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9 회: 그들, 그리고 사랑 --> (100/131)

<-- 99 회: 그들, 그리고 사랑 -->

“유경아!”

문을 열고 들어서던 수윤이 놀라 소리를 높였다.

누워 있어야 할 유경이 일어나 앉아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어나지 말거라. 의원이 이르기를 몸조리를 잘 해야 한다고...”

“흉한 꼴을 보였습니다, 서방님.”

쪽진 머리에 비녀를 다시 꽂으며 유경이 살며시 웃었다.

그 웃음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은 수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좀 더 누워 있거라. 내가 옆에 있을 것이니...”

“너무 누워서 허리가 아픕니다. 앉아 있는 것이 좋습니다.”

수윤은 유경이 왜 웃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 원망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원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왜 다른 여자의 질투심에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원망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렸는지 원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다못해 앙탈을 부리며 울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다 들어줄 수 있었다.

죄를 지은 것은 수윤 자신이기에 그녀가 무슨 원망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줄 수 있었다.

때리면 맞고, 원망하면 미안하다 빌고...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원망을 하지 않는다.

미운 눈을 짓지도 않는다.

그저 웃는다.

그 미소 앞에서 수윤이 길을 잃어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길을 잃어버렸다.

“미안하...”

“서방님.”

수윤의 손을 유경이 살며시 잡아왔다.

따뜻한 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서방님을 믿어요. 그러니 제게 미안하다는 말씀은 하지 마시어요.”

“유경아, 나는...”

“제게 미안해하지 마시어요. 제게 고개 숙이지 마시어요. 서방님이 이러시면 제가 속상해요.”

“유경아, 나는 정말...”

결국 수윤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평생 누군가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 없었다.

그런데 이 여인 앞에서만 벌써 두 번째 눈물이었다.

이 여인만이 자신을 울게 만드는 것이다.

아니, 울게 만들 정도로 이 여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마음은 거짓이 아니다.

누군가를 이렇게나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사랑이라는 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왔었다.

때로는 이 꽃에 앉았다가 때로는 저 꽃에 앉는 나비처럼, 사랑도 때로는 이곳에 머물 수도 있고 때로는 저곳에 머물 수도 있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했었다.

한 곳에 머무르는 나비가 어리석듯이 한 여인만을 사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 생각했었다.

바람의 방향이 변하듯 사랑도 변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일생을 한 여인만을 사랑하는 것은 바보 같은 것이라고,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만 울어버렸다.

그 바보 같은 사랑을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바보 같은 사랑에 자신이 빠져 버린 것이다.

사랑한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

더 사랑해서 더 소중히 여겨주고 싶다.

더 소중해서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

차라리 그 상처를 자신이 입을지언정 소중한 사랑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

“유경아...내가 널 사랑한다...”

“알고 있어요, 서방님...”

깨닫지 말아야 했다.

이 사랑이라는 걸 깨닫지 말아야 했다.

알지 말아야 했다.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상처 입힐 수 있는 이 사랑이라는 놈을 알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안 다음에야 어쩔 수 없다.

가슴이 아파도 어쩔 수 없다.

가슴이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심장이 찢어져도 어쩔 수 없다.

사랑을 알아버렸으니까.

그래서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은 단 하나의 소중한 사랑을 위해서,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해야 한다.

지킨다는 것을, 해야 한다.

지키기 위해서 버리는 것을 해야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다.

사랑이, 사랑을 버리라 말하고 있어서...

“내 평생에 사랑은 너 하나 뿐이다...”

수윤이 유경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녀에게서 은은한 향이 풍겨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풋풋한 풀잎의 향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너만 사랑한다...”

“알아요, 알아요 서방님...”

수윤의 품안에 안긴 유경이 그녀의 뺨으로 흘러내리는 수윤의 눈물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그녀라고 왜 모를까.

그녀라고 왜 귀가 없고 눈이 없을까.

기방의 소문은 빠른 것이라 그녀라고 왜 모를까.

이화라는 기생이 단수윤의 아이를 가졌다는 그 소문을 그녀라고 왜 듣지 못했을까.

이화라는 기생이 그의 아이를 배고 그의 첩실이 되려한다는 소문을 그녀라도 왜 듣지 못했을까.

그녀라고 왜 보지 못했을까.

자신을 찌르려던 이화의 눈에 깃들었던 미움과 원망을.

그 지독한 원망을 그녀라고 왜 모를까.

그녀라고 왜 모를까.

자신의 태중에 있던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를.

사내는 몰라도 여인은 안다.

숱한 사내가 몸을 거쳐 갔어도 여인은 안다.

자신의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를 씨를 뿌린 사내는 몰라도 잉태한 여인은 안다.

자신의 아이는 죽고 이화의 아이는 살았다.

자신이 가진 수윤의 아이는 죽고 이화가 가진 수윤의 아이는 살았다.

그녀라고 왜 슬프지 않을까.

그녀라고 왜 아프지 않을까.

그녀라고 왜 수윤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을까.

아이를 잃어 가장 슬픈 것이 누구일까.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스스로를 원망하는 이 남자에게 자신의 슬픔을 알릴 수 없을 뿐이다.

지금도 충분히 괴로워하는 이 남자에게 자신의 아픔을 알릴 수 없을 뿐이다.

자신이 원망해버리면 이 남자는 무너져버릴 것이기에.

이 눈물로도 만족했다.

자신을 위해 흘려주는 이 남자의 눈물로도 만족했다.

이 남자가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되었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받아보지 못한 이 남자의 눈물을 받은 것만으로도...

이 남자의 사랑이 자신이라는 것만으로...

“알아요...아니까 이제 그만 우시어요...서방님...”

참 좋은 사람.

참 좋은 남자.

사랑의 모든 감정을 알게 해준 소중한 남자.

사랑으로 인한 모든 것을 알게 해준...

유경의 감은 속눈썹이 살며시 떨렸다.

그녀의 떨리는 속눈썹 위로 수윤의 눈물이 젖어 빛나고 있었다.


0