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회: 눈 위에 붉은 꽃 -->
“형조 판서댁이라 하옵니다.”
추영의 말에 이경세의 눈가가 굳어진다.
“작년에도 분명 형조 판서 댁에 앵화 가지가 남겨 졌었지?”
“네. 하지만 그 직후로 형조 판서 대감이 호위를 강화하였고 그 후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때를 전후해서 활동을 멈췄던 홍앵이 다시 움직이는 것은 역시 형조 판서 대감을 노리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형조 판서는 뭐라 하더냐?”
“제가 대감을 직접 만나 뵈었더니 대감께서 이르시기를 본인의 일은 본인이 알아서 하신다며 한성부에서는 손을 떼라 하셨습니다.”
“뒤가 구리니 겁나는 구석이 있겠지.”
“네?”
“그런 것이 있다.”
이경세가 그쯤에서 말을 거둔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까닭은 지난번 단이가 찾아왔을 때 그녀에게 그 아비의 검을 내어준 일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분명 아비의 복수를 마무리 지으려 하는 것이리라.
그때 말렸어야 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경세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누군들 자식이 자신의 복수를 하기를 바랄까.
그녀에게 핏빛 이야기를 들려주며 처음 그 손에 복수의 칼을 들려준 것이 누구인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 아비의 검을 내어주지 말았을 것을...하며,
한번 더 말려볼 것을...하며 이경세가 조용히 한숨을 삼킨다.
형조판서 윤형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이경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죽은 이들과는 다른 자인 것이다.
그 자는 결코 호락호락하게 자기 목숨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당하는 것은 그녀일지도 모른다.
이경세가 추영을 조용히 바라본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차라리 행복한 것이라는 걸 이경세는 추영을 통해 깨닫고 있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은 것이다.
알면 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알면 칼을 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은 것이다.
‘이보게, 이수. 자네 아들이 이렇게나 장성하게 자랐네. 어제는 평생 같이할 반려라며 참한 아이도 데려왔었네. 그 핏덩이를 처음에 받아들 때는 어찌 키워야 하나 마음이 무거웠었는데 이렇게 반듯하게 자라주었네. 그런데 이수, 자네 딸은 어찌해야 할까...아무것도 모르는 자네 아들은 이렇게 살아가겠지만 다 알고 있는 자네 딸은 어찌해야 할까...’
“형조 판서 대감이 뭐라고 하던 간에 한성부 병력으로 그 댁 주변을 겹겹이 둘러싸고 만약에 홍앵이 나타나면 반드시 생포해야 할 것이다. 절대로 사사로이 목숨을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알리거라.”
“네, 알겠습니다.”
추영이 대답하며 일어섰다.
그로서도 홍앵을 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녀를 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 유경을 통해 듣기로는 그녀가 유경의 오라버니라는 그 사내와 정혼하기로 하였다 했다.
이제 막 행복해지려는 그녀가 왜 다시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어느 달밤, 발소리를 죽이지 않고 뒤를 따르던 그 그림자의 주인을 차마 죽음에 넘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반드시 생포하겠습니다.”
잡히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아예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일단 해야 한다면 살리고 싶었다.
차라리 잡아 옥사에 가두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죽는 것보다는 그것이 더 나을 것이다.
*
“정말 가는 거야?”
작은 보따리를 손에 든 유경을 향해 단이가 서운한 눈으로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언니.”
유경이 살며시 웃어준다.
이제 진짜 언니가 되는 것이다.
그녀의 오라비와 단이가 정혼하면 진짜 단이가 그녀의 언니가 되는 것이다.
한번에 가족들이 많이 생긴 것이 기분이 좋아 유경이 환하게 웃으며 단이의 손을 잡았다.
“언니, 이제 위험한 일은 하지 말아요.”
그녀는 단이가 홍앵이라는 걸 알고 있다.
시영과 문한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상처 입은 그녀를 치료해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산호의 아내가 되려는 지금, 더 이상 그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녀의 원한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녀가 왜 여자의 몸으로 칼을 드는 것인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소중한 사람이 생겼으면 보다 덜 소중한 것은 내려놓아야 한다고 그녀가 생각했다.
하나를 위해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헤묵은 원한이 버려야 하는 쪽이라고.
과거를 위해 현재가 희생당해서는 안된다.
비극을 위해 행복이 희생당해서는 안된다.
“위험한 일 안해. 그러니까 너도 가서 잘 살아.”
단이가 마냥 좋아서 웃었다.
예뻐하는 유경이 추영의 색시가 되는 것이 마냥 기뻐서 그녀가 웃었다.
추영 옆에 유경이처럼 예쁜 색시가 있어준다는 것이 마냥 기뻐서 그녀가 웃었다.
“행복하게 살아.”
‘우리 추영이, 행복하게 해줘...’
한번도 소리 내서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다.
‘추영아’하고 한번도 불러보지 못했다.
어쩌면 평생 추영은 자신에게 누이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겠지만 그 편이 그에게는 더 나을 것이.
영원히 비밀은 지켜져야 한다.
“우리 누가 먼저 애 낳나 내기할까?”
단이의 뜬금없는 말에 유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오늘부터 열심히 밤마다 해야 애를 낳지 않겠어? 내기하자. 먼저 애 낳는 사람이 언니 하기.”
“언니가 언니잖아요.”
“실은 내 나이, 나도 잘 몰라. 그냥 대충 언니라고 둘러댄 거지 뭐.”
단이가 헤헤 웃는다.
“하지만 전 언니를 언니라 부르는 게 좋아요.”
“그러면 내기가 안 되잖아.”
“그래도 언니가 좋은걸요.”
뭐라 말해도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 분명한 유경의 등을 단이가 떠민다.
사립문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한성부 판윤 대감 댁에서 온 하인들이었다.
가마꾼들도 있었다.
그녀를 모셔가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이제 그 가마를 타고 그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잘 살아. 정말로.”
단이가 사립문을 나서는 유경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문한은 유경이 가는 모습을 보지 않겠다며 일찌감치 주막에 술을 마시러 가버린 후였다.
단이의 배웅을 받으며 유경이 가마에 올랐다.
그녀가 가마에 오르자 가마꾼들이 영차, 하며 일어난다.
늘 걸어서 내려가던 언덕길을 가마에 몸을 싣고 내려가며 그녀가 살며시 가마창문을 열어본다.
저 멀리 넘실거리는 한강의 푸른 물결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일 년 동안 정들었던 삼짓 나루를 이렇게 떠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