형판 대감 댁 광에 무슨 쌀이 그리 남아돌아서 군식구들을 그리도 거두나 싶었는데 알고보니 그 영감 몸을 지키는 개들이었어. 없는 사람 곳간에서 모아들인 쌀로 밥을 지어 사방 각지 미친개들을 다 끌어모아 밥을 퍼먹이더니 그게 다 제 몸 지키는 개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내 아버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시더군. 저리 사냥개 떼로 키워서 제 몸을 지키려는 것을 보면 구리는 것이 많은 모양이야. 그리고 그 사냥개 이빨이 그 단이란 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이제는 네 놈이 그 미친개 이빨에 죽으러 유경이 두고 간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던데, 이빨을 다 뽑아놓자니 그 이빨 뽑는 손도 어지간히 피를 흘려야 하겠고...어쩌면 손모가지를 내놔야 그 미친개 이빨을 뽑을지도 모를 일이지...”
수윤도 안다.
입으로는 한성 판윤 대감 권세가 형조 판서 하나 어찌 못해서 아들을 사지로 모느니 어쩌느니 말은 하지만 수윤도 알고 있다.
형조 판서 하나를 어찌하려면 적어도 손목 하나는 내놔야 한다는 것을.
어지간히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적어도 한성 판윤 자리 내놓고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추영은 그것이 싫어 혼자 가려한다는 것을.
“유경이는 널 보내주더냐?”
“...”
“잡지 않았겠지. 잡는 법을 모르는 아이니까 잡지 않았겠지. 잡으면 무슨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아는 아이니까.”
유경의 모습을 떠올리며 수윤이 설핏, 웃어버렸다.
“왜 나한테는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거냐?”
웃음을 멈추고 수윤이 추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가 진지했다.
더 이상의 빈정거림도 그 안에 없었다.
“날 더 이상 벗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냐?”
“자넬 끌어들일 수 없네.”
“왜 도와달라고 하지 않아? 네 놈이 도와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내가 도와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네 놈이 손모가지 하나 내 다오, 라고 말하면 내가 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수윤이...”
“네 놈이 그 잘난 입으로 ‘이보게, 친구. 자네 모가지 좀 내 놓게’라고 말하면 내가 어련히 내 모가지 아낄까 그러는 건가?”
“그러지 말게 수윤이.”
“형조 판서 그 놈 모가지가 갖고 싶으면 내게 말하지 그랬나? 네 놈과 유경이 년 봐서라도 내가 그 형조 판서 놈 모가지를 네 손 위에 얹어 줬을 텐데. 나도 지난번에 형조 판서 그 놈 얼굴을 보았지. 사람 목숨 수십개 잡아 먹은 얼굴이더군. 사람 목숨 여럿 잡아 먹어서 얼굴에 개기름이 그렇게 좌르르 흐르나 했는데 이제 그 얼굴에 널 잡아 먹은 개기름도 흐르게 하고 싶은 거냐?”
“그러지 말라니까.”
“하여간에 요령 없는 놈은 어쩔 수가 없어. 굳이 이럴 필요없이 출세해서 그 놈 원수 갚아주면 될 것이구만. 당당하게 출세해서, 그 형조판서보다 더 높이 올라가서 그 잘난 면상 당당히 짓밟아주면 그만이구만. 왜? 그렇게 출세 못할 것 같아? 그러면 내가 그리해주지. 내가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네 놈 대신 그 놈 얼굴을 짓밟아 버릴 것이니 지금 하려는 일 하지 마. 하지 말고 유경이에게 돌아가.”
“때로는, 어리석은 길이지만 가야만 하는 길도 있는 법이네.”
그 말을 마친 추영이 일어섰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 하고 나니 속이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이제 속 시원하게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강녕하게.”
그 말을 남기고 추영이 방을 나간다.
탁, 하고 문 닫히는 것을 보며 수윤이 허, 하고 웃음을 흘렸다.
“지랄은...”
수윤의 입에서 험한 말이 흘러나왔다.
곱디 고운 선비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 흘러나왔다.
“도와달라 말도 못하는 주제에 지랄은...저 혼자 아파하는 주제에 지랄은...”
‘엄동설한 혼자 칼 바람 맞으러 가는 주제에 지랄은...이런 찬 바람은 혼자 맞는 것보다 둘이 맞는 것이 덜 춥고 좋다는 것도 모르는 주제에 혼자 잘난 척 지랄은...’
수윤이 씁쓸하게 웃었다.
“유경아, 네 팔자도 참 사납다. 내가 떠나면 저 놈이 널 행복하게 해줄 줄 알았더니...네 년의 팔자는 왜 그리도 사나운 거냐...”
수윤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그 눈가에 지독하게 슬픈 웃음이 떠오른다.
“내 모가지 주고 저 놈 모가지 살리면...네가 계속 웃을 수 있으려나...내 어여쁜 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