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회: 눈 위에 붉은 꽃 -->
날이 찰수록 달이 밝다고 누군가 말하더라.
그래서 한월이라고.
그 한월의 시린 빛을 어깨에 받으며 검은 그림자 하나가 담 위로 뛰어 올랐다.
날렵하게 담 위로 뛰어오른 그림자가 얼른 담을 넘어 거침없이 어디론가로 달려간다.
달빛이 비추는 밤을 주저 없이 달려나가는 그 허리 끝에 매달린 칼이 한월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 걸음이 멈춘 곳은 굳게 닫아지른 대문 앞이었다.
대문 안에 또 대문이 있는 이곳을 넘어서면 마지막 하나 남은 그 자가 있는 것이다.
그녀의 발 앞에 두 명의 사내가 쓰러져 있다.
대문을 지키는 두 명의 사내를 그녀가 쓰러뜨린 것이다.
조용히 대문을 열자 육중한 대문이 소리 없이 열린다.
며칠 전에 내려 아직 녹지 않고 얼어붙은 눈 위를 조심스럽게 옮기는 발이 형판 대감의 처소 앞까지 다다르자 더 조심스러워진다.
댓돌을 밟고 대청 마루에 살며시 올라선 그림자가 문을 소리 없이 밀어본다.
안쪽에서 걸지 않았는지 문이 스르륵 열렸다.
한월의 빛이 방을 은은하게 비춘다.
얼마나 고요한 밤인지 그녀가 허리춤에서 칼을 빼는 소리가 울린다.
“웬 놈이길래 내 집에 허락도 없는 들어오는 것이냐?”
방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녀가 움직임을 멈췄다.
잠에서 깬 목소리가 아니다.
“네 놈이 도성 안을 어지럽히고 다닌다는 그 홍앵인가 하는 놈인가 보구나. 내 네 놈의 낯짝 한번 보고 싶던 차에 잘 됐구나.”
조용히 일어서는 형조 판서 대감의 좌우로 칼 든 무사들이 서 있다.
그녀의 눈에 바짝 긴장감이 돈다.
둘 정도, 해보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밖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형판이 사방에 대기시켜 놓았던 사병들이 달려오는 소리였다.
“네 놈이 오늘 여기서 살아 돌아가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아.”
형판의 눈짓에 그의 좌우에 있던 무사들이 칼을 들어 올린다.
그녀가 짧게 혀를 차며 두 손으로 칼을 들었다.
그녀의 아비의 칼이었다.
죽기 전에는 절대로 놓을수 없는 칼이었다.
그 칼을 들고 이를 악문 그녀가 방 안으로 뛰어 들었다.
*
다음날 한양 저자 거리에 야단이 났다.
이삼년 동안 한양에서 온갖 소문을 떨치던 홍앵이 잡혔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형판 대감댁 담을 넘어 그 대감 목을 노리던 홍앵을 잡고 보니 계집년이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도 그냥 계집년이 아니라 하구한날 저자거리 쏘아다니며 이밥 저밥 얻어먹던 다릿재 백정 딸년 단이가 그 홍앵이었다는 말에 다들 자기들의 귀를 의심했다.
그 년을 잡고 그 년 애비 집을 득달같이 밀어 닥치니 그년의 늙고 병든 백정 아비는 누군가가 애저녁에 빼돌렸는지 텅 빈 집이었다고 했다.
무슨 연유로 고관 대작들의 목만 골라서 땄느냐는 형조 판서 대감의 문초에 그 년은 그저 묵묵 부답에 조롱조로 웃기만 했다고 했다.
그저 웃기만 하는 년을 형조 판서 대감이 그 자리에서 목을 치지 않고 살려둔 까닭은 차후에 직접 문초하여 그 일당까지 모조리 잡아들이려는 심보 때문이었다.
한성부에서 죄인을 넘겨 달라 한성부 판관 이추영이 형조 판서 대감을 찾아왔지만 자기 집에 뛰어든 도둑놈을 한성부에 넘기기 싫다고 형조 판서가 부티는 바람에 한성부에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수윤이 들은 모든 소문의 전부였다.
