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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방문을 열던 유경이 저도 모르게 작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밤 사이에 내린 눈이 마당을 소복하게 뒤덮어 놓았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밤하늘에 별이 총총이었는데 언제 눈이 내린 것인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서걱, 서걱, 눈 밟는 소리에 유경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새하얀 입김에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어제는 일찌감치 기방에서 돌아왔던 그녀다.

술자리가 끝나고 난 뒤 그녀를 사기 원하는 손님이 없진 않았으나 그녀가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일찌감치 돌아온 다음 밤이 늦도록 문한과 화롯불에 군밤을 구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하룻밤이 꼬박 지난 것이다.

눈을 뜨자 화로에는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고 바닥에는 군밤의 껍질들이 굴러다녔다.

그리고 한쪽 구속에서 문한이 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고 그 반대쪽에서 웅크리고 잠이 들었던 유경이 문한 보다 일찍 잠이 깬 것이다.

밤새 군밤을 까며 문한은 이제 기생질 그만 접고 좋은 사내 만나 살림 차리라는 말을 유경에게 했었다.

그 좋은 사내가 누구인지 이름까지 꺼내지는 않았지만 문한이 말하는 그 좋은 사내가 누구인지는 유경도 짐작했다.

문한은 추영을 좋아했다.

문한이 왜 추영을 아끼는 지 그 이유는 유경도 몰랐다.

서로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건만 문한이 추영을 아낀다는 것은 그의 말에 묻어나는 감정으로 알 수 있었다.

- 늙어죽을 때까지 기생 노릇 할 것도 아니고, 지금은 네가 이팔 청춘이지만 앞으로 십년만 더 지나면 너도 퇴물 기생 노릇 못 면한다. 한번 퇴물 기생 자리로 물러나면 찾아주는 놈도 없고 반기는 자리도 없고, 그렇게 쓸쓸하게 늙는 것이 기생 팔자인데 더 해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러냐.

지난 밤에 문한이 했던 말을 유경이 떠올렸다.

- 울 안에 핀 꽃이나 울 밖에 핀 꽃이나 매한가지 꽃이겠지만 이왕지사 피었다 질 꽃이라면 망부석처럼 기다리는 사내의 가슴에 피는 꽃이 되면 좋지 않겠느냐?

그 말이 유경의 가슴에 맴돌았다.

이왕지사 피었다 질 꽃이라면 망부석처럼 기다리는 사내의 가슴에 피는 꽃이 되면 좋겠다는...

그녀를 기다리는 사내의 가슴에 피는 꽃...

그 가슴에 피었다가 그 가슴에서 지는 꽃.

“이렇게 아침 일찍 어쩐 일이야?”

유경이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는 산호를 향해 생긋 웃었다.

눈을 밟는 발소리가 나서 누군가 했더니 산호다.

“눈 쓸려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이 가득이라 이 집에 눈 쓸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 말과 함께 산호가 빗자루를 손에 들고 마당에 쌓인 눈을 쓸기 시작한다.

마루에 앉아서 마당의 눈을 쓰는 산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유경이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저씨 아주머니는 찾아 뵈었어?”

그녀를 돌봐주었던 강씨와 유씨가 생각난 것이다.

“아직.”

“아저씨하고 아주머니가 오라버니 기다릴 텐데...”

“잘 돼서 찾아 뵈야지.”

“마지막까지 오라버니 걱정이셨어. 빨리 장가도 가고 해야 한다고...”

“유경아.”

산호가 빗자루 질을 하는 곳마다 깨끗하게 눈이 쓸려나간다.

“나 장가 들거다.”

“뭐?”

뜬금없는 산호의 말에 유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기는. 장가 든다고.”

“누구? 누구와?”

장가 든다는 산호의 말에 유경이 적잖게 놀라며 뺨을 붉힌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산호의 나이가 이미 노총각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긴 하지만 그가 장가간다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이.”

