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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이 지나 창호문 너머로 동이 터오고 있었다.

깊이 잠든 유경을 내려다보던 수윤이 벗어 놓았던 갓을 머리에 쓴다.

아무리 괜찮다 하지만 충격 받은 몸이 어찌 멀쩡할 수 있을까.

잠시 앉아 있다 다시 누워 깊은 잠에 빠진 유경을 밤이 새도록, 동이 터올 때까지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수윤이 문살 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붉은 아침빛에 처음으로 몸을 움직였다.

가만히 손을 들어 유경의 창백한 얼굴을 한번 어루만져본다.

“예쁘지도 않은 것이...”

천천히 어루만지는 그 손끝이 그녀의 마른 입술에 가서 멎는다.

“내년 앵화는 같이 볼 수 있으려나 했는데...”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만지던 손길을 그가 거둔다.

그리고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하고...” 

꽃밭 사이에서 한 동이 술을 놓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하네...”

친한 벗도 없이 홀로 마신다...“擧盃邀明月(거배요명월)하여...”

잔을 들어 밝은 달을 청하여...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하구나.”

그림자를 마주하니 더불어 셋이 되었구나.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하고...”

달은 본래 술을 마실 줄 모르고...“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하지만...”

그림자만 부질없이 나를 따를 뿐이지만...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하여...”

잠시 달을 친구하고 그림자와 더불어...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하네...”

가는 봄을 즐겨 보네. “我歌月徘廻(아가월배회)하고...”

나개 노래하면 달도 따라 돌고... “我舞影凌亂(아무영능난) 하는구나.”

내가 춤 추면 그림자도 덩실덩실 춤을 추는구나.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이지만...”

깨어선 함께 즐기지만...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이겠지...”

취한 후에는 저마다 흩어지겠지.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하여...”

우리 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귐을 영원히 맺어서...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하자구나...”

훗날 저 멀리 은하수 저 편에서 다시 만나기를 서로 기약하자구나...

“유경아...”

깊이 잠든 그녀를 바라보며 수윤이 조용히 읊조린다.

“네가 말했었지. 함께 하는 동안에 후회 없이 사랑하고 인연이 끝나는 날에 미련 없이 보내준다고...”

수윤이 마른 입술을 삼킨다.

“내가 이백의 시를 좋아하는 줄 어찌 알고 네가 그런 말을 했을까. 어여쁜 것...”

수윤이 유경의 반듯한 이마를 손으로 그어본다.

“삶이라는 것이 꽃처럼 모였다가, 꽃잎처럼 바람에 흩어지는 것이라면...아름다운 날을 즐기다가 바람 부는 날에 흩어지는 것이 삶이라면...잠시 이별에 흔들리면 안 되는 것이겠지. 잠시 미련에 마음이 약해지면 안되는 것이겠지...”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을 수윤이 만져본다.

“꽃잎이...흩어질 시간이구나...내 사랑아...”

‘오늘이구나...꽃잎이 바람결에 흩어지는 시간이...우리가 나뉘어 흩어지는 시간이...’

만지작거리던 손을 아쉬운 듯 들어 수윤이 그녀의 온기가 묻어있는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대어본다.

“하지만 꽃잎이 흩어진다 하여 이미 마음에 스며든 그 향마저 사라질까...”

- 자네가 그녀에게서 빼앗은 것은 아이가 아니라...

추영의 말을 수윤이 떠올렸다.

알고 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한 것인지 알고 있다.

자신은 그녀에게서 행복을 빼앗았고, 또 앞으로도 빼앗을 것이다.

자신과 함께 하는 한 그녀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해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해도,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

사랑해도, 그 가슴에서 아픔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옆에 있다는 이유 만으로 그녀가 당해야 하는 아픔인 것이다.

그녀는 수윤이 이화를 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수윤을 사랑하면서 수윤이 이화와 그녀의 아이를 품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일 것이다.

원망도 하지 않으며 그저 받아들일 것이다.

언젠가는 정실도 들여야 한다.

유경은 그마저도 웃으면서 받아들일 것이다.

수윤의 곁에 진짜 아내와 그의 아이를 낳은 여자가 서 있는 것을 웃으면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웃어줄 것이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서 누구도 모르는 피눈물을 흘리겠지.

누구도 모르는 가슴 앓이를 하겠지.

사랑만으로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추영이는 든든한 사내이니...”

수윤이 뒷말을 잇지 못한다.

깊이 잠든 그녀가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뒷말을 잇지 못한다.

“너를 행복하게 해주겠지...”