수윤의 귀에 들리는 소문은 그것이 다였다.
다른 것은 몰랐다.
알 방법도, 아는 사람도 없으니 어찌 알 수 있으랴.
하지만 수윤이 보고야 말았다.
형조 판서 대감 댁에서 나오며 수윤이 보고야 말았다.
형조 판서 대감 댁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추영의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아비인 병조 판서의 전언을 가지고 형조 판서를 찾아갔다 나오던 수윤이 대문 앞에 하늘이 무너진 표정으로 서 있는 추영을 보고야 말았다.
추영과 십 수년을 사귀었지만 그의 표정이 그렇게 무너진 것은 수윤으로서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추영과 자신이 갈라진 마당에 이제 더 이상 추영의 일에 관여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수윤이 생각했다.
관여하지 말아야 했다.
모른척 돌아갔어야 했다.
그것이 옳은 일이었다.
추영이 유경을 첩으로 들였다는 것은 수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기가 첩으로 들인다 할 때는 그렇게나 한사코 거절하던 유경이 추영의 첩으로 들어갔다는 말에 배신감도 느꼈지만 둘이 행복하라고,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며 물러난 것은 자신이었다.
그 두 사람에게 행복하라고 알아서 물러나버린 것은 자신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인 까닭에, 사람의 마음인 까닭에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모른척 하려 했었다.
이젠 벗이고 뭐고 모른척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무너진 표정에, 그 알 수 없는 눈동자의 흔들림에 차마 모른척 지나갈 수 없었다.
“어떤 관계냐?”
문득 앞에 멈춰 선 그림자에 추영이 고개를 들었다.
하얀 도포 입은 수윤이 그곳에 서 있었다.
웃지도 않고 거기에 서 있었다.
“그 년하고 어떤 관계냐고.”
“그냥 가게.”
“유경이 마음 아프게 하면 넌 내 손에 죽어.”
“그냥 가라니까.”
“이추영!”
수윤이 추영의 멱살을 잡아 그 얼굴을 올린다.
마주친 추영의 눈동자가 슬프다고 수윤이 생각했다.
“나도 모른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나도 모른다. 다만...저리 잡혀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추영의 진심이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유경 오라비의 정혼녀라는 사실 외에, 문한의 제자라는 것 외에, 자신의 뒤를 밟았다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무엇 하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이 소리치고 있었다.
저렇게 잡혀서는 안된다고.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마음이 소리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도와주는 건 한번 만이다.”
그렇게 말하며 수윤이 추영의 손에 뭔가를 쥐어준다.
그것을 쥐어주고 수윤이 가버리자 추영이 손을 폈다.
손바닥에 쇳대가 올려져 있었다.
분명 형조판서 집 안에 있는 광의 쇳대일 것이다.
홍앵이 갇혀 있는 광의 쇳대일 것이다.
이것을 수윤이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녀를 구해낼 수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
“샅샅이 뒤져라!”
사방에서 울리는 거친 목소리에 길을 걷던 수윤이 픽, 하고 웃었다.
아무래도 형판 대감의 광에 갇혀 있던 홍앵이 달아난 것이 분명했다.
여기저기서 저자를 다 뒤져 잡으라는 고함소리를 들으며 수윤이 유유자적 걸음을 옮겨 놓는다.
부친의 전언을 형조 판서에게 전하며 그 문서에 형조 판서의 눈과 신경이 쏠려 있는 사이에 그 옆에 놓여져 있던 쇳대가 아무래도 문제의 그이를 가둬놓은 곳의 쇳대일 것 같아 슬쩍 소맷단 안에 감추고 나오는 길이었다.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형판이 쇳대를 옆에 두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예상은 맞아 들어가 아무래도 잡아 놓았던 홍앵이 달아난 듯 싶었다.
“잡히지 마라, 누군지는 몰라도 잡히지 마라.”
이제 추영이 얼굴에서 근심이 조금 사라지려나 싶어 수윤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추영이 얼굴이 그늘지면 그녀의 얼굴도 그늘질 것이 뻔해서, 이것은 추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 그가 애써 변명을 해본다.
서툰 변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