그녀의 이름을 내뱉는 산호의 등을 유경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산호는 유경에게 등 진 채로 비질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유경에게 얼굴을 보이기 창피한 것이리라.

그래서 그저 묵묵히 비질만 하며 애써 딴청을 부리는 것이다.

“단이 언니...”

“뭐?! 단이?!”

“에그머니!”

갑작스레 등뒤에서 문한이 소리치며 나오자 마루에 앉아 있던 유경이 깜짝 놀라 소리를 냈다.

방 구석에서 쿨쿨 잘 자고 있던 문한이 느닷없이 달려 나온 것이다.

“단이년이 널 덮쳤구나!”

문한의 고함 소리에 얼떨결에 돌아봤던 산호의 얼굴이 붉어진다.

“뭐야?! 둘이 벌써 했어?!”

그렇지 않고서는 덮쳤다는 말에 얼굴이 붉어질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며 문한이 더 목소리를 높인다.

“어르신도 장가가지 않은 마당에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문한이 손으로 옆을 더듬었다.

그리고 옆에 뒹굴고 있던 장대를 손에 잡고 마당으로 달려 나가자 산호가 얼른 뒤로 물러선다.

퍽-

문한이 산호를 향해 장대를 내려쳤다.

“단이년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냐?!”

문한이 내리치는 장대를 빗자루로 막으며 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딸처럼 여기는 년인데, 만약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넌 내 손에 죽는다.”

“제 몸 보다 더 아껴주겠습니다.”

산호의 대답이 미덥게 들렸던 것일까.

문한이 들고 있던 장대를 내려 놓는다.

“그 년이 시집을 다 가고...세월이 빠르긴 빠르구나...”

잠시 중얼거리던 문한이 뒤를 돌아본다.

아직 놀란 눈의 유경이 마루에 앉아 있었다.

“이참에 너도 시집가고, 한날 한시에 날 잡아서 넷 다 같이 혼례 올려 버려라.”

“네?”

유경의 놀란 눈이 더 커진다.

벌써 세 번째 놀라는 것이다.

아침 일찍 천지를 덮은 눈에 한번 놀라고, 산호 장가간다는 말에 또 한번 놀라고, 이참에 넷이서 혼례를 올려 버리라는 말에 놀라고...

“이 참에 다 치워버리고 나도 조용히 살아보자.”

문한이 유경과 산호를 번갈아보며 낄낄거리며 웃는다.

뭔가 반가운 소식이 있을 것처럼 새하얗게 눈 덮인 지붕 위에서 까치가 울고 있었다.

*

“이것이 무엇입니까?”

따뜻한 군불 지핀 방 안에 추영과 마주 앉은 유경이 그가 내민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운 비단 주머니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열어보시오.”

정오가 조금 지나 찾아온 추영이었다.

바로 이제 이 방에서 그녀를 뜨겁게 안았던 추영이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를 찾아와 뭔가를 내민 것이다.

“무엇이길래...”

유경이 그가 내민 주머니를 살며시 열어본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두 개의 가락지였다.

“나으리...”

“그대가 내게 준 가락지는 내 손에 잘 맞지 않길래 손가락에 끼우기보다는 목에 걸기로 했소. 내 손마디가 점점 굵어져서 이제는 새끼 손가락에도 들어가지 않게 되었지 뭐요.”

그 말을 하며 추영이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가락지를 내보인다.

그녀가 그에게 주었던 가락지였다.

유경은 그 가락지를 서랍 깊은 곳에 넣어두고 꺼내보지 않았다.

“하나는 그대 것이고, 하나는 내 것이오.”

추영이 유경의 손바닥에 올려진 가락지 하나를 그녀의 약지에 끼워준다.

그리고 남은 하나를 자신의 약지에 끼운다.

“변하지 않는 옥빛처럼 그대를 향한 내 마음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언약하겠소.”

“나으리, 이러시면...”

“내 의미가 되어주면 아니되겠소?”

추영의 말에 유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의미’라는 그 말에 그녀의 가슴이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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