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회: 눈 위에 붉은 꽃 -->
“이상하네? 요것들이 슬슬 입질 할 때가 되었는데...”
하지만 대나무 낚싯대는 그저 잠잠할 뿐이다.
바람 한 점 없으니 낚싯대가 흔들릴 일이 없다.
“...”
산호가 멀뚱 멀뚱 미동도 하지 않는 낚싯대 끝을 쳐다봤다.
오늘은 다른 일이 없어 그저 쉬려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단이가 급한 일이 있다고 끌고나와 따라와 보니 얼어붙은 한강 한 가운데다.
이 얼어붙은 겨울에 무슨 낚시인가 싶지만 얼음 깨고 그 구멍에 얼음 낚시가 일품이라고 추켜세우는 단이의 말에 그만 눌러 앉고 말았는데 그 말이 반은 허언이었는지 입질 한번 없는 것이다.
옆에서 물고기야 물어라, 물어라 노래를 부르고 있는 단이의 모습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워서 한번 웃어주었을 뿐, 얼어붙은 강 위로 살짝 살짝 부는 바람에 귀가 빨갛게 언다.
누구에게나 귀염 받는 단이.
붙임성이 좋으니 어디에서나 귀염을 받는다.
주막집 주모도, 장터 늙은 장사꾼도, 이 엄동설한에 흙발로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순찰 도는 나졸들도, 한가로이 바둑이나 두고 시간을 보내는 객주 사람들도 모두 단이를 귀여워한다.
“어? 어? 어?”
단이의 낚싯대가 흔들린다.
요란하게 흔들리는 꼴을 보니 큰 놈이 걸려든 것 같다.
“이야! 이거 오늘 오라버니 앞에서 모양새 좀 나네~”
고기 마저 단이를 귀여워하는지 산호의 낚싯대는 꿈쩍도 하지 않는데 단이가 얼음 구멍에서 대어를 건져낸다.
차가운 얼음 위에서 몸부림치는 물고기를 보고 있자니 미동도 하지 않는 자기 낚싯대가 조금 미워 지는 산호다.
“어?”
뜻밖의 일에 산호가 놀라 입을 벌렸다.
단이가 잡은 물고기를 다시 물 속으로 놓아준 것이다.
“그걸 왜 놓아주는 거냐? 가져 가면 저녁 찬거리는 될 것인데...”
“제가 잡고 싶은 건 이게 아니니까요.”
단이의 말에 산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무엇을 잡으려는 거냐?”
물고기를 잡으러 낚시를 온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잡고 싶은 것이 따로 있다면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대어를 원하는 것일까?
산호가 묻자 단이의 경망스럽던 눈동자가 한순간 잔잔하니 예뻐진다.
“오라버니 마음이요.”
그 말에 얼이 빠진 듯 그녀를 쳐다보는 산호를 향해 단이가 다시 한번 말한다.
“오라버니 마음 하나 잡고 싶어요.”
“못하는 말이 없다.”
당황한 산호가 말을 얼버무리고 얼른 고개를 돌려버린다.
하지만 고개는 돌려도 확 끼치는 열은 어쩔 수가 없다.
무슨 계집애가 이리 당돌한 것인지 붉어진 얼굴을 들 수가 없는 산호였다.
낚싯대는 입질이 없고 어느새 성큼 옆으로 다가와 앉은 단이가 낚싯대 위에 얹은 산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어 놓는다.
그 손을 산호가 뿌리치지 못했다.
왜 이 손을 뿌리치지 못하는 건지는 산호 자신도 알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얼어붙은 손 위에 얹어진 단이의 다정한 손의 온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뜻한 숨결이 산호의 귓가에서 흩어졌다.
손등 위에, 귓가에, 그리고 마음에 온기가 내리고 있었다.
*
“오라버니가 유경이 좋아하는 건 알고 있어요.”
어른거리는 불빛 너머로 단이가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나 음전하게 말하는 계집애가 그 경망스러운 계집애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산호가 쉬이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도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걸.”
“내가 유경이 좋아한다고 누가 그러더냐.”
“다 알아. 객주 사람들 다 알아요. 오라버니는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
“...”
얼굴에 다 드러난다는 단이의 말에 산호가 우스웠다.
모든 이들이 다 아는데 정작 당사자인 유경이만 모르는 것이다.
그것이 우스운 것이다.
“그런데 오라버니하고 유경이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건 내가 오라버니 좋아해서 그러는 말이 아니라 진짜 그래요. 오라버니와 유경이는 어떻게 해도 잘 안 될 거야.”
“누가 그렇게 정했다더냐?”
“유경이 눈에 오라버니는 오라버니일 뿐이니까. 너무 오래 오라버니여서 유경이 눈에 오라버니는 남자로 안 보여요. 한번 마음에 각인된다는 게 그렇게 무서워요, 오라버니.”
“내 눈에도 네가 누이로 보인...”
산호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불빛에 어른거리던 단이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 이번 겨울에 청국에 다녀와라.
오늘 낮에 호태가 한 말이 왜 이 순간에 떠오르는 것인지 산호는 알 수 없었다.
- 왜에는 두어번 다녀왔으니 이제는 청국에도 가봐야지. 가서 얼굴도 트고 길도 트고. 앞으로 계속 내 일 맡아서 하려면 두루 두루 다니며 사람, 길 다 익혀놓아야 한다.
호태는 산호를 좋게 봐준 것이 분명하다.
장가를 가지 않아서 자식도 없는 호태에게는 객주를 물려줄 사람이 없다.
객주에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어도 깐깐한 그 눈에 드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그런데 유난히 산호가 마음에 든 듯 했다.
일 년 남짓 봐온 사내가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든 것인지는 몰라도 꽤나 마음에 든 듯 했다.
처음에는 상단 호위로 쓰려고 들인 산호가 마음에 들었는지 장사하는 법이며, 물건 고르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무래도 다른 마음을 먹은 것이 분명했다.
객주의 거의 모든 이들이 호태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었고 산호도 모르지 않았다.
좋아해야할 일이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은 과한 기대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리라.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들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늘 누이같이 앞에서 얼쩡거리던 단이가 새삼 여인인양 입을 맞춰오는 지금 호태의 그 말이 생각나 버린 것일까.
“달라붙지 않을게. 그 마음 조금만 가지고 있다가 때 되면 물러날게. 그러니까 내가 그 마음 조금만 가지게 해줘요.”
산호의 입술에서 자기 입술을 떼어내며 단이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 모습이 산호는 낯설었다.
두 사람 외에는 없는 넓은 평상 위에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언 몸을 녹여주는 화로 안에서는 새빨간 불씨가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고 있는데, 두 사람의 어깨 위로는 새하얀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나, 여기 오래 있지 않아...그러니까 오라버니...나하고 조금만 사랑하자...”
단이의 속삭임에 산호가 차마 ‘머지않아 청국에 다녀올 거다’라고 말하지 못했다.
유경이의 얼굴과 단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지만, 단이의 얼굴이 조금 더 안쓰럽게 보이는 이유는 산호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