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회: 눈 위에 붉은 꽃 -->
언덕 아래에서 정다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워지는 그 웃음소리에 사립문 안 마루에 앉아 있던 추영이 일어섰다.
시간을 내서 찾아왔더니 빈 집이라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
웃음 가득한 얼굴로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던 유경이 걸음을 멈췄다.
걸음을 멈추기는 그녀와 함께 들어서던 산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셨습니까?”
유경의 인사를 받으며 추영의 시선이 그녀의 옆에 선 산호를 향한다.
듣기로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남매와 같은 사이라 들었었다.
하지만 남녀 사이에 남매와 같은 사이라는 것이 어디 있을까.
진짜 피를 나누지 않은 이상은 그런 관계란 우스운 것이다.
그리고 추영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연소답청에서 물에 빠진 그녀를 구해냈을 때 산호가 짓고 있던 표정을.
그것은 사내의 눈빛이었다.
그것도 연심에 빠진 사내의 눈빛이었다.
그래서 추영은 산호를 믿지 않는다.
오라비라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서 산호는 오라비일 수 있어도 산호에게마저 그녀가 누이일리는 없기 때문이다.
“얼굴이나 한번 볼까 하여 왔소. 요즘은 한성부 일이 많아서 화연각에 갈 짬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찾아와야 얼굴을 보지 않겠소.”
“그러지 마시어요, 나으리.”
차분하게 대답하는 유경의 목소리에 추영이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그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찾아왔건만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마음에 품은 이 역시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랑이 참으로 지독하게 오래도 가는 것이다.
그 여름에도, 그 가을에도 추영은 그녀를 찾았다.
화연각으로 그녀를 찾아가서 그녀의 손님이 되었다.
손님으로 찾아오는 그는 그녀가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님으로는 받아들이되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수없이 몸을 섞었지만 아직 마음은 섞이지 못했다.
얼마나 더 몸을 섞어야 마음까지 섞일지는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면, 이제 내 손을 잡아주겠소?”
그 말은 기적에서 나와 그의 여인이 되라는 뜻이다.
추영은 이미 여러번 뜻을 비췄었다.
기적에서 빼줄 것이니 그가 마련해주는 집에서 그와 함께 살자, 그리 말했었다.
정실처럼 여길 것이니 그리 같이 살자 하는 그의 말에 그녀는 조용히 거절했었다.
첩실로 들이고 싶다는 수윤의 말을 거절했듯이 그의 말도 거절했었다.
“저 같은 기생에게 연연하지 마시고 이제 나으리도 정실을 들이세요. 제가 보고 싶으면 화연각으로 찾아오시면 저는 언제든지 그곳에 있을 것이니 더 늦기 전에 나으리도 좋은 혼처를 찾으셔야지요.”
“나는 늘 그대가 보고 싶은데, 그대는 단 한번도 내가 보고 싶은 적이 없겠지?”
“나으리...”
“나는 늘 그대가 그리운데 그대는 단 한번도 나를 그리워한 적이 없겠지?”
“나으리, 저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내 그리움이 끝이 날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그대 눈 안에 내가 들어가게 될까?”
추영의 시선에서 잠시 고개를 돌린 유경이 옆에 서 있던 산호의 허리를 떠민다.
“오라버니, 이제 그만 가 봐.”
“하지만 유경아.”
“괜찮아. 나으리께 술상이나 봐드리게 오라버니는 그만 가봐.”
“...”
“오라버니 청국 가기 전에 내가 술 한번 대접할게.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 가봐.”
계속해서 떠미는 유경의 손길에 산호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놓는다.
청국에 가기로 이미 결정을 내린 산호였다.
이달 보름이면 청국으로 가는 상단이 출발을 한다.
한번 가면 못해도 여섯달은 걸려야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청국에 가서 여섯달 있어야 돌아온다는 말에 단이는 그저 웃었다.
청국 가기 전 보름 동안은 자기 차지라며 그저 웃었다.
그것도 안 된다 할 수 없어서 그만 고개를 끄덕인 것이 틈을 줘버린 것일까.
밤이면 산호가 자는 방의 문을 몰래 열고 들어와 산호의 팔을 베고 잠들었다가 새벽이면 빠져나가는 단이의 모습에 늘 마음이 무거웠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유경을 기다리고 있는 사내를 보며 산호가 비로소 깨달았다.
단이의 말이 옳았다.
그녀의 마음 안에는 자신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은 그녀의 오라비일 뿐이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사내처럼 당당하게 보고 싶다고, 그립다고 말하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유경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내들이 다 사라진다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마음을 고백할 기회조차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오라버니니까.
어쩔 수 없는 오라버니니까.
그 작고 어린 손을 잡았을 그때부터 그녀의 오라버니였으니까.
유경이가 떠미는 손길에 사립문 밖으로 밀려나며 산호가 생각했다.
오늘 밤에 단이가 찾아오면 오늘은 그냥 보내지 말자 생각했다.
그 쓸쓸한 뒷모습을 가진 채로 그냥 돌아가게 하지는 말자 그리 생각했다.
어쩌면 여섯달 청국 길에 같이 동행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밤에 찾아오면 그리 한번 말해보자 생각해본다.
늙으신 부친 봉양할 일이 마음에 걸려 차마 같이 떠나지 못 하겠다 하면 사람을 붙여준다 그리 말해보자 생각해본다.
유경의 손에 떠밀려 문을 나서며 산호가 단이, 그 경망스러운 얼굴을 떠올렸다.
“우리 유경이.”
산호가 걷다 말고 돌아서서 추영을 바라봤다.
이제야 말할 수 있었다.
“울리지 마십시오.”
이제야 진짜 오라비처럼 말할 수 있었다.
“내 누이, 눈에 눈물 나게 하지 마십시오.”
진즉에 이랬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늦었지만, 이게 옳은 것이다.
이제야 겨우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산호의 말에 추영이 잠시 놀란 눈을 했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추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두 번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오. 두 번 후회도 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의 누이, 내게 믿고 맡겨도 좋을 것이오.”
추영의 대답에 그제야 산호가 돌아서서 언덕을 내려갔다.
두 남자의 주고받는 목소리 사이에 끼어서 유경의 얼굴만이 붉어졌다.
산호가 그리 말할 줄은 유경 자신도 몰랐기 때문이다.
꼭 누이 동생 시집 보내는 오라비처럼 그리 말할 줄은...
*
“일이 바쁘시다 하니 제 술 한잔만 받으시고 일어나시어요.”
개다리 소반에 술병 하나와 간소한 안주 하나를 차려놓고 유경이 술잔에 술을 따른다.
그나마 집안에 술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홍앵이 다시 움직인 탓에 밤으로는 내가 화연각으로 가지 못하오.”
홍앵이라는 말에 유경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단이다.
단이가 다시 그 일을 시작한 것이다.
몇 달 동안 잠잠하여 포기하였나 싶었던 단이가 다시 그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대 얼굴을 보지 못하니 누구를 봐도 그대 얼굴이 겹쳐서 아무것도 못하겠소.”
추영의 말에 유경이 살며시 고개를 숙인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그리고 더 이상 화연각에서 그대를 안고 싶지 않아...”
낮은 추영의 목소리에 유경이 붉어진 얼굴을 애써 돌리려 했지만 그녀의 손을 추영이 잡아 온다.
“더 이상 그대의 손님이 되고 싶지 않소. 화연각이 아닌 곳에서 그저 그대를 사랑하는 남자로 그대를 안고 싶어...지금처럼...”
손을 잡고 있는 추영의 손이 뜨겁다고 그녀가 생각했다.
뜨거워서, 달아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