‘나는 주지 못하는 행복을 그는 줄 수 있겠지...사랑은 내가 하지만 행복은 그가 줄 수 있겠지...그라면 널 아프게 만들지 않겠지...’

손을 거둔 수윤이 갓끈을 단정하게 맨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문을 여는 손끝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두고 가는 사랑이 서러워서 그 손끝에 미련이 묻어난다.

사랑이 이렇게 서러운 것이라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사랑이 이렇게 아프도록 서러운 것이라는 걸...

흘릴 수 없어 삼킬 수밖에 없는 눈물이 이렇게 뜨겁다는 것을...

오래도록 그리울 것을 알고 있다.

햇살에 나뭇잎이 반짝여도 그 미소가 떠오를 것이다.

밤 어둠에 앵화가 흩날려도 그 눈매가 떠오를 것이다.

문득 바람만 불어도 그 손끝이 생각날 것이다.

사람은 빛바래도 사랑은 바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가슴속 깊이 묻어둬도 빛 바래지 않고 언제까지나 살아 숨쉴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인가 묻어두었던 그리움을 꺼내 보는 날에, 흐르는 세월이 무색하게 생생하게 빛나고 있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가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사랑을...

*

“마땅한 혼처를 알아봐주십시오.”

수윤의 말에 병조판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첩실을 들이는 마당에 정실이 없어서야 세간에 이목이 좋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그것이 순서겠지.”

“이화가 해산하기 전에 서둘러 혼례를 마무리 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해산한 수에 아이를 바로 데려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내가 미리 점찍어둔 혼처가 있으니 걱정 말거라.”

한동안 혼인에는 뜻이 없던 아들이 첩실을 들이며 스스로 혼인에 대해 물어오자 그것이 흡족했던 것인지 병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며느리도 생기고 손주도 생기게 되는 것이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

“나으리...”

이화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신이 저지른 패악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건 잘못했다는 말로 수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질투를 억누르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유산한 것이 내 아이라는 사실을 어른들이 알게 되면 너는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

수윤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용서받지 못할 거라는 것을.

“하지만 덮어두려고 한다.”

“네?”

덮어둔다는 수윤의 말에 이화가 고개를 들었다.

“내 잘못도 있으니 덮어두려고 한다. 지나간 일에 더 이상 마음 쓰지 말고 태교에만 힘 쓰거라. 그리고...”

목소리는 그녀를 향하고 있지만 시선은 그녀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화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대하고 있지만 자신을 보고 있지 않는 사내.

“멀리 시골로 내려가라는 말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 아이를 낳고 나서도 계속 한성에 머물러 있어도 좋다. 네게 필요한 모든 것은 다 대줄 것이다. 하지만 처음 말대로 아이는 본가로 데려갈 것이다. 나는 곧 혼인한다. 정식으로 집안에 안사람이 들어오게 되면 네가 낳는 아이를 데려가 그 사람에게 키우게 할 것이다. 그 정도는 너도 양보해줄 수 있겠지?”

“하오면 나으리께서는...”

이화가 수윤을 바라본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에 정염이 깃들고 있었다.

그를 죽이기보다 유경을 죽이기 원했던 것은, 그와 함께 서 있던 유경에게 질투를 느낀 것은, 자기고 모르게 악귀처럼 행동한 것은 그녀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의 마음에 연심이 깃들었기 때문이리라.

얼음처럼 싸늘한 이 사내를 어찌할 수 없이 마음에 품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저를 다시 찾아주실 건가요?”

이화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빈 껍데기라도...”

이화를 바라보는 수윤의 눈동자에 측은지심이 담겨 있다.

“빈 껍데기라도 가지고 싶다는 것이냐? 그리 비참하게 살고 싶은 것이냐?”

그 말을 하고 수윤이 일어난다.

“나으리!”

이화가 수윤의 발목을 황급히 붙잡는다.

“빈껍데기라도 좋습니다! 좋으니 나으리, 저를 버리지만 마십시오! 저를 다시 찾아주기만 하시면...”

“욕심이 과하면 화가 되는 법이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사는 법을 배우거라.”

잡고 있는 이화의 손을 뿌리치고 수윤이 걸어나온다.

“나으리!”

뒤에서 소리치는 목소리에도 그가 돌아보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기로 결심한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사랑, 그것 외에 욕심 부리지 않기로 결심한.

사랑과 행복, 그 두 가지를 다 손에 쥐기를 포기한...

자신에게는 사랑을, 그녀에게는 행복을 남기기를 결정한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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